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재림주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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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 신가?(22. 나의 재림주이신 예수님) / 본문 : 히10:37-39

어린아이들은 부모님과 헤어지면 불안해합니다. 어린아이들만 그런 것은 아니고 누구나 가까운 사람과 헤어진다면 마음이 아픕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지지만 다시 만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으면 헤어짐의 슬픔이 작아집니다. 그리고 다시 만날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떠날 때는 반드시 자녀에게 언제 온다고 말하고 떠납니다. 다시 만나기 때문에 그 때까지만 참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오늘 본문 히10:37절에서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미국 플로리다해변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는 바캉스를 떠나는 젊은이들의 들뜬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그 틈에 한 중년의 사나이가 몸을 잔뜩 움출인체 앉아 있었습니다. 허술한 옷과 덥수룩한 수염과 굳게 닫힌 입술의 사나이에게 한 소녀가 접근해 어렵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사내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뉴욕 교도소에서 4년 동안 복역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오. 아내가 나를 맞아줄 것인지 불안하오.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소. 오늘 출소할 것인데 나를 받아주겠다면 집 앞의 커다란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놓으라고 했소. 만약 노란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내 인생은 끝나는 것이오”
승객들은 모두 숙연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버스가 마을에 이르자 승객들은 손에 땀을 쥐며 참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수백 개의 노란 손수건이 환영의 깃발처럼 참나무에서 춤추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먼저 그분이 우리를 다시 만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정말 우리는 잘 모릅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혹시 나의 욕심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는 않았습니까? 우리교회가 주앙교회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은 교회인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만 보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친히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눅18:1-6에 보면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이야기를 주님이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이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한 과부는 그에게 찾아가 자신의 억울함으로 호소했습니다. 재판관은 계속해서 이 과부가 찾아와 자신을 괴롭힐 것을 생각하고 처음에는 그 여인의 간청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들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8:7-8)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지 명확히 하셨습니다. 우리의 원한, 억울함을 풀어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우리가 다 용서했는데 우리의 원한과 억울함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에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용서하지 못해서 개인의 원한을 풀어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이기주의적인 신앙을 가지신 분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망하고 자신만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는 하지 않으십니다. 미국의 16대 링컨 대통령은 당시의 남북전쟁이 있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참모가 와서 “하나님이 우리편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북쪽이나 남쪽이나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싸우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은 그 참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기를 기대하기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 편인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에는 우리는 구원을 받으나 사단은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 죄 값으로 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습니까? 죄의 뿌리는 아주 깊어서 서로가 의심하고, 미워하고, 대적합니다. 그리고 인류는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이유도 모르고 죽어 가는 순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죄의 결과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죄를 가져다준 사단을 멸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재림은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재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마13:40-43, 마19:28, 마24:30, 막8:38, 막13:6-7, 눅12:35-40, 눅18:8, 요5:28, 요12:48, 요21:22-23). 천국이 싶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많이 말씀하셨고,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고도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재림에 대한 이야기가 318번 언급되어 있는데 특히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예언보다 재림에 대한 예언이 거의 8배나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3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눅12:4),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증거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기초하여 바울도 그리스도의 재림소망을 그의 모든 서신에서 증언했습니다(롬8:19-24, 고전15:22-28, 51-57, 고후5:9-10, 엡4:30, 빌3:20-21, 골3:4, 살전4:13-17, 5:1-11, 살후1:7-10, 딤전6:14, 딤후1:18, 딛2:13).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그의 서신의 핵심으로 기록하였습니다(벧전1:7, 4:5, 13, 5:4-10, 벧후3장). 베드로전서는 마지막 때 임할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기록한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고 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1:10-11에서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이 요한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재림을 믿지 않으신다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거나 기독교인이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두 믿느냐고 문답을 합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만 기록된 책입니다. 21장 중에서 18개장들이 구체적으로 재림을 다루고 있습니다. 2장과 3장은 재림에 앞서 있게되는 교회에 대해서 말한 것이고, 4장부터 18장까지는 하늘과 땅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19장은 재림 자체를 묘사한 것이고, 20장은 천년 왕국에 대한 것이고, 21장과 22장은 우리가 가게될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것입니다. 이토록 정확하게 하나님은 요한을 통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재림을 믿지 않는다면 요한계시록 자체를 믿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헬라 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은 필립 2세였습니다. 그에게는 이상한 신하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신하는 다른 일을 전혀 하지 않고 꼭 한가지만 맡아서 했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 이 신하는 왕의 침소 머리맡으로 다가가서 큰소리로 왕을 깨웁니다. “대왕마마! 오늘이 어쩌면 대왕마마의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 소리를 듣고 왕이 깜짝 놀라서 깨어난다고 합니다. “그래 맞아! 오늘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지. 내가 이렇게 잠에 취해 있을 수 없지.” 부랴부랴 세수를 하고 아침 식탁에 앉으면, 이 신하가 이번에는 아주 흉측하게 생긴 해골을 갖고 식사를 하고 있는 왕의 식탁 위에 올려놓습니다. 왕은 연신 그 해골을 바라보면서 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 맞아!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지. 결국 썩어질 육신,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아야지. 먹고 마시는 일에 귀중한 인생을 낭비할 수 없지.” 왕이 식사 후 집무할 때 이 신하는 그 해골을 들고 이제는 왕이 집무하는 책상머리에 갖다 놓습니다. 왕은 틈틈이 해골을 바라보면서 집무를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 맞아!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겠지. 어차피 썩어질 육신, 청렴결백하게 살고 공평무사하게 일해야지.” 왕은 어디를 가든지 그 신하가 가지고 온 해골을 보면서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의 성전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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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 신가?(21. 나의 성전이신 예수님) / 본문 : 요2:13-22

우리는 가끔 어부출신들인 제자들만을 기억한 나머지 제자들이 무식한 것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 17절은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시69편 9절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를 떠올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케 하시는 모습을 본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이 말씀을 기억하여 연상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연상하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한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을 관리하는 산헤드린공의회 회원들이나 대제사장이 가만히 있을리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장차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할 것을 예언했지만 그 때마다 제자들은 정확히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청결사건을 지켜본 제자들에게 이상한 느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예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훗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데 직접적인 빌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건 자체를 문제삼고 싶었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것을 트집잡지는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문제를 삼은 것입니다.

목숨을 건 성전청결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초기부터 왜 이토록 부담스러운 언행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오신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며 결코 뒤로 물러서거나 이제부터 복음을 전하시면서 만나게 될 모든 일정을 미리 확정지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을 준비하시고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막10:45)고 하셨습니다. 목숨을 이미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은 없는 법입니다. 도둑이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비상벨? 경찰? 아닙니다. 할머니라고 말합니다. 할머니가 ‘그래 나 죽여라, 나 죽이고 훔쳐가라!, 나 죽이기 전에는 못나간다.’ 소리를 치시면 도둑이 제일 무섭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에 죽음을 겁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을 금요일 저녁에 체포하여 밤 세도록 심문을 했지만 죄목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이 성전청결사건 때 하신 말씀을 책잡고 나왔습니다.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마26:61),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막14:58)라고 고소했습니다. 죄를 찾으려고 고민하고 있던 가야바에게는 더 없는 죄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건과 이 때 하신 말씀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교부 폴리갑은 그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순교장에 끌려가서 마지막 죽음을 당하기 직전, 핍박자들은 지금이라도 신앙을 포기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늙은 폴리갑은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오늘까지 80여 년간 살아오는 동안 우리 주님께서 나를 버리신 일이 없었거늘, 지금 내가 어찌 주님을 부인하리요. 나는 이대로 죽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순교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고 하셨습니다. 또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하셨습니다.

왜 성전을 청결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성전을 처음 만든 것은 광야생활 가운데서 였습니다(출25-30장). 이 때는 정확히 성전이라고 사용하지 않고 성막이라고 했습니다. 외형적인 모습을 성막이라고 부르고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속죄제와 각종 제사가 드려질 때 비로소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계실 성막을 만드는데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생각한대로 마음대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철저하게 하나님이 일러 주신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25장은 언약궤와 진설병상, 금 촛대 등 성전 안에서 제사드릴 때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방법을 가리켜 주십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6장에서 성막과 휘장 만드는 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성막이 성전이 되기 위해서, 제사드릴 때 필요한 물품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 또한 하나님이 시키신 방법대로만 해야지 조금도 임의로 드릴 수 없습니다. 레위기는 바로 이러한 제사드리는 방법이 자세히 기록된 책입니다. 아론은 레위기 9장에서 첫 번째 제사를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론은 그 아들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흠 없는 수송아지와 양을 잡아 드린 것입니다. 첫 번째 제사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번제물과 기름을 하나님께서 불로 사르셨습니다. 이를 보고 온 백성이 소리를 지르고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 광경을 보고 너무 흥분할 탓일까요?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다가 분향하다가 여호와의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무서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이 땅에 임재하실 때 이렇게 엄격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민수기는 왜 이스라엘민족의 숫자를 세었습니까? 성막을 보호하고 행군할 순서를 정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 지파에게는 그들 가운데서 성막을 지키는 역할을 맡기셨는데 하나님은 만일 누구든지 성막의 근처만 와도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민3:38).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은 이 땅의 중심이요 하나님과 교통하는 유일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이곳은 죄인인 인간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을 더럽히고 망가트린 그곳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격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시대 갔으면 여호와의 불이 나와 모조리 불살라 버렸을 것입니다.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 마쳐진 것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깨닫지 못하고 이때부터 예수님을 잡아죽일 궁리만 하게된 것입니다.

사흘 동안에 일으킨 성전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성전’은 ‘나오스’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외형적인 ‘성전’을 말하는 ‘히에론’과 다른 뜻입니다. 즉 구약의 성막을 ‘히에론’이라고 한다면 성전은 ‘나오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 ‘나오스’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들(고전3:16, 17, 계3:12)에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가 예배할 참 성전이셨던 것입니다(요4:20-24).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성전은 완성된 것이 아니고 건축 중에 있었습니다. 이 성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을 섬기려는 바른 자세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헤롯이 건축 광이었고 유대인의 민심을 잡으려는 마음에서 건축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헤롯은 B.C.20-19년에 성전 재건에 착수했고 그 후 헤롯이 완공하지 못하고 알비누스 총독 시대(A.D.62-64)년경에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예수님의 예언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막13:1)대로 A.D. 70년에 철저히 부서졌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재건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내면적인 성전을 말씀하신다면 이들은 장막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비웃었습니다.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라고 했습니다. 당시 헤롯에 의해 동원된 인원은 약 18,000명 정도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많은 인원을 가지고 46년간이나 공사를 했는데 아직까지 마치지 못한 성전을 어떻게 사흘만에 세운다는 것인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황당무계한 조롱의 말로만 들렸던 것입니다.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말씀에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이 말씀을 이해하고 믿었습니다(요2:22).

6.25전쟁 중 우리 나라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한 만삭이 된 어머니가 아기를 낳기 위해 어떤 집을 찾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만 그 집에 도착하지 못하고 길에서 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어머니는 어느 다리 밑에 겨우 자리를 잡아 아기를 분만하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가운데 그 어머니는 모든 것을 혼자 처리하고는 아기가 춥지 않도록 자기 옷을 모두 벗어서 아기를 감싸주었습니다.
해산 직후 추위에 어머니는 그만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어느 미군 장교 한 사람이 차를 타고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휘발유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부대로 연락을 취해 놓고 차에서 내려 그 부근을 거닐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이상한 아기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란 그 군인은 그 소리를 따라 다리 밑까지 내려오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 군인은 기가 막힌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어머니는 벌거벗은 채 얼어죽어 있었고 어머니의 옷에 둘러싸인 갓난아기가 몹시 울고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기름이 떨어진 것이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살리시기 위함인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생각한 군인은 그 아기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아 잘 키웠습니다.
그 아들은 미국에서 훌륭하게 자라 성인이 되었고, 늘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고 싶어하던 그 아들은 어느 날 자기를 키워 준 아버지로부터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무덤을 찾아 한국에 나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기 옷을 벗어서 무덤 위를 덮으면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는 그런 희생을 치르셨군요!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벌거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겠어요!”라고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이 땅에 임재하신 곳은 에덴동산이었습니다(창3:8). 그리고 아담의 범죄 후에 하나님은 더 이상 에덴동산을 아담(사람)에게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이 땅의 에덴동산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에덴에 아담이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을 떠나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시고 광야에서 모두 죽일 수 없어 모세의 간곡한 기도로 이 땅에 임재하시기를 결정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명령하시기를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출25:8)을 만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방법은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임시거처로 이 땅에 머물러 계시던 하나님은 친히 성전이 되셔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전 안에서만 속죄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것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된 것입니다.

AIDS에 걸린 어느 여인의 병실에 목사님이 문병을 갔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목사님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병실의 침대 옆에 예쁜 여자아이 사진을 발견하고 “저 아이가 누구지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여인은 “제 딸인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계속해서 목사님은 “그럼 저 딸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여인은 대답하기를 “저는 제 딸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의 어떤 죄도 모두 용서해 주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인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습니다.

이제 다시는 성막이나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것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가 필요할 뿐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모신 모든 성도들을 모두 성전인 것입니다. 또한 이 성전은 다시는 더럽히면 안됩니다. 더럽히는 그 자체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7) 하나님의 전은 거룩한 곳입니다. 회개한 성도는 하나님이 친히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하늘나라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성도에게 임재하셔서 거하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나의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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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 신가?(20. 나의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5:1-11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현재 우리가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은 1620년 영국에서의 종교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 대륙에 상륙한 영국의 청교도들이 이주(移住) 후, 첫 번째 수확기였던 1621년 가을 플리머드 정착지에서 첫 번째 추수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 처음부터 감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었습니다. 사실 추수한 것이 풍족했던 것이 아니라 겨울을 나려면 어림없는 곡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셔서 이제 말라비틀어진 무말랭이 같은 이 부족한 것으로 어떻게 겨울을 날수 있냐고 불평했습니다. 그 때 한 소녀가 많은 사람들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그 부족한 상태의 추수를 보면서 “우리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곡식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부족한 것을 알면서도 그 추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이후 미국의 제1대 대통령인 워싱턴 대통령 때였던 1789년도에는 11월 25일로, 1863년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추수감사절 날에는 전쟁을 쉬자’라고 제의한 링컨 대통령 때에는 11월 마지막 목요일로 지켜 오다가, 1941년 미국 의회에서는 11월 넷째 목요일로 지키자고 결의한 후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 시험을 받는 것도 욕심 때문입니다. 야고보서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욕심이 감사의 길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황소의 거대한 몸짓을 본 개구리가 황소처럼 되어보겠다고 바람을 마셔 배를 부풀게 하다가 그만 배가 터져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고깃덩어리 하나를 훔친 개가 다리를 건너다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르고 그 고기를 빼앗겠다고 짖다가 그만 물고 있던 고기마저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혹 오늘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다면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에만 감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과 병자, 불구자는 감사하지 못합니까? 아닙니다. 이상하게 그분들이 더 감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농사짓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이 물려준 것만 바라보다가 자신이 농사지은 것이 없어 가난하게 된 사람도 있고, 물려받은 것이 없어서 악착같이 노력하여 부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이북사람이 부자가 많다고 합니다. 현대그룹 회장이었던 정주영씨도 북한에서 소 한 마리를 가지고 내려왔던 분입니다. 미국에는 유대인들이 재계, 정계, 예술계의 중요한 위치는 모두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유대인의 교육에서 나왔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총학생수 16,700명 중에서 4,500명, 26.95%가 유대인이고, 예일대학교 총학생수 10,000명중에 3,000명이 유대인이며, 보스턴대학교 25,000명중에 5,000명이 유대인 재학생이 있습니다. 미국 6개의 명문대학의 20%을 유대인이 차지합니다. 자식 농사는 역시 교육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중국의 강태공도 “좋은 전답을 많이 가졌다고 자랑 말라! 그것은 언제까지나 당신의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것보다는 적더라도 기술을 하나 제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견고한 보물이 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농사를 잘 짓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확실한 방법에 도달하게 됩니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농부가 아무리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물을 주어도 그것만으로 추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에 따라 비가와야 하고 햇빛이 비추어야 하고 밤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농사만를 짓던 시절의 풍습은 풍년이 되게 해 달라는, 사실상 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을 지으신 아버지가 농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지난주에 수능시험이 있었습니다. 만일 시험문제를 낸 분이 시험을 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묻는 제가 이상하지요. 당연히 100점 이상일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농부이면 이제 농사는 100% 보장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절대로 농사를 망치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농사는 내가 짓는 것이 아니라 농부이신 하나님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농사는 반드시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주인이신 그분이 농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들어갈 때부터 이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팔레스틴은 날씨가 맑고 늦여름 밤에 이슬이 내리는 기후이기 때문에 포도재배에 알맞은 곳입니다. 이 포도나무는 수세기 동안 자라왔습니다(렘31:5, 암9:13). 그런데 왜 예수님은 “포도나무”에 ‘참’이라는 말을 강조 하셨을까요? 참 포도나무가 아닌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포도원은 성경시대에 사람들에게는 번영과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논 몇 마지기 가지고 있느냐 하였던 것과 같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미4:4) 한것은 이스라엘의 번영을 말한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 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호2:15)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영적회복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극 상품의 포도나무는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시 80:13),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사5:4)하였습니다.
들포도는 머루와 같이 작은 알맹이의 포도를 말합니다. 아주 형편없어진 포도입니다. 이런 포도는 돼지나 들짐승들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는 것은 영적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들 포도처럼 되어버린 하나님의 영혼들을 참 포도나무로 복귀시키는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대로 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들 포도나무 같이 제멋대로 엉킨 쓸모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로 더불어 쓸모 없던 내가 쓸모 있는 모양으로 되살아 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mevnw(메노) “거하다”의 이 단어는 오늘 본문 안에 무려 10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인지 알 수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 붙어있으라는 것입니다. 이 가지에만 붙어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많이 맺을 수 있지만, 떨어져 나간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가지를 모아다가 불에 사른다고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왜 필요한 것입니까? 포도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포도나무 가지에 포도가 열리지 않는다면 그 가지는 잘라내는 것입니다. 과수원 농사를 해본 사람은 잘 아실 것입니다. 봄에 가지치기를 잘해야 합니다. 열매를 잘 맺는 가지는 잘 보존하여 열매를 더 잘 맺을 수 있도록 하고 열매가 없는 가지는 잘라냅니다. 다른 나무는 목재나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데 반해 포도나무는 오직 포도열매를 맺기 위함이기 때문에 열매가 없으면 잘라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안에 거할 수 있는 수액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3절에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말씀이 생명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붙어있을 수 있는 비밀은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고 하셨습니다.
지난 8월 영국에 갔을 때 브리스톨한인교회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오신지 얼마 안되시는 분이 차를 몰고 따라오는데 참 운전을 잘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목사임은 ‘영국에 오신지 얼마 안 되는데 운전을 잘하십니다.’라고 물었더니 그분이 하는 말이 ‘저는 영국 길을 몰라서 그 때 목사님 잃어버리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죽을힘을 다해 쫓아간 것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끝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의미 있는 두 가지 예식을 행합니다. 세례식과 성찬예식은 모두 예수님과 이제부터 하나가 되는 거룩한 성례식인 것입니다.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접붙이는 것입니다. 우리이제부터 이 세상에서는 죽을 때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예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헬라어에는 말씀이 두 가지로 나옵니다. ‘로고스’와 ‘레에마’입니다. 로고스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록된 말씀을 뜻하는 것이고 ‘레에마’는 로고스가 역사하여 내 안으로 불같이 들어오는 뜨거운 말씀을 의미합니다. 성경책에만 기록된 말씀은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가슴속으로 그 말씀이 찬란한 햇빛처럼 밀고 들어올 때, 바위를 깨뜨리는 빗방울처럼 스며들어올 때 살아있는 하나님을 체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그리스도께 붙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대예배에서 헌금위원을 맡은 한 집사님이 헌금바구니를 돌리는데 초라한 차림의 한 맹인이 10만원 짜리 수표를 세 개나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깜짝 놀라 나중에 그 맹인에게 왜 그렇게 많은 돈을 헌금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라고 헌금하지 말라는 법 있나요? 지난번 이 교회 사무원한테 한달 전기료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30만원 내외라고 하더군요 보시다시피 저는 소경입니다. 볼 수 없으니 전깃불도 필요 없죠 하지만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영의 눈을 뜨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교회에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뜨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육신의 어두움보다 훨씬 심각한 영적 어두움을 밝혀주는 교회사역을 위해서 조금씩 절약해 모은 돈으로 매달 그만큼이라도 하려구요” 참으로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15:11)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모두가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밖에 버려 불태워지는 가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붙어있어 절로 열매를 맺는 축복된 가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창조주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19. 나의 창조주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1-13

오늘 본문 요한복음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왜 자신의 복음서시작을 이렇게 시작하는 것입니까?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시작하고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으며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로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던 창조주이시라면 바로 예수님도 창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10)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첫 이적의 사건을 2장에 기록하는데 이것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표적)인 것입니다. 요2:1-12에 기록된 “가나의 혼인 잔치”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갈릴리 가나 지역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곳에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청을 받아서 그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정확히 누구의 잔치인지는 모르나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 제자들이 참석한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일가나 친척의 결혼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잔치에 충분히 있어야할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아마 생각보다 하객들이 많이 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직까지 한번도 예수님은 이적을 일으킨 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적을 일으켜 준다고 믿고 예수님께 말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 없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순종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가까운데 가서 포도주를 사올 수 있는 것이라면 구태여 예수님께 말하지 않고 자신이 하인들에게 직접 포도주를 사오라고 권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이 난감한 일을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은 처음에는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야흐로 때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 항아리 여섯이 나란히 놓여있는 것을 보시고 그 항아리에 물을 아구까지 가득히 채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항아리에 물은 아구까지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요2:8)고 하셨습니다. 흔히 ‘물이 변하여 보도주가 되어라’는 기도나 주문 등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퍼다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포도주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포도주의 맛은 다른데서 구할 수 없는 맛을 내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적(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신 것을 첫 번째 이적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이분은 창조주였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에 많은 인도자, 제사장, 선지자, 예언자 등이 왔다 갔습니다. 미래에 있을 일은 예언을 한다든가 교훈을 주거나 인도는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새롭게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은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이적을 말하다가는 오늘밤을 세워도 안될 것입니다. 그러다가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 동안 설교한 목사로 남겠지요?
제가 오늘 이 말씀을 전해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저에게 신앙 상담으로 한 통의 메일이 왔습니다. 이와 비슷한 편지를 종종 받습니다. 제가 왜 주일날 예수님에 대해서만 설교하는지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아울러 주앙교회 성도님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에 대해서만큼은 그분이 누구 신지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저에게 온 메일을 하나 소개합니다.

“이 목사님께 e-mail로 문안 인사를 드려 죄송합니다. 충남에 사는 김.. 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 부분이 있어 문의 드립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결국 성경은 예수님을 기록한 것인데,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고 또한, 나름대로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되는데, 아니 공관복음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정체성에 의심이 갑니다.
과연 예수님이 god 혹은 human인가조차 이해가 안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가 과연 단순히 god을 의미하는 것인 지요? 외국에서나 학계에서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설은 정말 신화로서 받아드리는 것인 지요? 우리가 아담과 하와로 인해 죄인인가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돌아가셨나요?
저는 하나님은 존재하고, 예수님이 god 혹은 human이든 신앙에는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부처님이 인간이었기에 불자들이 믿지 않는 것은 아닌 것처럼…
그러나 신앙으로서가 아닌 현대 신학으로서의 견해로서 알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으로서 사실을 안다는 것은 무리지만요. 저는 안티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제가 교회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은 단지 저희교회 목사님께 누가 될까봐서 입니다.
이영제 목사님께 이런 질문을 드린다는 것이 죄송스럽지만, 제가 자꾸 이런 갈등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목사님의 견해를 듣고 싶으며, 제가 읽을 만한 책이 있으면 또한 소개 부탁드립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이런 고민을 하는 분이 이분뿐이겠습니까? 우리 또한 이러한 궁금증과 문제들을 안고 있으면서 나는 아닌 것처럼 행동하거나 그저 교회에 와서 고개나 끄덕이다가 평생을 지낼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문제에서 확실히 믿음이 있는 자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이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다가는 큰일납니다.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24:41)고 했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아닙니다.
위의 분의 글에서 한가지 이상한 곳이 있습니다. 저에게 상담을 요청하면서 ‘신앙으로서가 아닌 현대신학으로서의 견해’를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신학이 예수그리스도를 창조주로서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다른 종교의 교주처럼 그런 성인의 한 분으로 예수를 믿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 믿음에서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언 듯 볼 때 신앙이 깊으신 분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분이 꼭 진실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신, 그분만이 유일하신 우리의 구주라는 사실을 믿고 영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솔직히 신앙으로서가 아닌 신학으로 대답해 달라는 이분의 말뜻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분의 질문의 의도 속에 나타난 생각은 ‘신앙’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합리화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신앙은 제대로 된 신학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학과 신앙은 일치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짓을 신앙으로 밀어 부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설교했다고 해도 만일 그런 식의 설교를 전했다고 하면 그것은 모두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상담을 하신 분이 미리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질문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고 자신의 생각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또 다른 목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로서가 아닌, 즉 배운 대로만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대답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한 개인의 입장에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경 중에서 특히 요한복음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해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같이 오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계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오셨고 그분과 동행하셨습니다. 다음 성경의 구절들이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요3:34)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3:35)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7:16)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7:17)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요8:26)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8:28)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요8:2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요12:49)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12:5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17:8)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17:9)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17:10)
이 정도면 믿으시겠습니까! 요한복음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늘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나타납니다. 저는 요한복음을 너무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42번이나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1장으로 되어있는 요한복음 중에 17장에 걸쳐 나타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요한이 자의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아버지께 받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이 비밀은 하나님께로 오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분에게 생명이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6일만에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1850년 12월 6일 주일, 영국의 콜체스터시는 심한 눈보라 때문에 교통이 두절 됐습니다. 한 소년이 날씨 때문에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가지 못하고, 집 가까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따라 그 교회목사가 출타하여 한 평신도가 대신 설교를 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성도들을 앞에 두고 그 평신도는 더듬거리며 이사야 45:22의 말씀을 봉독 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매우 서툴렀습니다. 그런데도 소년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자문해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내게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소년은 괴로웠습니다.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평신도 설교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그대는 매우 곤고해 보이는 구려. 그럴수록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그의 평범한 말 한 마디가 소년의 마음에 깊이 박히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일평생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가 바로 후일의 위대한 설교자가 된 ‘찰스 스펄전’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그 자체로도 힘이 생깁니다. 생명이 그 안에 있습니다. 세상의 학문이 구원시키는 것 아닙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생명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2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우리 또한 사람의 방법으로 난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고 말합니다. 천지의 창조와 천사들도 예수님을 위해서, 그분에 의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계3:14)라고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님은 육체로 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독생자 이셨습니다. 말씀을 하실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라는 말을 사용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만을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없는 것도 창조되는 힘이 나타납니다. –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