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잔치에 오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마 22:1-5)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시 50:2) 고 하셨습니다.
광부 구조팀이 622m을 뚫고 캡슐을 준비해서 내려보냈습니다. 구조를 기다리던 광부들은 순서를 짜고 차례대로 캡슐을 타고 올라와 구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622m가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멀고 먼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구조타입캡슐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만 믿으면 구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부들이 그 수고에도 불구하고 만일 타지 않겠다고 버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구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구조 팀의 실망은 말로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준비해 놓으신 구조의 캡슐을 타지 않겠다고 버티면 주님이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그냥 타기만 하면 됩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이 초대를 거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실 초대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현대시대는 너무 상업적인 초대가 많습니다. 지난번에 교회로 극장 영화무료상영권이라고 여러 장이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장씩 나눠주려고 기분이 좋아서 있는데 선교회에 목사님이 한 분 오셔서 말씀드렸더니 자기네 교회도 와서 가봤는데 안가는 게 좋다는 겁니다. 영화상영하기 전에 약을 파는 모양입니다. 그것을 한참 듣고 영화구경 해야 되는데 성도들한테 욕먹었다는 겁니다.
요즘은 공짜라면 조금 의심을 해봐야 되는 시대이다 보니 예수님의 초청도 의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 혹시 공짜로 구원해 주겠다고 하고서 헌금만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교회에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겁도 나는 모양입니다. 혹시 힌옷 입고 일도 안하고 산에 올라가 예수님 기다리다가 다 죽이는 것은 아닌지? 거짓 선지자들, 목사들, 전도자들이 용서받기 힘든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적으로도 너무 많은 잘못을 사람들이 저질러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늑대가 온다해도 믿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성경을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예수님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거짓 증인들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용어가 있다면 ‘오라’는 것입니다.
여러 오해를 가지고, 집나간 자식에게 부모님이 뭐라고 합니까?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하자! 너 어디니, 빨리 들어와!” 그러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따져도 하나님께 나와서 따지십시오. 밖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보살펴 줄 수가 없습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있습니다. 완벽하게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밖에 있으면 도와줄 수 없습니다.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칠레 광부들에게 구조캡슐 내려보내고 이걸 타려면 돈내야 된다고 하면 이해가 됩니까? 거기서 누가 돈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또 구조팀이 돈 받으려고 그 일 했습니까? 생명을 구하는 일은 돈 받지 않습니다. 사람도 그런데 하나님이 돈 받고 구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돈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빚 진자가 갑니다. 죄인들이 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목마른 사람들이 갑니다. 이 세상에서 배부른 사람들은 못 갑니다. 영적으로 목마른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옆에 아내가 있으면 고백하기 어렵지만 여러분! 혹 청혼을 했는데 거절당하신 분 있습니까?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고백했다가 오늘 큰일납니다. 만일 경험이 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습니까? 결혼한 분들은 거절 안 당하셨겠네요. 여기 처녀 총각들이 경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거절당했으니까 아직 혼자이겠지요. 제가 너무 아픈 가슴을 찔렀나요. 그렇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살맛이 안 날 정도로 기분이 나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끈질기게 설득하고 계십니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렘 7:13) 그러나 하나님도 거절 당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거절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주님을 더 이상 문밖에 머물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따뜻한 밥 한끼는 대접했습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곳에 오셨습니다. 나를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지신 십자가입니다.
선택은 내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을 영접해야 마지막 날에 주님의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을 사귀어 두어야 합니다. 지금 주님과 친구가 되고 친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음성을 듣고 구원해 주십니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시 95:7)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3-5)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우리를 얼마나 원하셨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화려하게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고 마지막 주간을 보내셨습니다. 첫날은 월요일은 화려한 입성 식이 있었지만 저녁때는 성전 이곳 저곳을 다니시다가 비둘기 팔고 돈 바꾸는 이들의 상을 업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설교, 마지막 성만찬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시간은 정점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목요일 밤, 그것도 한밤중입니다. 동산은 풀 벌래 소리와 저쪽 계곡을 지나 예루살렘 성에서 간혹 빛나는 불빛이 비쳐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마지막 밤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이 별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이날 밤, 마지막 밤만큼은 제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코를 골며 잡니다. 피곤한 것입니다. 지쳐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날 밤만큼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날 밤에 예수님의 기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나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잤습니다. 예수님 혼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 우리가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기도가 들려야 합니다. 내 가슴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홀로 계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싸움은 해보아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으로 사탄과의 마지막 싸움이 끝난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님 편지 제목에 “열방 보다 골방이 크다”고 했습니다. 열방으로 가려면 먼저 골방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다락방으로, 골방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싸느란 밤에 홀로 계신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겟세마네에 홀로 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과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혼인잔치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본문에 “3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 5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왜 혼인잔치에 가지 않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일에 바쁜 겁니다. 그런데 혼인잔치는 매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석하고 와서 다음에 자기 일하면 됩니다. 혼인잔치는 누구나 잘 준비합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준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혼인잔치입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아들이는 시간입니다.

“혼인 잔치에 오라”함은 케크레메누스인데 이 말은 칼테오 부른다, 초대한다의 현재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의 자리에 계속적으로 초대되어져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처음 초대한 사람들이 오지 않았지만 혼주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초대가 마치는 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장만한 음식을 다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시장에 가서 사람들을 모아옵니다. 이 사람들은 예복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도 와서 음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초대는 되었지만 다 선택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초대되고 있습니다. 그 문은 아직 열려져 있습니다. 그 문은 교회의 문입니다. 교회는 초대된 사람들을 계속적으로 오게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초대된 것으로 만족하시면 안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해서 선택이 되어져야 합니다. 영적으로 주님과 혼인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겟세마네에 있는 주님을 만나러 가는 겁니다.
사람이 많고 화려한 곳, 그곳에만 주님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큰일납니다. 주님은 어쩌면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 25:44-4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 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이 어디입니까? 주님이 오라고 하신 곳이 어디니까? 그곳에서 혼인잔치가 열립니다. 주님이 계신 예식장을 바로 찾아 가시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주님을 화나게 하지 마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1:12-13)

예전에(1989 ?) 한겨레신문에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하나님’은 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이며 ‘하느님’이 문법상 맡는 용어라고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답해서 왜 개신교에서 하나님으로 사용하는지 다시 써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감사하게 독자투고란에 제법 크게 싫어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겨레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는 겁니다. 혹 원고료라도 주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벌써 유명해 졌나? 아마 면도하다 받았는지 약간 베었습니다. 피도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흥분해 뛰어나오다 책상에 발이 걸려 그렇지 않아도 파고 들어가는 발톱 때문에 아픈 엄지발가락이 뼈저리게 아팠습니다. 얼굴엔 피가 묻어 있고 발은 아파 절뚝거리면서 수화기를 잡았습니다. 숨을 벌떡거리며 “전화 받았습니다.” “여기는 한겨레신문사입니다. 선생님의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 다음에 “저희 신문사에서 나오는 한겨레21을 1년 간만 구독해 주세요. 5만원이면 됩니다.” 저는 6개월만 구독하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실망이 얼마나 컸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은 단지 나의 돈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실망이 크겠습니까? 그 사람이 장사꾼이라고 해도 화가 날 것입니다. 하물며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면 얼마나 망연자실하겠습니까?

때때로 종교가 이익과 특권을 위해 이용되었는데 그럴 때는 으레 두 가지 결과가 따라다니게 됩니다. 사람들의 착취와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서 제일먼저 성전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주말이 되면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십자가에 죽으심을 알고 계십니다. 지금은 월요일입니다.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실 때 나귀새끼를 타셨지만 나름대로 화려한 입성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왕의 행렬처럼 호산나를 외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유월절 기간이기 때문에 사람들로 성내는 붑벼습니다. 이제 그 호산나 찬양 소리가 사라질 무렵 저녁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막 11:11)고 했습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성내를 가득 메웠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보신 것은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비둘기사고 돈 바꾸느라 사람들은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완전히 성전이 시장 바닥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13절)

무엇이 예수님을 이토록 분노하게 만들었습니까?
신앙을 빙자하여 특권을 누리고 있는 성전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는 유월 기간이기 때문에 전국에 있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제일 큰 명절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절기이기도 합니다. 전국각지와 여러 나라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두 가지 의무를 이행해야만 했습니다.

첫째는 희생양이나 비둘기를 드려합니다.
자신을 대신하여 죽어야 할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키우던 것이나 1년 동안 준비해서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몰론 사람들은 동물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준비해 간들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상하게 다른 곳에서 가져온 동물은 흠이 있다고 불합격 판정을 받는 겁니다. 따라서 성전 안에서 산 비둘기 만이 흠이 없는 것으로 판정이 나 자기 내들이 파는 비둘기만 희생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렇다보니 부르는 게 값이었습니다.

둘째는 성전 세를 내야했습니다.
일년에 한번씩 부과되는데 유월절 기간에 제사장들이 정한 이 지역의 화폐로만 내야 했습니다. 외국 돈 뿐만이 아니라 자기들의 돈도 바꾸어야 했습니다. 수수료 또한 자기들 마음대로 챙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유월절에 참여하는데 왜 이렇게 복잡한 겁니까? 돈이 없으면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합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강도들이 지키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꾼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참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충동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돈이 없어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기도하러 가야 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사람일수록 더 하나님을 만나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못 만납니다.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출 22:22-26)

가난한자를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에 9:22) 부림절에도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날입니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시 9:12) 고 하셨습니다. 이런 증거는 성경에 깔렸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난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강매의 경험을 한두 번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주 사람이 기분이 나쁩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이용하여 강매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딛 1:11)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돈벌이되는 환자만을 좋아한다면 큰 문제 아닙니까? 제가 치아가 많이 안 좋아 치과에 자주 가는 편입니다. 제 생각이 잘못되었기를 바라지만 치과에 가면 제 치아를 보면 의사선생님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돈벌이되는 환자가 왔다는 거지요. 한번은 지금까지 잘 사용하는 치아를 다른 곳에서 하고 왔는데 잘못 되었다고 빼고 다시 해 넣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고집부리고 안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잘 쓰고 있습니다. 환자를 고쳐 통증을 없애주고 치료해줄 생각은 없고 돈벌이만 관심을 가진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빙자한 돈벌이 수단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7-18) 고 했습니다. 결국 이런 유대인에게 내린 하나님의 뜻은 이제 더 이상 특권층으로, 선택받은 선민으로 남겨두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하나님의 성전을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는 이스라엘사람에게 더 이상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천국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다른 백성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든지 이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롬 11:21) 무서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적당히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에 거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영적인 생활을 위하기보다는 육을 먼저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적인 육신 적인 성장과 성공에 지나치게 현혹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큰 교회를 건축하지 못한 목사는 실패한 목사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좋은- 차를 타지 못하고 큰집에서 살지 못하면 실패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공의 여부는 천국에 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겁니다. 영적인 삶입니다. 이런 말씀드리면 오해하실 지 모르지만 큰 회사 다니다 나오신 분들 보면 자기가 먼저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다녀도 되는데 집사람 말리는 대도 더 이상 동료들, 부하직원들 잘리는 것은 볼 수 없다고 자기가 나온 겁니다. 세상 적인 관점에서는 별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직장 일찍 쫓겨난 무능력한 사람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 까지 나만 잘살지는 마십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월요일 저녁은 이렇게 지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주변 감람산 기슭에서 밤을 새우시고 화요일 아침에 예루살렘 성을 다시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긴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면서 저들의 영혼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입니다(마 21:33-45).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세 주고 떠났는데 저들은 주인의 아들이 오자 죽였다는 겁니다. 이 예루살렘의 주인은 하나님이 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성전에도 못 들어갈 형편입니다. 결국 아들을 돌로 쳐서 죽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혼인 잔치를 배설한 왕의 이야기입니다(마 22:1-14).
여기서도 보냄을 받은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 청함에 응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반응입니다.

백화점에서 놀이공원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더 이상 쇼핑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흥미도 없는 일입니다. 아이가 없어졌는데 지금 그 아이를 찾는 일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에너지는 아이를 찾는데 집중될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구하기 위해 지불해야하는 값은 그것이 얼마 건 결코 비싼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에너지를 쏟아도,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 자식을 찾기 위한 길은 아무리 멀어도 갑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의 그 손길 느껴보십시오.
노아는 구름이 걷히고 무지개가 나타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은 사라의 태에 손을 대면서 그것을 느꼈습니다.
야곱은 실패를 통해서 그것을 알았습니다.
바로도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나 그는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로 그 민족이 바로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청함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의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처절한 고통과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릴 뿐입니다.

오래 전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들렸던 하나님의 음성을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30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31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32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34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4:30-35)

세상을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상고해 보십시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더 위대하신 일이 있는가? 우리에게는 십자를 지고 가신 예수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나를 위해 오신 분이 있습니다. 이 방법 위에 더 좋은 길이 없습니다. 새롭게 놓인 길입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청함입니다. 거절하지 아니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새언약의 일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전 3:6)

이모(18)군은 1992년 2월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른바 90년도에 유행했던 원정출산아입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1987년 미국 영주권을 취득했지만 주로 한국에서 살다가 1992년 1월부터 3개월 동안만 미국에 머문 뒤 아들과 함께 귀국해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습니다. 한·미 복수국적자가 된 이군은 지난해 12월 법무부에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하지만 법무부는 “한국 국적을 이탈하고 싶으면 먼저 병역의무부터 이행하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출생은 미국에서 했지만 살지 않았고 국적만 취득해 갔고 있다가 군대갈 때가 되니까 대한민국 국적은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택하겠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혜택은 누렸지만 의무는 안 지겠다는 겁니다.

KBS1 일일극 ‘바람불어 좋은 날’에 보면 오복이는 아이가 있는 남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친 엄마 미란이가 나타나 결혼생활을 방해합니다. 아이만 나 놓고 미국으로 떠났던 미란이를 아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책임은 지지 않고 엄마 역할만 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의 의무는 버리고, 아무 책임은 가지지 않고 천국만 가려고 한다면 양심 없는 이중 국적 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보내신 것을 약속을 지키시고 책임을 지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책임을 지키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약속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구약, 신약이라고 부릅니다. 둘 다 무엇을 강조합니까?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구약에서 다른 말로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창 6:18) 라고 하셨습니다. 무지개도 하나님이 다시는 이 땅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표로 주신 것입니다(창 9:16-17).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출 34:10)
하나님은 나타나셨다하면 사람하고 언약을 세우십니다. 노아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모세에게도 언약을 세우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있었던 사람하고 약속을 하신 것하고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약속을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만들어 가지고 올라갔던 궤를 ‘언약궤’라고 부릅니다. 약속의 박스입니다. 그 약속의 궤가 가면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습게 생각하는 국가와 민족과 개인은 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왕상 8:1) 다윗이 건축하려고 했던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아들인 솔로몬이 건축합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이 성전으로 가지고 옵니다. 성전이 왜 필요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또 그곳에 우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저희와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왕상 8:21) 언약궤가 없다면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의 목적은 언약궤를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때에 요한계시록에서 천사가 일곱째 나팔을 불 때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9) 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단 9:4) 가고 고백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말 2:4)
바로 이 증거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지막까지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실 약속은 우리가 여겼는데 하나님은 먼저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지 못한 약속을 대신해서 책임을 져 주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막 14:24)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새 언약의 피입니다. 피로서 새우신 언약입니다.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세우신 것입니다.
누가는 이에 대해서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눅 1:72)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랜 약속에 의해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갑자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에 뭐가 있었지요? ‘언약궤’입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에는 무엇이 있어야 교회가 됩니까? ‘예수’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언약의 피입니다. 이 약속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를 보혈이라고 말합니다. 그냥 피가 아닙니다. 보혈입니다. 보혈을 가진 교회, 성도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힘은 세상 적인 힘이 아닙니다. 보혈입니다. 세상 적인 기준으로 교회를 보면 안됩니다. 학교는 병원은 큰 곳이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간혹 세상의 힘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교회, 목사, 성도가 있지만 모두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려고 노력할 것은 보혈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보혈을 가진 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일꾼이 일할 때 약속하지 않고 하는 사람 있나요? 없습니다. 다 약속이 있는 겁니다. 얼마큼 일할 태니 얼마를 주겠다는 약속이 다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ㅣ22)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못 믿지만 예수가 보증입니다. 천국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일꾼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역사는 한가지 큰 원리를 가지고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그 속에는 상이한 두 개의 도시가 존재하는데 인간은 어느 한쪽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의 인간의 도시로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도시와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도시가 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중심으로 사는 사람과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 자기를 위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남을 위한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이 자신만을 위한 복음이었다면 신약을 남을 위한 복음입니다. 구약이 이스라엘민족 복음이었다면 신약은 이방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음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본문에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은 영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육인 무익합니다. 육이 우리의 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의 육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고 합니다. 영혼이 잘되고 다른 것이 잘되어야 합니다. 영혼은 엉망인데, 영혼은 죽었는데 다른 것이 잘되면 뭐합니까? 영혼을 위해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현대교육학사전에서 교육을 정의하기를 “인간의 능력과 행동을 발달시키는 전체 과정, 그리고 사회적 경쟁과 성장을 이루게 하는 사회적 과정”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교육의 출발점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을 상실한 점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품이 어디서 오게되는지는 모르고 인간의 소질만 개발시키고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중심 축은 소외시키고 주변 기능과 유능성을 함양하는데 교육의 목적을 두게된 것입니다.
갈릴레오는 “하나님이 없는 교육은 지혜 있는 악마를 만들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일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사,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에 성경이 다 들어있습니다. 주일 짧은 시간에 성경을 다 가르칠 수 없지만 성경을 요약해서 다 고백하는 겁니다. 이것이 별것 아닌 것이 아닙니다. 모든 운동경기도 기본자세가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고백은 인간의 기본을 가르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근육디스로피협회를 만든 분이 계십니다. 일명 근육병입니다. 이분이 마음에 가지고 있는 상처는 초등학교 때 체육시간에 다리에 힘이 없어서 자꾸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원인을 묻지도 않고 아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근육병 때문에 다리에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인격교육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 영역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전 미국 카터 대통령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 잘한 것이 무엇이냐고 했습니다. 자신이 제일 큰 축복을 받은 것은 첫째, 예수 믿은 것이고, 둘째, 교회에서 집사가 된 것이고, 셋째 하비타드를 세워서 남을 위해 종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위해서 일하시고 할 때 한가지를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닙니다., 신약 이후에 살고 있습니다. 신약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약속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갈 때 아이들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놀렸습니다. 이 때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왕하 2:24) 우리는 지금 이런 구약시대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대머리라고 놀렸다가 다 죽임을 당해야 하는 엘리사 시대가 아닙니다.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눅 9:51-56)
좀 돌아가면 됩니다. 길 가로막았다고 다 죽여버리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사마리아 사람하고 예수님하고 원수지간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누구를 저주하시고 원수를 맺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시면서도 그 원수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밤에 가룟유다하고 군병들이 찾아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방어하고 나섰습니다.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1)
예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군병들에게 초라하게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 두려움에 떨게 하고 죽여버릴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면 육신의 방법을 쓰는 겁니다. 미란이 아버지처럼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힘이 있으면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래서 하나님이 능력을 안주십니다. 주시면 그 능력을 다 죽이는데 결국 사용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다 죽여버릴 것입니다.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 만일 그것을 넘겨 매를 지나치게 때리면 네가 네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하노라”(신 25:3)
잘못을 저질러 태형을 때리지만 그러나 40대 이상 때리면 안됩니다. 자꾸 때리다 보면 경히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을 무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잘못이 있어 때려야 하지만 무시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도 회개하고 다시 잘 살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살면 잘됩니다. 지금 왜 매를 때립니까?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복음의 일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남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모든 나라 사람을 존중하기를 바랍니다.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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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 19 그의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수8:18-19)

동서양을 막론하고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옛날, 옛날에 토끼와 거북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토끼는 매우 빨랐고, 거북이는 매우 느렸습니다. 어느 날 토끼가 거북이를 느림보라고 놀려대자, 거북이는 토끼에게 달리기 경주를 제안하였습니다. 경주를 시작한 토끼는 거북이가 한참 뒤진 것을 보고 안심을 하고 중간에 낮잠을 잡니다. 그런데 토끼가 잠을 길게 자자 거북이는 토끼 옆을 한참 지나가고 잠에서 문득 깬 토끼는 거북이가 어느새 경주를 마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우화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에 살던 노예였다고 합니다. 이솝우화로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들을 17세기 라퐁텐이 책으로 출간한 뒤로 우리들은 더 쉽게 이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우화에서는 인생을 경주에 비유했고, 토끼는 나태한 인간, 거북이는 성실한 인간을 상징한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반대로 거북이가 토끼를 보고도 그냥 지나쳤기 때문에 공정하지 않다고 보고, 거북이가 더 나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태한 토끼에게서 교훈을 얻으려는 데 초점을 맞추지만 서양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한 거북에게서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나태한 것보다 정직하지 못한 것을 더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거북이가 토끼를 깨워서 정정당당한 게임을 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가나안땅을 보고 죽었고 이제 이스라엘의 인도자는 여호수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목전에 있습니다. 그러나 첫 성인 여리고성은 가나안의 제일 큰 성입니다. 구약성경에 65번이나 언급된 오래된 성입니다. 여리고 성이 창세기 28:19에는 ‘루스’라고 나옵니다. 이 성을 뚫어야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여호수아 6장에는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천사가 지시한 방식대로 언약궤를 앞세워 여리고성을 육일 동안 돌고, 제 칠일에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이 고함을 쳐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여리고성의 정복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리고 성의 고고학적 발굴은 1868년부터 시작되었고 1930-1936년에 John Garstang 에 의해 발굴되었습니다. 가스탕(Garstang)과 올브라이트(Albright)는 B.C. 1400년대로 추정되는 일련의 무너진 성벽들의 잔해를 발굴해냈습니다. 이는 자연적으로 풍화되거나 버려져서 무너진 성벽들이 아니라, 드라마틱하게 무너져 버린 성벽들로 드러났습니다. 이는 여호수아의 여리고성 정복을 B.C. 1400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큰 성을 무너뜨린 이스라엘백성의 다음 목표는 아이성입니다.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해서 보 잘 것 없는 작은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와 달리 해발 800m 산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평지 전투는 정면대결양상이지만 산지는 다릅니다. 군사가 많다고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작은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대패합니다. 여호수아는 첫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옷을 찢으며 땅에 엎드려 흑을 뒤집어쓰고 하루종일 통곡합니다(수 7:6). 그러면서 차라리 요단 저쪽(동쪽)에 그냥 있는 것이 더 좋았을 뻔하였다고 합니다(7:7).
어마어마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별것 아닌 아이성 때문에 이 고생을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적으로는 6.25를 겪었고, 60-70년대를 이겨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국가적으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도 여리고성과 같은 성을 무너뜨리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 작은 아이성 때문에 우리는 좌절하고 낙담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여호수아가 요단 저쪽에 그대로 있었을 것 괜히 여기까지 들어왔다고 하는 것처럼, 결혼하지 않고 그냥 사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괜히 교회 나왔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철저히 분석하고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우리에게 이런 실패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아이성 전투의 1차 공격의 제일 큰 실패 원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간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수 6:18)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수 7:11)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몰랐습니다. 왜 전투에서 졌는지 누구 물건을 빼돌렸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시고 계셨습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수 7:21)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거짓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모든 것이 용서와 축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즉결심판이 딱 한군데 나옵니다. 그것은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다가 마음이 변한 사건입니다. 땅 팔아 절반만 바쳐도 많이 바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께는 지금 많고 적은 것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아간이 가지고 있던 물건을 빼앗아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수 7:26)

여러분! 하나님 것 내가 못 같습니다. 하나님 것 가지고 있으면 바로 드려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법궤를 가져갔다가 혼 줄이 납니다. 하나님이 주셨을 때만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것은 가지고 있으면 화만 불러옵니다.

여리고 성의 것은 가나안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얻은 첫 결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그것을 나에게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이성의 것은 달랐습니다.
“…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수 8:2) 첫 번째 여리고 은금 동철은 하나님께 드리고(수 6:19), 성의 소와 양과 나귀는 죽이라고 했습니다(수 6:20). 그런데 아이성의 것은 다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이성 뿐만이 아닙니다. 앞으로 점령하게 될 모든 성은 아이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다 주시는 것입니다. 다 차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 땅으로 인도하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못 참고 욕심을 내었던 것입니다. 기다리세요. 결국 우리에게 다 주십니다. 미리 하나님의 것을 탈취하지 마세요.

사람의 말을 의지했습니다.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수 7:3)
여호수아는 아이성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정탐한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 보고하고 그들은 상대를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아이성이 작으니까 한 3천명만 보내도 넉넉히 이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얼마 전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본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매일 매일(6일 동안) 돌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 성이 크고 두려우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성은 자기들끼리 쳐서 이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를 않습니다. 언약궤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앞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하나님께 먼저 기도했다면 아간의 일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의지했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사람에게 두면 안됩니다. 부자에게 의지하면 안됩니다. 지식에 학벌에 의지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아루 아파트에 1억이 넘는 차가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거 모릅니다. 1억 짜리인지 예지아빠가 알려줬습니다.
여러분! 큰 것, 비싼 것 만 좋아하지 마세요. 사람에게는 자기에게 맞는 것이 있습니다. 신발이 맞아야 합니다. 옷도 맞아야 합니다. 여러분 맞지 않으면 큰 신발 신고 다닐 수 있습니까?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의지하세요. 그것이 성도에게 맞는 것입니다.

전심 전력하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의 정탐꾼들은 3천명만 보내면 된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먼저 “이에 여호수아가 일어나서 군사와 함께 아이로 올라가려 하여 용사 삼만 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수 8:3) 라고 했습니다. 있는 군사가 놀면 뭐합니까? 힘을 보태야 합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3만 명을 보내라고 합니까? 사람은 3천명만 있으면 된다는데 하나님은 3만 명을 보내라고 합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은 사람의 힘에 의지한다고 숫자에 의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은 유일하게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을 더 많이 보내십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적게 보낸 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교만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아직 부족하다 늘 그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가야 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나태함입니다. 저만큼 믿음생활하면 되었다 하는 것이 없습니다. 20번 넘게 성경 쓰신 분이 있습니다. 계속 씁니다. 시험은이요 머무는데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개인으로서는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나태하게 정치하고 살면 대통령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망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외국에 많이 나갔는데 외국에 가서 가능하면 밤에 잠을 안자고 한국으로 얼른 돌아온답니다. 수행원들이 많아 하루 밤 더 자면 호텔비용이 많이 나와서 비행기에서 자면 되지 하고 돌아온답니다. 두바이 왕자들은 하룻밤에 몇 천 만원 하는데서 자고 비행기도 천 만 원씩 되는 것 타고 다니지만 우리 대통령은 호텔비가 아까워서 호텔에서 안자고 돌아옵니다.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도 가도 갈곳이 있습니다. 교만하면 안됩니다. 허리를 동여야 됩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도울 곳이 많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삼상 7:3)고 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세상과 친구가 되지 마시고, 하나님과 친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전략이 없었습니다.
여호수아는 3천명을 아무 전략 없이 그냥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전략을 보십시오. 10배를 더 보내시고도 전략을 수립합니다. 숫자적으로만 우세하다고 그것만 믿으면 안됩니다.
“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너희 손에 주시리라”(수 8:7)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거짓으로 패한 척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매” 유인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9절 “그의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협공, 철저하게 준비된 전략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여리고 성처럼 단번에 무너뜨리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왜 이처럼 수고로운 방법을 일러주셨을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만 만나를 먹었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와서는 만나가 끊어 졌습니다. 가나안땅에 토산품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 하라는 것입니다. 전쟁에서이기는 법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도저히 우리의 힘이 한계가 있을 때 도우십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사람은 돕지 않습니다.

본문 18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르키십시요. 우리의 전략을 통해 가리키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재능을 활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단창이 있습니다.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제일 잘 나가는 인기 여 그룹이 있습니다. 이 그룹은 시집가면 끝납니다. ‘소녀시대’입니다. 요즘 일본에서도 아이튠즈(iTunes) 뮤직비디오 차트 1위를 비롯해 일본 최대 음악 사이트 및 각종 음악 포털에서도 인기 최고입니다. 한국 욘사마만 좋아했는데 이번에는 소녀시대가 휩쓸고 있습니다.
이 그룹이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것은 일단 머리 수(멤버)가 많습니다(9명). 윤아, 수영(170), 효연, 윤아-유리(코수술만 함 167), 태연, 정수연-제시카, 태연-티파니(162), 이순규-써니(158), 서현(자연미인 168) 많다보니까 이중에 한 명만 좋아해도 인기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준비와 연습입니다. 대충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수준으로 철저히 준비합니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키가 큰 수영이와 유리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키가 제일 작은 써니(158)도 인기가 많답니다. 초등학생들이 제일 좋아한답니다.

유대인의 격언에 인정받지 못하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담보 없이 돈 빌려주는 사람, 공처가, 그리고 도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제가 선교하면서 제일 많은 받는 이야기 중에 성령으로 하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입니다. 압니다. 성령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략, 노력이 필요합니다. 집중이 필요합니다.
단창(키돈)은 긴 창이나 방패가 아닙니다. 사실 그렇게 훌륭한 무기는 아닙니다. 창도 창이지만 정신력입니다.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그리스 스파르타군사 훈련에서 한 병사가 부러진 짧은 칼을 가지고 연습했습니다. 칼이 작으니 불리합니다. 그래서 대장에게 가서 부러지지 않은 온전한 칼로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이때 대장이 말하기를 ‘부러진 칼이기 때문에 남보다 한발 앞서 적을 찌르도록 연습하라’고 하고 그냥 돌려보냅니다. 단창이 문제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력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단창입니다. 뭐 그렇게 많은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큰 교회도 아니도, 물질도 부족합니다. 단창입니다. 그러나 단창을 들어 세상을 가리키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꿈을 꾸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 28:10-16)

2단지 입구에 보면 자동차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말뚝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곳은 돌 같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은 철로(스텐레스) 만들어져 있습니다. 한 두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그 통을 손바닥으로 두드려 보는 것입니다. 한참을 두드리다가 또 옆으로 가서 다른 통을 두드립니다. 엄마는 가려고 서 있는데 이 아이는 가지 않고 이통 저통 두들겨 봅니다. 이 아이에게는 호기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이 아이에게 꿈을 꾸게 합니다. 이다음에 커서 해 보고 싶은 것이 많이 생기게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기쁨을 얻게 됩니다. 바로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아이들과 같이 꿈만 꿀 수 있다면 어린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의 특징중의 하나는 꿈이 있다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베푸신 첫 이적은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요 2:1-10). 어머니 마리아가 난처한 표정으로 예수를 바라보며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의논했을 때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아닙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혼인잔치의 기쁨을 망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만들어 내셨습니다(요 6:9-13).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면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위로 하셨으며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꿈은 헛된 꿈이 아닙니다. 우리의 꿈은 이루어지는 꿈입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의 꿈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꿈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 땅에 잠시 살면서 무슨 꿈을 못 꾸겠습니까? 꿈을 꾸세요.

페르디난드 데 레세피는 1854년 이집트로부터 수에즈 운하 건설권을 획득하여 1859년 4월 공사를 시작한 뒤 10년만인 1869년 개통시켰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도 그는 그렇기 때문에 더 성공시킬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감, 열정,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일했습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파나마 운하에 도전합니다. 그는 1879년 파나마 운하의 공사권을 파나마 정부로부터 따냅니다, 하지만 10년 뒤인 1889년 이 공사를 성공시키지 못하고, 그와 함께 그가 운영했던 회사도 파산하고 맙니다.
나중에 미국 정부가 사들여 완성하지만 사실 레세피가 시작하지 않았으면 파나마 운하는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파나마 운하도 그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불가능해 보이고 어려워 보이지만 시작을 하세요. 내가 못하면 다음 사람이 합니다. 다음 세대가 합니다. 그것이 선한 일이라면 포기하지 마세요.
징기스칸은 “한 사람의 꿈은 꿈으로 남지만 만인의 꿈은 현실이 된다”고 했습니다.

“Boys,Be ambitious!”(젊은이들이여 꿈을 가져라) 널리 알려진 이 말은 19세기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물학자이며 농학자였던 미국 윌리엄 클라크 박사가 한 말입니다.
매사추세츠 주립농과대학 학장이었던 그는 1876년 7월 일본 삿포로 농림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했습니다. 그의 일행이 처음 일본에 도착했을 때 유난히 ‘큰 짐’을 본 장학관이 “무슨 짐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성경이지요.”
“성경은 가르칠 수 없는데요.”
“그러면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가겠다는 말에 크게 당황한 장학관은
“강의 시간 이후에 가르치시지요”라고 허락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농업기술을 전수하는 한편 ‘성경에 인생의 꿈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임기를 마친 후 그는 고별사에서 ‘젊은이들이여 꿈을 가져라’란 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일본 삿포로농과대학 교정에 세워진 그의 동상에 이 세계적인 명언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경에는 인생을 살리는 ‘꿈’이 있습니다.

중국에 선교사로 간 허드슨 테일러가 1847년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는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수개월 동안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에 달린 줄을 잡고서야 간신히 옆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너무도 허약했기 때문에 편지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편지를 받아쓰게 했습니다. 침대 발치 벽에는 커다란 중국 지도를 걸어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계획을 구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허드슨 테일러는, 아직 들어가지 못한 중국 내륙에 있는 9개의 성에서 개척 선교를 할 18명의 선교사 후보생을 모집하였습니다. 누군가와 시간을 많이 보내면, 그 사람의 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함으로써 시작됩니다. ‘다음에는 무엇을 할까요? 주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꿈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향한 주님의 사역 중에서 제사 감당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되고서도 꿈이 없다고요. 저는 단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분은 기도하지 않는 분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꿈을 꾸게 합니다. 하나님이 꿈을 갖게 하십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잘 보이는 벽면에다 이 계획을 붙여 놓았습니다. 어느 것도, 심지어는 병마도, 중국 내지를 복음화 하려는 그의 꿈을 막지 못했습니다.

최근 “순교자의 소리”측은 중국으로 사람을 파견하여 왕 다오(40) 목사를 접견했습니다. 왕 다오 목사는 광조우시의 리앙그렌교회에서 목회 하는데, “공공 질서 교란을 위해 폭도들을 규합”한 혐의로 지난 해 5월에 체포되었다가 몇 주만에 석방된 적이 있습니다. 중국 당국은 계속해서 그를 감시하며 최근에 중국 당국은 수감과 추방 가운데 택일 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왕 목사는 둘 다 원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추방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기간의 수감생활을 할 각오를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옥에 가둔들 우리들의 꿈이 사라지겠습니까? 우리를 죽인들 우리의 꿈이 사라집니까? 우리의 꿈은 영원한 것입니다.

꿈이 무엇입니까? 꿈은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그랬습니다. 뜻을 정하고 왕의 진미를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상의 재물에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했습니다.
헌신의 결과로 오는 어떤 대가라도 지불하기로 결정하고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 이것이 다니엘과 세 친구의 꿈이었습니다. 헌신된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왕들과 그 나라 방백들의 모함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 결과는 승리요 축복이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야곱은 꿈을 가졌습니다. 운명처럼 여겨지던 당시 장자권의 축복을 차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야곱은 꿈을 꾸어도 아마 장자로 태어나는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온 것입니다. 형 에서가 사냥을 나간 후 마침 어머니의 집안에서 어머니의 일을 돕고 있던 야곱이 팥죽을 쓰고 있었는데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사냥 나갔던 에서가 배가 몹시 고프든 차에 팥죽 냄새를 맡고는 야곱에게 갔습니다.
야곱 형이 지금 배가 몹시 고픈데 팥죽 한 그릇 줘라, 대답을 않습니다. 두, 세 번 말을 합니다
그때 야곱이 심각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형 내가 할 말이 있는데, 이 팥죽을 줄 테니 형의 장자권 나에게 주면 안 돼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농담인지 진담인지를 몰라도 에서가 말을 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지금 배가 고픈데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냐! 그래 장자권 네가 가져!” 그럽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형과 동생이 뒤바뀌는, 하나님의 축복의 물줄기가 에서로부터 야곱으로 바뀌어지는 영적 천재지변과 같은 사건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야곱에게는 수많은 고난이 따르고 줄을 이으면서 쫓아오고 있습니다.
먼저는 아버지를 속이게 되는 불효자식이 됩니다. 형의 보복을 피해 집을 떠나게 되는 나그네 신세가 됩니다. 삼촌 라반에게 3번이나 사기를 당하게 됩니다.
그의 생애가 참으로 파란 만장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후에 야곱은 바로 앞에서 험악한 130년의 생애를 보내었다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야곱처럼 꿈을 꾸어야 합니다. 꿈이 없으면 아무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본문에 야곱이 긴 꿈을 꿉니다.
물론 구약시대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꿈이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특별한 꿈이 아니더라도 꿈은 사실 그 사람이 평소에 생각하던 것이 나타납니다.
저도 가끔 꿈을 꿉니다. 그런데 거의 교회와 관계 있는 꿈을 꿉니다. 늘 교회만 생각하니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16절에서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합니다. 꿈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이곳에 계십니다. 우리교회에 계십니다. 내 옆에 계십니다.

역사상 위대한 선교사가 많이 있지만 제가 관심을 가지는 선교사중의 한 사람은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입니다. 슈바이처는 독일의 의사, 음악가, 철학자, 개신교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입니다. 이것도 다 대충한 것이 아니라 박사학위만 4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박사학위 때문만은 아닙니다.
슈바이처는 1875년 알자스의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인 루이 슈바이처 목사의 큰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는 슈바이처의 건강 때문에 몸이 약한 아들의 건강을 위해 독일 농촌인 귄스바흐에서 자랐습니다. 귄스바흐에는 가난한 루터교인들이 살았습니다. 거기다 아버지는 또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 자주 설교했습니다. 거기서 슈바이처는 가난한 자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생 시절, 19세 이상의 독일국민은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병역법에 따라 군복무를 하였는데 이때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1899년 스트라스부르의 목사가 되었으며, 1902년 모교의 신학부 강사가 되었습니다.
군대 복무 중 성령강림주일 휴가를 집에서 보냈는데, 이때 “나는 이렇게 가족들과 행복하게 휴가를 보내는데, 이러한 행복을 나만 누려도 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나만 행복하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프리카(현재 가봉 공화국) 랑바레네로 떠났습니다. 병원 건물은 선교사가 사용했던 닭장을 수리하여 사용했습니다.
그는 저술과 강연, 연주, 레코드 등에 의한 수입으로 병원을 자력으로 운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금이 달려 운영이 어렵게 되자, 병원의 기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돌아왔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태어난 알사스 지방은 당시 독일의 영토였으므로 독일 사람이라는 이유로 구금되었으며, 1917년 프랑스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그에게 준 가장 큰 상처는 어머니가 1916년 프랑스 군인들의 군마(軍馬)에 치여 죽은 돌아가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가두고, 어머니를 죽인 프랑스를 국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이 지역이 단순히 프랑스로 넘어갔기 때문이 아닙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가봉에서 선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24년 아프리카로 돌아갔으나, 병원은 부서져 뼈대만 남아 있었습니다. 병원운영에 필요한 돈은 3년에 한 번 꼴로 유럽으로 돌아와 연주회를 열어 번 돈과 저서의 인세, 강연으로 받은 돈과 기부금으로 충당했습니다. 슈바이쳐도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화려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재주를 가지고 보통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살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한 영혼을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생명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나는 나무에서 잎사귀 하나라도 의미 없이는 뜯지 않는다. 한 포기의 들꽃도 꺾지 않는다.
벌레도 밟지 않도록 조심한다. 여름밤 램프 밑에서 일할 때 많은 벌레의 날개가 타서 책상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창문을 닫고 무더운 공기를 호흡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도 생명을 소중히 여깁시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내부에서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안에 빛이 있으면 스스로 밖이 빛나는 법이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컴퓨터선교와 인터넷를 통해서 복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미래에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교회의 모습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음세대의 우리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부르짖는 것은 ‘다음 세대에 더 좋은 교회가 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세대에게 물려 줄 믿음의 유산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하여 기꺼이 대가를 지불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조금 더 고생을 해도 다음세대에게는 더 좋은 것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적인 것까지 더 좋은 것을 물려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나귀를 드린 사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21:1-5) 

사람의 진실함과 진정성을 알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의 마지막 길을 살펴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브라질 살바도르에 있는 여섯살 난 선교사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매튜입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열병으로 끙끙 앓더니만 열이 높아가면서 눈의 초점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차에 싣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매튜는 병원으로 가는 동안 엄마 무릎 위에 누워서 허공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엄마가 손을 잡자 뿌리치고 또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엄마는 어리둥절해서 “매튜야 뭘 잡으려고 하니?” 물었습니다. 매튜는 “예수님 손을 잡으려는 거예요.” 라는 말과 함께 눈을 감았고 혼수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틀 후에 매튜는 세균성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매튜는 비록 여섯 살 밖에 못살았지만 죽음의 순간에 예수님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매튜보다는 많이 살았습니다. 많이 산 것이 자랑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느 날 마지막 순간이 홀연히 온다면 예수의 손을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걸으신 마지막 길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좀더 가깝게는 감람산 가까이 있는 벳바게라는 동네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사실 여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은 결코 여리고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시작된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여행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던 그 순간에 예수님을 갈보리를 향해 출발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나이는 33살입니다. 사실 유대 청년의 나이로는 너무 젊습니다. 예수님은 도 닦다가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공부하시다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병에 걸려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8-19)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아시고 가신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도 육신의 삶으로는 이 땅에서 마지막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도망가기는 했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래도 제자들이 많이 훈련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사실 오늘 명령은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킵니다. 두 제자에게 명령하시기를 본문 2-3절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정말 거기가면 나귀가 있습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정말 그 주인이 그 나귀를 주겠습니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말을 잘 듣습니다. 아마 이 두 제자는 얼마 전에 변화 산에 함께 올라갔던 제자인지 모릅니다. 하늘에서 빛이 비추이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을 목격한 제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어쨌든 이 두 제자들은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주님이 다 아시기 때문에 보내는 것이겠지 하고 갑니다.

그런데 정작 언 듯 이해가 안 되는 되는 것은 나귀의 주인입니다.
나귀는 유대민족이 야생 동물 중 처음으로 길을 드려 가축으로 사랑 받는 유용한 동물이라고 합니다. 저는 천국에 가면 만나보고 싶은 사람도 많고 질문할 것도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나귀주인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도 성도 모릅니다. 그러니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예수께서 나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는가? 환상을 보았는가? 천사가 나타나 알려 주었는가? 편지를 받았는가? 이 메일을 받았는가? 우리는 여러 추측만 할 뿐이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선 듯 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나귀는 군마가 아닙니다. 요즘 자동차로 말하면 소형차입니다. 참 예수님도 이상하십니다. 탈것이 없으면 그냥 들어가시면 되지 굳이 뭘 타고 가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소형차타고 들어가면 이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사람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삼으셔야 하겠다고 광야로 끌어내려고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사람이 어디있겠습까? 개인이든 국가든 하나님 대적하다가는 다 망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을 못 내줍니까? 자기들의 소유물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가지 것 인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내 것이 없습니다.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자식도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 마구간에 매어 있어야할 나귀 새끼에 불과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주님이 쓰시고 나면 찾아오면 됩니다.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작은 나귀 새끼에 불과하지만 예수님께 드려졌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타고 가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친절이 이처럼 고귀한 목적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받치기 원하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러나 확실치 않기에 드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여러분! 돈벌기 위해서 얼마나 기회를 봅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드릴 기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드리고 싶어도 드릴 것이 없는 때가 있습니다. 있을 때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군마는 아니지만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임이 쓰시겠다고 할 때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크고 소중하기 때문에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이 경우가 더 많겠지요?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을 때 이까짓 것이 무슨 보탬이 되겠나 하면 그 헌금 못합니다. 이까짓 작은 것이 하나님께 드려져서 무슨 유익이 있게나 생각하면 못 드립니다.
우리는 누구나 작은 나귀 새끼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성경타자 프로그램 만들면서 성장아이콘을 표시하는데 처음에는 화분을 하나씩 줍니다. 가입만 하면 누구에게든지 기본으로 제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기본으로 주신 것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심을 수 있는 화분 같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노래하는 재주일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베려하는 마음일수도 있고, 언어능력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 모두에게는 나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용하신 용어는 고대의 왕이 세금을 징수할 때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신하의 소유물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있는 왕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성경은 특별한 것을 드린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것을 드린 이들이 가는 곳인지 모릅니다. 라합은 밧줄을 드렸습니다. 다윗 소년은 물맷돌을 드렸습니다. 모세는 잡고 있던 지팡이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렸을 때 모두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생명을 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을 때는 그냥 마굿간에 있는 새끼 나귀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드렸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타고 갑니다. 귀하게 사용됩니다.

미국에서 19세기 무렵에 구두를 수선하던 한 청년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주일학교 선생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킴벌(Kimvall)입니다. 여러분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다릅니다. 킴벌이 전도한 사람은 여러분이 잘 아는 바로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입니다. 그 후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무디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무디가 전도한 사람은 수를 셀수가 없지만 무디의 설교가 프레드릭 B. 마이어(Frederick B. Meyer)라는 젊은 설교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마이어는 대학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월버 채프만(J. Wilbur Chapman)을 회심시켰습니다. 채프만은 YMCA에서 일했는데 이 때 야구 선수 출신의 빌리 선데이(Billy Sunday)를 노스 캐롤라이나의 찰로테에 부흥강사로 청했습니다. 찰로테 지역의 지도자들은 열심히 생겨 또 다른 운동을 전개했으며 모르드개 함(Mordecai Hamm)이라는 사람을 강사로 초청했습니다. 이 집회에서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보스턴의 주일학교 교사 한 사람이 일으키게 될 역사를 우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나귀 하나가 변화시킬 세상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 드려졌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제 일산에 있는 십자성 선교회라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자주 강의를 가는 편인데 그곳 선교회를 세우신분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분이 다른 곳에 계시고 일을 하시기 때문에 제가 만나지를 못하고 제 강의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선교단체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십일조를 가지고 내가 살게 하소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십의 구조를 드리고 십일조를 자기가 살아가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십일조 가지고 살아야 하니까 돈을 많이 벌어야지요.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지금 사업을 잘하고 계시고 약속대로 십의 구조를 하나님께 드린답니다.

내가 먼저 우리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먼저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갑자기 성의 없이 아무대서나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지정하시고, 부르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물건을 살 때 마음을 드는 것을 고르기 위해서 흠이 없는지 잘못된 것은 없는지 살펴봅니다. 한참을 서서 고릅니다.
신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사탄은 사람을 선택할 똑똑하고 약삭빠르고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선택한답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다 가져가고 나머지를 선택하셨답니다. 똑똑하지도 않고, 가진 것도 없고 쓸모 없이 버려진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쓰레기 같은 우리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사실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새끼 나귀는 단지 잠시 빌리자는 것입니다. 구원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3:1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보세요. 예수님은 너희가 성공한다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혹은 너희가 정상에 선다면 구원을 얻으리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약 네가 견디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원문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만약 네가 마지막까지 매달려 있다면…”, “만약 네가 끝까지 가기만 한다면”이 됩니다.
제법 오래된 한 오렌지주스 TV광고 중에 ‘따봉(TA BOM)’이라는 포르투갈어(브라질)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말이 최고라는 뜻으로 이해하는데 TA(지금, 그래) BOM(좋다)로 적당히 좋다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지가 적당히 익어야 좋기 때문에 오렌지 주스에는 그렇게 사용하면 최고로 좋다는 표현이 됩니다. 그러나 식당에서 음식 먹고 서비스하는 사람에게 ‘따봉’하면 그저 그렇다 정도로 이해한답니다. 최고로 좋다는 다른 말은 ‘오찌무(OTIMO)’라고 합니다.
‘견디는 것’은 ‘마지막까지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왕 포르투갈어로 예를 들었으니까 브라질 사람들이 잘 쓰는 말하나를 더 배우겠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따봉 보다 더 쉽습니다. 포루투갈어로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매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가라(garra)”라고 합니다. ‘가라’의 원래 뜻은 ‘집게발’을 의미합니다. 낭떠러지에 매달려서도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을 수 있는 능력은 집게발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낭떨어지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고 버텨야 합니다.

영화 벤허를 촬영하는 동안 철톤 헤스톤은 마차 타는 것을 배우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도 연습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많은 연습을 한 후에 마침내 마차를 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이 되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감독인 세실 드밀(Cecil. B. DeMille)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마차는 탈 수 있는데 경주에서 이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드밀이 말하기를 “단지 경주에 남아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기도록 해 줄 겁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런 확신을 주십니다. “단지 포도나무에 붙어만 있어라 그러면 내가 열매를 맺게 해줄 것이다.”

우리의 ‘가라’ 집게발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마지막에 할 일이 무엇입니까? 순종이 집게발입니다. ‘가라’입니다. 나귀를 드렸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음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끝까지 붙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암미와 루하마의 하나님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호 2:1)

요즘 KBS2 드라마 중에 제빵왕 김탁구를 아시지요? 그런데 진짜 제빵 왕이 성경에 나옵니다. BC 782-753년경에 북이스라엘을 통치한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한 호세아입니다. 호세아의 출생지는 정확히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북왕국에서 태어난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의 직업은 제빵업자이거나(7:4), 평범한 농사꾼이었습니다. 호세아의 이름은 신약 식으로 부르면 ‘예수’입니다. 이름의 뜻도 같습니다. ‘구원’이라는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때 통일 왕국을 이루어 솔로몬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그때가 B.C. 931년입니다. 북왕국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남왕국을 유다라고 불렀습니다. 북왕국의 초대왕이 여로보암(왕상 13:1-14:31)입니다. 남왕국 유다의 초대왕은 르호보암(대하 10:1-12:16)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여로보암1세이고 오늘 호세아가 선지자 활동을 하던 시기의 여로보암은 2세로 13대 왕으로 왕위에 41년(왕하 14:23)을 있었습니다. 남북이 분단된 후에 여러보암2세까지는 149년(931-782)이 흘렀습니다. 여러보암2세가 등극하고 정확히 61년 있다가 721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왕이 19명 있었는데 한 명도 선한 왕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남왕국 유다는 20명의 왕이 있었는데 선하다고 할 수 있는 왕이 7명 정도입니다. 북왕국 210년, 남왕국 345년 동안 유지하다가 망합니다. 하나님은 이 기간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다시 한번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2세는 북왕국 19명의 왕 중에 41년이라는 제일 오래 동안 통치한 왕입니다. 이 기간이 북이스라엘이 제일 왕성하고 평화로웠던 시기였습니다. 수리아가 앗수르의 침략으로 쇠약하여지는 틈을 타서 하맛에서부터 아라바까지 땅을 차지했습니다(왕하 14:25). 그런데도 성경은 왕하 14:23-29까지 간단하기 소개하고 마칩니다. 사실 이 기간이 제일 번성했던 기간이니 만큼 제일 많은 기록을 남겨야하지만 성경의 저자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6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27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왕하 14:26-27) 이 기간동안의 번영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너무 허망한 것 같은 생각이 안 듭니까? 그래도 북이스라엘에서 제일 잘 나가던 시기인데 어떻게 이렇게 짧게 기록되고 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짧게 기록된 반면에 하나님은 이 시기에 가장 강력한 선지자 두 사람을 보내셔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당시에 활동을 했던 아모스와 호세아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이 두 사람만큼 인상에 남는 선지자는 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제일 잘 나가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주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번영은 죄와 타락만 키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는 국가, 개인 잘되는 것 부러워 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만 키우고, 악만 키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잘 되어도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아이에게 부모님 없으면 먹을 것, 입을 것 다 주어도 소용없습니다. 따라합시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데도 안 간다”, “예수님 없이는 아무 일도 안 한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없이 번성하면서 나타난 현상을 아모스가 잘 지적했습니다.
“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7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암 2:6-7)라고 했습니다.
“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5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암 6:4-6)라고 합니다.
저는 침대 사용 안 합니다. 침대가 문제이겠습니까? 자기가 마치 다윗이 된 것처럼 행세한다는 겁니다. 요즘 우리가 왕처럼 살고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결국 망한다고 예언했습니다. 이런 쓴 소리하고 북왕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모스는 북왕국에서 남왕국으로 탈출했습니다. 탈북자인 샘입니다. 그리고 계속 남왕국에서 북왕국을 향해서 너희들 그렇게 살다가는 망한다. 왕과 신하들이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암 1:15).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암 2:9)
“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도 그리하리라 3 너희가 성 무너진 데를 통하여 각기 앞으로 바로 나가서 하르몬에 던져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2-3)고 쓴 소리를 합니다.

이런 사치와 방탕에 대해서 호세아도 입장을 같이합니다.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호 13:3)고 예언했습니다. 망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아모스와 달리 북왕국에 남아서 선지자 활동을 했습니다. 아모스와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누가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이 사용하신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두 방법을 모두 사용하신 것입니다. 탈북자가 되어서 눈물로 호소한 아모스도 가슴아픈 선지자이지만 호세아는 그 북왕국에 남아서 그 사람들처럼 되어야 하는 연극이 아닌, 인생을 건 포퍼먼스를 해야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모스가 죄에 대하여 책망만 했다면 호세아는 그래도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구원해 주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호세아게 그들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호 1:2) 우리는 여기서 잘 이해해야 합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과 결혼했다고 해서 타락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창가의 여자 고멜과 결혼했습니다. 아이도 셋이나 낳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자식들의 이름을 하나님이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시는 이름이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이즈르엘은 ‘하나님께서 흩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예후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아합 집안의 사람 42명을 집단 살인한 장소입니다(왕하 9:27, 10:13). 둘째는 딸인데 로루하마 ‘하나님께 은총을 입지 못하다’는 뜻이며 아들을 또 나았는데 로암미 ‘내 백성이 아니다’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호세아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가혹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가 다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다른 교훈하기 위해서 호세아가 희생당하고 자기 자식들까지 그런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호세아는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합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삶입니다.

호세아는 창녀하고 삽니다. 그녀는 호세아에게 만족을 못합니다. 밤마다 나갑니다. 다른 남자의 품속에서 히히락락하며 밤을 지냅니다. 결혼만 했지 집에는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호세아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하나님이 그런 여인하고 결혼하라고 해서 한 것입니다. 호세아보다 마음고생 더한 선지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차라리 죽고싶습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 친구가 이혼을 한 친구가 있는데 여자가 바람나서 했습니다. 물론 이 친구는 제가 보기에 그럴만한 이유를 상당히 제공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의 외도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그 친구하고 지방에서 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오면서 밤새도록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속이 뒤집어져서 참을 수가 없더랍니다. 그리고 그 장소를 알았을 때는 자기가 차에다 기름통을 싫고 그 집까지 찾아갔답니다. 그 집으로 그대로 돌진하여 다 불지르고 끝내고 싶었답니다.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그렇게 속이 아프더랍니다.

지금 호세아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이 그렇게 아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그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호 2:13)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인 성도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결혼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무시하고 음란하게 우상을 따르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호세아를 통해서 느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다가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마치 처음 연애하는 남녀의 사이 같았습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호 9:10)
바람난 창녀 고멜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멜은 세 자식을 낳고 바람나서 집을 나갔습니다. 자식 버리고 나가는 여자 정말 용서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다. 이런 여인을 사랑하고 찾아오라는 것입니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호 3:1-2)라고 합니다. 고멜은 노예시장에 팔렸습니다. 값을 지불해야 데려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냥 받아주기도 힘든데 값까지 지불을 해야하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사 42:3) 라고 하나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바람난 여자 같은 우리를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값을 치르시고 우릴 구하셨습니다.

이제 오늘본문을 말씀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호 2:1)
‘암미’는 ‘나의 백성’이라는 뜻이고 ‘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분단되어있습니다. 구원의 때가되면 회복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백성(암미) 긍휼히 여기신다(루하다)’고 하셨습니다. 창녀 같은 우리를, 자식도 버리고 집나간 우리를 하나님은 비싼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호세아는 호소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호 4:1), “네 백성이 제사장과 다투는 다투는 자처럼 되었음이니라”(호 4:4),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호 4:16)라고 합니다. 그러나 회개해야합니다. 암소 같은 고집으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삽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호 13:4)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호 14:1)

하나님의 이 호소 거절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먼저 가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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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그 땅의 열매를 손에 가지고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하였느니라 26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27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28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29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신 1:25-33)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옴즈씨를 구하려고 북한에 들어갔습니다. 언제나 악역은 북한이고 선한 역할은 미국이 하고 있습니다. 참 멋있는 나라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난번에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인질로 잡혀있는 두 기자를 데리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나라에서 살고싶다 그런 생각을 하게됩니다. 한사람의 미국 국민을 위해서 기꺼이 전직 대통령까지 나서서 힘을 보태는 나라, 한 사람의 국민을 포기하지 않는 나라, 바로 그런 국가를 우리 모두는 꿈꾸고 있습니다. 이런 나라 다른 사람들이 이 땅에 와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 자식, 제나라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른 민족, 다른 사람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땅에 오셨습니다. 먼저 선택했던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래 전에 아브라함 때부터 선택했던 유대인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결과 비참한 결과를 체험했지만 하나님은 그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유대인에게 보냄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미국이 하나님의 이런 정신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왜, 모세와 바울을 선택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알고 보면 살인자입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이 학대받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참지 못하고 애굽 인을 쳐죽였습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목동으로 살았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에 빠져서 지나친 열심 때문에 예수님을 모를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예루살렘에 보내고 죽였습니다. 바로 스데반이 죽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장본인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구약에서 제일 많은 성경을 쓴 저자들이 바로 살인자들입니다. 그것이 정당화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두 살인자를 불러 사용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들에게는 동족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나쳐서 살인 할 만큼 동족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동족의 죄를 위해서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바울은 예수님께 돌아와 모든 성도들을 사랑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전제는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 바칠 때 전제로 드리려고 했던 것이잖아요. 바로 그와 같이 자신은 성도를 위해서라면 불태워서 죽는다 해도 기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 사회를 보면서 때로는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미국은 개인을 보호하고 열심히 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국가입니다. 오히려 진짜 개인주의가 우리나라 아닌지 우리 자신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과 국가는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왜 들어가지 못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의 길을 인생에 자주 비교합니다. 또한 가나안땅은 천국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람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이지만 오늘날에도 똑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잘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답이 없습니다. 문제는 많이 지적하지만 길은 찾지 못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고 합니다. 언제나 우리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합니다.
지난번 MBC에서 4대강 문제점을 담은 PD수첩을 방송하려고 했다가 사장단의 검열로 방송을 취소하였습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일로 MBC노조는 크게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자성의 목소리도 함께 나왔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은 말하기를 ‘MBC가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강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번에 제작을 맡았던 팀은 지난번 광우병을 보도한 팀입니다. 여러분! 바른 것만 가지고 안됩니다. 바른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국가를 생각하고 어떤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를 생각할 때입니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특정한 정치세력에 서 있으면 안됩니다. KBS만 공영방송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공영방송과 같은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나라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북한을 보세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지금 정권이양 한다고 홍수로 온 나라가 엉망이 되었는데도 평양에 모여서 저 열광하는 것을 보세요. 우리가 지금 싸울 때가 아닙니다. 말이면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도와야 합니다. 미국도 평온할 때는 대통령 개인생활도 다 문제삼습니다. 그리고 뒤도 캡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가 여유 있을 때 하는 것입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위기 상황에서는 대통령에게 힘을 모아 주는 것입니다. 현 정부가 다 잘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를 위해 때를 알고 할말만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얼마나 축복을 받았습니까? 5천년 역사이래 지금처럼 세계 속에 함께 한 적이 있습니까? 세계주요 선진국 20개국 정상이 다 모여듭니다. 세계가 한반도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연일 아마 전 세계가 한국을 소개하고 알릴 것입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그래도 참 우리나라 좋아졌습니다. 대통령도 총리, 장관 아무나 못시킵니다. 지난번 청문회에서 총리후보자가 어렵게 살았다고 보리밥만 먹었다고 하니까 야당 의원이 그 당시 그럼 우리나라 사람이 다 그렇게 살았지 총리 후보자 아버님만 그렇게 사신 것이냐고 하면서 우리 집은 보리밥이 없어서 밀가루만 먹고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럼 저희 집은 밀가루도 부족해서 감자만 먹고살았습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선교사님이 10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인데 대륙이 아니라 오른쪽 인도양에 있는 큰 섬입니다.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입니다. 케냐와 면적이 거의 비슷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자주 자연다큐에서 소개될 때 카말레온이 자주 나옵니다. 자연 습지가 잘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은 다릅니다. 한국에 온 학생들은 한국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부럽기도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특히 가는 곳마다 산에 나무가 많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다는 산에 거의 나무가 없다고 합니다. 나무를 베어서 숯을 만드느라 산이 민둥산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가뭄이나 태풍 같은 수해로 한해 농사가 흉년이 들까 봐 농민들이 애를 태웠습니다. 그런데 남한은 오히려 풍년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쌀 재고가 자꾸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대풍이 예상됩니다. 쌀이 남아도는 걱정을 해야하다니 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잘 보존하고 나누는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25절 “그 땅의 열매를 손에 가지고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하였느니라”고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지시하신 땅은 확실히 좋은 땅이라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이제 그곳에 들어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다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왜 들어가지 못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해야 됩니다.
본문 26절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라고 말합니다. 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원해야 됩니다. 기도가 다 무엇입니까? 원하는 것입니다. 땅속으로 굴을 파고 다니는 쥐도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곳에 가두면 3분이면 죽는답니다. 그러나 빛줄기 하나를 비춰주면 36시간을 산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입니다.

원망했습니다.
본문 27절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고 했습니다. 여기 잘 보면 원망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가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라고 했습니다. 장막은 그들의 집입니다. 집에서 나오지는 않고 집안에서 원망만 하는 것입니다. 일하지는 않고 않아서 말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잠 13:23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가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라고 합니다. 여러분! 언제 하나님이 자기들을 미워했습니까? 그런데 왜 자기들을 미워하신다고 말합니까? 자기들이 볼 때 조금 힘들어 보이는 일이 생겼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소설을 잘 씁니다. 자꾸 꾸며내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봅니까? 우리 멋대로 생각하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잠 14:2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히 여기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목숨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 안됩니다. 비행기 조종하시는 분들은 자주 하늘과 바다를 착각하기 때문에 자기 눈을 믿지 말고 계기 판을 믿는 훈련을 꾸준히 한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비행기 계기 판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결론입니다.
본문 28절 “우리가 어디로 가랴” 그럽니다. 갈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백성은 갈곳이 없습니다.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러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말은 낙심케 할 뿐입니다.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자신들만 생각합니다. 자기들이 싸우면 패하지요. 실제로 본문 다음에 신 1:40-44에 보면 아모리 족속과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돌이켜서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42절에서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힘만을 믿고 싸우러 갔습니다. 그 결과 대패입니다. 45절에서 통곡하고 울었지만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듣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전쟁은 패망입니다. 왜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합니까?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왜 믿지 못합니까? 인간의 교만함과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4)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2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고 하십니다.
30절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에서 크라이막스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어린양이 아닙니까? 아무 대책 없이 하나님이 지시하시고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지금 얼마나 어떤 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본문 31-33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잘 표현합니다.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32절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가시는 하나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돕는 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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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 2:18)

오늘 설교제목은 “돕는 배필”입니다. 제 집사람이 없으면 좀더 설교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오늘은 교회에 나오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 이유로 오늘 제가 설교를 조금 못해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남편으로 얼마나 잘 살았나 생각해 보면, 아마 점수로 메긴다면 최하위권을 맴돌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거의 돈을 벌어다 주지 못했습니다. 암 병으로 고생하는 시어머니 10년을 넘게 돌보아 드렸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곰살맞은 구석이 있어서 따뜻하게 대해주거나 밥하고 설거지 하나 제대로 해 주지 못했습니다. 또한 뭐 그렇게 성격이 남보다 좋은 것도 아닙니다. 고집은 있어서 우기기도 잘합니다. 그래도 감사하고 다행인 것은 이런 남편을 두고도 저만큼 잘 견디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제가 오늘 서론을 이 정도는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늘 설교하고 집에 가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릅니다. 기도해 주세요?
제가 잘할 수 있는 것만을 가지고 설교한다고 생각해 보니까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잘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 믿었다는 것 위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윗도 바울도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 티끌만도 못하다고 했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도와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한낮 잠시 지나가는 안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천사보다 나은 하나님의 자녀요 영광을 돌리며 받는 거룩한 존재가 됩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철학서 회남자에는 ‘경계하라’는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 하나가 ‘수영 실력을 자신하는 사람이 오히려 물에 빠지기 쉽다’는 말입니다. 수영에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면 물가에서 조심하는 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증권시장에서 실패하는 이유도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지나치게 믿어 의심치 않는 자만심에 빠져, 결과적으로 낭패를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전설적인 주식시장의 드림팀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소속된 사람들은 과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미국은 이 팀을 ‘꿈의 운용팀’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이 회사는 바로 미국의 초대형 헤지펀드 회사인 롱텀캐피탈 매니저먼트입니다. 그러나 이 회사는 자기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망했습니다.
그래서 투자자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 증권시장에서 회자되는 것입니다. 주식시장에서 스스로의 능력을 과시한 나머지 고집을 피우는 것은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부부사이에 어떤 부류의 부부가 제일 문제가 있느냐, 그것은 자신이 지나치게 남편 또는 아내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는 과신입니다. 그래서 금술이 좋은 부부는 완벽한 부부가 아니라 뭐가 좀 모자라는 그런 부부랍니다. 우리 부부처럼이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면서 가슴을 치며 “하나님 가까이에 가기도 송구합니다.” 하는 사람은 큰 문제가 없습니다. 율법도 지키고 다 했다는 사람이 문제가 될 가능성이 더 큽니다. 오늘 우리는 “돕는 배필”의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맡겨주신 소명은 다하되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해답을 찾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머리의 책임 아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하려다보면 선악과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선악과를 하와도 먹고 아담도 먹었는데 하나님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찾으십니다. 먹기는 여자가 먼저 먹었고, 꾀임에 빠진 것도 여자가 먼저 빠졌는데 하나님은 그 책임을 남자인 아담에게 먼저 묻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그냥 머리가 아닙니다. 군림하라는 머리가 아닙니다. 잘 인도하라는 머리입니다.
성경을 잘 보세요. 창 2:16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담입니다. 그런데 하와는 다음 18절에 지음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는 명령을 하와가 들었습니까? 못 들었습니까? 예! 하와는 지음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듣지 못했습니다. 아담만 들었습니다. 그럼 아담의 책임이 무엇입니까? 17절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하와에게 잘 전해야 하는 사명이 아담에게 있는 겁니다. 하와가 나를 잘 도와주게 하려면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하와에게 잘 전해야 합니다. 머리가 역할을 바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고 머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군림하는 머리, 리더가 아닌 섬기는 리더, 바르게 인도하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리더가, 머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가르치지 않으면 머리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인간이 왜 길을 왜 모릅니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길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가 길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꿈을 이루게 하실 분입니다. ‘어디로 걸어가는 걸까?’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의 길로, 예수께서 가르쳐준 길로 걸어가면 됩니다. 전해 주어야 합니다. 길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어야 됩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아내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는 것도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지만 남편이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것 또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전 11:11) 고 했습니다. 사실 이 차원은 바닥을 쳤을 때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배필이 왜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돕는”입니다. 부부의 임무는 도와주는 것입니다. 왜 도와 주어야 합니까? 부족하니까 돕는 것입니다.

아담의 첫 배필 하와는 실패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배필이 필요합니다. 하와는 안됩니다. 죄를 몰고 왔습니다. 다시 진정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그런 분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2-3)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배우자로 중매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도 처음 하와가 뱀(사탄)의 간계에 미혹 당한 것처럼 미혹 당하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보내 주셨습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고 했습니다. 아담의 죄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머리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죄도 모두가 알고 보면 내가 머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본문의 ‘도움(rz<[e:에제르)’은 ‘rz”[:아자르’는 “방어하다, 둘러싸다”의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하와가 무엇으로 아담을 돕습니까? 밥 해 먹이는 것이요? 물론 그것도 한가지 일이겠지요. 그러나 정말 중요한 사실은 사탄에게서 아담을 방어해야 합니다. 둘러싸서 지켜야 합니다. 하와의 역할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담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방어하는 일이었습니다. 남편을 보호해 주세요. 방어해 주세요. 사탄에게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방어해야 합니다. 지켜야 합니다. 사탄의 공격에서 방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하나님이 나를 돕습니다. 예수님도 돕습니다. 성령님도 돕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우리 대한민국 사람은 이런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작년 2009년 9월에 중국인 기독교인 리 밍쓘이 탈북자들의 남한 행을 도왔다는 이유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그를 도와서 함께 활동한 여성 기독교인인 장 용후는 7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북중 국경지대를 탈출한 북한 인들을 비교적 안전지대인 몽골로 옮겨주는 활동을 벌이면서 이들에게 음식물과 숙박, 운송 수단 등을 제공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몽골은 탈북자 문제에 관한한 중립적 입장을 표방하고 있고, 탈북자들 상당수를 난민으로 인정해 주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들 두 사람은 지난 4월 29일, 탈북자들을 몽골 국경으로 넘기는 작업을 하던 도중 국경지대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항소 재판을 통해 탈북 난민들이 중국에서 난민지위 부여를 거부당할 뿐 아니라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고 있으며, 이는 중국이 지난 1982년에 서명 비준한 UN협약을 위반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강제 송환되면 그 대가는 혹독합니다. 일단 이들에게는 국가를 배신했다는 어마어마한 혐의가 적용되기 때문에 강제노동수용소 등에서 종신형을 살거나 사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중국당국은 체포한 탈북자들을 송환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는 탈북자 명단에서 삭제한 후 인신매매 조직으로 넘기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나 여성들의 경우는 이런 식으로 빼돌려져 조직에 넘겨져 성 노예로 팔려 가는 경우가 흔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6:8-10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복음으로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여러분을 교회로 모으셨습니까? 헌금 거두려고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모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을 두 번 사는 것 아닙니다. 한번뿐인 인생 돕는 배필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길을 가야합니다. 도우면서 살다보면 복이 임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내가 혼자 성공 못합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여러분! 내가 헤엄처서 어떻게 미국을 갑니까? 그렇다고 날아갑니까? 그러나 비행기타고 가면 금방 갑니다. 나의 노력으로 못 갑니다. 천국이 미국보다 가깝답디까? 그보다 편히 갈 수 있는 그런 곳에 있답니까? 나의 힘으로 못 갑니다. 그러나 주님 보내주시는 구원의 방주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다른 것 도와 주는 것 다 좋지만 천국 가는 길을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 5:1-15)

오늘은 광복절입니다. 일본은 어설픈 말로 사과하고 있습니다.
간 나오토 일본총리가 10일 한일강제병합 100년 사과담화 발표문에 보면 “1910년 강제병합이 한국민의 뜻에 반하여 이뤄졌다. 일본 궁내청이 보관 중인 조선왕실의궤 등 도서를 인도하겠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강제병합조약의 불법성’과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동원’ 문제 등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과로는 우리 국민의 아픔을 치유하기는 부족합니다. 아직도 일본은 솔직히 교만합니다.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도 포기 안 했습니다. 그래도 이만큼 사과문을 이끌어 낸 것은 한국이 이제 예전과는 사뭇 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많은 부분에서 일본에 뒤 처지지만 그래도 한 두 분야에서는 일본을 앞서기 시작한 분야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반도체는 세계시장의 50%이상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모니터, TV분야도 세계 최고입니다. 조선산업은 이미 오래 전에 일본을 제쳤습니다. 태평양에 떠다니는 절반이 한국에서 만든 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축구는 다른 나라에는 다 져도 일본에 지는 것은 용납 못합니다. FIFA순위에서는 일본에 밀리지만 우리는 그런 것 상관없습니다. 일본과 경기에서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잠재력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해내고 소중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이런 질문이 인터넷 한 포털 사이트 지식사전에 올라왔습니다.
김일성이 어떻게 북에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언제부터 남북사이에 마찰이 빚어진 거죠?
광복해서 다 신나 좋았을 텐데요…

우리가 기뻐하는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민족의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 앞에서 질문한 한 학생도 질문의 내용에 보면 많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우리민족이 하나되어 처음부터 광복의 기쁨을 간직하고 살지 못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을 조금만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광복에 대한 기쁨에 들떠 있을 때, 세계 최강국이었던 소련과 미국이 이미 38선 긋고 군정 통치하는 것까지 합의합니다.
일본은 여운형에게 과도정부를 세워서 정권이양 받으라고 하지만, 차일피일 미루면서 소련과 미국에 어필할만한 정치세력으로 키우지 못합니다. 오히려 미군은 기존에 있던 조직마저 무색케 만들고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2차 대전 말, 1945년 8월 9일에 소련은 만주를 공격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소련과 미국이 잠정적으로 한반도를 반으로 나누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미군은 겨우 오키나와 점령한 상태였고 한반도까지 병력 보낼 여유가 안 됐습니다. 여기에 한반도 전부 점령하기엔 소련과 중국이라는 공산권과 국경선 맞대고 있어야 하니 부담이 컸습니다. 그래서 Colonel Dean Rusk and Colonel Charles H. Bonesteel III 이 두 미군 장교는 한반도 남부에 항구 두개 정도만 가져가면 족하다고 보고 38선을 경계로 긋고 이것도 단 30분만에 결정했답니다. 소련 역시 동유럽에서의 소련 점령지역에 대한 합의를 위한 카드로 미국의 한반도 남부 점령을 용인하게 됩니다.
이후로 소련은 소련 점령지역을 공산화하는 데 적극적입니다. 이에 반해 미국은 별 관심 없다가 소련이 급속히 공산권을 확대하자 부랴부랴 막으려고 뛰어듭니다.
김일성은 1937년경에 중국 공산당 계열의 게릴라부대를 지휘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당시 이런 부대에는 조선족 출신들만을 모아서 부대를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1940년에 일본군에 추격을 받다가 소련으로 넘어가게 되고 이때부터 소련군 장교가 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한편 1945년 일본 항복 이후,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북한을 대리 통치할 후보를 찾게 되는데 Lavrenty Beria가 김일성을 추천하게 됩니다. 이유는 원조 공산주의자하고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라서 통제하기 쉬울 거라는 이유였습니다. 그가 처음 북한에 도착했을 때는 소련군의 꼭두각시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저 소련군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고 또 소련군은 그를 지도자를 내세우기 위해서 그를 제외한 다른 지도자 후보군들을 모두 제거합니다.

이 모두가 우리나라가 전적으로 힘이 약해서 강대국들의 편의에 따라 놀아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이 나라에는 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조선왕조는 쇄국정책을 사용해 외국과의 문호를 막았습니다. 그 결과 세계의 흐름을 놓쳤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도약해야 할 그 시기에 싸움만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무너진 것입니다. 끝까지 싸우면 어떻게 됩니까? 다 망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망합니다.
본문 마지막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기 위해서 힘쓸 때입니다. 길을 찾아야 됩니다. 화합할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누군가 욕을 먹어도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정당이라는 곳에서 무슨 일만 있으면 서로 대변인을 내 새워 발표를 합니다. 어떤 때는 유치해서 듣기도 민망합니다. 책임은 다 다른 당에게 있습니다. 자신들은 거룩합니다. 아무 문제도 잘못도 없습니다. 이런 태도로는 화합이 안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는 사회가 바로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힘없는 사람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인도 카스트 못지 않은 신분계급이 있었습니다.
조선은 양반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양반들은 상놈을 억눌렀고 상놈은 그 지배 아래서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백정은 상놈의 대명사였습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고 비단옷이나 갖신도 신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양반이 지나갈 때에는 길을 비켜서야 했으며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가듯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습니다. 만일 허리를 숙이지 않으면 중형에 처해졌습니다.
평양에 신학교를 세운 마펫 선교사가 상놈 출신을 받아들여 교육을 시켰는데 그 중에 백정 박씨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박씨는 불행히도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고 마펫 선교사는 왕의 시의였던 애비슨을 데리고 와서 치료해주었습니다. 백정으로서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박씨의 온 가족이 개종을 하였습니다.
박씨는 1895년에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그가 백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백정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하면서 반 이상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펫 선교사는 “예수의 사랑 앞에는 사람의 차별이 없다”고 양반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양반들은 “그러면 교회에서 양반과 백정의 자리를 구분하여 양반들에게 앞자리를 달라”고 타협안을 제시하였습니다. 마펫 선교사는 이런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1895년 4월 마펫은 한학자 최씨로 하여금 박씨를 도와서 정부에 백정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할 것을 탄원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정부는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평민들과 같이 초립과 망건을 착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해 3월에는 인구조사에 백정이 빠져 있자 이것을 시정하여 백정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해달라고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백정 박씨의 개종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들 박동열은 1907년에 최초로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박씨 자신도 은행업을 시작하여 사업가와 장로가 되었습니다. 박씨는 백정조합 회장으로 선출되어 백정들에게 해방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일을 한 마펫 선교사는 현재 총신대와 장신대의 뿌리인 평양신학교를 세운 초대 교장이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 4절입니다. 율법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행위입니다. 자기가 다 지켰다는 자만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빠집니다. 주님이 없습니다. 은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입니다. 이것이 공산주의가 율법주의 인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고 당이 하고 수령님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농부가 자기 잘나서 풍년이 옵니까? 자신도 최선을 다했지만 하나님이 도우셔서 풍년이 왔다고 해야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삷니다.

둘째, 5절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하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내가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주님 안에서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주실 소망을 기다립니다.

셋째, 6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여러분! 여기서 잘 알아야 합니다. 할례는 역사 안 합니다. 죽은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무슨 역사를 합니까?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기다린 소망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는 역사합니다. 이 역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입니다.

넷째, 9-10절입니다. 죄를 버려야 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다른 마음입니다. 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닙니다. 누룩은 퍼뜨리는 특성이 있습니다. 죄도 삽시간에 퍼져나갑니다. 요즘 인터넷에서는 이러한 일이 간혹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전보다 더 잘 퍼집니다. 잘못된 이단 사상을 버려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잘하는 말이 11절에 나옵니다.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십자가를 전하니까 백해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 맡습니다. 지금도 율법이나 전하고, 사탄이 좋아하는 제사도 지내고. 아무하고나 손잡으면 박해받을 일이 없지요. 그러나 십자가를 전하니까 박해합니다. 사탄이 하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전하는 게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사탄이 방해하는 겁니다.

해방 후가 중요합니다.
처음에 억압되어있던 개인이나 민족은 해방만 되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못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해방 이후입니다. 해방 전에는 그 사람들 원망만 하면 됩니다. 모든 문제를 일본군 탓만 하면 끝납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다릅니다. 남의 종으로만 있던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이 알아서 결정하는 것이 미숙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른 책임 또한 함께 져야 한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주인 노릇도 해본 사람이 한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아직 미숙한 것이 많지만 영국과 미국이 300년 만에 이룬 민주주의를 단 50년 만에 이룩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13절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는 말씀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해서 “19 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20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21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시 102:19-21) 고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해방되었습니다.
당시 외국 선교사들의 보고에 의하면 일제의 핍박 때문에 당시 5,000여 곳의 교회 중에서 1,200여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투옥이 되었고, 많은 목사와 성도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리고 약 70만을 헤아리던 개신교인의 수는 절반으로 줄어들고 말았습니다. 일제는 오늘 바로 우리가 해방하던 날을 1945년 8월 18일을 기하여 한국 전역에 산재하는 기독 신자들을 진멸 할 계획을 세워 놓고 은밀히 진행 중이었음이 해방 이후 저들의 비밀문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민족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게 하신 줄 믿습니다. 이를 위해 이 민족에게 해방을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은혜만 받아서는 안됩니다. 은혜 다음에 책임을 배워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책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탄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자기만 빠져나가면 그만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남을 왜 우리가 욕하게 됩니까? 우습게 알기 때문입니다. 남을 왜 지배하려고 합니까? 우습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욕하는 것이요 사탄이 하는 겁니다. 남을 지배하는 것 사탄이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섬깁니다. 섬김의 종이 먼저 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우리가 자유하면서도, 해방의 기쁨을 유지하면서도 함께 번영하는 길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책임을 지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서로 잘못을 떠넘기기만 해 가지고는 안됩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이 민족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하신 아브라함에게 내렸던 축복이 오늘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이 민족에게 내릴 줄로 믿습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