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7. 나의 해방자이신 예수님) / 본문 : 히 2:14-18

오늘은 486주년이 되는 종교 개혁주일 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가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스스로의 모순 속에 접어들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이 낳은 신학자요 천주교 신부였던 마틴 루터가 당시 천주교의 부패성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내걸고 어두워진 영적 암흑기 속에서 종교 개혁의 깃발을 든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때를 기념하여 드리는 주일예배(10월 마지막주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상태에 있는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는지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스스로 된 종’ 즉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종이란 의미는 “노예”를 말하는 것으로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된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만큼 종의 역사를 가진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것을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바로로부터 구출해 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역사가 곧 유대인의 역사를 만들어냈습니다. 하나님께 스스로 된 종 외에 정말로 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종은 사람 취급을 못 받습니다. 때로는 개나 짐승만도 못한 것이 종입니다. 그래서 종은 사고 팔 수 있는 사유재산으로 간주되었습니다(레25:44-46).
출애굽기 21장, 레위기 25장, 신명기 15장에는 노예에 관한 제도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대인에게 있어서 상전을 섬기는 종의 제도에 관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면 진짜 노예는 어떤 것입니까? 애굽에서 노예 생활할 때 그런 법이 있었겠습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생활을 할 때 그런 법이 통했겠습니까? 이런 혹독한 노예 생활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주님은 오신 것입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5)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가 노예가 됩니까?

1. 전쟁의 포로입니다.
성서시대 근동지방에서의 최초의 노예는 전쟁에서 졌을 때 한꺼번에 거의 모든 부족이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뿐만이 아니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 까지 모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적을 모두 죽여버렸는데 이에 비하면 노예로 삼는 것은 인도주의적으로 개선된 상태로 말했습니다(민31:7-35, 신20:10-18, 왕상20:39, 대하20:8-15).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대하36:20)고 했습니다. 죽일 것을 살려준 것이니 이들이 인간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노예가 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단에게 지면 사단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단은 우리를 죽여야 하는 것인데 잠시 살려둔 것뿐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종으로 삼아 부려먹기 위함입니다. 이 얼마나 딱한 노릇입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런 비참한 것이 노예이며 종입니다.

2. 채무 노예입니다.
성서시대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어서 노예가 되는 주요 원인은 자신의 능력으로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출21:2-4, 신15:12). 만일 도적질을 하다 걸리면 노예가 됩니다. 왜냐하면 물건을 훔쳤기 때문이 아니라 물건을 변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출22:2). 빚을 값기 위해서 노예가 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아둘람 굴에서 다윗과 같이 합세한 사람들도 빚진 자들이었습니다(삼상22:2).
우리들은 하나님께 빚진 자들로서 하나님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가 값을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노예의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는데 출애굽기 21:32에 의하면 30세겔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은 30에 팔리셨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우리의 빗을 대신 값아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고 하셨습니다.

3. 상속된 노예입니다.
부모가 되어서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주고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일 비참한 것이 노예상속자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이 해결할 수 없기에 노예가 되어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노예는 상속되었습니다. 노예가 주인 소유이기 때문에 노예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역시 주인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후에 자유인이 되었을 때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출21:4, 레25:54).
이와 같이 우리가 죄에게 노예 된 것 역시 아담으로부터 상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고리를 끊으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적인 죄에 매여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8)고 하십니다. 이제 상황은 역전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지난 (2000년) 9월말 교황청은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유일한 전통성을 지닌 교회이며, 개신교의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인 요제츠 라칭거 추기경이 발표한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Jesus) 이란 36쪽 분량의 선언문은 “성 베드로와 그의 영적인 교감을 가진 주교들에 의해 주도되는 카톨릭교회만이 유일한 참된 교회”라며 로마 카톨릭교회가 유일한 교회임을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베드로의 법통을 이어온 교황의 지위, 사제들에 의해 진행되는 성찬의식을 개신교회는 인정치 않고 있기에 개신교는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회가 아니라 “교회적 공동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청은 그동안 “자매교회”로 불러온 개신교를 “교회적 공동체”로 부르라는 지침을 각 국 카톨릭 주교회 의장들에게 내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답답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할 당시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 당시의 내용은 현재까지 대부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변했다고 하는 것도 그 중심에는 여전히 그런 정신이 남아있습니다.

1.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성경중심의 신앙, 성경중심의 삶을 사는 자가 되자는 운동이 종교개혁 운동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권위보다는 교권의 권위가 더 힘이 있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교황이 성경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성경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 교권이 교리를 앞세워 별 이상한 짓을 다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속죄권 판매였습니다. 속죄권이란 1515년 교황 레오10세가 베드로 대 성당을 짓다가 자금이 모자라게 되자 교인들에게서 돈을 모으기 위하여 속죄권이라는 것을 팔았는데, 이 속죄권이란? 죄지은 사람이 죄 사함을 받으려면 돈을 내고 이것을 사야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엉터리지요. 또 이 속죄권만 사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다고 주장하고 팔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믿고 현혹되어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이 속죄권을 사게 되었고 죽은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거액을 내고 종이 쪽지에 불과한 속죄표를 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없는 순전히 종교 사기꾼들의 엄청난 죄요, 신앙의 타락인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현상이 있는 것 같아 염려됩니다. 제가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규모가 큰 교회인데 그곳에서 안수집사나 장로가 되려면 돈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직분을 받게되면 얼마를 헌금할 수 있는지 미리 써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사를 한답니다. 제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그리고 정말 이런 교회가 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속죄권을 판 로마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한국교회가 회개할 일입니다.

2.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 질 수 있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카톨릭의 교리는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있습니다. 또 자기의 고행으로 인해 의로워 질 수 있다고 믿고, 속죄권을 돈을 주고 사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괴롭히며 높은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라갔다 내려오고 고행과 수행으로 의로워 지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기독교는 불교나 힌두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오늘날도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원주의 신앙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하신 말씀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H 대학에서 “사이버시대의 문화와 종교”라는 세미나를 하는데 저에게 기독교 쪽 발제를 맡아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가만히 보니 불교, 천주교 등에서 전문가라고 하는 분들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제가 단순히 학문적인 자리라고 생각하여 참여해도 그만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타종교 지도자들과 한자리에서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인데 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가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요? 저는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입장의 목사입니다. 결코 하나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고 했습니다.

3. 종교개혁은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마리아를 중보자로 믿고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마리아를 숭배하고 그 앞에 가서 기도합니다. 카톨릭의 이단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출생시키는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 의해서 성령으로 된 일이지 마리아에게 어떤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할 여인일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리아는 성도에게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은 될지 몰라도 예배의 대상이나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예수님 보다 더 높이고 숭배하고 예배하는 이단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중간에 누구를 거쳐서 나가는 자가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예수님이 친히 영원한 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휘장을 찢어 주시므로 이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이 말씀에 근거하여 만인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우리를 종노릇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솔직히 말합시다. ‘돈’아닙니까? 그리고 또 솔직해 집시다. 그 돈 죽어서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 돈으로 천국을 살 수 있습니까? 잠시 이 땅에서 편안하게는 살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돈 많은 사람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지 모릅니다. 너무 많으면 그 돈 때문에 오히려 고민하고 많은 시간을 낭비합니다.

유대인들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어떤 유대인 노인이 세상 떠날 날이 가까이 옴을 알자 자신에게 있는 3만불을 어떻게 사용할까 걱정하다 유대인 선생인 랍비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1만불을 헌금을 하고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랍비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유대인 노인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천주교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내 비록 유대인이지만 신부님께 천국가기 위해서 기도 받기를 원합니다. 하고 1만불을 헌금하고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천주교 신부도 응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확신이 오지 않아서 더 안전하고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개신교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만불을 헌금하고 기도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을 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현재에도 로마 카톨릭이 범했던 위험한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카톨릭처럼 조직화된 교회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제일먼저입니다. 성경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이 아니라 사람이나 교회 건물이나 선행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보다 앞서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이 있었다면 오늘 우리도 개혁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러한 교회를 비판하면서도 진정 내 신앙은 그들의 모습을 닮고 있다면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1)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해방시켜준 이 고귀한 해방의 자유를 다른 것으로 막을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이러한 올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8. 나의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 / 본문 : 출12:13, 고전 5:7-8

“내가 애굽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7-8)

유월절(逾越节)의 ‘유월’이란 말은 원어의 ‘페사크’인데 영어로는 ‘패스 오버’(pass over), 즉 ‘넘어서 지나가다’는 뜻입니다. 이 절기는 니산월 10일에 처음 난 어린양을 골라 두었다가 14일 밤에 이것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15일부터 1주일 동안 누룩 없는 무교병을 먹습니다. 이 절기가 무교절입니다(출12:1,27, 레23:4-14, 민9:2-14, 신16:1-8). 그러니까 유월절과 무교절은 한 절기처럼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풍습은 세계 최고의 절기로 기억되어 남아 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3천년이나 지켜온 절기로 이렇게 오래 된 절기는 세계에서 유월절 외에는 없다고 합니다. 후에 유월절은 국가적 축제일로 공식 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설립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중에 20세 이상 된 남자는 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각 곳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일년 내내 유월절에 가기 위하여 돈을 모으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습관화되었습니다. 유월절에 참여하지 않는 유대인 남자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도 역시 가장 큰 절기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절기 중 제일 먼저 오는 절기로 유월절을 시작으로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로 이어집니다(출12:2).
유월절이 생겨난 것은 애굽 왕 바로가 9번째 흑암 재앙을 만나고 모세에게 양과 소 떼만 남겨 두고 다 가도 좋다는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짐승 한 마리도 남길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바로는 모세를 쫓아내면서 다시 나타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 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에 마지막 재앙을 내림으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내듯이 내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애굽의 모든 장자들과 생축의 처음 난 것들이 죽는 무서운 장자 재앙이 임할 것을 경고 하셨습니다. 9가지 재앙은 모세를 통해서 하셨는데 이번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하나님이 직접 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재앙은 이 마지막 재앙을 내리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장자 재앙이 내릴 때에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통곡이 있을 것이라며 마지막으로 바로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번에도 듣지 않았습니다. 유월절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애굽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 찌라 내가 피를 볼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 찌니라”(출12:13-14)
유월절은 애굽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진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을 잡아 피를 발랐습니다 천사가 그것을 보고 유월(넘어감)하였습니다.
유월절은 히브리어로 유월의 ‘페사크’는 ‘지나간다, 넘어간다’의 뜻도 있지만 ‘용서한다’는 의미도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피가 있는 집은 유월하신 것은 곧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나라 가운데 처음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 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1-13)
이 날의 밤은 무서운 밤이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장이 고조되는 긴 밤이었습니다. 장자가 있는 집들은! 아니 장자가 없는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신, 죽음의 그림자가 지나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문설주에 양의 피가 묻어 있으면 죽음의 그림자가 다음 집으로 넘어갑니다. 만일 양의 피가 묻어있지 않으면 그 집의 장자는 사람과 동물 모두 죽는 것입니다. 비록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있었다고 해도 뜬눈으로 밤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 날밤 애굽 전역 집집마다, 왕의 아들부터 종의 아들까지 장자는 모두 다 죽임을 당했으므로 집집마다 초상이 났습니다. 옆집에서 나는 죽음의 통곡의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으며 하나님의 심판이 피해간 것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겠습니까? 어찌 이 날을 기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즉 생각이 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날이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세계최초, 최고의 절기가 된 것입니다.

둘째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유월절은 430년 간 노예 생활하던 애굽에서 해방된 감격의 날입니다. 유월절에 해방된 것이 아니고 해방된 날을 유월절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어린양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려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습니다.
“너희는 누룩없는 자인 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
우리 나라는 일제의 침략으로 36년의 치욕적인 강제 통치를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방 운동의 불씨를 집힌 3월 1일과 드디어 광복한 8.15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인 것입니다. 36년의 강제통치에서 해방된 것이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430년간입니다. 올해가 루터가 개혁한지 486주년 됩니다. 우리가 그 때를 지금 제대로 기억이나 합니까? 사실 전해들은 이야기로 약간 알고 있을 뿐 잘 모릅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이렇게 오랜 기간을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방된 기쁨의 날인 것입니다.

셋째 언약의 피입니다.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양을 취할 찌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의 식양을 따라서 너희 어린양을 계산할 것이며 너희 어린양은 흠없고 일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중에서 취하고 이달 십 사일까지 간직하였가다 해 질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묵을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12:3-7)
유월절 어린양은 가족의 수효에 따라 선택했습니다. 자신을 위해 피 흘려야 되는 양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일년 된 양, 가장 힘이 좋을 때 드려야 합니다. 가장 살이 찌고 완전할 때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씨와 힘을 상징하는 수컷을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미리 선택한 양을 14일간 두었다가 저녁에 잡았습니다.
죠세프스에 의하면 14일 해질 때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간인 오후 3시에서 5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시뻘겋게 발랐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집집마다 피 색깔이었습니다. 이 피는 바로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발라야 합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넷째 유월절은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에 먹을 음식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밤에 그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출12:8-11)
1)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무교병은 맛이 없는 떡입니다. 누룩을 넣어서 맛을 즐기며 먹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음식을 여유 있게 맛을 즐기면서 먹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려고 먹는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무교병은 누룩이 없는 떡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누룩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바울은 제안을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7-8)고 합니다. 복음 외에 다른 것은 누룩입니다. 너무 배부르면 사람들은 맛있는 것을 찾아 나섭니다. 오늘날의 복음도 자꾸만 다른 사상과 혼합되어 순수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재미있는 것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 누룩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노예 시절을 회상하라는 것입니다. 그 때 당했던 고통을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교병과 쓴 나물을 7일간 먹었습니다.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이 쓴 나물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애굽노예생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3) 허리띠를 매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 합니다.
이것은 애굽을 출발할 때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때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는 아침까지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가 급히 애굽을 빠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출12:22). 죄의 고통에서는 조금도 더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회개하는 것은 급히 해야할 일입니다.

다섯째 고백을 드립니다.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에 행하는 가정예식을 ‘세다’라고 부릅니다 ‘세다’에서는 네 가지 질문이 어린아이들에게 주어집니다. 이 질문은 “너는 그날에 네 아들에게 뵈어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인함이라”(출13:8)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이것을 가르쳐 이스라엘 대대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시키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의가 무엇입니까? 한자로 한번 써 볼까요? ‘(義)’는 어린양(羊) 밑에 내 아(我)가 있는 글자입니다. 내 머리 위에 양을 올려놓으면 의(義)가 되는 것입니다. 이 한자를 만든 사람은 옛날 유월절을 아는 유대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말한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는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을 일컬어 구약을 인용하여 말한 것입니다(시14:1). 그러나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고 했습니다. 의인은 많습니다.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든 것 위에 올려놓은 사람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진기한 물건 한 가지씩 갖고 있는 삼 형제 이야기가 있습니다.
형에겐 망원경, 둘째에겐 요술 담요, 셋째에겐 만병을 다스리는 사과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형은 망원경을 통해 왕의 담화문을 보았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공주를 낫게 해주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둘째가 즉시 요술 담요를 타고 삼 형제는 공주에게 갔고, 막내가 사과를 줌으로써 공주는 나았습니다. 누가 공주와 결혼했을까요? 막내였습니다. 첫째와 둘째의 물건은 그대로 있었으나 막내의 사과는 줌으로써 없어졌습니다. 왕은 이 ‘희생’을 택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속죄의 양으로 드려질 때는, 사도 요한에 의하면 유월절 첫 날이었습니다. 애굽의 탈출을 위해서는 어린양의 피 흘림과 문설주에 바른 것이 하나님의 재앙이 넘어갔다면, 이 세상의 끝 날에는 예수그리스도 어린양의 피의 공로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느냐 아니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 흘림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유월절 희생양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6. 나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0:1-18

성경에는 양이라는 말이 약 500번 넘게 나옵니다. 양은 창세기 4장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담의 두 아들인 가인은 농사를 지었는데 아벨은 양치는 목동이었습니다. 양은 인류 시초부터 사람과 함께 살아온 동물입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은 목축을 생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때는 마을마다 공동 소유로 양의 우리를 지었던 것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이리와 짐승 떼와 도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양의 우리는 약 3m 정도의 높이로 울타리가 처졌고 밤이 되면 목자들은 그의 양떼를 우리에 넣어두었고, 문지기는 그 앞에서 밤새도록 보초를 섰습니다. 그런데 이런 양들을 노리고 몰래 찾아오는 자들이 있었으니, 절도요 강도였습니다. 이들은 캄캄한 밤에 양들을 훔쳐 팔아먹고자 아무도 모르게 담을 넘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아무 거리낄 것이 없기에 떳떳하게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목자들이 오면 문지기는 문을 열어 줍니다. 그러면 목자는 들어가 각각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얼룩아, 순둥아, 말썽아” 그러면 양들은 신기하게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고 양이 그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목자와 양의 관계가 인격적이고 긴밀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목자는 양들을 도매금으로 부르거나 번호를 붙여 부르지 않습니다. 평소에 관심을 갖고 살피며 일일이 이름을 붙여주고, 양도 목자가 자기에게 붙여준 이름을 알게 됩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불러 우리에서 내어놓은 후에 양들 앞서 갑니다. 보통 돼지 같은 짐승들은 뒤에서 회초리로 때리며 몰아야 꿀꿀거리며 앞으로 갑니다. 그러나 양은 목자가 앞서가야 따라갑니다. 양은 앞을 잘 보지 못하고 두려움이 많기에 뒤에서 몰면 오히려 두려워서 절대로 앞서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앞서가며 본을 보이면 목자를 깊이 신뢰하고 두려움 없이 따라옵니다. 이 비유는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실제의 풍경을 통해서 예수님은 오늘 비유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양의 특성을 이해하면 왜 예수님이 우리를 양에 비유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양은 스스로 길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개와 고양이 등은 쉽게 길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양의 시력은 3m앞도 잘 보지 못한답니다. 충성스런 개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우리나라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울산에서 살던 분이 가끔 개에게 돈을 입에다 물려주고 푸주간에 가서 고기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 개는 영리하여 자신이 먹고싶은 고기를 먹지도 않고 심부름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서울로 이사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깜박 잊고 개에게 고기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 개는 돈을 물고 울산까지 내려가려고 고속도로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탈진하여 그만 고속도로에서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비나 연어 같은 동물은 오랜 시간 먼 거리를 여행하고도 자기의 본향을 찾아가는 놀라운 방향감각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양은 쉽게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인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삶의 방향 감각에 둔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목자 되신 주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2. 양은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밤송이처럼 생겨서 구분이 잘 안되고 잘못 접근하면 찔리기만 합니다. 카멜레온은 자신을 위장하는 대표적인 동물입니다. 아니면 스컹크처럼 가스를 내뿜는 다는가, 빨리 도망갈 수 있는 다리가 있던가 아니면 덩치가 있던가 합니다. 그러나 양은 특별한 무기가 없습니다. 공격할 수 있는 무기도 피할 수 있는 빠른 달리기도 상대에게 치명적을 가할 수 있는 독도 위협을 줄 수 있는 덩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양은 평안한 가운데서 살며 번식도 합니다. 그 이유는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사단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특별한 무기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비무장입니다. 그러므로 선교할 때의 방법이 총칼을 앞세우고 가면 안됩니다. 그러나 목자이신 주님이 지켜주시고 함께 하십니다.

3. 양은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양은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는 만큼 겁이 많은 짐승입니다. 그러다 보니 함께 무리를 지어 살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무리도 얼룩말처럼 다른 짐승으로부터 특별한 방어수단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저 겁이 많기 때문에 모여있을 뿐입니다. 이리가 한 마리만 양 우리로 뛰어들어와도 양들은 힘을 합해서 물리칠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 흩어지고 맙니다. 돌봐 주는 목자가 없다면 결국 죽고 맙니다.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양의 특징은 항상 목자와 연관됩니다.

4. 양은 깨끗하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들의 몸을 혀로 핥아서 씻든지 풀에 구르든지 물로 씻든지 하면서 나름대로 청결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양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물이 몸에 묻으면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습니다. 목자가 씻어줄 때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죄에서 사하여 주십니다(요일1:7).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8)라고 하셨습니다.

5. 양은 양식이나 물을 스스로 찾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먹이를 찾는데 비해 양은 돌봄이 없으면 독초도 해로운 줄 모르고 뜯어먹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의 돌봄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아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도는 여러 가지 세상적인 교훈 이단의 유혹과 타종교의 호기심으로부터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면 구분하지 못합니다.

양은 이처럼 부족한 것이 많은 동물입니다. 양에 대한 문화적 인식에 차이가 있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좋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순하고, 인간과 가까이 생활하고, 깨끗한 동물, 하얀 털을 갖고 있는 호감 있는 짐승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동지방에서는 생각이 모자라는 놈, 고집이세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줄 모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심한 욕이 ‘개새끼’라면 중동에서는 ‘양 같은 놈’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갈 길로 갔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양은 고집이 세고 성질이 급한 동물입니다. 우리보다 오래 전부터 양을 치며 살아온 중동의 사람들이 양에 대해서는 더 정확하게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양이 잘하는 것 하나 있습니다. 양에게 발달된 것이 있다면 귀뿐입니다.

양은 주인의 음성을 알아야 합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10:3-5)
양의 주인은 자신의 양들이 알아듣는 이름을 부릅니다. 양들은 사람과 달리 청각이 발달되어 있어서 목자의 음성과 타인의 소리를 구분합니다. 목자가 아니면 양들은 순간 흩어져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한 상황을 피합니다.
한국사람이 특별히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데 “귀의 문화”가 있어서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말 가운데 가장 발달한 것이 의성어, 의태어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거의 모두 시각적 언어가 발전했는데 우리만은 청각적 언어가 발전했습니다. 우리는 하늘도 ‘푸르다(청색)’고 하고 나무도 ‘푸르다(녹색)’고 하여 시각적으로 색을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청각에 대해서는 잠잘 때 나는 소리가 젖먹이는 ‘색색’, 유치원 다니는 아이는 ‘콜콜’, 아버지와 어머니는 ‘쿨쿨’입니다. 현미경을 발견한 서양인들도 이렇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숨소리를 ‘제트(z)’ 자로 나타낼 뿐입니다. 종소리도 그들은 기껏해야 ‘딩동’ 정도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땡그렁’, ‘댕그렁’ 뿐만이 아니라 아주 개인에 따라서 소리는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통합니다. ‘맴맴’울어서 ‘매미’가 되었고 ‘개굴개굴’울어서 ‘개구리’가 되었습니다. ‘뻐꾸기’, ‘뜸북이’, ‘부엉이’, ‘꾀꼬리’가 모두 그렇습니다. 숫제 ‘징’이란 말은 음 자체가 그대로 사물명이 된 것입니다. ‘細雨(세우)’란 말도 우리는 ‘보슬비’와 ‘부슬비’로 구분하고 제트기는 ‘쌕쌕이’ 배는 기선이나 화륜선으로 기능별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귀에 들리는 대로 ‘통통배’나 ‘똑딱배’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귀(귀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못 알아듣는다면 그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양만큼이나 귀가 밝은 민족입니다. 주앙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만일 주님의 음성이 아니면 양처럼 피해야 합니다. 저는 이 땅에 아무 문제없는 교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권면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신앙 생활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그리스도, 목자의 음성이 아니면 속히 떠나야 합니다. 지체할 겨를도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야 살아납니다. 부족한 종이 원하기는 다른 것은 몰라도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9, 23, 눅8:8)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도의 세 힌두교 학자들이 비바람이 몰아칠 것 같아 어느 날, 강을 건너려고 나루터로 나갔습니다. 그들이 나룻배를 타자 늙은 뱃사공이 노를 젓기 시작했습니다.
학자1 : 천문학에 대하여 좀 알고 있습니까?
사 공 : 평생 노만 저었기 때문에 모릅니다.
학자2 : 힌두교의 철학은 아십니까?
사 공 : 평생 노만 저었기 때문에 모릅니다.
학자2 : 허! 당신은 반평생을 잃었군요.
학자3 : 당신은 힌두 경전이나 생물학, 심리학도 모르겠군요.
사 공 : 글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노만 저었다니까요.
세 학자들 : 딱하군 딱해 쯧! 쯧!
바로 이때 세찬 바람이 불어와 나룻배가 뒤집혔습니다.
세 학자들은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러댔습니다.
사 공 : 당신들은 수영도 못 배웠소. 참 딱하기도 하군요. 당신들은 인생의 전부를 잃었소.

양은 아무능력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무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목자의 음성 같지만 삯군목자가 있습니다. 돈을 받고 고용된 목자는 진정한 목자가 아닙니다.

삯군목자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양이 300마리 이상일 경우 대규모 목축에 속하기 때문에 별도로 양을 칠 일꾼을 고용했습니다. 이들은 임금을 받고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렇게 고용된 삯군 목자는 목자가 아닌 것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있어서 제일 경계해야 되는 것은 이리떼나 맹수들입니다. 진정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지킵니다. 다윗도 양을 칠 때 사자와 곰과 정면으로 대결한 적이 있었습니다(삼상17:34-37). 이런 위협이 있을 때 삯군목자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습니다. 미쉬나(Mishnah)에 보면 삯군목자의 책임한계는 이리 한 마리의 공격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리 한 마리의 공격으로부터의 공격은 막아야 할 책임이 있지만 2마리 이상의 이리떼나 다른 맹수들로부터 지킬 책임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삯군목자는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12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단순히 직업으로 택한 목사와 사명으로 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교회선택이 한 목회자의 고매한 인격, 뛰어난 지식, 교회의 아름다운 건물, 집이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오늘 본문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5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7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그리고 18절에서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본문을 통해서만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노라고 세 번 언급하시고 18절에 다시 생명의 권한에 대해서 말씀하심으로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선한 목자로서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교회에는 십자가 대신에 양이 한 마리가 올려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교회를 건축할 때 지붕에 한 인부가 떨어져 죽을 뻔하였는데 마침 지나가던 양떼 위에 떨어져 다행히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죽으신 속죄 제물로 오셨습니다.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가 죽은 양하고는 다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신 분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에 대해서 양 자신보다 목자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① 양의 필요 ② 양의 건강 상태 ③ 양의 요구 등을 다 알고 계십니다.
시편기자는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와 같으신 분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따라나선 여러분들 정말 잘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절)고 하셨습니다. 아직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을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과 같이 우리도 기도하며 양을 인도하시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양)의 문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5. 나(양)의 문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0:1-10

문은 왜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들여보낼 것과 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을 거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시험문제도 문, 답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질문을 하고 그리고 그것에 해당하는 정답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집에 달린 문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지방이나 지역을 출입하는 문도 있고, 나라를 드나드는 문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의 형태는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만이 환영받고 보호받고 대접받는다는 점입니다. 밀입국자들이나 밀수를 하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문을 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평생을 문으로 드나들다 결국은 또 문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드나드는 문이 어느 문이었느냐에 따라서 마지막에 들어갈 문도 결정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땅의 하나님의 집인 교회, 기도하는 집에 열심히 출입한 사람은 천국 문이요, 세상의 넓은 유흥과 향락의 문으로만 출입한 사람은 지옥문일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문 중에 양이나 소 짐승들이 들어가는 문이 따로 있었습니다. 이것이 ‘양의 문’입니다. 이 양의 문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5: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양의 문’을 통과하셨습니다. 양의 문 곁에는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놀라운 상황을 목격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라고 했습니다. 가난하고 자기 몸조차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B.C.586년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파괴되고 느헤미야 선지자가 재건축할 때 가장 먼저 수축한 것이 양의 문입니다(느3:1). 이스라엘의 각 지파별로 나누어 성문들을 수축하고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게 양의 문입니다. 양의 문에서 시작해서 양의 문에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양의 문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다 도적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라고 하신 데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전의 문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처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특권층이 있고 평민이나 병자, 가난한 자들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들이 들어가려면 성전세금을 내고 들어갈 수 있으나 가난한 이들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서, 짐승이 드나들던 양의 문에 모여있는 자들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들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양을 약탈하는 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장사하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셋째는 ‘양의 문’은 희생제물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이 되셔서 이 문으로 들어가심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양의 문이 되셨고 우리가 어떤 문으로 들어가야 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어떤 문은 화려하게 보여서 두드렸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기대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은 것 모양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들어가 보니 잘 들어왔다고 생각되는 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문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들어갈 문을 설명해 주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이 문은 좁은 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은 다름 아닌 양의 문이었습니다. 병들고, 헐벗고, 굶주린 주님의 백성들이 들어가는 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10:7)
베트남에 가면 구찌 땅굴이 있습니다. 이 지역에 베트콩 본부가 있었습니다. 미군은 이곳을 찾기 위해 온 산에다 고엽제를 뿌려서 나무를 다 없앴는데도 찾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서 땅굴에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좁은 통로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더 좁게 만들어진 구간이 있습니다. 이곳은 날씬한 베트남 사람들만 들어갈 수가 있고 덩치가 큰 미군은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얼마나 좁은지 저도 겁이 덜컥나 괜히 들어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당시 베트남사람에게는 이 좁은 굴이 자신들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명문대학교 문이 넓은 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좁은 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좁은 문입니다. 아무나 들어가는 문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학생들 중에서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의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산 사람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좋은 것, 귀한 것은 아무나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 자만이 갖게되는 것입니다.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를 부른 세계적인 팝가수 셀린 디온이 가수활동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그녀는 폭발적인 가창력과 맑은 음색을 지닌 세계 최고의 여가수로 불립니다. 인기정상을 달리던 그녀가 돌연 부와 명예를 거절하고 가정으로 돌아간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캐나다 출신인 셀린 디온이 가수가 된 것은 열 두 살 때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들고 한 음반 회사를 찾았습니다. 그때 지금의 남편인 안젤린이 빚을 얻어 음반을 만들어 주었고 셀린 디온의 매니저로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셀린 디온은 기자회견에서 “남편이 지금 후두암에 걸려 투병중입니다. 지금은 남편에게 내가 가장 필요한 시간입니다. 남편 곁에서 병간호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쇼 비즈니스가 결코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제부터 남편에게 진 사랑의 빚을 내가 갚을 차례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요10:1-2)고 했습니다.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절도”로 좀도둑을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가룟 유다에게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요12:6)고 했습니다. 목자 몰래 양을 훔쳐 가는 도둑입니다. “강도”는 바라바에게 사용되었던 말로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요18:40)고 했습니다. 양을 강제로 빼앗아 가는 자들을 말한 것입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양을 도적질하고 강제로 빼앗아간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때는 예수님께 적대적 행위를 한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양을 도적질하고 빼앗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양의 문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좁은 문을 통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예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며 자신들이 문이 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지 않고 넓은 길로만 가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문을 피해가려는 사람들입니다.

문은 열어야 합니다.
자동차 운전하시는 분들은 다들 한번쯤 경험한 일일 것입니다. 자동차 키를 차안에다 꽂아 놓고 문을 닫고 내린 것입니다. 저도 서너 번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분명히 내 차인데 열쇠가 없어서 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열쇠가 없으니 차 문을 열 수도 없고, 타지도 못하니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차 도둑처럼 옆으로 긴 철사를 끼어서 열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도둑이 아닌지라 쉽게 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물쇠는 열리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문을 열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대답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부여받았습니다.(마16:19) 그리고 이 열쇠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계3:7) 예수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스터키가 있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눅11:52) 율법사들은 예수님의 키만이 열린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열쇠인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불행한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자신들 뿐 아니라 다른 자들도 막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또 하나는 안에서 열어주면 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요10:3)라고 했습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자신들의 양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온 양들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몰려온 양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목자의 음성을 들은 양들입니다.
그렇게 안타깝게 자동차 문을 열려고 하는데 차안에 어린 딸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너무 어려서 닫혀진 문을 잘 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빠는 창문 옆에 달린 것을 올리라고 차 밖에서 손짓을 합니다. 그리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아니면 딸이 문을 열어주겠습니까? 열어주지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겠습니까. 철저하게 양을 가려내십니다. 우리 우화에 여우가 손에 밀가루를 바르고 어머니로 둔갑하여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양의 탈을 쓴 사단에게 속아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제일 확실한 문지기이신 것입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만을 외치고 주님 뜻대로 살지 않은 자들도 가려내십니다(마7:21).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눅13:25) 저와 여러분들은 그 문에 있을 때 주님께서 문을 열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문 앞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면 구원과 꼴을 얻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는 자에게는 자유롭게 왕래하며 꼴을 얻을 수 있습니다. ‘J. 스트루더’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40년을 허비한 후에야 나는 이러한 확실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천국보다 더 명확한 곳이 어디 있으며, 지옥보다 더 혼란스러운 곳이 어디 있으랴!”고 했습니다. “들어가며 나오며”는 자유를 말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제일 큰 단점이 무엇입니까? 바로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고(소데세타이)”로 단순히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를 넘어서 안전하게 보호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양이 원하는 꼴을 주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3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5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28:2-6)고 했습니다. 이러한 축복을 주는데 조건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입니다. 복이 임하는데 먼저 장소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들어가며 나가며 어디에서든지 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집에서만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십니다.

오래 전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병에 걸린 어머니를 간호하는 착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어머니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캤습니다. 어느 날 소녀는 절벽 사이에 돋아나 있는 약초를 캐다 그만 굴러 떨어졌고 소녀의 몸에서 피가 나와 주변의 하얀 꽃에 번져 나갔습니다.
소녀가 숨을 거두려 할 때 예수님이 나타나

나의 감독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4. 나의 감독자이신 예수님) / 본문 : 벧전2:18-25

‘감독’하면 얼른 생각나는 것은 운동경기일 것입니다. 어떤 경기이든 감독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기술을 가르쳐주는 코치는 부분적으로 모자라는 것을 보완시켜주는 역할을 하지만 감독은 선수 개개인의 특징을 알고 있어야 하며 경기에 이기기 위해서 선수들을 격려하고 지켜보고, 지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도 감독을 잘 만나지 못하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좋은 감독은 좋은 선수를 찾아냅니다. 2002년 월드컵은 한국인이라면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 한국감독을 맡은 네덜란드 출신의 히딩크 감독의 역할로 4강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감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감독자의 역할처럼 원어의 ‘감독’ ejpivskopo”(에피스코포스)이라는 말은 “존중하다, 배려하다, 방문하다, 찾아내다, 소집하다, 징벌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직분과 역할로서 오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감독으로 표현하는 것 중의 제일 비중이 큰 것은 그분이 곧 감독자인 동시에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심판을 받습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고모라가 모세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르우벤지파 사람 3명(엘리압의 아들 다단, 아비람, 벨렛)과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250명이나 가담되어 있었습니다. 반란의 이유는 당신 모세와 아론만 하나님이 선택한 자이며, 잘난 체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기도한 다음 “내일 아침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주실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레위 인들아 잘 들어라! 하나님께서 레위 인들을 시켜서 성막에서 일하게 하신 것을 너희가 작은 일로 생각하느냐? 하나님께서 너희 레위 인들에게 이런 귀한 일을 맡기셨는데 어째서 너희가 제사장 직분까지 맡으려고 하느냐, 너희는 하나가 되어 여호와를 거역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사람을 시켜서 엘라압의 아들 세 명의 주동자를 불러오게 했으나 그들은 거절하며 모세에게 “당신이 우리를 비옥한 땅에서 이곳 광야에서 죽이려고 한 것도 부족하여 이제 우리의 왕까지 되려고 하시오. 당신은 우리를 비옥한 땅으로 인도하지 않았고 밭이나 포도원도 주지 않았소.” 그리고 고모라가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광채로 성막 입구에 나타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시기를 너희는 이곳에서 떠나라 내가 이들을 당장 죽여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께 엎드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시여 한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모든 사람에게 노하십니까?”하고 애원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백성에게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천막에서 떠나라고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이 갈라져 이들은 산 채로 깊은 구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250명의 추종자도 “땅이 우리를 삼키려 한다”고 하며 도망하였습니다. 그 때 분향하던 불이 그들을 좇아 태워 죽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감독자’는 이렇게 심판하시는 자로 방문하심을 말씀하십니다. 불순종하는 민족들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방문을 받을 것이며(렘6:15), 그들의 우상들은 방문의 날에 깨뜨려질 것이다.(사10:3)고 하십니다. 감독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심판주가 아닌 구원의 주님으로 만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독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찾으십니다.
창세기 18장의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를 잘 아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창18:26)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 50명만 있으면 멸하시지 않겠다는 조건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의인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죽기로 작정하고 하나님과 협상을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10명씩 줄여나가며 하나님께 간구 합니다. 일단 하나님이 50명의 의인을 제시하셨기 때문에 한꺼번에 적은 수의 의인을 말할 수 없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해주시는 것을 보면서 조금씩 줄여나갑니다.
“사십오인을 찾으면”(28절)
“삼십인을 찾으시면”(30절)
“이십인을 찾으시면”(31절)
“십인을 찾으시면”(32절) 그 십인을 인하여서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에는 10인이 없었습니다. 결국 롯의 일행만 빠져나오고 그 성은 멸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찾으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지금의 의인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마18:12-13)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말씀해 주십니다. 목자를 잃어버렸던 이 양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나를 존중하고 선택해 주셨습니다.
감독이 선수들을 다루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가끔 운동경기 감독들은 지나치게 선수들을 혹독하게, 그리고 개인적인 배려 없이, 경기만 생각한 나머지 개인의 인격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독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개인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 될 자격이 있다고 보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정상적인 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무자격자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의 학교에는 랍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생이 누구인가에 따라 문하생이 있습니다. 유태인의 교육사상은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아이들을 교육시켜 읽고 쓸 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기본교육은 받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어떤 랍비에게 사사를 받았거나 문하생이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일정한 시험을 거친 것도 아니며 오직 예수님이 감독자로서 그들을 선택했습니다. 무명의 사람을 선수로 길러낸 것입니다.
요8:3-9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절)라고 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하라고 하면 예수님은 사랑이 없고 여인을 죽인 사람으로 몰아갈 것이고, 놓아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 유대인이라고 예수를 모함하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린아이로부터 하나씩 슬금슬금 사라지고 이 여인과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절)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는 가까이할 수도 없고 더군다나 여자와는 상종치 못했습니다. 그런데다가 예수님이 만난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우리가 이 여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감독자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바울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1:26-27)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느 임금이 하루는 정원에 나가 보았더니 화단의 꽃과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임금은 참나무에게 왜 죽어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참나무는 멋진 전나무처럼 키도 크지 못한데 살아서 무엇하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나무에게 넌 왜 죽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포도나무처럼 좋은 열매도 못 맺으니 죽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포도나무에게 물었습니다. 포도나무도 장미처럼 꽃도 못 피우니 살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제비꽃은 생생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임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비꽃에게 너는 왜 이렇게 힘있게 살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비꽃은 말했습니다. “임금님께서 저를 여기에 심으신 것은 제가 이곳에 꼭 필요하기 때문임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키가 작고 예쁘지 않아도 제비꽃으로 열심히 피어서 임금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저도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는 만족함이 없는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습니까? 여러 가지 다른 축복은 제쳐 두고라도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주어진 삶에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련하고 약한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심에 감사해서 살아갑니다.

애매한 고난을 참으십시오.
운동경기를 보면 가끔 선수들이 열심히 뛰었는데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게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심판의 불공정 판결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안 선수들과 감독들은 심판에게 항의하며 경기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부름을 입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한 때는 베드로 자신도 이러한 고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데 모닥불을 쬐고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희생해야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오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할 수 있는 그런 성숙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2:19, 20)의 “아름아우나” cavri”(카리스)는 “은혜, 선물, 기쁨, 감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경기할 때 분통이 터지는 불합리한 판정에 참으면 사람들에게 잠시 아름답게 보이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라면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카리스는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반드시 그에 응당한 기쁨, 선물의 은혜를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에서 제일 처음 나타난 곳은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눅2:40)입니다. “은혜”가 바로 cavri”(카리스)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언제 주어지는지 아시겠습니까?
선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참고, 인내할 때입니다.

구전(口传)에 의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로마 사람들이 주문하는 십자가를 만드는 전문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에 아버지 요셉을 도와 열심히 목수의 일을 하셨으므로 예수님도 십자가를 만드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만드는 전문가이셔서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절한 십자가를 친히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유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어떤 주인에게 두 마리의 소가 있는데 한 마리는 약하고 힘이 없고 또 한 마리는 강하고 힘이 세다면 어느 소에 무거운 짐을 지울까?”
물론 강하고 힘이 센 소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나의 십자가가 유난히 무겁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질 만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십자가를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는 본을 보인 감독이십니다.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고 하십니다. 어떠한 본을 보여주셨습니까?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채찍을 받으실 때 우리는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2:5)라고 했습니다. 이 법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본을 보이신 앞서가신 감독이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고아와 같이 버려진 목자 없는 양이 아닙니다.

감독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유치원의 어린아이들이 엄마가 없으면 재롱잔치에서 장기자랑을 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안 납니다. 사랑하는 엄마 앞에서 보여주고 싶은데 엄마가 없기 때문입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우리가 4강에 들 수 있었던 것도 대한민국 국민이 간절히 원하고 응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머리털 하나 까지도 세고 계신 분이며(마10:30) 또한 머리털 하나라도 상치 아니하도록 지켜주십니다(눅21:18).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경기에 임한 선수같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감독이신 그리스도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