잔치에의 초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8. 비유21 – 잔치에의 초대) / 본문 : 눅 14:15-24

“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15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어제는 권부자 자매님의 아들 돌이 있어 다녀왔습니다. 오래 전부터 전화로 초대하고 또 몇 일 전에는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강정민자매도 결혼하는데 초청장을 만들어 보낼 것입니다. 잔치 집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손님입니다. 손님이 없는 잔치 집은 정말 보기가 안 좋습니다. 잔치가 열린다는 것은 손님을 초대하는 자리입니다. 선별하여 초대할 수는 있겠으나 초대하지 않는 잔치 집은 없습니다. 옆 사람하고 인사합시다. ‘하나님의 잔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고 할 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Hom. Faber)임과 동시에 잔치(축제)하는 존재(Hom. Festinus)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비인간화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컴퓨터선교회를 시작할 때 바로 이점을 생각했습니다. 옛날 전쟁에서 이기려면 잘 무장된 칼과 방패 등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맞지 않는 갑옷과 칼을 가지고는 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잘 맞는 도구, 무기를 골라야 합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는 긴 창을 가지고 다녔고 장비는 무쇠덩이 같은 것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저는 컴퓨터가 최고의 도구가 될 것을 생각하여 컴퓨터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조건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사람이 일만 하고는 진정한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의 교육과 단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생을 잘 즐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잔치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점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돈을 벌기는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잔치를 베풀지 못하는 것입니다. 잔치를 베풀지 못하는 인간은 ‘기계적인 인간’, ‘합리적인 계산기’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모두가 잔치라고 말합니다. 백일잔치, 돌잔치, 생일잔치, 재롱이 잔치, 결혼잔치, 경로잔치, 스포츠에서도 농구잔치, 꽃 잔치, 단풍잔치, 음식잔치 좋은 것은 모두 잔치라고 합니다.

신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모두 잔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잔치에 비유하여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잔치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음식’입니다. 먹을 것이 있어야 잔치가 됩니다. 호남지방에서는 잔치 집에 홍어회가 빠지면 별로 잘 차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서두에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는 큰 축제를 베풉니다. 마태복음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하고 이 초청에 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는 떡을 떼며 축제를 동반한 예배를 드렸고 세례식이나 부활절을 지킬 때에는 들에 나가 함께 노래하며 춤추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러시아는 가히 축제의 나라라고 할 만 합니다. 연중 거의 1/3이 교회가 지키는 축제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중 제일 큰 축제일은 부활절(파스하) 입니다. 축제음식으로 “부활 달걀”(파스하 쿨리치)을 먹기도 하고 장식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흥이 많은 사람들인데 너무 전쟁을 많이 하다보니 축제가 잊혀져 버린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간은 축제 없이 살 수 없는데 교회의 예배가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축제가 안될 때 사람들은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유럽교회의 쇠퇴 원인도 교회가 축제를 잊어버린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예배가 축제를 상실할 때 사람들은 나이트클럽과 술과 세상 향락으로 범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짜 축제가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금송아지 앞에서 벌어졌던 아론의 축제를 기억합니다.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의 축제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축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기도와 찬양의 축제를 회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진정한 하나님의 잔치 집입니다.

하나님은 잔치를 베풀어 놓고 우리를 그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런 초청을 제일 잘 나타내 주는 곳이 누가복음 14장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는 주님의 초청을 3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8-11절에서는 결혼축제(a wedding feast)를 말씀하시면서 상좌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겸손(Humility)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둘째, 12-15절에서는 만찬을 여시고 부자를 청하지 말고 가난한 자를 청하여 자신의 과시 욕을 보이기 위한 잔치가 아니라 진정한 이웃을 위한 잔치를 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셋째, 16-24절에서는 큰 잔치(A great Supper)라는 축제를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가르침 중에 최상의 교훈인 구원(Salvation)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속지 마세요. 세상 사람들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시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자연에 대해서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인간은 할 수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로의 초청뿐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잔치는 그리스의 날 곧 메시야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 베풀어지는 잔치 그 잔치를 큰 잔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아이를 위해 돌잔치를 합니다. 결혼을 하기 되어 잔치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베푸시는 잔치가 잔치중의 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잔치입니다. 구약에서 이 잔치를 잘 예언한 곳이 있습니다.

이사야 25:6-9절 “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 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7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9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잔치를 “어린양의 혼인잔치”(계 19:7-9), “하나님의 큰 잔치”(계19:17-18)라고 다시 소개합니다.

오늘 본문 큰 잔치의 비유는 초청의 잔치라고 불려집니다. 16절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주인이 오라고 부르는 데는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서 언급되었던 두 가지 경우의 잔치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8-11절에서는 결혼축제에서 ‘겸손’을 말씀하신 것과 둘째, 12-15절에서는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잔치를 베풀지 말라고 한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 주님이 오라고 하는 것은 최소한 그런 잔치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초청하시는 데는

첫째,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오라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사람들(계층)을 초청하니 오라는 것입니다.
셋째, 아직 빈방이 있으니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러한 초청에 대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이유와 구실을 내세워 이 초청을 거부합니다. 그 핑계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18절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나가 볼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큰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 밭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불가불”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핑계입니다. 땅을 산 사람이 보지도 않고 샀을 리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보러가겠다는 것은 그곳에 마음이 있고 자꾸만 보고 싶은 것입니다. 물질에 가치를 가지는 사람입니다. 언젠가는 두고 가야할 것에 집착하여 주님께 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19절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적 표현으로 바꾸어보면 “자동차를 새로 샀는데 지금 가서 시운전을 해보아야겠습니다.”가 됩니다. 그럼 왜 하필 이 시간에 가야합니까? 이것도 핑계에 불과합니다.

셋째, 20절에 보면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합니다. 먼저한 사람의 핑계보다는 제일 무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사람은 더 강력한 거부 의사를 나타냅니다. 노골적으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거부인 동시에 고집스러움을 보여줍니다.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이렇게 복음에 대해서 정면으로 거부한 사람들 마지막 날에 주님도 저를 모른다고 하실 때 핑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의 풍습에 의하면 잔치에 사람들을 청할 때는 두 번 초청을 합니다. 한번 잔치가 열리기 훨씬 앞서서 몇 일 전에 알리는 것이고(16절), 다음은 잔치 시간이 임박해서 오늘 몇 시에 잔치합니다(17절)라고 초청합니다. 전자가 구약의 초청이라면 후자는 신약의 초청입니다. 우리는 잔치에 참여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음식을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준비해 놓으셨습니다(잠 19:1, 사 25:6, 마22:1). 그리고 이 풍성한 것을 선물로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잔치 집의 사람이 없으니 주인은 다른 방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하나님의 일군들에게 잔치에 초대할 방법을 다시 일러주십니다. “빨리”라는 단어가 이제 시간이 다 되었고 급박함을 알립니다. 지체할 여유가 없습니다. 복음 전도의 시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우리가 가야할 곳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먼저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상을 말해줍니다.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이제 부족한 사람들을 불러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상류층의 사람들 종교지도자들은 이 초청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여 초청하였는데도 자리가 더 남아있었습니다. 그 때 가야하는 곳이 23절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길과 산울은 시내의 거리보다는 사람이 덜 다니는 곳입니다. 지금은 시대적인 시기는 후자인 것 같습니다. 복음이 유럽을 한바퀴 돌아 우리에게 왔습니다. 여기는 이미 잔치집의 손님이 아주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조금 남은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부른다는 것입니다. 때가 상당히 임박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 때는 급박하기 때문에 강권해서 채우는 것입니다. 상대편 입장을 다 들어줄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어떤 나라에 큰 난리가 났습니다. 급기야 왕이 그 왕궁을 버리고 시골로 피난을 갑니다. 왕은 농부의 옷으로 갈아입고 신하 몇 사람과 함께 어느 마을에 몰래 숨어 들어갔습니다. 한 농부가 이 낯선 길손들을 잘 영접해주었습니다. 변장을 한 왕과 신하들은 며칠 동안 거기서 잘 묵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라 정세가 회복되어 왕은 환궁하게 되었습니다. 환궁한 왕은 그 농부가 자기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준 것과,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남을 잘 대접해준 것이 기특해서 농부를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농부는 낯선 길손들이 왕과 신하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왕은 농부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 그러나 농부는 이렇다할 소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이시여, 이제 와서 제가 출세를 원하겠습니까, 영화를 원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금은보화를 원하겠습니까? 그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다만 며칠 후 제 생일잔치에나 한번 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침 환갑인 지라, 자식들이 힘을 모아서 조촐하나마 잔치를 열어준다는 군요.” 왕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며칠 후, 한 나라의 왕이 시골 초가집에 사는 일개 농부의 환갑잔치에 왔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 집은 귀한 집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집이 되었습니다. 그일 하나로 인해 농부의 가문은 위대한 가문이 되었습니다.

지난 15일 송도지역 코오롱건설의 ‘더 프라우’ 청약 때 몇 일 전부터 텐트를 치고 밤을 세워가며 줄을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좋아하는 운동경기를 보기 위해서도 표를 사고 줄을 섭니다. 교회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조금 예의바른 사람은 잔치 집에 잘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자잘한 세상 잔치에는 모두 참여하고 ‘어린양의 잔치’, ‘제일 큰 잔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진짜 중요한 잔치 집을 잘못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큰 잔치 집에 반드시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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