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명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3. 나의 생명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11:1-44
예루살렘에서 약3km 떨어져 있는 베다니라는 마을에 나사로는 동생 마리아, 마르다하고 단촐하게 살고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2절)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다음 12장에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예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있기 전이며 나사로를 살리기 전이지만 예수님과 이들은 이미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5절)라고 했습니다.
이 집안의 가장은 나사로 였습니다.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사로 가정 역시 어떤 어려움이 있어(어떤 심각한 질병) 이곳에 살고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가장 역할을 하던 나사로의 병세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두 여동생은 이 급보를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절)고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계신 곳(요10:40: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 세례주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계셨습니다.
이 사이에 나사로는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고 결국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절)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고 있는 것이면 깨우면 될 정도로 병세가 호전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14절)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두 여동생은 예수님이 속히 오시지 않고 이러한 급보를 들으시고도 그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물고 계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사로는 결국 죽게되었습니다.
이러한 나사로의 죽음은 두 자매에게는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탄에 잠긴 채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래도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왔습니다. 이 때쯤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갔지만 마리아는 일어나 맞이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아마 예수님에 대한 섭섭함이 아직 그대로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함께 계셨다면 죽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 라고 고백했습니다. 대단한 믿음이요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께서 당장 나사로를 살려낸다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고 즉석에서 질문하셨습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27절에서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화답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달려나오지 않은 마리아를 찾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찾으신다는 말에 마리아는 급히 뛰어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마르다가 한 말하고 똑같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섭섭한 말을 토로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대인들과 마리아가 모두 울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저들과 같이 슬퍼하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33절) 계셨습니다(이 슬픔 속에는 분노와 어울려 노여움도 포함되어 있다). 사별의 슬픔에 잡힌 자매의 마음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자신도 비통함에 잡히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죽음의 결과가 우연이 아닌 사단이 우리를 그리로 몰아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고전15:26에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라고 부르는 것에서 사망의 쇠사슬을 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도 남음이 있는데 ‘빛이 있으라’하시는 창조적 말씀처럼 ‘나사로야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예수께만 존재할 수 있는 창조적 말씀의 능력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사망의 권세도 계속해서 나사로를 붙잡아 놀 수는 없었습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44절)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셨던 특징을 이해함으로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미래를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나사로가 죽게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4절)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잠시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기다리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 급히 서둘러 길을 떠나시지 않았고 언제든지 그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기에, 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서둘러 길을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사로의 육체적 죽음과 살아나게 하심을 통해서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실 수 있는 분은 창조자가 보내신 아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으로 우리 모든 육체를 살려낼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을 보여주신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사기도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1절) 이것은 우리의 기도모습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께 신적 권한을 부여받아 오신 분으로 나사로를 살리는 문제를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성은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미 이러한 권한을 부여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나사로를 살리셨습니까?
나사로 이외에도 이미 다른 복음서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야이로의 딸(막5:22-43)과 나인 성에서 한 과부의 아들(눅7:11-17)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경우 죽은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기절’한 상태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17절)는 진술은 그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 시체는 썩어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더 확신을 만들어준 사건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활이요 생명”(25절)으로서 자신을 확실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동기
나사로를 우연하게 단순히 살리신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5절) 라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11절)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은 “눈물을 흘리시더라”(35절)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36절) 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기록은 딱 한번 더 나오는데 누가복음 19:41에 예루살렘
배고픈 독수리가 비둘기를 잡아먹으려고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비둘기는 포기하지 않고 도망치다가 밑에 굴이 보여 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독수리는 독 안에 든 쥐라며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비둘기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으나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 굴은 독사의 굴이었습니다. 독사는 굴러온 떡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비둘기는 문제와 문제, 죽음과 죽음 사이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인이 밭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구구구구 외쳤습니다. 너무 멀어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둘기가 포기하지 않고 외치자 드디어 주인이 비둘기 소리를 들었습니다. 주인은 일단 독수리를 쫓고 곧 이어 독사를 죽였습니다. 비둘기는 마침내 생명을 얻었습니다.
“성을 보시고 우시며” 뿐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눈물을 흘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게세마네의 기도에서도 땀방울이 피 방울처럼 되었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나사로의 죽음 때문만에 우신 것은 아닙니다. 죽은 나사로는 살리면 됩니다. 그런데 왜 우셨습니까? 그것은 사망(사단)의 권세가 저들을 감싸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눈물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토록 이 사망의 눈물을 거두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신 말씀이시기도 합니다.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27절)고 대답했습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 그리스도 외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실 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1-4)
원문의 “감취었음이니라” kevkruptai(케크뤼프타이)는 현존적 현재 완료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얻은 생명의 효과가 현재 주어진 것이며 영원함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세상에 대해서는 감추어진 영원한 비밀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입니다(고전2:14, 요일3:2). 마지막 예수님 재림하실 때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에 꼭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죽어서만 천국에 빨리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고 하셨으며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에서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고 이 땅의 축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땅의, 눈앞에 보이는 것 때문에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안개와 같을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먼저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물론 돈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이젠 힘에 부치네요
(몇 일전 제게 온 상담 메일입니다. 실명이 아니기에 공개합니다.)
삶의 무게가 오늘도 나에겐 버겁다.
난 오늘도 이곳 저곳을 전전하면서 돈을 벌만한 일자리를 알아봤다. 그러나 어제처럼 그제처럼 일자리는 없었다.
혹 있다고 하더라고 신용불량자이기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신용불량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카드를 쓰는건 외상으로 소잡아 먹는 거라며 반대를 했던 나인데 나 역시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걱정하고 삶에 비애를 느끼면서 자살까지 생각을 한다.
주식으로 많은 돈을 번 사람을 보면서 부럽고 나 역시 그럴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처음엔 한 장 또 다음 또 다음의 순으로 신용카드가 많은걸 무슨 자랑인냥 은행에서 현금 서비스를 마구 받아서 나도 재벌의 꿈을 향해서 주식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열정과 의지가 강해서 조금의 이익이 생겼으나 그건 정말로 나에겐 땀을 흘리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달콤한 악마의 유혹이었다. 그래서 무리를 하게되었다.
참 이이러니하다 나 같은 인간도 조금이나마 돈을 벌었다는 게, 투자금액이 크면 이익도 크다라는 나만의 착각으로 무리를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카드대금은 한 달에 한번씩 한 달에도 열 번씩 소위 말하는 돌려치기 방법으로 결제를 했지만 떨어지는 주가에 꼬박꼬박 카드대금의 이자와 수수료를 감당하기가 힘이 들었다.
결제 일이 늦어지면 한도액이 줄고 한도액이 줄면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 결제를 하고 그러다 여동생의 카드를 빌려서 간신히 돌려서 결재를 하는 상태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원금이 계속 들어가야 하기에 꾸준한 수입이 없는 난 가족들의 카드를 몰래 이용해서 결재를 하였다. 나이 드신 부모님의 카드를 몰래 가지고 나와서 결재하고 하루 하루를 연명하였다.
전에 장사하다 당시에 나의 실수로 부모님께 큰짐을 드린 관계로 이번 일은 말씀을 드리지도 못한다. 혈압이 높으신 아버지 그리고 엄마 또한 말씀을 드린다고 한들 갚을 길이 없다. 나 역시 우리 집 가족의 구성원이기에 우리 집 사정을 잘 안다
앞이 깜깜하다 살고는 싶다 그렇지만 살아갈 힘이 없다. 난 빚이 너무나 많아서 살아갈 수가 없다. 더군다나 혼자서 애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동생에게 부끄럽고 부모님에게 더욱더 면목이 없다. 벌써 집을 나온지 4달 근근히 먹고는 산다. 그나마 날이 따뜻한 관계로 막일이라도 하면 소위 말하는 때껄이는 해결되지만 돈이 모이질 않는다.
못난 내 자신을 원망하면서 채찍질해가며 서글피 운다. 아들 하나라고 잘 키워주신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다.
보고싶은데 얼마나 많이 보고싶은데 볼 수가 없다. 엄마 아버지 여동생과 조카 …
내 신용만 불량이면 되는데 가족들에게까지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나라는 인간은 정말로 한심스럽다.
만약 나에게 새로운 삶이 다시 한번 부여된다면 열심히 살고싶다.
모든 게 다 나의 잘못이기에 난 절규한다. 어떻게 던 살고싶다고… 그러나 난 결코 자살은 안 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자꾸 의지가 상실이 된다. 자살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삶의 끈을 놓았는지 이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