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터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2. 집의 터이신 예수님) / 고전 3:10-15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0-15)

어려서 흙을 가지고 놀 때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께 새집 다오”하면서 손으로 흙을 덮고 놀던 기억이 있습니다. 원래 이 노래는 제의적인 집단요로 가락국 건국 신화에 나오는 삽입가요로서, 가락국은 두껍이(거북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였는데, 두껍이는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노래를 통해 가락국 김수로왕을 새 시대를 열어갈 주체로 소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노래를 다시 끝까지 하면 이렇습니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물길어 오너라 너희집 지어줄게
두껍아 두껍아 너희 집에 불났다 솔이랑 가지고 뚤래 뚤래 오너라“입니다.
이 노래와 두껍이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두꺼비가 알을 품으면 평소에는 피해 다니던 독사를 찾아가 독사에게 잡혀 먹히면서 독사 뱃속에 자신의 독의 뿜어 독사를 죽게 합니다. 알들은 죽은 엄마 두꺼비와 독사를 먹이로 건강하구 식식한 세끼두꺼비로 태어납니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에서 헌집은 엄마 두꺼비를 뜻하고 새집은 건강하게 태어나는 새끼 두꺼비를 뜻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과 다릅니다. 두꺼비는 개구리와 같이 양서류 파충류에 속하는 것으로 알을 낳아 새끼를 만듭니다. 실제로 뱀에게 새끼를 만들려고 하면 아마 질식해서 죽을 겁니다. 그러나 두꺼비의 독은 사실입니다. 귀샘에서 분비되는 독액은 부포톡신이라 하며 부포탈린 등 여러 종류의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중국과 한국에서는 한약제로도 사용됩니다. 가락국 김수로왕을 세우고자 노래와 함께 이 이야기를 퍼트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거짓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내용에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두꺼비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두껍이가 죽어 새끼를 번식시킨다는 이야기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저는 어떤 때 이 노래가 우리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의 집은 헌집입니다. 세상에 속한 집은 버려질 집입니다. 고린도후서 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집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집을 건축하고 계십니다. 이 땅의 집은 다 버리고 가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은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는 축복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한지 3개월만에 시내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나를 위하여 지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쩌다 한번 찾아오시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인데 아예 그들 가운데 집을 짓고 함께 사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집이 필요하겠습니까? 온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이 어떻게 20평밖에 안 되는 작은 천막에 거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을 짓는 우리는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알고 보면 나를 위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나폴레옹 황제가 부관과 같이 두 사람이 어느 시골에 있는 조그마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이제 나폴레옹 황제는 변장을 하고 평민처럼 이렇게 또 부관은 친구처럼 둘이서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그날 저녁에 식사를 하는데 식사를 잘 시켜서 있는 대로 좋은 식사를 하고 식사 끝에 웨이터가 14프랑이라고 하는 많은 돈 계산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나폴레옹 황제가 “어 이 돈은 내가 내지” 그러면서 계산서를 받아들고 손을 주머니에 넣어 봤는데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돈주머니가 없어요. 그래 당황하니까 옆에 있는 부관이 “제가 내지요 뭐.” 그런데 그 사람도 주머니에 돈이 없어요. 두 사람 다 돈이 없어요. 그러니까 부관이 정중하게 말하기를 “대단히 죄송합니다 만은 지금 두 사람 다 지갑을 가져오지 못했는데 정확하게 한 시간 후에 돈을 갖다 드리겠습니다. 좀 이해해 주세요.” 그러니까 웨이터는 그런 대로 이해하는 거 같은데 그 호텔 주인이 나와 가지고 야단야단 하는 겁니다.
돈도 없는 사람들이 비싼 음식을 먹고 돌아다닌다고. 정신없는 놈들이라고 욕을 욕을 합니다. 오늘 당장 내라고. 그 부관이 하도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한 시간 후에 꼭 갖다 주겠습니다.” 그 웨이터가 가만히 보니까 믿음이 가요. “보자 하니 그렇게, 이 이렇게 거짓말할 분들은 아닌 거 같은데 이해하십시오”하다가 정 주인이 말을 안 들으니까 이 사람이 웨이터가 자기 돈을 냈어요. 14프랑을 내고 “먼저 가십시오.” 그래서 손님들을 보냈습니다. 한 시간 후에 부관이 다시 왔습니다.
돈을 내주고 주인보고 하는 말이 “이 여관 얼마면 살 수 있겠소?”, “이거 제가 얼마 전에 3만 프랑을 주고 샀는데요”, “좋아요, 여기 3만 프랑 있소. 이 집문서를 내 놓으시오” 그래 그 호텔을 사 가지고 그 자리에서 당장 웨이터에게 주었어요. “이제부터 이 집은 네 거다. 너는 나를 믿어주었다.”하고 집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터는 기초를 말합니다.
터는 문자 적으로 성이나 망대의 기초(딤후 2:19, 히 11:10, 계 21:19)를 말하는데 비유적으로는 교회 기초(롬 15:20)나 가르침의 기초(히 6:1, 딤전 6:19)를 말하는 것입니다.
집을 짓기 위해 제일 처음에 해야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집을 지을 터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 터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지을 집은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회사가 창립할 때 자본금이 얼마가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회사의 터는 자본금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회사는 자본금은 없고 어떤 기술을 가지고 시작된 회사도 있습니다. 이 회사의 터는 기술입니다. 그리고 어떤 회사는 경영마인드가 특이한 것으로 시작된 회사도 있습니다. 이것이 그 회사의 터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터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한국속담에도 “속담 터를 잡아야 집을 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뜻입니다. 집을 지으려면 먼저 터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터가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피흘린 값으로 사신 것입니다(행 20:28, 계5:9). 예수님은 자신이 교회의 머릿돌임을 주장하셨습니다(마 21:42). 바울은 에베소서 5:23과 골로새서 1:18에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터는 어떤 홍수가 와도 엄몰하지 못하며 어떠한 것에도 무너지지 않은 견고한 터입니다.
북한에는 “목수가 많으면 집을 무너뜨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옳은 지도자가 있어야 함을 교훈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 주앙교회의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을 근본으로 하고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의 터는 예수님 입니다. 예수가 터가 되지 못한 교회는 이미 교회당은 될지 모르나 교회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건축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 10절에서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라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터를 닦아주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오는 세대를 위해서 주앙교회의 터를 닦아주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창립한지 이제 1년이 되어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시간이 더가고 우리가 열심히 해서 교회가 성장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때쯤이면 교회는 제가 지금 꿈꾸던 많은 일들을 추진할만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가 되면 저는 은퇴해야 될 나이가 될지 모릅니다. 조용히 물러나야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터를 닦아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그가 1, 2, 3차 여행을 통해서 제일 성장시키고 복음이 들어간 지역이 고린도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이라면 그 교회를 떠나지 않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성도들을 그토록 사랑하여 바울은 많은 편지를 교회에 고린도 교회에 보내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것이 고린도전후서의 성경입니다. 그곳에서는 잘 아시는 사랑 장(고전13장) 이라고 말하는 성경도 있습니다. 각종 은사에 대해서 소개한 12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우들끼리는 송사하지 말라는 6장의 당부도 있었습니다. 8장 10장은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1장에는 여성도님들에게 당부하는 편지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8장에는 마게도냐 교회를 자랑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장에는 가난한 성도들의 헌금에 대한 문제도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따라해야 합니다.
바울이 터를 닦은 방법은 한마디로 은혜를 따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한 것입니다. 저의 좌우명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없으면 못합니다. 힘듭니다. 짜증이 납니다. 피곤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있으면 힘이 납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자꾸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독수리와 같이 올라가는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을 모두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용서해 주시고 들으세요.
저는 설교할 때 원고를 보지 않고 하는 것이 더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성경만 보면서 설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오후 예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목사님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주일 오전 예배에 원고를 써 가지고 설교하는지 아십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저는 이 설교 준비를 하면서 제가 먼저 은혜 받습니다. 그리고 왜 제가 원고를 보면서 설교하면 그냥 하는 것에 비해서 잘 못하는 것 같고 여러분이 은혜 못 받는 것 같이 느끼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제가 욕심이 많아서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부모님이 맛있는 것 있으면 자식에게 다 주고 싶지 않습니까? 이것도 먹어보라고 하고, 저것도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은 부모님의 그 심정을 배불러 죽겠다고, 비만 된다고 화만 내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제가 먼저 말씀에 은혜를 받다보니까 왜 설교시간은 꼭 1시간 안에 마쳐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1시간이 지나면 그 때부터는 은혜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시험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 목사가 주책이라고 할까봐 짧게 마쳐야 쿨한 목사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선교지 중국 같은데 가서 있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 훈련 잘된 것 하나 중에는 몇 시간을 해도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책상에 않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쁜 소식(복음) 듣고 오신 분답게 은혜가 충만한 기쁨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 중에 하나가 기쁨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기쁘게 사십시오. 이것이 은혜입니다.

건축은 좋은 자제를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터가 좋다면 반드시 그 자제도 좋은 것으로 사용하여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만일 서울 한 복판, 제일 값이 많이 나가는 명동에 싸구려 자제를 사용하여 철판으로 공장을 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요즘 하는 말로 “명동 땅을 두 번 죽이는 겁니다” 그 비싼 땅에는 그곳에 알 맞는 좋은 자제를 사용하여 집을 지어야 합니다.
제가 싱가포르에 갔을 때들은 이야기입니다. 싱가포르는 땅이 아주 작은 섬입니다. 그것도 일본처럼 자꾸만 바다 물이 올라와 앝은 땅은 자꾸만 침몰되어 갑니다. 한마디로 땅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귀하고 비싼 땅에 건물을 함부로 지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부가 정한 법은 30층 이상의 건물만 허용하고 또 건축양식이나 디자인이 독특하여 지금까지 어디서 본적이 없는 특이한 건물만 허락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어야 할 터는 그럼 얼마나 소중한 터입니까? 예수님이 피로사신 값으로 따질 수 없이 귀한 터입니다. 이 귀한 터 위에 쓰레기 같은 집을 지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 귀한 터 위에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집을 짓는다 생각하십시오. 또 반드시 우리가 짓는 집은 제일 귀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앙교회는 그러한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불로 그 “공력”을 각각 불로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에는 “공력”을 “작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은 집은 불로 시험을 당합니다. “불”로 심판하기 때문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좋은 것으로, 풀이나 짚은 나쁜 것으로 비유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없어지지 아니할 귀한 것으로 지으라는 것입니다. 세상 학문이나 명예, 물질 등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지은 집은 불에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인 성막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5:9절에 보면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지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제일 귀중한 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이십니다.
그리고 그 터 위에 또 제일 소중한 집을 지어봅시다.
누가 따라할 수 없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달란트 대로 멋있게 지어봅시다.
이 집을 지을 생각에 잠이 안 옵니다.
가슴이 설래 입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아름다운 집은 처음이다. 너무 아름다워 이 집은 영구히 보존하리라”는 칭찬을 받으시는 주앙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1.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 /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흔히 약장수들이 약을 선전할 때 그 약이 만병통치약처럼 선전합니다. 우리 나라에 제일처럼 대일밴드가 나왔을 때 이것을 가지고 시골을 다니면서 판 약장수가 있는데 이것을 아픈 곳에 부치기만 하면 심지어 배아픈 것까지 낫는 것으로 선전했습니다. 우리 성도에게도 만병통치약 같은 것이 있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만병통치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으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 없는 자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교만하면 그것은 도리어 믿음이 없는 것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믿음은 겸손입니다.

어느 목사가 대중들 앞에서 설교를 한 뒤 무척 우쭐해 졌습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목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듣기에도 자기의 설교가 꽤 근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목사는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넌지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이 세상에 설교를 잘하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 것 같소?” 그러자 아내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모르긴 해도 당신이 생각하는 숫자보다 한 사람이 적을 것 같아요”

저는 먼저 교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전재하고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합니다.

주님은 믿음 없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언제가 한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어린아이가 엄마와 함께 탔습니다. 그리고 엄마 이거 “엘리베이터지”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내리지도 않는 여러 층을 누른 것입니다. 그때 옆에 있는 엄마가 “너 그러지 말랬지!”하고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혼을 내 줘야지!”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하는 말. “엘리베이터가 뭐야 다시 해봐! (혀를 둘려가며)엘리베이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영어공부보다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바르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교육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근본을 위해서 교육하시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단순히 히브리어, 아람어 발음이 좋지 않다고 꾸짖으신 것 아닙니다. 그런 것을 교육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핵심 교육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 눅 12:28)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고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실제의 생활 전체를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마 16:8)고 하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당연히 염려할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제자들은 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축사하시고 5천명을 먹이신 일과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신 일을 경험한 후였습니다. 그런데도 갈릴리 바다건너(마가단 지경)로 예수님과 함께 간 제자들은 떡이 없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간질들린 아이를 제자들 앞에 데리고 왔는데 고치지 못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마 17:17, 막9:19)하시고 고쳐 주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마17:20에서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 후에도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6:14)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제일 많이 그리고 자주 꾸짖으셨던 것은 이빨 안 닦는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운동 안 한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것을 책망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일 좋은 교육의 효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칭찬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잘 알고 계셨으며 바로 그러한 일을 만나자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마8:5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때 한 백부장이 나왔습니다. 백부장이란 자기가 거느린 군병이 100명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중풍병 때문에 주님께 나아와 고쳐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7절에 “가서 고쳐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내 집에 주님이 오시는 것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하면서 “말씀만 하시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내 부하들도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간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 한마디면 하인의 병은 고쳐질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눅 7:9)고 하셨습니다.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모두가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 9: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믿음입니다.
믿음은 누가 만듭니까?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부모님이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면 교육적인 효과로 자녀에게 믿음을 가르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본입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가고있었습니다. 너무 좋은 차라 시골에 가면 번쩍번쩍 빛이 나던 그런 시절입니다. 길을 물어보려고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노인과 아이가 섰습니다. 그런데 차에 타고 있던 젊은 부인은 왜 심통이 났는지 “진주로 가려면 어디로 가요.”라고 반말 투로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노인과 소년은 “저리로 고개를 돌아 좌측으로 가면 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젊은 부인은 “진짜 그리로 가면 진주 나와요”라고 물었습니다. “예 그리로 가면 진주가 나옵니다.” 거짓말 아니지요. “예 아닙니다” 그리고 젊은 부인은 “당신들 거짓말시키는 거지”하면서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그러더니 가르쳐준 방향대로 안가고 자기들 마음대로 뒤돌아 갔습니다. 그곳은 삼천포가는 길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이렇게 됩니다. 화는 자신이 내고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주 찾아가는 길이야 가다 잘못가서 삼천포면 다시 돌아가면 되겠지요. 하지만 천국가는 길은 그럴 수 없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있으면…
1) 믿음은 곧 능력입니다.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눅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 말씀들은 믿음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습니다.
(막 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막 5: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눅 5: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눅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눅 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예수님께 병을 가지고 나왔던 사람들은 병만 고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너를 구원하였으니”라는 말씀입니다. 병은 잠이 나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병 고침과 구원의 문제는 별개입니다. 오늘날에는 병원에 가면 어지간한 병은 다 낫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 사함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냥 육체의 병만 일시적으로 나은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죄 사함, 구원”해 주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치유는 완벽한 것을 의미합니다. 일시적인 치유가 아님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도 이와 같은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을 가지려면
주님께 부탁하십시오. 그분에게 먼저 구해야 합니다. 제자들도 주님께 구했습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눅 17:5)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물론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믿어주셨습니다. 즉 부족한 것을 알면서도 믿어주신 것입니다. 믿음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해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믿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도들간에 용서와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인디언 마을에 ‘너구리 잭’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불평과 불만이 많이 너구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디언 마을 계곡에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너구리 잭도 이 교회에 다녔습니다. 이 교회에는 신앙고백 시간이 있었는데, 말하자면 성령이 강림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일어나 일종의 짧은 간증(고백)을 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 시간에 너구리 잭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몇몇이 내 등뒤에서 나를 놓고 쑤군거린다는걸 알고 있어. 난 그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구. 당신들이 뭣 땜에 그러는지 알아. 교회 임원 모임에서 내게 찬송가 상자 열쇠를 맡긴 게 샘나서 그렇지? 좋아 그렇다면 모두들 잘 들어.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당장 나오라구. 내가 가진 걸로 해결해 줄테니.”
너구리 잭은 미친 듯이 발을 쾅쾅 구르면서 사슴가죽 셔츠를 확 저치더니 권총 손잡이를 두들겼습니다. 금방 교회안에서 총을 쏘지는 않겠지만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할아버지 한 분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너구리 잭에게 말했습니다. “잭 자네가 찬송가 열쇠를 어찌나 잘 간수하는지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감탄하고 있어. 행여 자네 기분에 거슬리는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일이 있다면,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슬퍼할 걸세.” 너구리 잭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풀리는지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제야 휴! 하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할아버지 손자가 물어보았습니다. “너구리 잭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너도 알다시피 체로키족(인디언 부족 이름)이 고향에서 쫓겨나 오클라호마 주로 강제이주당할 때 너구리 잭은 혈기 왕성한 젊은 이었다. 잭은 산속으로 달아나며 열심히 싸웠지. 그러는 동안에 남북전쟁이 터졌는데, 잭은 이번에 연방군(북군을 말함)을 물리치면 땅과 집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고 열심히 싸웠는데 결과는 패배로 끝났지. 전쟁이 끝나자 이제는 정치가들이 들어와서 남아있던 얼마 안 되는 것 가지고 또다시 싸웠지… 너도 알다시피 너구리 잭은 평생 싸운 것 밖에 없어. 이제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이 찬송가 열쇠란 말이다. 이제 잭은 그것 밖에 남은 것이 없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소년은 너구리 잭 아저씨가 좋아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지난 15일에 했습니다. 투표 결과에 대해서 마음에 드시는 분, 안 드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반목만 하고 상대편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넓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다 그분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성향이 생긴 것 아닙니까?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고 칭찬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부활(2)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0. 부활(2)이신 예수님 / 요 11:25

“25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할렐루야!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여러분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인터넷에서 ‘부활’이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가수그룹 이름이 ‘부활’이 있나 봅니다. 그 분들 앨범과 기타 내용들이 검색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이 ‘패자 부활전’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또 활동을 그만 두었던 연애인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로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스포츠 선수들이 다시 돌아와 예전처럼 잘할 때 ‘부활했다’고 사용했습니다. 부활은 어쨌든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런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인간에게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죽음을 막는 일입니다. 혹 조금 더 늘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히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KBS TV에서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의학다큐 프로그램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첫 번째로 ‘성장호르몬, 현대판 불로초인가’로 시작하여 59번 째 2004년 4월 6일 “수명을 단축시키는 세 가지 – 제 1편 『설탕』”까지 진행되었습니다.
20세기 의학은 수많은 질병치료법을 내어놓았고, 인간의 평균 수명을 43세에서 77세로 두 배 가까이 늘려놓았습니다. 그리고 21세기, 학자들은 인간의 한계수명을 120세, 혹자는 150세까지 예상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고령이 되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람이 먹고, 자고, 활동하는 하는 우리 삶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통해 ‘건강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한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은 4번째로 방영된 ‘고기 먹어야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방송입니다. 제가 아는 상식과 세계의 장수마을에서 장수 노인들을 조사한 것에 의하면 소식과 채식을 많이 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프로그램에서 말하는 것은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키는 것 말하는 것 다 지키려면 그것 신경 쓰다 더 먼저 죽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력화시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절대적 위력을 갖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향하여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라고 큰 소리 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죽음을 무력화시키고 사람들을 거기서 풀어 자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 복음은 구체화되어 세계 속에 놀라운 희망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그저 보고만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그렇게 유심히 보시겠습니까? 그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전도서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이 세상의 지긋지긋한 생을 마감하게 되어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즐겁지 않았던 고통스러웠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태양이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비추는 하나님의 진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활의 영생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죽는 날이 절대로 낮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오직 주 안에서 죽을 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천국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은 이 죽음 말 그대로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보다는 “부활하시기 위해서 가셨다”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장례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천국 환송회”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해리 리머(Harry Rimmer) 박사가 어느 날 회교도인 이집트 정부의 한 고위관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자 회교도 관리는 “우리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리머박사는 또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회교관리는 “우리도 그 사실을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리머박사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책 곧 성경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책 곧 코란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셨다고 믿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리머박사는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관리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곧 예언자 모하메드를 통하여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리머박사가 말하기를 “우리는 예수께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자 회교 관리는 “우리는 모하메드가 그의 백성을 위하여 죽은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리머박사가 말하기를 “우리는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스스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그의 말씀을 실제로 증거 하실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하자 회교 관리는 “우리는 죽은 이후의 우리 예언자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정복하고 무덤을 이기신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지극히 높으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거기에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수치와 불명예의 상징인 십자가를 승리의 상징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 놓여 있었지만 무덤이 그를 가둬 놓지는 못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종교”일지는 몰라도 “생명과 구원”은 아니며, 부활 신앙이 없는 기독교인은 “교인”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이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스스로를 “부활”(요 11:25)이라고 칭하셨고, 제자들도 자신들을 “부활의 증인”(행 1:20)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부활은 단순하게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모든 것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 살리는 역사는 죽음 이후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장차 영생할 뿐만 아니라, 만나는 그 순간 깨진 꿈이 회복되고, 지친 몸이 치유되며, 상한 마음이 위로 받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이 충만하면, 어떤 환경과 여건에서도 산 소망과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롯유다를 대신하여 한 명의 제자를 뽑기로 할 때 사도행전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행 17:18)
“복음” 그것은 죽음에서의 부활이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복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영국을 여행하던 한 여행객이 해안지방을 지나가다가 많은 갈매기들이 모래사장에 죽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다는 청정했으며 갈매기들이 살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기에 분명 예사 죽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행객은 죽은 갈매기들을 치우고 있는 한 사람에게 죽음의 원인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그는 “이곳에는 여행객들이 많이 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갈매기들에게 과자와 사탕 등 맛있는 먹이를 던져줍니다. 그것은 갈매기들에겐 해로운 것이지요. 갈매기들이 이 맛있는 먹이들을 받아먹다가 그만 자연먹이에 대한 식욕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답니다. 철이 지나고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면 갈매기들은 그들에게 좋은 바다 속의 많은 먹이를 놔두고 여행객들이 음식만을 기다리다 굶어죽고 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들은 때론 너무 달콤하여 우리 몸과 영혼의 배고픔과 갈증을 채울 수 있는 좋은 양식들을 잊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주는 향락은 잠시 우리를 즐겁게 해 줄지는 모릅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 잠시 우리를 편안히 쉬게 해 주는 것 같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잠시입니다. 그날은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노인이 정원에서 묘목을 심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는 도대체 언제쯤이나 그 나무에서 열매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노인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무래도 70년은 지나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다시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 그렇게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다시 대답을 하였습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소. 내가 태어났을 때 과수원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소.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님이 나를 위하여 어린 나무를 심어 놓았기 때문이오. 그것과 똑같은 일이지요.”

저와 여러분들의 남은 생애를 주님께 드립시다.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전도하고 선교하시기를 오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참고] 부활에 대한 성구
(마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마 22: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1) 죽은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마 27: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막 12: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막 12: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눅 14: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눅 20:27)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이들이 와서
(눅 20:33)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눅 20:35)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눅 20:36)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11: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행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 2:31)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4: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행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 17:18)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행 17:32)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행 23:6) 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행 23: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행 24: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행 24:21)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고전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 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 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고전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빌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딤후 2: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히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히 11: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계 20: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계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십자가상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9. 십자가상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 / 눅 23:33-46

A. D. 33년 4월 초순 금요일 일기 화창한 어떤 봄날 예루살렘성 밖으로 세 사람의 십자가의 죽음 행렬이 엄숙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목적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요, 아람어로 된 말을 해석하면 해골이란 동산인데 여기까지 와서 각자가 메고 온 십자가에 이 세 사람을 달았습니다. 그 중에 중앙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7곱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부활하시기 전에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몹시 지쳐있습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또 넘어져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게 할만큼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한계를 보이고 계셨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밑에 따라왔던 마리아 및 사람들에 의해서 이 말씀은 낱낱이 전하게 되었고 오늘 우리가 보는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오늘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하신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실 수 있습니다. 멀리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와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놓치지 않고 들었던 갈릴리 사람들과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를 바랍니다.

첫째 마디 :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 이니이다”(눅 23:34)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기간 내내 외치셨던 말씀이 용서와 사랑입니다.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혹 악을 40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8-44)
자신을 죽이는 자들은 지금 몰라서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죄가 얼마나 중한지도 모릅니다. 만일 예수님이 용서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그 죄책감에 모두가 온전히 이 세상에 남은 생애를 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죄인의 몸으로 제일 비참한 상태에 계십니다. 조롱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남을 구원한다고 비방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내려오 보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소리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사하여 주옵소서”의 원문 ‘압히에미’는 “울부짖다, 용서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다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울부짖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둘째 마디 :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고 했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이요, 비판적이요, 야욕적인 말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현재도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주관적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강도처럼 비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지금도 강도처럼 죽어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만 중앙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구원을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영원한 천국의 주인이십니다(계 22:1-6).

셋째 마디 : “예수께서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
십자가에 달리신 상태에서 예수님의 얼굴은 땀과 피범벅이 되어있어서 눈을 바로 뜨기도 어려웠습니다. 쓰라림을 참으시며 눈을 뜨신 예수님께 어머니 마리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어머니는 떠날 수 없었습니다. 죽더라도 함께 죽겠다는 것이 어머니 아닙니까?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였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어린시절 어머니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애타게 찾았습니다(눅 2:41-51). 예수님께 이런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부터 기억이 필립처럼 돌아갔을 것입니다. 바로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어머니 마리아를 지금도 부탁하고 계십니다.

넷째 마디 :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 46)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뇌에서 비롯된 절규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정죄를 당하고 허물없는 자가 박해를 받으며 은혜 베푸는 자가 잔인하게 죽어 가는 일이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는 순간 주님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더 할 말씀이 없고 성경에 응하기 위한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이런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은 인간의 죄를 사하는 순간입니다. 잠시 아들의 모습을 외면하셨지만 우리에게 놓인 장막을 걷어내는 순간이었습니다.

다섯째 마디 : “내가 목마르다”(요 19:28)고 하셨습니다.
육체를 입고계신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제자들 중에 유일하게 십자가 밑에 있었던 요한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섯째 마디 : “다 이루었다”(요 19:30)
원문의 ‘텔레오’는 “완수하다, 결론짓다, 완전히 하다, 청산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창세기부터 아담의 죄 때문에 내려오는 죄의 고리가 단절되었습니다.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새겨야 합니다. 아담의 죄 그것은 우리의 죄였습니다. 이제 마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마쳤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죄를 짊어지고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직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않은 분들입니다.

일곱째 마디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예수님은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는데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 14, 16장), 요한복음 17장에서 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아버지란 명칭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아버지 손에 맡기고 부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 11시가 넘어서 우리집 옆 아파트에서 싸우는 소리가 났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싸우는지 여자들 엉엉 우는소리와 무엇을 집어던지는지 소리가 났습니다. 저는 자려고 누웠다가 옷을 빨리 챙겨 입고 나가보았습니다. 딸이 얼마나 잘못한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딸을 마구 때리며 엄마는 소리를 지르고 말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너무 딸을 때려서 일단 우리 집으로 피신시키고 제가 그 아저씨에게 가서 “진정하시고 좀 마음을 가라앉히세요.”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파트 복도에 흩어진 책과 노트들을 담아서 갖다 주었습니다. 잠시 후 진정이 되었는지 동생인 아들을 보내서 데리고 오라고 아빠가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런 마음으로 “가서 아빠에게 잘못했다고 말해라 다 너희들 잘 되라고 그러시는 거야”라고 부탁하고 보냈습니다. 보내 놓고도 한참을 불안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침에도 그 집을 한번 쳐다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심하게 책망하고 때렸지만 아버지입니다. 이 딸은 무슨 잘못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렇게 화가 나셔서 딸을 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이 아무 잘못도 안 하셨는데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아담보다 더한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보다 더한 고충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얼마나 주님이 기뻐하시는지 아십니까? 온 천하를 얻은 것 보다 더 기뻐하십니다(마16:26)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통,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순간 그 모든 고통은 제일 값진 역사가 일어나는 현장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마지막이 다 되어 갈 때에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주님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스데반과 같은,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실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