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3. 나의 영이신 예수님) / 본문 : 고후3:12-18

이곳으로 이사오기전의 사무실이 건대입구역 로데오거리에 있었는데 저희 사무실 맞은편 2층에 여행사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이 사무실은 가끔 불이 꺼지지 않고 밤 세도록 켜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도 저토록 열심히 일을 하는데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선교를 하면서, 저 사람들만큼 열심히 하는지를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도 밤을 새우기도 하고, 땀을 흘리기도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바울은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고후3:12)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소망은 앞의 7-10절을 말한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를 따르던 사람은 단순히 죄를 알려주는 직분이었습니다. 이 없어질 직분이 영광스러웠다면 사람을 의롭게 하는 영원한 직분은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러니 담대히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담대히 증거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썩어질 것을 위해서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영원한 일을 위해서 어찌 열심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바울은 이러한 심정으로 담대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광채는 유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후3:13) 이 말씀은 출34:29-35절을 예로 든 것입니다.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쓴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모세에게 있던 광채가 사라졌을 때 그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질 것을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나타났던 광채를 통해서 백성들이 모세에게 현혹되어 영원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이 자신과 모세를 비교한다기보다는 복음과 율법을 비교한 것입니다. 율법은 유한한 것이며 복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율법의 일꾼이었던 모세와 다르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당당하고 마음의 속박함이 없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할 것 같아 수건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복음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건을 써야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수건이 마음을 덮고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고후3:14)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모세만 수건을 덮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수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대하는데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수건을 덮어쓰고 있었던 것은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서 그랬던 것입니다. 원어의 ‘완고(에포로테:ejpwrwvqh)’는 의학용어인 피부 경질이란 뜻입니다. 이 경질은 뼈가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자리에 생기는 것으로 굳으면 원래 뼈보다 더 단단한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돌과 같이 무감각하고 굳어진 경질 같은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자신들의 고집을 버리지 않고 읽었다는 말입니다.

‘정신병원의 독서시간’이란 제목의 유머가 있습니다.
몇몇 환자가 두꺼운 책을 텍스트로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환자1 : 이 책은 너무 나열 식이야.
 환자2 : 게다가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좀 산만해.
 그런 이야기로 열기를 더해 가는데 간호원이 급하게 들어와서 물었습니다.
 “누구 전화번호부 가져간 사람 있어요?”
우리도 아직까지 수건을 벗지 못해서 성경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강아지에게 안대를 씌어준 것을 보았습니다. 강아지는 그 안대가 얼마나 갑갑했던지 발로 비비고 고개를 휘두르고 난리를 떨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답답한 안대 같은 수건이 얼굴을 덮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합니까? 당연히 수건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수건을 벗는 방법은 딱 한가지가 있습니다.

주님께 돌아오면 벗어집니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3:14)고 했습니다. 이 수건을 벗는 것은 율법의 한계성을 영원하게, 미완성적인 것은 온전하게 만드신 율법의 완성 자이신(마5:17-18, 롬10:4)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원문은 (엔 크리스토 카타르게이타:ejn Cristw’/ katargei’ta)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히 소멸된다]는 뜻입니다. 카타르게이타(katargei’ta)는 현재형 수동태로 ‘지금 그렇게 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수건이 벗어지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왜! 외국의 많은 신학교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고 이상한 교리에 많은 문제가 발생되었는지 아십니까? 학문이라는 것은 원래 발전해야 되는데 공학과 또 역사적으로 무엇을 발굴해 내는 학문은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은 생각해 보십시오. 박사 과정의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에게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의 학교에서는 그 정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교수는 그것을 학문적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원주의로 흘러가고 예수 안에서만이 아니라 선행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나, 종교는 다 같다는 식의 논리가 성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고후3:16)입니다. 돌아온다(에페스트렙호:ejpistrevfw)는 말은 회개를 말합니다. 그리고 ‘복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결코 수건은 벗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가끔 수건을 덮어쓰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다름 아닌 율법에 젖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인이나 안식교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단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전통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교단이 될 수도 있고, 학교가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교회나 목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교회가 아니면 안되다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교회에 대한 자부심과 프라이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쳐서 혹 교회나 목사님을 그리스도보다 앞서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에게 예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목사 설교 들으려고,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이런 모습이 우리 자신이었다면 그리스도안에서 회개하고 그분에게로 온전히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5:19-20). 나 자신이 그리스도안에서 돌아올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을 돌아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영은 자유롭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영’ (프뉴마:pneu’ma)는 성령을 뜻합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제일 처음에 나타나는 곳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3:16) 입니다. 주님이 성령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주의 영이 우리의 속에 역사하고 있음을 말합니다(롬8:15, 갈3:2, 엡5:18). 요한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했습니다. 성령은 다름 아닌 진리의 영입니다. ‘자유함’이라는 말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죄로 인해서 사단에게 속박 당하고 있었던 모든 문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은 하나이십니다(요10:30). 이분에게 불가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나 성령은 모든 생명, 진리, 능력, 거룩함, 축복, 영광의 근원으로 나타납니다. 이 자유의 그리스도의 영은 나를 모든 죄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유명한 시인 에머슨의 집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에머슨이 그의 아들과 함께 송아지를 외양간에 집어넣으려고 아들은 앞에서 끌고 에머슨은 뒤에서 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자가 힘을 다했지만 송아지는 네 발을 딱 버티고는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일랜드 출신인 부인이 이 광경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땀을 닦고 있는 에머슨 부자 앞에서 송아지 입에 손가락을 넣고 다른 손으로는 송아지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다정스럽게 대해 송아지가 스스로 외양간으로 들어가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에머슨처럼 멋진 시를 쓸 줄 몰랐지만 송아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강제적으로 외양간에 집어넣으려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랑으로서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TV이나 신문을 통해서 사람의 약점을 잡고 그것을 빌미로 계속해서 돈을 뜯어내는 아주 파렴치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잡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계속해서 막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깨끗하게 해결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사단에게 계속해서 질질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이제 결단을 하십시다.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고 질질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서,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자유함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영은 우리를 주님과 같이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전3:18)
여러분 여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두 단어를 주시해야 합니다. 하나는 ‘형상(에이코나:eijkovna)’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모방이나 유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형적 대표, 실체를 말하는 것이며 아울러 현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골1:15, 히10:1). 그리고 ‘화하여’(메타모르푸메타:metamorfouvmeqa) 내적 본성에서 변화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막9:2-3에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하신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수건을 벗고 주님의 영광을 보면 바로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체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된 몸과 같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빌3:21, 요일3:2). 이런 영광은 주의 성령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는 한 분을 소개합니다.

얼마 전 영국에서 수련회가 있었는데, 한 집회에서 신앙 때문에 18년을 감옥에서 보낸 중국인 목사가 소개되어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청중에게 자신의 감옥살이 경험을 이런 말로 들려주었습니다.
“제 친구들은 제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어떤 일을 하였기에 몸의 건강을 지킬 수 있었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그곳에서의 삶은 너무너무 고된 것이었다고 대답합니다. 수용소 당국자들은 제게 인분 구덩이를 치우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 구덩이는 수감원들조차 가까이 가기를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내가 교육 수준이 높은데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특히 자기들은 무신론자인데 나는 그리스도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일을 시켰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나에게 인분 구덩이 치우는 일을 시키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여러 해 동안 내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구덩이는 수용소 전체에서 수거된 인분으로 가득 찬 넒이 2미터 이상에 길이도 2미터나 되는 구덩이였습니다. 인분이 꽉 차면 적당히 썩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퍼서 밭에 비료로 보냈습니다. 구덩이는 아주 깊어서 바닥까지 깨끗하게 퍼낼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병균 덩어리 속에 직접 들어가 시종 악취를 맡아가며 인분을 조금씩 차례로 퍼내야 했습니다.
간수들과 모든 수감원들은 악취 때문에 가까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좋아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혼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는 보통 모든 수감원들이 엄격한 감시하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혼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구덩이에서 일했기 때문에 혼자 있을 수도 있었고, 주님께 실컷 큰 소리로 기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외우고 있던 시편 모두와 여러 성경 말씀을 암송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가까이 와서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인분 구덩이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던 이유입니다. 그때까지 외우고 있던 찬송들을 큰 소리로 부를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내가 제일 즐겨 부르던 찬송 중 하나가 ‘저 장미꽃 위의 이슬’(499장)입니다. 그것은 체포되기 전에도 제일 좋아했던 찬송이었지만, 그때는 그 찬송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분구덩이에서 일하면서 나는 우리 주님과의 놀라운 교제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내 곁에 계신 우리 주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 구덩이 안에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나는 주님의 임재를 맛보았습니다. 그 분은 결코 나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아나게 되었고 그 인분 구덩이는 주님과 교재하는 나의 은밀한 동산이 되었습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우리도 이와 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아 그분과 같이 새로운 부활의 생명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셨습니다” 생령(生灵)은 ‘살아있는 영’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원래는 영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을 왜 영이시라고 다시 말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영은 이미 하나님을 떠나 죄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죽은 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살리는 영이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반석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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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 신가?(12. 나의 반석이신 예수님) / 본문 : 마6:24-27, 고전10:4

우리 속담에 ‘소귀에 경 읽기’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해 주지만 소처럼 큰 눈만 깜박거리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아무리 좋은 말을 들려주어도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으며 그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인생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집에서 살고 집에서 죽는 것입니다. 집은 곳 우리의 안식처요 가족이 있고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야구를 보면 홈에서 출발해서 홈으로 들어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족이 있는 집, 홈에서 출발해서 홈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것은 여행길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돌아갈 본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길을 떠난 우리들은 잠시 죄악 때문에, 사단의 방해로 그 길을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 길을 다시 찾아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당신의 집으로 안내하십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찾아가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집을 짓는 사람은 먼저 설계를 해야합니다.
‘바둑’아시죠? 바둑은 집을 누가 많이 확보하느냐에 따라서 게임의 승패가 나는 것입니다. 바둑판은 19*19줄의 361집입니다. 이 바둑판을 두고 인생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집을 지을 것인가를 계획합니다. 그러나 혼자 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편이 그 집을 그대로 짓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습니다. 상대편도 집을 확보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싸움을 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고수일수록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급급해 하지 않고 바둑판을 크게 봅니다.
우리는 모두 남은 인생을 설계해야 합니다. 설계를 할 때는 넓은 마음으로 전체를 보고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미 설계를 잘해서 집이 지어져 가는 분도 있을 것이고 이미 다 지어서 그 집을 활용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집이 잘못되어 다시 지을 필요가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잘못된 집을 지은 사람의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유형의 사람은 ‘나는 기초가 필요 없다. 바람 부는 대로 떠내려 갈 것이다’라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표류하고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유형은 ‘나는 견고한 기초 위에 집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초가 잘못된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초는 세상 학문, 물질, 명예와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집을 설계하고 지었다면 부수고 다시 재건축을 하시기 바랍니다. 안타까운 일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기초가 잘못된 자기 집을 계속 짓는 사람입니다.

한 여객선이 심한 폭풍우로 항로를 잃고 헤매다가 어느 무인도에서 난파되었습니다. 승객들이 머리를 모아 아무리 의논을 해도 무인도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난파된 배 주위를 살펴보니 다행히 몇 달 먹을 식량과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는 날까지 살아야 했기에 씨앗을 심기로 결정하고 땅을 팠습니다. 그런데 황금덩어리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씨앗 뿌리는 것도 잊고 황금을 캐느라 온 무인도를 동분서주했습니다. 몇 달 후, 황금은 산더미같이 쌓였고 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지쳤다. 그런데 설상가상을 식량까지 바닥났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이 씨앗을 뿌리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습니다. 훗날 그들 모두 황금더미 옆에서 굶어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누런 황금 덩어리 쌓는 것이 살 길이 아닙니다. 미래를 위해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미래를 위한 설계입니다.

집은 기초가 제일 중요합니다.
미국의 뉴욕과 호주의 시드니는 반석 위에 세워진 도시라면 이탈리아의 베니스는 아드리아 해의 물 속으로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거기엔 뉴욕이나 시드니 같은 기반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7:25)라고 하십니다. ‘반석’은 원어로 페트라(pevtran)입니다. 이 말은 바위, 암반을 말하며 천연요새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본문은 팔레스틴의 지형적인 특징을 이해해야 합니다. 팔레스틴은 건기 때에는 바짝 마른 땅도 우기(wadi)때에는 급류가 내려갑니다. 제가 작년에 캄보디아 갔을 때 선교사님이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교통과 여러 가지 여건이 좋은 땅을 봐 두었는데 건기 때 본 것입니다. 그런데 우기가 되니까 그 땅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집을 지으면 물 속에 짓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우기가 되어서야 알았습니다. 열대지방은 반드시 우기를 거치고 나야 땅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반석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2:20)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4:11)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벧전2:6-7)
이 세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영생을 위해서 건축하시기를 원하신다면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반석이시기 때문입니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침례교목사를 지낸 에드워드 모트(1797-1874)가 작곡한(찬송가 539장) ‘이 몸의 소망 무엔가’의 후렴에서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서기를 소원하는 이 찬송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외모를 너무 화려하게 지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집을 짓는 모든 사람은 외모에도 신경을 쓸 것입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외모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속은 비어 있으면서 남에게만 보이기 위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소용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옛날 집을 보면 대문을 크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속 있는 집은 굴뚝을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회칠한 담을 내가 이렇게 훼파하여 땅에 넘어 뜨리고 그 기초를 드러낼 것이라”(겔13:14)고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15절에서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도 없어졌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것입니다. 바로 이들은 기초를 반석위에 세우지 않고 담에 회칠을 해서 그럴듯하게만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은 담도, 회칠한 자들도 없어졌습니다. 외모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신앙이어야지 남에게 보이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예수님 때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너무나 외식 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고 하셨습니다.

반석위가 아닌 집은 무너집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7) 본문에는 접속사인 ‘그러므로, 역시, 마찬가지로’의 뜻이 있는 카이(kai;)가 무려 5회나 나옵니다. 우리말에 ‘업친데 덮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무너지는 것이 계속되기 때문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집은 안전검사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집은 하나님께서 짓도록 허락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그분에 의해서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집도 준공검사를 받아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라에서 정한 안전한 기준에 따라 건물을 조사하고 사용을 승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집은 하나님께서 잘 지었다는 승인해 주어야 합니다. 그 승인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비유적이지만 인 맞은, 도장을 찍어준 사람의 수와 도장의 내용까지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계7:4)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것이 있도다”(계14:1)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집에 도장을 찍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 도장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이름을 쓴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집을 지었나?
하나님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 기초 위에 집을 지었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을 위해 지었는가?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에 이민해서 살고 있는 한인 2세가 명문 컬럼비아대 의과대학에 지원했습니다. 공부도 잘해서 SAT시험에 만점을 받았습니다. 집안 형편도 부유해서 무난히 합격되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합격 통지서가 날라 왔습니다. 이유는
“귀하의 성적은 아주 우수합니다. 가정형편이나 여러 조건들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귀하의 서류 어디를 보아도 헌혈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헌혈한 경험도 없는 귀하가 어떻게 환자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귀하는 의사 될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혹 이런 모습이 우리교육의 현재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지요?

여러분 우리의 집도 우리의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육체도 자신의 것으로만 알고 사는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앙교회는 우리만의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입니다. 나아가 세계의 형제 자매들의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오래 전에 영국에 William Borden은 예일대학교에 입학을 한 유망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중국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주변 사람은 그의 결정이 어리석은 것이었다고 비웃었습니다. 좋은 가문,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처지에 있는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복음을 위해 자기를 바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중국에 가는 도중 애굽에서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애굽의 병상에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알렸습니다. 나는 ‘No reserve(남겨둔 것이 없다), No retreat(물러설 곳도 없다), No regret(후회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Borden은 이런 글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견고한 터 위에 집을 짓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준비해야 할 것을 준비했습니다. 그리스도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할렐루야-
 

나의 산 돌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1. 나의 산 돌이신 예수님) / 본문 : 벧전2:1-10, 사28:16

인간이 제일먼저 이용한 도구는 ‘돌’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석기시대라고 말합니다. 육지가 만들어질 때 크게 두 가지 물질로 창조하셨는데 그것은 흙과 돌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흙은 돌이 부서져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풍화’라고 합니다. 이 과정은 큰 바위 → 작은 바위→ 큰 돌 → 작은 돌 → 왕모래 → 가는 모래 순으로 변하는 것을 기계적 풍화라고 하고 바로 모래나 흙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화학적 풍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돌 위에 살고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많은 별들이 무엇으로 만들어졌겠습니까? 그것 또한 돌입니다. 그러다 보니 돌들도 한가지가 아니라 그 종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 중에는 사람들의 관심에도 없는 돌들이 있는가 하면 주목을 받는 돌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석입니다. 그리고 보석 중에서도 여러 가지로 나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 좋은 돌(보석)은 다이아몬드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숯과 다이아몬드는 그 원소가 똑같은 탄소라는 것을 아시는지요?

한 여인이 꿈에서 시장에 갔습니다. 새로 문을 연 듯한 가게로 들어갔는데 가게 주인은 다름 아닌 하얀 날개를 단 천사였습니다. 여인이 이 가게엔 무엇을 파는지 묻자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가슴이 원하는 무엇이든 팝니다.”
그 대답에 너무 놀란 여인은 생각 끝에 인간이 원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사기로 결심하고 말했습니다.
“마음의 평화와 사랑, 지혜와 행복, 그리고 두려움과 슬픔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세요.”
그 말을 들은 천사가 미소를 지우며 말했습니다.
“부인 죄송합니다. 가게를 잘못 찾으신 것 같군요. 이 가게엔 열매는 팔지 않습니다. 단지 씨앗만을 팔 뿐이죠.” 같은 씨앗을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검은 숯만 만들고 어떤 사람은 다이아몬드를 만듭니다.

계21:19에 보면 앞으로 우리가 가게될 하늘의 성은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라고 합니다. 아마 다이아몬드는 이 보석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섬 마을 어린이들이 서울에 올 때 선생님은 미리 서울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미리 약간의 지식을 알려줌으로 서울을 바로 이해하고 당황하지 말라는 뜻에서 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미리 우리에게 천국에 대해서 약간 알려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돌은 하늘나라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보석은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 보다도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을 ‘산 돌’이라고 말할 때는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돌을 말할 때는 생명력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시앗(남편의 첩) 싸움엔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돌은 생명력이 없음을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며, 남편이 바람을 피면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는 이 생명력이 없는 돌들로 사람들을 고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셨을 때의 일입니다. 군중들의 환호성과 찬양소리를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삼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함으로 이런 문제가 예수의 제자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19:40)는 대답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찬양하지 않는다면 생명력이 없는 돌(자연)이 그리스도를 찬양할 것이라는 뜻과 둘째는 제자들이 찬양하지 않는다면 돌들이 고발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 한가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9)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능력이 전혀 없는 돌들을 통해서도 자녀를 낳는 능력을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잉태할 수 없는 나이에 이삭을 태어나게 하신 것을 상기시키는 뜻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전능함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약속의 돌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수4:20-22)고 했습니다. 저도 가끔 해변 가에 가면 돌들을 가져오곤 합니다. 저는 그저 돌이 반들반들하여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후손들에게 요단강을 건넌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여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웠습니다. 또한 다윗이 블레셋 거장 골리앗을 죽이게 한 것도 물매돌 이었습니다.(삼상17:41-49)
이스라엘 민족에게 ‘돌’이란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상징이요 언약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구약성경은 오실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가리켜 ‘시험한 돌’, ‘귀하고 견고한 돌’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28:16)
‘시험한 돌’이라는 것은 ‘모든 시험을 다 거친 돌’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마4:1-11).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을 지심으로 승리하시기 전까지 생애 전체가 시험의 과정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들의 끝임 없는 시험 곧 넘어뜨리려는 질문들이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예언했지만 이와 같이 ‘시험한 돌’로 말씀하시고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산 돌’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좋은 돌(보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산 돌’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죽어있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산 개가 죽은 호랑이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실제로 산 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제가 어렸을 때 수정이라고 해서 뾰쪽하게 솟아난 돌이 있는데 이 돌에 물을 주면 돌이 자라난다고 해서 물을 주고 기다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돌도 변하고 있는데 그것은 부서지는 것과 아니면 산에 있는 돌이 굴러 내려와 물매 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산 돌’ 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왜 산 돌에 비유했을까요?

돌은 쉽게 부식하지 않기 때문에 기록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기록은 십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직접 돌에 새겨서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십계명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돌에 기록된 문자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산 돌’이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2에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돌은 집을 짓는 기초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돌’로 묘사한 것의 제일 중요한 것은 성전의 종석(宗石, keystone)으로서 머릿돌, 모퉁이 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직접 마태복음 12:10과 누가복음20:18에서 직접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때 버림받으실 것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종석이 되게 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기초하여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벧전2:7)라는 말을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모퉁이 돌이 되시고 머릿돌이 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시험한 돌’ 즉 우리를 위해서 같은 고통과 시험을 대신 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 되시기 때문입니다.

돌은 깨뜨리는 심판 역할을 합니다.
항아리를 깨뜨리는 돌에 대한 이야기가 유대인에게 있었습니다(단2:31, 사8:14 참고).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시켜서 불 항아리를 만들고 그것을 깨뜨려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경험이 있습니다. 아마 이러한 내용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돌과 항아리’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항아리는 사람에게 비유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돌입니다.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은 돌에 부딪혀 깨지는 항아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했을 경우, 두 사람을 다 끌어내어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어떤 남자가 한 남편과 결혼한 여자와 동침하는 것이 발견되면 그들을 둘 다 죽일지니”(신22:22)라고 하십니다. 돌을 던지는 것은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8)고 하셨습니다. 우리 속담에 ‘돌을 차면 제 발부리만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부딪히는 돌이 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탈무드에는 ‘사람들은 길에서 넘어지면 먼저 돌을 탓한다. 만약 돌이 없으면 언덕을, 언덕이 없으면 자기의 구두를 탓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좀처럼 자기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넘어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말씀을 순종치 않기 때문입니다.

돌(반석)은 생수의 근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기록하는 돌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대표적으로 십계명을 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에게 돌(반석)에 대한 사건이 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 때 르미딤에 장막을 쳤을 때 물이 없어 모세를 돌로 치려고 할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출17:1-6).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17:6) 이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대로 이어졌으며 하나님이 생수를 직접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장막절에 물을 붓는 예식을 행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그들의 심정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기회를 얻어 ‘큰 날’(장막절)에 물을 성령으로 비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39)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유엔에서 우리나라도 물 부족국가로 분류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물의 중요성을 잘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1년 평균강우량이 300밀리입니다. 우리나라의 요즘장마철 같으면 집중적으로 올 때는 하루에도 100밀리씩 쏟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물은 곧 생명을 상징합니다. 이 물이 어디에서 나온다는 말씀입니까? 바로 ‘산 돌’이신 예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 생명수는 성령입니다.

‘산 돌’이신 예수님께는 바로 교회의 머리와 구원하시는 주되심과 동시에 항아리를 깨뜨리는 심판하는 돌과 같이 심판 주되심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아니라 교회의 머릿돌이시며 성전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 되십니다. 아울러 우리 성도에게는 성령의 생수를 공급하시는 ‘산 돌’(반석)이십니다. 이러한 축복은 오직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하신 축복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신랑

예수님은 누구 신가?(10. 나의 신랑) / 본문 : 사54:4-10

우리는 결혼하는 것을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말합니다. 영어의 ‘wed(결혼하다)’는 우리와 달리 ‘약속한다, 서약한다’의 뜻입니다. 남녀간에 부부가 되는 것을 약속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징표로 결혼반지를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혼은 단순한 남녀가 만나서 한평생 살기로 약속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시집’이란 남편만이 아니라 ‘남편의 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집간다’는 것은 한 남자와 살러간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가족(시집)과 살려고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장가간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가’는 ‘장인 장모의 집(처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구려 때는 남자가 아내를 얻으려면 먼저 처가에 가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첫 아이를 낳게 되면 비로소 색시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우리의 결혼이란 1대 1의 결합이기도 하지만 한 집안과 자신이 들어가 결합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오늘 구약본문에서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5절)고 하십니다. 그리고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하십니다.
제가 조카 결혼식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주례를 하시는 분이 저희 집안을 말하면서 ‘명문가의 집안과 결혼하게 된 신부는…’이라고 할 때 사실 우리집안 사람은 그 말에 어리둥절 했습니다. 우리 집안이 명문가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희와 반대로 명문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발표된 이야기에 따르면 미국부자 중에 3대를 이어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명문가는 부자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집안과의 결혼을 생각하는 경우는 신랑, 신부보다도 집안을 따지게 마련입니다. 명문가일수록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가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왕자 또는 공주와의 사랑과 결혼을 꿈속에서처럼 그려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꿈보다 더 나은 실제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 예수님의 일가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의 말씀은 비유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적인 말씀에 담긴 뜻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우리가 이해하기 좋게 비유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남편 되어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가끔 지나치게 자신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집안의 연인과 사랑을 하다 결혼 때가 되어 박대를 당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화나 드라마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우리사회에서 이 보다 더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가족과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인도에 같을 때 있었던 사건입니다. 인도에는 아직도 카스트(계급) 사회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실제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젊은 남녀가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남자 집안의 신분이 낮은 하층 계급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브라만 계급의 상류층 여자였습니다. 여자 집안 쪽에서 당연히 반대를 하고 남자에게 경고를 보냈습니다.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하겠다고 했겠지요? 그리고 그 남자는 얼마 있다가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이와 같이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을 바라보다 죽음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니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사 54:4)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탄생하실 때부터 문제가 복잡했습니다. 저는 그래도 단칸방이지만 따뜻한 아랫목에서 편안하게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머리 둘 곳 없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하찮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대신해서 갖은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중죄인이나 받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해외여행이나 해외에서 사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얼마나 국가나 민족적으로 차별이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차별 없이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고 신부로 부르십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부르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먼저 부르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집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집안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남편으로 비유할 때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한 것을 성경은 간음으로 묘사했습니다(대하21:11, 겔6:9, 호4:12).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사 54:6) 본문의 ‘부르시되’(&a;r;q]:케라아크)는 ‘드러내다, 외치다, 선언하다’로 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하는 것 보아서 결정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를 신부로서 큰 소리로 많은 사람이 듣도록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변경할 수 없는 완료형으로 이미 결정 난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중 인생론에 관한 이러한 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무서운 맹수의 추격을 피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다하여 도망치다가 마침내 낭떠러지 절벽을 만났습니다.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그 절벽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한참을 떨어져 내려가는데 칡넝쿨 같은 줄에 걸렸습니다. 얼마 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위에는 들소가 으르렁거리고 있으며, 절벽 아래에는 무서운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사적으로 그 칡넝쿨을 잡고 있는데 바위틈에서 희고 까만 들쥐가 나와서 그 뿌리를 교대로 깔아 먹고 있습니다.
불안과 초조와 공포 속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 앞에 무엇인가 간헐적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위 벌집에서 꿀이 녹아서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혀를 내어서 그 꿀을 받아먹으면서 순간의 즐거움을 통하여 그 고통을 잊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을 통해서 인류를 향하여 하나님이 부르시는 간절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우신 종들을 부르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가 열려야 합니다. 이것이 그 시대를 향한 복음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이 소리가 나타나는 현장의 역사를 보는 눈이 열려야 복된 인생입니다. 오늘은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왜 부르셨습니까?

영원한 자비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죄로 인해서 얼굴을 잠시 가리우셨습니다. 즉 못 본 척 하셨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불쾌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넘치는 진노’와 ‘영원한 자비’를 대조하여 우리를 일깨워 주십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넘치는 진노에서 영원한 자비를 받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비’(dseje:헷쎄드)는 ‘아름다운’과 ‘책망’의 뜻이 함께 있습니다. 즉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는 못 본체 하시지 않고 사랑의 매를 필요하면 때리시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생아가 아닙니다.

미국 유머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미국인이 6․25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산길을 걷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남자는 나귀를 타고 그 아내는 뒤에서 숨을 헐떡이면서 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인은 눈이 둥그레져서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레이디 퍼스트의 예의도 모르시오? 여자를 저렇게 학대하다니….’
그러자 그 군자는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풍속이오!’
그런데 그 미국인이 6․25 직후에 다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그와 정반대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똑같은 산길이었지만 이번엔 여자가 앞에서 나귀를 타고 남자는 멀찍이 떨어져 조심성 있게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 미국인이 신기하게 생각하며 ‘여보시오, 그동안 풍속이 변했구료.’
그러나 그 군자는 옛날과 똑같은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전쟁통에 지뢰가 사방에 묻혀있기 때문에 아내를 이렇게 앞세우고 가는 거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이 부려먹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우리와 함께 하시며 살리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마지막에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8)라고 ‘구속자’라고 수식어가 붙은 것은 메시야의 구속사역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구약성경 말씀은 이스라엘의 영광과 회복에 대해서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5절의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삼위일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4:16-19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기억해 보십시오.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는 말씀의 깊은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사마리아의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를 세상 적인 남편으로만 보십니까? 처음에는 약간 그런 의미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는 말씀은 영적인 남편을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바로 오늘 말씀의 제목, 나의 남편인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축복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주셨으며 에베소서 1: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로 더욱 우리를 감동하게 하십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도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