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양)의 문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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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 신가?(15. 나(양)의 문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0:1-10

문은 왜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들여보낼 것과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을 거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시험문제도 문, 답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질문을 하고 그리고 그것에 해당하는 정답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집에 달린 문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지방이나 지역을 출입하는 문도 있고, 나라를 드나드는 문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의 형태는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만이 환영받고 보호받고 대접받는다는 점입니다. 밀입국자들이나 밀수를 하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문을 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평생을 문으로 드나들다 결국은 또 문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드나드는 문이 어느 문이었느냐에 따라서 마지막에 들어갈 문도 결정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땅의 하나님의 집인 교회, 기도하는 집에 열심히 출입한 사람은 천국 문이요, 세상의 넓은 유흥과 향락의 문으로만 출입한 사람은 지옥문일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문 중에 양이나 소 짐승들이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것이 ‘양의 문’입니다. 이 양의 문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5: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양의 문’을 통과하셨습니다. 양의 문 곁에는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놀라운 상황을 목격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라고 했습니다. 가난하고 자기 몸조차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B.C.586년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파괴되고 느헤미야 선지자가 재건축할 때 가장 먼저 수축한 것이 양의 문입니다(느3:1). 이스라엘의 각 지파별로 나누어 성문들을 수축하고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게 양의 문입니다. 양의 문에서 시작해서 양의 문에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양의 문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다 도적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고 하신 데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전의 문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처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특권층이 있고 평민이나 병자, 가난한 자들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들어가려면 성전세금을 내고 들어갈 수 있으나 가난한 이들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서, 짐승이 드나들던 양의 문에 모여있는 자들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들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양을 약탈하는 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하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셋째는 ‘양의 문’은 희생제물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이 되셔서 이 문으로 들어가심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양의 문이 되셨고 우리가 어떤 문으로 들어가야 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어떤 문은 화려하게 보여서 두드렸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기대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은 것 모양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들어가 보니 잘 들어왔다고 생각되는 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문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들어갈 문을 설명해 주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이 문은 좁은 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은 다름 아닌 양의 문이었습니다. 병들고, 헐벗고, 굶주린 주님의 백성들이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10:7)
베트남에 가면 구찌 땅굴이 있습니다. 이 지역에 베트콩 본부가 있었습니다. 미군은 이곳을 찾기 위해 온 산에다 고엽제를 뿌려서 나무를 다 없앴는데도 찾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서 땅굴에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좁은 통로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더 좁게 만들어진 구간이 있습니다. 이곳은 날씬한 베트남 사람들만 들어갈 수가 있고 덩치가 큰 미군은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얼마나 좁은지 저도 겁이 덜컥나 괜히 들어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당시 베트남사람에게는 이 좁은 굴이 자신들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명문대학교 문이 넓은 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좁은 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좁은 문입니다. 아무나 들어가는 문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학생들 중에서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의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산 사람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좋은 것, 귀한 것은 아무나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 자만이 갖게되는 것입니다.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를 부른 세계적인 팝가수 셀린 디온이 가수활동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그녀는 폭발적인 가창력과 맑은 음색을 지닌 세계 최고의 여가수로 불립니다. 인기정상을 달리던 그녀가 돌연 부와 명예를 거절하고 가정으로 돌아간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캐나다 출신인 셀린 디온이 가수가 된 것은 열 두 살 때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들고 한 음반 회사를 찾았습니다. 그때 지금의 남편인 안젤린이 빚을 얻어 음반을 만들어 주었고 셀린 디온의 매니저로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셀린 디온은 기자회견에서 “남편이 지금 후두암에 걸려 투병중입니다. 지금은 남편에게 내가 가장 필요한 시간입니다. 남편 곁에서 병간호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쇼 비즈니스가 결코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제부터 남편에게 진 사랑의 빚을 내가 갚을 차례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요10:1-2)고 했습니다.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도”로 좀도둑을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가룟 유다에게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요12:6)고 했습니다. 목자 몰래 양을 훔쳐 가는 도둑입니다. “강도”는 바라바에게 사용되었던 말로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요18:40)고 했습니다. 양을 강제로 빼앗아 가는 자들을 말한 것입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양을 도적질하고 강제로 빼앗아간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때는 예수님께 적대적 행위를 한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양을 도적질하고 빼앗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양의 문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좁은 문을 통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예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며 자신들이 문이 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지 않고 넓은 길로만 가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문을 피해가려는 사람들입니다.

문은 열어야 합니다.
자동차 운전하시는 분들은 다들 한번쯤 경험한 일일 것입니다. 자동차 키를 차안에다 꽂아 놓고 문을 닫고 내린 것입니다. 저도 서너 번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분명히 내 차인데 열쇠가 없어서 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열쇠가 없으니 차 문을 열 수도 없고, 타지도 못하니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차 도둑처럼 옆으로 긴 철사를 끼어서 열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도둑이 아닌지라 쉽게 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물쇠는 열리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문을 열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대답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부여받았습니다.(마16:19) 그리고 이 열쇠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계3:7) 예수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스터키가 있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눅11:52) 율법사들은 예수님의 키만이 열린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열쇠인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불행한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자신들 뿐 아니라 다른 자들도 막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또 하나는 안에서 열어주면 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요10:3)라고 했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자신들의 양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온 양들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몰려온 양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목자의 음성을 들은 양들입니다.
그렇게 안타깝게 자동차 문을 열려고 하는데 차안에 어린 딸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너무 어려서 닫혀진 문을 잘 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빠는 창문 옆에 달린 것을 올리라고 차 밖에서 손짓을 합니다. 그리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아니면 딸이 문을 열어주겠습니까? 열어주지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겠습니까. 철저하게 양을 가려내십니다. 우리 우화에 여우가 손에 밀가루를 바르고 어머니로 둔갑하여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양의 탈을 쓴 사단에게 속아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제일 확실한 문지기이신 것입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만을 외치고 주님 뜻대로 살지 않은 자들도 가려내십니다(마7:21).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눅13:25) 저와 여러분들은 그 문에 있을 때 주님께서 문을 열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문 앞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면 구원과 꼴을 얻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는 자에게는 자유롭게 왕래하며 꼴을 얻을 수 있습니다. ‘J. 스트루더’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40년을 허비한 후에야 나는 이러한 확실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천국보다 더 명확한 곳이 어디 있으며, 지옥보다 더 혼란스러운 곳이 어디 있으랴!”고 했습니다. “들어가며 나오며”는 자유를 말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제일 큰 단점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고(소데세타이)”로 단순히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를 넘어서 안전하게 보호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양이 원하는 꼴을 주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28:2-6)고 했습니다. 이러한 축복을 주는데 조건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입니다. 복이 임하는데 먼저 장소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들어가며 나가며 어디에서든지 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집에서만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십니다.

오래 전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병에 걸린 어머니를 간호하는 착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어머니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캤습니다. 어느 날 소녀는 절벽 사이에 돋아나 있는 약초를 캐다 그만 굴러 떨어졌고 소녀의 몸에서 피가 나와 주변의 하얀 꽃에 번져 나갔습니다.
소녀가 숨을 거두려 할 때 예수님이 나타나

나의 감독자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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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 신가?(14. 나의 감독자이신 예수님) / 본문 : 벧전2:18-25

‘감독’하면 얼른 생각나는 것은 운동경기일 것입니다. 어떤 경기이든 감독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기술을 가르쳐주는 코치는 부분적으로 모자라는 것을 보완시켜주는 역할을 하지만 감독은 선수 개개인의 특징을 알고 있어야 하며 경기에 이기기 위해서 선수들을 격려하고 지켜보고, 지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도 감독을 잘 만나지 못하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좋은 감독은 좋은 선수를 찾아냅니다. 2002년 월드컵은 한국인이라면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 한국감독을 맡은 네덜란드 출신의 히딩크 감독의 역할로 4강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감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감독자의 역할처럼 원어의 ‘감독’ ejpivskopo”(에피스코포스)이라는 말은 “존중하다, 배려하다, 방문하다, 찾아내다, 소집하다, 징벌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직분과 역할로서 오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감독으로 표현하는 것 중의 제일 비중이 큰 것은 그분이 곧 감독자인 동시에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심판을 받습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고모라가 모세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르우벤지파 사람 3명(엘리압의 아들 다단, 아비람, 벨렛)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250명이나 가담되어 있었습니다. 반란의 이유는 당신 모세와 아론만 하나님이 선택한 자이며, 잘난 체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기도한 다음 “내일 아침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주실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 인들아 잘 들어라! 하나님께서 레위 인들을 시켜서 성막에서 일하게 하신 것을 너희가 작은 일로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 너희 레위 인들에게 이런 귀한 일을 맡기셨는데 어째서 너희가 제사장 직분까지 맡으려고 하느냐, 너희는 하나가 되어 여호와를 거역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사람을 시켜서 엘라압의 아들 세 명의 주동자를 불러오게 했으나 그들은 거절하며 모세에게 “당신이 우리를 비옥한 땅에서 이곳 광야에서 죽이려고 한 것도 부족하여 이제 우리의 왕까지 되려고 하시오. 당신은 우리를 비옥한 땅으로 인도하지 않았고 밭이나 포도원도 주지 않았소.” 그리고 고모라가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광채로 성막 입구에 나타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시기를 너희는 이곳에서 떠나라 내가 이들을 당장 죽여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께 엎드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시여 한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모든 사람에게 노하십니까?”하고 애원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백성에게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천막에서 떠나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이 갈라져 이들은 산 채로 깊은 구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250명의 추종자도 “땅이 우리를 삼키려 한다”고 하며 도망하였습니다. 그 때 분향하던 불이 그들을 좇아 태워 죽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감독자’는 이렇게 심판하시는 자로 방문하심을 말씀하십니다. 불순종하는 민족들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방문을 받을 것이며(렘6:15), 그들의 우상들은 방문의 날에 깨뜨려질 것이다.(사10:3)고 하십니다. 감독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심판주가 아닌 구원의 주님으로 만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독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찾으십니다.
창세기 18장의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창18:26)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 50명만 있으면 멸하시지 않겠다는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의인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죽기로 작정하고 하나님과 협상을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10명씩 줄여나가며 하나님께 간구 합니다. 일단 하나님이 50명의 의인을 제시하셨기 때문에 한꺼번에 적은 수의 의인을 말할 수 없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조금씩 줄여나갑니다.
“사십오인을 찾으면”(28절)
“삼십인을 찾으시면”(30절)
“이십인을 찾으시면”(31절)
“십인을 찾으시면”(32절) 그 십인을 인하여서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에는 10인이 없었습니다. 결국 롯의 일행만 빠져나오고 그 성은 멸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찾으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지금의 의인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마18:12-13)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말씀해 주십니다. 목자를 잃어버렸던 이 양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나를 존중하고 선택해 주셨습니다.
감독이 선수들을 다루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가끔 운동경기 감독들은 지나치게 선수들을 혹독하게, 그리고 개인적인 배려 없이, 경기만 생각한 나머지 개인의 인격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독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개인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 될 자격이 있다고 보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정상적인 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무자격자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의 학교에는 랍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생이 누구인가에 따라 문하생이 있습니다. 유태인의 교육사상은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아이들을 교육시켜 읽고 쓸 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기본교육은 받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어떤 랍비에게 사사를 받았거나 문하생이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일정한 시험을 거친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님이 감독자로서 그들을 선택했습니다. 무명의 사람을 선수로 길러낸 것입니다.
요8:3-9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절)라고 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하라고 하면 예수님은 사랑이 없고 여인을 죽인 사람으로 몰아갈 것이고, 놓아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 유대인이라고 예수를 모함하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린아이로부터 하나씩 슬금슬금 사라지고 이 여인과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절)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는 가까이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여자와는 상종치 못했습니다. 그런데다가 예수님이 만난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이 여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감독자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바울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1:26-27)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느 임금이 하루는 정원에 나가 보았더니 화단의 꽃과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임금은 참나무에게 왜 죽어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참나무는 멋진 전나무처럼 키도 크지 못한데 살아서 무엇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나무에게 넌 왜 죽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포도나무처럼 좋은 열매도 못 맺으니 죽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포도나무에게 물었습니다. 포도나무도 장미처럼 꽃도 못 피우니 살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제비꽃은 생생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임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비꽃에게 너는 왜 이렇게 힘있게 살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비꽃은 말했습니다. “임금님께서 저를 여기에 심으신 것은 제가 이곳에 꼭 필요하기 때문임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키가 작고 예쁘지 않아도 제비꽃으로 열심히 피어서 임금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저도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는 만족함이 없는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습니까? 여러 가지 다른 축복은 제쳐 두고라도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주어진 삶에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련하고 약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심에 감사해서 살아갑니다.

애매한 고난을 참으십시오.
운동경기를 보면 가끔 선수들이 열심히 뛰었는데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게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심판의 불공정 판결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안 선수들과 감독들은 심판에게 항의하며 경기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부름을 입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한 때는 베드로 자신도 이러한 고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데 모닥불을 쬐고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희생해야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오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할 수 있는 그런 성숙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2:19, 20)의 “아름아우나” cavri”(카리스)는 “은혜, 선물, 기쁨, 감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경기할 때 분통이 터지는 불합리한 판정에 참으면 사람들에게 잠시 아름답게 보이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라면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카리스는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반드시 그에 응당한 기쁨, 선물의 은혜를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에서 제일 처음 나타난 곳은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2:40)입니다. “은혜”가 바로 cavri”(카리스)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언제 주어지는지 아시겠습니까?
선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참고, 인내할 때입니다.

구전(口传)에 의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로마 사람들이 주문하는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에 아버지 요셉을 도와 열심히 목수의 일을 하셨으므로 예수님도 십자가를 만드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만드는 전문가이셔서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한 십자가를 친히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유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어떤 주인에게 두 마리의 소가 있는데 한 마리는 약하고 힘이 없고 또 한 마리는 강하고 힘이 세다면 어느 소에 무거운 짐을 지울까?”
물론 강하고 힘이 센 소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나의 십자가가 유난히 무겁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질 만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를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는 본을 보인 감독이십니다.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고 하십니다. 어떠한 본을 보여주셨습니까?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채찍을 받으실 때 우리는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2:5)라고 했습니다. 이 법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본을 보이신 앞서가신 감독이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고아와 같이 버려진 목자 없는 양이 아닙니다.

감독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유치원의 어린아이들이 엄마가 없으면 재롱잔치에서 장기자랑을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안 납니다. 사랑하는 엄마 앞에서 보여주고 싶은데 엄마가 없기 때문입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우리가 4강에 들 수 있었던 것도 대한민국 국민이 간절히 원하고 응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머리털 하나 까지도 세고 계신 분이며(마10:30) 또한 머리털 하나라도 상치 아니하도록 지켜주십니다(눅21:18).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경기에 임한 선수같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감독이신 그리스도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영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3. 나의 영이신 예수님) / 본문 : 고후3:12-18

이곳으로 이사오기전의 사무실이 건대입구역 로데오거리에 있었는데 저희 사무실 맞은편 2층에 여행사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이 사무실은 가끔 불이 꺼지지 않고 밤 세도록 켜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도 저토록 열심히 일을 하는데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선교를 하면서, 저 사람들만큼 열심히 하는지를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도 밤을 새우기도 하고, 땀을 흘리기도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바울은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고후3:12)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소망은 앞의 7-10절을 말한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를 따르던 사람은 단순히 죄를 알려주는 직분이었습니다. 이 없어질 직분이 영광스러웠다면 사람을 의롭게 하는 영원한 직분은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러니 담대히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담대히 증거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썩어질 것을 위해서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영원한 일을 위해서 어찌 열심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바울은 이러한 심정으로 담대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광채는 유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후3:13) 이 말씀은 출34:29-35절을 예로 든 것입니다.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쓴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모세에게 있던 광채가 사라졌을 때 그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질 것을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나타났던 광채를 통해서 백성들이 모세에게 현혹되어 영원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이 자신과 모세를 비교한다기보다는 복음과 율법을 비교한 것입니다. 율법은 유한한 것이며 복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율법의 일꾼이었던 모세와 다르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당당하고 마음의 속박함이 없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할 것 같아 수건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복음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건을 써야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수건이 마음을 덮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고후3:14)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모세만 수건을 덮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수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대하는데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수건을 덮어쓰고 있었던 것은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서 그랬던 것입니다. 원어의 ‘완고(에포로테:ejpwrwvqh)’는 의학용어인 피부 경질이란 뜻입니다. 이 경질은 뼈가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자리에 생기는 것으로 굳으면 원래 뼈보다 더 단단한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돌과 같이 무감각하고 굳어진 경질 같은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자신들의 고집을 버리지 않고 읽었다는 말입니다.

‘정신병원의 독서시간’이란 제목의 유머가 있습니다.
몇몇 환자가 두꺼운 책을 텍스트로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환자1 : 이 책은 너무 나열 식이야.
 환자2 : 게다가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좀 산만해.
 그런 이야기로 열기를 더해 가는데 간호원이 급하게 들어와서 물었습니다.
 “누구 전화번호부 가져간 사람 있어요?”
우리도 아직까지 수건을 벗지 못해서 성경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강아지에게 안대를 씌어준 것을 보았습니다. 강아지는 그 안대가 얼마나 갑갑했던지 발로 비비고 고개를 휘두르고 난리를 떨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답답한 안대 같은 수건이 얼굴을 덮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합니까? 당연히 수건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수건을 벗는 방법은 딱 한가지가 있습니다.

주님께 돌아오면 벗어집니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3:14)고 했습니다. 이 수건을 벗는 것은 율법의 한계성을 영원하게, 미완성적인 것은 온전하게 만드신 율법의 완성 자이신(마5:17-18, 롬10:4)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원문은 (엔 크리스토 카타르게이타:ejn Cristw’/ katargei’ta)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히 소멸된다]는 뜻입니다. 카타르게이타(katargei’ta)는 현재형 수동태로 ‘지금 그렇게 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수건이 벗어지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왜! 외국의 많은 신학교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고 이상한 교리에 많은 문제가 발생되었는지 아십니까? 학문이라는 것은 원래 발전해야 되는데 공학과 또 역사적으로 무엇을 발굴해 내는 학문은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은 생각해 보십시오. 박사 과정의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에게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의 학교에서는 그 정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교수는 그것을 학문적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원주의로 흘러가고 예수 안에서만이 아니라 선행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나, 종교는 다 같다는 식의 논리가 성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고후3:16)입니다. 돌아온다(에페스트렙호:ejpistrevfw)는 말은 회개를 말합니다. 그리고 ‘복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결코 수건은 벗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가끔 수건을 덮어쓰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다름 아닌 율법에 젖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인이나 안식교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단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전통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교단이 될 수도 있고, 학교가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교회나 목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교회가 아니면 안되다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교회에 대한 자부심과 프라이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쳐서 혹 교회나 목사님을 그리스도보다 앞서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에게 예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목사 설교 들으려고,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이런 모습이 우리 자신이었다면 그리스도안에서 회개하고 그분에게로 온전히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5:19-20). 나 자신이 그리스도안에서 돌아올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을 돌아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영은 자유롭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영’ (프뉴마:pneu’ma)는 성령을 뜻합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제일 처음에 나타나는 곳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3:16) 입니다. 주님이 성령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주의 영이 우리의 속에 역사하고 있음을 말합니다(롬8:15, 갈3:2, 엡5:18). 요한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했습니다. 성령은 다름 아닌 진리의 영입니다. ‘자유함’이라는 말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죄로 인해서 사단에게 속박 당하고 있었던 모든 문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은 하나이십니다(요10:30). 이분에게 불가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나 성령은 모든 생명, 진리, 능력, 거룩함, 축복, 영광의 근원으로 나타납니다. 이 자유의 그리스도의 영은 나를 모든 죄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유명한 시인 에머슨의 집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에머슨이 그의 아들과 함께 송아지를 외양간에 집어넣으려고 아들은 앞에서 끌고 에머슨은 뒤에서 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자가 힘을 다했지만 송아지는 네 발을 딱 버티고는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일랜드 출신인 부인이 이 광경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땀을 닦고 있는 에머슨 부자 앞에서 송아지 입에 손가락을 넣고 다른 손으로는 송아지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다정스럽게 대해 송아지가 스스로 외양간으로 들어가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에머슨처럼 멋진 시를 쓸 줄 몰랐지만 송아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강제적으로 외양간에 집어넣으려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랑으로서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TV이나 신문을 통해서 사람의 약점을 잡고 그것을 빌미로 계속해서 돈을 뜯어내는 아주 파렴치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잡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계속해서 막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깨끗하게 해결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사단에게 계속해서 질질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이제 결단을 하십시다.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고 질질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서,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자유함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영은 우리를 주님과 같이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전3:18)
여러분 여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두 단어를 주시해야 합니다. 하나는 ‘형상(에이코나:eijkovna)’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모방이나 유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형적 대표, 실체를 말하는 것이며 아울러 현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골1:15, 히10:1). 그리고 ‘화하여’(메타모르푸메타:metamorfouvmeqa) 내적 본성에서 변화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막9:2-3에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하신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수건을 벗고 주님의 영광을 보면 바로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체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된 몸과 같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빌3:21, 요일3:2). 이런 영광은 주의 성령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는 한 분을 소개합니다.

얼마 전 영국에서 수련회가 있었는데, 한 집회에서 신앙 때문에 18년을 감옥에서 보낸 중국인 목사가 소개되어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청중에게 자신의 감옥살이 경험을 이런 말로 들려주었습니다.
“제 친구들은 제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어떤 일을 하였기에 몸의 건강을 지킬 수 있었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그곳에서의 삶은 너무너무 고된 것이었다고 대답합니다. 수용소 당국자들은 제게 인분 구덩이를 치우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 구덩이는 수감원들조차 가까이 가기를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내가 교육 수준이 높은데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특히 자기들은 무신론자인데 나는 그리스도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일을 시켰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나에게 인분 구덩이 치우는 일을 시키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여러 해 동안 내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구덩이는 수용소 전체에서 수거된 인분으로 가득 찬 넒이 2미터 이상에 길이도 2미터나 되는 구덩이였습니다. 인분이 꽉 차면 적당히 썩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퍼서 밭에 비료로 보냈습니다. 구덩이는 아주 깊어서 바닥까지 깨끗하게 퍼낼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병균 덩어리 속에 직접 들어가 시종 악취를 맡아가며 인분을 조금씩 차례로 퍼내야 했습니다.
간수들과 모든 수감원들은 악취 때문에 가까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좋아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혼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는 보통 모든 수감원들이 엄격한 감시하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혼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구덩이에서 일했기 때문에 혼자 있을 수도 있었고, 주님께 실컷 큰 소리로 기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외우고 있던 시편 모두와 여러 성경 말씀을 암송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가까이 와서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인분 구덩이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던 이유입니다. 그때까지 외우고 있던 찬송들을 큰 소리로 부를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내가 제일 즐겨 부르던 찬송 중 하나가 ‘저 장미꽃 위의 이슬’(499장)입니다. 그것은 체포되기 전에도 제일 좋아했던 찬송이었지만, 그때는 그 찬송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분구덩이에서 일하면서 나는 우리 주님과의 놀라운 교제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내 곁에 계신 우리 주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 구덩이 안에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나는 주님의 임재를 맛보았습니다. 그 분은 결코 나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아나게 되었고 그 인분 구덩이는 주님과 교재하는 나의 은밀한 동산이 되었습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우리도 이와 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아 그분과 같이 새로운 부활의 생명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셨습니다” 생령(生灵)은 ‘살아있는 영’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원래는 영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을 왜 영이시라고 다시 말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영은 이미 하나님을 떠나 죄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죽은 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살리는 영이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반석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2. 나의 반석이신 예수님) / 본문 : 마6:24-27, 고전10:4

우리 속담에 ‘소귀에 경 읽기’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 주지만 소처럼 큰 눈만 깜박거리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아무리 좋은 말을 들려주어도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으며 그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인생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집에서 살고 집에서 죽는 것입니다. 집은 곳 우리의 안식처요 가족이 있고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야구를 보면 홈에서 출발해서 홈으로 들어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족이 있는 집, 홈에서 출발해서 홈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것은 여행길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돌아갈 본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길을 떠난 우리들은 잠시 죄악 때문에, 사단의 방해로 그 길을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 길을 다시 찾아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안내하십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찾아가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집을 짓는 사람은 먼저 설계를 해야합니다.
‘바둑’아시죠? 바둑은 집을 누가 많이 확보하느냐에 따라서 게임의 승패가 나는 것입니다. 바둑판은 19*19줄의 361집입니다. 이 바둑판을 두고 인생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집을 지을 것인가를 계획합니다. 그러나 혼자 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편이 그 집을 그대로 짓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습니다. 상대편도 집을 확보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싸움을 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고수일수록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급급해 하지 않고 바둑판을 크게 봅니다.
우리는 모두 남은 인생을 설계해야 합니다. 설계를 할 때는 넓은 마음으로 전체를 보고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미 설계를 잘해서 집이 지어져 가는 분도 있을 것이고 이미 다 지어서 그 집을 활용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집이 잘못되어 다시 지을 필요가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잘못된 집을 지은 사람의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은 ‘나는 기초가 필요 없다. 바람 부는 대로 떠내려 갈 것이다’라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표류하고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유형은 ‘나는 견고한 기초 위에 집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초가 잘못된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초는 세상 학문, 물질, 명예와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집을 설계하고 지었다면 부수고 다시 재건축을 하시기 바랍니다. 안타까운 일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기초가 잘못된 자기 집을 계속 짓는 사람입니다.

한 여객선이 심한 폭풍우로 항로를 잃고 헤매다가 어느 무인도에서 난파되었습니다. 승객들이 머리를 모아 아무리 의논을 해도 무인도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난파된 배 주위를 살펴보니 다행히 몇 달 먹을 식량과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는 날까지 살아야 했기에 씨앗을 심기로 결정하고 땅을 팠습니다. 그런데 황금덩어리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씨앗 뿌리는 것도 잊고 황금을 캐느라 온 무인도를 동분서주했습니다. 몇 달 후, 황금은 산더미같이 쌓였고 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지쳤다. 그런데 설상가상을 식량까지 바닥났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이 씨앗을 뿌리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습니다. 훗날 그들 모두 황금더미 옆에서 굶어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누런 황금 덩어리 쌓는 것이 살 길이 아닙니다. 미래를 위해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미래를 위한 설계입니다.

집은 기초가 제일 중요합니다.
미국의 뉴욕과 호주의 시드니는 반석 위에 세워진 도시라면 이탈리아의 베니스는 아드리아 해의 물 속으로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거기엔 뉴욕이나 시드니 같은 기반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7:25)라고 하십니다. ‘반석’은 원어로 페트라(pevtran)입니다. 이 말은 바위, 암반을 말하며 천연요새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본문은 팔레스틴의 지형적인 특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팔레스틴은 건기 때에는 바짝 마른 땅도 우기(wadi)때에는 급류가 내려갑니다. 제가 작년에 캄보디아 갔을 때 선교사님이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교통과 여러 가지 여건이 좋은 땅을 봐 두었는데 건기 때 본 것입니다. 그런데 우기가 되니까 그 땅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집을 지으면 물 속에 짓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우기가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열대지방은 반드시 우기를 거치고 나야 땅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반석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4:11)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벧전2:6-7)
이 세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영생을 위해서 건축하시기를 원하신다면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침례교목사를 지낸 에드워드 모트(1797-1874)가 작곡한(찬송가 539장) ‘이 몸의 소망 무엔가’의 후렴에서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서기를 소원하는 이 찬송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외모를 너무 화려하게 지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집을 짓는 모든 사람은 외모에도 신경을 쓸 것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외모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속은 비어 있으면서 남에게만 보이기 위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소용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옛날 집을 보면 대문을 크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속 있는 집은 굴뚝을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훼파하여 땅에 넘어 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겔13:14)고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15절에서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도 없어졌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것입니다. 바로 이들은 기초를 반석위에 세우지 않고 담에 회칠을 해서 그럴듯하게만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은 담도, 회칠한 자들도 없어졌습니다. 외모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신앙이어야지 남에게 보이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예수님 때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너무나 외식 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고 하셨습니다.

반석위가 아닌 집은 무너집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7) 본문에는 접속사인 ‘그러므로, 역시, 마찬가지로’의 뜻이 있는 카이(kai;)가 무려 5회나 나옵니다. 우리말에 ‘업친데 덮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무너지는 것이 계속되기 때문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집은 안전검사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집은 하나님께서 짓도록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그분에 의해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집도 준공검사를 받아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라에서 정한 안전한 기준에 따라 건물을 조사하고 사용을 승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집은 하나님께서 잘 지었다는 승인해 주어야 합니다. 그 승인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비유적이지만 인 맞은, 도장을 찍어준 사람의 수와 도장의 내용까지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계7:4)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것이 있도다”(계14:1)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집에 도장을 찍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 도장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이름을 쓴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집을 지었나?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 기초 위에 집을 지었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을 위해 지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에 이민해서 살고 있는 한인 2세가 명문 컬럼비아대 의과대학에 지원했습니다. 공부도 잘해서 SAT시험에 만점을 받았습니다. 집안 형편도 부유해서 무난히 합격되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합격 통지서가 날라 왔습니다. 이유는
“귀하의 성적은 아주 우수합니다. 가정형편이나 여러 조건들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귀하의 서류 어디를 보아도 헌혈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헌혈한 경험도 없는 귀하가 어떻게 환자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귀하는 의사 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혹 이런 모습이 우리교육의 현재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지요?

여러분 우리의 집도 우리의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육체도 자신의 것으로만 알고 사는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앙교회는 우리만의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입니다. 나아가 세계의 형제 자매들의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오래 전에 영국에 William Borden은 예일대학교에 입학을 한 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중국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주변 사람은 그의 결정이 어리석은 것이었다고 비웃었습니다. 좋은 가문,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처지에 있는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복음을 위해 자기를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중국에 가는 도중 애굽에서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애굽의 병상에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알렸습니다. 나는 ‘No reserve(남겨둔 것이 없다), No retreat(물러설 곳도 없다), No regret(후회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Borden은 이런 글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견고한 터 위에 집을 짓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준비해야 할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리스도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할렐루야-
 

나의 산 돌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1. 나의 산 돌이신 예수님) / 본문 : 벧전2:1-10, 사28:16

인간이 제일먼저 이용한 도구는 ‘돌’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석기시대라고 말합니다. 육지가 만들어질 때 크게 두 가지 물질로 창조하셨는데 그것은 흙과 돌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흙은 돌이 부서져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풍화’라고 합니다. 이 과정은 큰 바위 → 작은 바위→ 큰 돌 → 작은 돌 → 왕모래 → 가는 모래 순으로 변하는 것을 기계적 풍화라고 하고 바로 모래나 흙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화학적 풍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돌 위에 살고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별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졌겠습니까? 그것 또한 돌입니다. 그러다 보니 돌들도 한가지가 아니라 그 종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 중에는 사람들의 관심에도 없는 돌들이 있는가 하면 주목을 받는 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석입니다. 그리고 보석 중에서도 여러 가지로 나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 좋은 돌(보석)은 다이아몬드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숯과 다이아몬드는 그 원소가 똑같은 탄소라는 것을 아시는지요?

한 여인이 꿈에서 시장에 갔습니다. 새로 문을 연 듯한 가게로 들어갔는데 가게 주인은 다름 아닌 하얀 날개를 단 천사였습니다. 여인이 이 가게엔 무엇을 파는지 묻자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가슴이 원하는 무엇이든 팝니다.”
그 대답에 너무 놀란 여인은 생각 끝에 인간이 원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사기로 결심하고 말했습니다.
“마음의 평화와 사랑, 지혜와 행복, 그리고 두려움과 슬픔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세요.”
그 말을 들은 천사가 미소를 지우며 말했습니다.
“부인 죄송합니다. 가게를 잘못 찾으신 것 같군요. 이 가게엔 열매는 팔지 않습니다. 단지 씨앗만을 팔 뿐이죠.” 같은 씨앗을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검은 숯만 만들고 어떤 사람은 다이아몬드를 만듭니다.

계21:19에 보면 앞으로 우리가 가게될 하늘의 성은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라고 합니다. 아마 다이아몬드는 이 보석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섬 마을 어린이들이 서울에 올 때 선생님은 미리 서울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미리 약간의 지식을 알려줌으로 서울을 바로 이해하고 당황하지 말라는 뜻에서 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미리 우리에게 천국에 대해서 약간 알려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돌은 하늘나라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보석은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 보다도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말할 때는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돌을 말할 때는 생명력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시앗(남편의 첩) 싸움엔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돌은 생명력이 없음을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며, 남편이 바람을 피면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는 이 생명력이 없는 돌들로 사람들을 고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셨을 때의 일입니다. 군중들의 환호성과 찬양소리를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삼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함으로 이런 문제가 예수의 제자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19:40)는 대답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찬양하지 않는다면 생명력이 없는 돌(자연)이 그리스도를 찬양할 것이라는 뜻과 둘째는 제자들이 찬양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고발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한가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능력이 전혀 없는 돌들을 통해서도 자녀를 낳는 능력을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잉태할 수 없는 나이에 이삭을 태어나게 하신 것을 상기시키는 뜻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전능함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약속의 돌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수4:20-22)고 했습니다. 저도 가끔 해변 가에 가면 돌들을 가져오곤 합니다. 저는 그저 돌이 반들반들하여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후손들에게 요단강을 건넌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여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웠습니다. 또한 다윗이 블레셋 거장 골리앗을 죽이게 한 것도 물매돌 이었습니다.(삼상17:41-49)
이스라엘 민족에게 ‘돌’이란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상징이요 언약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구약성경은 오실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가리켜 ‘시험한 돌’, ‘귀하고 견고한 돌’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
‘시험한 돌’이라는 것은 ‘모든 시험을 다 거친 돌’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4:1-11).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을 지심으로 승리하시기 전까지 생애 전체가 시험의 과정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들의 끝임 없는 시험 곧 넘어뜨리려는 질문들이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예언했지만 이와 같이 ‘시험한 돌’로 말씀하시고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산 돌’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좋은 돌(보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산 돌’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죽어있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산 개가 죽은 호랑이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실제로 산 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제가 어렸을 때 수정이라고 해서 뾰쪽하게 솟아난 돌이 있는데 이 돌에 물을 주면 돌이 자라난다고 해서 물을 주고 기다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돌도 변하고 있는데 그것은 부서지는 것과 아니면 산에 있는 돌이 굴러 내려와 물매 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산 돌’ 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왜 산 돌에 비유했을까요?

돌은 쉽게 부식하지 않기 때문에 기록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기록은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직접 돌에 새겨서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십계명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돌에 기록된 문자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산 돌’이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2에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돌은 집을 짓는 기초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돌’로 묘사한 것의 제일 중요한 것은 성전의 종석(宗石, keystone)으로서 머릿돌, 모퉁이 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직접 마태복음 12:10과 누가복음20:18에서 직접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때 버림받으실 것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종석이 되게 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기초하여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벧전2:7)라는 말을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모퉁이 돌이 되시고 머릿돌이 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시험한 돌’ 즉 우리를 위해서 같은 고통과 시험을 대신 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 되시기 때문입니다.

돌은 깨뜨리는 심판 역할을 합니다.
항아리를 깨뜨리는 돌에 대한 이야기가 유대인에게 있었습니다(단2:31, 사8:14 참고).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시켜서 불 항아리를 만들고 그것을 깨뜨려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경험이 있습니다. 아마 이러한 내용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돌과 항아리’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항아리는 사람에게 비유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돌입니다.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은 돌에 부딪혀 깨지는 항아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했을 경우, 두 사람을 다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어떤 남자가 한 남편과 결혼한 여자와 동침하는 것이 발견되면 그들을 둘 다 죽일지니”(신22:22)라고 하십니다. 돌을 던지는 것은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8)고 하셨습니다. 우리 속담에 ‘돌을 차면 제 발부리만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부딪히는 돌이 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탈무드에는 ‘사람들은 길에서 넘어지면 먼저 돌을 탓한다. 만약 돌이 없으면 언덕을, 언덕이 없으면 자기의 구두를 탓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좀처럼 자기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넘어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을 순종치 않기 때문입니다.

돌(반석)은 생수의 근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기록하는 돌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대표적으로 십계명을 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에게 돌(반석)에 대한 사건이 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 때 르미딤에 장막을 쳤을 때 물이 없어 모세를 돌로 치려고 할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출17:1-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17:6) 이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대로 이어졌으며 하나님이 생수를 직접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장막절에 물을 붓는 예식을 행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의 심정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기회를 얻어 ‘큰 날’(장막절)에 물을 성령으로 비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39)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유엔에서 우리나라도 물 부족국가로 분류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물의 중요성을 잘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1년 평균강우량이 300밀리입니다. 우리나라의 요즘장마철 같으면 집중적으로 올 때는 하루에도 100밀리씩 쏟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물은 곧 생명을 상징합니다. 이 물이 어디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까? 바로 ‘산 돌’이신 예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 생명수는 성령입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께는 바로 교회의 머리와 구원하시는 주되심과 동시에 항아리를 깨뜨리는 심판하는 돌과 같이 심판 주되심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아니라 교회의 머릿돌이시며 성전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 되십니다. 아울러 우리 성도에게는 성령의 생수를 공급하시는 ‘산 돌’(반석)이십니다. 이러한 축복은 오직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하신 축복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신랑

예수님은 누구 신가?(10. 나의 신랑) / 본문 : 사54:4-10

우리는 결혼하는 것을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말합니다. 영어의 ‘wed(결혼하다)’는 우리와 달리 ‘약속한다, 서약한다’의 뜻입니다. 남녀간에 부부가 되는 것을 약속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징표로 결혼반지를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혼은 단순한 남녀가 만나서 한평생 살기로 약속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시집’이란 남편만이 아니라 ‘남편의 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집간다’는 것은 한 남자와 살러간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가족(시집)과 살려고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장가간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가’는 ‘장인 장모의 집(처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구려 때는 남자가 아내를 얻으려면 먼저 처가에 가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첫 아이를 낳게 되면 비로소 색시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우리의 결혼이란 1대 1의 결합이기도 하지만 한 집안과 자신이 들어가 결합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오늘 구약본문에서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5절)고 하십니다. 그리고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하십니다.
제가 조카 결혼식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주례를 하시는 분이 저희 집안을 말하면서 ‘명문가의 집안과 결혼하게 된 신부는…’이라고 할 때 사실 우리집안 사람은 그 말에 어리둥절 했습니다. 우리 집안이 명문가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희와 반대로 명문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발표된 이야기에 따르면 미국부자 중에 3대를 이어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명문가는 부자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집안과의 결혼을 생각하는 경우는 신랑, 신부보다도 집안을 따지게 마련입니다. 명문가일수록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가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왕자 또는 공주와의 사랑과 결혼을 꿈속에서처럼 그려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꿈보다 더 나은 실제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 예수님의 일가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의 말씀은 비유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적인 말씀에 담긴 뜻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우리가 이해하기 좋게 비유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남편 되어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가끔 지나치게 자신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집안의 연인과 사랑을 하다 결혼 때가 되어 박대를 당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화나 드라마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우리사회에서 이 보다 더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가족과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인도에 같을 때 있었던 사건입니다. 인도에는 아직도 카스트(계급) 사회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실제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젊은 남녀가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남자 집안의 신분이 낮은 하층 계급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브라만 계급의 상류층 여자였습니다. 여자 집안 쪽에서 당연히 반대를 하고 남자에게 경고를 보냈습니다.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하겠다고 했겠지요? 그리고 그 남자는 얼마 있다가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이와 같이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바라보다 죽음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니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사 54:4)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탄생하실 때부터 문제가 복잡했습니다. 저는 그래도 단칸방이지만 따뜻한 아랫목에서 편안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머리 둘 곳 없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하찮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대신해서 갖은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중죄인이나 받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해외여행이나 해외에서 사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얼마나 국가나 민족적으로 차별이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차별 없이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고 신부로 부르십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부르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먼저 부르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집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집안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남편으로 비유할 때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한 것을 성경은 간음으로 묘사했습니다(대하21:11, 겔6:9, 호4:12).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사 54:6) 본문의 ‘부르시되’(&a;r;q]:케라아크)는 ‘드러내다, 외치다, 선언하다’로 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하는 것 보아서 결정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를 신부로서 큰 소리로 많은 사람이 듣도록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변경할 수 없는 완료형으로 이미 결정 난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중 인생론에 관한 이러한 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서운 맹수의 추격을 피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여 도망치다가 마침내 낭떠러지 절벽을 만났습니다.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그 절벽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한참을 떨어져 내려가는데 칡넝쿨 같은 줄에 걸렸습니다. 얼마 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위에는 들소가 으르렁거리고 있으며, 절벽 아래에는 무서운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사적으로 그 칡넝쿨을 잡고 있는데 바위틈에서 희고 까만 들쥐가 나와서 그 뿌리를 교대로 깔아 먹고 있습니다.
불안과 초조와 공포 속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 앞에 무엇인가 간헐적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위 벌집에서 꿀이 녹아서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혀를 내어서 그 꿀을 받아먹으면서 순간의 즐거움을 통하여 그 고통을 잊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을 통해서 인류를 향하여 하나님이 부르시는 간절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종들을 부르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가 열려야 합니다. 이것이 그 시대를 향한 복음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이 소리가 나타나는 현장의 역사를 보는 눈이 열려야 복된 인생입니다. 오늘은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왜 부르셨습니까?

영원한 자비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죄로 인해서 얼굴을 잠시 가리우셨습니다. 즉 못 본 척 하셨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불쾌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넘치는 진노’와 ‘영원한 자비’를 대조하여 우리를 일깨워 주십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넘치는 진노에서 영원한 자비를 받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비’(dseje:헷쎄드)는 ‘아름다운’과 ‘책망’의 뜻이 함께 있습니다. 즉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는 못 본체 하시지 않고 사랑의 매를 필요하면 때리시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생아가 아닙니다.

미국 유머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미국인이 6․25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산길을 걷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남자는 나귀를 타고 그 아내는 뒤에서 숨을 헐떡이면서 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인은 눈이 둥그레져서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레이디 퍼스트의 예의도 모르시오? 여자를 저렇게 학대하다니….’
그러자 그 군자는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풍속이오!’
그런데 그 미국인이 6․25 직후에 다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그와 정반대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똑같은 산길이었지만 이번엔 여자가 앞에서 나귀를 타고 남자는 멀찍이 떨어져 조심성 있게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 미국인이 신기하게 생각하며 ‘여보시오, 그동안 풍속이 변했구료.’
그러나 그 군자는 옛날과 똑같은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쟁통에 지뢰가 사방에 묻혀있기 때문에 아내를 이렇게 앞세우고 가는 거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이 부려먹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우리와 함께 하시며 살리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마지막에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8)라고 ‘구속자’라고 수식어가 붙은 것은 메시야의 구속사역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구약성경 말씀은 이스라엘의 영광과 회복에 대해서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5절의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삼위일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4:16-19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기억해 보십시오.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는 말씀의 깊은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사마리아의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를 세상 적인 남편으로만 보십니까? 처음에는 약간 그런 의미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는 말씀은 영적인 남편을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바로 오늘 말씀의 제목, 나의 남편인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축복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주셨으며 에베소서 1: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로 더욱 우리를 감동하게 하십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도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돋는 해

예수님은 누구 신가?(9. 나의 돋는 해) / 본문 : 눅1:78-79, 말4:1-2

(눅1:78-79)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말4: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저는 지난 8월5일-16일에 영국을 다녀왔습니다. 그 때 한국날씨가 하도 더워서 어서 빨리 영국에 가야지 그러면 조금이라도 덜 덥겠지 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유럽 전체가 몇 십 년 만에 제일 더운 날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프랑스에서는 독거 노인들이 몇 천명이 죽었습니다. 영국의 도박사들은 날씨가 연일 최고더위를 경신하자 돈을 잘못 걸어 망한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영국의 집들은 에어컨과 선풍기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더운 날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자상가를 갔을 때 “선풍기가 다 팔렸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문구가 창에 써 있었습니다. 아마 이런 더위가 매년 계속된다면 영국의 가옥구조도 변경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기온이 몇 도만 더 올라간다면 심각한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태양을 조금만 더 지구에 가까이 접근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조금만 더 멀리하시면 어두움과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우주선을 쏟아 올린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지구의 온난화 문제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일어난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공해 때문입니다.
대구유니버시아드에 참석한 북한 응원단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진이 함께 찍힌 현수막을 상기된 얼굴로 걷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울먹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초상을 저렇게 낮은 곳에 걸려있고, 귀퉁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 맞으면 안된다고 고이고이 접어가지고 갔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태양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수령님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는 심판 날에 임하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해’로 비유했습니다. ‘해’로 표현한 것은 북한의 김일성이나 김정일처럼 우상화 시켜서 섬기라는 뜻에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악인과 의인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임하시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심판 날에 악인에게는 극렬한 풀무 불로 임하셔서 그들의 뿌리까지 태우십니다.
정원을 가꾸어 보신 분들이나 농사를 지으셨던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잔디밭이나 농지에 잡초가 자라나는데 잡초는 잘 보이지 않으려고 납작한 것이 많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아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뿌리가 더 깊이 박혀있습니다. 이것이 잡초들이 살아가는 방법인 것입니다. 뿌리를 다 뽑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멀쩡한 것까지 뽑힐 염려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염려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피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 뿌리까지 다 태우십니다. 완전한 결산을 하는 것이며 악은 모두 거두어 하나도 남김없이 그 근원을 모두 불로 태우신다는 것입니다(마13:41-42).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1절)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이방 나라를 다스리고 자신들이 많은 나라를 통치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셨습니다. 유대인만의 구주가 아니요 이 세상의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혈통만 믿고 자신들의 행동과 죄는 뒤로했습니다. 유대인이니까 의로운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기만 하면 의로워진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오래된 영국교회들도 이러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 8월 10일 웨일즈의 한 개척교회에서 주일오전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교회의 목회자는 영국의 큰 교회(건물만)에 담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뜨거운 가슴을 막을 길이 없어 피켓을 들고 길거리에서 전도했습니다. 이런 영국의 목사를 찾아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교회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권위가 실추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창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쫓아내었다는 것입니다. 왜 영국의 교회들이 오늘날처럼 되었는지 약간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텅 빈 큰 교회건물들을 옆에 두고 작은 공간에 임시 막사처럼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날은 영국에서 몇 십 년 만에 제일 더운 날이라고 한 날이다. 선풍기 하나가 강대상 옆에서 돌아갈 뿐이었는데 열을 식히는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땀의 뒤범벅이 되었어도 살아있는 그 느낌은 영국의 큰 성공회의 많은 형식의 예배분위기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조지 바나(George Barna)는 이러한 현상을 ‘주전자 속의 개구리’(Frog in the Kwttle)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곧 주전자 안의 미지근한 물 속에 개구리를 집어넣고 서서히 물을 데우면 개구리가 기분 좋게 죽어간다고 합니다. 바나는 바로 이같은 이미지야말로 현대 서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즉, 현상 유지(Status-quo)의식 안에 안거하여 편리와 기득권을 즐기는 동안에 우리는 실상 죽어가고 있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앞서온 세례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11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7-12)

그러나 의인에게는 의로운 해로 떠오르십니다.
어느 날 문득 저 동녘하늘에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는 순간 숨이 머물 것 같은 감동을 느껴보신 적이 없으신지요? 태양은 매일 떠오르지만 매일 새것입니다. 해가 없다면 이 땅의 동, 식물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태양의 광선이 식물과 동물의 생명을 위해서 빛과 열을 주는 것처럼 ‘의로운 해’, ‘돋는 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을 위해서 떠오르신 것입니다.
교만한 자와 악한 자에게 내리시는 심판과는 반대로 말라기 저자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사람이 의인이라는 말 아닙니까? 또한 이 사람에게 의로운 해, 바로 치료하는 광선을 비쳐준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의 표현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이와 같이 기쁜 일을 신약본문 눅1:78절은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일이 시험 보아서 된다든가, 돈 있어야 된다든가, 힘있는 사람만 된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아무래도 제외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이지 않습니까? 돈도 아니요, 힘도 아니요, 머리도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이름만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라디오 설교 방송을 들은 어머님은 그 목사님의 방송 테이프를 자기 자식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설교의 어느 부분에 은혜를 받으셔서 테이프를 구입하려고 하세요?’
‘목사님께서 맛있는 식당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그곳에 꼭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찾으신다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내 입맛에 맞으면 나에게 평생을 먹을 것을 만들어 주신 부모님의 입맛에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꼭 그 음식점에 함께 모시고 가신다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실 부모님들은 큰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부모님을 기억하고 함께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시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가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해서 나만을 위해서 살라고 말하지는 않으십니다. 더욱이 이 세상의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가진 것 중에 무엇이 필요하신 분이겠습니까? 사실 다 그분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기억하고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름만 부르고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종교가 기독교 외에 어디 또 있습니까?

저는 요즘 모든 것이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중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더 그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중국에 갔을 때 제가 설교하는 것이 목사의 설교를 처음으로 듣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사에게 처음 축복기도와 안수 기도를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분들의 감격과 감동도 컸겠지만 저 역시 감격스런 일이었습니다. 중국 땅에 머물며 살아오신 그분들의 애환을 제가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리고 두만강가로 바로 건널 수 있는 작은 강을 앞에 두고 손에 잡힐 듯한 산을 바라보며 그곳이 북한 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왜 또 그리 슬퍼지는 것입니까? 백두산에 올라갔으나 천지를 보지 못하고 내려왔지만 그분들이 더 미안해하고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분들의 잘못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런 슬픔도 이 땅에서 잠시뿐입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중국의 조선족 할머님들은 저의 두 손을 꼭 잡고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제가 다시올 때까지 건강하게 사셔야 됩니다.”라고 인사하고 돌아왔습니다.
계21: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찬송가 외엔 아는 노래도 거의 없습니다만, 세상 가요이지만 심수봉씨의 “젊은 태양”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생각납니다. 한 여인의 허스키한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조용한 노래에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햇빛 쏟는 거리에 선 그대 그대
고독을 느껴보았나 그대 그대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햇빛 쏟는 하늘 보며 웃자 웃자
외로움 떨쳐버리고 웃자 웃자
우리는 너나 없는 나그네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종 소리 바람 소리 고이 고이 잠들던 날
먼 하늘에 저 태양이 웃는다
햇빛 쏟는 거리에 선 그대 그대
고독을 느껴보았나 그대 그대
우리는 너나 없는 나그네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아~ 아~ 아~ 아~

모진 바람 거센 파도 가슴 속에 몰아쳐도
먼 하늘에 저 태양이 웃는다
햇빛 쏟는 거리에 선 그대 그대
고독을 느껴보았나 그대 그대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햇빛 쏟는 하늘 보며 웃자 웃자
외로움 떨쳐버리고 웃자 웃자
우리는 너나 없는 나그네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후렴에서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하며 사라지는 노래는 여운을 남깁니다.
호이토 맨 이라는 사람은 “추위에 떤 자일수록 태양의 따뜻함을 느낀다”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의 고뇌를 맛본 자일수록 생명의 존귀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삶의 고난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깊이 알기란 어렵습니다.
태양하면 얼른 생각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다는 것과 생명 아닙니까?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은 따뜻한 봄날의 햇살처럼 생명의 빛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축복이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왕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8. 나의 왕이신 예수님) / 본문 : 마16:21-28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왕이 올 것을 기대했지만 그들의 생각에는 예수가 그 같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을 위한 왕, 세계를 지배하는 왕이 나올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아니지만 현재 세계를 사실상 지배하는 미국의 왕(대통령)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말 한마디면 세계의 어느 곳도 초토화시킬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왕을 유대인들이 원한다면 현재 미국의 왕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이 세상에 그런 왕을 내려보내지는 않으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을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보았습니다. 세계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고있습니다.

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가난이 무엇인지 조금은 압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돈을 좀 벌어보겠다고 중학교 다닐 때 신문을 배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은 문득 이렇게 해서 언제 부자가 될 수 있나! 하는 생각에 미친놈처럼 밖으로 뛰어나가 캄캄한 밤에 보이지도 않는 산을 단숨에 뛰어 올라가 밤하늘을 쳐다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깊이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상상을 합니다. ‘내가 올림픽에 나가(만화책에서 본 것이 생각났는지?) 단숨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권투를 하던, 아니면 투포환을 던지든 금 매달을 따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하겠지’ 하며 혼자 마음대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나를 돕는 어떤 무소 부재의 능력을 가지신 왕 같은 분이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우리로 말하면 일제시대와 같은 로마의 속국으로 자주권을 잃고 살아간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루속히 자신들만을 위한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을 회복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윗 왕과 같은 힘있는 유대인의 왕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선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세계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미묘한 때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습적인 왕통은 늘 도전을 받았고 그들은 다른 왕이 어디서 나온다는 소문만 있어도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헤롯왕은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듣고 극도로 쫓기는 마음으로 자신의 왕좌가 흔들릴 것을 우려하여 순진 무구한 2살 이하의 아기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B.C. 4년 3월) 임종을 4-5일 앞두고 후계자로 정해졌던 장자 안티파터의 처형을 명령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고 후계자로 자처하며 행세하는 꼴이 보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그의 아들 셋을 모조리 죽이고 자신도 몇 일 있다가 죽었습니다. 헤롯은 후계자로 지명했던 세 아들 안티파터, 알렉산더, 아리스토불루스를 죽인 후 새 후계자로 아켈라오를 지명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지명만으로 왕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재가를 얻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로 떠나갔습니다.
바로 이 때 로마에 대한 항거로 대중적인 지지로 메시야 왕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더 이상 로마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헤롯 왕조를 거부하고 유대인을 위한 다윗과 같은 순수 혈통의 왕을 세움으로 로마의 섭정을 거세하려했던 것입니다. 이 때 다윗의 순수 혈통임을 자부하며 새 다윗의 역할을 하겠다고 나온 인물들이 있는데 갈릴리 지역에서는 유다, 베뢰아에서는 시몬, 유다 지역에서는 아트롱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언했고 왕관까지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들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로마의 황제가 임명한 아켈로오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후 6년에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민중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주후 6년에 일어난 이 운동은 왕위에 대한 것보다는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의 정치적 상황이란 매우 복잡하고 혼란한 시기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기에 예수께서 자라나시고 사역을 하셨다는 것을 먼저 숙지해야 합니다. 결코 편안한 안락의자나 설교하기 좋은 저와 같은 강단에서 편안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가만히 다시 들여다보십시오. 복음서를 다시 읽어보십시오. 얼마나 긴박한 순간들이 계속되는지 모릅니다. 그 긴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헤롯왕이 두 살 어린이를 죽인 사건은 당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던 세 사람도 힘이 없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진정한 왕이 될만한 사람으로 얼른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주의 영광의 나라가 오면 자기들에게 좌의정, 우의정 자리를 달라고 예수께 못박아 두려고 했습니다(마20:20-21, 막10:35-37).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20:22) 하셨습니다. 그리고 26-27절에 으뜸이 되고자 하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러 왔다고 하십니다. 물론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있기까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의 왕이 되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21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실망할 수밖에 없는, 꿈이 깨지는 이야기입니다. 수제자인 베드로가 참다못해 나섰을 것입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온 결과가 이런 것이라면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이토록 간곡히 부탁드린 일은 없습니다. 만일 이렇게 끝난다면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온 자신의 모든 꿈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맡아 띵~ 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기대하던 예수님의 답변이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충격의 말씀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예수님을 떠나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그의 마음은 착잡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격렬한 분노와 감정을 표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사단에게 시험받으신 일이 있습니다. 사단은 예수께 천하만국과 권세, 영광을 주겠노라고 세상 왕에 대한 정치적 시험을 해왔을 때, 그 때도 예수님은 격렬한 분노를 감추시지 않으시고 “사단아 물러가라”(마4:10)고 호령하셨습니다. 이 두 경우의 특징을 보면 첫째, 시험 당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
둘째, 모두 예수께서 격노하셨다는 것
셋째, 시험의 요소가 정치적(권력의 유혹)이었다는 것
넷째, 시험을 건 주체는 사단이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바로 베드로(제자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예수께 다시 한번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단이 베드로를 통해서 말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단에 대해서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왕에 대한 유혹으로 사단은 시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다음의 말씀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24-26절)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왕이 되실 것을 꿈꾸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왜 세상 왕에 대한 대응으로 ‘십자가, 죽음,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까? 이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왕이 되고 또한 제자들이 영의정과 좌의정이 되어 유대 나라를 다스리고 앉아있는 것은 잠시뿐일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생각은 이 땅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거나 세상의 욕심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어린이를 구하려던 역무원이 열차에 치여 두 발을 잃는 안타까운 사고가 지난 25일 오전 9시10분쯤 일어났습니다. 경부선 영등포역 김행균(42)열차운용팀장이 서울발 부산행 새마을호 열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김행균씨는 안전선 밖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뛰어들어 어린아이를 밀쳐내고 자신은 왼쪽 발목 아랫부분과 오른쪽 발등을 잘리는 중상을 입은 것입니다. 김행군씨는 신촌의 병원으로 급히 옮겨져 왼쪽 발목 접합수술을 받았습니다. 철도청은 사고 후 새마을호 승객으로 보이는 어린이를 찾기 위해 사고 열차와 역 구내에서 안내방송을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인터넷에는 네티즌들이 김행군씨를 돕자는 글이 무수히 올라오고 있습니다. 또한 무정한 어린이의 부모를 질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식을 살려준 은인에 대한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지다니, 이 사회의 빡빡한 인심을 단면적으로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보다 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있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데 3년이나 따라다닌 제자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남자성인만 5000명이 넘게 배불리 먹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우리는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찬송가 356장 “성자의 귀한 몸”의 4절)라고 찬송합니다.
그리고는 지금도 나를 위해 무엇을 달라고만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니까 보따리 내 놓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자들보다,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나에게 어떤 짐이 지워질 것 같아 슬쩍 사라진 어린이의 부모가 곧 우리들이 아니겠습니까?
혹 우리도 유대인과 같이 이러한 왕을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나만을 위한 왕, 우리 자녀들만을 위한 왕, 내 사업의 번창만을 위한 왕!
바로 이러한 왕이 유대인들이 꿈꾸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조롱과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무참히 죽는 순간 이런 왕을 꿈꾸던 자들의 꿈은 산산이 조각났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나의 왕이신 예수님”이 안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 제목은 필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국 고담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배가 고픈 호랑이가 산중에서 여우를 만났습니다. 호랑이는 배고픈 김에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여우를 잡아먹고자 덮치려고 했습니다. 여우는 이 궁지를 모면해 보려고 한 꾀를 생각해냈습니다. 덮치려는 호랑이를 보고 “호랑이 아저씨 잠깐 기다리십시오. 나를 잡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 산중의 제왕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호랑이가 “그것을 네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하고 말했습니다. 여우가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 뒤를 따라 다니시면 알 수 있습니다.” 호랑이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여우 뒤를 따라 산중을 따라다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산중의 모든 짐승들은 이들을 보더니 다 피해서 달아났습니다. 그때 여우가 말하기를 “이것 보십시오. 내가 나타나서 저렇게 다 무서워서 달아나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가 이 산중에서 제왕이지 않습니까? 체면도 있으니 내게 손대지 마시오.” 호랑이는 여우의 말이 그럴듯해서 여우를 놓아주었고 여우는 도망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산 짐승들이 여우 일행을 보고 도망한 것은 여우 때문이 아니라 그 뒤의 호랑이를 보고 무서워서 달아났던 것입니다. 호랑이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서 여우에게 속았습니다.

우물안 개구리가 보는 하늘은 동그란 작은 모습의 하늘뿐입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엄청난 책망으로 실의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뿐만 이겠습니까?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다른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격한 분노의 말씀 앞에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희망과 기쁨이 주어질 수 있었습니다. 자 오늘 본문 마지막 두 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27-28절) 천사들과 함께 왕권을 가지고 속히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주적 심판의 만 왕의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고을이나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나라를 한 때 통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고 그곳의 왕이 되시는 분이십니다(시2장, 72장, 110장). 그리고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하시는 왕이십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이라고 말합니까? 이 땅의 일만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혹 그분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셨다해도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한 복음이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6에 보면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보좌는 ‘수정, 유리바다’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수정, 유리바다’면 살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깨끗한 나라를 말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왕이신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이 나라에 함께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홀(笏)과 실로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7. 나의 홀(笏)과 실로(hlyvi)이신 예수님) / 본문 : 창49:8-12

오늘 본문은 성경의 첫 권 창세기 49장입니다. 창세기에는 천지창조로부터 아담의 타락, 노아의 방주를 통한 심판과 구원의 역사 그리고 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스라엘 족장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족장들의 역사가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49장은 창세기의 한 장(50장)을 남겨놓고 바로 전에 기록된 것입니다. 다음 장(50장)은 야곱의 장례식과 요셉의 죽음에 대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창세기의 결론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아담의 타락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의 죄 때문에 벌을 내려주신 것은 이미 창세기 3장 16절에서 하와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17절 아담에게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벌만 내려주시고 만 것일까요?
아니면 역사가 한참 흐른 다음 어느 날 갑자기 생각이 나셔서 죄로 인한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예수님을 급히 보내주셨을까요?
여러분은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잘못을 이다음에 야단치려고 수첩에 꼭꼭 적어놓습니까? 아니면 지금 야단을 칩니까? 지금야단을 쳐야하는 것입니다. 혹 감정적으로 질책하지 않으려는 부모는 모았다가 다음에 야단을 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자녀들은 우리 부모가 또 어떤 빌미를 잡아 가지고 언제 나를 혼내줄까 염려하여 불안에 떨며 지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그가 타락했을 때 바로 그 죄의 대가가 주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죄를 통해서 인간에게 내려진 죄의 대가를 다시 거둘 계획도 세우십니다. 아마 당장의 죄만을 혼내주고 자녀를 위해서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자녀의 미래가 불투명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을 기록한 창세기를 넘기지 않고 마지막장이 다 되어서 야곱을 통해서 열 두 아들에 대한 “후일에 당할 일”(1절)을 말씀하시면서 유다지파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 속에 이 놀라운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2절에서 “너희는 모여 들으라 … 들을지어다”가 반복적으로 기록된 것은 야곱의 죽음이 임박했음과 야곱이 말하려고 하는 계시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이 단어의 어근 솨마([m’v;)는 단순히 듣는다는 뜻 외에 “경청하고 동의하고, 순종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단순히 야곱이 죽기 때문에 유언을 하는 의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들으라” 이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여 경청하고, 동의하여 아멘으로 순종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유다지파에게 내린 야곱의 예언은 다른 지파에게 내린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지파에게서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유다지파에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이스라엘의 유다지파에게 뿐만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내린 예언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4째 아들로 레아가 B.C 1755년에 하란에서 낳았습니다. 유다지파는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선봉이었습니다(삿1:2). 이 지파는 다른 지파에 비해 용감하고 탁월했습니다. 이 지파에게서 이스라엘이 제일 번창했던 ‘다윗’이 탄생했습니다.
야곱의 예언을 통해서 나타난 ‘유다’ 지파의 예언은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찬송 받으실 분이십니다.
‘유다’ 이름의 뜻이 ‘찬송’입니다. 그의 이름대로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1절)고 말합니다. 사람의 이름은 그 뜻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지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님께 해당되는 말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21:9)했으며 대제사장이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꾀하여 책잡으려고 할 때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막14:61)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 말이지만, 예수께서 찬송 받으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1:25)이라고 함으로 예수께서만이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임을 선포했습니다.

2. 원수를 이기신 분입니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1절)했습니다. 우리는 죄(사단)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이가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10) 이것은 예수께서 원수를 그의 죽으심으로 이기신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기자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히10:30)로 확실하게 예언된 말씀을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사자(狮子)이십니다.
“유다는 사자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같고 암사자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9절)고 합니다. 이것은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상징입니다. 구약시대 성전 칸막이에도 그려져 있었습니다(왕상7:9). 사자는 짐승들의 왕으로서 숲 속에서 사자가 울부짖으면 모든 짐승은 숨을 죽입니다. 그러나 그는 포악하고 성난 사자가 아니라 자기 힘을 원수를 이기는데 만 사용한 웅크린 사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예언된 이 말씀이 성경의 마지막 권 요한계시록 5장 5절에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기록되었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나님의 숨결이 베어있는 책입니다.

4. 홀(笏:홀홀) 이십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10절) 우리말 ‘홀(笏)’의 뜻은 ‘홀기(笏记)’의 준말로 혼례나 제례 때 의식의 순서를 적은 글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홀’은 왕권을 상징하기 위한 증표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통치자의 지휘봉’이라고 했으며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왕의 지팡이’로 번역했습니다. 족장시대에는 이 ‘홀’(증표물)은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였습니다. 우리나라 왕통시대로 말한다면 왕의 상징인 ‘옥새’를 말하는 것입니다. 족장시대 ‘옥새’는 지팡이에 새겨 가지고 다닌 것입니다. ‘옥새’도 새긴다 할 때 사용하는 ‘도장 새(玺)’자를 뜻합니다. ‘홀’로 번역된 이 단어 역시 하카크(qq’j;)라는 단어인데 “새기다, 제정하다, 통치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사야는 바벨론의 패망 가리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패권자의 홀을 꺾으셨도다”(사14:5)고 말했습니다.
야곱의 예언은 유다에게서 왕권이 떠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유다지파에서 왕이(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마27:37). 사람들은 예수께 ‘왕’이라고 조롱했지만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5. 실로(hlyvi)’이십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10절)의 본문은 난해한 본문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 같은 단어로 나타난 곳은 예루살렘 북쪽 약 48km떨어진 곳에 있는 ‘지명’이름입니다. 여호수아가 이곳을 본부로 장막을 쳤던 곳입니다(수18:1). 그러나 본문의 뜻은 장소를 말한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어떤 장소를 ‘오시기까지’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홀’에 대해서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실로’는 당연히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실로(hlyv)’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구약역본(LXX)은 ‘그가 그 자신으로 오시기까지’로 옮겼습니다. 표준새번역은 “권능으로 그 자리에 앉을 분이 오시면”으로 현대인의 성경은 “그 지팡이의 소유자가 오실 때까지”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분명 ‘실로(hlyv)’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있는 개역성경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어려운 원문과 여러 성경을 비교하여 말씀드리는 것은 이 문제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라”고 했는데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실로(hlyv)’의 어근 ‘솨라(hl;v;)’는 “안전하다, 성공적인, 잔잔하다, 평안하다”를 뜻하는 것으로 ‘평안이 올 때까지’로 다시 말하면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6)로 이스라엘의 인사말 ‘샬롬’(!/lv;)과 같은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들이 부른 노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부른 노래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눅19:38)에서 ‘하늘에는 평화요’로 찬송했습니다. 예수님께는 늘 평화가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진정한 평화와 평안을 안겨주실 분입니다.
인간에게는 죄로 인해서 불신과 불안만이 존재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독서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병사 한 사람이 와서 물었습니다.
“장군은 어느 때가 가장 두렵습니까?”
나폴레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발할 때가 가장 두렵다네. 면도사의 칼이 왔다 갔다 할 때면 으스스하기까지 한다네. 그래서 나는 면도할 때에는 부하를 시켜서 이발사의 아들의 목을 잡고 있게 하여 이발사가 내 목을 벨 때는 그 아이의 목도 잘린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네.”

나폴레옹과 같은 독재자에게만 두려움과 불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삽니다. 즉 이 세상에는 두려움과 고통이 그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겪는 불안과 괴로움은 죽음이 올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며 죽음 앞에서는 극도의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10절)의 ‘복종’은 복종의 의미도 있지만 ‘순종’의 의미도 있습니다. 결국은 사단과 믿지 않는 자들도 복종케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순종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8:27) 자연도 순종했습니다. 또 귀신들도 순종합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1:27)
믿지 않는 자들과 사단이 마지막에 예수께 복종할 때는 강제적인 것으로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가 됩니다.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11,12절)라고 했는데 히브리인들은 평화시에 나귀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대개 나귀는 잡목에 매어두기 마련인데 본문에서는 포도나무에 매어둔다고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땅이 축복을 받아 비옥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이 이렇게 오래 전 창세기에 이토록 정확하게 야곱에 의해서 예언되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 아닙니까? 또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녀가신 이후 성령시대에 살고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평안의 축복입니까? 이 축복의 기회를 놓치시지 마십시다.
우리에게 ‘홀(笏)’로 왕권을 가지시고 ‘실로(hlyv)’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 순종하심으로 영생을 소유하시는 축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6. 나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 본문 : 요6:35-51

여러분들 중에는 애완동물이나 난이나 분재, 꽃 같은 식물을 키우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은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것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먹이를 주지 않거나 물을 주지 않고 내버려두면 얼마 안 가서 죽게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절)고 하나님께서 왜 주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지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그리고 자꾸 잊어버려서 애완동물이나 식물을 못 키웁니다. 제게 맡겨진 것이 있다면 얼마 못 가서 죽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릅니다. 반드시 우리를 말씀하신 대로 살리십니다.
저는 먼저의 설교에서 생명이신 예수님과 부활의 예수님에 대해서 전했습니다. 부활은 우리도 예수와 같이 살아날 수 있다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것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죽은 우리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고, 우리의 생명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지막날에 만일 육체적으로 잠들어(죽어) 있다면 주님께서 일으켜 주시게 되고 잠들지 않았다면 주님과 같이 하나님께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날이 되기 이전까지는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때까지 먹고 마실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디베랴에서 떡과 고기를 축사하신 후 먹이신 사건을 기억하고 그곳에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와 제자들을 찾아보았으나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으러 배를 타고 좀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가버나움이 있는데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무리들은 이제 예수님을 만났으니 지난번 베풀어주신 것처럼 떡과 물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축복을 또 한번 기적을 일으켜 주시기를 원해서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서 표적을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표적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육체적인 배를 채우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늘 예수님과 사람사이에 잘 이해가 안 되는 문제는 예수님은 영적인 것을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표적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30절)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31절)고 했습니다. 이 질문으로 보아 그들은 계속해서 만나와 같은 떡을 지속적으로 먹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32절)의 대답으로 보아 무리들은 모세가 만나를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라는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오늘 말씀의 제목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35절)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입니다(33, 41절).
만나를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린”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십니다(38절).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었다는 육신 적인 것만을 기억하고 수군거렸습니다(42절). 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것을 강조하십니까? 그것은 이 땅의 것으로는 우리를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오는 신령한 것이 아니고는 우리가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전1:9),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14) 전도서 기자는 이미 해 아래서의 헛됨을 독백처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고 하셨습니다.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일 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제일먼저 가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주 구약의 에녹, 엘리야 같은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하늘에 올라간 자는 아니었다. 이 뜻은 단순한 하늘에 올라간 자의 의미보다는 부활의 첫 열매되심을 증거 한 것이다.).
예수님은 부자청년과의 대화에서 영생을 얻는 문제에 대해서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다는 뜻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만나만 먹으면 죽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출16:35)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죽었습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린 떡은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의 생명에 필요한 양식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보통 밤을 세끼를 먹습니다. 하루만 굶으면 금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난리가 아닙니다. 육체를 위해서 영양분이 필요하다고, 장에서 속이 비었다는 신호이지요.

예전에 가난했던 시절 어떤 주일학교 학생이 교회에 처음 나왔는데, 식사할 때 기도하고 밥 먹으라는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을 듣고는 집에 가서 기도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서 “하나님 어디계신지 모르지만 함께 드입시더”하고 혹시 어디선가 하나님이시라는 분이 나타나 금방 다 먹어버릴 것 같아서 단숨에 밤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나 살아있는 모든 동식물에게는 양식이 떨어지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6:11)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굶주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예수님도 육체를 위한 양식을 부정하거나 결코 필요 없다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진짜 관심은 우리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는 양식의 예표였습니다. 육체가 양식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도 양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3. 산(생명) 떡을 먹으면 영생합니다.
본문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32절) ou(우) “아니”는 문장 전체를 부정하는 의미로 볼 수 있는 “levgw”(레고) “말하다”의 다음에 ou\n(운)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떡은 모세가 준 것도 아니지만 그 앞에 나타나는 ou\n(운)은 그것은 “참 떡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광야에서 주신 만나는 그들의 육체를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히 살리는 생명의 떡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고 하시자 하늘에서 ‘만나’같이 내려오는 양식을 생각한 사람들은 실망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자신의 사업이 안되면 금방 실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식이 노력하지 않고 있는데 좋은 수험점수가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 실망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이 땅의 축복을 잔뜩 기대했다가 자기의 생각처럼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이 사람들처럼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수군수군 거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43-44절) 여러분 지금 축복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얼른 생각하면 급한 것이야 지금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다시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 없는 것입니다.

“난 더러운 똥인데,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아무 짝에도 쓸 수 없을 텐데……” 강아지 똥은 쓸쓸하게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봄이 한창인 어느 날, 그 강아지 똥 위에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강아지 똥이 민들레가 자라도록 거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할 화목 제물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흘려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된 것입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자에게는 예수 안에 거하는 축복을 주십니다.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56절) mevnw(메노) “거하다, 거주하다, 남아있다”의 이 말은 요한의 주요 신학적인 주제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삼위일체교리가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안에 “거하고”(요14:10), 성령님이 예수님에 “거하며”(요1:32),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께서도 그들 안에 “거합니다”(요6:56, 요15:4, 참고 요일2:6, 27, 28, 요일4:12에서도 나타난다.)
이 말은 단순한 영적 교감의 수준을 넘어 본질상 하나가 되는 영적 교통함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거주하고 내가 예수께 거주함”을 말하는 것은 예수와 함께 살아있는 상태임을 말합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표현은 신, 구약에서는 많이 발견됩니다만(수3:10, 삼상17:26, 삼상25:26, 왕하19:4, 사37:4, 렘10:10, 마16:16, 마26:63, 롬9:26, 고후3:3, 딤전4:10, 히3:12, 히9:14, 히10:31, 히12:22, 계10:6) “살아계신 아버지”(57절)라는 표현은 본 절이 유일한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원이 아버지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주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샘터라는 잡지에 있던 글입니다(저는 엄호섭님의 ‘우리에 들지 않은 양’에서 옮겼습니다).
글의 제목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입니다.
어느 중년 여인이 유복자를 낳아 너무 귀하게 키웠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아들의 모습에 어머니는 삶의 보람과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 아들의 모습에서 먼저가신 남편의 추억을 느끼며 겨울밤을 외롭지 않게 보내곤 했습니다.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의 모습이 너무나 대견하여 하루종일 아들만 쳐다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들은 친구가 생기고 등하교 길에 “엄마”라는 목소리로 집에 돌아왔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학교에서 올 시간이 넘었는데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온 한 통의 전화는 어머니의 모든 꿈을 산산이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삶의 의미도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도 잃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에게 긴장감 마저 주었습니다.
며칠 후 이상한 일이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일어났습니다. 소복 차림의 어머니 한 분이 복잡한 횡단 보도에서 등교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개구쟁이 어린이들이 모두 길을 건넌 후 확인하고 피켓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손에 든 교통 통제용 피켓에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적혀있었습니다.
무엇이 무슨 힘이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이 여인의 눈에 눈물을 머금게 했겠습니까? 이 여인은 아들이 죽어 한 맺힌 그 삶을 포기했어야 했는데 아들의 죽음과 어머니의 삶 가운데서 위로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감사의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은 곧 “살아 계신 아버지”품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 안에 거하여 이와 같은 위로와 영생의 축복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