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4.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 고전 15:45-50

“45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45-50)

아담이라는 말의 뜻은 “사람”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가리켜 “마지막 아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신 “마지막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치 말라 하였어도”(렘 44:4)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 방법으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증거하기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고 하셨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첫 아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순간 에덴 동산의 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부부를 상상해 보십시오. 에덴동산의 각종 먹을 것과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안전한 낙원이었습니다. 특별히 더위나 추위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가 많이 오거나 가뭄이 들어 흉년이 되는 것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쫓겨나자마자 그들은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야 했을 것이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전전긍긍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어느새 몸은 상하고 병들어서 힘에 겨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마다 에덴동산이 그리워서 몇 번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이 지키고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그 검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에덴을 바라보며 두 부부는 쓸쓸히 그곳에서 발길을 또 돌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첫 아담의 실패

오늘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소망합니다. 그 증거로 성공에 관한 책과 지도자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성공하기 위해서 온갖 종교를 다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공이 곧 생존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성공하려면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고, 실패의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성경에는 성공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실패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롯, 사울, 가룟 유다의 실패와 아브라함, 다윗, 베드로의 실수 등 많은 인물들의 실패와 실수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런 실패자 중에 최고의 실패자는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입니다. 아담은 성공 중에 성공인 최고의 자리에서 최악의 실패의 자리로 전락했습니다. 이 같은 아담의 실패는 아담 자신만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실패이며, 우리가 벗어나야 할 실패의 자리입니다.
그러면, 첫 아담의 실패를 살펴봄으로, 우리 모두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믿음의 성공자가 됩시다.

첫째, 탐욕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탐욕 때문이었습니다(창 3:5). 하나님은 아담을 복된 존재로 창조하시고, 필요한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이처럼 탐욕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만족이 없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도 감사치 않음이 죄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롬 1:21).
사단은 감사가 없는 자리에 찾아와서 탐욕과 불평을 가져다줍니다. 이 때, 아담처럼 모든 것을 소유해도 감사치 않으면, 우리는 탐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어도 바울처럼 감사의 삶을 살면, 어떤 역경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아담의 실패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단과 사람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아담의 실패를 거울삼아 우리는 사단의 전략을 파악해야 하고, 사단보다 더 지혜로워야 합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예수님을 유혹할 때 “말씀”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말씀을 조금 바꾸거나, 일부만 인용해서 우리를 현혹합니다(창 3:1 하). 이것은 오늘날 이단들도 동일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유혹이 올 때, 하와처럼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면 패배하게 됩니다(창 3: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 일획도 변함없이 지키면 누구나 인생의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마 4:4).

셋째, 자기 잘못을 아내에게 책임 전가
아담은 모든 잘못을 아내와 그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말하면서, 아내에게 책임을 떠 넘겼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에 대해서 감사는 없고 자신의 죄에 대한 핑계로 삼았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은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아담”이었습니다.

넷째, 회개하지 않았다.
아담에게 있어서 선악과를 먹은 것보다 회개하지 않은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는 것보다,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을 더 미워하십니다(잠 28:13). 하나님이 죄를 지은 아담을 찾아오신 것은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징벌하려고 했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영원히 멸망 받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신 것은 회복시켜 주시고, 용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담의 실패를 교훈 삼아 우리는 잘못을 범했을 때, 즉시 뉘우치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가 바로 성공하는 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증거합니다.

아담 이후 내려온 죄

아담의 교만(욕심), 불순종, 회개하지 않은 것은 아담의 한 사람의 문제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인류에게 미쳤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에 제일 넘기 어려운 고개가 있었는데 그 고개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름도 쉬어(울고) 넘는다”는 옛 시조의 고개일까요? 아니면 박달나무로 우거진 문경 ‘새재’의 고개일까요? 또 아니면 임꺽정이 지키고 있었던 ‘까치 고개’일까요? 아니면 지금은 터널이 뚫어있는 대관령 고개일까요? 아닙니다. 그 고개는 지금 봄의 끝자락에 있는 이 때쯤이 제일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릿고개”입니다.
인사말은 그 나라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안개가 자욱한 영국에서는 “굿모닝” 좋은 아침이 그 사람들의 인사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영국에서 개조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후(안개)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영국 사람들이 왜 “굿모닝”이라고 인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아침 인사란 것이 없고 언제나 만나면 “봉주르”하면 됩니다. ‘봉’은 ‘좋은’, ‘주르’는 ‘낮’이란 뜻인데 향락문화가 많았던 프랑스에서는 늦게 일어나는 것이 예의이고 귀족들은 오후에 생활을 했답니다. 그래서 괜히 아침 일찍 여자가 다니면 창녀로 오해받기 십상이었답니다.
몽고 사람들은 모든 것(음식, 의복, 연료 등)을 가축에 의지하여 생활하다보니 “당신네 집 가축은 살이 얼마나 쪘습니까?”가 인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고 나왔냐”였습니다. 그리고 밤에 죽는 사람도 있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였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지만 그러나 아직도 먹고살기 힘든 사람은 많습니다.
아담 이후 죄가 이 땅에 들어와 사망이 왕노릇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불평, 불만은 많이 하면서 이것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늘 원망과 불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범죄한 일에 대한 불만입니다. 좀 어려울 때마다, 좀 힘들 때마다 ‘그 할아버지 할머니는 왜 그 선악과를 따먹어 가지고 그 결과로 우리까지 이렇게 고생을 시키나… 그 에덴 동산에 살았으면 농사도 하지 않고 평안하게 잘 살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쫓겨 나가지고 고생을 하게 되나…. 원인은 아담과 이브,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문제다 이거.’ 늘 이렇게 원망을 했는데 그 원망이 좀 지나쳤어요. 목사님이 이말 저말로 설명을 해 봤지만은 영 듣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댁에서 이 장로님을 초청했습니다. 저녁 만찬을 청했는데 음식을 잘 차려놓고 식사 기도를 하고 막 식사를 하는데 밖에서 손님이 찾아서 이 목사님이 밖으로 나가시면서 하는 말씀이, “자 우리 기도도 다 했으니깐 식사를 먼저 하십시오. 다 같이 식사를 하세요. 그건데 요 가운데 있는 요 그릇, 뚜껑 닫아 놓은 건 그대로 두세요. 제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제가 이것을 열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은 참고 다른 것만 다른 모든 것만 잡수십시오.” 그랬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나갔어요. 식사하는데 이 장로님이 그것이 궁금해 못 견디겠거든. 그것이 무어냐 이거 에요. 마침내 그것을 살짝 열어 보았는데 그 속에 새 한 마리를 잡아 넣으셨어요. “푸릉” 하고 날아올랐는데 아 이걸 잡을 재간이 있어 야죠. 목사님 들어오시기 전에 잡아서 다시 집어넣어야겠는데 잡을 길이 없어요. 이리 저리 쫓아다니는데 먼지가 자욱합니다. 이제 목사님이 들어 왔습니다. “아니 여기 많은 음식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것을 열어 보았습니까?” 그리고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분명 아담의 후예입니다.” 그랬다는 겁니다.
미국은 요즘 시끄럽습니다. 이라크를 해방시켜 주겠다고, 핵무기, 화학무기를 찾겠다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기름 빼앗아 오려는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이라크 해방”은 명분으로 내어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라크에서 군인들이 포로들에게 잔학한 짓을 한 것이 탈로 난 것입니다.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갖은 모욕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진정 이라크 해방군입니까? 그래서 전 세계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청하면서 겉으론 평화를 내걸고 사실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하여 다른 나라 인권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도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본인들만 회개했으니까 죄인이 아니고, 저쪽 중동의 국민들만 죄인시 하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는 것은 또 한번의 교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도 역시 아담 이후 내려오는 죄의 문제를 안고있는 첫 아담의 후예들이라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분들이 많은데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죄를 지었고 또 내가 선악과의 유혹을 받았어도 따먹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감리교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가 바로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직자로, 규칙적인 경건 생활로, 선교사로 열심히 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738년 5월 24일 밤 9시 15분 올더스게잇의 작은 집회에서 회심을 하고 “그가 내 죄, 곧 나 자신의 죄를 가져 가셨으며 나를 죄와 죽음의 율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게 주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죄의 시조인 아담의 후예이나 또 한 사람의 다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여 생명 역사에 동참하게 된 것을 감사 드립시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살지 않고 있음을 저는 감사드립니다. 죄의 문제가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완전히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표현한 것은 첫째 아담과 비교하기 위해서 이며 첫 째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면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는 그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아담의 실패의 이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럼 성공한 마지막 아담은 첫 아담과 반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첫째 아담은 탐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탐욕이 없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시작하기 전에 사단이 시험한 것은 바로 첫 번째 아담과 같은 시험입니다. 천하세상을 보여주고 다 주겠다고 한 사단의 소리는 바로 첫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보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첫 아담은 사단의 소리를 들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순종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오직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 지시는 것만을 생각하시고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죄 없으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는 늘 중보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 결과 첫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면 후 아담을 통해서는 이 죄가 단절되었습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첫 사람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 탐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은 하늘에서 나셔서 오셨고 하늘의 생각만을 했습니다.
지금도 누가 욕심이 많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욕심이 많은 것입니다. 누가 죄를 짓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죄의 육체로 하늘의 영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회개한 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육체는 이 땅에 벗어버리고 아프지 않고 썩지 않을 새 육체로 갈아입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서는 교회에서 만나지만 어느 날 우리가 이 땅이 아닌 곳에 있다면 반드시 그곳이 천국이길 바랍니다. 그곳에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 모두 만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3. 어린아이를 영접하신 예수님) / 마 18:1-6, 막 9:33-37, 눅 9:46-48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1-6)
“33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3-37)
“46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 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 9:46-48)

본문말씀은 같은 사건을 공관복음 세기자가 모두 기록한 것입니다. 3개의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것은 그만큼 이 사건이 성경저자들이 잘 기억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잘 알려진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여쭌 것으로 마가는 “노중에서 제자들이 쟁론한 것을 아시고 질문하신 것으로” 요한은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세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마가가 제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행로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면을 참고해 주세요.]
본문에 “가버나움에 이르러”라고 나오고 “노중에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 어느 곳으로부터 “가버나움”에 오신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지명의 언급은 막 9:30에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앞의 지명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막 9:2에 보시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는 것이 나옵니다. 여기서 또 이 “높은 산”이 어느 산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산은 “다볼산”이라고 하는데 “다볼산”은 갈릴리 바다 남서쪽에 위치한 평평한 산으로 해발 560m 정도입니다. 따라서 이 산을 “높은 산”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과 현재 예수님의 행로와도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 산을 대체적으로 해발 2,850m의 헤르몬(Hermon) 산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산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 산에서 변화되셨으며 그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귀신을 쫓으시고 벙어리, 귀먹은 자를 고쳐주셨을 것입니다(막 9:25).
그리고 오늘 본문의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집은 정확히 누구의 집인지 언급은 안되어 있지만 예수님이 쉬었다 가실 수 있는 편안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예수께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다섯 제자를 부르셨던 곳입니다(마 4:13, 18-22 마 9:9). 그리고 백부장의 종, 베드로의 장모, 4인이 메고 온 반신불수 등의 병자를 고치신 곳이기도 합니다(마 8:5, 14, 9:1, 요 6:55-59). 그래서 가버나움을 예수님의 제2 고향이라고도 부릅니다(마 4:13).
다메섹에서 지중해 방면으로 왕래하는 통로인고로 상업이 번창하여 예수 당시에 가장 번화하였던 곳으로 유대인의 회당(눅 7:5)과 로마 세관(막 2:14)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머물고 계시는 집은 베드로나 또 다른 제자의 집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에 왜 가셨을까요? 단순히 쉬시기 위해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의 행보는 예루살렘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마지막 길을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집에서도 오랫동안 머물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부활하시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곳을 들려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싱가포르의 한 식물공원에 갔었는데 나이 드신 한국의 어르신들이 여행을 오셨습니다. 그분들은 그 식물들 하나 하나를 유심히 살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별로 그런 식물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어르신들은 언제 또 이곳에 오나 하는 마음에서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노중에서”라고 했는데 이 노중이 왜 중요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길을 오면서 쟁론한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꾸만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실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잠잠하니”라고 했는데 문법적으로는 미완료형 입니다. 지금 대답을 못하고 침묵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서열문제
지금 제자들이 노중에서 왜 이런 논쟁을 벌였습니까? 단순히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서열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서열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가는 쟁론했다고 말합니다. 쟁론한 문제는 “서로 누가 크냐”는 문제입니다. 이 말은 메이죤(meivzwn)으로 누가 더 “위대하냐” 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변화산에 예수님과 함께 올라갔던 제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먼저 자신들이 다른 제자보다 서열상 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정황이 막 10:37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영광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청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서열 잘 따지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것에 목메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사람과 한국사람이 다른 것이 있는데 중국사람은 명분에 치우치지 않고 실리를 챙긴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실리는 잃어버리고 명분을 앞세운답니다. 그래서 한국은 기술과 실력이 아니라 줄이라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도 부모님은 자녀에게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질문을 합니다. 이런 것 하지 마세요. 어른들은 장난 삼아 하지만 아이들은 순간 고민합니다. “어느 편으로 붙어야 좋을까” 그리고 어린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힘의 서열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른 아이들은 하나 잘하는 것 있습니다. 눈치하나는 빠르지요? 이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닙니다. 또한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심리적인 차별과 서열을 가르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이 잘 일어나는 집을 보면 자신들만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자꾸만 이웃과 친구와 비교합니다. 여러분 나는 나입니다. 나의 남편을 아내를 자녀를 자꾸만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버릇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서열을 왜 평소에 구분하려하는 것입니까? 서열을 정함으로 위와 아래, 첫째와 꽁지가 결정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차별입니다. 바로 차별하려고 서열을 나누는 것입니다.
남녀 차별이 심하던 시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첫 딸을 낳았다.
그럴법한 일이라 해서 의일 이라 이름지었다.
다음에 또 딸을 낳았다. 간혹 그럴 수도 있다해서 혹이라 이름지었다.
그런데 또 딸을 낳았다. 이건 너무 많다하여 과삼이라 이름지었는데
연거퍼 딸을 또 낳았다. 참 너무도 심하다해서 심사라 했다.
또 딸을 낳았다. 정말 분하다고 오분이라 이름 지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아들을 기다리는데 또 딸을 낳고는 화가 치밀어 육노라 이름지었다.
그런 후 또 딸을 낳아 고만 놀래서 칠경이라 이름을 짓고 말았다.
얼마 후에 또 딸을 낳고 보니 나오는 것은 한숨 뿐이라. 팔탄이라 이름 짖고 한탄만 하고 지내는 데,
또 딸을 낳고 보니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와 구소라 이름지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관심이 있는 “첫째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학생에게 제일 관심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일등을 하는 일입니다. 직장 생활하시는 분 관심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승진하는 일일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지금 관심 있는 일은 누가 첫째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자녀가 “어떻게 하면 첫째가 될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부모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첫째 되는 방법의 말씀을 꺼냈을 때 제자들의 반응은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앉으려하고 귀를 세웠을 것입니다.
예수께선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절) 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마 23:8-12, 막10:31, 43, 눅22:24-27).
교회에서도 제자들과 같은 서열의식이 있거나 은연중에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서열은 없습니다. 오직 봉사의 직분과 직책만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첫째가 되라는 의미에서의 직분이 아닙니다. 봉사하라는 직분입니다. 목사가 되어 가지고 목사직분을 감당하지 못하면 평신도 모다 못한 것입니다. 다른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맨 앞자리에 장로님, 그리고 성가대원, 직분자들을 순서대로 의자에 붙여 놓았던 적이 있는데 처음 교회에 오신 분이 잘 모르고 맨 앞자리에 앉았다가 장로님이 “제 자리인데요!” 그래서 일어나고 또 그 뒤에 앉았는데 집사님이 오시더니 “제 자리인데요!”라고 해서 그냥 교회를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의자가 많이 있으니까 그런 분 있으면 모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36절)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 보면 후보자들이 어린아이를 안고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대부분 이쁘고 잘 생긴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어린아이 하나를 안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으신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용으로 보아 그는 보잘것없는 아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마 제가 어렸을 때 코를 많이 흘렸는데 코도 흘리고 지저분한 그런 모습의 아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KCM홈페이지에 보면 눈이 둥그런 아이가 있습니다. 미나자매가 디자인을 잘 해서 이쁘게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보통 아이입니다. 그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보면서 어린아이를 안으신 예수님이 생각이나 홈페이지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유대나 헬라문화권에서는 어린아이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사람취급을 안 했습니다. 성경에 오병이어를 보시면 여자와 어린이를 뺀 숫자입니다. 수를 셀 때도 넣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덜 성숙한 미숙아로 취급하고 한 인간으로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도 분명히 한 인격체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입장도 존중해 주고 보호해 주어야 할 책임이 어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예수님의 비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37절)라고 하심으로 어린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높은 자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낮은 자와 비교하고 계십니다. 흔히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을 비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것도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25:31-46에 보면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헐벗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자신을 딤전 1:15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고 천하게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당시의 권력을 누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사장들과 바리새인 등의 특권층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 죽여서 안달이었으며 결국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잘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죄인 괴수일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께 용서받아야될 대상일 뿐입니다. 착각하면 안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 하나님께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혹 의미가 있다면 그 재능을 주님을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사용할 때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나를 영접함이요
제일 낮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제일 높으신 분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제일 낮은 자와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이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땅의 권력 있는 자, 명예 있는 자, 물질 있는 자가 아니라 제일 낮은 자로부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만일 높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초라하고 작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오히려 그 때가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만나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는 제일 작아지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발견할 기회가 없는 사람입니다.

1999년 8월 2일. 아프리카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를 출발한 비행기가 벨기에 브뤼셀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착륙장치 안에서 사람모형의

집의 터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2. 집의 터이신 예수님) / 고전 3:10-15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0-15)

어려서 흙을 가지고 놀 때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께 새집 다오”하면서 손으로 흙을 덮고 놀던 기억이 있습니다. 원래 이 노래는 제의적인 집단요로 가락국 건국 신화에 나오는 삽입가요로서, 가락국은 두껍이(거북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였는데, 두껍이는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노래를 통해 가락국 김수로왕을 새 시대를 열어갈 주체로 소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노래를 다시 끝까지 하면 이렇습니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물길어 오너라 너희집 지어줄게
두껍아 두껍아 너희 집에 불났다 솔이랑 가지고 뚤래 뚤래 오너라“입니다.
이 노래와 두껍이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두꺼비가 알을 품으면 평소에는 피해 다니던 독사를 찾아가 독사에게 잡혀 먹히면서 독사 뱃속에 자신의 독의 뿜어 독사를 죽게 합니다. 알들은 죽은 엄마 두꺼비와 독사를 먹이로 건강하구 식식한 세끼두꺼비로 태어납니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에서 헌집은 엄마 두꺼비를 뜻하고 새집은 건강하게 태어나는 새끼 두꺼비를 뜻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과 다릅니다. 두꺼비는 개구리와 같이 양서류 파충류에 속하는 것으로 알을 낳아 새끼를 만듭니다. 실제로 뱀에게 새끼를 만들려고 하면 아마 질식해서 죽을 겁니다. 그러나 두꺼비의 독은 사실입니다. 귀샘에서 분비되는 독액은 부포톡신이라 하며 부포탈린 등 여러 종류의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중국과 한국에서는 한약제로도 사용됩니다. 가락국 김수로왕을 세우고자 노래와 함께 이 이야기를 퍼트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거짓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내용에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두꺼비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두껍이가 죽어 새끼를 번식시킨다는 이야기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저는 어떤 때 이 노래가 우리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의 집은 헌집입니다. 세상에 속한 집은 버려질 집입니다. 고린도후서 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집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집을 건축하고 계십니다. 이 땅의 집은 다 버리고 가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은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는 축복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한지 3개월만에 시내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나를 위하여 지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쩌다 한번 찾아오시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인데 아예 그들 가운데 집을 짓고 함께 사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집이 필요하겠습니까? 온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이 어떻게 20평밖에 안 되는 작은 천막에 거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을 짓는 우리는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알고 보면 나를 위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나폴레옹 황제가 부관과 같이 두 사람이 어느 시골에 있는 조그마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이제 나폴레옹 황제는 변장을 하고 평민처럼 이렇게 또 부관은 친구처럼 둘이서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그날 저녁에 식사를 하는데 식사를 잘 시켜서 있는 대로 좋은 식사를 하고 식사 끝에 웨이터가 14프랑이라고 하는 많은 돈 계산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나폴레옹 황제가 “어 이 돈은 내가 내지” 그러면서 계산서를 받아들고 손을 주머니에 넣어 봤는데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돈주머니가 없어요. 그래 당황하니까 옆에 있는 부관이 “제가 내지요 뭐.” 그런데 그 사람도 주머니에 돈이 없어요. 두 사람 다 돈이 없어요. 그러니까 부관이 정중하게 말하기를 “대단히 죄송합니다 만은 지금 두 사람 다 지갑을 가져오지 못했는데 정확하게 한 시간 후에 돈을 갖다 드리겠습니다. 좀 이해해 주세요.” 그러니까 웨이터는 그런 대로 이해하는 거 같은데 그 호텔 주인이 나와 가지고 야단야단 하는 겁니다.
돈도 없는 사람들이 비싼 음식을 먹고 돌아다닌다고. 정신없는 놈들이라고 욕을 욕을 합니다. 오늘 당장 내라고. 그 부관이 하도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한 시간 후에 꼭 갖다 주겠습니다.” 그 웨이터가 가만히 보니까 믿음이 가요. “보자 하니 그렇게, 이 이렇게 거짓말할 분들은 아닌 거 같은데 이해하십시오”하다가 정 주인이 말을 안 들으니까 이 사람이 웨이터가 자기 돈을 냈어요. 14프랑을 내고 “먼저 가십시오.” 그래서 손님들을 보냈습니다. 한 시간 후에 부관이 다시 왔습니다.
돈을 내주고 주인보고 하는 말이 “이 여관 얼마면 살 수 있겠소?”, “이거 제가 얼마 전에 3만 프랑을 주고 샀는데요”, “좋아요, 여기 3만 프랑 있소. 이 집문서를 내 놓으시오” 그래 그 호텔을 사 가지고 그 자리에서 당장 웨이터에게 주었어요. “이제부터 이 집은 네 거다. 너는 나를 믿어주었다.”하고 집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터는 기초를 말합니다.
터는 문자 적으로 성이나 망대의 기초(딤후 2:19, 히 11:10, 계 21:19)를 말하는데 비유적으로는 교회 기초(롬 15:20)나 가르침의 기초(히 6:1, 딤전 6:19)를 말하는 것입니다.
집을 짓기 위해 제일 처음에 해야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집을 지을 터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 터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지을 집은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회사가 창립할 때 자본금이 얼마가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회사의 터는 자본금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회사는 자본금은 없고 어떤 기술을 가지고 시작된 회사도 있습니다. 이 회사의 터는 기술입니다. 그리고 어떤 회사는 경영마인드가 특이한 것으로 시작된 회사도 있습니다. 이것이 그 회사의 터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터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한국속담에도 “속담 터를 잡아야 집을 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뜻입니다. 집을 지으려면 먼저 터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터가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피흘린 값으로 사신 것입니다(행 20:28, 계5:9). 예수님은 자신이 교회의 머릿돌임을 주장하셨습니다(마 21:42). 바울은 에베소서 5:23과 골로새서 1:18에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터는 어떤 홍수가 와도 엄몰하지 못하며 어떠한 것에도 무너지지 않은 견고한 터입니다.
북한에는 “목수가 많으면 집을 무너뜨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옳은 지도자가 있어야 함을 교훈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 주앙교회의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을 근본으로 하고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의 터는 예수님 입니다. 예수가 터가 되지 못한 교회는 이미 교회당은 될지 모르나 교회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건축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 10절에서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라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터를 닦아주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오는 세대를 위해서 주앙교회의 터를 닦아주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창립한지 이제 1년이 되어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시간이 더가고 우리가 열심히 해서 교회가 성장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때쯤이면 교회는 제가 지금 꿈꾸던 많은 일들을 추진할만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가 되면 저는 은퇴해야 될 나이가 될지 모릅니다. 조용히 물러나야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터를 닦아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그가 1, 2, 3차 여행을 통해서 제일 성장시키고 복음이 들어간 지역이 고린도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이라면 그 교회를 떠나지 않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성도들을 그토록 사랑하여 바울은 많은 편지를 교회에 고린도 교회에 보내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것이 고린도전후서의 성경입니다. 그곳에서는 잘 아시는 사랑 장(고전13장) 이라고 말하는 성경도 있습니다. 각종 은사에 대해서 소개한 12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우들끼리는 송사하지 말라는 6장의 당부도 있었습니다. 8장 10장은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1장에는 여성도님들에게 당부하는 편지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8장에는 마게도냐 교회를 자랑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장에는 가난한 성도들의 헌금에 대한 문제도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따라해야 합니다.
바울이 터를 닦은 방법은 한마디로 은혜를 따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한 것입니다. 저의 좌우명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없으면 못합니다. 힘듭니다. 짜증이 납니다. 피곤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있으면 힘이 납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자꾸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독수리와 같이 올라가는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을 모두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용서해 주시고 들으세요.
저는 설교할 때 원고를 보지 않고 하는 것이 더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성경만 보면서 설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오후 예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목사님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주일 오전 예배에 원고를 써 가지고 설교하는지 아십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저는 이 설교 준비를 하면서 제가 먼저 은혜 받습니다. 그리고 왜 제가 원고를 보면서 설교하면 그냥 하는 것에 비해서 잘 못하는 것 같고 여러분이 은혜 못 받는 것 같이 느끼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제가 욕심이 많아서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부모님이 맛있는 것 있으면 자식에게 다 주고 싶지 않습니까? 이것도 먹어보라고 하고, 저것도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은 부모님의 그 심정을 배불러 죽겠다고, 비만 된다고 화만 내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제가 먼저 말씀에 은혜를 받다보니까 왜 설교시간은 꼭 1시간 안에 마쳐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1시간이 지나면 그 때부터는 은혜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시험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 목사가 주책이라고 할까봐 짧게 마쳐야 쿨한 목사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선교지 중국 같은데 가서 있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 훈련 잘된 것 하나 중에는 몇 시간을 해도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책상에 않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쁜 소식(복음) 듣고 오신 분답게 은혜가 충만한 기쁨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 중에 하나가 기쁨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기쁘게 사십시오. 이것이 은혜입니다.

건축은 좋은 자제를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터가 좋다면 반드시 그 자제도 좋은 것으로 사용하여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만일 서울 한 복판, 제일 값이 많이 나가는 명동에 싸구려 자제를 사용하여 철판으로 공장을 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요즘 하는 말로 “명동 땅을 두 번 죽이는 겁니다” 그 비싼 땅에는 그곳에 알 맞는 좋은 자제를 사용하여 집을 지어야 합니다.
제가 싱가포르에 갔을 때들은 이야기입니다. 싱가포르는 땅이 아주 작은 섬입니다. 그것도 일본처럼 자꾸만 바다 물이 올라와 앝은 땅은 자꾸만 침몰되어 갑니다. 한마디로 땅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귀하고 비싼 땅에 건물을 함부로 지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부가 정한 법은 30층 이상의 건물만 허용하고 또 건축양식이나 디자인이 독특하여 지금까지 어디서 본적이 없는 특이한 건물만 허락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어야 할 터는 그럼 얼마나 소중한 터입니까? 예수님이 피로사신 값으로 따질 수 없이 귀한 터입니다. 이 귀한 터 위에 쓰레기 같은 집을 지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 귀한 터 위에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집을 짓는다 생각하십시오. 또 반드시 우리가 짓는 집은 제일 귀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앙교회는 그러한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불로 그 “공력”을 각각 불로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에는 “공력”을 “작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은 집은 불로 시험을 당합니다. “불”로 심판하기 때문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좋은 것으로, 풀이나 짚은 나쁜 것으로 비유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없어지지 아니할 귀한 것으로 지으라는 것입니다. 세상 학문이나 명예, 물질 등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지은 집은 불에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인 성막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5:9절에 보면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지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제일 귀중한 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이십니다.
그리고 그 터 위에 또 제일 소중한 집을 지어봅시다.
누가 따라할 수 없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달란트 대로 멋있게 지어봅시다.
이 집을 지을 생각에 잠이 안 옵니다.
가슴이 설래 입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아름다운 집은 처음이다. 너무 아름다워 이 집은 영구히 보존하리라”는 칭찬을 받으시는 주앙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1.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 /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흔히 약장수들이 약을 선전할 때 그 약이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합니다. 우리 나라에 제일처럼 대일밴드가 나왔을 때 이것을 가지고 시골을 다니면서 판 약장수가 있는데 이것을 아픈 곳에 부치기만 하면 심지어 배아픈 것까지 낫는 것으로 선전했습니다. 우리 성도에게도 만병통치약 같은 것이 있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만병통치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으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 없는 자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교만하면 그것은 도리어 믿음이 없는 것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믿음은 겸손입니다.

어느 목사가 대중들 앞에서 설교를 한 뒤 무척 우쭐해 졌습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목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듣기에도 자기의 설교가 꽤 근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목사는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넌지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 세상에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 것 같소?” 그러자 아내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당신이 생각하는 숫자보다 한 사람이 적을 것 같아요”

저는 먼저 교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전재하고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합니다.

주님은 믿음 없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언제가 한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어린아이가 엄마와 함께 탔습니다. 그리고 엄마 이거 “엘리베이터지”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내리지도 않는 여러 층을 누른 것입니다. 그때 옆에 있는 엄마가 “너 그러지 말랬지!”하고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혼을 내 줘야지!”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하는 말. “엘리베이터가 뭐야 다시 해봐! (혀를 둘려가며)엘리베이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영어공부보다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바르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교육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근본을 위해서 교육하시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단순히 히브리어, 아람어 발음이 좋지 않다고 꾸짖으신 것 아닙니다. 그런 것을 교육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핵심 교육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 눅 12:28)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고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실제의 생활 전체를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마 16:8)고 하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당연히 염려할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제자들은 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축사하시고 5천명을 먹이신 일과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신 일을 경험한 후였습니다. 그런데도 갈릴리 바다건너(마가단 지경)로 예수님과 함께 간 제자들은 떡이 없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간질들린 아이를 제자들 앞에 데리고 왔는데 고치지 못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마 17:17, 막9:19)하시고 고쳐 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마17:20에서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도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6:14)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일 많이 그리고 자주 꾸짖으셨던 것은 이빨 안 닦는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운동 안 한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것을 책망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일 좋은 교육의 효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칭찬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잘 알고 계셨으며 바로 그러한 일을 만나자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마8:5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때 한 백부장이 나왔습니다. 백부장이란 자기가 거느린 군병이 100명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중풍병 때문에 주님께 나아와 고쳐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7절에 “가서 고쳐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내 집에 주님이 오시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면서 “말씀만 하시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내 부하들도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간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 한마디면 하인의 병은 고쳐질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눅 7:9)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모두가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믿음입니다.
믿음은 누가 만듭니까?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부모님이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면 교육적인 효과로 자녀에게 믿음을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본입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가고있었습니다. 너무 좋은 차라 시골에 가면 번쩍번쩍 빛이 나던 그런 시절입니다. 길을 물어보려고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노인과 아이가 섰습니다. 그런데 차에 타고 있던 젊은 부인은 왜 심통이 났는지 “진주로 가려면 어디로 가요.”라고 반말 투로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노인과 소년은 “저리로 고개를 돌아 좌측으로 가면 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젊은 부인은 “진짜 그리로 가면 진주 나와요”라고 물었습니다. “예 그리로 가면 진주가 나옵니다.” 거짓말 아니지요. “예 아닙니다” 그리고 젊은 부인은 “당신들 거짓말시키는 거지”하면서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그러더니 가르쳐준 방향대로 안가고 자기들 마음대로 뒤돌아 갔습니다. 그곳은 삼천포가는 길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렇게 됩니다. 화는 자신이 내고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주 찾아가는 길이야 가다 잘못가서 삼천포면 다시 돌아가면 되겠지요. 하지만 천국가는 길은 그럴 수 없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있으면…
1) 믿음은 곧 능력입니다.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눅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 말씀들은 믿음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막 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눅 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눅 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예수님께 병을 가지고 나왔던 사람들은 병만 고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너를 구원하였으니”라는 말씀입니다. 병은 잠이 나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병 고침과 구원의 문제는 별개입니다. 오늘날에는 병원에 가면 어지간한 병은 다 낫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 사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냥 육체의 병만 일시적으로 나은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죄 사함, 구원”해 주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치유는 완벽한 것을 의미합니다. 일시적인 치유가 아님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도 이와 같은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을 가지려면
주님께 부탁하십시오. 그분에게 먼저 구해야 합니다. 제자들도 주님께 구했습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눅 17:5)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물론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믿어주셨습니다. 즉 부족한 것을 알면서도 믿어주신 것입니다. 믿음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해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믿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도들간에 용서와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인디언 마을에 ‘너구리 잭’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불평과 불만이 많이 너구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디언 마을 계곡에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너구리 잭도 이 교회에 다녔습니다. 이 교회에는 신앙고백 시간이 있었는데, 말하자면 성령이 강림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일어나 일종의 짧은 간증(고백)을 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 시간에 너구리 잭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몇몇이 내 등뒤에서 나를 놓고 쑤군거린다는걸 알고 있어. 난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구. 당신들이 뭣 땜에 그러는지 알아. 교회 임원 모임에서 내게 찬송가 상자 열쇠를 맡긴 게 샘나서 그렇지? 좋아 그렇다면 모두들 잘 들어.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당장 나오라구. 내가 가진 걸로 해결해 줄테니.”
너구리 잭은 미친 듯이 발을 쾅쾅 구르면서 사슴가죽 셔츠를 확 저치더니 권총 손잡이를 두들겼습니다. 금방 교회안에서 총을 쏘지는 않겠지만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할아버지 한 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너구리 잭에게 말했습니다. “잭 자네가 찬송가 열쇠를 어찌나 잘 간수하는지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감탄하고 있어. 행여 자네 기분에 거슬리는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일이 있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슬퍼할 걸세.” 너구리 잭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풀리는지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제야 휴! 하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할아버지 손자가 물어보았습니다. “너구리 잭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너도 알다시피 체로키족(인디언 부족 이름)이 고향에서 쫓겨나 오클라호마 주로 강제이주당할 때 너구리 잭은 혈기 왕성한 젊은 이었다. 잭은 산속으로 달아나며 열심히 싸웠지. 그러는 동안에 남북전쟁이 터졌는데, 잭은 이번에 연방군(북군을 말함)을 물리치면 땅과 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고 열심히 싸웠는데 결과는 패배로 끝났지. 전쟁이 끝나자 이제는 정치가들이 들어와서 남아있던 얼마 안 되는 것 가지고 또다시 싸웠지… 너도 알다시피 너구리 잭은 평생 싸운 것 밖에 없어. 이제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이 찬송가 열쇠란 말이다. 이제 잭은 그것 밖에 남은 것이 없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소년은 너구리 잭 아저씨가 좋아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지난 15일에 했습니다. 투표 결과에 대해서 마음에 드시는 분, 안 드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반목만 하고 상대편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넓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다 그분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성향이 생긴 것 아닙니까?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고 칭찬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부활(2)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0. 부활(2)이신 예수님 / 요 11:25

“25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할렐루야!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여러분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인터넷에서 ‘부활’이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가수그룹 이름이 ‘부활’이 있나 봅니다. 그 분들 앨범과 기타 내용들이 검색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이 ‘패자 부활전’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또 활동을 그만 두었던 연애인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로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스포츠 선수들이 다시 돌아와 예전처럼 잘할 때 ‘부활했다’고 사용했습니다. 부활은 어쨌든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런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인간에게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죽음을 막는 일입니다. 혹 조금 더 늘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히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KBS TV에서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의학다큐 프로그램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첫 번째로 ‘성장호르몬, 현대판 불로초인가’로 시작하여 59번 째 2004년 4월 6일 “수명을 단축시키는 세 가지 – 제 1편 『설탕』”까지 진행되었습니다.
20세기 의학은 수많은 질병치료법을 내어놓았고, 인간의 평균 수명을 43세에서 77세로 두 배 가까이 늘려놓았습니다. 그리고 21세기, 학자들은 인간의 한계수명을 120세, 혹자는 150세까지 예상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고령이 되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람이 먹고, 자고, 활동하는 하는 우리 삶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통해 ‘건강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한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은 4번째로 방영된 ‘고기 먹어야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방송입니다. 제가 아는 상식과 세계의 장수마을에서 장수 노인들을 조사한 것에 의하면 소식과 채식을 많이 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프로그램에서 말하는 것은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키는 것 말하는 것 다 지키려면 그것 신경 쓰다 더 먼저 죽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력화시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절대적 위력을 갖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향하여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라고 큰 소리 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죽음을 무력화시키고 사람들을 거기서 풀어 자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 복음은 구체화되어 세계 속에 놀라운 희망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그저 보고만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그렇게 유심히 보시겠습니까? 그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전도서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이 세상의 지긋지긋한 생을 마감하게 되어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즐겁지 않았던 고통스러웠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태양이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비추는 하나님의 진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활의 영생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죽는 날이 절대로 낮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오직 주 안에서 죽을 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천국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은 이 죽음 말 그대로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보다는 “부활하시기 위해서 가셨다”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장례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천국 환송회”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해리 리머(Harry Rimmer) 박사가 어느 날 회교도인 이집트 정부의 한 고위관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회교도 관리는 “우리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리머박사는 또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회교관리는 “우리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리머박사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책 곧 성경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책 곧 코란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셨다고 믿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리머박사는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관리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언자 모하메드를 통하여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리머박사가 말하기를 “우리는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회교 관리는 “우리는 모하메드가 그의 백성을 위하여 죽은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리머박사가 말하기를 “우리는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스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그의 말씀을 실제로 증거 하실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하자 회교 관리는 “우리는 죽은 이후의 우리 예언자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정복하고 무덤을 이기신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거기에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수치와 불명예의 상징인 십자가를 승리의 상징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 놓여 있었지만 무덤이 그를 가둬 놓지는 못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종교”일지는 몰라도 “생명과 구원”은 아니며, 부활 신앙이 없는 기독교인은 “교인”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이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스스로를 “부활”(요 11:25)이라고 칭하셨고, 제자들도 자신들을 “부활의 증인”(행 1:20)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부활은 단순하게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모든 것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 살리는 역사는 죽음 이후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장차 영생할 뿐만 아니라, 만나는 그 순간 깨진 꿈이 회복되고, 지친 몸이 치유되며, 상한 마음이 위로 받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이 충만하면, 어떤 환경과 여건에서도 산 소망과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롯유다를 대신하여 한 명의 제자를 뽑기로 할 때 사도행전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행 17:18)
“복음” 그것은 죽음에서의 부활이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복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영국을 여행하던 한 여행객이 해안지방을 지나가다가 많은 갈매기들이 모래사장에 죽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다는 청정했으며 갈매기들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기에 분명 예사 죽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행객은 죽은 갈매기들을 치우고 있는 한 사람에게 죽음의 원인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그는 “이곳에는 여행객들이 많이 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갈매기들에게 과자와 사탕 등 맛있는 먹이를 던져줍니다. 그것은 갈매기들에겐 해로운 것이지요. 갈매기들이 이 맛있는 먹이들을 받아먹다가 그만 자연먹이에 대한 식욕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답니다. 철이 지나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갈매기들은 그들에게 좋은 바다 속의 많은 먹이를 놔두고 여행객들이 음식만을 기다리다 굶어죽고 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들은 때론 너무 달콤하여 우리 몸과 영혼의 배고픔과 갈증을 채울 수 있는 좋은 양식들을 잊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주는 향락은 잠시 우리를 즐겁게 해 줄지는 모릅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 잠시 우리를 편안히 쉬게 해 주는 것 같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잠시입니다. 그날은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노인이 정원에서 묘목을 심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는 도대체 언제쯤이나 그 나무에서 열매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노인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무래도 70년은 지나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다시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 그렇게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다시 대답을 하였습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소. 내가 태어났을 때 과수원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소.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님이 나를 위하여 어린 나무를 심어 놓았기 때문이오. 그것과 똑같은 일이지요.”

저와 여러분들의 남은 생애를 주님께 드립시다.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전도하고 선교하시기를 오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참고] 부활에 대한 성구
(마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마 22: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1) 죽은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마 27: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막 12: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막 12: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눅 14: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눅 20:27)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이들이 와서
(눅 20:33)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눅 20: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눅 20: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행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 2:31)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4: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행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 17: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행 17: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 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행 23: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행 24: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행 24:21)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고전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 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 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딤후 2: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히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히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계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십자가상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9. 십자가상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 / 눅 23:33-46

A. D. 33년 4월 초순 금요일 일기 화창한 어떤 봄날 예루살렘성 밖으로 세 사람의 십자가의 죽음 행렬이 엄숙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요, 아람어로 된 말을 해석하면 해골이란 동산인데 여기까지 와서 각자가 메고 온 십자가에 이 세 사람을 달았습니다. 그 중에 중앙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7곱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시기 전에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몹시 지쳐있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져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게 할만큼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한계를 보이고 계셨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밑에 따라왔던 마리아 및 사람들에 의해서 이 말씀은 낱낱이 전하게 되었고 오늘 우리가 보는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오늘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실 수 있습니다. 멀리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와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놓치지 않고 들었던 갈릴리 사람들과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를 바랍니다.

첫째 마디 :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 이니이다”(눅 23:34)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기간 내내 외치셨던 말씀이 용서와 사랑입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혹 악을 40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8-44)
자신을 죽이는 자들은 지금 몰라서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죄가 얼마나 중한지도 모릅니다. 만일 예수님이 용서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그 죄책감에 모두가 온전히 이 세상에 남은 생애를 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죄인의 몸으로 제일 비참한 상태에 계십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남을 구원한다고 비방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내려오 보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소리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사하여 주옵소서”의 원문 ‘압히에미’는 “울부짖다, 용서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다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울부짖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둘째 마디 :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고 했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이요, 비판적이요, 야욕적인 말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현재도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주관적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강도처럼 비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지금도 강도처럼 죽어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만 중앙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구원을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영원한 천국의 주인이십니다(계 22:1-6).

셋째 마디 : “예수께서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
십자가에 달리신 상태에서 예수님의 얼굴은 땀과 피범벅이 되어있어서 눈을 바로 뜨기도 어려웠습니다. 쓰라림을 참으시며 눈을 뜨신 예수님께 어머니 마리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어머니는 떠날 수 없었습니다. 죽더라도 함께 죽겠다는 것이 어머니 아닙니까?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였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어린시절 어머니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애타게 찾았습니다(눅 2:41-51). 예수님께 이런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부터 기억이 필립처럼 돌아갔을 것입니다. 바로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어머니 마리아를 지금도 부탁하고 계십니다.

넷째 마디 :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 46)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뇌에서 비롯된 절규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정죄를 당하고 허물없는 자가 박해를 받으며 은혜 베푸는 자가 잔인하게 죽어 가는 일이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는 순간 주님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더 할 말씀이 없고 성경에 응하기 위한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이런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은 인간의 죄를 사하는 순간입니다. 잠시 아들의 모습을 외면하셨지만 우리에게 놓인 장막을 걷어내는 순간이었습니다.

다섯째 마디 : “내가 목마르다”(요 19:28)고 하셨습니다.
육체를 입고계신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제자들 중에 유일하게 십자가 밑에 있었던 요한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섯째 마디 : “다 이루었다”(요 19:30)
원문의 ‘텔레오’는 “완수하다, 결론짓다, 완전히 하다, 청산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창세기부터 아담의 죄 때문에 내려오는 죄의 고리가 단절되었습니다.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새겨야 합니다. 아담의 죄 그것은 우리의 죄였습니다. 이제 마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마쳤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죄를 짊어지고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직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않은 분들입니다.

일곱째 마디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예수님은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는데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 14, 16장), 요한복음 17장에서 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아버지란 명칭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아버지 손에 맡기고 부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 11시가 넘어서 우리집 옆 아파트에서 싸우는 소리가 났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싸우는지 여자들 엉엉 우는소리와 무엇을 집어던지는지 소리가 났습니다. 저는 자려고 누웠다가 옷을 빨리 챙겨 입고 나가보았습니다. 딸이 얼마나 잘못한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딸을 마구 때리며 엄마는 소리를 지르고 말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너무 딸을 때려서 일단 우리 집으로 피신시키고 제가 그 아저씨에게 가서 “진정하시고 좀 마음을 가라앉히세요.”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파트 복도에 흩어진 책과 노트들을 담아서 갖다 주었습니다. 잠시 후 진정이 되었는지 동생인 아들을 보내서 데리고 오라고 아빠가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런 마음으로 “가서 아빠에게 잘못했다고 말해라 다 너희들 잘 되라고 그러시는 거야”라고 부탁하고 보냈습니다. 보내 놓고도 한참을 불안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침에도 그 집을 한번 쳐다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심하게 책망하고 때렸지만 아버지입니다. 이 딸은 무슨 잘못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렇게 화가 나셔서 딸을 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이 아무 잘못도 안 하셨는데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아담보다 더한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보다 더한 고충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시는지 아십니까? 온 천하를 얻은 것 보다 더 기뻐하십니다(마16:26)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통,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순간 그 모든 고통은 제일 값진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마지막이 다 되어 갈 때에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주님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스데반과 같은,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실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독생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8. 하나님의 아들(독생자)이신 예수님 / 본문 요 1:14-18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4-18)

성경을 한마디로 어떤 책이냐고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또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기에, 그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산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말씀 중에서도 그 핵심인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하고자 합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제가 왜 증거 합니까?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믿지 않는다면 저의 말씀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잘 몰라도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은 꼭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저는 앞으로도 이 설교를 자주 할겁니다. 그때마다 “목사님 한 말씀을 또 하시네” 그러지 마십시오. 또 하는 것이 아니라 늘 해야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침 먹었다고 점심 안 먹습니까? 어제 밥 먹었다고 오늘 안 먹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증거 해야할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이신 성부와 성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고 구약성경 미가가 예언했습니다. 때가 되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지만 그분은 원래 태초부터 계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자신의 복음서의 시작을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제일 많이 사용된(2700번 이상) ‘엘로힘’은 복수 대명사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묘사하는 동사로도 사용됩니다. 마치 한 사람 이상이 일하는 것과 같은 기묘한 동사로 사용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개인, 다수 어느 편이건 이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말하는 유일신 하나님은 한 인간의 능력을 완전히 능가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문 하나가 요 17:21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믿게 하시려는 이유가 요 3:16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멸망치 않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영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믿지 않으셔도 관계없습니다. 그러나 멸망하는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하시기를 원하신다면 반드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증거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요 8:18)고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혼자서 말씀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증거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두 번의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났음을 증거 합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2)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성경의 사건들을 너무 의미 없이 그저 소설을 보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현상이 더 두드러집니다. SF영화 같은 것이 많아 성경을 볼 때도 무의식중에 그런 것처럼 취급합니다. 또한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의 많은 내용들은 현실이 아닌 것입니다. KCM에서 만드는 전돌이의 성경여행이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만들면서도 걱정되는 것이 혹 어린이들이 다른 SF애니메이션이나 동화 이야기 정도로 생각할까 걱정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것은 SF영화가 아닙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의 사람들과 제자들은 모두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거짓이었다면 당시에 그것을 본 목격자들이 살아있을 때인데 마태나 다른 제자들이 거짓으로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거짓이었다면 오늘날까지 성경으로 내려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본문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원문으로는 [결코 보여주신 적이 없는 하나님]입니다. 물론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시내 산에서 대면했습니다(출 33:11, 신 34:10) 하지만 하나님의 본체를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출 33:17, 34:9). 유한하고 죄인인 사람이 하나님을 보면 죽습니다(출 33:20).
그러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품속에서 오셨습니다.

제가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 책인데 요즘 다시 읽고있습니다. 미국에서 작은 고전으로 평가받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입니다. 인디언의 산속 생활에 대해서 할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저자(포리스트 카터:Forrest Carter)가 쓴 것입니다.
내용 중에 ‘빨간여우 슬리크’가 나옵니다. 여우는 잔꾀를 부리지만 인디언인 할아버지는 여우의 모든 것을 알고있습니다. 여우는 자기 집에서 1.5km을 벗어나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사냥개가 따라오면 자기 집을 가운데 두고 원을 그리며 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을 점점 줄여가며 자기 집에 다가갑니다. 이 사실을 알고있는 인디언 할아버지는 여우 집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우는 진흙땅에 발자국을 남겨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도 하며 혼자서 잔꾀를 부립니다. 한번은 나무 뒤로 여우가 숨더니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여러 마리인 것처럼 속이고 갑자기 통나무 뒤에서 튀어 나와 저쪽으로 쭉 달아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냥개들은 속아서 그쪽으로 쭉 딸아 갔지만 여우는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통나무에서 쿨쿨 코를 골며 자고있는 여우를 발견했습니다. 이 여우는 인디언 할아버지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믿든 안 믿든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고백
초자연적인 현상도 있었지만 제일 가까이 에서 예수님과 함께 동고 동락 했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두 제자는 우리에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내가 직접 보지 못했다고 믿지 않으려고 한다면 예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기록들은 하나도 믿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있었고 세종대왕이 있었고 징기즈칸도 있었다고 믿는 다면, 먼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해야 구원받습니다.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이 말씀은 예수님의 단순한 경고가 아닙니다. 구원의 길의 열쇠를 바로 ‘믿음’이라는 것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공부해서, 도 닦아서, 아니면 운동경기해서 천국에 간다면 저 같은 사람은 큰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래서 오늘본문에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은혜와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를 비교하여 (에겐토) “왔다”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한정적으로 주어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은혜는 율법의 모든 부족한 영역을 완성하는 마침이 되는 것입니다.
16절의 “은혜 위에 은혜러라”의 ‘…위에’로 사용된 (안티)는 “때문에, 그래서”로 사용되는 전치사인데 여기서는 ‘은혜에 응답하는 은혜’라는 뜻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요구를 계속해서 채워주는 한없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고후 6:2, 7:9).
뿐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을 가지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이것이 실감이 안 나시는 분들이 있나본데, 한치 앞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의 명예와 물질이 부족하다고 혹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은 포기하고 그것을 쫓으시겠습니까? 그런 어리석은 분들이 우리 주앙교회에는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을 그냥 주십니다. 요 근처 마트에 보니까 무슨 세일을 그렇게 자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일 싸게 파는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하면 밤 10시 넘어서 싸게 파는 물건이 많이 있습니다. 하루를 넘기면 상하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려고 열심인 아줌마들이 싸게 팔 것 같은 곳에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주 그냥 주는 것 아닙니다. 조금 싸게 팔 뿐입니다.
그런데 구원받는 것은 돈이 안 들어갑니다. 믿기만 하시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그 고생을 하신 것은 순전히 나를 위한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주님께 돌아올 때 주님은 온 천하를 얻으신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가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잔뜩 선물을 준비하셔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가나안 땅은 천국으로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에 못 들어간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출애굽기 20:12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1931년, 85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한평생 천 가지 이상의 훌륭한 물건을 발명한 발명왕이 아닙니까? 그에게 기자들이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노인이 되어서도 정열적으로 일 하실 수 있는 겁니까?” 그 노인이 대답합니다. “믿음입니다. 영원에 대한 믿음이 저로 하여금 이렇게 현재의 삶을 더 충실하고 만족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는 믿고 있습니다. 죽음은 현재에서의 출구요, 영원으로 향한 입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이에게 상주실 것을 믿어야 할 지니라”(히 11;5) 이 모든 축복을 받으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7.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 / 본문 :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오늘 본문 말씀인 창세기 3장 15절을 가리켜 흔히 원시복음 또는 최초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지금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범죄를 한 직후에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고 있는데 하나님은 하와에게 해산하는 고통을 말씀하시기 전에 오늘 말씀을 주셨어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인간에게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을 언급하신 것이기 때문에 최초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수많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의 말씀 중에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5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히 10:5-7)고 하셨습니다. “두루마리 책”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창 3:15로부터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모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성육신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한 절은 없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3장 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사단은 여자를 먼저 꾀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가 꾀었습니다. 남자 분들 지금도 여자가 남자를 꼬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여자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남자도 죄를 피할 수는 없게 되었고 또한 그 책임이 하와와 같으나 분명한 것은 여자를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자가 최초의 범법자이기도 하지만 그를 통해서 죄가 사해질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4)이라고 하셨습니다. 동정녀 여자를 통해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여인의 몸을 통해서 나셨지만 하나님이 직접 잉태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요즈음은 생명공학이 발전하여 DNA만 가지고도 사람을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사람이 씨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몸을 빌릴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는 상태의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의 아들이 동시에 되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고난 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사단에 의해서 고난받을 것을 예언해 주신 것입니다. 원문의 “발꿈치, 아케브(bqe[)”는 “끝 부분, 후미, 마지막의”의 뜻으로 사단에게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와 비교한다면 상처를 받기는 하지만 치명적이지 않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시련이 지속될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마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인성을 상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 됩니다. 사단은 광야에서 시험할 때부터 바로 예수님의 인성을 파고들은 것입니다. 즉 인간으로 오신 육체의 약점을 노리고 시험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러한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신체를 상하게 하셨으나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신 결과였지 사단의 시험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실제로 예수님의 발꿈치가 손상을 입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예수님의 육체(인성)을 상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것이었습니다.

셋째, 사단을 이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은 일시적으로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반대로 사단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머리, 로쉬(varo)”는 신체상의 머리도 의미하지만 “시작, 높은, 통치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특히 뱀은 머리 빼면 없습니다. 나머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뱀의 머리를 짓이긴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사단을 멸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이며 동시에 그의 피를 이어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와 성도들을 신부로 말합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롬 16:20)
사단은 우리도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단에게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일으킴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으로부터의 승리도 우리 것입니다. 사단은 다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단에게 질질 끌려 다니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단은 이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는 것만 남겨두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께는 12제자 말고 70인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전하고 돌아와서 주님께 한 말이 있습니다. 눅가복음 10:17입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고 하셨습니다.
사단을 이기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사단은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달되지 않은 곳은 사단이 판을 칩니다.
저도 이제 상당히 무감각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처음에 선교지를 방문해 보았을 때는 정말 정신이 들었습니다. 태국에 간 일이 있습니다. 길거리마다 집안에 우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다 치워버리고 싶었습니다. 타이완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우상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어디 그 두 나라뿐이겠습니까?
애굽은 한 시대와 그 주변에서 그 힘을 크게 과시하시는 맹주였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제일 가는 군림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19장에 보면 그들의 지혜는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하는 자에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과 애굽은 쇠퇴하다가 결국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의 멸망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어 왕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영광과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신으로 에언도 하였습니다.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물론 그의 자녀들과 후손까지 나아가 나라까지 전쟁에 패배라는 치명적인 오명을 남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대상10:13에서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신접한 여자를 찾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패망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처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성전도 건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년에 가서 그의 여인들로 인하여 우상을 숭배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듭되는 경고를 듣지 않는 성도가 되므로 인하여 그의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왕상11:4-5).

여러분! 복음만이 이 우상을 치워버릴 수 있습니다.
제가 우상을 파괴하려고 생각한 것처럼 실제 우리 나라에서도 우상을 파괴하다 경찰서에 넘겨진 목사님도 있었습니다. 물론 보이는 우상을 부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 마음이 안 일어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 우상을 없애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제 사단은 힘을 잃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주님은 지금도 “사단이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기쁜 일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그저 우리교회가 이 지역에서 조금 부흥이나 해보려고 선교하자는 것 아닙니다. 또한 교회의 돌파구가 없어서 선교를 부르짖는 것도 아닙니다. 선교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사단을 소멸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취소된 것은 아닙니다.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이 제대로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조금만 힘을 내 봅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다만 우리의 순종을 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선교하려고 나설 때 성령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결국은 그분이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누님 집에 다녀왔습니다. 매형이 이제 시골집에서 소나 키우면서 살겠다고 시골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진돗개라고 누가 갖다 줘서 키우는데 개를 끌고 산책을 나갔다 개가 나무에 끈이 말려 그것을 풀어주려고 하다가 개에게 물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3주 동안을 고생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양은 어떤지 아십니까? 우리 나라는 양을 많이 키우지 않아 털깍는 기술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여름을 지내야 하니까 양의 털을 깎으려고 어떤 분이 기계가 없어서 가위로 깎았다는 겁니다. “깎는데 이걸 붙여 깎다 보면 살을 잘라 내는 거예요. 안 그러려고 해도 잘리는 거예요. 그래도 양은 깜짝 깜짝 놀라면서도 그냥 누워 있어요. 끝까지 누워 있어요.” 개 아니라 다른 동물도 자기 살을 찝히면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양은 가만히 있더라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은 바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도 못 박히면 아픕니다. 예수님은 이 양처럼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을 기억하시면서 복음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으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6. 아름다운 옷을 입으신 예수님) / 본문 : 슥 3:1-5

“1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슥 3:1-5)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있을 일을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이며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520년 전에 스가랴를 통해서 미래에 있을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스가랴가 이 말을 할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힘겨운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직후여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성전건축이 힘겹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거기다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여 중단되었던 것을 다시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백성들이 쉽게 따라주지 않자 스가랴가 백성들을 독려하려고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스가랴를 통해서 560여 년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예언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스가랴가 본 네 번째 환상 부분입니다.
본문 말씀은 사단이 여호수아를 고소하고 이에 대해서 여호와의 사자가 변호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제사장 여호수아로 나타난 분은 대제사장직을 담당한 분으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의 ‘여호수아’는 헬라어 발음 ‘예수’라는 말과 같은 말이며 구원자를 뜻합니다. 즉 오늘 본문 말씀은 오실 메시야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한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3, 4절에서 옷에 대해서 나옵니다. 오늘 이 옷에 대해서 이해하면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됩니다.
우리는 흔히 “옷이 날개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사람은 옷 입은 것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37:23-24에 보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꿈꾼 것을 말하자 시기하여 채색 옷을 벗기고 죽이려고 구덩이에 집어넣은 것이 나옵니다. 이 때 요셉의 옷이 벗겨진 것입니다. 즉 그가 입었던 채색 옷은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조선시대 때의 양반 집 자식들은 색동옷을 입었습니다. 한국속담에 “옷은 시집 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자가 제일 옷을 잘 입었을 때는 시집올 때라는 말입니다. 영국속담에는 “신사를 만드는 것은 옷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내지만 결코 교만하면 안됩니다.

옛날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그의 보좌 옆에 작은 궤 하나를 놓아두고 날마다 한번씩 그 궤를 열어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왕이 그 궤 속에 보화를 감추어두고 날마다 그 보화를 확인하느라고 궤를 열어본다는 소문을 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왕은 신하들을 불러다 놓고 그 궤를 열어 보여주었습니다. 그 속에는 양치기의 옷 한 벌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전에 가난한 양치기였었습니다. 왕이 된 다음에도 교만해 지지 않으려고 목동시절에 입었던 옷을 매일 한번씩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매일 과거에 입었던 양치기 옷을 매일 한번 씩 보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9장에는 제사장의 옷에 대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제사장의 옷을 어떻게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옷을 입은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사하는 예식을 행할 때 입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레 10: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제사장의 옷을 찢는다는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되는 금지령이었습니다. 만일 찢는다면 당연히 그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옷은 깨끗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출 19:10)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옷을 빨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 가운데 시내산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구름과 빛을 본 그 날이 성결하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의 옷을 빨 것을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레위기 14, 15장에 보면 하나님은 각종 질병과 관련하여 옷을 빨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즉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면 각종 전염병에서 깨끗케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민족과 유대인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유리 민족은 수시로 옷을 빨고 정결한 상태를 유지해 왔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전염병의 발병원인을 보면 한마디로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집 입구에 언제나 씻을 수 있는 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씻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기 전에도 반드시 손을 씻습니다.
여러분 음식을 먹다가 흘리면 어떻게 합니까? 밥 먹을 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잘 흘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너는 턱이 빠졌냐?”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잘 넘어지기도 하지만 잘 흘리기도 하고 한마디로 집사람 표현대로 부실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잘 압니다. 음식을 먹다 흘려서 옷을 더럽혀도 깨끗하게 씻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의 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씻어야하지 않습니까? 음식물이 조금 옷에 묻어도 깨끗하게 씻는 우리들이 어찌 더러운 죄를 씻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저희 누님은 초등학교 6학년 개근했습니다. 저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저는 팔이 삐어 수시로 학교를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누님이 한번은 신발주머니에 흑이 묻었다고 버리고 온 것이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1-2학년쯤 되었을 때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일로 어머니는 몹시 화를 내시고 당장 신발주머니를 찾아오라고 호통을 치셔서 누님은 울면서 학교로 신발주머니 찾으러갔습니다. 초등학생의 생각으론 신발주머니에 흙이 묻었으니 더럽다고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레위지파가 입고있는 제사장 옷이나 유다지파가 입고있는 갑옷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신분에 맞는 옷입니다. 문제는 신분의 의미보다는 우리 옷이 깨끗해야 합니다. 국회의원 옷 입고 더러운 것보다는, 사장 옷 입고 더러운 것보다는, 교회의 각종직분의 옷 입고 더러운 것보다는 그 옷을 입지 않고 깨끗한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제사장의 옷을 찢거나 더럽히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입은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더렵혀져 있다면 빨리 씻어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자였는데 사람들이 보지 않는데서 온갖 나쁜 일을 일삼고 다니는 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에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독실한 신자 행세를 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그 두 형제의 거짓된 마음을 꿰뚫어보았습니다. 또한 말씀을 아주 훌륭하게 전하셔서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새 예배당을 짓기 위해 헌금을 모금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형이 죽었습니다. 동생은 장례식 전날 목사님을 찾아와 새 건물을 짓는데 충분한 액수의 수표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목사님,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장례식 때 제 형이 훌륭한 성도였다고 이야기해주십시오.”
목사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수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장례식에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를 속이고 가족들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하지만 잠시 후 목사님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 동생에 비하면 훌륭한 성도였습니다“

여러분! 혹시 내가 이러한 거짓 성도의 옷을 입었다면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혹 사람들과 목사는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주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
본문 3절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옷’은 수치와 비난 거리가 되는 심각한 죄인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사 64:6)라고 했습니다. 죄로 가득한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히브리어 ‘더러운’의 초임(!yai/x)은 가장 간악하고 혐오스러운 성격의 더러움을 말하는 히브리어 중에 가장 강력한 표현의 단어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더러운 옷을 입고 서 계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이런 모습을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라고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을 마 27:31에서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에서 봅니다.
우리 죄악의 옷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그 초라한 모습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이 과정이 없이는 저와 여러분들의 죄는 사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난 후 예수님의 옷은 어떻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마 27:35)라고 했습니다. 로마 군병들에 의해서 제비 뽑혔고 군사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실제의 보이는 예수님의 옷은 비참할 정도로 찢겨진 채 몸에서 벗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입고 계셨던 이 세상의 옷은 더러운 죄악세상에서 우리를 대신한 죄의 징표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죄악의 옷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입고계신 것입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
마태복음 28:3절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원래 모습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우리의 죄를 인한 옷을 입고 계셨던 것입니다. 부활후의 예수님의 옷은 이 세상의 옷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이 옆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어찌 보면 옷을 안 입으신 것입니다. 이 옷은 이 세상의 옷과는 다른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 옷이 바로 스가랴가 예언한 본문 4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새 옷을 입으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죄악의 옷을 어린양의 피에 씻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에 씻어야 합니다.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들은 탕자이야기가 누가복음 15:11절부터 나옵니다. 아버지를 떠나 공생하다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고 했습니다. 돌아온 탕자가 입은 “제일 좋은 옷”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세상의 좋은 옷 색동옷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옷의 의미는 죄의 옷을 벗고 아버지가 입혀주는 의의 옷 사랑의 따뜻한 옷을 의미합니다.

몇 해 전, 미국의 한 조간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신문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어젯밤, 운명은 존 스미스에게 30초의 시간을 주고, 아내와 함께 죽느냐, 아니면 아내를 떠나서 혼자서 사느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하게 했다. 그런데 그는 죽음을 택했다.”
기사의 내용은 존 스미스 부부는 어둑어둑한 저녁에 산책을 나갔는데 이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두 사람은 철로 길을 걷고 있었는데 기차를 다른 쪽으로 가게 하는 전철기(轉轍機, point) 근처에서 미끄러지면서, 한쪽 발이 두 레일사이에 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발을 빼려고 해도 발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도와 힘껏 잡아당겼으나 고통만 더할 뿐 발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 급행 열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몇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지만, 금방 닥쳐올 위기 앞에서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있을 때 기차는 벌써 50미터 앞까지 왔습니다. 존 스미스는 한 팔로 아내의 얼굴을 감싸안고 그리고 다른 한 팔로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차를 향해 섰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다가오는 십자가를 스스로 지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입혀주시는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옷은 “11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히 1:11-12)고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입으셨던 눈과 같이 흰 그 옷입니다. 구원의 옷입니다. 이 세상의 더러운 죄의 옷을 벗고 십자가의 어린양을 통해서 입혀주시는 의의 옷으로 갈아입으시는 주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5.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 본문 : 마 9:9-13

“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9-13)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이 별로 실감이 안 나시는 분이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간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왜 의인이 아닌 죄인입니까?

우리 나라는 역사의 ‘친일진상규명법’을 2004년 3월 2일에서야 국회를 통과해서 그나마 역사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규명하여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게 했습니다. ‘친일진상규명’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모두 9명으로 구성되는 ‘친일 진상규명위원회’는 앞으로 3년간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편찬할 예정입니다.
‘친일진상규명법’은 일제시대 당시 일본군과 싸우는 부대를 토벌하거나 토벌하도록 명령한 행위와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살상하거나 체포 또는 이를 지시한 행위 등을 친일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학도병이나 징병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와 중앙의 문화기관이나 단체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황민화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와 침략의 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등도 친일 반민족행위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입법이 지금까지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친일의 잔재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이 친일파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겁내고 있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기록한 마태
그런데 마태는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을 누가 기록한 것입니까? 바로 마태 본인입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라고 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세리’는 창기와 같은 죄인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정부에 바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세리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악질적인 공무원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조선에서 세금을 걷어 일본에 바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마태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친일파입니다. 즉 친로마파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우리가 일본에 식민지 된 것처럼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알려지기가 제일 창피하고 부끄러웠을 것 같은 본인이 스스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그것도 성경에 버젓이 기록을 하다니 정말 이 사람 속된말로 간덩이가 분 사람 아닙니까?
마태가 이렇게 솔직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었던 용기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친일파가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것도 스스로 나는 죄인이라고 말하고, 고백하고 스스로 기록한다면 그 사람의 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인정하고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는 기록하는 것까지 자신의 손으로 그것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성경에 기록한 것입니다.

건강한 자가 문제입니다.
오늘 문제는 사실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한 마태와 세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랴”고 했습니다. 문제는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들이 상당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잘못이 없고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문제를 예수님께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죄인이니 예수님도 똑같은 것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공산주의가 태동할 때 러시아 중국에서 농민들, 서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억눌려 있던 감정을 모두 당시 고위급의 지도층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정권을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의인이요 부패한 정치인들은 죽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습니까? 정말 자신들은 부패 없이 잘 하고 있습니까? 우리 나라도 그렇습니다. 현 정권을 보아도 안타깝습니다. 386세대라고 말하는 분들이 전에 과오를 범했던 정치인들과 달리 청렴결백을 주장하면서 청와대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줄줄이 뇌물을 받고 연루되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작은 교회 목회를 하면서도 큰 교회의 문제점만을 들추어내어 말하고 자신은 크게되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는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크게되면 큰 교회가 안고있는 고민이 또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내가하면 더 잘할 것 같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인 한 두 사람이나 교회에서 목사 혼자 바르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돕고 격려하며 죄인임을 스스로 고백하며 진솔하게 노력할 때 하나 하나 바르게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고하셨습니다. ‘건강한 자’는 이수퀴오(ijscuvw)로 힘이 ‘강한, 완전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의 뜻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잘 관찰해 보면 어떤 사람입니까? 한마디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다른 나라를 침략합니까? 아닙니다. 교만한 사람이 침략하여 뺐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4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2-4)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도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고 했습니다. 건강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칫하면 교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큰 병을 앓은 적은 없지만 늘 골골댑니다. 어르신들 앞에서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가끔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쑤십니다. 저는 육체적으로도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건강 하시다구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체는 아주 연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조금 강하게 부디 치기만 해도 사망 아니면 중상입니다.

또 건강한 사람이 가진 생각은 무엇입니까? 의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의인이 가진 생각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 필요 없으신 것입니다. 교회 나오지 않는 분들의 생각을 보면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교회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타종교에 가서도 죄를 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가 알기로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해나 입히지 말고 복을 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를 닦는 것도 죄 사함을 받고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아직 수련이 부족하니 수련을 더해서 의인의 경지에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도를 닦으면 닦을수록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의인으로 완벽하게 되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건드릴 수 없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때 이러한 사람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병든 자’는 누구입니까? 어디가 많이 아픈 사람입니다. 의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교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은 힘이 없다고 인정합니다. 건강한자에게는 의원은 필요 없지만 사람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의원이 없으면 아픈 상처를 끌어안고 결국은 그대로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원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의원의 도움이 없이는 안됩니다.
바리새인들은 검사의 눈으로 죄인들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의사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의사는 사람이 병들었다고 해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사람을 볼 때 병들어 쓸모 없게 되었다고 소망을 끊지 않습니다. 의사는 병자에 대해 병만 치료해 주면 건강하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의사의 사명은 병을 치료해 줌으로써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 의사로서 죄인을 치료해 주심으로 살리러 오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주로 오셨습니다.

세관을 떠나 예수님을 따른 마태
세관 문에 앉아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강제로 걷고있는 마태를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은 그의 겉모양만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일 만큼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그도 부르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고 또 예수님을 따라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자 된 사람들의 행동은 예수님의 부름에 모두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마태 역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어부였다가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마태는 어부하고는 다릅니다. 비록 사람들의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그 자리는 돈을 만지는 자리고 싶게 놓고싶은 위치가 아닙니다. 미국에서 제일 정보화가 잘 이루어져 제일 좋은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국방연구소?, 미 항공 우주국?, 아니면 CIA? 아닙니다. 바로 국세청입니다. 세금을 징수하는 기관입니다. 당시에도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자리를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름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돌아 볼 것도 없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모두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데이비드 브레어너드는 “나는 설교에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말을 한번도 뺀 것이 없다.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한 사실을 깨닫는 자들에게 굳이 다른 교훈들을 가르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철학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는데 고상하게 포장하기 위한 필요한 약간의 액세서리나 옵션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해야 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선포하신 예수님
오늘 본문 앞 마태복음 9:2절에 중풍병자 고쳐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에게 죄 사함을 명했던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서기관이 깜짝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고 했습니다. 죄사함의 선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할 수 있느나?”고 하였습니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 선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주제넘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다고 예수님을 맹렬히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그들의 생각은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가 곧 죄 사하실 권세가 있는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 옆을 보십시오? 거기 보이시는 분이 죄인 갖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뒤를 보십시오? 보시는 분이 죄인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앞을 보십시오. 바로 저입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앙교회는 자칭 의인이 많기보다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성도가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의인이 많으면 피 바람이 일지만 죄인임을 고백하는 겸손한 자들이 많으면 평화가 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이제 죄의 문제는 더 이상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마태는 자신이 죄인임을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기록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간절히 의원을 기다리는 병자의 심정으로 우리 죄를 속하실 주님을 찾으시기를 그리고 마태처럼 속히 뛰어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