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돋는 해

예수님은 누구 신가?(9. 나의 돋는 해) / 본문 : 눅1:78-79, 말4:1-2

(눅1:78-79)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말4: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2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저는 지난 8월5일-16일에 영국을 다녀왔습니다. 그 때 한국날씨가 하도 더워서 어서 빨리 영국에 가야지 그러면 조금이라도 덜 덥겠지 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유럽 전체가 몇 십 년 만에 제일 더운 날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프랑스에서는 독거 노인들이 몇 천명이 죽었습니다. 영국의 도박사들은 날씨가 연일 최고더위를 경신하자 돈을 잘못 걸어 망한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영국의 집들은 에어컨과 선풍기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더운 날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자상가를 갔을 때 “선풍기가 다 팔렸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문구가 창에 써 있었습니다. 아마 이런 더위가 매년 계속된다면 영국의 가옥구조도 변경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기온이 몇 도만 더 올라간다면 심각한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태양을 조금만 더 지구에 가까이 접근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조금만 더 멀리하시면 어두움과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우주선을 쏟아 올린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지구의 온난화 문제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일어난 문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공해 때문입니다.
대구유니버시아드에 참석한 북한 응원단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진이 함께 찍힌 현수막을 상기된 얼굴로 걷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울먹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 초상을 저렇게 낮은 곳에 걸려있고, 귀퉁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 맞으면 안된다고 고이고이 접어가지고 갔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태양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수령님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는 심판 날에 임하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해’로 비유했습니다. ‘해’로 표현한 것은 북한의 김일성이나 김정일처럼 우상화 시켜서 섬기라는 뜻에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악인과 의인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임하시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심판 날에 악인에게는 극렬한 풀무 불로 임하셔서 그들의 뿌리까지 태우십니다.
정원을 가꾸어 보신 분들이나 농사를 지으셨던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잔디밭이나 농지에 잡초가 자라나는데 잡초는 잘 보이지 않으려고 납작한 것이 많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아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뿌리가 더 깊이 박혀있습니다. 이것이 잡초들이 살아가는 방법인 것입니다. 뿌리를 다 뽑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멀쩡한 것까지 뽑힐 염려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염려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피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 뿌리까지 다 태우십니다. 완전한 결산을 하는 것이며 악은 모두 거두어 하나도 남김없이 그 근원을 모두 불로 태우신다는 것입니다(마13:41-42).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1절)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이방 나라를 다스리고 자신들이 많은 나라를 통치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셨습니다. 유대인만의 구주가 아니요 이 세상의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혈통만 믿고 자신들의 행동과 죄는 뒤로했습니다. 유대인이니까 의로운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기만 하면 의로워진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오래된 영국교회들도 이러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저는 지난 8월 10일 웨일즈의 한 개척교회에서 주일오전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교회의 목회자는 영국의 큰 교회(건물만)에 담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뜨거운 가슴을 막을 길이 없어 피켓을 들고 길거리에서 전도했습니다. 이런 영국의 목사를 찾아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교회에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권위가 실추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창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쫓아내었다는 것입니다. 왜 영국의 교회들이 오늘날처럼 되었는지 약간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텅 빈 큰 교회건물들을 옆에 두고 작은 공간에 임시 막사처럼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날은 영국에서 몇 십 년 만에 제일 더운 날이라고 한 날이다. 선풍기 하나가 강대상 옆에서 돌아갈 뿐이었는데 열을 식히는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땀의 뒤범벅이 되었어도 살아있는 그 느낌은 영국의 큰 성공회의 많은 형식의 예배분위기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조지 바나(George Barna)는 이러한 현상을 ‘주전자 속의 개구리’(Frog in the Kwttle)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곧 주전자 안의 미지근한 물 속에 개구리를 집어넣고 서서히 물을 데우면 개구리가 기분 좋게 죽어간다고 합니다. 바나는 바로 이같은 이미지야말로 현대 서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즉, 현상 유지(Status-quo)의식 안에 안거하여 편리와 기득권을 즐기는 동안에 우리는 실상 죽어가고 있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앞서온 세례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11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7-12)

그러나 의인에게는 의로운 해로 떠오르십니다.
어느 날 문득 저 동녘하늘에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는 순간 숨이 머물 것 같은 감동을 느껴보신 적이 없으신지요? 태양은 매일 떠오르지만 매일 새것입니다. 해가 없다면 이 땅의 동, 식물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태양의 광선이 식물과 동물의 생명을 위해서 빛과 열을 주는 것처럼 ‘의로운 해’, ‘돋는 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을 위해서 떠오르신 것입니다.
교만한 자와 악한 자에게 내리시는 심판과는 반대로 말라기 저자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사람이 의인이라는 말 아닙니까? 또한 이 사람에게 의로운 해, 바로 치료하는 광선을 비쳐준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의 표현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이와 같이 기쁜 일을 신약본문 눅1:78절은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일이 시험 보아서 된다든가, 돈 있어야 된다든가, 힘있는 사람만 된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아무래도 제외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이지 않습니까? 돈도 아니요, 힘도 아니요, 머리도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이름만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라디오 설교 방송을 들은 어머님은 그 목사님의 방송 테이프를 자기 자식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구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설교의 어느 부분에 은혜를 받으셔서 테이프를 구입하려고 하세요?’
‘목사님께서 맛있는 식당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그곳에 꼭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찾으신다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내 입맛에 맞으면 나에게 평생을 먹을 것을 만들어 주신 부모님의 입맛에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꼭 그 음식점에 함께 모시고 가신다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실 부모님들은 큰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부모님을 기억하고 함께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시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가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해서 나만을 위해서 살라고 말하지는 않으십니다. 더욱이 이 세상의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가진 것 중에 무엇이 필요하신 분이겠습니까? 사실 다 그분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기억하고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름만 부르고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종교가 기독교 외에 어디 또 있습니까?

저는 요즘 모든 것이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중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더 그런 마음이 생겼습니다. 중국에 갔을 때 제가 설교하는 것이 목사의 설교를 처음으로 듣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사에게 처음 축복기도와 안수 기도를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분들의 감격과 감동도 컸겠지만 저 역시 감격스런 일이었습니다. 중국 땅에 머물며 살아오신 그분들의 애환을 제가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그리고 두만강가로 바로 건널 수 있는 작은 강을 앞에 두고 손에 잡힐 듯한 산을 바라보며 그곳이 북한 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왜 또 그리 슬퍼지는 것입니까? 백두산에 올라갔으나 천지를 보지 못하고 내려왔지만 그분들이 더 미안해하고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분들의 잘못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런 슬픔도 이 땅에서 잠시뿐입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중국의 조선족 할머님들은 저의 두 손을 꼭 잡고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제가 다시올 때까지 건강하게 사셔야 됩니다.”라고 인사하고 돌아왔습니다.
계21: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찬송가 외엔 아는 노래도 거의 없습니다만, 세상 가요이지만 심수봉씨의 “젊은 태양”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생각납니다. 한 여인의 허스키한 음성으로 흘러나오는 조용한 노래에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햇빛 쏟는 거리에 선 그대 그대
고독을 느껴보았나 그대 그대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햇빛 쏟는 하늘 보며 웃자 웃자
외로움 떨쳐버리고 웃자 웃자
우리는 너나 없는 나그네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종 소리 바람 소리 고이 고이 잠들던 날
먼 하늘에 저 태양이 웃는다
햇빛 쏟는 거리에 선 그대 그대
고독을 느껴보았나 그대 그대
우리는 너나 없는 나그네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아~ 아~ 아~ 아~

모진 바람 거센 파도 가슴 속에 몰아쳐도
먼 하늘에 저 태양이 웃는다
햇빛 쏟는 거리에 선 그대 그대
고독을 느껴보았나 그대 그대
우리는 너나 없는 이방인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햇빛 쏟는 하늘 보며 웃자 웃자
외로움 떨쳐버리고 웃자 웃자
우리는 너나 없는 나그네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

후렴에서 ‘왜 서로를 사랑하지 않나’하며 사라지는 노래는 여운을 남깁니다.
호이토 맨 이라는 사람은 “추위에 떤 자일수록 태양의 따뜻함을 느낀다”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의 고뇌를 맛본 자일수록 생명의 존귀함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삶의 고난이 없는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깊이 알기란 어렵습니다.
태양하면 얼른 생각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다는 것과 생명 아닙니까?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은 따뜻한 봄날의 햇살처럼 생명의 빛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축복이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왕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8. 나의 왕이신 예수님) / 본문 : 마16:21-28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왕이 올 것을 기대했지만 그들의 생각에는 예수가 그 같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을 위한 왕, 세계를 지배하는 왕이 나올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아니지만 현재 세계를 사실상 지배하는 미국의 왕(대통령)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말 한마디면 세계의 어느 곳도 초토화시킬 수 있는 힘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왕을 유대인들이 원한다면 현재 미국의 왕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이 세상에 그런 왕을 내려보내지는 않으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을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보았습니다. 세계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고있습니다.

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가난이 무엇인지 조금은 압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돈을 좀 벌어보겠다고 중학교 다닐 때 신문을 배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은 문득 이렇게 해서 언제 부자가 될 수 있나! 하는 생각에 미친놈처럼 밖으로 뛰어나가 캄캄한 밤에 보이지도 않는 산을 단숨에 뛰어 올라가 밤하늘을 쳐다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깊이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상상을 합니다. ‘내가 올림픽에 나가(만화책에서 본 것이 생각났는지?) 단숨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권투를 하던, 아니면 투포환을 던지든 금 매달을 따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하겠지’ 하며 혼자 마음대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나를 돕는 어떤 무소 부재의 능력을 가지신 왕 같은 분이 나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우리로 말하면 일제시대와 같은 로마의 속국으로 자주권을 잃고 살아간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루속히 자신들만을 위한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을 회복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윗 왕과 같은 힘있는 유대인의 왕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선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세계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미묘한 때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습적인 왕통은 늘 도전을 받았고 그들은 다른 왕이 어디서 나온다는 소문만 있어도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헤롯왕은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듣고 극도로 쫓기는 마음으로 자신의 왕좌가 흔들릴 것을 우려하여 순진 무구한 2살 이하의 아기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B.C. 4년 3월) 임종을 4-5일 앞두고 후계자로 정해졌던 장자 안티파터의 처형을 명령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고 후계자로 자처하며 행세하는 꼴이 보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그의 아들 셋을 모조리 죽이고 자신도 몇 일 있다가 죽었습니다. 헤롯은 후계자로 지명했던 세 아들 안티파터, 알렉산더, 아리스토불루스를 죽인 후 새 후계자로 아켈라오를 지명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지명만으로 왕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황제의 재가를 얻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로 떠나갔습니다.
바로 이 때 로마에 대한 항거로 대중적인 지지로 메시야 왕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더 이상 로마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헤롯 왕조를 거부하고 유대인을 위한 다윗과 같은 순수 혈통의 왕을 세움으로 로마의 섭정을 거세하려했던 것입니다. 이 때 다윗의 순수 혈통임을 자부하며 새 다윗의 역할을 하겠다고 나온 인물들이 있는데 갈릴리 지역에서는 유다, 베뢰아에서는 시몬, 유다 지역에서는 아트롱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언했고 왕관까지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들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로마의 황제가 임명한 아켈로오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후 6년에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민중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주후 6년에 일어난 이 운동은 왕위에 대한 것보다는 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의 정치적 상황이란 매우 복잡하고 혼란한 시기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기에 예수께서 자라나시고 사역을 하셨다는 것을 먼저 숙지해야 합니다. 결코 편안한 안락의자나 설교하기 좋은 저와 같은 강단에서 편안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가만히 다시 들여다보십시오. 복음서를 다시 읽어보십시오. 얼마나 긴박한 순간들이 계속되는지 모릅니다. 그 긴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헤롯왕이 두 살 어린이를 죽인 사건은 당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던 세 사람도 힘이 없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진정한 왕이 될만한 사람으로 얼른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주의 영광의 나라가 오면 자기들에게 좌의정, 우의정 자리를 달라고 예수께 못박아 두려고 했습니다(마20:20-21, 막10:35-37).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20:22) 하셨습니다. 그리고 26-27절에 으뜸이 되고자 하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러 왔다고 하십니다. 물론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있기까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의 왕이 되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21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실망할 수밖에 없는, 꿈이 깨지는 이야기입니다. 수제자인 베드로가 참다못해 나섰을 것입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온 결과가 이런 것이라면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이토록 간곡히 부탁드린 일은 없습니다. 만일 이렇게 끝난다면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온 자신의 모든 꿈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맡아 띵~ 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기대하던 예수님의 답변이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충격의 말씀이었습니다. 어쩌면 지금 예수님을 떠나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그의 마음은 착잡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격렬한 분노와 감정을 표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사단에게 시험받으신 일이 있습니다. 사단은 예수께 천하만국과 권세, 영광을 주겠노라고 세상 왕에 대한 정치적 시험을 해왔을 때, 그 때도 예수님은 격렬한 분노를 감추시지 않으시고 “사단아 물러가라”(마4:10)고 호령하셨습니다. 이 두 경우의 특징을 보면 첫째, 시험 당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
둘째, 모두 예수께서 격노하셨다는 것
셋째, 시험의 요소가 정치적(권력의 유혹)이었다는 것
넷째, 시험을 건 주체는 사단이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바로 베드로(제자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예수께 다시 한번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단이 베드로를 통해서 말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단에 대해서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 왕에 대한 유혹으로 사단은 시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다음의 말씀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24-26절)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왕이 되실 것을 꿈꾸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왜 세상 왕에 대한 대응으로 ‘십자가, 죽음,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까? 이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왕이 되고 또한 제자들이 영의정과 좌의정이 되어 유대 나라를 다스리고 앉아있는 것은 잠시뿐일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생각은 이 땅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거나 세상의 욕심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어린이를 구하려던 역무원이 열차에 치여 두 발을 잃는 안타까운 사고가 지난 25일 오전 9시10분쯤 일어났습니다. 경부선 영등포역 김행균(42)열차운용팀장이 서울발 부산행 새마을호 열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김행균씨는 안전선 밖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뛰어들어 어린아이를 밀쳐내고 자신은 왼쪽 발목 아랫부분과 오른쪽 발등을 잘리는 중상을 입은 것입니다. 김행군씨는 신촌의 병원으로 급히 옮겨져 왼쪽 발목 접합수술을 받았습니다. 철도청은 사고 후 새마을호 승객으로 보이는 어린이를 찾기 위해 사고 열차와 역 구내에서 안내방송을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인터넷에는 네티즌들이 김행군씨를 돕자는 글이 무수히 올라오고 있습니다. 또한 무정한 어린이의 부모를 질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식을 살려준 은인에 대한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지다니, 이 사회의 빡빡한 인심을 단면적으로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보다 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있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데 3년이나 따라다닌 제자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남자성인만 5000명이 넘게 배불리 먹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우리는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찬송가 356장 “성자의 귀한 몸”의 4절)라고 찬송합니다.
그리고는 지금도 나를 위해 무엇을 달라고만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니까 보따리 내 놓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자들보다,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나에게 어떤 짐이 지워질 것 같아 슬쩍 사라진 어린이의 부모가 곧 우리들이 아니겠습니까?
혹 우리도 유대인과 같이 이러한 왕을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나만을 위한 왕, 우리 자녀들만을 위한 왕, 내 사업의 번창만을 위한 왕!
바로 이러한 왕이 유대인들이 꿈꾸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조롱과 핍박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무참히 죽는 순간 이런 왕을 꿈꾸던 자들의 꿈은 산산이 조각났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나의 왕이신 예수님”이 안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 제목은 필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국 고담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배가 고픈 호랑이가 산중에서 여우를 만났습니다. 호랑이는 배고픈 김에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여우를 잡아먹고자 덮치려고 했습니다. 여우는 이 궁지를 모면해 보려고 한 꾀를 생각해냈습니다. 덮치려는 호랑이를 보고 “호랑이 아저씨 잠깐 기다리십시오. 나를 잡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 산중의 제왕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호랑이가 “그것을 네가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하고 말했습니다. 여우가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 뒤를 따라 다니시면 알 수 있습니다.” 호랑이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여우 뒤를 따라 산중을 따라다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산중의 모든 짐승들은 이들을 보더니 다 피해서 달아났습니다. 그때 여우가 말하기를 “이것 보십시오. 내가 나타나서 저렇게 다 무서워서 달아나지 않습니까? 그러니 내가 이 산중에서 제왕이지 않습니까? 체면도 있으니 내게 손대지 마시오.” 호랑이는 여우의 말이 그럴듯해서 여우를 놓아주었고 여우는 도망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산 짐승들이 여우 일행을 보고 도망한 것은 여우 때문이 아니라 그 뒤의 호랑이를 보고 무서워서 달아났던 것입니다. 호랑이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서 여우에게 속았습니다.

우물안 개구리가 보는 하늘은 동그란 작은 모습의 하늘뿐입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엄청난 책망으로 실의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뿐만 이겠습니까?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다른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격한 분노의 말씀 앞에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희망과 기쁨이 주어질 수 있었습니다. 자 오늘 본문 마지막 두 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27-28절) 천사들과 함께 왕권을 가지고 속히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주적 심판의 만 왕의 왕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고을이나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나라를 한 때 통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고 그곳의 왕이 되시는 분이십니다(시2장, 72장, 110장). 그리고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하시는 왕이십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이라고 말합니까? 이 땅의 일만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혹 그분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셨다해도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한 복음이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6에 보면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보좌는 ‘수정, 유리바다’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수정, 유리바다’면 살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깨끗한 나라를 말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왕이신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이 나라에 함께 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