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소금이다.

성도는 소금이다 / 마5:13-16, 눅14:34-35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눅 14: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특별한 각오 없이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다니는 수많은 무리에게 예수님은 제자가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26-27, 33절).
예수님을 따르다가 타락한 자들과 배교한 자들의 생태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설명하시면서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34-35)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에는 소금은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어서 별로 귀하게 취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소금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다. 소금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귀하게 취급되었는가는 지난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소금을 구하기 위해서 전쟁까지 일어났으며 소금을 구하기 쉬운 곳에서 대개 고대 국가들이 건설되었다. 그것은 소금을 지배하는 것이 곧 백성을 지배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월급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Salary라는 말은 원래 소금이라는 단어 Salt에서 나온 말이다. 옛날 로마 군인들이 월급을 소금으로 받았기 때문에 소금은 바로 현금과 같은 것이였다.
인류는 옛날부터 소금을 먹지 않으면 죽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금이 없으면 몸 안에 소금과 물 사이에 미묘한 균형이 깨어져서 탈수 현상으로 죽고 만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없을 때에는 짐승의 뒤를 따라가서 암염을 찾았다고 한다. 동물들도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소금으로 된 바위를 찾았기 때문이다.

저는 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에 다이아몬드나 보석이라’하지 않고 ‘세상의 소금이라’했는가 좀 섭섭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다이아몬드나 보석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소금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다이아몬드와 보석은 사치품이지만 소금은 필수품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소금으로 명명한 것은 세상에서 꼭 있어야 할 필수적인 존재로 불러 주신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 되어야 하리라’하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현재형)’ 한 점입니다. 앞으로 유용하고 필수품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우리를 세상의 소금으로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벌써 세상의 유용하고 필수품인 소금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에 대한 놀라운 축복인 동시에 큰 사명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꿀이라 하지 않고 소금이라’고 말씀한데는 교회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소금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소금은 쓰고 따갑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의 말씀은 항상 달콤한 말씀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프게 하고 가슴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종종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박해가 일어나고 핍박과 고난이 있으며 배척이 일어납니다.
달콤한 이야기만 하는 것은 쉽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달콤한 이야기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을 파멸케 합니다. 사탕은 입에는 달지만 몸에는 해롭습니다. 약은 입에 쓰지만 몸에는 유익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항상 달콤한 이야기만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달콤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쓴 이야기입니다. 아픔과 고통의 이야기(Story)입니다. 따갑고 쓴 소금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두메 산골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교회 전도사님이 잠시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시게 되자 그 교회 장로님께서 수요 기도회를 인도하시게 되었답니다. 할 수 없이 맡기긴 했어도 워낙 학식이 없으신 데다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신 분이시라 심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장로님을 만나 신신당부를 드립니다. “장로님, 설교하시려고 하지는 마시구요 그저 성경말씀을 많이 읽으신 다음 교인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드디어 수요일 저녁이 되어 장로님이 기도회를 인도하러 올라갑니다. 전도사님이 그토록 부탁을 하셨건만 강단에 올라서고 보니 마음이 달라지는 겁니다. 오십여명 되는 교인들이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데 말씀만 읽고 내려가기는 조금 싱겁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이 기회에 우리 교인들에게 뭔가 신앙적인 교훈을 하나 심어 주리라는 결심을 하고는 평소 생각해 두었던 구절을 읽어나갑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을 봉독한 다음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 라는 말씀을 가지고 점잖게 말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함수 관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리켜 세상의 ‘소곰’이라 했습니다. ‘소곰’이 뭡니까? 소와 곰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와 곰이 어떤 동물입니까? 소는 온순하고 착하기 이를 데 없는 동물이요 곰은 사납고 힘이 강한 동물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소처럼 온순하게 주님 앞에 순종하고 또 곰처럼 믿음으로 씩씩하게 우리 인생을 살아갑시다.”

성경에 보면 소금에 관한 구절이 23번이나 나오는데, 대개 3가지 기능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시키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소금은 조미료 역할을 합니다.
욥기 6장 6절에 보면 “싱거운 것이 소금없이 먹히겠느냐”는 말이 있고 마가복음 9장 50절에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이 있으며, 골로새서 4장6절에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가? 맛을 내게 하는 소금의 역할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소금은 그 자체보다 다른 물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을 섬기고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시킬 사명이 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다.
조미료 역할을 할 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소금은 요리를 만들때 채소의 숨을 죽이고 고르게 퍼집니다. 부드럽게 합니다. 믿는 성도가 가는 곳에는 완고한 사람이 온유해지고 고집쟁이가 유순해지며 형제간에 화평케 합니다. 주님께서도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막 9:50).

2. 소금은 부패를 막는 방부제 역할을 합니다.
레위기 2장 13절에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했습니다. 소금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생선이나 고기가 썩지 않게 방부제의 역할을 합니다. 교회도 우리 사회 속에서 방부제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소금의 역할이 부패를 방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 곳에서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제 역할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 때문에 사회의 부정 부패가 없어지고 우리 기독교인 때문에 사회의 불신풍조가 없어져야 합니다.

3. 소금은 소독제(해독제)로 정결케하는 역할을 합니다.
출애굽기 30장 35절에 보면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케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엘리사는 여리고성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물이 좋지 않아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졌으나 소금으로 그 물을 해독하여 토산의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왕하 2:19-22).
어느 약품이건 소금이 사용되지 않는데가 없다고 합니다. 바닷가에서 손이나 팔, 발에 상처가 났을 때 바닷물에서는 소독이 되어 곧 낫습니다. 여하간 소금은 정결케하고 해독제의 역할을 합니다.
소금은 자신이 녹아지고 없어짐으로 맛을 내고 방부제가 되고 해독제가 되어 소금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다 소금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국속담] 소금에 절지 않는 것이 장에 절을까?(소금에도 절지 않는 음식이 소금보다 덜 짠 장에 절 턱이 없다는 말이다.)

결론. 소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소금은 그 형질이 비록 녹아 없어져도 그 맛, 그 본질은 그대로 자연계에 존재합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변하지 않는 약속을 <소금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대하13:5) 성도가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믿음, 변하지 않는 말, 변화지 않는 행동을 보여야 합니다.
이 소금은 우리 몸속에도 있습니다. 사람의 피 속에는 0.9%의 염분이 있어서 우리 몸의 산과 알카리의 농
도를 적정농도로 항상 유지시키주며, 이로써 건강과 생명을 지켜 줍니다.

어느 나라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보기 위해 길 한가운데 큰 돌을 갖다 놓고 누가 그 돌을 치우는가 멀리 숨어서 보고 있었습니다.
한 상인이 지나가며 “재수 없게 아침부터 돌이 앞길을 가로막아” 하며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한 관리는”어떤 고약한 놈이 돌을 길 한복판에 가져다 놨나? “라고 투덜거리며 걸어갔습니다. 잠시 후 한 젊은이가 지나가다 힐끗 쳐다보더니 더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왕은 큰 실망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한 농부가 수레에 채소를 싣고 시장에 가다가 그 돌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농부는 그 돌을 굴려 한쪽으로 치웠습니다. 그런데 그 돌이 놓여있던 자리에 무슨 주머니가 있어 펴보았더니 많은 돈과 한통의 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여기 있는 돈은 이 돌을 치우는 분의 것입니다. “라는 왕의 편지였습니다.

한국교회의 교인 수가 1천2백만이라는 사실은 온 세계 기독교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교학자들이 한국교회 성장에 관한 책들을 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의 소금은 3%만 되어도 바닷물 전체를 짜게 하는데 우리 25%의 교인들은 그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금의 특성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질 속에서 녹아 없어지는데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시작

초대교회의 시작 / 행 2:37-42

교회란 말이 옛 히브리어로는 “카할”과 “에다하”라는 단어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모임이나 그 모인 사람들 자체를 의미했고 신약시대에는 “에클레시아”로서 이스라엘의 회중이 특별히 여호와 앞에 종교적인 목적으로 모였을 때를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국들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불러냄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요즈음 한국에서 잡다한 이방 종교들이 그 명칭에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교회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인 무리”가 교회인데 그 뜻에 어긋나게 주님을 부인하고 자신들을 신격화 시켜나가는 사이비 종파들이 교회란 말을 쓸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이 “교회”를 의미하는 말들이 많이 있는데 그 명칭들을 택함 받은 자들로, 아브라함의 후손들, 열두 지파로, 흩어진 나그네로,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교회”를 직접교회로, 거룩한 자의 회중으로 정직한 자의 회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 몸으로, 온몸으로, 그의 몸으로, 몸인 교회로, 그의 몸된 교회 가지(요15:1-16)로, 나의 심은 가지로, 그리스도의 지체로,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로, 하나님이 자기피로 사신교회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로, 장자들의 교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 성도의 회,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 비둘기,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 하나님의 양, 양, 내 어린양, 내 양 ,한 무리, 장자들의 총회, 야곱의 하나님의 전, 금 촛대,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하늘의 예루살렘, 거룩한 성, 성상, 거룩한 산, 그리스도의 집, 신령한 집, 하나님의 권속, 주의 산업, 하나님의 이스라엘, 온 세상의 기쁨, 왕의 딸, 하나님의 나라 천국, 그의 나라, 내 나라, 주의나라, 어린양의 아내, 여호와의 분깃, 택하신 기업, 시온산, 여호와의 전의 산, 진리의 기둥과 터, 내 보좌의 처소, 새 예루살렘, 즐거운 분깃, 기쁨의 시내, 여호와의 성소, 그리스도의 누이, 버리지 아니한 성읍,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하나님의 성전, 성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 포도원 영광스러운 교회, 성령의 전, 새 이스라엘 등으로 비유하며 표현하고 있습니다.

1. 교회 시작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는 “에클레시아-교회”란 말을 두 번밖에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첫 번째는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할 때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말씀하신 때이고 또 한 번은 형제가 범죄 했을 때 제자들이 해야 할 의무에 관하여 말씀하신 중에 “만일 그들의 말고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18:17)고 하실 때입니다.
그 후에 사도들의 서신에 보면 이 “교회”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1:2) 에는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 들의 모임을 의미하기 위하여 사용하였고 안디옥교회의 경우에는 그 부근의 같은 지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제자들을 모았고 이 제자들이 새 이스라엘의 핵심 인물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본질적으로 그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인간적인 기관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기에 달려 죽어 장사되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다락방에서 기다리던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후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중심한 사도들의 전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교회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고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과 가까운 장래에 재림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고 그의 생애와 죽으심과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없었다면 교회는 형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사건과 성령주실 것을 믿은 제자들의 열성과 기도와 하나로 뭉친 마음이 시초가 되어서 결국은 “새 이스라엘”의 교회가 부흥과 발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왜 “예수의 피로 사신교회”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면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의 뿌리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줄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분명히 알지 못하여 신앙은 제쳐놓고 세상 의학으로는 못 고칠 병을 고치는 곳으로 알고 있거나 귀신 쫒아 내는 곳으로 알고 있으며 정신수양이나 하는 곳으로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병 고쳐주면…..헌금도 하고, 교회에 다니겠다”라고 하기도 하고 “이 고민 해결해 주면………하겠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 데 참으로 잘못된 생각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된 이 교회는 먼저 예수를 메시야(구세주)로 믿어야 하며 병 고치는 것 고민 해결하는 것은 그 부수적인 결과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 탄생하심으로 이 세상에 오신 능력과 기적으로 교회를 세우셨고 그 몸으로 대속의 제사를 드림으로 주의 백성들을 사셨으며 죽은자 가운데서 영생을 얻도록 그를 살리셨고 성령을 보내시어서 성도들을 충만하고 넘치는 은혜아래 생활하게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성전의 모퉁이 돌’로서 ‘대 제사장과 제사장 나라’로서 ‘머리와 많은 지체를 가진 몸’으로서 ‘신랑과 신부’로서 ‘많은 형제중의 첫 열매’로서 ‘주인과 종’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이 설명들은 교회의 거룩함과 교회의 하나됨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교회는 성령 충만을 통하여 시작되었습니다. (행2:4)“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오늘 본문에 보니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용기를 얻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서 성령은 임하였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작은 무리가 합심 기도하는 중에 성령은 임하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교회의 역사가 이룩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상근 주석’에 보면 “성령강림은 그리스도교회의 중요한 사건이라기 보다는 교회 그 자체의 탄생을 뜻한다”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교회의 시작이 되기 시작했다면 ‘성령강림은 그 시작을 힘있게 출발시켜준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힘을 얻은 베드로의 위대한 설교 앞에 듣는 무리들이 가슴이 찔려 통회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약 삼 천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말로 한다면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강림에 의해 태어났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교회의 기원을 이룩하시려 제자들을 불러 새 예루살렘 즉 새 이스라엘의 인원으로 지으셨고 이 인원을 가지고 성령의 힘이 그 속에 불에 넣어짐을 통해 교회는 조직되어 졌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3. 교회는 복음 증거를 위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능력을 얻고 담대히 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진리를 증거 했습니다. 베드로의 전함을 듣고 주님께 돌아온 제자 수가 삼 천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 지상생활과 기적이사의 능력 행하심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예언을 성취 하셨으며 이 분이 곧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지은 인류를 상기하게 하였더니 “우리가 어이할꼬”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던 군중들이 주님 앞으로 겸손히 머리 숙이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고전2:2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결론.
1) 교회에서 받는 것
38절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성령을 받으라”, 40절 “구원을 받으라”

1907년 평양 대부흥회가 길선주목사의 인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장대현교회에 모인 1500여명은 길목사의 설교에도 변화가 없었다. 기도도 터지지 못했고 성령의 은사도 임하지 않았다.그 때 길목사는 은혜의 단절은 자신의 탓이라 깨닫고 외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