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와 회개의 요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2. 비유(20) – 비유와 회개의 요구) / 본문 : 마 5:24-26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우리나라의 고려 공미왕 때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우애 깊은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형제가 길을 가던 중 동생이 황금덩이를 줍게 되었습니다. 아우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다 가지고 싶은 욕심이 솟는 것을 누르고 형과 반씩 나누어 갖기로 하였습니다. 이윽고 강가에 이루러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가 중간지점정도 왔을 때 동생이 갑자기 금덩이를 형 앞에 내어놓더니 “형님, 제가 이 금덩이를 발견하기 전 까지는 형님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에 조금의 흠도 없었는데 이 황금을 발견하고 나누어 가질 생각을 했을 때 욕심이 생기고 형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전 이 금덩이를 저 강물에 던져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형님이 아우의 손을 잡으며 “그래, 네 말이 뫘구나”하면서 둘이서 힘껏 금덩이를 강물 한가운데로 던져버렸답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서로 화목해지고자 할 때, 장애가 되는 것은 서슴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화목이 가능해 집니다.

오늘로서 비유에 대해서 설교한 것이 20번째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비유가운데서 어떤 점을 발견하셨습니까? 저는 예수님의 비유를 설교하면서 전체적으로 비유의 주제가 드러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종말의 때가 가까이 왔다고, 또는 종말이 반드시 오는데 그 때를 위해서 준비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세기말 팔레스틴 신학자 엘리에치르라는 랍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기 전 하루동안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선생님 어떻게 사람이 자기의 죽는 날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랍비 엘리에치르는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 할 수 있는 한 오늘 많이 회개하라. 이렇게 하면 일생 내내 회개 속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9:8에서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선의 삶입니다.

때가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러한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하라는 것입니다. “송사하는 자와 함께 있을 때 급히 사화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재판관에게 내어주면 그 때부터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비유의 내용 설정은 매우 급하게 돌아갑니다. 재판관에게 내어줄 사람은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속히 내어주려고 할 것입니다.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곧 고발당하게 됩니다. 반드시 해결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경찰서에 가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사건이 일어나면 일단 당사자와 화해를 신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돼서 경찰서까지 가면 어떻게 하든 경찰서에서 해결을 해야합니다. 민사상 고발 사건은 당사자와 해결을 원만히 해결하면 고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일단 검찰로 넘어가면 문제가 복잡해지고 시간이 오래가게 됩니다. 검찰에서 법원으로 가면 더 골치아파집니다. 법원으로 가면 일단 제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검찰에서 법원으로 넘어가기 전에 해결을 해야 불기소처분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단계를 거쳤습니다. 25절 “…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예수님이 왜 범죄자의 장면으로 이야기 하셨습니까? 다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사건을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길에 있을 때에”는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이 마지막 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
26절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빚을 다 갚기 전에는 결코 형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원문은 이것을 “진실로 … 못하리라”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우메’(ouj mh;)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마태가 예수님의 이 비유를 ‘형제의 화목’과 연결시킴으로 윤리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원래 예수님의 이 비유의 목적은 단순한 윤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형제와 화목 하는 문제를 가지고도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정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단순히 형제와 화목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화목을 그렇게 강조한 것은 형제 화목이 그러할 진데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바로 이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화목은 하나인 것입니다. 회개 없이 화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우리의 원죄를 끊는 일보다는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와도 화목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화목하지 않은 자의 예물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제사의 종류(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로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번제(레 1:3-17)는 일상의 신앙고백과 경배의 제사이며 소제(레 2:1-16)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순종의 제사입니다. 그리고 화목제(레 3:1, 7:12)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제사이며 속죄제(레 4:1, 13)는 무의식적인 범죄와 부정함과 허물을 사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레 5:1-4)는 하나님과 이웃을 적대 관계에 놓이게 한 죄를 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제사의 종류를 자세히 보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속건제를 드리지 않은 사람이 속죄제를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을 방해하였다면 먼저 이 제사를 지내야 그 다음에 자신의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로 인한 다른 사람의 피해는 그대로 놓아둔 채 내 죄만 속하겠다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 아닙니까? 지금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속건제가 드려지지 안으면 속죄제를 지낼 수 없고, 속죄제가 드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화목제를 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속해지지 않았는데 어찌 화목제를 지낼 수 있습니까? 화목제가 드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소제 역시 드릴 수 없습니다. 소제를 드릴 수 없다면 일종의 신앙고백 격인 번제는 더욱더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제사의 시작은 속건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속건제가 안되면 아무제사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속건제가 시작되면 거슬러 올라가 번제까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가 이 비유를 이렇게 적용한 것은 단순히 윤리에 초점을 두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입장하고 유대인은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선택받았다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깊이 박혀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하나님께 가기 위한 ‘화목’ 즉 우리가 강조하는 것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상태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유대인에게 지금 번제보다는 속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로만 끝날 수 있습니다. 단순히 형제와 화목만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상태에서 머물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제사가 제일 중요하다고요? 제사가 다 중요하지만 그 시작에 있는 속건제가 중요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첫 단추가 뀌어져야 다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제사의 방법이 네 가지(화제, 요제, 거제, 전체)가 있습니다.
화제는 흠 없는 수소, 암소, 숫양, 암양, 숫염소, 암염소, 산비둘기, 집비둘기, 고운 곡식 가루, 기름, 유향 등의 모든 제물(레 1:3, 10,14; 2:1,2; 3:1,6,12; 4:23,28)
요제는 화목 제물의 가슴, 첫 곡식 단(레 23:15), 첫 이삭의 떡(레 23:20)
거제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 타작 마당의 곡식, 십일조, 포도주, 기름(레 7:32; 민 15:20) 등
전제는 포도주, 독주(레 23:13; 민 28:7)로 드립니다.

그런데 속건제를 드리는 제사의 방법은 두 가지로만 드릴 수 있습니다(레 6:17-18, 14:12, 14).
화제와 요제입니다. 화제와 요제의 특징은 제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화제는 흠 없는 소나 양 등이 필요합니다. 요제 또한 화목 제물의 가슴을 식단에서 높이 들어 앞뒤로 흔들어 들이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속건제 제사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화제는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을 상징합니다(요 1:29,36; 고후 5:21).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요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제물로 바쳐짐을 의미합니다(골 1:22; 히 9:24,25).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우리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 피가 있어야 됩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도 형제와 용서하고 화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가 없으면 그 화목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으로 잘 지내보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걸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반드시 화목하게 하는 제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 제사의 시작은 속건제이며 그 속건제는 화제와 요제로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곧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회개치 않은 사람이 형제와 진정한 화목을 이룰 것 같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형제와 화목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가능합니다. 속건제가 드려져야 화목제사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눅 5:24)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오직 우리 죄를 속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을 통해서만 우리의 온전한 회개,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의 제사가 가능한 것입니다. 회개와 화목은 하나인 것입니다. 같이 가는 것입니다.

페루의 쉬피보 인디언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쉬피보어로 “사하심”이라는 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보지 않고 넘겨 버린다.”라는 말이 제시되었습니다. 이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어 거부되었다. 다음에는 “생각지 아니한다.”라는 말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기피한다는 뜻이 있어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말이 제시되었는데, 그 말은 “빚을 탕감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하심은 탕감을 넘어 베푸시기까지 하는 것이라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결국 “문질러 없앤다.”, 또는 “지워버린다.”는 말이 제시되었습니다. 이 말은 죄의 존재를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식적으로 죄를 씻어 주셔서 더 이상은 죄가 없다는 의미로 “사하심”과 어느 정도 합당하다고 하여 채택되었습니다. 멕시코의 싼 뿔라스 인디언의 성경도 “사하심”을 “약한 마음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하시려는 것은 죄와 함께 죄의식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어떤 미국인이 프랑스를 방문해서 돌아다니다가 시골의 어떤 장터에서 싸구려 목걸이를 하나 사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세관에서 높은 세금을 매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아주 싸구려 물건입니다” 했더니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고가의 고급 품목입니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고가의 세금을 물고 왔습니다. 이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서 그 목걸이를 가지고 보석 감정 전문가에게 그 목걸이를 보였습니다. 감정가는 확대경을 가지고 한참 목걸이를 관찰하더니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손님, 이건 보통 목걸이가 아닙니다. 손님도 좀 보시지요.” 그래서 가만히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보니 거기에 글자가 이렇게 새겨져 있더랍니다. “조세핀에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한 세기를 지배하던 나폴레옹의 사인 때문에 그 목걸이가 그렇게 고가품으로 인정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인과 하나님의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놀라운 기술과 계획, 하나님의 인치심 속에서 만들어진 인생으로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인생입니까!

언제나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나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께 가는 모든 방해요소를 지워버리십니다. 주님의 사인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시는 주앙교회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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