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1. 나의 길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14:4-6

성경에서 예수님은 약 100가지 정도로 예수님에 대해서 비유, 은유, 상징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금주부터 이러한 다양한 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을 하나 하나 설교해 가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또는 지루하다 하는 마음을 버리고,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라도 겸손히 주님의 음성을 기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전달할 때 그 어떤 주제나 제목보다 강력한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저희 주앙교회가 월요일에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작하는 설교를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평소에 다 알고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만 바로 알고 따라가면 우리의 신앙은 반석위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왜 예수님이 나의 길이 되시는지를 통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산에 올라갔다 길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숲 속을 헤매다 가시에 찔리고, 나뭇가지에 맞고,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고 이렇게 한참을 헤매다 그만 뱀 소굴을 만났습니다. 뱀들이 바위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놀라서 무조건 숲 속으로 도망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어렵게 깊은 산 속의 숲 속에서 작은 길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길은 저에게 생명길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던지 한숨을 크게 쉬고 길로 나아갔을 때는 이제는 되었다는 마음의 안도였습니다.
그리고 제 몸을 보니까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길을 찾지 못했을 때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마치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영원한 것처럼 착각하고 가고있는 것은 아닌지요?
여러분 세상에 길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길하고는 차원이 다른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4절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어원은 oi[date(오이다테)로 완료형이지만 현재적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형은 아니기 때문에 “알리라”의 번역보다는 [너희가 알고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오해가 없습니다.
그런데 5절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도마가 말했지만 “우리가”로 말함으로 다른 제자들도 포함하여 함께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말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심정은 사도행전2장에서 성령을 체험하기 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지 못한다고 하는데 “알고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미래에 알게될 것이지만 현재 완료형으로 표현하여 이미 알고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무 어려운가요? 싶게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나 어떻게 나았어’라고 물어보면 ‘이 다음에 다 알게 될 거야!’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미 아이가 성장하면 반드시 알게될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여 ‘너는 이미 알고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논법입니까? 미래에 있을 일에 대한 확신을 당겨와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해하고 있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 때는 분명히 알게된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예지 능력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신 말씀이다.
 

둘째, 도마가 생각하는 길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이 달랐습니다. 도마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지”로 말하므로 실제로 사람이 걸어다니는 길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길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도마의 질문에 대답한 말씀으로 !Egwv eijmi(에고 에이미) “나는 … 이다”라는 형식으로 대답하셨는데 이러한 용법은 요한이 일곱 개(요6:48, 요8:12, 요10:9, 11, 요11:25, 요14:6, 요15:1)를 사용했는데 그 중에 여섯 번째가 됩니다(참고. 요15:1). 예수께서 “길”이 되시는 것은 그분이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옛날 미국 뉴욕주에 맥스 쥬크스라는 청년과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두 청년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청년들이었지만 아주 대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맥스 쥬크스라는 청년은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았고, 믿지 않는 여성과 결혼했고,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기독교 교육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청년은 예수를 잘 믿었을 뿐 아니라 신앙이 아주 좋은 여성과 결혼했고, 그리고 자녀들에게 청교도적인 신앙교육을 시켰습니다. 누군가가 이 두 집안을 조사해 보았다고 합니다. 맥스 쥬크스 집안에서는 1,026명의 자손이 출생했는데, 그 가운데 약 300명 정도가 조산으로 일찍 죽었고, 약 100명이 평균 13년 간씩 교도소에서 복역을 했고, 약 190명은 매춘부 노릇을 했고, 약 100명은 술고래가 되어 그 말로가 아주 비참했다고 합니다. 이 집안이 뉴욕주에 부담시킨 비용은 120만 달러라는 엄청난 거액이었습니다. 즉 국가에 공헌하기보다는 오히려 손해를 끼치고 부담을 준 집안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조나단 에드워드의 집안에서는 모두 729명의 자손이 출생했는데, 그 가운데 300명에 이르는 자손이 목사가 되었고, 65명이 대학 교수가 되었고, 13명이 대학 총장이었고, 그리고 50명이 유명한 베스트 셀러의 저술가였습니다. 이 집안은 사회 여러 분야에서 많이 공헌을 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길이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마 문명이 그렇게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가 ‘길’을 잘 닦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세계에서 국토도 넓고 인구도 많은 중국이 후진성을 면하지 못한 것은 ‘길’을 닦기보다는 성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그만큼 길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닦으신 새롭고 산길입니다.
구약의 성소에는 두 개의 방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소이고 또 하나는 지성소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오직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하루에 한 차례 들어가서 분향하고 등불을 켜는 일을 했습니다. 성소 안쪽에 있는 지성소는 일년에 단 한번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는 일이 이처럼 제한된 이유 가 어디 있습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 둔 곳이며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지만 특별히 하나의 이름 둔 것이요 머물러 계신 곳이 성전이기에 누구나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려면 제사장이라도 반드시 속죄의 피를 가지고 가야만 합니다. 자신의 죄를 씻는 속죄의 피가 없으면 제사장이라도 성전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보좌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위에 있는 곳을 시은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머물러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왜 길을, 다리를 다시 닦고 놓습니까? 예전 길로는 다리로는 건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롭고” provsfaton(프로스파토스)는 성경 중에서 본 절에서만 기록된 것으로 ‘최근에 다시 만들어진’으로 근본적으로 다시 만들어진 “산” zw’san(조산) “살아있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사람들은 지성소에 자유롭게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가야 할 장벽으로 여겨졌던 휘장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찢어졌습니다
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찢으신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휘장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얇은 커텐이 아닙니다. 양피지나 두꺼운 천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쉽게 찢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누구나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길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번 잘못 들어선 길은 평생을 가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리저리 방황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이제 상처만 입고 돌아왔습니다.
이 길은 평생에 가는 길이지 가다말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이 길은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욥은 그의 대답에서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시며”(욥12:2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택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십니다.
마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만약 여러분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잃어버렸다면 지금처럼 마음 편하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아들을 찾아 헤맬 것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오직 한길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한번 찾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길을 다시는 잃어버리지 마시고 끝까지 저와 여러분이 함께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일곱 살 된 손자에게 아랫동네 큰 할아버지 댁에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아이는 심부름을 가다가 풍선장수가 예쁜 풍선을 팔고있는 것을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고,
다시 길을 가다가 동네친구들을 만나 함께 구슬치기를 하며 재미있게 놀기도 했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 아이는 다시 길을 갔고, 돌 뿌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소매로 피를 닦고 조금 쉬었다가 일어난 아이는 다시 길을 갔고
시간이 지나 해질 녘에야 큰 할아버지 댁에 무사히 도착을 했습니다.
큰 할아버지는 아이를 보고 무척 반가운 듯 말했습니다.
“네가 먼 길을 어떻게 혼자서 왔니?”
“할아버지 심부름 왔어요”
“그래, 무슨 심부름이니?”
“ …………………..”
아이는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먼 길을 오는 사이 그만 잊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이내 울상이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너보다 더 먼 길을 걸어왔는데도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아직도 정확히 모르고 있단다.”라고

자신이 지금 어디로 무엇을 향해 가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지금 우린 예쁜 풍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 뿌리에 걸려 넘어져 있진 않은지,
또 친구와 어디선가 놀고 있진 않은지, 일상의 여유도 필요하지만 정확한 길을 걸으면서 가고 있는지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

사마리아에 임한 성령 / 본문 : 행 8:14-24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오늘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약속하신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이 지난 후 50일째 되는 날이며 첫 열매를 거두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오순절의 구약적 의미는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의 첫 수확을 누리며 기뻐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기간에 잡혀서 죽으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을 오순절에 보내시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한 열매를 거두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므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출발과 교회의 새로운 시작이 있게 되었으며 풍성한 구원의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열매가 있어야 함을 보여 주는 의미도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이 사도들 다음으로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에 임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 취급을 하던 사마리아 지역에 내렸습니다. – 할렐루야 -
사마리아에 성령이 처음 내렸다고 했는데 그럼 사마리아와 성령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겠습니다.

1. 사마리아(뜻:살핌)는 어떤 곳입니까?
예루살렘 북쪽 약 67km 지점으로 사마리아 도와 사마리아 성이 있다.
사마리아 성은 세겜 북방 11km 지점 91km 높이의 언덕 위에 있는데 현재는 세바스티에 라는 곳으로 보잘것없는 동내가 되었다.
BC 30년에 헤롯은 사마리아 대건설 계획에 착수, 새로 건설된 도시를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세바스티아로 개칭했다. 도시의 출입문은 서편과 동편에 있었다. 북편과 남편에도 성문이 하나씩 더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낙후된 아랍인의 마을에 불과하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여기였다.
그리심산이 있다. 이 산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으며, 산정에는 유적지가 있다. 소수민족인, 전통적인 사마리아인은 4백명 뿐으로 그리심산에 살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때문에 익숙한 도시이름이다.
(1) 사마리아 성읍은 이스라엘 북왕국의 수도이다.
(2) 디르사에 수도를 정하던 오므리왕(아합 왕의 아버지)이 세멜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이 산을 사서 그 소유주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하였다(왕상16:23-24).
(3) 사마리아도는 옛날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쳐서 취하여 12지파에게 분할해 줄 때 에브라임, 단, 므낫세, 반지파에게 준 땅이 곧 예수님 당시의 사마리아다.
(4) 여호수아 때에는 솔로몬 왕 때까지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솔로몬왕이 죽은 후에 남북 2국으로 분립되어 남에는 유다, 베냐민의 두 지파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은 유다국이 건설되고 북에는 기타 10지파가 느밧의 아들 여호보암으로 왕을 삼은 이스라엘 국이 건설되어 250여년 간 내려왔다.
(5) 앗수르왕 살만에셀이 이스라엘국을 쳐서 취하였다.
이때에 살만에셀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다른 지방으로 옮기고 아수르 국민을 사마리아 에 옮겼다(왕하17:3-6,24).
(6) 그 다음에는 마게도냐,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하여 또 사마리아인을 축출하고 자기 국민을 사마리아도에 이식하니 자연히 상홍홍혈이 되어버렸다.
(7) 그 때 부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이방시하고 그 주민을 이족시 하게 되었다.
(8)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사마리아인들이 협력하기 원하여도 거절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시 하는 유대인들에게 원한을 품고 바사국의 인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방해하였고, 그리심산에 따로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반대하게 되었다(스4:1-6).
(9) 이러한 두 가지 원인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간에는 피차 반목 질시하게 되고 유대인이 그 지역에 가지도 않고 그곳 주민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므로 갈릴리도를 갈때는 사마리아도를 통과하지 않고 멀리 요단강으로 돌아 다녔다.
(10) 예수님은 그것을 관계치 않으시고 통과하시다가 수가 성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생수의 원리를 가르쳐 주셨다(요4:3- 14).
(11) 선한 사마리아인이 비유을 듣고(눅1:30-37).
(12) 문둥병자 10명을 고쳐 주셨을 때 다 가버리고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와서 감사함으로 그를 칭찬하셨다(눅17:11-19).
(13) 그래서 예수를 사마리아인이라고 욕한 사람도 있다(요8:48).
(14) 스데반이 순교 후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만나 교인들이 사방에 흩어지는 중에 이 사마리아 도에 들어가서 교회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행8:1).

사도들(행2:1-4 ) 다음으로 처음 나타난 성령은 바로 사마리아에서였습니다.
이 사마리아는 유대인들과는 반목이 깊어 왕래를 하지 않던 그런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한번도 이 사마리아를 차별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성령은 무엇입니까?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보혜사”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파라크레토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성경 전체에 5번 쓰였는데, 요한복음에 4번 나온다. 오늘 본문 16절과 요14:26, 요15:26, 그리고 요16:7에 나온다. 나머지 한 번은 요일2:1절에 쓰였다. 이 말은 본래 법정의 법률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법정에 선 사람에게 법률적 도움을 주는 사람을 “파라크레토스”라고 했다.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변호사”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파라크레토스”를 영어 성경에서는 “돕는 자”라는 말인 “helper”로 번역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면서 돕는 자로 보내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사마리아에 어떻게 성령이 임하실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첫째, 14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 갑자기 성령이 임하지는 않습니다. 칼빈은 늘 말씀을 읽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 순서는 말씀 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앙교회도 예배순서에 말씀 봉독전에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넣기로 헸습니다.

둘째, 사도들(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안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성령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임을 너무도 많이 체험하였습니다. 성령 없는 성도는 껍데기 교인에 불과합니다.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 한 교사가 반의 학생들에게 사도신경을 한 구절씩 외워오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교사의 인도에 따라 학생 각자는 자신이 외운 사도신경의 한 귀절씩을 외우기 시작했다. 한 학생이 일어나 “전능하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를 외우자 두 번째 학생이 일어나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했고, 또 다른 학생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끊어지고 말았다.
교사가 다음 번 계속하라고 하자 한 학생이 “선생님, 다음의 ‘성령을 믿사오며’를 외울 학생이 결석했습니다.”라고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이와 같이 ‘성령을 믿사오며’하는 대목에서 빠지곤 한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 우리는 이제부터 성령을 믿는 사람입니까?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까? 성령을 믿을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아 함께 하는 사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믿기만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은 받아야 합니다.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주앙교회가 성령강림절 다음날 창립예배를 드리게 된 것을 감사 드립니다.
이것은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계신 것입니다.
 

힘써 지키는 교회

힘써 지키는 교회 / 본문 : 엡 4:1-6

바울은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으면서 에베소 성도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형편이 좋은 사람이 형편이 나쁜 사람에게 전달하면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보다 더 형편이 나쁜 사람이 전달하면 그 말은 우습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1.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1절)
하나님이 부르신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1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 ‘합당하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악시오스’는 문자 적으로 ‘다른 들보를 하나 더 세워’라는 의미로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어떤 기준을 세워야 함을 의미한다(Wood, Lincoln). 그 기준은’부르심’으로서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을 통한 새 생명에의 초대이다(1:4, 5, 12, 13). 본 절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신앙인의 고백과 실천 사이에는 항상 평형(平衡)이 유지되어야 함을 시사한다(마3:8; 10:38; 행26:20; 빌1:27; 골1:10).

[등대지기] 한 외딴섬에 등대가 있었다. 어느 날 우편집배원이 섬을 찾았다.
집배원은 한 명 때문에 섬을 찾은 것에 짜증을 내며 불평했다.
“기껏 편지 한 통 배달하느라 기차타고, 버스타고, 배타고 꼬박 하루 걸려 이 섬에 도착했소.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기분이 나빠진 등대지기가 한마디했다.
“당신, 자꾸 투덜거리면 일간신문 구독할 거야.”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일 다하고 남는 시간에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남는 시간에 응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성도가 아닙니다.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라(2절)
본 절은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지녀야 할 구체적인 덕목들을 제시한다(Bruce).
(1) 겸손 – 이것은 자신의 부족과 무가치함을 깨닫고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이다(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당시 ‘겸손’은 비열한 마음과 노예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미덕이 아니었다(Foulkes, Wood).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낮아지시는 모범을 통해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셨기 때문에(빌 2:6-11; 벧전 5:5)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미덕가운데 중요한 것이 되었다.
“모든 덕이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인데 겸손이 그 첫째 계단이다. 이 첫째 계단에 오르면 그 다음에는 위로 올라가기가 쉬운 것이다.”(어거스틴)
“동전을 담는 저금통은 동전이 가득할 때 소리가 안난다.”
(2) 온유 – 이것은 ‘이해심 깊음’이라는 말로서 ‘정중함’(gentleness)이라고도 번역된다. 이 미덕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며(고후 10:1) 성령의 열매로서(갈 5:22, 23)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중용’(中庸)을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둘째,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본능적인 욕구 등을 스스로 자제하는 덕성을 의미한다(약 3:3-8).
(3) 오래 참음 – 이것은 죄인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며(롬 2:4;9:22; 벧전3:20; 벧후 3:15) 그리스도인들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타내야 할 성령의 열매로서(고전 13:4; 고후 6:6; 갈 5:22; 골 3:12),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복수하지 않는 정신이다.
(4)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본문은 앞서 언급한 ‘오래 참음’의 확대된 미덕이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단순히 ‘서로 용납하라’고 권면하고 있으나(골 3:13) 본 절에서는 ‘사랑 가운데서’를 삽입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사랑’이다. 여기서의 ‘사랑’은 성령에 의해 공급되어지는(롬 5:5) 새 시대의 능력으로(고전 13장; 갈 5:14, 22), 어떤 보상이나 조건을 내걸지 않은 자기 희생적인 무조건적 사랑이다.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의 연약함과 결점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Lincoln).

3. 성령은 하나되게 하신다.(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
바울은 하나됨의 생활 곧 일치의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일치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수단은 ‘평안의 매는 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원수 된 관계를 화해시키고,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화해를 이루셨으며(2:14-18)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됨’을 유지(维持)하도록 하기 위해서 평안과 화해의 대리자라는 직분을 주셨다(고후 5:18).
이러한 ‘평안’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치가 분열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매는 줄’(쉰데스모)은 성도들을 서로 묶어 주는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한(골 3:14) 것으로 족쇄보다 강한 결속을 시사한다.
한편 ‘힘써 지키라’의 헬라어 ‘스푸다존테스’는 ‘노력하다’보다 강한 표현으로서 어떤 목적을 향한 진지하고 열심 있는 태도를 가리킨다(Blaikie).
‘나는 배운게 없어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그런 내 귀는 나를 현명하게 가르쳤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4.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4-6절)
몸이 하나이요 ‘한 몸’을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뜻한다(1:23; 2:14-22). 이러한 ‘한 몸’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온전히 하나로 묶여진 유기체로서 통일성을 이룬다(고전 6:15;10:17; 골 1:18).
성령이 하나이니(헨 프뉴마) –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성령을 영접하였다고 선언한다(1:13, 14).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 사이의 공통적 근거로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의 유기체적인 통일성을 이룸을 시사한다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 교회가 통일성을 이루어야 하는 이유는 ‘부르심의 한 소망’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특별한 소망을 위해서 부르셨는데 여기서 ‘한 소망’은 ‘우주적 통일성’에 관한 소망을 가리킨다
“해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이사야 45장 6절)
이사야 45장 22절에도 “땅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이가 없음이라.”고 했고, 호세아 13장 4절에도 “나 밖에 네가 다른신을 알지말 것이라 나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은 한 분이어야지 두 분이라면 이해가 됩니까? 당연히 우리를 지으신 분은 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혹 다른 분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이해했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누가 속여도 속이는 것입니다.
◦ 구세주도 오직 한 분입니다. / ◦ 구원의 길도 오직 하나입니다 / ◦ 중보자도 오직 한 분입니다.

어느 날 소녀가 아버지 서재 안으로 살며시 들어갔다. 아무 말 없이 그 아이는 아버지 옆에 조용히 앉아서 아버지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후에 아버지가 말했다. “얘야 뭐 원하는 것이 있니?” “아니요.” 그 소녀가 대답했다. “그냥 여기 앉아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곧 소녀는 들어올 때와 똑같이 조용하게 방을 나갔다.
그 소녀는 자기가 아버지에게 무엇인가 해 달라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 소녀는 그저 아버지 곁에 있고 싶고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직 이 하나를 힘써 지키시는 주앙교회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소금이다.

성도는 소금이다 / 마5:13-16, 눅14:34-35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눅 14: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특별한 각오 없이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다니는 수많은 무리에게 예수님은 제자가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26-27, 33절).
예수님을 따르다가 타락한 자들과 배교한 자들의 생태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설명하시면서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34-35)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에는 소금은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어서 별로 귀하게 취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소금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다. 소금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귀하게 취급되었는가는 지난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소금을 구하기 위해서 전쟁까지 일어났으며 소금을 구하기 쉬운 곳에서 대개 고대 국가들이 건설되었다. 그것은 소금을 지배하는 것이 곧 백성을 지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월급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Salary라는 말은 원래 소금이라는 단어 Salt에서 나온 말이다. 옛날 로마 군인들이 월급을 소금으로 받았기 때문에 소금은 바로 현금과 같은 것이였다.
인류는 옛날부터 소금을 먹지 않으면 죽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금이 없으면 몸 안에 소금과 물 사이에 미묘한 균형이 깨어져서 탈수 현상으로 죽고 만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없을 때에는 짐승의 뒤를 따라가서 암염을 찾았다고 한다. 동물들도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소금으로 된 바위를 찾았기 때문이다.

저는 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 다이아몬드나 보석이라’하지 않고 ‘세상의 소금이라’했는가 좀 섭섭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다이아몬드나 보석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소금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다이아몬드와 보석은 사치품이지만 소금은 필수품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소금으로 명명한 것은 세상에서 꼭 있어야 할 필수적인 존재로 불러 주신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 되어야 하리라’하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현재형)’ 한 점입니다. 앞으로 유용하고 필수품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우리를 세상의 소금으로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벌써 세상의 유용하고 필수품인 소금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에 대한 놀라운 축복인 동시에 큰 사명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꿀이라 하지 않고 소금이라’고 말씀한데는 교회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소금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소금은 쓰고 따갑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의 말씀은 항상 달콤한 말씀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프게 하고 가슴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종종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박해가 일어나고 핍박과 고난이 있으며 배척이 일어납니다.
달콤한 이야기만 하는 것은 쉽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달콤한 이야기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을 파멸케 합니다. 사탕은 입에는 달지만 몸에는 해롭습니다. 약은 입에 쓰지만 몸에는 유익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항상 달콤한 이야기만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달콤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쓴 이야기입니다. 아픔과 고통의 이야기(Story)입니다. 따갑고 쓴 소금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두메 산골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교회 전도사님이 잠시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시게 되자 그 교회 장로님께서 수요 기도회를 인도하시게 되었답니다. 할 수 없이 맡기긴 했어도 워낙 학식이 없으신 데다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신 분이시라 심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장로님을 만나 신신당부를 드립니다. “장로님, 설교하시려고 하지는 마시구요 그저 성경말씀을 많이 읽으신 다음 교인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드디어 수요일 저녁이 되어 장로님이 기도회를 인도하러 올라갑니다. 전도사님이 그토록 부탁을 하셨건만 강단에 올라서고 보니 마음이 달라지는 겁니다. 오십여명 되는 교인들이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데 말씀만 읽고 내려가기는 조금 싱겁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이 기회에 우리 교인들에게 뭔가 신앙적인 교훈을 하나 심어 주리라는 결심을 하고는 평소 생각해 두었던 구절을 읽어나갑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을 봉독한 다음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 라는 말씀을 가지고 점잖게 말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함수 관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리켜 세상의 ‘소곰’이라 했습니다. ‘소곰’이 뭡니까? 소와 곰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와 곰이 어떤 동물입니까? 소는 온순하고 착하기 이를 데 없는 동물이요 곰은 사납고 힘이 강한 동물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소처럼 온순하게 주님 앞에 순종하고 또 곰처럼 믿음으로 씩씩하게 우리 인생을 살아갑시다.”

성경에 보면 소금에 관한 구절이 23번이나 나오는데, 대개 3가지 기능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시키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소금은 조미료 역할을 합니다.
욥기 6장 6절에 보면 “싱거운 것이 소금없이 먹히겠느냐”는 말이 있고 마가복음 9장 50절에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이 있으며, 골로새서 4장6절에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가? 맛을 내게 하는 소금의 역할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소금은 그 자체보다 다른 물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을 섬기고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시킬 사명이 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다.
조미료 역할을 할 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소금은 요리를 만들때 채소의 숨을 죽이고 고르게 퍼집니다. 부드럽게 합니다. 믿는 성도가 가는 곳에는 완고한 사람이 온유해지고 고집쟁이가 유순해지며 형제간에 화평케 합니다. 주님께서도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막 9:50).

2. 소금은 부패를 막는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레위기 2장 13절에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했습니다. 소금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생선이나 고기가 썩지 않게 방부제의 역할을 합니다. 교회도 우리 사회 속에서 방부제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소금의 역할이 부패를 방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 곳에서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 때문에 사회의 부정 부패가 없어지고 우리 기독교인 때문에 사회의 불신풍조가 없어져야 합니다.

3. 소금은 소독제(해독제)로 정결케하는 역할을 합니다.
출애굽기 30장 35절에 보면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케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엘리사는 여리고성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물이 좋지 않아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졌으나 소금으로 그 물을 해독하여 토산의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왕하 2:19-22).
어느 약품이건 소금이 사용되지 않는데가 없다고 합니다. 바닷가에서 손이나 팔, 발에 상처가 났을 때 바닷물에서는 소독이 되어 곧 낫습니다. 여하간 소금은 정결케하고 해독제의 역할을 합니다.
소금은 자신이 녹아지고 없어짐으로 맛을 내고 방부제가 되고 해독제가 되어 소금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다 소금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국속담] 소금에 절지 않는 것이 장에 절을까?(소금에도 절지 않는 음식이 소금보다 덜 짠 장에 절 턱이 없다는 말이다.)

결론. 소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소금은 그 형질이 비록 녹아 없어져도 그 맛, 그 본질은 그대로 자연계에 존재합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변하지 않는 약속을 <소금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대하13:5) 성도가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믿음, 변하지 않는 말, 변화지 않는 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이 소금은 우리 몸속에도 있습니다. 사람의 피 속에는 0.9%의 염분이 있어서 우리 몸의 산과 알카리의 농
도를 적정농도로 항상 유지시키주며, 이로써 건강과 생명을 지켜 줍니다.

어느 나라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보기 위해 길 한가운데 큰 돌을 갖다 놓고 누가 그 돌을 치우는가 멀리 숨어서 보고 있었습니다.
한 상인이 지나가며 “재수 없게 아침부터 돌이 앞길을 가로막아” 하며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한 관리는”어떤 고약한 놈이 돌을 길 한복판에 가져다 놨나? “라고 투덜거리며 걸어갔습니다. 잠시 후 한 젊은이가 지나가다 힐끗 쳐다보더니 더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왕은 큰 실망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한 농부가 수레에 채소를 싣고 시장에 가다가 그 돌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농부는 그 돌을 굴려 한쪽으로 치웠습니다. 그런데 그 돌이 놓여있던 자리에 무슨 주머니가 있어 펴보았더니 많은 돈과 한통의 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여기 있는 돈은 이 돌을 치우는 분의 것입니다. “라는 왕의 편지였습니다.

한국교회의 교인 수가 1천2백만이라는 사실은 온 세계 기독교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교학자들이 한국교회 성장에 관한 책들을 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의 소금은 3%만 되어도 바닷물 전체를 짜게 하는데 우리 25%의 교인들은 그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금의 특성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질 속에서 녹아 없어지는데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시작

초대교회의 시작 / 행 2:37-42

교회란 말이 옛 히브리어로는 “카할”과 “에다하”라는 단어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모임이나 그 모인 사람들 자체를 의미했고 신약시대에는 “에클레시아”로서 이스라엘의 회중이 특별히 여호와 앞에 종교적인 목적으로 모였을 때를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국들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불러냄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요즈음 한국에서 잡다한 이방 종교들이 그 명칭에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교회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인 무리”가 교회인데 그 뜻에 어긋나게 주님을 부인하고 자신들을 신격화 시켜나가는 사이비 종파들이 교회란 말을 쓸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이 “교회”를 의미하는 말들이 많이 있는데 그 명칭들을 택함 받은 자들로, 아브라함의 후손들, 열두 지파로, 흩어진 나그네로,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교회”를 직접교회로, 거룩한 자의 회중으로 정직한 자의 회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 몸으로, 온몸으로, 그의 몸으로, 몸인 교회로, 그의 몸된 교회 가지(요15:1-16)로, 나의 심은 가지로, 그리스도의 지체로,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로, 하나님이 자기피로 사신교회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로, 장자들의 교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 성도의 회,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 비둘기,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 하나님의 양, 양, 내 어린양, 내 양 ,한 무리, 장자들의 총회, 야곱의 하나님의 전, 금 촛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하늘의 예루살렘, 거룩한 성, 성상, 거룩한 산, 그리스도의 집, 신령한 집, 하나님의 권속, 주의 산업, 하나님의 이스라엘, 온 세상의 기쁨, 왕의 딸, 하나님의 나라 천국, 그의 나라, 내 나라, 주의나라, 어린양의 아내, 여호와의 분깃, 택하신 기업, 시온산, 여호와의 전의 산, 진리의 기둥과 터, 내 보좌의 처소, 새 예루살렘, 즐거운 분깃, 기쁨의 시내, 여호와의 성소, 그리스도의 누이, 버리지 아니한 성읍,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하나님의 성전, 성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 포도원 영광스러운 교회, 성령의 전, 새 이스라엘 등으로 비유하며 표현하고 있습니다.

1. 교회 시작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는 “에클레시아-교회”란 말을 두 번밖에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첫 번째는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할 때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말씀하신 때이고 또 한 번은 형제가 범죄 했을 때 제자들이 해야 할 의무에 관하여 말씀하신 중에 “만일 그들의 말고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7)고 하실 때입니다.
그 후에 사도들의 서신에 보면 이 “교회”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1:2) 에는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 들의 모임을 의미하기 위하여 사용하였고 안디옥교회의 경우에는 그 부근의 같은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제자들을 모았고 이 제자들이 새 이스라엘의 핵심 인물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본질적으로 그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인간적인 기관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기에 달려 죽어 장사되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다락방에서 기다리던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중심한 사도들의 전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교회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고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과 가까운 장래에 재림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고 그의 생애와 죽으심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없었다면 교회는 형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건과 성령주실 것을 믿은 제자들의 열성과 기도와 하나로 뭉친 마음이 시초가 되어서 결국은 “새 이스라엘”의 교회가 부흥과 발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왜 “예수의 피로 사신교회”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면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의 뿌리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줄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분명히 알지 못하여 신앙은 제쳐놓고 세상 의학으로는 못 고칠 병을 고치는 곳으로 알고 있거나 귀신 쫒아 내는 곳으로 알고 있으며 정신수양이나 하는 곳으로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병 고쳐주면…..헌금도 하고, 교회에 다니겠다”라고 하기도 하고 “이 고민 해결해 주면………하겠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 데 참으로 잘못된 생각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된 이 교회는 먼저 예수를 메시야(구세주)로 믿어야 하며 병 고치는 것 고민 해결하는 것은 그 부수적인 결과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 탄생하심으로 이 세상에 오신 능력과 기적으로 교회를 세우셨고 그 몸으로 대속의 제사를 드림으로 주의 백성들을 사셨으며 죽은자 가운데서 영생을 얻도록 그를 살리셨고 성령을 보내시어서 성도들을 충만하고 넘치는 은혜아래 생활하게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성전의 모퉁이 돌’로서 ‘대 제사장과 제사장 나라’로서 ‘머리와 많은 지체를 가진 몸’으로서 ‘신랑과 신부’로서 ‘많은 형제중의 첫 열매’로서 ‘주인과 종’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이 설명들은 교회의 거룩함과 교회의 하나됨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교회는 성령 충만을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행2:4)“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오늘 본문에 보니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용기를 얻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서 성령은 임하였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작은 무리가 합심 기도하는 중에 성령은 임하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교회의 역사가 이룩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상근 주석’에 보면 “성령강림은 그리스도교회의 중요한 사건이라기 보다는 교회 그 자체의 탄생을 뜻한다”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교회의 시작이 되기 시작했다면 ‘성령강림은 그 시작을 힘있게 출발시켜준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힘을 얻은 베드로의 위대한 설교 앞에 듣는 무리들이 가슴이 찔려 통회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약 삼 천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말로 한다면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강림에 의해 태어났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교회의 기원을 이룩하시려 제자들을 불러 새 예루살렘 즉 새 이스라엘의 인원으로 지으셨고 이 인원을 가지고 성령의 힘이 그 속에 불에 넣어짐을 통해 교회는 조직되어 졌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3. 교회는 복음 증거를 위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능력을 얻고 담대히 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진리를 증거 했습니다. 베드로의 전함을 듣고 주님께 돌아온 제자 수가 삼 천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 지상생활과 기적이사의 능력 행하심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예언을 성취 하셨으며 이 분이 곧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지은 인류를 상기하게 하였더니 “우리가 어이할꼬”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던 군중들이 주님 앞으로 겸손히 머리 숙이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고전2:2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결론.
1) 교회에서 받는 것
38절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성령을 받으라”, 40절 “구원을 받으라”

1907년 평양 대부흥회가 길선주목사의 인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장대현교회에 모인 1500여명은 길목사의 설교에도 변화가 없었다. 기도도 터지지 못했고 성령의 은사도 임하지 않았다.그 때 길목사는 은혜의 단절은 자신의 탓이라 깨닫고 외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