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계시니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1-14)

오늘은 2009년 성서 주일입니다. 대강절이 기독교의 절기가 시작되는 절기입니다. 미국의 성서 공회에서는 1943년부터 성서 주간을 매년 추수 감사절로부터 크리스마스까지로 확장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954년 이후 매년 12월 둘째 주일만 성서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비록 오늘 하루만을 성서주일로 지키지만 우리는 1년의 모든 날을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난해에 수능 끝나고 137명이나 되는 학생이 자살했습니다. 이 엄청난 학생들이 수능시험에서 인생을 걸고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수능이 전부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인생의 극히 한 부분입니다. 살다보면 다른 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하나님은 잘 되는 사람일수록 늦게 됩니다. 대기만성입니다. 먼저 쭉쭉 올라간다고 앞서가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늦추어서 나가면 길이 다 있습니다. 조급하게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등산을 하다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은 영영 길을 못 찾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서 보면 어디서 길을 잃어버렸는지, 멀리 보면 보입니다. 교회는 올라가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올라가게 만듭니다.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은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위엣 것을 사모하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성서 주일은 대강절 기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그 가운데 성서주일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메시야를 기다리되 말씀대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합니다. 성경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대로 갈 수 없습니다. 바다에서 항해하는 배에 나침반이 고장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경을 가지고 있다해도 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그 말씀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행함이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에스라 10:3 “곧 내 주(에스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에스라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떨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떨었습니다. 그래서 범죄 한 후에도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교만해 졌습니다. 인간 최고의 교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스라 10:11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따르는 자는 소망이 보이게 됩니다. 소생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버리면 다 소용이 없습니다. 유명한 대학을 나와도, 사업에 성공을 해도, 세상의 영화와 부귀를 누려도 다 부질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의 결과는
마음이 부패됩니다(딤전 6:3,5), 저주를 받습니다(신 27:26), 주께 버림을 받습니다(호 4:6), 역경으로 넘어집니다(마 7:26,27),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눅 8:12).
그러나 말씀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합니다(요 20:31), 교훈을 줍니다(롬 15:4), 성도를 거룩케 하게 합니다(요 17:17), 성도를 자유하게 합니다(요 8:32),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딤후 3:15-17), 영생을 얻게 합니다(요일 5:13).

욕쟁이 집이라는 소문난 음식점을 하는 할머니가 보니, 점잖은 장로님 얼굴이 항상 굳어있는 겁니다. 집에서 권사님과 부부싸움을 했는지, 사업이 잘 안 되는지, 목사님과 의견충돌이 있었는지… 그래서 저 장로님 나한테 한번 걸리면 가만 안 둔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장로님과 욕쟁이 할머니가 교회 현관에서 딱 마주쳤습니다.
“저 장로님… 잠깐 귀 좀…” 욕쟁이 할머니가 다른 사람들 들으면 곤란한 일이 있어서 그러나? 장로님이 별 생각 없이 궁금해하며 귀를 대주었습니다.
그랬는데 욕쟁이 할머니가 장로님의 귀에 대고 다짜고짜 “야, 이 새끼야. 얼굴 좀 펴라” 장로님이 당황하여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칠면조 얼굴이 되어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웃음을 몰랐던 장로님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얼마나 웃고 살았던지 장로님의 간수치가 위험수위에 있었는데 정상이 되었답니다. 복음을 듣고도 웃지 못하고 산다면 욕쟁이 할머니께 욕 좀 먹어야 합니다.

둘째는 메시야가 말씀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즉 성육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주일을 대강절 중간에 넣어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4복음서를 읽다보면 그 시작이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족보로 시작하고, 마가복음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글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님 출생 전에 있었던 세례요한의 탄생부터 예수님의 탄생 때의 천사들의 활동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시작은 매우 특이합니다. 영적 시작과 말씀으로 시작되는 세상의 빛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 말씀들을 읽어 가다보면 눈을 떼지 못합니다. 조금 읽어볼까요. 본문 요한복음 1장 1-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보이는 것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산과 바다 강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생명들과 자연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답니다. 그 말씀이 빛이랍니다. 그 말씀이 생명이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빛을 잘 몰랐습니다. 그 빛이, 그 말씀이 천지창조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놀랍습니다.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난 것은 육신의 사람의 방법으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성서주일과 관련하여 한가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소녀 메리 존스(Mary Jones, 1784.12.16-1866.12.28)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웨일즈는 영국의 남, 서쪽 지방으로 지형이 험난하고 기후 조건이 좋지 않아 대부분의 서민들은 궁핍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도를 보면 우리나라의 호남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영국의 웨일즈 지방은 믿음의 본고장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성경을 가지고 들어온 토마스 선교사도 이 지방출신입니다. 영국의 마지막 청교도 후예라고 말하는 로이드 존스 목사도 이곳 출신입니다.
메리 존스는 매주 저녁 교회에 나가 성경을 배우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습니다. 메리는 10살이 되던 해. 찰스 목사가 세운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집에서 학교가 3km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도 보통 이 정도의 길은 걸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이 먼 길을 오가며, 언젠가 글을 배워서 스스로 성경을 읽겠다는 소망을 키워갔습니다.
이 학교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주일학교가 시작되었는데, 메리는 첫날 마태복음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마태복음의 첫 장이라고 알고 있던 말씀이 첫째 장이 아니고 둘째 장인 것을 알고 나서 ‘성경의 필요성’을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2년 전 자신의 집에 와서 성경을 읽어도 좋다고 한 이반스 부인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메리는 매주 토요일마다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성경을 홀로 접하게 된 메리는 감격에 겨웠으나 시간적 제약으로 성경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아쉬워한 메리는 “몇 십 년이 걸려도 꼭 성경 한 권을 사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메리는 성경을 사야겠다는 일념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나 시작 첫 해에는 모은 돈이 너무 적어 실망하였고, 아버지 병세의 악화와 집안 일로 돈을 모으지 못한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메리는 실망하지 않고 6년 간 각종 허드렛일을 마다 않고 돈을 모은 끝에 결국 겨우 한 권의 성경책 값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책 사려고 돈 모으는데 6개월 걸렸습니다. 10살 때 돈 모으기 시작해서 6년이 걸렸으니까 16살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메리는 성경을 구하기 위해 30km나 되는 거리를 쉬지 않고 뛰다시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웨일즈 성경이 더 이상 판매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메리는 엄청난 절망감에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감동한 찰스 목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경을 메리에게 주었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성경을 갖게 된 메리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피곤함과 배고픔도 다 잊은 채 30km를 단숨에 걸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반갑게 맞이하는 부모님과 함께 메리는 성경을 상위에 놓고 성경을 들여다보며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웨일즈 성경이 더 이상 인쇄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절망적인 눈물을 흘린 메리의 이야기를 찰스 목사는 1802년 12월 런던에서 열린 기독교서회 회의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이 회의를 계기로 드디어 1804년 3월 7일 영국성서공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난번 미얀마에 갔을 때도 호텔 객실에서 책상의 서랍을 열어보니까 기드온에서 배포한 성경이 들어있었습니다. 공산국가에서도 불교국가에도 성경을 준비하여 고객에게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전 세계 2,479개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2008.12). 그러나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6,500여 개의 언어인 것을 감안하면 아직도 해야할 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또한 발행한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읽힐 수 있는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전해야 합니다.

웨일즈에서 메리 존스(Mary Jones)의 성경에 관한 일화가 생길 때 즈음에 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토마스 목사를 파송한 영국 웨일즈 라드노 주 하노버(Hanover United Reformed Church)교회입니다.
제가 2003년도에 이 교회를 방문했었습니다. 교회의 크기가 딱 우리교회만 합니다. 토마스 목사의 아버지가 시무 했던 교회입니다. 토마스는 이곳에서 1840년 9월 7일에 태어납니다. 메리 존스의 이야기가 있은 지 약 40년이 지나서입니다. 그러니까 메레 존스는 이 지역(웨일즈)에서 토마스 목사가 태어날 즈음에 1802년 16살 정도였으니까 56-7세 정도 되니까 아마 권사님이 되어 계셨을 것입니다. 바로 이분들의 세대가 영국에서 선교사를 제일 많이 보내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경을 전달해 주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1863년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 상해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내 캐롤라인이 오는 중에 병을 얻어 죽습니다. 그 때 그는 선교사역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인도로 세관에서 통역 일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겼습니다. 아직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조선 땅을 향해 다시 복음 전달의 열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1865년 9월 13일 백령도에 도착해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 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중, 그의 앞에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통역관으로 그 배에 동승했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 주일 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1866년 9월 2일경)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시기적으로 너무 좋지 않은 때였습니다.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년은 우리나라 교회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한해였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나라안의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난 때입니다. 조선의 쇄국정책이 극으로 치닫고 있을 때입니다. 이 때 나타난 셔먼호는 조선 입장에서는 조선을 쳐들어온 미국 침략선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결국 조선의 공격에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됩니다.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 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단 한 권이라도 더 조선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한 권의 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의 처단은 즉시 집행되었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박춘권 입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 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면서 그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기도하고 쑥섬에서 박춘권의 칼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박춘권은 그 일 이후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자기를 향해 웃던 토마스 목사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전도사가 되었고 나중에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박춘권과 함께 있던 영문주사 박영식은 성경을 자기 집에 가지고가서 성경을 뜯어 벽지로 발랐습니다. 결국 그의 집은 널다리골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널다리골교회가 장제대교회가 되었고 장대제교회는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의 시작이 된 장대현교회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비록 정식으로 조선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한 채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음을 당했지만 그가 건네 준 한문으로 된 성경책은 이 땅에 복음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 복음의 부흥을 위한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1931년 대영성서공회가 발행한 성경책이 정..선교사 할아버님이 성결교 목사님이셨는데 가지고 계셨던 성경책입니다. 한문과 한글이 섞인 성경입니다.
국내 번역위원회가 구성되어 1900년 신약전서를, 1911년에 구약전서를 완역하였다. 이를 다시 1936년에 구약을, 1938년에 신약을 개정하였는데, 1938년에 개정한 성경은 1956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거하여 개역성경을 발간하였다.

성경은 예수님의 보혈의 자국이 남아있는 책입니다. 우리를 사랑한단 말씀이 있는 책입니다. 세상의 어떤 책이 나를 위해 준비된 책이겠습니까? 오직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받으시기를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의 중심, 인생의 중심 십자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9. 성경의 중심, 인생의 중심 십자가) / 본문 : 요 19:23-30

“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사복음서들에는, 제일 중요한 사건은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기사는 두 개의 복음서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과 십자가의 사건은 모든 복음서 기자가 기록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엄청난 양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배경과 달리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은 떠들썩하게 지내면서 정작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는 함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전도서 7:1-2에서는 출생하는 집이나 잔치 집에 가는 것 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났다고 했습니다.

대개 전기의 종류들은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부분들이 아무리 많아도 전체의 10%가 넘지 못합니다. 간디나 마틴 루터킹 목사 같이 암살 당하고 정치적으로 상당히 의미를 가지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약 삼분의 일 가량이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부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관한 기사는 사복음서 모두가 기록하고 있지만 양으로 볼 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개 전기를 기록할 때 인물의 업적이나 공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의 학문적 지식이나 업적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죽음은 그저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이 상식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통일교)의 주장처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메시야로서 실패를 했다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그가 메시야가 아니었다면 굳이 그의 참혹한 십자가의 사건을 이렇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기록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나 기적을 베푸신 사건이 적어서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야기를 많이 기록하였겠습니까? 요한사도는 그의 복음서 맨 마지막에서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요 21:25)고 했습니다. 엄청나게 몰려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병 고침을 받고 환호하는 사람들, 오병이어 때, 칠병이어 때 예수님께 물고기와 떡을 얻어먹은 사람들의 간증들, 베드로와 제자들이 목격한 물 위로 걸으신 사건과 하늘에서의 소리들 그 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기적이야기, 예수님이 어떻게 숙식을 해결하고 다니셨는지, 경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을 했는지 등 수 많은 이야기 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 듯 보면 재미도 없고 비슷한 이야기를 네 명의 성경 기자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의 일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중심이 십자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에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학자입니다. 그런 그가 십자가를 만나고 세상 모든 학문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다 버렸습니다.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십자가 형벌은 고대 군주 국가인 페르시아나 페니키아에서 유래된 것으로 로마 제국의 확장으로 인해 일종의 사형 제도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형은 당시의 사형 제도 중에서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제도였기 때문에 자국민인 로마인에 대해서는 이 형벌을 적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에 포청천이라는 판관이 나오는데 이 때 사형을 집행하는 방법이 목을 자르는 작두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두형을 받을 때 두 가지 작두가 나옵니다. 하나는 서민을 처형시키는 개 작두이고 하나는 고위층을 사형시키는 용 작두입니다. 한번은 드라마를 보는데 자기는 양반이니 죽여도 꼭 용 작두에 죽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로 말하면 용 작두가 아닌 개 작두인 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달려야할 그 참혹한 십자가에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왜 하필 섭리는 가장 결정적인 때 얼굴을 감추고 마는 걸까?
마치 맹목적이고 멍청하며 무자비한 자연의 법에
스스로 굴복해 버리는 것처럼…(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구약성경을 속독하여 내려오다 보면 유대인들을 택하신 하나님은 애굽을 탈출하여 엄청난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 잘 듣고 순종하면 늘 축복이 쏟아집니다. 하나님의 아들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도 언제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불타는 가마솥에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출애굽의 여파와 온갖 기적으로 가득 찬 구약의 여운이 아직 귀에 쟁쟁하고 눈에 어리는 가운데 신약의 첫 성경인 마태복음에 이르게 되고 어느덧 오늘 본문의 말씀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귓가에 남습니다. 본문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셨는다는 것인지?

예수님이 마지막 주간을 보내신 기간은 유월절 기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출애굽 할 때 맨 마지막 재앙에서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까지도 모든 첫 것, 장자를 죽이셨는데 양의 피를 발라 유대인임을 표시한 집안은 심판하지 않고 넘어가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대인의 유월절을 기억하고 모인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기적이 마지막으로 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보여주신 갖가지 기적들로 볼 때 충분히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실 분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호산나’를 외친 것입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느꼈을 ‘아 끝장이다!’ 하는 심정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 였습니다. 사람들은 한동안 망치로 머리를 맡은 것처럼 멍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둘 실망에 차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뒤돌아보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누구보다도 제일 실망한 것은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6절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한 그 사랑의 제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마지막까지 있었던 요한이 영적 통찰력이 제일 뛰어난 복음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 부분에 최후의 만찬 사건을 제일 길게 다룹니다. 요한복음 13-17장에 걸쳐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역시 유대인이기 때문에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먹고 기념하기 위해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최후의 만찬이지 제자들은 당시 그것이 최후의 만찬이라고 생각한 제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출애굽 기념으로 모였을 때 제자들이야말로 그 날의 영광을 재현할 분임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애굽’이라는 단어 대신에 이제는 ‘로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꿈이 성취되는 듯한 흥분에 사로잡혔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눅 22:29)야겠다고 하셨고,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셨으니 착각할 만도 합니다. 그리고 계속 요한복음을 읽어가노라면 그 날 밤 만찬의 흐름을 단절시켰던 사건이 소개됩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요 13:3)이라고 하시고선 난데없이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하십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요 13:4) 일어나 마치 종의 모습을 하신 체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주십니다. 베드로는 발을 예수님께 내 놓기가 민망했던지 안 닦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아마 발이 더러웠던지 아니면 지금 예수님이 발이나 닦고 있을 그런 한가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일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기는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당시엔 발을 씻기는 일은 하도 천해서 종이 유대인인 경우엔 아무리 주인이라 해도 그런 행위를 요구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발을 씻기는 장면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스캇 펙(M. Scott Peck) 같은 작가는 이 일을 예수 생애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습니다. 갑자기 수건을 두르신 예수님이 맨발로 내려와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아마도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상식적으로 당시의 사회 질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신경이 날카로워 졌습니다. ‘서로 누가 높으냐’ 이런 토론 할 기분이 아닙니다. 괜히 갈릴리에서 고기나 잡고 있을걸 3년의 세월이 그 고생이 헛것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실망감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 이루었다”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이제 그를 따라 다녔던 제자들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성경의 중심에 두셨습니다. 십자가 그 모든 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십자가를 하나님은 오페라로 말하면 클라이막스로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모두 맞춘 것입니다. 무엇이 포인트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알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우리 모두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 담겨 있는 것, 하나님 은혜의 모든 것, 우리를 위해 대답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대답하십니다. 이 한 분이 지신, 이 하나의 사건이 온 인류의 억 만가지 문제를 풀어주고 짐을 벗겨주며 길을 열어줍니다.

세계 3대 박물관을 꼽으라면 영국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사람들이 머뭇거립니다. 미국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거론할지 아니면 중국의 보물을 다 가져다 놓은 장개석의 타이완 박물관일지, 그러나 영국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기는 세계최고의 박물관은 러시아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쥐 박물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르미타쥐 박물관에는 레오나르드다빈치, 라파엘로, 고흐, 피카소 등 엄청난 진품들이 있습니다. 제가 1995년 처음 방문했는데 사실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 이 박물관을 팔면 러시아가 3백년동안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모나리자, 비너스도 있습니다. 이태리 바티칸 박물관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있습니다. 엄청난 보물들입니다.
박물관마다 최고가 있습니다. 그럼 전 세계 최고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영국 박물관에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입니다. 로제타스톤은 프랑스군이 이집트에 가서 작전을 하는 1779년에 군인들이 가서 로제타라고 하는 마을에서 작전을 하다가 그곳에서 많은 유물, 문화재를 발굴해냅니다. 그 당시는 점령한 군인들이 가져가는 것이니까 프랑스 군대가 그 모든 것을 가져갑니다. 가져가다가 영국군하고 싸움이 붙어서 영국군한테로 넘어갑니다. 영국 박물관이 갖고 있는 가장 값진 보화입니다. 그건 비석입니다. 길이가 114cm 폭이 72cm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돌로 된 비석이 어떻게 세계에서 최고로 유명한가 하면 그것은 바로 이 비문 제일 위에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있고, 중간에 이집트 Demotic가 있고, 맨 아래 그리스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석이 상형문자을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것입니다. 알파벳은 모두 아니까 이 알파벳을 통하여 애굽의 상형문자의 해석의 길이 열렸습니다. 애굽은 세계를 가장 오랫동안 지배했던 최강대국입니다. 4천년을 강대국으로 내려왔습니다. 세계를 지배했지만 그 많고 많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문헌은 비석이든 책이든 하나도 못 읽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상형문자라 모릅니다. 어떤 고고학자도 어떤 학자도 상형문자를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이 상형문자를 알 수 있는 길이 제 각각 어떤 짐작을 할 뿐이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길이 없는데, 로제타스톤이 나오면서 그리스어가 있으니까 그리스어로 이걸 풀다 보니까 전 애굽의 수많은 그 비문, 말할 수 없는 역사적인 자료가 한 순간에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제타스톤이라고 하는 것은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귀한 보화 중에도 보화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를 푸는 키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로제타스톤입니다. 로제타스톤은 애굽에 있는 그 글만 알려줄 뿐이지 세계 인류의 문제를 대답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많고 많은 문제, 국가의 문제, 가정의 문제가, 오늘 날 이렇게 과학이 발달해도 못살아 가지고 야단인데 이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인류의 죄의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줍니까? 해결을 고사하고 알 수도 없습니다. 공자도 물론 모릅니다. 공자는 ‘내가 아침에 알면, 나는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또한 獲罪於天(획죄어천), 無所禱也(무소도야)니라 ‘하늘을 향해 진 죄는 빌 곳도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민 고민 하다가 고행을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도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業報衆生 濟度不能(업보중생 제도불능)이라 ‘자기가 진 죄는 자기가 다 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인간은 어느 길로 가야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인생의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우리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짐은 어떻게 벗어야 합니까? 누가 우리를 자유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밝혀줍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그래서 성경을 보화이며 비밀의 책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푸는 키입니다.

예수님이 이 십자가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막 8:34, 눅 9:23)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한참 전에 십자가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별도로 마 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십자가를 지셨고 다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천하를 모두 넘어뜨려도 십자가 앞에는 맥을 못 춥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도 십자가로 무장하지 않아서 어정쩡한 군인이 되어 그렇지, 진짜 십자가 바로 믿고 바로 서면 여러분을 당할 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죽음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굴복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우리 사람의 중심이 되는 십자가입니다.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침표입니다. -아멘-

성경 말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5. 성경 말씀) / 본문 : 마 1:21-22, 딤후 3:15-17, 시편 19:7-10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어느 날,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함께 뜰에서 구름을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저쪽 학의 날개와 같은 구름이 내거냐?”
“저 산봉우리 맨 위의 접시 같은 구름이 내거야?”
“그럼 그 아래 주먹 같은 구름이 내거야?”
아이들은 저마다 이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모양의 구름을 가리키면서 서로 자기 구름이 멋있다고 우겨대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름은 서풍에 의해 그 형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을 보자 한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습니다.
“왜 그래?” 두 아이가 일제히 물었습니다.
“우리 구름들이 다 없어지니 저절로 눈물이 나!” 한 아이가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말했습니다.
“임마, 그럼 구름이 늘 그 모양대로 있는 줄 아니? 병신같이…”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는 거야?”
“우리도 나중에는 저 구름처럼 없어지고 말게 아니야?”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는 자라서 어떻게 되었는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한낮 덧없이 사라지는 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1. 성경을 기록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

한 권의 성경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님의 연합하심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1,600여 년 동안에 걸쳐(구약 1500년, 신약 100년) 무수한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는데, 그들은 예언자, 목자, 음악가, 세리, 의사, 왕 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과 저자들이 있었지만 그 내용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가지 관심과 주제를 가지고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① 기록케 하신 이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이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하며 범죄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② 기록하신 이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성령 하나님께서는 감동 받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깊은 뜻, 즉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의 약속을 전달하시기 위함입니다.

③ 기록된 것을 이루신 분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잡혀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때 한 제자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었습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이 위기를 빠져나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 26:52-54)
성부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 기록케 하신 그 약속을 이루신 분은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그 약속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구원 사역을 다 이루시고 가셨습니다.
1994년, 기독교 선교팀이 성경책을 나눠주려고 러시아의 스타브로폴 지역을 방문했다. 그 지역의 오래된 창고 하나는 1930년대에 강제노동수용소로 사용된 곳으로 당시 압수했던 물품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때 압수했던 성경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 성경을 트럭에 실으러 왔던 사람들 가운데는 하루 품삯을 벌려는 젊은 무신론자 학생도 한 명 끼여 있었다. 그는 성경 한 권을 훔쳐 작업장을 빠져나갔다. 얼마 후 동료들이 한 구석에서 울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수백 권의 성경 가운데서 그가 훔친 것이 바로 자기 할머니가 쓰던 성경이었던 것이다. 그 성경에는 자기 할머니의 서명이 그때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2. 성경의 역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경은 크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도구이며 또한 인생들을 이끄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성경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디모데후서 3:15-17 말씀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15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예수께서도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 4:16)

② 교훈과 책망과 의로 교육합니다.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③ 우리의 행위를 온전케 합니다. 17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안전한 항구 되시는 하나님의 품에 이르도록 돕는 영적 인도서인 동시에 그 미래를 보장하는 소망의 책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게 될 때에 우리 인생 여정은 가장 안전하며 확실합니다. 성경 말씀이 아닌 다른 가르침을 좇음으로 인해 인생의 바다에서 표류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 성경에 대한 바른 자세

올바른 성경 관은 올바른 신앙 생활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럼 올바른 신앙 생활을 위한 바른 성경 관, 즉 성경에 대한 성도의 바른 자세란 어떤 것일까요? 왜 같은 성경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변화를 받아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사는 것이겠습니까?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① 사모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② 신뢰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③ 역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얹듯 믿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 비전이 있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제게 뜨거워진 이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4. 성경이 주시는 은혜

시편 19: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하십니다. 금은 귀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돈 대신 금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경제가 불안하여 돈이 값어치가 없어지면 금을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 금보다 훨씬 더 귀한 것입니다. 시편 19:7-10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① 생명을 줍니다. 7절(상)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금은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살리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합니다.

② 지혜를 줍니다. 7절(하)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금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를 미련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지혜롭게 만드십니다.

③ 기쁨을 줍니다. 8절(상)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금은 있을 때는 기쁨이 있지만 없어지면 그 기쁨도 금새 사라지는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훈이 주는 영혼의 기쁨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④ 영안을 줍니다 8절(하)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물질인 금은 탐욕을 우리 눈을 가려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정결한 여호와의 계명은, 그것을 지켜 행하는 자의 영안(靈眼)을 밝혀 천국을 보게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이 아이는 성장하여 한국인 최초의 7인 목사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숭실학교와 숭덕학교을 설립했으며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입니다.
길선주 목사는 당시의 풍속에 따라 11살 때 나이 많은 아내와 결혼하였습니다. 하루는 서당에서 오전 공부를 마치고 점심 먹으러 집에 돌아온 선주는 곧장 부엌에 들어가 솥에서 밥을 퍼담는 아내에게 손을 내밀며 “나 누룽지 좀 줘. 하고 졸라대었다.”
선주는 아내 등에 업혀 뒷동산에 올라가 달구경을 하고 있었다. 아내가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자 어린 신랑은 아내의 두 귀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뭘 그렇게 내려다보는 거야”
아내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흥, 등에 업힌 서방님의 강짜가 너무 심하네요”
그는 12세 글방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했는데 그 시입니다.
[농부의 아내를 만들지 말지니
해마다 고생이 이와 같도다
옥 같은 소니에 신고가 그치지 않고
꽃다운 마음속에서 팔자를 한탄하네
청루에 있는 것은 뉘집 딸인고
밤마다 끄리는 옷이 닳는 소리뿐일세]

그는 17세 때 안주에서 불량배 윤학영 3형제로부터 억울하게 무수히 구타를 당합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식구를 거느리고 평양에 이주까지 했으나 마음에 깊은 상처만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허망한 현세에서 불변의 영계(靈界)를 동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또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친은 이미 늙어 그가 집안 살림을 보살펴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는 평양의 거상 이재경의 상점에서 1년 동안 상술을 익히고 18세 때 따로 상점을 경영하였습니다. 그는 성격이 맞지 않는 점포를 꾸려 가는 동안에 이해와 타산에 매인 생활에 대해 환멸을 느꼈고 늘 자기 자신을 자책하며 살았습니다. 평양 북 마을의 면장으로 있으면서 첩을 두고 두 집 살림을 하던 형은 물건을 닥치는 대로 가져다 쓰고 원금도 갚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장사에 으레 따르게 마련인 에누리를 할 줄 몰라 매상은 올렸지만 이문을 내지 못해 결국 장사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래저래 그는 세태에 대한 실망과 혐오만 더하여 염세에 빠진 데다가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은 어혈(瘀血)로 허약한 몸에 중병까지 겹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부인의 극진한 간호와 부모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병세가 차츰 호전되었으나, 그는 세상이 싫어 살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후 수도에 뜻을 두고 김순도(호 창일)라는 사람을 만나 수도의 길을 걷습니다. 산신차력(山神借力)에 도가 틉니다. 19세에 관성교(關聖敎)를 숭상하고 21-29세까지 9년 동안 선도(仙道)에 심취된 도인 길선주가 하나님을 만나가 된 것은 어느 날, 평양에서 이런 소문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평양에 괴상한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더라. 키가 꺽다리이고, 파란 눈이 우묵 들어가고, 코가 크고, 머리털은 볼그레하고 옷은 괴상하게도 쳇다리 같은 바지에 무당의 덧옷 같은 긴 저고리를 입고, 말은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데, 그게 바로 양귀자(洋鬼子)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 사람이 양교(洋敎)라는 교를 가지고 와서 전하는데, 한번 거기 발을 들여놓으면 혼을 뽑아서 미치고 만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에 대한 이런 유언비어는 삽시간에 쫙 퍼져 온 성내가 떠들썩했습니다. 이 괴상한 인물은 한국에 파송 된 마펫(한국명 마포삼열, 인디애나주 매디슨 출생으로 1884년 하노빌대학을 졸업하고, 1889년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선교사로 와서 평양장로회신학교 세움) 선교사로, 그는 1890년 1월에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으며, 그 해 8월에 평양에 와서 여문 앞 김선달의 집에서 유숙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기독교에 귀화한 한석진(韓錫晋)씨가 평양에서 마펫 선교사의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길선주의 귀에 이 소문이 들어간 것은 그가 평양 널다리골에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양귀자가 새 교를 전한다는 말에 호기심을 느끼고 어느 날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서 담론을 나누었는데, 그 선교사가 전하는 교에는 뭔가 취할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도무지 알쏭달쏭하여 감히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후 1893년 봄에 그는 친구 문흥준을 마펫 선교사와 한석진씨에게 소개하고, 그 해 여름에는 김종섭을 소개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뭔지 좀더 분명히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길선주가 23세 때 김종섭은 선도를 숭상하면서 도인 길선주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도리를 담론하고 형과 아우를 맺은 사이었습니다. 그런데 양교의 내용을 알아보라고 마펫 선교사에게 소개한 김종섭이 어느새 예수를 믿게 되고, 길선주에게도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양교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미 우리나라에 전해진 천주교를 새로 바로잡은 것으로 선도와는 댈 것이 아니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바르게 살아야 하오…”
“듣기 싫어요” 길선주는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양코가 뭔지 알아보라고 선교사에게 소개했더니 형님은 금방 양귀신에 홀렸구려. 그런 경솔한 변심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러나 한편 길선주는 김종섭의 회도에 큰 충격을 받고, 필경 거기에는 그럴 만한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기독교를 철저히 연구하기 위해 중국 성서공회에서 발행한 관주 신약(貫珠新約)을 입수하여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관주가 있는지라 구약을 읽지 않을 수 없어 곧 한문으로 된 구약 성경도 구입하고, 성경 주석과 그 밖의 기독교 서적도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전설이나 신화 같기도 하고 심지어 무당의 독백 같기도 하여 종잡을 수 없고, 불교와 같이 오도의 지름길을 설파하거나 유학과 같이 깊은 인륜도덕을 논한 것도 아니고, 선도의 주문처럼 신비의 교리를 제시한 것도 아닌 아리송한 내용으로 표현은 쉬운데 알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가타부타 비판할 수도 없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이 없이 사교에 젖은 머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쉽사리 들어갈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길선주는 평양성내 해주골 입구에 집을 마련하고 가게를 내고 있었습니다. 김종섭은 매일같이 그를 찾아와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권면 했습니다. 형님, 글쎄 예수가 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덮어놓고 믿으란 말이오 그러나 김종섭은 실망하지 않고 그를 찾아올 적마다 회보(回報)인 [그리스도 신문]을 갖고 와서 읽어 주었습니다. 하루는 김종섭이 [이 선생전]이라는 전도 책자 한 권을 가지고 와서 읽어보라고 길선주에게 주었습니다. 그 책에는 아편 중독자로서 방탕한 생활을 하던 어떤 중국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를 믿게 된 경위가 쓰여 있었습니다. 길선주는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착해졌다는 이야기가 신기하기는 했으나, 별로 감동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김종섭은 다시 [장원양우 상론(張元兩友相論)]이라는 다른 책 한 권을 꺼내 주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주고받은 두 사람의 대화가 담긴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길선주는 상당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김종섭은 또 다른 책한 권을 읽어보라고 주었는데 그것은 [천로역정:게일 선교사가 번역한 것, 1888년,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기독청년회 지원으로 25세 되던 1888년 12월 15일 기포드와 함께 내한했습니다. 성경번역을 주도했는데 마펫과 게일은 "하나님"으로 번역하기를 주장하여 결국 하나님으로 관철하였습니다. 그리스도신문 주간이었고 그는 제2대 독노회장을 지냈고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와 연동교회를 설립했습니다.]이었습니다.
길선주는 별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 장롱 밑에 밀어 넣고 여전히 선도에 몰두하였다. 그 날도 주문을 열심히 외우고 있는데 김종섭이 찾아왔습니다.
“아직도 삼령 주문을 외우고 있소?”, “그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는게 어떻겠소?”
길선주는 날마다 삼령신군에게 기도하였습니다.
“삼령신군이시여, 예수교가 참 도인지 거짓 도인지 알 수 없으니 가르쳐 주옵소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기를 며칠이 지나니 선도가 과연 영생불사(永生不生)의 도인지 차츰 의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는 지금까지 썩은 새끼줄을 튼튼한 생명줄로 잘못 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김종섭 처럼 예수교를 냉큼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 예수교 역시 구원의 길이 보장되는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러 지도 못하고 저러 지도 못하는 가운데 심한 번민에 빠져 입맛을 잃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는 문득 김종섭이 갖다 준 [천로역정]이 생각나 장롱 밑에서 꺼내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뜻밖에도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큰 감동을 받아 솟구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길선주는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령하신 하나님이시여, 저는 심히 마음이 괴롭습니다. 오랫동안 영생불사의 도로 알고 정성껏 선봉 해온 선도에 대해 의심이 생기고, 저 예수교의 도리는 영생의 진리인지 아직 알 수 없으니 저는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나이다. 저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가 참으로 인류의 구세주인지 아닌지 분명히 가르쳐 주옵소서!…”하고 기도를 미쳐 마치기도 전에 천장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고 세 번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너무나 놀랐고 두려워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엎드린 채, “사랑하시는 아버지여,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 그는 찾아오는 손님을 피하여 100일 기도와 성경 연구에 열중하였습니다. 전에는 아리송하기만 하던 성경 구절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이 인간을 생명 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꿀맛처럼 달아, 밤을 새워가면서 탐독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도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으로 이루어진 감격스러운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원한 예술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 입신하여 조사가 될 때까지 신. 구약 성경을 20번쯤 통독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대. 소 선지서, 시편, 신약의 복음서, 로마서, 요한서신 등은 개별적으로 50번 가량 독파하고 중요한 대목은 거의 다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는 성경의 심오한 진리에 도취되어 성경 해석에도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 자신이 은혜를 받기 위해 그를 가끔 집회에 초대하여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의 설교에는 청중의 심령을 찌르는 영력이 깃들어 있었으며 그의 기도에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기도와 성경의 사람]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1907년 1월 6일에 장대현교회에서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부흥회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 많은 회중들이 회개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1898년 길선주는 30세에 평양 널다리골교회 목사가 되었고,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35년 안남도 고창교회(高昌敎會)에서 집회 설교도중 뇌일혈로 67세에 순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해야할 일은 이 말씀을 사모하고 열심히 읽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반드시 전달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성경을 컴퓨터보다 좋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먼저 우리가 성경을 좋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곁에 두시고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