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의지하여 깊은데로 가라

예수님의 생애(9.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데로 가라) / 누가복음 5:4-11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되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어느 목사님이 중국 북경에 가서 성도들을 방문했습니다. 가정예배 처소였는데, 그곳에서는 예배를 드릴 때, 외부에서 온 사람은 절대로 설교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일어서서 말하면 설교요, 앉아서 말하면 좌담이 되어 외부에서 온 사람도 앉아서 말하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좌담식으로 앉아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말씀 더하라는 회중의 권유에 따라 두 시간이나 설교를 했답니다. 이야기가 끝나 경청하던 청년 하나가 벌떡 일어나 소리칩니다. “오늘의 교양, 전적으로 접수합니다.” 공산당이 교양 할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접수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전적으로 접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 명령
고기를 잡으려면 고기가 있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지금 고기가 어디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깊은데”있다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고기잡고 빈 그물을 털고 있는 어부들의 심정이란, 하루종일 땀흘려 일하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경험을 하신 분들은 이해합니다. 허무하고 허탈한 것입니다. 저희 어머님이 지금도 저에게 하시는 말이 있는데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오다가 돌을 차면서 왔는데 하필이면 그게 앞집 가게 유리에 맞아 쨍그랑 깨졌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저를 알았기 때문에 가만히 계셨습니다. 차라리 혼을 내주면 좋은데 그냥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일 없이 집에 왔는데 저녁에 어머님이 일 다녀오시면서 하루 품삯을 그 아주머니에게 주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일을 생각하시면 그렇게 허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부들은 밤새도록 고기잡이하고 빈 그물을 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깊은데로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지금 고기들은 아침이 되어서 깊은 데로 몰려있습니다. 이곳에 어망을 내리면 됩니다.
여러분 밑천 없는 분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시려면 어디를 가시면 되는지 아십니까? 돈이 굴러다니는데 가시면 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시장입니다. 시장에 가면 돈이 돕니다. 지금 시장은 또 형편이 다른가 봅니다. 즉 기회가 있는 곳에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할 일이 있는 곳에 가야합니다. 선교지에 가면 사회가 역동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불평만 합니다. 이건 아직 이렇고 저건 저래서 불만이고, 그러나 기회를 보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다 되어있으면 내가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직 부족한 것이 있는 곳 그곳에 내가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깊은 곳입니다. 그곳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에 따르기 싫었을 것입니다. 어망을 깨끗하게 했는데 이제 더 헛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다 고기잡이는 밤이 제일이지 이제 아침에는 적격이 아니다, 또 적당인 깊이가 제격이지 깊은 곳은 아니다, 고기잡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목수의 말을 듣다니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이와 같이 불합리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절) – 순종
처음에는 예수님의 이 명령에 베드로는 반신반의하였습니다. 그래서 변명을 합니다. “우리들이 밤이 되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을 안 해도 예수님은 지금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안 해도 될 말을 합니다. 이 말속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우리들이 한시간도 아니고 그것도 밤 세도록 잡았는데 얻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나가 고기를 잡아본들 잡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며 목수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적 배경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한들 얻을 것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바다로 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수님께 순종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은 누구의 말을 듣고 사는 것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철학이다라고 말합니다. 다 철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누군가의 철학을 이어받거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아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사회로부터 사람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론, 환경에 영항을 받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책일 질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축복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여러분 말씀에 의지하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의 배경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말씀” 의지하였습니다.
신석구 목사는 어떤 장로와 길을 가던 도중에 자신의 목회 철학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장로님, 신바닥의 진리를 아십니까? 이 신바닥은 주인이 가자 하는 대로 순종만 합니다. 자갈길로 가자면 가고, 가시밭길도 지나가고, 더러운 오물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불평불만 없이 따라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목사나 장로는 자기 주장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의 길은 바로 순종의 길입니다.

가득 차는 육신적 축복(6-7절) – 축복
순종은 항상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삼상 15:22) 하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노하우(KNOW-HOW)만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할 때 비로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 인도의 성자 선다 싱이 네팔지방의 산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쳐 한치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모르는 사이지만 같은 방향으로 가는 길동무가 한 사람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그들이 추위와 눈보라를 헤치며 한참 가니 인적도 없는 외진 산비탈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싱이 동행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그냥 두면 틀림없이 죽고 말 거요.’
동행인은 펄쩍 뛰었습니다.
‘미쳤소? 우리도 죽을지 모르는 판에 어떻게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단 말이오’
그는 화까지 내면서 혼자 서둘러 떠나버렸습니다. 싱은 할 수 없이 쓰러진 사람을 등에 업고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한파는 갈수록 심해지고 기운은 떨어져갔으나 이를 악물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온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등에 업힌 사람도 싱의 따뜻한 체온으로 얼었던 몸이 녹으며 차츰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가자 마을이 나왔습니다. 희망이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서 눈 속에 얼어죽은 시체 하나가 발에 걸렸습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 동행이었습니다. 이 판국에 누구를 돕느냐고 서둘러 간 사람은 얼어죽고, 죽어가던 사람을 업고 간 싱은 살게 된 것입니다.
경제불황이 닥치면서 우리 모두 그들처럼 혹한 속의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앞길은 전혀 보이지 않고 너나없이 불안과 절망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이기심의 만연입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어떻게 남을 돕느냐는 동행인 같은 사람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를 녹여주고 생기를 넣어줄 수 있는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서로의 체온입니다. 싱과 쓰러졌던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함께 나누면 죽음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그것은 사랑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누구나 어렵지만 자신을 잘 살피면 그 중에서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걸 다같이 주고받으면 어떤 역경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물을 던졌을 때 놀랍게도 엄청난 물고기가 잡혀 올라옵니다. 그물이 찢어지려 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청합니다. 그래 그들이 와서 고기를 퍼담는데 두 배에 잠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도 경험하는 바지만 어려울 때 도움 청하기는 쉬워도 넘칠 때 도움을 청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밤새도록 고생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어떻게 고기를 잡았습니까?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것은 자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고기를 자기 혼자 가져도 누구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다른 배의 친구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의 마음, 동역하는 마음, 도움을 청하는 마음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혼자서 하면 매우 힘이 들지만 누가 옆에서 조금만 거들어 주어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우리를 위대한 인물로 성장시키는 비결이요 또한 상대편을 위대한 인물로 함께 자라게 하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협력자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7절까지는 이세상의 육신의 축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축복 받는 것이 이 세상의 것으로 끝난다면 그야말로 허무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 중에는 그래도 좋으니 돈벼락이나 한고 죽으면 소원이 없고 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의 안타까움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저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돈 한번 벌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고민해 왔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세상의 고난에 대해서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제 고향이 경기도 마석인데 그곳에 당시 서울에서 등산하러 오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갈증이 나고 물이 귀하여 아이스 통에 하드(아이스께끼)를 넣은 통을 가지고 천마산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산은 해발 812m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드 값을 배 이상 불러도 잘 팔립니다. 그렇게 돈맛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는 뒷전입니다. 어떻게 학교 빨리 마치고 돈벌러 가느냐 하는 것이 제 고민이었습니다. 학교를 마치자 마자 달려가 도매로 빵을 구하고 그 빵을 경춘선 기차에 올라가 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홍익회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아무나 팔면 되는 것으로 알고 빵을 팔다 홍익회 아저씨들한테 혼나고 내려온 적도 있습니다. 겨울방학 때는 탄광에 가면 돈을 번다기에 친구를 꼬셔서 강원도 황지 탄광촌에까지 갔었습니다. 더 할까요? 이 정도만 말씀드리면 저도 보통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런 저에게도 봄날의 햇빛이 따스하게 내려 쬐듯이 어느새 예수님이 제 마음에 들어오시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드렸던 고백이 저의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 – 회개의 고백
고기가 많이 잡힘을 보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9절 하반). “놀라고(담보스)”는 매우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말문이 막히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어부들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밤새도록 잡아도 잡히지 않던 고기가 한배에 실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배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축복해 주시면 감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고기만 잡고 놀랐으면 되었지 베드로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갑자기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광채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드러난 것입니다.
아마 당시의 대제사장이나 율법사, 랍비들, 산헤드린공의회 회원 정도가 되면 죄인과 함께 있지 못하겠다고 떠났을 것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그냥 유대인들도 죄인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오히려 돌로 치려고 합니다.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을 위해서 죄인의 세상에, 죄인을 대신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취하리라(10절) – 예수님의 약속
베드로만 놀란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같이 동업하는 야고보, 요한도 놀랐습니다. 놀라서 떨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무서워 말라”고 하십니다. 이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진정시키십니다. 오히려 세례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을 때보다 더 돌란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을 때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했지만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만큼 자신들의 생각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기라고는 잡아보지도 않으시고 목수 일만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넘치도록 많은 고기를 잡고 놀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렇게 고기를 잡았던 것과 같이 사람들을 사로잡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11절) – 제자됨
저는 솔직히 이 상황에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흔히 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신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따라가서 어떻게 할까?, 지금 저 많이 잡은 고기는 어떻게 하고? 그런 걱정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강력한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배와 고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아멘
더 이상의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된 것이 제일 큰 축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도가 된 것이 제일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에서 한 가족과 같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여 선교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사역을 같이 하시는 분 가운데 한국인 아가씨가 한 분 있는데, 킴 윅스라는 맹인 아가씨입니다. 한국전쟁 때 실명을 했고 고아원에서 자라났는데, 어떤 미군 중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인디아나 주립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오스트리아에서 성악 수업을 하여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녀가 예수를 믿고 놀라운 간증을 갖게 되어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집회를 할 때마다 간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의 간증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장님인 나를 인도할 때, 저 101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고 말하고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분을 내가 믿고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성실할 때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꼭 도착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20년 후도 알지 못합니다. 또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보이시는 그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면 하나님은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내 생애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그곳에 도달케 하실 것입니다.”
순종하면 지금도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역사 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이것은 주님의 영원한 명령입니다. 이 부름에 우리모두 아멘으로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4.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 고전 15:45-50

“45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45-50)

아담이라는 말의 뜻은 “사람”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가리켜 “마지막 아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신 “마지막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치 말라 하였어도”(렘 44:4)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 방법으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증거하기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고 하셨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첫 아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순간 에덴 동산의 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부부를 상상해 보십시오. 에덴동산의 각종 먹을 것과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안전한 낙원이었습니다. 특별히 더위나 추위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가 많이 오거나 가뭄이 들어 흉년이 되는 것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쫓겨나자마자 그들은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야 했을 것이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전전긍긍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어느새 몸은 상하고 병들어서 힘에 겨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마다 에덴동산이 그리워서 몇 번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이 지키고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그 검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에덴을 바라보며 두 부부는 쓸쓸히 그곳에서 발길을 또 돌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첫 아담의 실패

오늘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소망합니다. 그 증거로 성공에 관한 책과 지도자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성공하기 위해서 온갖 종교를 다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공이 곧 생존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성공하려면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고, 실패의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성경에는 성공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실패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롯, 사울, 가룟 유다의 실패와 아브라함, 다윗, 베드로의 실수 등 많은 인물들의 실패와 실수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런 실패자 중에 최고의 실패자는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입니다. 아담은 성공 중에 성공인 최고의 자리에서 최악의 실패의 자리로 전락했습니다. 이 같은 아담의 실패는 아담 자신만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실패이며, 우리가 벗어나야 할 실패의 자리입니다.
그러면, 첫 아담의 실패를 살펴봄으로, 우리 모두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믿음의 성공자가 됩시다.

첫째, 탐욕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탐욕 때문이었습니다(창 3:5). 하나님은 아담을 복된 존재로 창조하시고, 필요한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이처럼 탐욕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만족이 없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도 감사치 않음이 죄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롬 1:21).
사단은 감사가 없는 자리에 찾아와서 탐욕과 불평을 가져다줍니다. 이 때, 아담처럼 모든 것을 소유해도 감사치 않으면, 우리는 탐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어도 바울처럼 감사의 삶을 살면, 어떤 역경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아담의 실패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단과 사람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아담의 실패를 거울삼아 우리는 사단의 전략을 파악해야 하고, 사단보다 더 지혜로워야 합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예수님을 유혹할 때 “말씀”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말씀을 조금 바꾸거나, 일부만 인용해서 우리를 현혹합니다(창 3:1 하). 이것은 오늘날 이단들도 동일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유혹이 올 때, 하와처럼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면 패배하게 됩니다(창 3: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 일획도 변함없이 지키면 누구나 인생의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마 4:4).

셋째, 자기 잘못을 아내에게 책임 전가
아담은 모든 잘못을 아내와 그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말하면서, 아내에게 책임을 떠 넘겼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에 대해서 감사는 없고 자신의 죄에 대한 핑계로 삼았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은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아담”이었습니다.

넷째, 회개하지 않았다.
아담에게 있어서 선악과를 먹은 것보다 회개하지 않은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는 것보다,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을 더 미워하십니다(잠 28:13). 하나님이 죄를 지은 아담을 찾아오신 것은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징벌하려고 했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영원히 멸망 받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신 것은 회복시켜 주시고, 용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담의 실패를 교훈 삼아 우리는 잘못을 범했을 때, 즉시 뉘우치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가 바로 성공하는 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증거합니다.

아담 이후 내려온 죄

아담의 교만(욕심), 불순종, 회개하지 않은 것은 아담의 한 사람의 문제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인류에게 미쳤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에 제일 넘기 어려운 고개가 있었는데 그 고개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름도 쉬어(울고) 넘는다”는 옛 시조의 고개일까요? 아니면 박달나무로 우거진 문경 ‘새재’의 고개일까요? 또 아니면 임꺽정이 지키고 있었던 ‘까치 고개’일까요? 아니면 지금은 터널이 뚫어있는 대관령 고개일까요? 아닙니다. 그 고개는 지금 봄의 끝자락에 있는 이 때쯤이 제일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릿고개”입니다.
인사말은 그 나라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안개가 자욱한 영국에서는 “굿모닝” 좋은 아침이 그 사람들의 인사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영국에서 개조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후(안개)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영국 사람들이 왜 “굿모닝”이라고 인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아침 인사란 것이 없고 언제나 만나면 “봉주르”하면 됩니다. ‘봉’은 ‘좋은’, ‘주르’는 ‘낮’이란 뜻인데 향락문화가 많았던 프랑스에서는 늦게 일어나는 것이 예의이고 귀족들은 오후에 생활을 했답니다. 그래서 괜히 아침 일찍 여자가 다니면 창녀로 오해받기 십상이었답니다.
몽고 사람들은 모든 것(음식, 의복, 연료 등)을 가축에 의지하여 생활하다보니 “당신네 집 가축은 살이 얼마나 쪘습니까?”가 인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고 나왔냐”였습니다. 그리고 밤에 죽는 사람도 있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였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지만 그러나 아직도 먹고살기 힘든 사람은 많습니다.
아담 이후 죄가 이 땅에 들어와 사망이 왕노릇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불평, 불만은 많이 하면서 이것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늘 원망과 불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범죄한 일에 대한 불만입니다. 좀 어려울 때마다, 좀 힘들 때마다 ‘그 할아버지 할머니는 왜 그 선악과를 따먹어 가지고 그 결과로 우리까지 이렇게 고생을 시키나… 그 에덴 동산에 살았으면 농사도 하지 않고 평안하게 잘 살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쫓겨 나가지고 고생을 하게 되나…. 원인은 아담과 이브,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문제다 이거.’ 늘 이렇게 원망을 했는데 그 원망이 좀 지나쳤어요. 목사님이 이말 저말로 설명을 해 봤지만은 영 듣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댁에서 이 장로님을 초청했습니다. 저녁 만찬을 청했는데 음식을 잘 차려놓고 식사 기도를 하고 막 식사를 하는데 밖에서 손님이 찾아서 이 목사님이 밖으로 나가시면서 하는 말씀이, “자 우리 기도도 다 했으니깐 식사를 먼저 하십시오. 다 같이 식사를 하세요. 그건데 요 가운데 있는 요 그릇, 뚜껑 닫아 놓은 건 그대로 두세요. 제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제가 이것을 열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은 참고 다른 것만 다른 모든 것만 잡수십시오.” 그랬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나갔어요. 식사하는데 이 장로님이 그것이 궁금해 못 견디겠거든. 그것이 무어냐 이거 에요. 마침내 그것을 살짝 열어 보았는데 그 속에 새 한 마리를 잡아 넣으셨어요. “푸릉” 하고 날아올랐는데 아 이걸 잡을 재간이 있어 야죠. 목사님 들어오시기 전에 잡아서 다시 집어넣어야겠는데 잡을 길이 없어요. 이리 저리 쫓아다니는데 먼지가 자욱합니다. 이제 목사님이 들어 왔습니다. “아니 여기 많은 음식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것을 열어 보았습니까?” 그리고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분명 아담의 후예입니다.” 그랬다는 겁니다.
미국은 요즘 시끄럽습니다. 이라크를 해방시켜 주겠다고, 핵무기, 화학무기를 찾겠다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기름 빼앗아 오려는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이라크 해방”은 명분으로 내어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라크에서 군인들이 포로들에게 잔학한 짓을 한 것이 탈로 난 것입니다.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갖은 모욕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진정 이라크 해방군입니까? 그래서 전 세계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청하면서 겉으론 평화를 내걸고 사실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하여 다른 나라 인권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도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본인들만 회개했으니까 죄인이 아니고, 저쪽 중동의 국민들만 죄인시 하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는 것은 또 한번의 교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도 역시 아담 이후 내려오는 죄의 문제를 안고있는 첫 아담의 후예들이라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분들이 많은데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죄를 지었고 또 내가 선악과의 유혹을 받았어도 따먹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감리교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가 바로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직자로, 규칙적인 경건 생활로, 선교사로 열심히 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738년 5월 24일 밤 9시 15분 올더스게잇의 작은 집회에서 회심을 하고 “그가 내 죄, 곧 나 자신의 죄를 가져 가셨으며 나를 죄와 죽음의 율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게 주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죄의 시조인 아담의 후예이나 또 한 사람의 다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여 생명 역사에 동참하게 된 것을 감사 드립시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살지 않고 있음을 저는 감사드립니다. 죄의 문제가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완전히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표현한 것은 첫째 아담과 비교하기 위해서 이며 첫 째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면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는 그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아담의 실패의 이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럼 성공한 마지막 아담은 첫 아담과 반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첫째 아담은 탐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탐욕이 없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시작하기 전에 사단이 시험한 것은 바로 첫 번째 아담과 같은 시험입니다. 천하세상을 보여주고 다 주겠다고 한 사단의 소리는 바로 첫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보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첫 아담은 사단의 소리를 들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순종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오직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 지시는 것만을 생각하시고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죄 없으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는 늘 중보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 결과 첫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면 후 아담을 통해서는 이 죄가 단절되었습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첫 사람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 탐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은 하늘에서 나셔서 오셨고 하늘의 생각만을 했습니다.
지금도 누가 욕심이 많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욕심이 많은 것입니다. 누가 죄를 짓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죄의 육체로 하늘의 영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회개한 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육체는 이 땅에 벗어버리고 아프지 않고 썩지 않을 새 육체로 갈아입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서는 교회에서 만나지만 어느 날 우리가 이 땅이 아닌 곳에 있다면 반드시 그곳이 천국이길 바랍니다. 그곳에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 모두 만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