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7.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 마12:1-8

“1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8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1-8)

제가 이스라엘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갑자기 안식일 날(안식일은 금요일 오후 해질 때부터 토요일 저녁 해질 때까지이다) 옆집에 사는 유대인이 달려와서 가스 불을 아이가 켰는지, 켜져서 그것을 끄지 못하고 빨리 와서 그 가스 불을 꺼달라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유대인 집에 가봤더니 잘못하면 불이 날 뻔할 정도로 가스 불이 타고있어 그것을 꺼준 일이 있다고 합니다. 불을 끄지 못하는 것은 안식일 금지법 37번째에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 교수들은 안식일에 사인을 안 합니다. 안식일 금지법 32번을 어기는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 때 39가지 구체적인 안식일 금지법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유대인 속에서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배고팠던 제자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그런데 밀 이삭을 잘라먹었던 것은 “시장하여” 먹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비록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안식일에 밀 이삭을 먹으면 안 되는 것쯤은 알고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든지 아는 일입니다.
제자들이라고 해서 안식일 금지법을 몰랐겠습니까? 충분히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어기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분명히 “시장하여”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밀 이삭을 잘라먹었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익히지 않은 밀만을 먹은 적은 없지만 밀가루를 어려서 먹어본 일은 있습니다. 익히지 않은 밀이 맛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먹었던 것입니다. 한국속담에 “배고픈데 장사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 중, 상류층에 속해있었던 바리새인들은 배고픔을 잘 몰랐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야하는 제자들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밀을 잘라먹었겠습니까? 흔히 배고프면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말합니다.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북한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너무 배가 고파서 밖을 보니 돼지가 지나가고 있어 그것을 잡아먹었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 자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절에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자리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모른 척 하고 계셨을까요?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먹는 문제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밀 이삭을, 그것도 안식일 날 따먹는 것을 보고만 계셨습니다. 제자들만 배고픈 것은 아닙니다. 육체를 입고오신 예수님도 제자들과 똑같이 배가 고프셨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예수를 믿는데 예수님은 아무 것도 나의 일을 도와주지 않는 것 같은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들의 배고픔을 내버려두었습니까? 인간의 죄 때문에 내려오는 문제는 제자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이 받아야 하는 어려움 우리도 받습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 사람만 예외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 모두 똑같이 태양 빛을 주십니다. 혹 기도한다고 너무 특별한 무슨 은사나 있는 것 같이 말하는 분들은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제자들이 배고픔을 참으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배고프지만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우편에, 좌편에 앉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중에도 이 제자들과 똑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예수 믿고 축복 받을 생각만 합니다. 예수 믿으면 축복을 확실히 받습니다. 하지만 제일 큰 축복은 영생의 축복입니다. 이 땅의 잠시 지나가는 영화에 너무 욕심 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앞장 마 11:7-8절에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7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사단이 제일 처음 한 시험이 먹는 문제였습니다.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 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 4:3-4)고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지금부터 제자들이 배고프면 밥 주고 아무 어려움이 없게 돌보시면 이 제자들은 온상에서 키운 풀처럼 힘없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이 되어서는 나중에 순교할 수 없습니다. 순교는커녕 배고픈 사람들의 심정을 알지도 못하고 지금 바리새인들처럼 될 것입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예전에 부모님 세대에 굶은 적이 있다고 하면 “라면 끓여먹으면 되지”라고 한다지요. 그렇게 키워 가지고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지 걱정이 됩니다. 좀 강하게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 굶겨야 합니다. 그래야 배고픈 사람 심정을 알지요. 예수님은 지금 이런 배고픔 정도야 제자들이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고 믿고 계셨습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어려움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를 이 땅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다 주시는 것 아닙니다.

맛있는 물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알프스 산록, 북극이나 남극의 얼음…
아무리 맛있어 보이는 자연수를 손에 넣은들,
당신의 마음이 좋지 않으면 결코 맛있는 물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아무리 맛있는 물이라도 맛이 없게 되고 맙니다.
땀을 흠뻑 흘리는 운동을 하고 나서
마시는 물은 수돗물이라도 맛있습니다.

항구에 정박한 한 상선에서 선장의 아들이 원숭이와 어울려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숭이가 소년의 모자를 낚아채 돛대 위로 올라갔습니다. 소년은 모자를 빼앗기 위해 정신없이 원숭이를 뒤쫓았습니다. 소년이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발 밑을 내려다본 소년은 겁에 질려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소년은 공포에 몸을 떨며 밧줄을 잡은 채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선장이 돛대 위에서 울고있는 아들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습니다.
 

나의 선생님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5. 나의 선생님이신 예수님) / 요13:12-15

“12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2-15)

한 소년이 담임선생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있었습니다. 미술시간에 크레파스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교사는 충혈 된 눈으로 “도대체 이번이 몇 번째냐?”며 다그쳤습니다. 소년은 어려운 가정형편을 차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침묵하는 소년을 향해 교사는 머리를 쥐어박으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다음부터는 훔쳐서라도 준비물을 가져와”
그로부터 17년 후 이 소년은 법정에 서 있었습니다. 지존파의 대부 김기환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최후진술은 이렇습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선생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선생이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만찬이 있었고 그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산헤드린 공의회나 율법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오합지졸의 사람들이 모여 다녔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제자의 절반 가량은 갈릴리 어부 출신이고, 나머지는 마태(세리)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따라 다니는 말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선생 될 자격이 있는 분이냐 하면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예수님 또한 선생(랍비)될 자격이 없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랍비가 되려면 전통 있는 학문의 가문에서 배운 적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학문적 가문에서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 40세가 되어야 랍비가 되는데 예수님의 현재 나이는 33세 이십니다. 유대인(세속적)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제자나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던 세 부류가 있습니다.

1. 대적 자들이 예수님께 부른 선생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1)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마 12:38)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눅 19:39)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요 8:4)
이 모두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진짜 예수님을 존경하고 부른 것은 아닙니다. 한마디로 비꼬아서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그저 어떤 기적이나 요구합니다. 아직 믿음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배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따져 불으려고만 합니다. 때로는 목사도 표적이 됩니다. 자신이 어디서 하나 알고 온 것을 가지고 질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 질문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곤란한 질문들 그리고 “당신 목사니까 한번 해봐”라는 식입니다. 이런 사람은 변화가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2. 관심 있는 자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마 8:19)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막 9:17)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관심은 있었으나 자신들의 요구을 위해서 나아왔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답을 주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대로 따르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자기에게 손해가 안 난다면 하겠지만 작은 어떤 희생이나 노력도 하지 않고 그야말로 주는 대로만 먹고 말겠다는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3. 제자들이 부른 선생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요 1: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 4:38)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 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막 10:35)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도 일반적인 선생이나 주가 아니라 본문에는 ‘호 디다스 칼로스’(@O didavskalo”)로 부릅니다. 그리고 ‘주’라고 부를 때도 ‘호 퀴리오스’라고 불렀습니다. 헬라의 호격에는 관사가 붙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관사인 ‘호’가 붙은 것은 주격으로 부르고 잇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선생, 유일하신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많은 선생님중의 한 분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빌립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땐 ‘퀴리에’라는 호격을 사용하여 여러 일반적인 선생 중에 뛰어난 선생으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것은 유일하고도 참된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경탄
어느 초등학생의 답안지(실화)
‘슬기로운 생활’ 문제 : 옆집 아주머니께서 사과를 주었습니다. 뭐라고 인사를 해야할까요?
답 : 뭐 이런걸 다
문제 : 부모님은 우리를 왜 사랑하실 까요?
답 : 그러게 말입니다.
문제 :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해낸 사람은?
답 : 죽었다. / 요즘 아이들의 시험답안을 보면서 경탄을 합니다. 예전에 나올 수 없었던 답도 나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마 7:28)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마 13:54)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마 22:33)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7)
한 마디로 아주 특별한 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예수께서 특별히 어느 가문에서 배운 것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놀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것을 배웠단 말입니까? 그에 대한 해답을 니고데모가 말합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3:11절에 “본 것을 증거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와 같은 선생이 되라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선생되지 말아야 합니까? 야고보가 말하는 선생이란 세속적인 선생, 즉 잘난 체만 하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그런 선생을 말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이 선생 되심을 스스로 밝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과 같은 선생이, 제자가 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계셨습니다. 이 행동은 상당히 의도된 행동이십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러 가야하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잃지 못할 교육을 시키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사막이 많아 먼지가 많고 이들은 센달을 신고 다니기 때문에 발이 항상 더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교육의 본으로 삼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어린 영국 군인이 적군의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군목은 군인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유언을 물었습니다.
“제 어머니에게 전해주십시오. 아들은 고통 없이 기쁘게 죽었다구요.”
어린 군인은 짤막하게 말했습니다. 잠시 후 어린 군인은 무슨 중요한 것이 생각난 듯 숨을 헐떡이면서 간곡하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학교 선생님께 이 말을 전해주십시오.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구요. 그리스도인으로 편안하게 눈을 감게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한다고 전해주세요.”
군목은 어린 군인의 유언에 따라 교회학교 선생님을 찾아가 마지막 유언을 들려주었습니다. 여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지금 교회학교 교사가 아닙니다. 교회학교 교사라는 직분이 대단치 않게 생각돼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유언을 들으며 결심했어요. 다음 주일부터 다시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일관되게 가르치신 것 하나가 있습니다.
.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먼저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 높아지지 말고 스스로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행동으로 이것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있기 전에 앞서서 예수님은(요 12:14) 예루살렘에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조롱 말이나 타고 가셔서 솔직히 어디 왕 같아 보이십니까? 큰 군말을 타고 가셔야 되지요. 그런데 스스로 작은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겸손, 낮아짐, 섬김” 이것이 예수님의 교육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같은 선생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6. 나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 / 히9:11-15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느뇨 15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1-15)

어떤 신발가게 주인이 한 켤레는 10만원, 한 켤레는 5만원의 가격표를 붙여놓고 고객들의 반응을 살폈습니다. 대부분의 고객들은 10만원 짜리 구두를 선택했습니다.
사람들은 무턱대고 값비싼 구두를 선호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값싼 것은 뭔가 결점이 있다. 값이 비싼 것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너무 값싼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현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의 구원을 너무 값싸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결코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엄청난 희생의 값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성경은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대제사장 되시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심에 대해서 히브리서 7장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먼저 멜기세덱의 제사장 우월성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이런 이유는 예수님이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과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1)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권을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2) 아론보다 먼저 제사장직을 받음으로 율법아래 있지 않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3) 아브라함의 후손들로부터 십일조를 받는 레위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훌륭한 제사장에 대해서 히 7:3절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레위지파만이 대제사장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이 유다지파의 자손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직을 의심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금 멜기세덱이라는 아브라함 때의 대제사장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라고 했는데 이것은 대제사장직이 지속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멜기세덱 혼자하고 레위지파처럼 대물림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멜기세덱만으로 마쳤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또 내려가는 다른 제사장 제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마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의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일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지파 대제사장들은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옷은 방울이 달려 있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서 방울 소리가 안 나면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들어가서 그를 데리고 나올 수는 없습니다. 죄인이 죄인을 위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 대신해서 사함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제사는 완벽할 수 없는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자신이 제물이 되셨습니다.
또한 이들이 드리는 제물은 자신이 아니라 백성을 대신한 양과 염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본문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직접 드린 제물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선배목사님이 이렇게 권고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병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이 병이 내게 옮겨와도 좋으니 이분의 병을 치료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생각하면 기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그 자녀의 고통을 내가 가지고 갈테니 내 자녀에게는 그런 시련을 주시지 말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만큼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단번에 지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는지 솔직히 우리는 다 이해가 안 갑니다. 그분은 죄가 있으셨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이 그분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구역의 멜기세덱을 비유로 들어 이미 레위지파가 아닌 사람도 대제사장이었던 적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그와 같은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대제사장직은 아론으로부터 내려오는 레위지파에서 오는 정통성을 말해오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긴 설명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긴 설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그분이 이미 이 세상의 죄인들과 같지 않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역시 레위지파의 대제사장이 해결하지 못했던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신 분이라는 것 또한 믿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대제사장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죄인인 사람은 시기합니다.
기술개발을 하거나 내가 생각한 것이 이미 다른 사람이 생각했었고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기운이 빠집니다. 내가 독창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이미 다른 사람이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한마디로 기득권의 반격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유대인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대제사장과 산헤드린공의회원 들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밥그릇 싸움이 아닌데 그들의 좁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를 따르기가 어려웠습니다.
오늘날에도 점점 교만하여져 가면 진짜 예수님이 오셔도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사람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미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누려야할 자리에 가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누가 필요해서 세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그분이 직접 아들을 보내셨으니 그것을 직분이 마쳐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 동안 특권을 누렸나 봅니다. 여러분 어느 자리에 있던지 마음을 비우십시오. 이 땅에서 영원한 직책과 직분은 없습니다. 어짜피 다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본문 11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는 현대인의성경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에 대 제사장으로 오셔서”로 번역했습니다. “장래”(게노메엔온)은 “…하려고 하다”로 부정과거로 이미 이루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오사(파라게노메노스)” 또한 부정과거형으로 “이미 오셨다”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즉 십자가에 이미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15절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중보(메시테스)”, “화해자, 중재자”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는 말씀이십니다.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 때(첫 언약한 때)에 이미 하나님을 떠났으며 그로 인해 가나안땅에 빨리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단순한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 제사였지 사람의 죄를 없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온전한 속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영원한 기업을 약속으로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3:4절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2,000규빗을 대충 계산하면 1km 정도입니다. 1km 정도 뒤에서 따라가면 앞에 무엇이 가는지 잘 모릅니다. 물론, 언약궤를 아무나 만지면 죽습니다. 대상 13:10절에 보면 웃사가 언약궤를 만지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가 또 있습니다. 구약 시대 때 죄인의 몸으로는 하나님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속죄한 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만큼 그분과 가깝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고 하셨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페루의 선원들이 스페인 사람들을 흔들어 깨웠다.
“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시오. 우리는 지금 물이 없어 죽어가고 있소”
페루 선원들은 아마존 강물을 퍼올려 스페인 사람들을 먹였다. 그제 서야 그들은 정신을 차렸다. 스페인 선원들은 사실 넓은 아마존강에 떠 있었다. 그러나 넓은 바다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도 바다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환경에 대해 막연한 공포를 느낀다.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절망’이라는 이름의 바다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심(카칼에네노이)”은 하나님께서 초청한 잔치에 청함 받은 사람을 말할 때 사용된(마22:8, 계19:9) 완료 수동태 주격으로 선택된 사람들은 이미 정해졌으나(엡1:4) 그 초청에 응하는 것은 아직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저와 여러분들이 아멘으로 응답하여 모두가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 : 히브리서에 나타난 예수님 대제사장 되심
(1) 하나님이 명하신 바요 (히5:5).
(2) 맹세로써 제사장을 삼으신 바요(히7:21).
(3) 죄가 없으신 바요(히7:26).
(4) 제사장의 직분은 갈리지 아니하는 바요(히7:23-24).
(5) 제사 드리신 것이 완성하고 또 있는 바요(히7:25).
(6) 그 대신 간구 하심에 온전한 특권이 있는 바요(히7:25).
(7)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 되심은 하나님을 대리하시고 사람을 대신하여 행하시는 권한을 받으신 바이다(히1:-2:)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4.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 고전 15:45-50

“45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45-50)

아담이라는 말의 뜻은 “사람”입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가리켜 “마지막 아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신 “마지막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치 말라 하였어도”(렘 44:4)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 방법으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증거하기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고 하셨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첫 아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순간 에덴 동산의 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부부를 상상해 보십시오. 에덴동산의 각종 먹을 것과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안전한 낙원이었습니다. 특별히 더위나 추위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가 많이 오거나 가뭄이 들어 흉년이 되는 것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쫓겨나자마자 그들은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야 했을 것이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전전긍긍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어느새 몸은 상하고 병들어서 힘에 겨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마다 에덴동산이 그리워서 몇 번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이 지키고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그 검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에덴을 바라보며 두 부부는 쓸쓸히 그곳에서 발길을 또 돌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첫 아담의 실패

오늘날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소망합니다. 그 증거로 성공에 관한 책과 지도자에 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성공하기 위해서 온갖 종교를 다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공이 곧 생존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성공하려면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고, 실패의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성경에는 성공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실패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롯, 사울, 가룟 유다의 실패와 아브라함, 다윗, 베드로의 실수 등 많은 인물들의 실패와 실수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런 실패자 중에 최고의 실패자는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입니다. 아담은 성공 중에 성공인 최고의 자리에서 최악의 실패의 자리로 전락했습니다. 이 같은 아담의 실패는 아담 자신만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실패이며, 우리가 벗어나야 할 실패의 자리입니다.
그러면, 첫 아담의 실패를 살펴봄으로, 우리 모두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믿음의 성공자가 됩시다.

첫째, 탐욕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탐욕 때문이었습니다(창 3:5). 하나님은 아담을 복된 존재로 창조하시고, 필요한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이처럼 탐욕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만족이 없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도 감사치 않음이 죄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롬 1:21).
사단은 감사가 없는 자리에 찾아와서 탐욕과 불평을 가져다줍니다. 이 때, 아담처럼 모든 것을 소유해도 감사치 않으면, 우리는 탐욕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어도 바울처럼 감사의 삶을 살면, 어떤 역경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아담의 실패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단과 사람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아담의 실패를 거울삼아 우리는 사단의 전략을 파악해야 하고, 사단보다 더 지혜로워야 합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예수님을 유혹할 때 “말씀”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말씀을 조금 바꾸거나, 일부만 인용해서 우리를 현혹합니다(창 3:1 하). 이것은 오늘날 이단들도 동일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유혹이 올 때, 하와처럼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면 패배하게 됩니다(창 3:3).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 일획도 변함없이 지키면 누구나 인생의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마 4:4).

셋째, 자기 잘못을 아내에게 책임 전가
아담은 모든 잘못을 아내와 그 아내를 주신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말하면서, 아내에게 책임을 떠 넘겼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에 대해서 감사는 없고 자신의 죄에 대한 핑계로 삼았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은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여자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아담”이었습니다.

넷째, 회개하지 않았다.
아담에게 있어서 선악과를 먹은 것보다 회개하지 않은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는 것보다,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을 더 미워하십니다(잠 28:13). 하나님이 죄를 지은 아담을 찾아오신 것은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징벌하려고 했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영원히 멸망 받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신 것은 회복시켜 주시고, 용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담의 실패를 교훈 삼아 우리는 잘못을 범했을 때, 즉시 뉘우치고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가 바로 성공하는 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고 증거합니다.

아담 이후 내려온 죄

아담의 교만(욕심), 불순종, 회개하지 않은 것은 아담의 한 사람의 문제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인류에게 미쳤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에 제일 넘기 어려운 고개가 있었는데 그 고개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름도 쉬어(울고) 넘는다”는 옛 시조의 고개일까요? 아니면 박달나무로 우거진 문경 ‘새재’의 고개일까요? 또 아니면 임꺽정이 지키고 있었던 ‘까치 고개’일까요? 아니면 지금은 터널이 뚫어있는 대관령 고개일까요? 아닙니다. 그 고개는 지금 봄의 끝자락에 있는 이 때쯤이 제일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릿고개”입니다.
인사말은 그 나라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안개가 자욱한 영국에서는 “굿모닝” 좋은 아침이 그 사람들의 인사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영국에서 개조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후(안개)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영국 사람들이 왜 “굿모닝”이라고 인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아침 인사란 것이 없고 언제나 만나면 “봉주르”하면 됩니다. ‘봉’은 ‘좋은’, ‘주르’는 ‘낮’이란 뜻인데 향락문화가 많았던 프랑스에서는 늦게 일어나는 것이 예의이고 귀족들은 오후에 생활을 했답니다. 그래서 괜히 아침 일찍 여자가 다니면 창녀로 오해받기 십상이었답니다.
몽고 사람들은 모든 것(음식, 의복, 연료 등)을 가축에 의지하여 생활하다보니 “당신네 집 가축은 살이 얼마나 쪘습니까?”가 인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고 나왔냐”였습니다. 그리고 밤에 죽는 사람도 있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였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지만 그러나 아직도 먹고살기 힘든 사람은 많습니다.
아담 이후 죄가 이 땅에 들어와 사망이 왕노릇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불평, 불만은 많이 하면서 이것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느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늘 원망과 불평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범죄한 일에 대한 불만입니다. 좀 어려울 때마다, 좀 힘들 때마다 ‘그 할아버지 할머니는 왜 그 선악과를 따먹어 가지고 그 결과로 우리까지 이렇게 고생을 시키나… 그 에덴 동산에 살았으면 농사도 하지 않고 평안하게 잘 살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쫓겨 나가지고 고생을 하게 되나…. 원인은 아담과 이브,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문제다 이거.’ 늘 이렇게 원망을 했는데 그 원망이 좀 지나쳤어요. 목사님이 이말 저말로 설명을 해 봤지만은 영 듣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 댁에서 이 장로님을 초청했습니다. 저녁 만찬을 청했는데 음식을 잘 차려놓고 식사 기도를 하고 막 식사를 하는데 밖에서 손님이 찾아서 이 목사님이 밖으로 나가시면서 하는 말씀이, “자 우리 기도도 다 했으니깐 식사를 먼저 하십시오. 다 같이 식사를 하세요. 그건데 요 가운데 있는 요 그릇, 뚜껑 닫아 놓은 건 그대로 두세요. 제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제가 이것을 열어 보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안은 참고 다른 것만 다른 모든 것만 잡수십시오.” 그랬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나갔어요. 식사하는데 이 장로님이 그것이 궁금해 못 견디겠거든. 그것이 무어냐 이거 에요. 마침내 그것을 살짝 열어 보았는데 그 속에 새 한 마리를 잡아 넣으셨어요. “푸릉” 하고 날아올랐는데 아 이걸 잡을 재간이 있어 야죠. 목사님 들어오시기 전에 잡아서 다시 집어넣어야겠는데 잡을 길이 없어요. 이리 저리 쫓아다니는데 먼지가 자욱합니다. 이제 목사님이 들어 왔습니다. “아니 여기 많은 음식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그것을 열어 보았습니까?” 그리고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분명 아담의 후예입니다.” 그랬다는 겁니다.
미국은 요즘 시끄럽습니다. 이라크를 해방시켜 주겠다고, 핵무기, 화학무기를 찾겠다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기름 빼앗아 오려는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이라크 해방”은 명분으로 내어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라크에서 군인들이 포로들에게 잔학한 짓을 한 것이 탈로 난 것입니다.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갖은 모욕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진정 이라크 해방군입니까? 그래서 전 세계가 분노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청하면서 겉으론 평화를 내걸고 사실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하여 다른 나라 인권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도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본인들만 회개했으니까 죄인이 아니고, 저쪽 중동의 국민들만 죄인시 하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는 것은 또 한번의 교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도 역시 아담 이후 내려오는 죄의 문제를 안고있는 첫 아담의 후예들이라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분들이 많은데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죄를 지었고 또 내가 선악과의 유혹을 받았어도 따먹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감리교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가 바로 그런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직자로, 규칙적인 경건 생활로, 선교사로 열심히 일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738년 5월 24일 밤 9시 15분 올더스게잇의 작은 집회에서 회심을 하고 “그가 내 죄, 곧 나 자신의 죄를 가져 가셨으며 나를 죄와 죽음의 율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게 주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죄의 시조인 아담의 후예이나 또 한 사람의 다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역사를 시작하여 생명 역사에 동참하게 된 것을 감사 드립시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살지 않고 있음을 저는 감사드립니다. 죄의 문제가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완전히 해결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표현한 것은 첫째 아담과 비교하기 위해서 이며 첫 째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면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는 그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아담의 실패의 이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그럼 성공한 마지막 아담은 첫 아담과 반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첫째 아담은 탐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탐욕이 없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시작하기 전에 사단이 시험한 것은 바로 첫 번째 아담과 같은 시험입니다. 천하세상을 보여주고 다 주겠다고 한 사단의 소리는 바로 첫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보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첫 아담은 사단의 소리를 들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명령했습니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은 순종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오직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 지시는 것만을 생각하시고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죄 없으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는 늘 중보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 결과 첫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다면 후 아담을 통해서는 이 죄가 단절되었습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첫 사람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 탐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은 하늘에서 나셔서 오셨고 하늘의 생각만을 했습니다.
지금도 누가 욕심이 많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욕심이 많은 것입니다. 누가 죄를 짓겠습니까? 이 땅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죄의 육체로 하늘의 영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회개한 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육체는 이 땅에 벗어버리고 아프지 않고 썩지 않을 새 육체로 갈아입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서는 교회에서 만나지만 어느 날 우리가 이 땅이 아닌 곳에 있다면 반드시 그곳이 천국이길 바랍니다. 그곳에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 모두 만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3. 어린아이를 영접하신 예수님) / 마 18:1-6, 막 9:33-37, 눅 9:46-48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1-6)
“33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3-37)
“46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 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 9:46-48)

본문말씀은 같은 사건을 공관복음 세기자가 모두 기록한 것입니다. 3개의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것은 그만큼 이 사건이 성경저자들이 잘 기억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잘 알려진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여쭌 것으로 마가는 “노중에서 제자들이 쟁론한 것을 아시고 질문하신 것으로” 요한은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세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마가가 제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행로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면을 참고해 주세요.]
본문에 “가버나움에 이르러”라고 나오고 “노중에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 어느 곳으로부터 “가버나움”에 오신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지명의 언급은 막 9:30에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앞의 지명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막 9:2에 보시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는 것이 나옵니다. 여기서 또 이 “높은 산”이 어느 산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산은 “다볼산”이라고 하는데 “다볼산”은 갈릴리 바다 남서쪽에 위치한 평평한 산으로 해발 560m 정도입니다. 따라서 이 산을 “높은 산”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과 현재 예수님의 행로와도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 산을 대체적으로 해발 2,850m의 헤르몬(Hermon) 산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산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 산에서 변화되셨으며 그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귀신을 쫓으시고 벙어리, 귀먹은 자를 고쳐주셨을 것입니다(막 9:25).
그리고 오늘 본문의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집은 정확히 누구의 집인지 언급은 안되어 있지만 예수님이 쉬었다 가실 수 있는 편안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예수께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다섯 제자를 부르셨던 곳입니다(마 4:13, 18-22 마 9:9). 그리고 백부장의 종, 베드로의 장모, 4인이 메고 온 반신불수 등의 병자를 고치신 곳이기도 합니다(마 8:5, 14, 9:1, 요 6:55-59). 그래서 가버나움을 예수님의 제2 고향이라고도 부릅니다(마 4:13).
다메섹에서 지중해 방면으로 왕래하는 통로인고로 상업이 번창하여 예수 당시에 가장 번화하였던 곳으로 유대인의 회당(눅 7:5)과 로마 세관(막 2:14)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머물고 계시는 집은 베드로나 또 다른 제자의 집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에 왜 가셨을까요? 단순히 쉬시기 위해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의 행보는 예루살렘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마지막 길을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집에서도 오랫동안 머물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부활하시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곳을 들려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싱가포르의 한 식물공원에 갔었는데 나이 드신 한국의 어르신들이 여행을 오셨습니다. 그분들은 그 식물들 하나 하나를 유심히 살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별로 그런 식물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어르신들은 언제 또 이곳에 오나 하는 마음에서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노중에서”라고 했는데 이 노중이 왜 중요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길을 오면서 쟁론한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꾸만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실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잠잠하니”라고 했는데 문법적으로는 미완료형 입니다. 지금 대답을 못하고 침묵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서열문제
지금 제자들이 노중에서 왜 이런 논쟁을 벌였습니까? 단순히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서열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서열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가는 쟁론했다고 말합니다. 쟁론한 문제는 “서로 누가 크냐”는 문제입니다. 이 말은 메이죤(meivzwn)으로 누가 더 “위대하냐” 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변화산에 예수님과 함께 올라갔던 제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먼저 자신들이 다른 제자보다 서열상 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정황이 막 10:37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영광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청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서열 잘 따지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것에 목메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사람과 한국사람이 다른 것이 있는데 중국사람은 명분에 치우치지 않고 실리를 챙긴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실리는 잃어버리고 명분을 앞세운답니다. 그래서 한국은 기술과 실력이 아니라 줄이라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도 부모님은 자녀에게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질문을 합니다. 이런 것 하지 마세요. 어른들은 장난 삼아 하지만 아이들은 순간 고민합니다. “어느 편으로 붙어야 좋을까” 그리고 어린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힘의 서열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른 아이들은 하나 잘하는 것 있습니다. 눈치하나는 빠르지요? 이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닙니다. 또한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심리적인 차별과 서열을 가르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이 잘 일어나는 집을 보면 자신들만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자꾸만 이웃과 친구와 비교합니다. 여러분 나는 나입니다. 나의 남편을 아내를 자녀를 자꾸만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버릇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서열을 왜 평소에 구분하려하는 것입니까? 서열을 정함으로 위와 아래, 첫째와 꽁지가 결정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차별입니다. 바로 차별하려고 서열을 나누는 것입니다.
남녀 차별이 심하던 시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첫 딸을 낳았다.
그럴법한 일이라 해서 의일 이라 이름지었다.
다음에 또 딸을 낳았다. 간혹 그럴 수도 있다해서 혹이라 이름지었다.
그런데 또 딸을 낳았다. 이건 너무 많다하여 과삼이라 이름지었는데
연거퍼 딸을 또 낳았다. 참 너무도 심하다해서 심사라 했다.
또 딸을 낳았다. 정말 분하다고 오분이라 이름 지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아들을 기다리는데 또 딸을 낳고는 화가 치밀어 육노라 이름지었다.
그런 후 또 딸을 낳아 고만 놀래서 칠경이라 이름을 짓고 말았다.
얼마 후에 또 딸을 낳고 보니 나오는 것은 한숨 뿐이라. 팔탄이라 이름 짖고 한탄만 하고 지내는 데,
또 딸을 낳고 보니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와 구소라 이름지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관심이 있는 “첫째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학생에게 제일 관심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일등을 하는 일입니다. 직장 생활하시는 분 관심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승진하는 일일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지금 관심 있는 일은 누가 첫째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자녀가 “어떻게 하면 첫째가 될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부모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첫째 되는 방법의 말씀을 꺼냈을 때 제자들의 반응은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앉으려하고 귀를 세웠을 것입니다.
예수께선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절) 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마 23:8-12, 막10:31, 43, 눅22:24-27).
교회에서도 제자들과 같은 서열의식이 있거나 은연중에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서열은 없습니다. 오직 봉사의 직분과 직책만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첫째가 되라는 의미에서의 직분이 아닙니다. 봉사하라는 직분입니다. 목사가 되어 가지고 목사직분을 감당하지 못하면 평신도 모다 못한 것입니다. 다른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맨 앞자리에 장로님, 그리고 성가대원, 직분자들을 순서대로 의자에 붙여 놓았던 적이 있는데 처음 교회에 오신 분이 잘 모르고 맨 앞자리에 앉았다가 장로님이 “제 자리인데요!” 그래서 일어나고 또 그 뒤에 앉았는데 집사님이 오시더니 “제 자리인데요!”라고 해서 그냥 교회를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의자가 많이 있으니까 그런 분 있으면 모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36절)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 보면 후보자들이 어린아이를 안고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대부분 이쁘고 잘 생긴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어린아이 하나를 안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으신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용으로 보아 그는 보잘것없는 아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마 제가 어렸을 때 코를 많이 흘렸는데 코도 흘리고 지저분한 그런 모습의 아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KCM홈페이지에 보면 눈이 둥그런 아이가 있습니다. 미나자매가 디자인을 잘 해서 이쁘게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보통 아이입니다. 그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보면서 어린아이를 안으신 예수님이 생각이나 홈페이지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유대나 헬라문화권에서는 어린아이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사람취급을 안 했습니다. 성경에 오병이어를 보시면 여자와 어린이를 뺀 숫자입니다. 수를 셀 때도 넣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덜 성숙한 미숙아로 취급하고 한 인간으로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도 분명히 한 인격체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입장도 존중해 주고 보호해 주어야 할 책임이 어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예수님의 비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37절)라고 하심으로 어린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높은 자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낮은 자와 비교하고 계십니다. 흔히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을 비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것도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25:31-46에 보면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헐벗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자신을 딤전 1:15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고 천하게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당시의 권력을 누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사장들과 바리새인 등의 특권층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 죽여서 안달이었으며 결국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잘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죄인 괴수일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께 용서받아야될 대상일 뿐입니다. 착각하면 안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 하나님께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혹 의미가 있다면 그 재능을 주님을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사용할 때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나를 영접함이요
제일 낮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제일 높으신 분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제일 낮은 자와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이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땅의 권력 있는 자, 명예 있는 자, 물질 있는 자가 아니라 제일 낮은 자로부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만일 높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초라하고 작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오히려 그 때가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만나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는 제일 작아지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발견할 기회가 없는 사람입니다.

1999년 8월 2일. 아프리카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를 출발한 비행기가 벨기에 브뤼셀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착륙장치 안에서 사람모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