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독생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8. 하나님의 아들(독생자)이신 예수님 / 본문 요 1:14-18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4-18)

성경을 한마디로 어떤 책이냐고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또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었기에, 그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산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말씀 중에서도 그 핵심인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하고자 합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제가 왜 증거 합니까?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믿지 않는다면 저의 말씀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잘 몰라도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은 꼭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저는 앞으로도 이 설교를 자주 할겁니다. 그때마다 “목사님 한 말씀을 또 하시네” 그러지 마십시오. 또 하는 것이 아니라 늘 해야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침 먹었다고 점심 안 먹습니까? 어제 밥 먹었다고 오늘 안 먹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증거 해야할 것,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이신 성부와 성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고 구약성경 미가가 예언했습니다. 때가 되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지만 그분은 원래 태초부터 계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자신의 복음서의 시작을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제일 많이 사용된(2700번 이상) ‘엘로힘’은 복수 대명사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묘사하는 동사로도 사용됩니다. 마치 한 사람 이상이 일하는 것과 같은 기묘한 동사로 사용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개인, 다수 어느 편이건 이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말하는 유일신 하나님은 한 인간의 능력을 완전히 능가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문 하나가 요 17:21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믿게 하시려는 이유가 요 3:16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멸망치 않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영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면 믿지 않으셔도 관계없습니다. 그러나 멸망하는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하시기를 원하신다면 반드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증거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요 8:18)고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혼자서 말씀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친히 증거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두 번의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났음을 증거 합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2)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성경의 사건들을 너무 의미 없이 그저 소설을 보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현상이 더 두드러집니다. SF영화 같은 것이 많아 성경을 볼 때도 무의식중에 그런 것처럼 취급합니다. 또한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의 많은 내용들은 현실이 아닌 것입니다. KCM에서 만드는 전돌이의 성경여행이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만들면서도 걱정되는 것이 혹 어린이들이 다른 SF애니메이션이나 동화 이야기 정도로 생각할까 걱정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것은 SF영화가 아닙니다.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의 사람들과 제자들은 모두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거짓이었다면 당시에 그것을 본 목격자들이 살아있을 때인데 마태나 다른 제자들이 거짓으로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거짓이었다면 오늘날까지 성경으로 내려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본문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원문으로는 [결코 보여주신 적이 없는 하나님]입니다. 물론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시내 산에서 대면했습니다(출 33:11, 신 34:10) 하지만 하나님의 본체를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출 33:17, 34:9). 유한하고 죄인인 사람이 하나님을 보면 죽습니다(출 33:20).
그러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품속에서 오셨습니다.

제가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 책인데 요즘 다시 읽고있습니다. 미국에서 작은 고전으로 평가받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입니다. 인디언의 산속 생활에 대해서 할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저자(포리스트 카터:Forrest Carter)가 쓴 것입니다.
내용 중에 ‘빨간여우 슬리크’가 나옵니다. 여우는 잔꾀를 부리지만 인디언인 할아버지는 여우의 모든 것을 알고있습니다. 여우는 자기 집에서 1.5km을 벗어나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사냥개가 따라오면 자기 집을 가운데 두고 원을 그리며 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을 점점 줄여가며 자기 집에 다가갑니다. 이 사실을 알고있는 인디언 할아버지는 여우 집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우는 진흙땅에 발자국을 남겨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도 하며 혼자서 잔꾀를 부립니다. 한번은 나무 뒤로 여우가 숨더니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여러 마리인 것처럼 속이고 갑자기 통나무 뒤에서 튀어 나와 저쪽으로 쭉 달아나더라는 것입니다. 사냥개들은 속아서 그쪽으로 쭉 딸아 갔지만 여우는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통나무에서 쿨쿨 코를 골며 자고있는 여우를 발견했습니다. 이 여우는 인디언 할아버지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믿든 안 믿든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고백
초자연적인 현상도 있었지만 제일 가까이 에서 예수님과 함께 동고 동락 했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두 제자는 우리에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내가 직접 보지 못했다고 믿지 않으려고 한다면 예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기록들은 하나도 믿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있었고 세종대왕이 있었고 징기즈칸도 있었다고 믿는 다면, 먼저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해야 구원받습니다.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이 말씀은 예수님의 단순한 경고가 아닙니다. 구원의 길의 열쇠를 바로 ‘믿음’이라는 것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공부해서, 도 닦아서, 아니면 운동경기해서 천국에 간다면 저 같은 사람은 큰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래서 오늘본문에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은혜와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를 비교하여 (에겐토) “왔다”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한정적으로 주어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은혜는 율법의 모든 부족한 영역을 완성하는 마침이 되는 것입니다.
16절의 “은혜 위에 은혜러라”의 ‘…위에’로 사용된 (안티)는 “때문에, 그래서”로 사용되는 전치사인데 여기서는 ‘은혜에 응답하는 은혜’라는 뜻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요구를 계속해서 채워주는 한없는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고후 6:2, 7:9).
뿐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을 가지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이것이 실감이 안 나시는 분들이 있나본데, 한치 앞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의 명예와 물질이 부족하다고 혹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은 포기하고 그것을 쫓으시겠습니까? 그런 어리석은 분들이 우리 주앙교회에는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을 그냥 주십니다. 요 근처 마트에 보니까 무슨 세일을 그렇게 자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일 싸게 파는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하면 밤 10시 넘어서 싸게 파는 물건이 많이 있습니다. 하루를 넘기면 상하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려고 열심인 아줌마들이 싸게 팔 것 같은 곳에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주 그냥 주는 것 아닙니다. 조금 싸게 팔 뿐입니다.
그런데 구원받는 것은 돈이 안 들어갑니다. 믿기만 하시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그 고생을 하신 것은 순전히 나를 위한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주님께 돌아올 때 주님은 온 천하를 얻으신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가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잔뜩 선물을 준비하셔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가나안 땅은 천국으로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에 못 들어간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출애굽기 20:12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1931년, 85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한평생 천 가지 이상의 훌륭한 물건을 발명한 발명왕이 아닙니까? 그에게 기자들이 말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노인이 되어서도 정열적으로 일 하실 수 있는 겁니까?” 그 노인이 대답합니다. “믿음입니다. 영원에 대한 믿음이 저로 하여금 이렇게 현재의 삶을 더 충실하고 만족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는 믿고 있습니다. 죽음은 현재에서의 출구요, 영원으로 향한 입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이에게 상주실 것을 믿어야 할 지니라”(히 11;5) 이 모든 축복을 받으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7.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 / 본문 :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오늘 본문 말씀인 창세기 3장 15절을 가리켜 흔히 원시복음 또는 최초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지금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범죄를 한 직후에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고 있는데 하나님은 하와에게 해산하는 고통을 말씀하시기 전에 오늘 말씀을 주셨어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인간에게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을 언급하신 것이기 때문에 최초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수많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의 말씀 중에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5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히 10:5-7)고 하셨습니다. “두루마리 책”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 창 3:15로부터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모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성육신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한 절은 없었으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3장 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사단은 여자를 먼저 꾀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가 꾀었습니다. 남자 분들 지금도 여자가 남자를 꼬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여자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남자도 죄를 피할 수는 없게 되었고 또한 그 책임이 하와와 같으나 분명한 것은 여자를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자가 최초의 범법자이기도 하지만 그를 통해서 죄가 사해질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4)이라고 하셨습니다. 동정녀 여자를 통해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여인의 몸을 통해서 나셨지만 하나님이 직접 잉태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요즈음은 생명공학이 발전하여 DNA만 가지고도 사람을 복제할 수 있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사람이 씨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몸을 빌릴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는 상태의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의 아들이 동시에 되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고난 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사단에 의해서 고난받을 것을 예언해 주신 것입니다. 원문의 “발꿈치, 아케브(bqe[)”는 “끝 부분, 후미, 마지막의”의 뜻으로 사단에게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와 비교한다면 상처를 받기는 하지만 치명적이지 않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시련이 지속될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마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인성을 상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 됩니다. 사단은 광야에서 시험할 때부터 바로 예수님의 인성을 파고들은 것입니다. 즉 인간으로 오신 육체의 약점을 노리고 시험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러한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신체를 상하게 하셨으나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신 결과였지 사단의 시험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실제로 예수님의 발꿈치가 손상을 입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예수님의 육체(인성)을 상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것이었습니다.

셋째, 사단을 이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은 일시적으로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반대로 사단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머리, 로쉬(varo)”는 신체상의 머리도 의미하지만 “시작, 높은, 통치자”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특히 뱀은 머리 빼면 없습니다. 나머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뱀의 머리를 짓이긴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사단을 멸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이며 동시에 그의 피를 이어받은 그리스도인들을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와 성도들을 신부로 말합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롬 16:20)
사단은 우리도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단에게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일으킴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으로부터의 승리도 우리 것입니다. 사단은 다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단에게 질질 끌려 다니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단은 이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는 것만 남겨두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께는 12제자 말고 70인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전하고 돌아와서 주님께 한 말이 있습니다. 눅가복음 10:17입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고 하셨습니다.
사단을 이기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사단은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전달되지 않은 곳은 사단이 판을 칩니다.
저도 이제 상당히 무감각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처음에 선교지를 방문해 보았을 때는 정말 정신이 들었습니다. 태국에 간 일이 있습니다. 길거리마다 집안에 우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다 치워버리고 싶었습니다. 타이완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우상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어디 그 두 나라뿐이겠습니까?
애굽은 한 시대와 그 주변에서 그 힘을 크게 과시하시는 맹주였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제일 가는 군림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19장에 보면 그들의 지혜는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하는 자에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과 애굽은 쇠퇴하다가 결국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의 멸망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어 왕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영광과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신으로 에언도 하였습니다.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물론 그의 자녀들과 후손까지 나아가 나라까지 전쟁에 패배라는 치명적인 오명을 남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대상10:13에서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신접한 여자를 찾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패망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처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성전도 건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년에 가서 그의 여인들로 인하여 우상을 숭배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듭되는 경고를 듣지 않는 성도가 되므로 인하여 그의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왕상11:4-5).

여러분! 복음만이 이 우상을 치워버릴 수 있습니다.
제가 우상을 파괴하려고 생각한 것처럼 실제 우리 나라에서도 우상을 파괴하다 경찰서에 넘겨진 목사님도 있었습니다. 물론 보이는 우상을 부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 마음이 안 일어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 우상을 없애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제 사단은 힘을 잃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주님은 지금도 “사단이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기쁜 일을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그저 우리교회가 이 지역에서 조금 부흥이나 해보려고 선교하자는 것 아닙니다. 또한 교회의 돌파구가 없어서 선교를 부르짖는 것도 아닙니다. 선교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사단을 소멸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취소된 것은 아닙니다.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이 제대로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조금만 힘을 내 봅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다만 우리의 순종을 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선교하려고 나설 때 성령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결국은 그분이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누님 집에 다녀왔습니다. 매형이 이제 시골집에서 소나 키우면서 살겠다고 시골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진돗개라고 누가 갖다 줘서 키우는데 개를 끌고 산책을 나갔다 개가 나무에 끈이 말려 그것을 풀어주려고 하다가 개에게 물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3주 동안을 고생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양은 어떤지 아십니까? 우리 나라는 양을 많이 키우지 않아 털깍는 기술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여름을 지내야 하니까 양의 털을 깎으려고 어떤 분이 기계가 없어서 가위로 깎았다는 겁니다. “깎는데 이걸 붙여 깎다 보면 살을 잘라 내는 거예요. 안 그러려고 해도 잘리는 거예요. 그래도 양은 깜짝 깜짝 놀라면서도 그냥 누워 있어요. 끝까지 누워 있어요.” 개 아니라 다른 동물도 자기 살을 찝히면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양은 가만히 있더라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은 바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도 못 박히면 아픕니다. 예수님은 이 양처럼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을 기억하시면서 복음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으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6. 아름다운 옷을 입으신 예수님) / 본문 : 슥 3:1-5

“1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슥 3:1-5)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있을 일을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이며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520년 전에 스가랴를 통해서 미래에 있을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스가랴가 이 말을 할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힘겨운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직후여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성전건축이 힘겹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거기다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여 중단되었던 것을 다시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백성들이 쉽게 따라주지 않자 스가랴가 백성들을 독려하려고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스가랴를 통해서 560여 년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예언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스가랴가 본 네 번째 환상 부분입니다.
본문 말씀은 사단이 여호수아를 고소하고 이에 대해서 여호와의 사자가 변호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제사장 여호수아로 나타난 분은 대제사장직을 담당한 분으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의 ‘여호수아’는 헬라어 발음 ‘예수’라는 말과 같은 말이며 구원자를 뜻합니다. 즉 오늘 본문 말씀은 오실 메시야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한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3, 4절에서 옷에 대해서 나옵니다. 오늘 이 옷에 대해서 이해하면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됩니다.
우리는 흔히 “옷이 날개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사람은 옷 입은 것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37:23-24에 보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꿈꾼 것을 말하자 시기하여 채색 옷을 벗기고 죽이려고 구덩이에 집어넣은 것이 나옵니다. 이 때 요셉의 옷이 벗겨진 것입니다. 즉 그가 입었던 채색 옷은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조선시대 때의 양반 집 자식들은 색동옷을 입었습니다. 한국속담에 “옷은 시집 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자가 제일 옷을 잘 입었을 때는 시집올 때라는 말입니다. 영국속담에는 “신사를 만드는 것은 옷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내지만 결코 교만하면 안됩니다.

옛날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그의 보좌 옆에 작은 궤 하나를 놓아두고 날마다 한번씩 그 궤를 열어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왕이 그 궤 속에 보화를 감추어두고 날마다 그 보화를 확인하느라고 궤를 열어본다는 소문을 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왕은 신하들을 불러다 놓고 그 궤를 열어 보여주었습니다. 그 속에는 양치기의 옷 한 벌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전에 가난한 양치기였었습니다. 왕이 된 다음에도 교만해 지지 않으려고 목동시절에 입었던 옷을 매일 한번씩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매일 과거에 입었던 양치기 옷을 매일 한번 씩 보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9장에는 제사장의 옷에 대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제사장의 옷을 어떻게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옷을 입은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사하는 예식을 행할 때 입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레 10: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제사장의 옷을 찢는다는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되는 금지령이었습니다. 만일 찢는다면 당연히 그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옷은 깨끗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출 19:10)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옷을 빨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 가운데 시내산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구름과 빛을 본 그 날이 성결하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의 옷을 빨 것을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레위기 14, 15장에 보면 하나님은 각종 질병과 관련하여 옷을 빨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즉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면 각종 전염병에서 깨끗케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민족과 유대인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유리 민족은 수시로 옷을 빨고 정결한 상태를 유지해 왔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전염병의 발병원인을 보면 한마디로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집 입구에 언제나 씻을 수 있는 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씻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기 전에도 반드시 손을 씻습니다.
여러분 음식을 먹다가 흘리면 어떻게 합니까? 밥 먹을 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잘 흘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너는 턱이 빠졌냐?”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잘 넘어지기도 하지만 잘 흘리기도 하고 한마디로 집사람 표현대로 부실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잘 압니다. 음식을 먹다 흘려서 옷을 더럽혀도 깨끗하게 씻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의 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씻어야하지 않습니까? 음식물이 조금 옷에 묻어도 깨끗하게 씻는 우리들이 어찌 더러운 죄를 씻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저희 누님은 초등학교 6학년 개근했습니다. 저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저는 팔이 삐어 수시로 학교를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누님이 한번은 신발주머니에 흑이 묻었다고 버리고 온 것이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1-2학년쯤 되었을 때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일로 어머니는 몹시 화를 내시고 당장 신발주머니를 찾아오라고 호통을 치셔서 누님은 울면서 학교로 신발주머니 찾으러갔습니다. 초등학생의 생각으론 신발주머니에 흙이 묻었으니 더럽다고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레위지파가 입고있는 제사장 옷이나 유다지파가 입고있는 갑옷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신분에 맞는 옷입니다. 문제는 신분의 의미보다는 우리 옷이 깨끗해야 합니다. 국회의원 옷 입고 더러운 것보다는, 사장 옷 입고 더러운 것보다는, 교회의 각종직분의 옷 입고 더러운 것보다는 그 옷을 입지 않고 깨끗한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제사장의 옷을 찢거나 더럽히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입은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더렵혀져 있다면 빨리 씻어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자였는데 사람들이 보지 않는데서 온갖 나쁜 일을 일삼고 다니는 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에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독실한 신자 행세를 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그 두 형제의 거짓된 마음을 꿰뚫어보았습니다. 또한 말씀을 아주 훌륭하게 전하셔서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새 예배당을 짓기 위해 헌금을 모금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형이 죽었습니다. 동생은 장례식 전날 목사님을 찾아와 새 건물을 짓는데 충분한 액수의 수표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목사님,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장례식 때 제 형이 훌륭한 성도였다고 이야기해주십시오.”
목사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수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장례식에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를 속이고 가족들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하지만 잠시 후 목사님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 동생에 비하면 훌륭한 성도였습니다“

여러분! 혹시 내가 이러한 거짓 성도의 옷을 입었다면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혹 사람들과 목사는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주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
본문 3절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옷’은 수치와 비난 거리가 되는 심각한 죄인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사 64:6)라고 했습니다. 죄로 가득한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히브리어 ‘더러운’의 초임(!yai/x)은 가장 간악하고 혐오스러운 성격의 더러움을 말하는 히브리어 중에 가장 강력한 표현의 단어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더러운 옷을 입고 서 계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이런 모습을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라고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을 마 27:31에서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에서 봅니다.
우리 죄악의 옷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그 초라한 모습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이 과정이 없이는 저와 여러분들의 죄는 사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난 후 예수님의 옷은 어떻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마 27:35)라고 했습니다. 로마 군병들에 의해서 제비 뽑혔고 군사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실제의 보이는 예수님의 옷은 비참할 정도로 찢겨진 채 몸에서 벗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입고 계셨던 이 세상의 옷은 더러운 죄악세상에서 우리를 대신한 죄의 징표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죄악의 옷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입고계신 것입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
마태복음 28:3절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원래 모습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우리의 죄를 인한 옷을 입고 계셨던 것입니다. 부활후의 예수님의 옷은 이 세상의 옷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이 옆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어찌 보면 옷을 안 입으신 것입니다. 이 옷은 이 세상의 옷과는 다른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 옷이 바로 스가랴가 예언한 본문 4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새 옷을 입으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죄악의 옷을 어린양의 피에 씻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에 씻어야 합니다.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들은 탕자이야기가 누가복음 15:11절부터 나옵니다. 아버지를 떠나 공생하다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고 했습니다. 돌아온 탕자가 입은 “제일 좋은 옷”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세상의 좋은 옷 색동옷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옷의 의미는 죄의 옷을 벗고 아버지가 입혀주는 의의 옷 사랑의 따뜻한 옷을 의미합니다.

몇 해 전, 미국의 한 조간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신문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어젯밤, 운명은 존 스미스에게 30초의 시간을 주고, 아내와 함께 죽느냐, 아니면 아내를 떠나서 혼자서 사느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하게 했다. 그런데 그는 죽음을 택했다.”
기사의 내용은 존 스미스 부부는 어둑어둑한 저녁에 산책을 나갔는데 이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두 사람은 철로 길을 걷고 있었는데 기차를 다른 쪽으로 가게 하는 전철기(轉轍機, point) 근처에서 미끄러지면서, 한쪽 발이 두 레일사이에 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발을 빼려고 해도 발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도와 힘껏 잡아당겼으나 고통만 더할 뿐 발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 급행 열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몇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지만, 금방 닥쳐올 위기 앞에서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있을 때 기차는 벌써 50미터 앞까지 왔습니다. 존 스미스는 한 팔로 아내의 얼굴을 감싸안고 그리고 다른 한 팔로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차를 향해 섰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다가오는 십자가를 스스로 지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입혀주시는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옷은 “11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히 1:11-12)고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입으셨던 눈과 같이 흰 그 옷입니다. 구원의 옷입니다. 이 세상의 더러운 죄의 옷을 벗고 십자가의 어린양을 통해서 입혀주시는 의의 옷으로 갈아입으시는 주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5.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 본문 : 마 9:9-13

“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9-13)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이 별로 실감이 안 나시는 분이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간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왜 의인이 아닌 죄인입니까?

우리 나라는 역사의 ‘친일진상규명법’을 2004년 3월 2일에서야 국회를 통과해서 그나마 역사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규명하여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게 했습니다. ‘친일진상규명’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모두 9명으로 구성되는 ‘친일 진상규명위원회’는 앞으로 3년간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편찬할 예정입니다.
‘친일진상규명법’은 일제시대 당시 일본군과 싸우는 부대를 토벌하거나 토벌하도록 명령한 행위와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살상하거나 체포 또는 이를 지시한 행위 등을 친일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학도병이나 징병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와 중앙의 문화기관이나 단체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황민화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와 침략의 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등도 친일 반민족행위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입법이 지금까지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친일의 잔재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이 친일파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겁내고 있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기록한 마태
그런데 마태는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을 누가 기록한 것입니까? 바로 마태 본인입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라고 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세리’는 창기와 같은 죄인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정부에 바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세리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악질적인 공무원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조선에서 세금을 걷어 일본에 바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마태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친일파입니다. 즉 친로마파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우리가 일본에 식민지 된 것처럼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알려지기가 제일 창피하고 부끄러웠을 것 같은 본인이 스스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그것도 성경에 버젓이 기록을 하다니 정말 이 사람 속된말로 간덩이가 분 사람 아닙니까?
마태가 이렇게 솔직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었던 용기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친일파가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것도 스스로 나는 죄인이라고 말하고, 고백하고 스스로 기록한다면 그 사람의 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인정하고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는 기록하는 것까지 자신의 손으로 그것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성경에 기록한 것입니다.

건강한 자가 문제입니다.
오늘 문제는 사실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한 마태와 세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랴”고 했습니다. 문제는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들이 상당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잘못이 없고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문제를 예수님께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죄인이니 예수님도 똑같은 것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공산주의가 태동할 때 러시아 중국에서 농민들, 서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억눌려 있던 감정을 모두 당시 고위급의 지도층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정권을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의인이요 부패한 정치인들은 죽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습니까? 정말 자신들은 부패 없이 잘 하고 있습니까? 우리 나라도 그렇습니다. 현 정권을 보아도 안타깝습니다. 386세대라고 말하는 분들이 전에 과오를 범했던 정치인들과 달리 청렴결백을 주장하면서 청와대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줄줄이 뇌물을 받고 연루되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작은 교회 목회를 하면서도 큰 교회의 문제점만을 들추어내어 말하고 자신은 크게되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는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크게되면 큰 교회가 안고있는 고민이 또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내가하면 더 잘할 것 같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인 한 두 사람이나 교회에서 목사 혼자 바르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돕고 격려하며 죄인임을 스스로 고백하며 진솔하게 노력할 때 하나 하나 바르게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고하셨습니다. ‘건강한 자’는 이수퀴오(ijscuvw)로 힘이 ‘강한, 완전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의 뜻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잘 관찰해 보면 어떤 사람입니까? 한마디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다른 나라를 침략합니까? 아닙니다. 교만한 사람이 침략하여 뺐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4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2-4)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도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고 했습니다. 건강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칫하면 교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큰 병을 앓은 적은 없지만 늘 골골댑니다. 어르신들 앞에서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가끔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쑤십니다. 저는 육체적으로도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건강 하시다구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체는 아주 연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조금 강하게 부디 치기만 해도 사망 아니면 중상입니다.

또 건강한 사람이 가진 생각은 무엇입니까? 의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의인이 가진 생각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 필요 없으신 것입니다. 교회 나오지 않는 분들의 생각을 보면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교회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타종교에 가서도 죄를 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가 알기로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해나 입히지 말고 복을 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를 닦는 것도 죄 사함을 받고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아직 수련이 부족하니 수련을 더해서 의인의 경지에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도를 닦으면 닦을수록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의인으로 완벽하게 되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건드릴 수 없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때 이러한 사람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병든 자’는 누구입니까? 어디가 많이 아픈 사람입니다. 의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교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은 힘이 없다고 인정합니다. 건강한자에게는 의원은 필요 없지만 사람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의원이 없으면 아픈 상처를 끌어안고 결국은 그대로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원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의원의 도움이 없이는 안됩니다.
바리새인들은 검사의 눈으로 죄인들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의사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의사는 사람이 병들었다고 해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사람을 볼 때 병들어 쓸모 없게 되었다고 소망을 끊지 않습니다. 의사는 병자에 대해 병만 치료해 주면 건강하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의사의 사명은 병을 치료해 줌으로써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 의사로서 죄인을 치료해 주심으로 살리러 오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주로 오셨습니다.

세관을 떠나 예수님을 따른 마태
세관 문에 앉아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강제로 걷고있는 마태를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은 그의 겉모양만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일 만큼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그도 부르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고 또 예수님을 따라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자 된 사람들의 행동은 예수님의 부름에 모두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마태 역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어부였다가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마태는 어부하고는 다릅니다. 비록 사람들의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그 자리는 돈을 만지는 자리고 싶게 놓고싶은 위치가 아닙니다. 미국에서 제일 정보화가 잘 이루어져 제일 좋은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국방연구소?, 미 항공 우주국?, 아니면 CIA? 아닙니다. 바로 국세청입니다. 세금을 징수하는 기관입니다. 당시에도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자리를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름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돌아 볼 것도 없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모두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데이비드 브레어너드는 “나는 설교에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말을 한번도 뺀 것이 없다.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한 사실을 깨닫는 자들에게 굳이 다른 교훈들을 가르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철학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는데 고상하게 포장하기 위한 필요한 약간의 액세서리나 옵션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해야 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선포하신 예수님
오늘 본문 앞 마태복음 9:2절에 중풍병자 고쳐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에게 죄 사함을 명했던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서기관이 깜짝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고 했습니다. 죄사함의 선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할 수 있느나?”고 하였습니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 선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주제넘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다고 예수님을 맹렬히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그들의 생각은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가 곧 죄 사하실 권세가 있는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 옆을 보십시오? 거기 보이시는 분이 죄인 갖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뒤를 보십시오? 보시는 분이 죄인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앞을 보십시오. 바로 저입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앙교회는 자칭 의인이 많기보다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성도가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의인이 많으면 피 바람이 일지만 죄인임을 고백하는 겸손한 자들이 많으면 평화가 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이제 죄의 문제는 더 이상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마태는 자신이 죄인임을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기록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간절히 의원을 기다리는 병자의 심정으로 우리 죄를 속하실 주님을 찾으시기를 그리고 마태처럼 속히 뛰어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