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34.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 / 본문 : 눅 12:49-50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49-50)

오늘 본문의 ‘불’이 어떤 불을 의미하느냐에 성경학자들은 오랜 토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본문의 불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정확하게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불은 심판하는 불과 성령의 불이 있는데 여기서 어느 것을 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주석서나 대개의 학자들은 ‘심판하는 불’ 쪽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이유는 오늘 본문 말씀 이후의 내용들이 심판하러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성령의 불’ 쪽에 무게를 두고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심판을 원하시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3:11에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세례요한이 증거 했는데 바로 예수님이 성령의 세례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제게 있어서도 이것은 고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중에 이 둘을 구분하려는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의 예수님 입장에서는 불이 붙지 않아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미 이 불은 붙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즉 성령의 불과 심판의 불이 모두 붙은 것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불붙은 것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어떤 불이 붙었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도 불붙은 것입니다. 이들에게 붙은 것은 심판의 불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영생으로 가는 사람들에게도 불은 붙어 있습니다. 이 불은 성령의 불입니다. 사탄에게는 심판의 불을 통해서 단죄해야 되고, 구원을 받게될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불이 붙어야 했던 것입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하신 것은 심판과 구원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심판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18절에 보면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따로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불과 함께 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51-54절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에 사마리아 동네로 통과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유대인과의 오랜 반목으로 인해 예수님이 이곳으로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54절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불을 명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믿고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직설적이고 감정적인 심판을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이 이 땅에 나타나실 때는 불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불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출 3:2). 이스라엘사람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 생활을 할 때로 하나님은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출 13:21-22 40:38).

제사를 받으신 증거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릴 때에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7-1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신 표시로 쪼갠 고기 사이로 불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모세가 제사를 드릴 때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레 9:24) 제사를 받으신 증거로 불이 그 제물들을 살랐습니다.

심판하시는 불
1) 잘못된 제사로 심판하셨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2) 의인이 없는 타락한 도시를 심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25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 19:24-25)
3) 영원한 형벌로 심판하십니다.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단 7:10)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10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9-10)
마지막 때의 심판에 대해서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에서 예언했으며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 동일하게 불로 심판하실 것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심판을 받습니까?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해 주신 것을 보면 열매 없는 나무(마3:10, 요15:6), 쭉정이(마3:12), 가라지들(마13:40)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포도나무 비유에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가지에 붙어만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을 심판하시는데도 사용하시지만 우리를 살리는 성령의 불로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실 때는 아직 불이 이 땅에 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선악간의 심판하시는 이 불을 붙이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 불을 붙이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불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붙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왜 그토록 답답해 하셨겠습니까? 바로 이 불을 속히 붙여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가나한 자와 함께 하시는 일도 중요한 것이겠으나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일과 비교한다면 이런 일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제일 큰 우선 순위가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율법사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과 한마디로 입씨름이나 하고 계실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현재의 상황을 생각하면 답답할 노릇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안타깝다’라고 해도 됩니다.
이 세상에 답답한 일은 많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동문서답할 때 답답함을 느낍니다. 바로 예수님 입장에서 지금 그런 상황입니다.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셔야 될 상황이 되어서 지신 것도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성경 원문의 ‘답답함’은 쉬네코(sunevcw)로 “괴롭히다, 곤경에 빠뜨리다, 강요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얼마나 더 괴롭히겠느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무지한 죄인들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음을 당하셨고 그 괴롭고 긴 터널과 같은 공생애를 마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눅 1:1)라고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누가가 이 글을 기록할 때도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뒤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미 이 불은 이 땅에 붙여졌다는 사실입니다.
미국해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함장은 피가 날 때까지 자기 혀를 깨문다” 한번도 배를 정박해 보지 못한 하급장교에게 배를 부두에 정박하라고 명령하고 기다릴 때 그것을 지켜보는 함장의 심정을 가리킨 말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이셨다면 그 혀가 잘라져 나갔을지도 모릅니다. 함장은 배를 대는 후배 장교를 보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믿고 계시는 것은 이보다 더하면 더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맙시다.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값아 드립시다.
나폴레옹 힐(Napoleon Hill)은 인간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한 권위자입니다. 그는 연구 결과를 「성공의 법칙」이라는 책으로 발표했습니다. 성공한 사람과 위대한 지도자들 500명을 연구한 것인데 성공한 사람에게는 일률적인 공통점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성공한 사람에게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자기가 꼭 이루기를 원하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자기의 목표를 향하여 무섭도록 놀라운 열정으로 앞으로 밀고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불붙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일에도 목표를 가지고 초지일관 밀고 나가는 사람은 성공한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겠지만 저도 성령을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불붙어 있는 생활을 합니다. 주님의 일을 생각하면 잠이 안 옵니다. 흥분이 됩니다. 가슴이 벅차 오르고 뿌듯함을 느낍니다. 살아있음에 감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한없는 찬양과 기쁨 그런 것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옵니다. 세상에 대한 원한도, 미련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주시는 은혜의 일과 기쁨만이 존재합니다. 우리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허황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는 자나깨나 “어떻게 선교할 것인가?”만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이 전도와 선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반드시 세계선교에 열심을 내어 놀라운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의 불이 붙어있습니까? 이 불이 붙어있다면 주님께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심판의 불이 아닌 구원의 불, 성령의 불이 붙어있기를 바랍니다.

일하러 오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3. 일하러 오신 예수님) / 본문 : 요 5:2-18

우리말에 “일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욕에 가까운 말로 사용됩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사용하는 말입니다. 상대하기 싫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전에 어렵게 살 때는 일만 시켜주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별 볼일 없는 놈” 이것도 욕입니다. 하는 일이 없어 빈둥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민족은 원래 일을 하기 싫은 민족이 아니라 일하고 살아온 민족입니다. 한국의 30-40대 남자가 전세계에서 제일 많은 노동을 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사람만큼 열심히 일하는 민족도 보기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일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그 지겨운 일에 대해서 왜 또 말씀하시나 그렇게도 생각하실 지 모릅니다.
보통 일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머리 속에 두 가지를 생각할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이 있고 하기 좋은 일이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두 가지 일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하기 싫은 일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힘든 일 입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대가로 주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3:16에서 여자는 “수고하여야 자식을 낳을 것이며” 17절에 남자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수고’는 히브리어 에쩨브(bx,[,)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즉 일을 할 때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인 것입니다. 힘든 일인 것입니다. 이 일은 죄의 대가입니다. 이러한 일을 우리는 노동이라고 말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노동의 시간을 우리에게 충분히 주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출 31:15)고 했습니다. 칠일 중에 하루는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불평하고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하루를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이 거꾸로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하실 뻔했습니까? ‘하루만 너희들을 위해서 쓰고 육일을 나에게 바쳐라’하셨다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시간을 가지고는 충분히 먹고 쓸 것을 벌지 못합니다’ 하고 오늘날로 말하면 데모라도 했을 것입니다. 십일조의 개념은 어떻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십의 일이 아니라 십의 구는 내 것이라고 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실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인데 십분의 일만 드리는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노동의 시간을 충분히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안식일은 단순히 일을 쉰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일, 죄의 대가로 주어진 노동의 시간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축복의 날이요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의 대가로 일이 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아담을 일하도록 임명하셨습니다(창 2:15). 이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수고하여, 고통스럽게 일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죄의 대가로 해야 하는 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고통이 없는 반면에 나를 위한 일에는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전혀 고통이 없습니까?’ 다시 묻는다면 ‘그렇습니다.’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 일에 싸움이 일어나고 시험이 드는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지 아니한 죄인들의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배경을 말씀드립니다.
요 5:2에서부터 보시면 예루살렘성전의 양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문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양과 염소 같은 동물을 들여보내는 문입니다. 바로 이문 옆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고 행각 다섯 채가 있었습니다. 이 연못에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이 파도가 치면서 움직이는데 그 때를 기다렸다가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러니 이 연못 주위에는 당연히 어떤 병자를 막론하고 많이 모여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물이 움직이는 것 같으면 재빨리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안타까운 병자 한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38년이나 병을 앓고있던 사람으로 연못의 물이 움직인다해도 일어날수가 없어서 연못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한눈에 이 사람의 처지를 알아보셨습니다. 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연못에 들어갈 필요도 없이 병이 나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나무일도 하지 않는 것으로 전통이 굳어져 내려와 일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아 질책하려고 찾았으나 예수께서는 그 자리를 슬쩍 피하셨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에 이 사람을 성전에서 다시 만나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대가로 주어진 고통스런 노동, 하기 싫은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 축복의 일을 기쁨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안식일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바보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는 날입니다.

우리말 가운데는 동사 어간에 ‘음’이 붙어 명사가 된 것이 많습니다. ‘얼음’은 ‘얼다’에서 나온 것이고 ‘사람’은 ‘살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면 ‘노름’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놀다’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어떻게 ‘노는 것’이 ‘놀음’(도박)이 되었습니까? 유교의 영향도 컸지만 그만큼 ‘노는 것’이 죄악시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놀아야 되는 것입니다. 솔직해 집시다. 놀기를 원하시죠? 자 보세요 대답을 쉽게 못하시잖아요. 우리는 일과 노는 것과 놀음에 대해서 구분이 잘 안되어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레저’란 말이 ‘일한다’는 것 못지 않게 중시되어 왔습니다. 건전한 오락은 일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죄악시하면서 음성적인 문화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노는 것이 ‘놀음’(도박)이 된 것이고 건전한 오락이 발전을 못했습니다. 서양의 레크리에이션이란 말은 노름이라는 말과는 정반대의 개념이 있습니다. 레크리에이션은 ‘재창조한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안식일에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레크리에이션 한다는 것과 무조건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하신 일은 ‘재창조’ 레크리에이션이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7-29)
하나님의 보내신 자,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그런데 28절의 ‘일’ 동사 에르가(e[rga)는 복수형으로 질문했고 예수님은 단수형 에르곤(e[rgon)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과 여러 율법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한가지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한가지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이곳에서 27절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의 ‘하라’는 일하라는 말씀으로 명령법, 현재형입니다. 지금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일을 영어의 액션으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즉 행동해야 됩니다. 믿음은 행함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본을 보이심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예수님은 마지막 이 땅에서의 40일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제자들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이 땅에 남아있는 하루라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지체하셨던 것입니다.
바울만큼 하나님의 일에 열심인 사도를 보기 어려운데 바울은 육체의 일도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살전 2:9)고 했습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일해야 합니다. 자신이 이렇게 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일할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기도 합니다.

죽은지 며칠 후 눈을 떠보니 그곳은 천국이었습니다. 한없이 넓고 푹신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편안한 자리에서 몇 칠을 쉬었습니다. 출근하라고 깨우는 아내도, 일을 재촉하는 상사도 없었습니다. 말만하면 무엇이든지 옆에 서 있던 하인이 가져다주었습니다. 부족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되풀이되자 그는 점점 싫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평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인을 불러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좀 달라!”고 하인에게 시켰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지금까지 거절한 적이 없는 하인이 그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곳에서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다 됩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당신이 직접 일을 하는 것만은 금지되어 있답니다.”
그러자 그는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옥이 낫겠지. 심심해서 어떻게 살란 말인가?”
하인은 그의 소리를 듣고 다시 놀라
“그럼 당신은 여기가 천국인 줄 아셨던가요? 여기가 바로 지옥이랍니다.”
이 유머는 미국의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0-12)

저는 가끔 꿈을 꿉니다. 직장에서 쫓겨나 무엇을 하고 살까 하면서 이리저리 노숙자가 되어 고민하는 나를 꿈속에서 봅니다. 그리고 아침에 깨어날 때 “아! 내가 실업자가 아니구나! 내게는 교회와 선교회의 일이 있지!”이렇게 현실로 돌아와서 감사를 드립니다.
어떤 분들은 일거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실업자가 많고 일자리가 적은 것 또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일자리가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일하기 싫은 것입니까? 일자리는 자기가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누가 시켜서만 일하는 사람은 얼마 못 갑니다. 스스로 하는 일이 즐겁고 계속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도 예전에 간판 집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장님이 월급을 얼마나 주면 되느냐고 물을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한 기억이 납니다. “제가 일한 만큼만 주세요?” 그리고 건물의 간판을 달 때 추운 겨울에도 다는데 지금처럼 사다리 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밧줄을 타고 건물 벽에 붙어서 일을 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은 공장 굴뚝에 피뢰침을 세우기 위해서 올라갔습니다. 그 굴뚝은 아파트 건물로 말하면 20층은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래까지 내릴 굵은 전기선을 어깨에 매고 올라갔습니다. 다 올라가서 하늘을 보니 구름이 왔다갔다하는데 어지러워서 한참을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솔직히 그 때 받은 월급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일한 만큼은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현재 여러분들의 일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더 좋은 길이 열립니다. 한번에 만족한 길은 없습니다. 그 길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 21:25)고 합니다.

처음에 선교회를 시작할 때 먹을 것이 있고 누가 도와주어서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한 달에 3만원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선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없는 것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힘들어서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후회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의 미래 우리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태국의 송.. 선교사님은 스스로 “주책 선교사”라고 말하십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선교사”라는 말입니다. 이 선교사님에게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분은 태국에서 여자의 몸으로 홀로 20여 년을 사역하셨기 때문에 이제 한국에 오시고 싶으실 것 같아 여쭤보았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한번은 옷가게를 들렸는데 몇 개의 옷을 보고 조금 비싼 것 같아 돌아서는데 뒤에서 “사지도 않을 거면서 만지작거리기는…”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가다 돈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아저씨 여기서 내려주세요?” 했더니 원래 가기로 한곳이 아니니 요금을 배로 달라고 하면서 계속 뭐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한국이 겁난다고 하셨습니다. 태국 사람은 우리보다 못살아도 순진하고 여유가 있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마지막 하신 말씀은 요 19:30에 “다 이루었다”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을 다 마치셨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이제 하실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과 뒷일은 하나님께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단순히 죄인의 신분으로 먹고살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신분은 더 이상 죄인의 신분이 아닙니다. 죄인에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고(노동)하여 먹고사는 것만이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은 예수그리스도의 일이요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재능대로 꼭 일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아 멘-

나의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2. 나의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 / 본문 : 롬 3:23-28, 요일 2:2

히틀러가 자국민을 선동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바로 유언비어 였다고 합니다. 유언비어는 똑같은 내용을 계속하는 것보다 조금씩 바꿔가며 유포시키면 폭발적인 효과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진실이 어떤 것인지 나중에는 혼돈이 일어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사단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이런 간교한 수작을 계속해서 벌입니다. 사단은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방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간절히 우리와 화목을 원하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십니다.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모세는 가시떨기 나무에 불붙은 것 같이 환한 광채가 나며 우뢰와 같은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모습을 산 아래에 있는 백성들도 목격했는데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연기를 보았습니다(출 20:24). 이 광경을 본 백성들은 멀리서 떨고 서 있었습니다.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곧 이어서 백성에게 화목제를 드리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하나님이 십계명을 왜 주셨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화목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레위기’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방법들이 나와있는데 화목제에 관한 것이 29번이나 나옵니다. 모든 제사보다도 중요한 것이 화목제라는 것입니다. 속죄제나 번제도 알고 보면 화목제사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잘못한 것을 속죄해야 화목이 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1천 번제를 드렸는데 그 제사도 화목제였습니다.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을 드렸으니 곧 여호와께 드린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이만이라”(왕상 8:63)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십계명을 지키고 화목제를 드려야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화목케하는 제사는 드렸지만 근본적으로 죄인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롬 3:23). 즉 의인이 되어야 하는데 구약의 화목제사로는 의인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합니다.
롬3: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자신처럼 깨끗한 사람은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는 법이 없어도 산다는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셜록 홈즈’라는 명탐정을 만들어낸 추리소설 작가 코난 도일은 유명한 장난꾼이었습니다. 한번은 자신의 친구 국회의원, 사업가, 변호사, 경찰 등에 똑 같은 내용으로 전보를 보내놓고 키득키득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웃고있는 남편에게 아내는 “이번에는 또 무슨 장난을 치시고 웃고 계신가요?” 물었습니다. “내 친구들이 정말 죄를 짓지 않고 사는지 시험 삼아 전보를 쳐 본 거요” 아내가 물었다. “뭐라고 전보를 쳤나요?” 코난 도일은 깔깔대며 대답했습니다. “간단한 내용이요. ‘당신의 죄가 탄로 났으니 빨리 몸을 숨기시오’ 라는 것이었소.” 그리고 전보를 받은 친구의 집을 차례차례 방문했는데 모두 집을 나가 소식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저주할 때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희망 없는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가 없었다면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 롬 3: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1천번제를 드리면서 소 이만 이천마리 양 십이만 마리를 드렸지만 의인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값 없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전혀 드려진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롬 3:25절은 함께 읽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하나님과 화목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소의 피로도 안됩니다. 양의 피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동물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대신하는 상징은 될 수 있지만 나는 아닙니다. 그리면 내 피로는 됩니까? 안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의 피로는 제사가 드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씻어주며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길을 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사람하고도 원수가 되거나 화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고 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많은 문제가 있고 시급한 것이 있지만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보다 급하고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이 모든 일에 급선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길고 긴 죄의 문제에 종지부를 찍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입장에서 답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흔히 정치를 할 때 한쪽에서 할 일을 다하고 상대편의 응답을 기다릴 때 ‘공은 넘어갔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문제 하나님은 하실 일을 다 하셨습니다. 공은 이제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주저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은 롬 5:10-11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고후 5:20절에서도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고 부탁합니다.

형제와 화목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형제와 화목하는 일도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일보다 더 선행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4)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화목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화목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금비유를 말씀하신 것도 화목 때문이었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하나같이 용서하고 산 사람은 모두가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요셉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지금도 용서하고 사는 사람은 모두가 축복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속어에도 ‘때린 놈은 오무리고 자도 맞은 사람은 다리 뻗고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잠언 17: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육선’은 진수성찬을 말하는 것인데 제사상의 음식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화목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모님도 형제들끼리 화목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가끔 장례식장에서 형제들끼리 재산 싸움하는 경우를 봅니다. 부모의 시신을 앞에 놓고도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고자 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잠언 15:17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요즘 보는 책 하나가 있는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라는 미국의 작은 고전으로 평가받는 책입니다. 저자인 포리스트 카터는 인디언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산에서 칠면조를 사냥했습니다. 너무 많이 잡아서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놓아주었습니다. 인디언은 자연에서 필요이상으로 가지지를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꿀벌인 티비들만 자기들이 쓸 것보다 더 많은 꿀을 저장해두지…
그러니 곰한테도 뺏기고 너구리한테도 뺏기고… 우리 체로키한테도 뺏기기도 하지.
그들은 언제나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쌓아두고 싶어하는 사람들하고 똑같아.
그러고도 또 남의 것 빼앗아오고 싶어하지. 그러니 전쟁이 일어나고… 조금이라도 자기 몫을 더 늘리려고 말이다.
그들은 자기가 먼저 깃발을 꽂았기 때문에 그럴 권리가 있다고 하지… 그러니 사람들은 그놈의 말과 깃발 때문에 서서히 죽어가는 셈이야… 하지만 그들도 자연의 이치를 바꿀 수 없어.”

욕심을 가지지 않으면 화목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화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오히려 또 하나의 축복을 받으려는 단순한 욕심이 아니시기를 바랍니다.

온 세상과 화목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하나님과 화목하고 형제와 화목 한다는 것은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보혈도 우리만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가끔 답답한 분들을 봅니다. 교회에 잘 다니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이웃과 나누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더 나아가 선교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말할 때 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받았고 권능을 제일 많이 받아서 하나님은 꼭 자신만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보혈이 나를 위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만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제일 위험한 신앙이 바로 이기적인 믿음입니다. 나만, 우리교회만 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나에게 계시는 주님은 여러분에게도 계십니다. 오늘 우리교회에 계신 주님은 중국의 용지교회와 아프리카의 김형주선교사님이 계시는 남아공의 잉까겡 잉카라펭(IKALAFENG)지역에 세워지는 교회와 흑인 성도님들에게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고 했습니다.

미항공우주국(NASA)의 연구에 따르면 동료가 화장실을 좀 오래 쓰거나 청소 상태가 좋지 않을 때 등 아주 사소한 일들이 우주비행사의 신경을 건드린다고 합니다. 기지국에서는 우주선 내에 갈등의 기미가 보이면, 일부러 선체 고장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고장난 부분을 수리하기 위해 협동하다 보면 모두가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우고 다투는 것도 비슷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사소한 문제들입니다.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하나의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일뿐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줄을 그어놓고 반목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자신의, 자국의 이익만을 챙기고자 할 때 전쟁이 일어납니다. 온 지구촌이 하나의 형제 자매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린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마18:18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아멘 레고 휘민(!Amh;n levgw uJmi’n)’으로 직역하면 “너희들에게 진리를 말한다”는 뜻입니다.
“매면”은 헬라어 ‘데오(devw)’로 실의 매듭을 말합니다. 사람사이에 꼬여있는 실의 매듭을 푸는 것을 말합니다.
풀다 ‘뤼오(luvw)’인데 ‘매면 매일 것이요와 풀면 풀리리라’의 문법이 같습니다. 앞에 나온 매면과 풀면은 모두 가정법, 부정과거 완료를 나타납니다. 그리고 뒤의 매일 것이요와 풀리리라는 현재완료형으로 과거에 있었던 일이 현재에 계속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 땅에서 묶고 푸는 것이 모두 하늘에서도 연장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하나님도 하늘에서 여러분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값 없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믿음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이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도 자랑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엡 2:8). – 아멘 -

나의 친구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1. 나의 친구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5:9-17

영국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상금을 내걸고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독자들에게 공모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천이나 되는 응모엽서 중 다음 것들이 선발되었습니다.
“기쁨은 곱해 주고 고통은 나눠 갖는 사람”
“우리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많은 동정이 쌓여서 옷을 입고 있는 것”
“언제나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고 절대로 멈추지 않은 시계” 하지만 1등은 다음의 글이었습니다. “친구란 온 세상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진정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저는 자신 있게 그분에게 “행복한 분입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세상 친구란 자신의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귈 때에 조건을 따져서 사귑니다. 학력, 나이, 지역, 수준 등을 봅니다. 여자들은 외모도 중시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조금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분은 조금 잘 생긴 친구를 사귀어 자신의 품격을 조금 끌어올리는데 필요한 친구로 생각한답니다. 그리고 반대로 조금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분은 조금 못생긴 분을 친구로 사귄다고 합니다. 그래서 함께 다니면서 그 친구보다 자신이 조금 잘 생긴 것을 뽑낸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친구 고르는 방법에 대해서 나온 것이 있습니다. “아내를 선택할 때는 한 계단 낮추어 선택하고 친구를 고를 때는 한 계단 올려 선택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이 말이 수긍이 가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탈무드의 이 이야기를 지키셨다면 우리는 절대로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혹 여러분은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친구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탈무드에는 “애매한 친구보다는 차라리 분명한 적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대하기 힘든 것이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친구입니다. 진정한 친구인가 아니면 적인가를 도무지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은 상대하기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작고한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가 어느 핸가 케네디 대통령의 조찬 초대를 수락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조반 한끼 먹으러 멀리 워싱턴까지 갈 마음이 없어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런 초대라면 대개는 병상에 누운 아내를 두고라도 달려가리라고 짐작합니다.
개인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닌 이상.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초대는커녕 오지 말라고 하여도 찾아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늘어서기 때문에 비서들은 골치를 앓습니다. 사실 좀 창피한 일이지만 목사님들 가운데도 자기의 권위를 위해 대통령이나 시장을 한번 만나기 애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좋은 친구가 있다고 고백하는 분은 정말 행복한 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를 소개해 드립니다. 타이완 기독교가 2000년대 표어로 내걸은 것이 “제일 좋은 친구 예수” 또는 “최고의 친구 예수”였습니다. 우리의 제일 좋은 친구는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친구는 솔직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친구는 친구를 가졌고, 그 친구도 다른 친구가 있으며, 그 친구의 친구도 다른 친구가 있다. 그러므로 당신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하라. 자기가 들은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은 대단히 참기 어렵다. 성경의 잠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자는 가까운 친구를 잃는다.’ 비밀은 꼭 지켜야 한다. 당신의 입은 금고이다. 금고는 쉽게 자주 열면 안 된다. 입을 금고에 비유라면, 열릴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금고일수록 정교하고 좋은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좋지 않은 친구의 이야기를 남에게 전달하는 속된말로 입싼 친구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이 진짜 친구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무엇을 보면 압니까? 말(언어)입니다. 잘 되는 집, 잘 되는 나라는 말하는 것 보면 다릅니다. 요즘 한국 정치권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아이들이 배울까 두렵습니다. 일반적으로도 우리는 ‘제일’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또한 ‘화끈하게’라는 말도 많이 사용합니다. 다짐을 할 때는 더 무섭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라는 말과 ‘나라가 반쪽이 나도’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반쪽이 되어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표현들은 창의성을 무시하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다짐을 잘 합니다. 그래서 양의와 한의가 다릅니다. 양의는 “약을 싸봐야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의는 “한 첩이면 끝납니다.”라는 말로 단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TV에 보니 홈쇼핑 채널의 PD와 몇 사람이 고발을 당하고 쫓겨났습니다. 건강약품을 소개하는데 바르기만 하면 채 지방이 빠져 살을 쉽게 뺀다는 광고였습니다. 저도 그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만 연애 인들이 나와서 홍보를 하니 그 말을 쉽게 믿는 것이지요. 우리 나라 사람 참 순진한데 가 많습니다. 솔직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친구 될 수 없습니다.
북한에서 탈북한 사람들 남한에 잘 정착하기 위해서 교육하는데 제일 창피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TV광고도 홍보책자도 그리고 쉽게 친구인척하고 접근하는 사람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었다가는 하루아침에 정착금 다 날리고 노숙자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들이 말하기를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고 삽니까?”라고 말할 때 할말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우리에게 이런 세상의적인 친구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15절 하반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밀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친구로서 모든 이야기를 전해주신 것입니다. 제일 좋은 친구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권세를 친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그의 친구 모두에게 동등하게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도장이나 신분증조차도 남에게 맡기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권세를 마음대로 이용하여 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단을 쫓을 때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대통령이름 잘못사용하면 붙잡혀 갑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 이름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 거룩하신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사랑입니까? 이 세상에 주님보다 더 귀한 친구는 없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그 귀한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는, 그 이름을 빛내는 예수의 친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친구는 목숨을 내어줍니다.

한 소년이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시골에 다니러 왔습니다.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며 뛰어 놀던 그 소년은 어느 날 호수에서 헤엄을 치다가 발에 쥐가 나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있는 힘을 다해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침 그 호수를 지나던 한 농부의 아들이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헤엄을 아주 잘하는 편은 못 되어서 그를 구해낼 수가 없었지만 자기라도 구하지 않으면 물에 빠진 소년이 영락없이 죽게 되니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고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는 소년을 구해냈습니다. 그 후 그들의 우정은 깊어갔습니다. 방학 때만 되면 도시 소년은 늘 시골에 와 그 친구와 사귀었습니다. 어느 날 시골에 놀러온 소년이 생명의 은인에게 장래의 희망을 물었습니다.
“학교 졸업하고 무얼 할 생각이니?”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의학을 공부해서 의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집안사정을 뻔히 아니 가망 없는 꿈이 되고 말 것 같아.“ 그러자 친구는
“내가 우리 부모님과 상의해 볼게. 부모님도 승낙하실 거야” 시골 소년은 도시 소년의 도움으로 의학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골 소년은 바로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으로 1945년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플레밍이 구해 주었던 도시 소년도 크게 장성하여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만 폐렴으로 쓰러져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습니다. 페니실린은 폐렴의 특효약이었습니다. 결국 플레밍은 그 소년을 두 번 살린 셈이 되었습니다.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우리에게 당부하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십니다. 제가 예수님에 대해서만 주일 낮 예배에 설교하는데 예수님에 대해서만 설교한다는 것은 곧 사랑에 대해서만 설교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 누가 이토록 사랑에 대해서 강조하시고 몸소 실천한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만들기 위해 조금도 우리의 자존심을 꺽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구제불능’이라든지 ‘너는 왜 그 모양이니’라든지 ‘누굴 닮아서 그러니’라는 말은 사용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나의 자랑스런 나의 친구야’, ‘네가 있어서 행복하다’라는 말을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강한 부정의 내용도 긍정문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마 19:24절의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입니다. 우리가 하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려우니라”로 되었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국어 선생님이 한문도 함께 가리키고 있었는데 창문너머로 첫 눈이 오는 것입니다. 여 선생님은 모른 척 하고 계속해서 “공부해야지” 하면서 책을 폈습니다. 속으로는 아마 이 선생님도 공부는 그만하고 밖에 나가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자 문학적 소질이 있는 한 학생이 “선생님 첫 눈에 반했어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학생이 저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학생들은 모두 밖을 쳐다보았습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면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가슴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차갑습니다. 정이 없고 무서운 사람을 냉혈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작은 말 한마디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 “무례(無禮)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했는데 사랑은 예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의가 없는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합니다. 사랑은 작은 말 한마디 예의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랑’ 그것은 작은 불씨 같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친구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사랑을 하게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단 사랑의 불씨가 붙으면 막을 수는 없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계명을 지켜야 친구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구가 되는 조건을 하나 말씀하셨습니다 14절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12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7절에 “내가 이것을 명함은 너희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친구가 되는 조건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머리로만 믿고 머리로만 은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온 몸으로, 생활로 드려야 합니다. “행하면”은 원어로는 “계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지속적으로 행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주안디옥교회(이동휘목사)가 저희 KCM을 후원합니다. 이 교회의 작년 선교비 총 지출액이 30억이 넘었습니다. 성도는 3000여명입니다. 계산을 해보니 성도 한 분이 1년에 1백 만원의 선교헌금을 한 샘입니다. 그리고 ‘좀도리’운동이라고 저금통을 모았다 헌금하는 것인데 작년이 이것만 1천 만원이 넘게 드렸습니다. 한마디로 성도들의 가정의 저금통까지 싹쓸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누구를 주겠습니까?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의 책에 보면 20명은 영양실조이고 그 중에 한 명은 죽는데 15명은 비만입니다. 여러분들은 가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집안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안에 드는 사람입니다.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100명중 7명안에 드는 부자입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가지고 있으면 100명중 2명에 드는 겁니다.
우리돈 2만원 정도면 5-6명의 한 가정을 한달 간 먹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팔리지 않아 버리는 음식만 모아도 현재 구호하는 전세계식량의 70%가 됩니다. 아마 한국과 일본 것만 모아도 세계의 굶어죽는 어린이는 먹여 살릴지 모릅니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28명씩 태어나고 10명이 죽습니다. 그 중 3명은 굶어죽고, 1명은 암으로 죽습니다. 2명은 첫돌이 되기 전에 죽습니다.
그리고 100명중 14명은 글을 읽지 못합니다. 정신호 선교사님이 우르드어로 성경을 녹음하고 있습니다. 우르드어는 5800만 명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그리고 서 펀잡어는 300만 명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이들 중에 글을 아는 아들은 10명중 2-3명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들려주려고 녹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개척한지 원년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해외선교비로는 월 15만원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KCM의 사무실을 운영해 가니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우리가 10여명이니까 안디옥교회 수준으로 하면 1천 만원을 선교비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월 100만원은 선교비로 지출해야 합니다. 일단 제가 기본적인 운영이 될 동안 사례비를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먼저 선교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한번 해봅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실천입니다. 내 것을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랑이요 선교입니다.

나의 여호와의 팔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0. 나의 여호와의 팔이신 예수님) / 본문 : 사53:1-3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1-3)

예전에 친구에게 전도를 하는데 ‘차라리 내 팔뚝을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 네 팔뚝 굵어’ 그러고 싶었지만 참았던 일이 있습니다. 이 친구는 자기 팔의 힘이 굉장히 센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팔로 얼마나 들어올릴 것 같습니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도선수로는 터키의 술레이마놀루를 꼽는데, 그는 남자 62㎏급에 출전하여 1988, 1992, 1996년 올림픽 역도부문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무게의 3배가 넘는 바벨을 들어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가 들어올린 것은 인상(138kg)과 용상(167.5kg), 합계(305kg)였습니다. 한마디로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람들은 힘의 상징을 팔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유적인 표현으로 ‘팔’(제로아)로 당신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팔은 능력,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팔은 어깨로부터 손까지를 말합니다. 때로는 이 단어가 ‘어깨’ 또는 ‘손’이라고도 나타납니다. 은유적인 표현으로 힘깨나 쓰는 청년들을 ‘어깨’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자식이 많아 부양할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어깨가 무겁다’는 말도 합니다. 저도 가정적으로는 자식이 없으니 어깨가 무겁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교회와 선교회를 생각하면 어깨가 무겁습니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가진 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또한 이 단어가 복수로 사용될 때는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세력들을 말합니다(단 11:15, 22, 31). 그래서 ‘팔을 부러뜨린다’는 것은 적의 힘, 능력을 저지하거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삼상 2:31, 욥 22:9, 38:15, 시10:15, 37:17, 렘48:25, 겔30:21-22).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팔
이 말이 은유적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17:8-16절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 때 아말렉과의 싸움이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명령을 따라 싸움에 나갔습니다. 싸우는 자는 여호수아와 뽑힌 자들이었지만 뒤에서 11절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기고,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아니한지라”(출 17:12)
하나님은 모세의 손과 함께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곳에 단을 쌓고 이곳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했습니다. ‘닛시’는 정확히 말하면 ‘나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누구의 힘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신 4:34)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 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신 것을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신 26:8)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팔이었습니다.

기억해야할 여호와의 팔,
1) 종 되었던 우리를 인도해 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신 5:15)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배은망덕(背恩忘德)’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고 배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인도해낸 것을 배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종 되었던 우리를 예수님의 힘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이적과 기사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그와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행하실 것이요”(신 7:19) ‘그와 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예전에 한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기억해야 합니다. 보지 못했어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징계와 그 위엄과 그 강한 손과 펴신 팔과”(신 11:2)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고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 있었던 사실들을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그것을 믿습니다. 바람과 전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전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등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전기가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의 팔로 나타내신 능력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었노라”(신 9:29)
우리는 얼마나 기억합니까?
왜 성경을 매일 보고 주님을 앙모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이적과 기적들을 보고 기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힘과 주님의 힘을 기억하여 그분이 곧 우리의 능력이라는 것을 믿기 위해서입니다.
물고기의 지능은 0.4밖에 되지 않고 기억은 3초밖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과 수초 전에 물고 혼났던 미끼를 또 다시 물어 낚시에 걸린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의 결국은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했습니다.

구원하시는 팔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 {셀라}”(시 77:15)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으시니이다”(시 89:1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 33:2)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사 40:10)라고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언하며 구원하실 주님의 팔을 그리워하며 찬양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들은 요한복음 12장 38절에서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기록함으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여호와의 팔로 나타나신 이는 예수그리스도이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능력을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셨습니다. 저주하시는데 이 능력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는데 사용하셨습니다.

한때 세기의 방랑자였던 존 뉴턴 목사님이 계십니다. 전직이 노예선의 선장으로 노예를 사고 파는 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회개하여 주께로 돌아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장차 저 천국에 가면 놀랄 일이 3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천국에 가면 그곳에 꼭 와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던 사람이 그곳에 와있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은 교회에서 헌금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도 오래 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천국 갈 것이다 생각했는데 천국에 와 있지 않을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놀랄 사건은, 세상에서 결코 그곳에 와있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천국에 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 할 것이라는 겁니다.
아마 천국에 가면 지존파를 보고 우리가 놀랄 것입니다. 인간의 인육을 먹었던 지존파 그들이 감옥에서 회개하고 예수 믿었거든요. 지존파 중에 한 명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따뜻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면 나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을…” 그들은 어릴 때부터 가정의 소중함을 모르고 자랐어요. 행복한 가정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체험한 적이 없습니다. “나도 어릴 때부터 따뜻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을…” 그리고 한마디 더 했습니다. “내가 진작에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을…”
세 번째로 놀랄 것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놀라운 사실은 나 같은 죄인이 그곳에 와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악한 죄인이고 나는 아닌 것 같이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주병 걸린 사람처럼 말입니다.
존 뉴턴 목사님은 이 고백으로 회개의 간증찬송이라고 할 수 있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라는(405장) 곡과 ‘시온 성과 같은 교회’(245장)를 썼습니다.

바울도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했습니다. 진짜 죄인은 바로 나입니다. 나를 위해 주님은 구원하시는 능력의 팔로 오셨습니다.

주의 영원하신 팔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시 37:17) 했습니다.
악인의 팔이 부러진다는 것은 그들의 행사가 끝나는 것을 말합니다. 악인은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망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다릅니다. 그 팔을 여호와께서 붙드십니다. 그분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 가산을 지킬 수 없습니다. 혹 지키는 것 같으나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신 33:27)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부르짖고 깨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깨우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무시기 때문에 깨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들의 잘못으로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이며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사 51:9)라고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도 다시 한번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역대 국회 중에서 제일 많은 국회의원들이 구속 수감되는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분들만 잘못한 것이 아닌지 모릅니다. 이 나라에서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정치적 관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분들은 억울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속담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흑 탕 물을 일으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이 뜻은 한 사람의 잘못을 질책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미꾸라지가 흑 탕 물을 일으키려 해도 일어나지 않는 깨끗한 물이면 됩니다.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마십시다.
예수님에게는 얼마나 많은 미꾸라지가 있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바리새인, 서기관 등)이 미꾸라지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서는 결코 흑 탕 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처음부터 잘못,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교회나 우리 자신도 흑 탕 물의 빌미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내 자신, 내 교회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주님이 원치 않으십니다. 설령 이적과 기적을 체험했다해도 주님의 일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큰 화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과 이적을 보고도 기억치 않고 잊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나무 도마와 플라스틱 도마에 살로넬라, 리스테리아 등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를 뿌리고 하룻밤 뒤 관찰을 하자 플라스틱 도마 위의 박테리아는 여러 배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무 도마에서는 박테리아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나무는 수억 년 동안 박테리아와 싸워온 결과 죽은 뒤에도 미생물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나무는 죽어서도 자기를 지킵니다.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면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교회를 주님의 팔이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정을 주님의 팔이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고 있는지를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잘못이 있었다면 계속해서 고쳐 나갑시다. 그리고 새로워집시다. 우리는 개혁교회입니다. 고치는 것을 변화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 때까지 지속적인 개혁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마음을 비우면 됩니다. 욕심을 버리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 우리의 팔이신 주님처럼 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여호와 팔이, 주님의 팔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