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홀(笏)과 실로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7. 나의 홀(笏)과 실로(hlyvi)이신 예수님) / 본문 : 창49:8-12

오늘 본문은 성경의 첫 권 창세기 49장입니다. 창세기에는 천지창조로부터 아담의 타락, 노아의 방주를 통한 심판과 구원의 역사 그리고 아브라함의 선택과 이스라엘 족장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족장들의 역사가 기록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49장은 창세기의 한 장(50장)을 남겨놓고 바로 전에 기록된 것입니다. 다음 장(50장)은 야곱의 장례식과 요셉의 죽음에 대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창세기의 결론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아담의 타락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의 죄 때문에 벌을 내려주신 것은 이미 창세기 3장 16절에서 하와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17절 아담에게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벌만 내려주시고 만 것일까요?
아니면 역사가 한참 흐른 다음 어느 날 갑자기 생각이 나셔서 죄로 인한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예수님을 급히 보내주셨을까요?
여러분은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잘못을 이다음에 야단치려고 수첩에 꼭꼭 적어놓습니까? 아니면 지금 야단을 칩니까? 지금야단을 쳐야하는 것입니다. 혹 감정적으로 질책하지 않으려는 부모는 모았다가 다음에 야단을 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자녀들은 우리 부모가 또 어떤 빌미를 잡아 가지고 언제 나를 혼내줄까 염려하여 불안에 떨며 지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그가 타락했을 때 바로 그 죄의 대가가 주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죄를 통해서 인간에게 내려진 죄의 대가를 다시 거둘 계획도 세우십니다. 아마 당장의 죄만을 혼내주고 자녀를 위해서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자녀의 미래가 불투명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을 기록한 창세기를 넘기지 않고 마지막장이 다 되어서 야곱을 통해서 열 두 아들에 대한 “후일에 당할 일”(1절)을 말씀하시면서 유다지파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 속에 이 놀라운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2절에서 “너희는 모여 들으라 … 들을지어다”가 반복적으로 기록된 것은 야곱의 죽음이 임박했음과 야곱이 말하려고 하는 계시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이 단어의 어근 솨마([m’v;)는 단순히 듣는다는 뜻 외에 “경청하고 동의하고, 순종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단순히 야곱이 죽기 때문에 유언을 하는 의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들으라” 이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여 경청하고, 동의하여 아멘으로 순종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유다지파에게 내린 야곱의 예언은 다른 지파에게 내린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지파에게서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유다지파에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이스라엘의 유다지파에게 뿐만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내린 예언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4째 아들로 레아가 B.C 1755년에 하란에서 낳았습니다. 유다지파는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선봉이었습니다(삿1:2). 이 지파는 다른 지파에 비해 용감하고 탁월했습니다. 이 지파에게서 이스라엘이 제일 번창했던 ‘다윗’이 탄생했습니다.
야곱의 예언을 통해서 나타난 ‘유다’ 지파의 예언은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찬송 받으실 분이십니다.
‘유다’ 이름의 뜻이 ‘찬송’입니다. 그의 이름대로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1절)고 말합니다. 사람의 이름은 그 뜻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지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님께 해당되는 말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21:9)했으며 대제사장이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꾀하여 책잡으려고 할 때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막14:61)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 말이지만, 예수께서 찬송 받으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1:25)이라고 함으로 예수께서만이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임을 선포했습니다.

2. 원수를 이기신 분입니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1절)했습니다. 우리는 죄(사단)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된 사이가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10) 이것은 예수께서 원수를 그의 죽으심으로 이기신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기자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히10:30)로 확실하게 예언된 말씀을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사자(狮子)이십니다.
“유다는 사자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같고 암사자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9절)고 합니다. 이것은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상징입니다. 구약시대 성전 칸막이에도 그려져 있었습니다(왕상7:9). 사자는 짐승들의 왕으로서 숲 속에서 사자가 울부짖으면 모든 짐승은 숨을 죽입니다. 그러나 그는 포악하고 성난 사자가 아니라 자기 힘을 원수를 이기는데 만 사용한 웅크린 사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예언된 이 말씀이 성경의 마지막 권 요한계시록 5장 5절에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기록되었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나님의 숨결이 베어있는 책입니다.

4. 홀(笏:홀홀) 이십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10절) 우리말 ‘홀(笏)’의 뜻은 ‘홀기(笏记)’의 준말로 혼례나 제례 때 의식의 순서를 적은 글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홀’은 왕권을 상징하기 위한 증표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통치자의 지휘봉’이라고 했으며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왕의 지팡이’로 번역했습니다. 족장시대에는 이 ‘홀’(증표물)은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였습니다. 우리나라 왕통시대로 말한다면 왕의 상징인 ‘옥새’를 말하는 것입니다. 족장시대 ‘옥새’는 지팡이에 새겨 가지고 다닌 것입니다. ‘옥새’도 새긴다 할 때 사용하는 ‘도장 새(玺)’자를 뜻합니다. ‘홀’로 번역된 이 단어 역시 하카크(qq’j;)라는 단어인데 “새기다, 제정하다, 통치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사야는 바벨론의 패망 가리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패권자의 홀을 꺾으셨도다”(사14:5)고 말했습니다.
야곱의 예언은 유다에게서 왕권이 떠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유다지파에서 왕이(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마27:37). 사람들은 예수께 ‘왕’이라고 조롱했지만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5. 실로(hlyvi)’이십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10절)의 본문은 난해한 본문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 같은 단어로 나타난 곳은 예루살렘 북쪽 약 48km떨어진 곳에 있는 ‘지명’이름입니다. 여호수아가 이곳을 본부로 장막을 쳤던 곳입니다(수18:1). 그러나 본문의 뜻은 장소를 말한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어떤 장소를 ‘오시기까지’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 ‘홀’에 대해서 언급했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실로’는 당연히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실로(hlyv)’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구약역본(LXX)은 ‘그가 그 자신으로 오시기까지’로 옮겼습니다. 표준새번역은 “권능으로 그 자리에 앉을 분이 오시면”으로 현대인의 성경은 “그 지팡이의 소유자가 오실 때까지”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원문에는 분명 ‘실로(hlyv)’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있는 개역성경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어려운 원문과 여러 성경을 비교하여 말씀드리는 것은 이 문제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라”고 했는데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실로(hlyv)’의 어근 ‘솨라(hl;v;)’는 “안전하다, 성공적인, 잔잔하다, 평안하다”를 뜻하는 것으로 ‘평안이 올 때까지’로 다시 말하면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6)로 이스라엘의 인사말 ‘샬롬’(!/lv;)과 같은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들이 부른 노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부른 노래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눅19:38)에서 ‘하늘에는 평화요’로 찬송했습니다. 예수님께는 늘 평화가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진정한 평화와 평안을 안겨주실 분입니다.
인간에게는 죄로 인해서 불신과 불안만이 존재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독서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병사 한 사람이 와서 물었습니다.
“장군은 어느 때가 가장 두렵습니까?”
나폴레옹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발할 때가 가장 두렵다네. 면도사의 칼이 왔다 갔다 할 때면 으스스하기까지 한다네. 그래서 나는 면도할 때에는 부하를 시켜서 이발사의 아들의 목을 잡고 있게 하여 이발사가 내 목을 벨 때는 그 아이의 목도 잘린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네.”

나폴레옹과 같은 독재자에게만 두려움과 불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삽니다. 즉 이 세상에는 두려움과 고통이 그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겪는 불안과 괴로움은 죽음이 올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며 죽음 앞에서는 극도의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10절)의 ‘복종’은 복종의 의미도 있지만 ‘순종’의 의미도 있습니다. 결국은 사단과 믿지 않는 자들도 복종케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순종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8:27) 자연도 순종했습니다. 또 귀신들도 순종합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1:27)
믿지 않는 자들과 사단이 마지막에 예수께 복종할 때는 강제적인 것으로 예수 앞에 무릎을 꿇는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가 됩니다.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11,12절)라고 했는데 히브리인들은 평화시에 나귀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대개 나귀는 잡목에 매어두기 마련인데 본문에서는 포도나무에 매어둔다고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땅이 축복을 받아 비옥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들을 믿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이 이렇게 오래 전 창세기에 이토록 정확하게 야곱에 의해서 예언되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 아닙니까? 또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녀가신 이후 성령시대에 살고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 평안의 축복입니까? 이 축복의 기회를 놓치시지 마십시다.
우리에게 ‘홀(笏)’로 왕권을 가지시고 ‘실로(hlyv)’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 순종하심으로 영생을 소유하시는 축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6. 나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 본문 : 요6:35-51

여러분들 중에는 애완동물이나 난이나 분재, 꽃 같은 식물을 키우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은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것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먹이를 주지 않거나 물을 주지 않고 내버려두면 얼마 안 가서 죽게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39절)고 하나님께서 왜 주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지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저는 게을러서 그리고 자꾸 잊어버려서 애완동물이나 식물을 못 키웁니다. 제게 맡겨진 것이 있다면 얼마 못 가서 죽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릅니다. 반드시 우리를 말씀하신 대로 살리십니다.
저는 먼저의 설교에서 생명이신 예수님과 부활의 예수님에 대해서 전했습니다. 부활은 우리도 예수와 같이 살아날 수 있다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시라는 것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죽은 우리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고, 우리의 생명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지막날에 만일 육체적으로 잠들어(죽어) 있다면 주님께서 일으켜 주시게 되고 잠들지 않았다면 주님과 같이 하나님께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날이 되기 이전까지는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때까지 먹고 마실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디베랴에서 떡과 고기를 축사하신 후 먹이신 사건을 기억하고 그곳에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와 제자들을 찾아보았으나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으러 배를 타고 좀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가버나움이 있는데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무리들은 이제 예수님을 만났으니 지난번 베풀어주신 것처럼 떡과 물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축복을 또 한번 기적을 일으켜 주시기를 원해서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서 표적을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표적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육체적인 배를 채우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늘 예수님과 사람사이에 잘 이해가 안 되는 문제는 예수님은 영적인 것을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표적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질문합니다.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30절) 그러면서 그들은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31절)고 했습니다. 이 질문으로 보아 그들은 계속해서 만나와 같은 떡을 지속적으로 먹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32절)의 대답으로 보아 무리들은 모세가 만나를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라는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오늘 말씀의 제목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35절)라고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입니다(33, 41절).
만나를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린”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십니다(38절).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었다는 육신 적인 것만을 기억하고 수군거렸습니다(42절). 왜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는 것을 강조하십니까? 그것은 이 땅의 것으로는 우리를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오는 신령한 것이 아니고는 우리가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전1:9),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14) 전도서 기자는 이미 해 아래서의 헛됨을 독백처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고 하셨습니다.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일 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제일먼저 가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주 구약의 에녹, 엘리야 같은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하늘에 올라간 자는 아니었다. 이 뜻은 단순한 하늘에 올라간 자의 의미보다는 부활의 첫 열매되심을 증거 한 것이다.).
예수님은 부자청년과의 대화에서 영생을 얻는 문제에 대해서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셨다는 뜻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만나만 먹으면 죽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출16:35)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죽었습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린 떡은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육체의 생명에 필요한 양식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보통 밤을 세끼를 먹습니다. 하루만 굶으면 금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난리가 아닙니다. 육체를 위해서 영양분이 필요하다고, 장에서 속이 비었다는 신호이지요.

예전에 가난했던 시절 어떤 주일학교 학생이 교회에 처음 나왔는데, 식사할 때 기도하고 밥 먹으라는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을 듣고는 집에 가서 기도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서 “하나님 어디계신지 모르지만 함께 드입시더”하고 혹시 어디선가 하나님이시라는 분이 나타나 금방 다 먹어버릴 것 같아서 단숨에 밤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나 살아있는 모든 동식물에게는 양식이 떨어지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6:11)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굶주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예수님도 육체를 위한 양식을 부정하거나 결코 필요 없다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가지고 계신 진짜 관심은 우리의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예수께서 주시고자 하는 양식의 예표였습니다. 육체가 양식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도 양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3. 산(생명) 떡을 먹으면 영생합니다.
본문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32절) ou(우) “아니”는 문장 전체를 부정하는 의미로 볼 수 있는 “levgw”(레고) “말하다”의 다음에 ou\n(운)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떡은 모세가 준 것도 아니지만 그 앞에 나타나는 ou\n(운)은 그것은 “참 떡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광야에서 주신 만나는 그들의 육체를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히 살리는 생명의 떡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절)고 하시자 하늘에서 ‘만나’같이 내려오는 양식을 생각한 사람들은 실망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자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자신의 사업이 안되면 금방 실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식이 노력하지 않고 있는데 좋은 수험점수가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 실망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이 땅의 축복을 잔뜩 기대했다가 자기의 생각처럼 축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이 사람들처럼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수군수군 거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43-44절) 여러분 지금 축복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까? 얼른 생각하면 급한 것이야 지금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다시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말할 나위 없는 것입니다.

“난 더러운 똥인데,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을까? 아무 짝에도 쓸 수 없을 텐데……” 강아지 똥은 쓸쓸하게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봄이 한창인 어느 날, 그 강아지 똥 위에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강아지 똥이 민들레가 자라도록 거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할 화목 제물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흘려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된 것입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자에게는 예수 안에 거하는 축복을 주십니다.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56절) mevnw(메노) “거하다, 거주하다, 남아있다”의 이 말은 요한의 주요 신학적인 주제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삼위일체교리가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안에 “거하고”(요14:10), 성령님이 예수님에 “거하며”(요1:32),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께서도 그들 안에 “거합니다”(요6:56, 요15:4, 참고 요일2:6, 27, 28, 요일4:12에서도 나타난다.)
이 말은 단순한 영적 교감의 수준을 넘어 본질상 하나가 되는 영적 교통함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거주하고 내가 예수께 거주함”을 말하는 것은 예수와 함께 살아있는 상태임을 말합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표현은 신, 구약에서는 많이 발견됩니다만(수3:10, 삼상17:26, 삼상25:26, 왕하19:4, 사37:4, 렘10:10, 마16:16, 마26:63, 롬9:26, 고후3:3, 딤전4:10, 히3:12, 히9:14, 히10:31, 히12:22, 계10:6) “살아계신 아버지”(57절)라는 표현은 본 절이 유일한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근원이 아버지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주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샘터라는 잡지에 있던 글입니다(저는 엄호섭님의 ‘우리에 들지 않은 양’에서 옮겼습니다).
글의 제목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입니다.
어느 중년 여인이 유복자를 낳아 너무 귀하게 키웠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아들의 모습에 어머니는 삶의 보람과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 아들의 모습에서 먼저가신 남편의 추억을 느끼며 겨울밤을 외롭지 않게 보내곤 했습니다.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의 모습이 너무나 대견하여 하루종일 아들만 쳐다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들은 친구가 생기고 등하교 길에 “엄마”라는 목소리로 집에 돌아왔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학교에서 올 시간이 넘었는데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온 한 통의 전화는 어머니의 모든 꿈을 산산이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삶의 의미도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도 잃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에게 긴장감 마저 주었습니다.
며칠 후 이상한 일이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일어났습니다. 소복 차림의 어머니 한 분이 복잡한 횡단 보도에서 등교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개구쟁이 어린이들이 모두 길을 건넌 후 확인하고 피켓을 내려놓았습니다. 그 손에 든 교통 통제용 피켓에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적혀있었습니다.
무엇이 무슨 힘이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이 여인의 눈에 눈물을 머금게 했겠습니까? 이 여인은 아들이 죽어 한 맺힌 그 삶을 포기했어야 했는데 아들의 죽음과 어머니의 삶 가운데서 위로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감사의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은 곧 “살아 계신 아버지”품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 안에 거하여 이와 같은 위로와 영생의 축복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부활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5. 나의 부활이신 예수님) / 본문 : 요20:1-18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슬람교도는 뽐을 내며 자랑합니다. 우리의 성지 메카에 가면 으리으리한 마호멧의 묘지가 있소, 당신들 예수의 무덤은 있소? 그러자 기독교인이 대답합니다. 그렇소 우리 예수님은 무덤은 없소, 예루살렘에 있긴 하지만 그것은 빈 무덤이오, 그리고 그것이 당신들과 우리의 차이점이요, 마호멧은 죽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였다오,
그렇습니다. 한 종교의 교주, 성인군자, 어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죽었습니다. 석가도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나의 가르침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도 죽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에 관해서만 1년 동안 설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항상 그 때의 제목을 보면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주제나 제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역시 제일 중요한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해서 죽으셨다고만하면 아마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실패의 종교일 것입니다. 제가 어느 유대인이 쓴 글을 보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사건까지 부분적으로는 부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인즉 유대인들은 밤에 죄인을 체포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의 법이 있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밤에 혈기가 등등한 산헤드린공의회의 수비병들과 함께 로마의 군병들에 의해서, 캄캄한 밤에 예수가 누구인지 쉽게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가 예수께 다가가 입을 맞춤으로 이들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을 분명히 밤에 체포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은 지금도 예수님 체포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말할 때 부활의 장면을 제일 처음에 목격한 마리아들과 제자들이 환영을 보았다고 부정합니다. 정말 이 부활의 사건이 제자들에 의해서 꾸며지거나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환영을 본 것일까요?
지금부터 저는 세 가지 측면에서 부활 사건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 죽음과 부활이 예언되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닌 미리 계획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주님은 이전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즉 우리와는 다른 그분은 실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치 앞도 보지 못합니다. 다만 추측하거나 거짓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하신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만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뿐일 것입니다.

둘째,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안식 후 첫날” 유대인들은 일주일의 기준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안식일로부터 계산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은 토요일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까지였고, 지금은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이며 즉 일요일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온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께서 고쳐주신 후 예수를 따르며 봉사했으며(막16:9, 눅8:2),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라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도 지켜보았던 여인입니다(요19:25). 공관복음에는 이 여인 외에 여러 명의 여자들이 함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마28:1, 막16:1, 눅23:55, 24:1). 요한도 2절에서 “우리”라고 복수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막달라 마리아 이외에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돌이 옮겨간 것을 예수의 시체를 누군가(제자들?) 훔쳐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찾아가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베드로와 제자들은 급히 예수님의 무덤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3-4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요한의 세심한 기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요한 자신도 지금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제자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달려갈 때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한 제자가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5절)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이름이 나타날 곳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중의 하나입니다. 이로 보아 그리고 그의 정확한 증언으로 보아 요한이 먼저 베드로보다 무덤에 빨리 도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6-7절)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마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세마포가 부활의 증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자신도 이런 것을 미리 염두 해 두고 기록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있는 그대로의 본 것을 증언한 것임에 분명합니다. 여러분 빈 무덤이 예수의 부활 증거가 됩니까? 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 누군가에 의해서 예수의 시체가 도둑맞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론 당시의 최고 군대인 로마의 군병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무덤이 지켜졌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그들에게 술을 먹여 졸게하고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보는 것 등입니다. 이 때의 문제는 예수의 무덤을 잘 지키지 못한 로마 군병의 책임론으로 이 사건은 종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사건에 대해서 다시 증명할 수 있는 증거물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마포 옷 예수님의 수의였던 것입니다. 본문을 원문으로 보면 “예수님이 입으셨던 세마포가 그대로 있는데 마치 예수님의 몸이 증발해서 빠져나온 것처럼 세마포가 그대로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어렸을 때 벌래를 본 적이 있는데 벌래가 나방으로 바뀔 때 자신이 입고있던 집을 쏙 빠져나온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꼭 그런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사람이 옷을 벗을 때는 이와 같이 벗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그저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육체는 단순히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신비스러운 다른 부활의 몸을 입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육체는 병들지 않는, 썩지 않는, 다시 죽음이 없는 분명 그러한 육체를 입으신 것이 틀림이 없었습니다.

언젠가 TV에서 가정의 문제를 다룬 드라마를 본적이 있습니다. 아마 실제사건이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자매가 시집을 갔는데 남편을 의심하여 자기 것을 늘 별도로 챙겨놓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이혼을 당하게 될 때 잘못하면 알몸으로 쫓겨나니까 미리미리 분명히 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습니다. 남편은 급기야 참다못해 정말 이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새댁이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가 보니까 언니 셋이 있는데 모두 어떤 이유에선지 이혼을 한겁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가르쳐 주기를 시집을 가자마자 남편을 믿지 말고 챙길 수 있는 것은 모두 챙겨놓으라는 언니들의 이야기만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세마포가 진짜 물증이 될 수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시체를 훔쳐 가는 도둑이 어떻게 이와 같이 수의를 벗겨놓고 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시체를 훔쳐 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수의를 벗겨놓고 시체를 훔쳐갔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아마 요한도 이러한 자신의 기록이 부활을 이토록 철저하게 증거 해 낼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의 기록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어떤 기록이 더 있어야 이 역사적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마는 부활 후 첫 번째 나타나신 광경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 자국과 손에 못 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두 번째 나타나실 때에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요20:27)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은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사실인 것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 강제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이 없는 자는 의심이 많은 자요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며 남이야 더욱 못 믿는 것입니다. 결국의 삶은 불행의 연속인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고전13:7)라고 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부활하신, 첫 열매가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의 증표로 믿어야 합니다.
저는 앞에서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땀을 뺐습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실상은 육체를 입고오신 하나님이신 데 사실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이 무어라 하든 꼭 그렇게 무덤에서 나오는 방법이 아니어도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가셔야할 길을 떠나셨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억지로 어떤(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실 필요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와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이 부활이 아무나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교회에 처음 다닐 때, 몇 년이 되었는데도 사실 제 마음속에서는 이 부활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찬송도 배우고 기도도 하고 그리고 성경의 좋은 말씀들도 대략 이해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제 스스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과 단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제가 기도원을 찾을 당시는 우리나라에 성령운동과 더불어 방언의 은사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다 찾아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0일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기도원 목사님은 우리기도원은 저녁에 술 먹고 올라온 사람도, 강아지도(그 정도로 방언 받기가 싶다는 뜻으로) 방언을 받아간다는 기도원이었습니다. 뭐 방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예수님의 부활만 믿게 해 주시면 방언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통해서 믿어진다면 그것을 주셔도 좋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는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기도원 산길을 터덜터덜 내려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내려오고 저는 힘이 빠져서 비관한 상태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이후에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결국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부활에 대한 믿음과 함께 각종은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왜 그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빨리 은혜를 주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기를 통해서 저는 인내와 싶게 믿어진 결과보다는 어렵게 믿어졌기 때문에 결코 잊을 수 없는 감사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 지금 솔직히 다 믿어지지 않지만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여러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때가 되면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방법으로 부활하신 것은 우리에게 당신과 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첫 열매로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성도들의 실제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어날 것에 대해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2)고 완료형으로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공동번역 고전15:12)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사도들의 전한 복음이란 오직 부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부활은 그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입증이었습니다. 제자들이나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전파하며 선포할 때에 그들은 의미 심장하게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를 사용하여 그 사건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들은 꼭 “그가 부활하셨다”가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지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깊은 영적 통찰력으로 그 일어나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이며
1943년, 조국 독일에서 포악한 히틀러 정권과 맞서 자유와 평화를 외치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본 회퍼 목사는 2년 후 프로센부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했습니다. 1945년 4월 9일, 그는 동료 죄수들과 지상에서의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격려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광명과 소망의 세계가 있습니다.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배 후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본 회퍼 목사는 고개를 돌려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새 생명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팔이 그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행하신 일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행2:24, 32, 3:15, 4:10, 롬6:49, 고전15:15). 흉악범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은 정통파 유대인의 생각에는 충격적일 뿐 아니라 실제로 참람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은밀한 기대를 가졌던 많은 경건한 사람들도 틀림없이 십자가 형벌로 인해 그의 거짓됨이 드러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서 가장 고귀하고 대담한, 희망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과 예수님의 메시야 권에 대한 하나님의 인치심, 그리고 그의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입증이 나타난 것입니다. 부활 이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소망의 사건을 보여주신 것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바울은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세례를 받습니까?”(고전15:29)라고 반문하며 말합니다. 우리는 증표로 세례(예수와 함께 죽었다가 살아남)를 행합니다. 이 세례의 증표를 행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함께 임한 것인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부활하는 날,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을 꼭 만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진리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4. 나의 진리이신 예수님) / 본문 : 요8:31-47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참된 진리를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율법만을 따르던 유대인들은 그것만이 참 진리인줄 알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는 말씀 때문에 격론이 벌어집니다.
먼저 이 “진리”라는 말(단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사용된 단어는 ajlhvqeia(알레데이아) “숨기지 않음”으로 거짓, 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마22:16절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라고 한 것 외에 모두 요한복음과 바울이 기록한 서신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께 비아냥거리면서 책잡기 위해서 먼저 아부하는 말로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들은 모르고 사용했지만 사실이었습니다.
구약 시편에서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6-7)라고 함으로 진리가 무너진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율법으로 씻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고 했습니다.
“진리”에는 이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런 죄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뿐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이것은 곧 주님자신과 그의 말씀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31절에 보면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반대하던 유대인들이 아니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예수를 죽이고자 했으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40, 58절).
예수님의 자유케 한다는 이 말에 자신들이 남의 종이 되었고 그곳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 8:33)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도 실상은 거짓임이 들어 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가 애굽에서 탈출할 때 애굽의 종 되었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마다 종살이를 시킨 적이 많이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바벨론 종살이에서 돌아온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압제하에 있으면서 남의 종이 되었던 적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과대 평가하며 역사까지 왜곡하는 발언이며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유대인들의 자존심에서 나온 답변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인의 자존심에 대해서 역사적인 관점은 뒤로하고 이들의 개인적인 죄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44-45)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들은 개인적인 죄를 회개를 하려고 들지 않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과 같고 귀신들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믿고 따랐던 유대인들에게조차 이 말씀을 하심으로 돌로 치게 만들 정도로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건들이셨겠습니까? 그것은 곧 진리를 따르지 않으면 죄를 사할 수도 없으며 사람이 새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이 진리가 중요한지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1. 진리가 없이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양이나 비둘기를 잡아 희생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의 시대에는 바로 예수님의 진리 안에서 예배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한글성경에서 “진정”으로 번역된 단어는 본문의 “진리”와 같은 용어입니다). 예배하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여호와께 드렸는데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히브리서 11:4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나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서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믿음을 다르게 표현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우리가 죄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속에서 진리가 역사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아직 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내가 왜 죄인이냐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증거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마19:16-22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죄는 그대로 있는데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와는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요4:1-26의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입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과 진리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은 죄인이었지만 진리에 대해서 알아들을 귀가 있었습니다. 관심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죄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3. 진리만이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7-19)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에서 완전히 승리하시고 거룩하게 되셨습니다. 이 거룩함은 이 진리를 믿는 모든 사람도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의 상태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거룩한자입니다.

4. 예수님은 이 진리에 대해서 증거하러 오셨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요 18:37)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왕으로 왔다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왕이 아니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께서 진리를 증거 하러 오신 왕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속한 자라면 내 소리를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사랑에 대해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진리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 있으면 그것이 불의 한 것일지라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험난한 세대에 다시 바울이 권면하는 것 같이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엡 6:14)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허리띠는 진리입니다. 진리가 있을 때 힘을 씁니다. 진리는 영원한 것이며 변하지 않습니다. 당장은 진리가 지는 것 같지만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진리는 반드시 드러납니다.

5. 진리는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가 심판을 가늠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2)

한국에 오셨던 선교사님 중에 크레인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안식년차 본국(미국)에 들어가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 때 마침 친구목사도 안식년이 되어 유럽에 가게되어 그 교회를 1년 동안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교인의 집에 엄청난 사건이 생겼습니다. 오랫동안 모아온 재산이 불타 없어졌고 아내가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아들은 캠프에 갔다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믿지 못할 이 사건은 실제 있었습니다. 크레인목사는 장례식 설교를 해야하는데 어떻게 위로하고 설교를 해야될지 몰랐습니다. 상주의 오른쪽은 물에 빠져 죽은 아들의 시신이, 왼쪽에는 불에 타죽은 아내의 시신이 있었습니다. 한참을 망설인 크레인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미스씨 당신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선택은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했더니 잠시 후 스미스씨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나님을 선택하겠다고 했답니다. 이 자리에 있던 많은 조문객들은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제 진리를 선택하는 문제와 유대인처럼 예수를 돌로 치는 문제는 나에게 선택권 있습니다.
요한은 이 진리에 대해서 제일 많이 언급한 사도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였습니다. 이런 요한이 자신의 서신에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요이 1:3)
,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요이 1:4),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1:3-4)고 했습니다. 아울러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요삼 1:8) 진리 안에서 행함이 있을 때에만 요한이 기뻐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 그 일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반대의 개념에서 불의인 것입니다. 모든 일을 흑백논리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한 것은 진리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름으로 하나님을 만나며,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