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5. 나의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님) / 본문 : 계1:8-20

오늘본문 8절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했는데 17절에서는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분이 곧 하나님이시오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삼위(성부, 성자, 성령)를 때로는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의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나타나신 현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은 밧모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신에 대해서 친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부분은 8절과 11절 그리고 17절 하반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로부터 20절까지 삼위일체이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1. 전능하신 분입니다.
본문 8절에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계시록에는 ‘전능자’(판토크라토르:pantokravtwr)라는 말이 9회 나옵니다. 앞으로 일어날 마지막의 세상 심판을 하시는 분은 곧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그분이 너무 크시고 우리의 지식의 한계로 그분을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분은 자유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과 한계를 뛰어넘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안 되는 것이 없고,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속도로 우리지구를 말해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을 축으로 하여 도는 아주 작은 별인데 태양 주위를 한번 도는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입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속도는 시속 6만 6천 마일이라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입니다.
1997년 월드시리즈에서 플로리다의 마무리 투수 ‘롭 넨’이 던진 103마일(166키로)가 현재 야구 기록상으로는 가장 빠르게 던진 것입니다. 여객기는 이보다 7.4배 이상 빨리 날아갑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여객기의 속도는 최고 마하 1.2정도로 날아갑니다. 마하1이 초속 340미터니까 시속으로 환산하면, 340미터*3600초=1,224,000미터로 시속 1,224킬로미터로 가는 겁니다. 1마일이 1,609km이니까 대략 비행기보다 8만7천 배 이상 빠른 겁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태양계를 도는 지구가 지금 흔들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좋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얼마나 충격을 최소화하느냐는 겁니다. 흔들리지 않고 소음이 적은 차가 좋은 차입니다.
크기로 말하면,
태양은 은하수를 중심 축으로 그 주위를 공전하는데, 한번 도는데 약 2억 년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우주에는 은하수와 같은 성군들이 수백만 개나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계산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만드시고 지금도 운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실 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소개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창 28:3)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전능자’라는 말이 제일 많이 나타나는 곳은 욥기서입니다. 32번으로 성경 전체의 약 절반정도가 나오는 횟수입니다. 제일 처절한 고난 가운데서도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이고 믿게된 것입니다.

2. 세상에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알파’는 헬라의 첫 문자이며 ‘오메가’는 마지막 문자입니다. 영어의 ‘알파베트’라는 말은 헬라어의 알파, 베타를 말한 것입니다. 영어로 한다면 AB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어의 기원이 헬라어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7절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ejgwv eijmi oJ prw’to” kai; oJ e[scato”:에고 에이미 호 프로토스 카이 호 에스카토스)는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나는 …이니”로 사용한 것과 같은 뜻입니다. 회교와 불교에서는 윤회설로 끝이 없습니다. 돌고 도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끝이 있다고 말합니다. 시작하신 분이 있고 이 분이 끝도 책임지실 분입니다.
시작할 때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하다말면 아니한만 못한 경우도 흔합니다. 특히 선한일과 믿음은 끝까지 해야할 일입니다.
‘끝을 맺기를 처음과 같이 하면 실패가 없다’(노자)
‘끝이 좋으면 모두가 좋다.’(셰익스피어)
‘아름다운 시작보다 아름다운 끝을 선택하라.’(그라시안)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고 반문합니다.

톨스토이가 쓴 글 중에 한 농부와 지주의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엄청난 땅을 가진 부자 지주가 농부에게 하루 종일 걸어서 그 안에 들어가는 땅을 주겠다고 말하자 한 평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죽을힘을 다해 뛰어서 해가 지기 전에 겨우 들어와 지주 앞에 쓰러졌습니다. 너무 피곤한 줄 알고 이제 그만 일어나 보게 했는데 숨어 끊어졌던 것입니다. 그 때 그 지주는 ‘한 평의 땅이면 족한데’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 이 땅의 생애를 마쳐야 합니다. 우리 개인의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세계 최고의 재벌인 빌게이츠가 자기의 대부분의 재산을 세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말한 것을 읽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수십 억의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건설적이 아니라고 했으며, 이것이 자기 삶의 철학이라고 말했습니다. 존경할만한 말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고 합니다. 세상의 끝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개인의 끝도 예수님께 있습니다.

3. 주님은 영존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끝까지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시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라고 했으며 하바국은 “선지자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합 1:12)했습니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이 원칙이 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우리는 정신 못 차릴 겁니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약속을 어기시거나 변경하신 적이 없습니다. 원칙이 없는 것처럼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시종일관’으로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고 하셨습니다.

4.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18절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것을 말합니다. 심판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세상을 막 살아갑니까? 심판자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심판합니다. 자신의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의 잘못만을 지적합니다. 자신은 꼭 심판에서 제외될 사람처럼 말합니다. 어찌 보면 자기자신이 신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악마가 천사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어이, 우리 지옥 식구들과 너네 천당 친구들과 축구 한게임 하자구!”
그러자 천사가 한참을 생각하고는 말했다.
“좋아. 하지만 우리가 이길껄? 전세계 슈퍼스타는 다 천당에 있잖아?”
그러자 악마가 말했습니다.
“낄낄낄.. 과연 그럴까? 심판이란 심판은 다 여기 있는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

서울시내버스기사들의 이야기입니다.
경쟁회사 버스가 추월해 갔습니다. 몇 번 버스라고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우리 쪽 버스 옆으로 갑자기 버스가 다가오더니 창문을 열고 기사끼리 욕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이 c8놈아 그렇게 차를 그렇게 몰면 어떡하냐?, 그런 너는 뭐가 잘 낫냐? 입에 담기 민망한 욕설이 오고갔습니다. 우리 쪽 기사는 더 열을 받았는지 상대방 버스를 따라가 내리더니 그 버스를 탔습니다. 그러자 그 버스 운전기사는 우리 쪽 버스 기사를 태운 채로 떠나버렸습니다. 우리 쪽 승객들은 기가 막혀서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내려야 하는 건지 그래도 조금 더 기다려 봐야 하는 건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우리 쪽 기사가 승리한 장군처럼 위풍당당하게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인슈타인이 와도 설명이 안될 상황입니다. 이 재미있는 상황을 한 아줌마는 핸드폰으로 생중계 합니다. 그래서 이민 갔던 사람들이 미국은 재미없어서 못살겠다고 재 이민 오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 궁금증은 잠시 후 경찰이 버스를 따라오면서 풀렸습니다. 경찰이 앵앵거리며 따라오더니 버스를 옆으로 세우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빼앗아온 00번 버스 차 키를 내놔라!”고 방송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상황은 이렇게 된 겁니다. 우리 쪽 버스기사가 그쪽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호등 앞에서 잠시 멈춰 섰을 때 그쪽 버스 키를 잽싸게 빼 가지고 우리 쪽 버스로 달려온 겁니다. 그래서 경찰차가 따라와서 “버스키 내놔라!”고 방송을 한 겁니다.

이 버스기사들은 승객의 불편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영업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승객은 그저 짐짝처럼 필요 없으면 버려도 되는 것처럼 취급한 것입니다. 제일 많이 고객의 눈치를 보는 곳이 광고카피하는 곳입니다. 광고하나 만들기 위해서 수 없는 회의를 하는데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은 고객의 마음의 방향이 어디로 흐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곧 주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그토록 사랑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 사랑하듯 하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막 7:11-12)라고 말씀하시면서 ‘고르반’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늘 함께하심을 로마서 11:36절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는 시작을 말합니다.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는 현재 진행을 말합니다.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세상의 끝마침을 말하는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가 저와 여러분들의 주인이시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실 분이십니다.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 / 눅 2:1-20

1) 캄캄한 밤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선지자를 세우셔서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 400년 동안에는 선지자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전 모든 인간이 이와 같이 어두움 속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사 60: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겔 34:12]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찌라

이런 캄캄한 땅에 예수님께서 구원의 빛으로, 생명의 빛으로, 소망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지금 어떻습니까?
모두가 다 욕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명예와, 권력과, 소유에 눈이 멀었습니다.
[마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눅 1: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예수님은 캄캄한 밤에 어둠을 가르고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구원의 빛으로, 생명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2)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하도많은 도시를 놔두고 왜 가장 작고 초라한 이름 없는 곳에서 예수님이 태어 나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베들레헴입니까?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다윗은 오실 메시야의 표상입니다.
[눅 2: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요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 말 구유에 오셨습니다.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맏아들을 낳아 구유에 뉘였습니다. 구유는 짐승의 먹이통이지 침대가 아닙니다.
그런데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후일에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요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예수님은 베들레헴으로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4) 그런데 메시야 예수님을 누가 만났습니까?
(사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아무도 창조주 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굽니까? 목자들입니다. 목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목자들이 어떻게 메시아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밤중에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본문 8 절입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목자들은 양을 지키고 있다가 천사들에 의해서 가장 먼저 메시야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목자로 이 땅에 오신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양에 비유됩니다. 그런데 양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둠 속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렘 50:6]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작은 산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약속의 말씀대로 양의 목자로 오셨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목자가 아닌 선하신 목자로 오셨습니다.
자기 양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는 양을 끔찍이 사랑하시는 목자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실 때에 백성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마 9: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막 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또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시려고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나의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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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 신가?(24. 나의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 본문 :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를 통해서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직접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뜻은 히브리어 ‘임’(함께:with)과 ‘마누’(우리와:us)와 ‘엘’(하나님:God)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와 이토록 함께 하시기를 원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있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구약에 하나님과 동행한 인물은 창5:21-24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 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무드셀라와 에녹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는 인간의 죄의 문제는 그대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죄의 문제도 해결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아담이 에덴동산을 쫓겨나던 그 때에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서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다시 예언해 주셨습니다.
힌두교의 본산인 인도에 젊은 선교사가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그곳에서 힌두교 승려한 사람을 알게되어 함께 길을 걷던 중 선교사가 그만 개미굴을 건드려 본의 아니게 많은 개미를 밟아 죽였습니다.
이를 본 승려가 깜짝 놀라며 무슨 큰 일이라도 일어난 듯이 말했습니다.
“아니 어쩌다 이렇게 많은 생명을 죽였소. 참으로 답답합니다. 이 개미들이 우리조상이었는지도 모르는데…”
선교사도 난감했습니다. “어떻게 하죠 모르고 저지른 실수인데…” 그래서 승려에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해결책을 물었습니다.
승려는 한참을 개미굴만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음…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당신이 죽은 다음에 개미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선교사는 어리벙벙하여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오신 까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직접 이야기 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 오신 것입니다.”

임마누엘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은?
육신을 지니신 예수님은 구원자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마음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십시다. 이것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육신을 지니고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마 4:24 “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육신을 지니고 오신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셨습니다. 마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당장 당신에게로 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히 11:6).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이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요 14:27).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1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지금 하나님께로 나아오셔서 참 평안을 받으십시다. 그리고 참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시다 그만두신 적이 없으십니다. 모든 일은 끝까지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중간에 헤어진다면 그 사랑을 끝까지 한 것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결론입니다.
사랑도 끝까지 해야 합니다.
복음도 끝까지 전해야 합니다.
믿음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부활 후에도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어 늘 함께하십니다. 요 14:16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언제까지 함께하신다구요? ‘영원토록’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분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에는 어떤 때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 같지 않을 때가 있지요.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하면 특별할 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느끼지요. 보통 때에는 하나님을 잃고 살다가 특별할 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으로 느끼지는 않는지요.

유치원을 다니고 있는 귀여운 딸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 아빠에게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아빠, 나 오늘 에버랜드에 놀러 갔게, 안 갔게?” “갔지!” “어 아빠! 어떻게 알았어?”라며 딸을 신기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아빠! 나랑 엄마랑, 그리고 친구 엄마 두 명이랑, 친구 둘하고 같이 갔게, 안 갔게?” “같이 갔지! 여섯명이” 아이는 “우리아빠 천재다 천재… 어떻게 6명이 갔다 온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었을까? 존경스러운 눈초리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빠, 그 에버랜드에서 5월이 어린이 달이라고 어린이들에게 곰 인형을 선물로 주었게, 안주었게?” “주었지!” 그러자 딸이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도 이건 못 맞출 거야. 그러면 그 인형이 검은색이게 아니게?” “검은색이지!”
그러자 이제는 아빠가 아니라 신처럼 생각하고는 “아빠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에버랜드가 용인에 있게? 다른 곳에 있게?” “용인에 있지!” “아빠는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알지” 아이는 눈물까지 흘렸다는 것입니다.

아빠가 이 딸의 질문을 맞히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것은 더 쉬운 일입니다.
이 어린아이처럼 질문을 해 볼까요? 맞혀보세요.
“우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게 아니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게 안주셨게?”, “참세를 하나님이 기르시게 안기르시게?”,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카락이 몇 개인지 아시게 모르시게?” 더 이상 무엇을 더 물어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 ‘임마누엘’은 주님과 同苦同樂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결단을 미루지 마십시오. 주님을 진심으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교회에 다닌 것하고 주님을 영접한 성도하고는 다릅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매우 논리적이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매사에 신속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칸트는 한 여인과 사귀고 있었는데 도무지 구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견디다 못해 칸트에게 청혼했습니다.
“저와 결혼해주세요.” 칸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칸트는 그때부터 결혼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도서관에 가서 결혼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글을 읽으며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그리고 여인과 결혼하기로 최종결론을 내리고 칸트는 여인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때 여인의 아버지가나와 말했습니다.
“너무 늦었소. 내 딸은 이미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오”라고 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되는 것,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청소년 집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헌금바구니에 예쁜 십대 소녀의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습니다. 가끔 장난기 있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사진을 빼내려고 보다 사진 뒤에 이렇게 쓰여있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주님께 드릴 것이 없으나, 나 자신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셔서 모든 것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할 차례입니다. 절대 후회 없는 삶, 그것은 주님께 우리를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말씀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3. 나의 말씀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1, 계19: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3)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여러분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 동안 선지자도 보냈었고, 왕도 세웠었고, 예언자도 보내셨습니다. 그것이 다 필요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최종적으로 친히 아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왔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즉 종으로 왔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전에 마지막으로 왔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서서 길을 평탄케하는 사명을 받고 왔던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라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눅 7:28)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을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제사장, 선지자, 왕, 예언자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역할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마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왔던 이분들이 완성하지 못한 것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가리켜 제퍼슨은 ‘만일 하나님의 거룩한 도서관이 되어 있는 성경이 우리에게서 없어지는 날이면 우리는 가장 불행하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또 앤드류 잭슨은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서 있다’고 했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나는 모든 영토는 버릴지라도 성서는 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만 전해주고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을 친히 그의 육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자기가 한 말을 자신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 말씀을 지키신 분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표현하기를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3)고 했습니다. 말만 하는 사람보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운동경기를 보면서 안타까울 때 그런 말을 자주 합니다. 저렇게 하니까 안되지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운동선수는 “그럼 네가 해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고 가셨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따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김장환목사님의 아들 중에 김요셉목사라고 있습니다. 그가 어려서 학교에 가면 혼혈아라고 놀려주니까 학교 가기가 싫었습니다. 아버지보고 미국학교에 보내달라고 하자 너는 한국 놈인데 왜 미국학교에 가려고 하느냐고 야단만 맞았습니다. 결혼문제를 놓고도 아버지는 한국 며느리를 보고 싶어하고 어머니는 미국 며느리를 보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Korean-American 신부를 얻어 공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낳아서 이름을 성경적인 이름으로 지어보려고 애썼는데 좋은 이름이 생각나지 않다가 에베소서 6장에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읽다가 순종으로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말씀 드렸더니 할머니가 말하기를 ‘네 아들이 어떻게 순종이냐 잡종이지!’라고 말해 한바탕 웃었다는 것입니다.

섬기러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시고 속죄 재물이 되어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으로 이끌어 영생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그분이 우리를 섬기러 오셨대요. 이해가 됩니까?
그래서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그러면 그 동안 많은 선지자, 왕, 예언자들이 왔는데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약간은 그들의 어깨가 으쓱했지요. 얼마나 신납니까? 하나님의 선지자로 와서 많은 사람을 지도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리고 왕으로 와서 얼마나 좋습니까? 암행어사가 되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암행어사가 섬기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벌주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러 온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결코 암행어사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고 있나 보고 잘못을 찾아서 벌을 주러 오셨다면, 또한 그것을 지적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기만 했다면 그 전에 왔던 선지자들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이 친히 말씀하신 것은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이 테레사와 함께 살고 있었던 한 분이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마침 테레사는 한 어린이의 고름을 만지면서 치료를 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이 분이 그녀 곁에 다가서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높은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시기심이 안 생깁니까? 이런 삶으로 만족하십니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테레사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말씀의 핵심
예수님이 전한 말씀이 왜 복음입니까? 한마디로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소망이 없는 구제불능의 우리들이 아닙니까? 이런 우리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특히 우리민족은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고통의 세월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런 연유에서일까요. 어느 나라에서나 꽃과 풀은 아름다운 전설과 이름을 따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생활에 여유가 없었던 우리는 밤에 피는 ‘달맞이꽃’을 토속어로는 ‘도둑놈꽃’이라고 했습니다. 모두 잠든 밤에 피는 것이 아무래도 좀 수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레서 ‘도둑놈’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한자식 이름을 딴 ‘봉선화’나 ‘옥잠화’ 같은 것은 그런 대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순 우리말로 된 꽃 이름은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 ‘여우오줌’, ‘쥐오줌풀’, ‘코딱지나물’ 이것도 모자라 ‘개불알꽃’, ‘홀아비X’ 등이다. 외국 사람에게 이것이 우리의 꽃 이름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한스러운 세월을 보내면서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애꿎은 ‘꽃’에게 욕을 퍼부으며 마음을 삭였던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한 어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냉동 창고 회사에서 어느 경비직원이 3교대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밤에 순찰을 돌던 중 엄청나게 큰 냉동 창고들 중에 한 창고의 문에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생각한 그는 급히 창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창고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 때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그만 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대형 냉동 창고의 문은 밖에서만 열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꼼짝없이 갇히고 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냉동실의 온도가 떨어지고 몸은 추워오고 산소가 부족해져서 숨쉬기가 힘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다 큰 일 날것같이 생각되었지만 그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다음 근무를 교대하러 온 경비는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냥 여느 때처럼 근무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경비는 한 고장난 냉동실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장난 냉동고 안에는 얼어죽은 동료 경비가 처참하게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고장난 냉동실 안에서 사람이 얼어죽었을까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시체를 부검해 보았습니다. 혹시 다른 곳에서 죽여 이곳으로 옮겨 놓았는가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고, 그리고 공기가 부족할리 없는 공간이었는데도 산소부족으로 죽은 이유도 알 수 없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 사건에 대한 정신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즉 그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냉동실이 고장났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경비는 스스로 온도가 내려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밀폐되어 있는 공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로 공기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정말로 그를 얼어죽게 하였고 질식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로 정신적인 세계가 무서운 것임을 이 사실로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사람은 이렇게 자포자기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주님께서 내셨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부모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고 하셨습니다. 망설이는 자에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7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고 하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섬기러 오셨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까지 주셨습니다. 저는 하도 못하는 집에서 살아서 조금 잘사는 집 사람의 아이들만 봐도 왜 그렇게 부러웠던지요. 옛날에 시골에서 잔칫집, 초상집, 제사지내는 집에서 어머니가 일하고 계시거나 아는 분이 있으면 떡을 하나 더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단한 권세입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이 없을 때 옆에서 떡 하나 더 가져가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있습니다. 세상에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무엇에도 낙심할 이유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미국 테네시 주 동쪽 작은 마을에, 벤 후퍼라는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다른 주위 친구들은 놀아주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들이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하고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2살 되었을 때, 교회 젊은 목사가 새로 부임해 왔습니다. 벤 후퍼는 새로온 목사님을 보고 싶어 교회에 갔습니다. 가끔 교회에 가도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축도가 마치기 전에 살짝 빠져나오고 했는데 이 날은 설교에 빠져서 그만 넋을 잃고 있다가 사람들과 함께 나오게 되었는데 벤 후퍼를 본적이 없는 목사는 “네가 누구의 아들이더라?”하고 말했습니다. 순간 주위의 분위기는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이상해졌습니다. 그리고 벤 후퍼는 도망가듯이 뛰어나갔습니다. 목사님은 그 때 “나는 네가 누군지 안다. 너는 네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어!” 주변 사람들은 더 얼굴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맞아 너는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었어!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라고 소리쳤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 답게 휼륭하게 살아야 되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 벤 후퍼는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재선되는 영애도 누렸습니다. 벤 후퍼는 말하기를 “내가 젊은 목사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던 그 날이 바로 테네시 주의 주지사가 태어난 날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러 왔다는 이 말씀을 전파하지 않으면 무엇을 전파합니까? 죄송합니다만 아줌마들이 모이면 전파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는 누구누구는 어땠드라 하면서 안 좋은 일들을 들추어 내어 전파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셨던 것은 그들을 통하여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께 이 말씀을 전파할 것을 받고 오신 분입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9) 그리고 이 명령을 실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마 4:23)했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마 10:27)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순종하여 우리도 예수님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