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중보자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51. 나의 중보자이신 예수님) / 딤전 2:1-7

“1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3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 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7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딤전 2:1-7)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심리적으로 3대 중요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① 자존심(자신이 중요한 존재로 평가받기 위하는 마음) ② 안정감(의식주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자유롭기 원하는 마음) ③ 소속감(어디엔가 속해 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기본욕망을 만족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참 만족을 얻으실 것입니다.
세계적인 대재벌인 록펠러(J. D. Rockefeller)의 어머니는 생전에 아들에게 세 가지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첫째, 예배당에 가면 항상 앞자리에 앉아라. 둘째,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 셋째,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라. 록펠러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살아 하나님께 이 땅의 축복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생각과 인생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으며 모든 악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 ‘모든’이라는 단어가 모두 5번이나 나타납니다.
첫 번째 ‘모든’이 세 번 기록된 것은 ‘기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중보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모든’이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신약시대 사람들은 크게 새 부류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 헬라인, 로마인입니다. 이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민족성이 강하여 물과 기름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자신의 민족이 우선이요, 먼저였습니다.
얼마 전 이라크에서 한국 분이 한 명 무장단체에 의해서 피살되었습니다(김선일 25세 남, 2004년 6월 24일 이라크 팔루자 인근). 이 사건을 통해서 이라크 파병에 대한 국론분열 현상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라크 국민에 대해서 적대시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신약시대의 세 민족은 이런 반목이 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범 세계적인 사람을 말한 다기보다는 민족을 뛰어넘어 사랑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라크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 ‘모든’이 두 번 기록된 것은 ‘구원’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는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중의 제일 중요한 쟁점이었습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해석하기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설을 주장했습니다. 칼빈주의 자들은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준비되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믿는 사람)만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의 주장을 따르는 것입니까? 칼빈입니다. 그래서 장로교는 칼빈주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사회의 어떤 계층이나 종족의 특성 때문에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 나라를 침략했던 일본 사람들도 예수믿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북한 사람도 중국사람도 베트남 사람도 이라크 사람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조건 유대인이라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느 민족 어떤 지위에 있느냐가 구원의 열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중보도 한 분이십니다.
본문 5절에 헬라어 원문에는 ‘가르’(ga;r)가 나옵니다. 이 말은 ‘왜냐하면’입니다. ‘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분되어 원수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모두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형제, 자매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 3:20에서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중보하실 수 있는 분도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부모님이 두분 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낳아 주신 분, 길러주신 분으로 말할 때 부모님이 혹 여러분을 모시고 섬길 수는 있는 것이지만 낳아주신 부모님은 한 분 외에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주신 분도 한 분이시요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 역시 한 분뿐이십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질 무렵, 워싱턴의 백악관 대기실에는 검은 가방을 든 훤칠한 키의 미국 신사가 초조히 실내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바로 한국의 육영공원 교사로 왔다가 곧 미 감리회 한국 선교사였던 헐버트였습니다. 그는 지금 일본의 마수에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로잡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고종 황제가 미국의 루스 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밀서를 지니고 대통령의 면회를 요청하고 서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밀서는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려 하고 있으며 이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며 무력에 의해 강압으로 이룩한 것이다. 한.미 수호조약의 규약과 그 정신에 입각하여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도와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헐버트는 백악관 문전에서 대통령을 만나지도 못하고 나와야 했습니다. 이미 제국주의의 열강간에 즉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비밀협약이 진행되었고 일본의 한국 침략은 미국의 용인을 받고 있는 터였습니다.

미국 대통령께 중보하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국익을 위해서 결정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보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영혼만을 위해서 결정하십니다.
히브리서는 다음 세 구절을 통해서 확실하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 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히 8:6)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5)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우리를 속전해 주셨습니다.
‘속전’에 해당하는 ajntivlutron(안틸뤼트론)은 헬라어 원문 성경에서도 이곳에만 나오는 유일한 단어입니다. 사람의 몸값을 말하는 lutron(뤼트론)과 대신을 말하는 ajntiv(안티)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당시의 노예들은 우리 나라의 노비와 같다고 보면 되는데 우리보다는 훨씬 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예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만 주면 사람을 살 수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자신의 힘으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많은 몸값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평생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우리의 죄 값은 무엇으로도 대신 값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계속해서 양과 소등을 제물로 드렸으나 이것으로 죄를 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몸값을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텔레마코스(Telemachus)는 주후 4세기에 수도원에서 기도하며 살았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기도중에 “로마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반복해서 듣고 수도원을 떠나 무조건 로마로 왔습니다. 도착해 보니 로마 원형경기장에 사람들이 몰려있었습니다. 검투사들(gladiators)이 싸우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쓰러져 죽을 때까지 경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께서 이 땅에 다녀 가신지가 4세기가 지났는데 아직도 오락과 같이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 흥분하는 관중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기장으로 뛰어들어가 양손을 들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관중들은 소리쳤습니다. “그놈을 치워 버려라!” 그리고 그는 다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검투사 하나가 칼등으로 그를 쳐서 땅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 그러자 다른 검투사가 그의 배를 칼로 찔러 그는 그곳에 엎드려져 일어나지 못하고 마지막 힘을 다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피가 모래위로 나오면서 어떤 한 사람이 먼저 일어나 경기장을 나갔습니다. 그러자 한 두 사람씩 경기장을 빠져나가 8만 관중이 모두 나가고 이때부터 로마 원형경기장에서는 다시는 검투 시합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하여…
7절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바울이 ‘이를 위하여’(7절)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전으로 내어주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전파하는 자’라고 말한 것의 원문은 임금이나 행정관, 군주 등의 명령을 받고 공공문서를 전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군대로 말하면 통신병입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고 복음을 전해야 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 드라마에서 왕의 명령서를 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시급성을 요하는 문서를 가지고 말을 빨리 재촉하여 왕의 급한 명령을 받고 가는 신하라는 뜻으로 빨간 깃발을 꽂고 빨리 달려가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바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가는 사도로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급하고도 중요한 명령을 받고 가는 전령이 가다가 쉬고, 딴 짓 하지 말고, 자신의 일을 보고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전령이 아닙니다. 사도가 아닙니다. 아마도 군법회의에 넘겨질 것입니다.

필리핀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처가 시장에서 암탉을 두 마리 샀습니다. 제가 가끔 비실대니까 몸보신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두 마리를 사서 한 마리는 끈으로 묶어 놓고 한 마리는 푹 고아서 아이들도 주지 않고 제게만 기름이 동동 뜨는 닭국을 가져왔습니다. 그때 그만 끈으로 묶어 두었던 닭이 끈을 풀고 담을 넘어 뒤편에 있는 수렁을 지나 건넛집 지붕으로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그 닭을 잡으려고 저는 발을 걷어붙이고 긴 장대를 들고 수렁을 지나 건너편 집에 가서 몇몇 아이들을 도움을 받으며 그 닭을 잡기 위해 이곳 저곳으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필리핀 촌닭은 어찌 그리도 잘 나르는지! 이 지붕에서 저 지붕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종횡무진 도망을 쳤습니다. 몇 시간을 따라다니며 저는 마음속으로 “주님 저 닭을 잡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저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므로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 저는 문득 저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에 이사와서 천하보다 귀한 잃은 영혼들을 찾으려고 이렇게 열심히 이 집 저 집을 다니지 아니했는데 고작 암탉 한 마리 잡으려고 이런 열심을 가지다니, 나도 별수 없는 속물에 불과하구나. 저는 닭을 따라 다니다가 결국 자신의 무지와 게으름을 발견했습니다. “주님 잃은 영혼들을 찾으러 이와 같은 열심을 가지고 이 집 저 집을 다니게 하옵소서. 종에게 믿음과 지혜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겁니다.

중국복음화에 문을 연 사람으로 알려진 허드슨 테일러는 아버지로부터 “성경을 사랑하거라. 하나님은 절대 거짓말을 안하신단다. 그분은 너희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실패하지도 않으신단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공부에 흥미를 잃고 문제아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교장으로부터 더 이상 학교공부를 시킬 수 없다는 통지를 받고 그는 집에서 놀며 아버지와 함께 약국 일을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제임스 테일러)는 불어, 라틴어를 가리키며 산수도 직접 가르쳤습니다. 허드슨은 두 명의 누이동생들(아벨리아 세 살 아래, 루이자는 여덟 살 아래)과 함께 자랐습니다. 산수를 가르치며 아이들이 재미 없어하면 재미있는 화재로 바꾸었는데 “면적이 영국의 100배나 되고 표면 중 사람이 살 수 있는 부분의 10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요.” “맞았어. 만일 중국인이 1m 간격으로 쭉 한 줄로 늘어선다면 지구를 일곱 바퀴나 돌게 된단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훗날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허드슨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명령을 받았으면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령의 사명입니다. 주앙교회 성도들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전령이심을 믿고 복음을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50.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 / 눅2:11, 행13:23-3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23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그 오시는 앞에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요한이 그 달려 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 풀기도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니 26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성경에 저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31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으니 저희가 이제 백성 앞에 그의 증인이라”(행 13:23-31)

우리 나라에는 성명학(姓名學)이라고 하는 이상야릇한 학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름 석자가 인생의 운명을 판가름한다고 믿는, 역학(易學)의 일종인 잡학(雜學)입니다. 성명학 관계자들은 성씨나 이름이 ‘금목수화토’ 오행(五行)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름을 연구해 보면 인간의 미래와 운명을 미리 점쳐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이런 성명학이나 사주팔자(四柱八字)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디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와 이름 석자에 자신의 운명을 맡겨보고 있는 것입니다. 참 어리석고 미련한 짓입니다. 설령 사주팔자와 이름 석자가 인생 행로(行路)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가정할지라도, 우리 기독교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어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생일과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런고로, 육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난 날짜와 그 지음 받은 이름이 우리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 인생을 얻은 구원의 날과 하나님께로부터 새로 지음 받은 이름이 더 중요합니다. 그야말로, 팔자가 바뀐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도 물론 필요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얻게 된 새 이름은 그리스도인, 성도입니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셨는데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인간의 구원입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의 높은 이상들을 설명해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방법과 길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즉 석가모니가 인간답게 사는 방법은 설명해 주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사해주거나 죽지는 않았습니다.
한사람이 강물에 빠졌습니다.
한 사람이 “왜 위험한 강물에 들어갔느냐? 가지 말라고 했지 않더냐?”
다른 사람은 “손을 이렇게 하고, 발을 이렇게 하여 수영을 하여 빨리 물에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웃옷을 벗고 물 속에 첨벙 들어가 그 사람을 붙잡아 나왔습니다.”
한사람은 유교이고, 다른 사람은 불교이고, 또 다른 사람은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달려 자신을 희생한 분입니다.
기독교가 왜 세상의 영화를 부러워하지 말고 경건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이 땅의 축복이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이 구원을 받아야 되는 문제를 생각하면 이 세상의 축복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이 땅의 축복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 땅의 축복도 의미가 있어집니다. 구원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의 향락을 위해 재물과 시간을 사용할 것입니다. 좀 나은 사람들은 사회의 구제를 위해서 재물을 나눌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드려지는 예물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인간에게 제일 기쁜 소식은 예수께서 나를 위해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미국의 대통령이 나를 만나기 위해, 나를 구원해 주기 위해서 한국에 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난리가 날겁니다. 미 대통령이 나 한사람을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 땅에 온다면 그것은 최고의 영광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미국 대통령이 와서 이 세상의 물질과 권세를 어느 정도 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분도 내 영혼을 구원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정도이겠지 나를 위해 희생하지는 않을 겁니다.
성경은 분명히 전합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아멘-

예수의 이름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실 것이다.” 또는 “구주”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누가 지어 주셨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누가 제일 권한이 있습니까?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아버지 되는 요셉에게 친아버지인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마 1:20-21에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직접 예수(구주)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 뜻으로 말하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나의 “구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분을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름을 부르기는 해도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 뜻과 의미를 모른체 부르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예수 이름이 왜 능력이 있습니까? 왜 예수이름만 부르면 마귀가 도망갑니까? 죄인은 누구를 보면 도망갑니까? 첫째는 자기가 죄지은 사람을 만나면 도망갑니다. 그리고 경찰을 보면 도망갑니다. 마귀는 예수님만 보면 도망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만 부르면 사단은 도망갑니다. 무서워서 벌벌 떱니다. 그분이 사단을 이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녀 가신지 2000년이 넘었습니다. 예수 이름 불러서 손해본 사람 있으면 말해 보세요. 예수 이름은 절망에서 소망을, 죽음에서 생명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엡 1:21) 하셨으며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2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속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당신의 독생자를 “예수(구주)”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에 대해서 조금 더 증거 하고자 합니다.
기독교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음으로 종교적 삶(권리와 의무)을 시작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하나님은 그의 생애 속에서 생동력 있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학자들에게만 필요한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우리 모두의 생활 속에 역사 하시는 실제적인 체험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나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변을 해 주어야 합니다.
(1)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2)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3)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구주를 증거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13:23-31의 말씀은 바울이 1차 선교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안식일날 유대인 회당에서 증거 한 것입니다(행13:14). 바울과 일행은 안식일에 이 유대인 회당에 가서 앉아있었습니다. 회당장이 성경을 읽은 후에 사람을 보내서 바울 일행에게 할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절호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바울은 손짓을 해가며 유대인에게 증거 합니다(행 13:16).
바울이 증거 한 핵심적인 것은 예수님은 구주라는 것입니다. “23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그리고 26절에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이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하셨습니다. 오래 전에 상표 인지도를 조사하여 보고한 것에 보면 전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코카콜라”라는 말을 들어보았느냐고 물어보고 그리고 “예수”를 들어보았냐고 질문했습니다. “코카콜라”를 들어보았다고 대답한 사람은 조사대상 사람 중에 90%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들어봤다는 사람은 70%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한 회사의 브랜드의 이름보다 예수의 이름을 더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전합니까? “예수” 이름만 전하면 됩니다. 그 이름 자체가 구원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카톨릭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예수님의 이름으로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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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거짓 증인들을 조심하십시오.
상표도 유명해지면 가짜 상표를 붙여 파는 악덕 상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유명하고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 24:5)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알렉산더 대제 휘하에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형편없는 생활을 하면서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먹칠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알렉산더 대왕이 심문하게 되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알렉산더입니다”
대왕은 다시 물었다. “이름이 뭐냐?” “알렉산더입니다”
화가 난 대왕이 소리쳤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네 이름을 대라”
병사는 세 번째도 똑같은 말로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대왕은 “너는 네가 지은 죄만큼 벌을 받도록 하라. 그리고 이름을 바꾸든지 행실을 고치든지 선택하도록 하라. 아무도 내 이름 알렉산더를 자기 이름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링컨은 “남자 나이 40이 지나면 자기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이름과 역할이 있다. 역할과 이름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그 사람은 위인이 될 수도 있고 지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름 값을 다 못해 얼굴을 들지 못하곤 합니다. 특히 크리스천으로서의 명분과 책임을 다하지 못해 비난의 대상이 될 때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부흥, 우리 가정의 문제, 나의 문제들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만 불러 보세요. 예수 이름 자체가 능력이요, 구원이요, 생명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주앙교회 이름에 자부심을 갔습니다. 어떤 분은 약간 현대적이지 못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의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만을 바라보라! 주님을 만을 바라보라! 온전히 예수 이름만을 부르라! 이런 성도들에게는 구원과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9.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 마 1:16, 막 8:29-31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6)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29-31)

참 세월이 빠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예배드린 것이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10년이 지나서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할 것 같습니다. 세월은 참 빠르다. 그 때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모두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는 세월 잡으려고 급하게 사는 민족 중에 우리민족을 따를 민족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한국사람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현지 가이드들은 다른 말은 몰라도 “빨리 빨리”는 압니다. 저도 패키지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 제일 빠른 보트 타고 섬을 한바퀴 돌아옵니다. 그런데 유럽사람들은 늦게 일어나 느린 큰배를 타고 서서히 그 섬을 돌려고 오고있었습니다.
우리는 말도 빠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컴퓨터 시대에는 한 단어라도 줄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미개한 말일수록 단어가 길고 문장이 깁니다. 원래부터 한국말은 간단합니다. 신체를 부르는 말은 거의 단음절로 되어있습니다. “눈, 코, 입, 배, 젖, 손, 팔”이 모두 단음입니다. 두 음절도 있지만 그것은 “머리, 다리, 허리”처럼 규칙적인 꼬리를 가지고 있어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은 미분화 현상이라고 해서 “머리 깍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 카락을 깍는다”로 해야 합니다. 여자들이 미장원 다녀와서 하는 말이 “나 머리 잘랐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아니 미장원이 머리 자르는 사형장입니까? 외국인이 한국 사람을 보고 “빨리 빨리”라고 놀림을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 “빨리 빨리”가 부작용도 있었지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그들이 한국사람 부르는 소리가 “빨리 빨리”가 다른 것으로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어떻게 불러주면 제일 좋겠습니까? 그리스도인 “크리스찬”으로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빨리 빨리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예수님께 제일 많이 붙여지는 칭호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Cristov”)라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이 단어의 횟수가 얼마나 나오는지 세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적용된 것만(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것은 제외) 약 535개가 나옵니다. 제가 1년 동안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오늘까지 49번을 했습니다. 참 다양한 예수님의 칭호, 상징, 은유적이 표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제목들을 주보에 적어두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성경저자들은 그 시작에서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누가는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라고 증거 했습니다.
신약성경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전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Cristov”)라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야”입니다(요 1:41, 4:25). “메시야”를 헬라말로 번역했을 때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메시야”라는 말보다는 “그리스도”란 말이 많이 사용된 것은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대인에게보다는 헬라지역의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달되고 그곳으로부터 다시 전 세계에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도 그리스도인을 크리스찬(Christian)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돈만 있으면 가지 못할 이 땅의 어느 곳도 없습니다. 단 한곳을 빼고는요. 바로 북한입니다. 그러나 북한도 1992년 중국과 수교를 맺고 백두산(장백산)을 구경가게 되면서 조금씩 변화가 왔습니다. 이 때 가이드하던 자매가 있었는데 조선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백두산 정상에서 교회를 다녀보지 않아서 아멘이라는 말도 모르는 가이드자매에게 어떤 장로님이 기도하면서 “아멘”하고 그 자매가 묻길레 기독교인들은 기도하고 나면 반드시 아멘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때 관광객 중 “평신도”라는 깃발을 꺼내 들어서 이 자매가 생각하기를 아 남조선에는 “평안도, 황해도, 함경북도, 경기도”가 있는 것처럼 남조선에는 “평신도”가 있구나 생각했답니다.
성도의 이름을 통일한다면 그리스도인 즉 크리스찬으로만 부르면 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용어는 구약에서 “메시야”는 ‘기름부음’의 뜻으로 제사장(출28:41), 왕(삿9:8), 선지자, 예언자(왕상19:26)에게 해당하는 용어입니다. 사무엘상 16:6에서는 “여호와의 기름부으심”으로 나옵니다. 시편에서는 다윗의 왕권에 사용되었습니다(시2:7, 100:4 등).
그리고 사람들(유대인)은 다윗과 같은 왕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대망(메시야)사상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자신의 저서의 시작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고 했습니다. 예수가 바로 기다리던 “하나님이 보내신 자” 메시야 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서 당시의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을 보통 사람(랍비)과 달랐으며 이적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지자중의 한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하나님이 다시 보내신 엘리야 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이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가 본문 막 8:29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를 자신을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있고, 교회에 나와서 장사나 하려는 사람이 있고, 병든 몸이나 나아보려고 온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기름부어 보내신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이 있은 후에야 예수님은 본문 30절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0-31)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을 때 예수님은 당신의 앞일을 제자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비밀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실 때 하나님의 비밀의 능력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제자들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4:40-41에 “40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귀신을 내어쫓으실 때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 조용히 자신의 앞날을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들의 부르짖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당시의 예수님은 사역이 더 남아있는 상태여서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에게 당신의 사역에 방해를 일찍 받으시는 것을 피하시기 위해서 꾸중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1-10)고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이 한 말씀에 나면서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나 걷고 뛰고 찬송을 했습니다.
도대체 『예수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이름이었는지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그 인생이 송두리채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무엇인데 이런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고 세상이 해결할 수 없던 일도 회복시키고 해결케 되는지 그저 감격할 뿐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두 가지로 말씀 드릴수가 있습니다.
① 내게 있는 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름』뿐이란 말입니다.
② 네게 줄 것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뿐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게 있는 것도 예수그리스도 이름이요 네게 줄 것도 예수그리스도 이름이란 말씀입니다.
사람의 삶이란 먼저는 내가 가져야 합니다. 내가 있어야 합니다. 물질도, 건강도, 평안도, 기쁨도, 능력도, 은혜도 내가 먼저 있어야 줄 수 있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먼저 주앙교회 성도들이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내가 기쁨이 없는데 어떻게 복음을, 기쁜 소식을 전합니까?
왜! 사람이 감추려고 해도 얼굴에 너무 좋아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 있지 않습니까? 혼자서 너무 기쁜 나머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혼자 실컷 웃고 즐기고 싶은 것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인입니다. 정말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앞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양이나 염소를 하나님께 드렸을 뿐입니다. 이것 드렸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면해보자는 것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방인인 우리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각자 영생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다고 산으로, 골방으로 가도 해결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무 기쁘기 때문에 복음은 전하지 않으려 해도 전해지는 것입니다. 기쁜 사람의 얼굴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라는 로마 황제의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아 체포되었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8.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 / 엡 4:15-16, 5:23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16)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제가 공원에 앉아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데 비둘기를 보았더니 다리가 멀쩡한 놈이 별로 없었습니다. 뒷발이 부러진 놈, 옆 발이 부러진 놈, 한 마리는 아직도 실이 얽혀져 있어 잡아 가지고 풀어주려고 했으나 푸드덕거리더니 도망가 버렸습니다. 저도 살려고 인간 가까이 다가왔으나 살아남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상처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좀 배가 고파도 산비둘기가 더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없는 한적한 곳 자연만 있는 곳, 오히려 그곳이 이들이 살기에 더 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죽지는 않았습니다. 열심히 살겠다고 먹이를 주어 먹으러 오는 모습은 우리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도 비둘기 보다 별로 나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직 죽은 것은 아닙니다. 다리만 아파서는 죽지 않습니다. 머리가 상하면 죽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사단과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한 것이 있습니다.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심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머리를 상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꿈치 약간을 상하게 됩니다. 시편 74:13에서도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사망 직전에 있습니다.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꿈치만 상했습니다. 사단의 머리가 깨어진 후에야 교회가 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고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최고의 인사는 머리숙여 절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찾아온 장면입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비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창 43:28)고 했습니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창 49:26)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땅에서 나와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출 12:27)고 했습니다.
세상 많은 민족이 인사하는 방법은 약간씩 다르지만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은 최고의 인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겸손히 낮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도 머리 숙여 경배해야 합니다. 고개 뻣뻣이 들고 있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께 겸손을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북한에는 “숙인 머리 베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잘못을 진실로 뉘우치는 사람은 관대히 용서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머리에 면류관을 씁니다.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고”(출 29:6)
“관유를 가져다가 그 머리에 부어 바르고”(출 29:7)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시 21:3)
머리가 신체 중에 제일 귀중한 부분이기 때문에 머리에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되는 예식, 왕이 되어 면류관을 머리에 씁니다. 마라톤 우승자는 월계관을 씌어줍니다. 미스코리아는 미스코리아 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좋은 것은 잠언서 기자가 말한 관입니다.
잠언 1:8-9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제물의 머리에 안수함
제물에도 머리에 안수했습니다. “너는 수송아지를 회막 앞으로 끌어 오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송아지 머리에 안수할지며”(출 29:10) “너는 또 수양 하나를 취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수양의 머리위에 안수할지며”(출 29:15)라고 했습니다. 또 레위기에 보면 재물을 드릴 때마다 “머리에 안수하고”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그냥 드리면 되지 왜 머리에 안수하고 드리라고 했겠습니까? “안수”예식을 행해야 우리 인간을 대신해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안수하지 않으면 그냥 양, 소를 드리는 것이지 우리 죄를 담당한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머리는 신체의 다른 부분과 구분되었습니다.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민 6:5)
“그 부모 형제 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민 6:7)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욥 1:20)

예수님이 말씀하신 머리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마 5:36)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눅9:58)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마 10:30, 눅12: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마 26:7, 막14:3)

교회의 머리되심
“머리”는 지체를 인도하는 부분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은 곧 교회의 인도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궁극적으로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교회가 바로 섭니다.
“두 사람의 머리는 한 사람의 머리보다 낫다.”(헤이우드)고 했습니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바둑둘 때 보면 9급이 100명 모여도 1급 한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머리로 하는 것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을 합하는 것은 많은 사람이 있으면 있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머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마음을 합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머리를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려고 한다면 안됩니다.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며 운영은 하지만 머리는 되지 맙시다. “주앙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아멘
본문 엡 4:16절에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한 지체라고 비유했을 때 그리스도가 머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대로 움직여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전에서 비둘기 팔고 세금내기 위해서 돈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상을 왜 엎으셨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의 머리가 당시의 대제사장이 마음대로 하고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예수님이 가르쳐 준대로 일러 준대로 만 하시기 바랍니다.

두개의 머리(탈무드)
탈무드에는 어떤 사고법을 단련시키기 위해 현실성이 부족한 원리와 같은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어린아이가 태어났다면, 이 아이를 한 사람으로 대우해야 하는가. 아니면 두 사람으로 대우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얼핏 생각하기에는 터무니없는 것 같지만, 예를 들어, ‘인간은 설령 머리가 둘 이더라도 몸통이 하나이면 한 사람이다’라든지 ‘머리 하나를 한 사람으로 취급해야 한다’라는 원칙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가 태어나 한 달이 지나면 예배당으로 데리고 가서 축복을 받는다. 그런데 이 때 머리가 둘이면 두 번 축복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몸통이 하나이니까 한번만 받아도 되는가? 또, 기도할 때는 작은 주발을 머리 위에 얹는데 이 때 머리가 둘이니까 두 개의 주발을 얹어야 하는가? 혹은 몸통이 하나이니까 한 개의 주발을 얹어야 하는가?
여러분은 이 가설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겠습니까? <탈무드>의 답은 아주 명쾌합니다. 한쪽 머리에 뜨거운 물을 부어 다른 쪽 머리도 뜨겁다고 비명을 지르면 한 사람이고, 만일 다른 쪽 머리가 무표정하게 있으면 두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유태인들이 어떤 민족인가를 이야기할 경우, 이 이야기를 잘 인용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에 있는 유태인들이 박해를 받거나, 러시아에 있는 유태인들이 박해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른다면 그는 유태인이고,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유태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지체라면 머리는 한 분 예수그리스도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체입니다. 우리 지체 중 하나가 아프면 그리스도는 아프신 것입니다. 즉 교회에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아픔과 슬픔, 기쁨을 함께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따로 따로 느낀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가 머리되시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왕의 머리가 되심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되실 뿐만 아니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5)
이 땅의 모든 왕들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알면 이 세상의 왕도 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다윗 왕이 그랬습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 역사상 제일 큰 민족을 이루었지만 그는 결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맷돌로 골리앗을 이겼던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면 이긴다는 것을, 승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평생 괴로우나 즐거우나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의지했습니다.
왕은 한 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직장에도 있습니다. 가정에도 있습니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어느 곳이나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요, 왕이 되실 때 우리는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것입니다. 자기가 머리라고 착각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왕”입니다.

“여보게 친구, 자네의 긴 주둥이로 내 목의 가시를 좀 뽑아줄 수 있겠나, 사례는 충분히 하겠네”
학은 늑대의 입에 긴 주둥이를 집어넣고 목구멍에 걸린 가시를 어렵게 뽑아냈습니다. 늑대는 그제 서야 살 것 같았습니다.
“옳지 됐어, 참 시원하군, 이렇게 좋은걸”
학은 늑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자 이제 약속한 사례비를 좀 주시지요”
그러자 늑대란 놈이 화를 벌컥 냈습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구, 네 머리가 내 입에 들어갔을 때 깨물어 토막을 내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해라”
이솝우화의 한 토막입니다. 세상에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주앙교회 성도여러분 주님의 은혜 있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니까 내가 왕이 되고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