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중보자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51. 나의 중보자이신 예수님) / 딤전 2:1-7
“1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3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 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7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딤전 2:1-7)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심리적으로 3대 중요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① 자존심(자신이 중요한 존재로 평가받기 위하는 마음) ② 안정감(의식주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자유롭기 원하는 마음) ③ 소속감(어디엔가 속해 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외로운 마음)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기본욕망을 만족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참 만족을 얻으실 것입니다.
세계적인 대재벌인 록펠러(J. D. Rockefeller)의 어머니는 생전에 아들에게 세 가지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첫째, 예배당에 가면 항상 앞자리에 앉아라. 둘째,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 셋째,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라. 록펠러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살아 하나님께 이 땅의 축복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생각과 인생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으며 모든 악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6절까지 ‘모든’이라는 단어가 모두 5번이나 나타납니다.
첫 번째 ‘모든’이 세 번 기록된 것은 ‘기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중보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모든’이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신약시대 사람들은 크게 새 부류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 헬라인, 로마인입니다. 이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민족성이 강하여 물과 기름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자신의 민족이 우선이요, 먼저였습니다.
얼마 전 이라크에서 한국 분이 한 명 무장단체에 의해서 피살되었습니다(김선일 25세 남, 2004년 6월 24일 이라크 팔루자 인근). 이 사건을 통해서 이라크 파병에 대한 국론분열 현상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라크 국민에 대해서 적대시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신약시대의 세 민족은 이런 반목이 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범 세계적인 사람을 말한 다기보다는 민족을 뛰어넘어 사랑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라크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두 번째 ‘모든’이 두 번 기록된 것은 ‘구원’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는 17세기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논쟁중의 제일 중요한 쟁점이었습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해석하기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보편 구원설을 주장했습니다. 칼빈주의 자들은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준비되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믿는 사람)만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의 주장을 따르는 것입니까? 칼빈입니다. 그래서 장로교는 칼빈주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사회의 어떤 계층이나 종족의 특성 때문에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때 우리 나라를 침략했던 일본 사람들도 예수믿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북한 사람도 중국사람도 베트남 사람도 이라크 사람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조건 유대인이라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느 민족 어떤 지위에 있느냐가 구원의 열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중보도 한 분이십니다.
본문 5절에 헬라어 원문에는 ‘가르’(ga;r)가 나옵니다. 이 말은 ‘왜냐하면’입니다. ‘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분되어 원수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모두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형제, 자매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 3:20에서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중보하실 수 있는 분도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부모님이 두분 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낳아 주신 분, 길러주신 분으로 말할 때 부모님이 혹 여러분을 모시고 섬길 수는 있는 것이지만 낳아주신 부모님은 한 분 외에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주신 분도 한 분이시요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 역시 한 분뿐이십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질 무렵, 워싱턴의 백악관 대기실에는 검은 가방을 든 훤칠한 키의 미국 신사가 초조히 실내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는 바로 한국의 육영공원 교사로 왔다가 곧 미 감리회 한국 선교사였던 헐버트였습니다. 그는 지금 일본의 마수에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로잡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고종 황제가 미국의 루스 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밀서를 지니고 대통령의 면회를 요청하고 서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밀서는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려 하고 있으며 이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며 무력에 의해 강압으로 이룩한 것이다. 한.미 수호조약의 규약과 그 정신에 입각하여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도와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헐버트는 백악관 문전에서 대통령을 만나지도 못하고 나와야 했습니다. 이미 제국주의의 열강간에 즉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비밀협약이 진행되었고 일본의 한국 침략은 미국의 용인을 받고 있는 터였습니다.
미국 대통령께 중보하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국익을 위해서 결정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보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영혼만을 위해서 결정하십니다.
히브리서는 다음 세 구절을 통해서 확실하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 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히 8:6)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5)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
우리를 속전해 주셨습니다.
‘속전’에 해당하는 ajntivlutron(안틸뤼트론)은 헬라어 원문 성경에서도 이곳에만 나오는 유일한 단어입니다. 사람의 몸값을 말하는 lutron(뤼트론)과 대신을 말하는 ajntiv(안티)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당시의 노예들은 우리 나라의 노비와 같다고 보면 되는데 우리보다는 훨씬 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노예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만 주면 사람을 살 수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자신의 힘으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많은 몸값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평생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우리의 죄 값은 무엇으로도 대신 값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계속해서 양과 소등을 제물로 드렸으나 이것으로 죄를 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몸값을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텔레마코스(Telemachus)는 주후 4세기에 수도원에서 기도하며 살았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기도중에 “로마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반복해서 듣고 수도원을 떠나 무조건 로마로 왔습니다. 도착해 보니 로마 원형경기장에 사람들이 몰려있었습니다. 검투사들(gladiators)이 싸우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쓰러져 죽을 때까지 경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께서 이 땅에 다녀 가신지가 4세기가 지났는데 아직도 오락과 같이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 흥분하는 관중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경기장으로 뛰어들어가 양손을 들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관중들은 소리쳤습니다. “그놈을 치워 버려라!” 그리고 그는 다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검투사 하나가 칼등으로 그를 쳐서 땅에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 그러자 다른 검투사가 그의 배를 칼로 찔러 그는 그곳에 엎드려져 일어나지 못하고 마지막 힘을 다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피가 모래위로 나오면서 어떤 한 사람이 먼저 일어나 경기장을 나갔습니다. 그러자 한 두 사람씩 경기장을 빠져나가 8만 관중이 모두 나가고 이때부터 로마 원형경기장에서는 다시는 검투 시합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를 위하여…
7절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바울이 ‘이를 위하여’(7절)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전으로 내어주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전파하는 자’라고 말한 것의 원문은 임금이나 행정관, 군주 등의 명령을 받고 공공문서를 전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군대로 말하면 통신병입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고 복음을 전해야 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 드라마에서 왕의 명령서를 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 시급성을 요하는 문서를 가지고 말을 빨리 재촉하여 왕의 급한 명령을 받고 가는 신하라는 뜻으로 빨간 깃발을 꽂고 빨리 달려가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바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가는 사도로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급하고도 중요한 명령을 받고 가는 전령이 가다가 쉬고, 딴 짓 하지 말고, 자신의 일을 보고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전령이 아닙니다. 사도가 아닙니다. 아마도 군법회의에 넘겨질 것입니다.
필리핀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처가 시장에서 암탉을 두 마리 샀습니다. 제가 가끔 비실대니까 몸보신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두 마리를 사서 한 마리는 끈으로 묶어 놓고 한 마리는 푹 고아서 아이들도 주지 않고 제게만 기름이 동동 뜨는 닭국을 가져왔습니다. 그때 그만 끈으로 묶어 두었던 닭이 끈을 풀고 담을 넘어 뒤편에 있는 수렁을 지나 건넛집 지붕으로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그 닭을 잡으려고 저는 발을 걷어붙이고 긴 장대를 들고 수렁을 지나 건너편 집에 가서 몇몇 아이들을 도움을 받으며 그 닭을 잡기 위해 이곳 저곳으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필리핀 촌닭은 어찌 그리도 잘 나르는지! 이 지붕에서 저 지붕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종횡무진 도망을 쳤습니다. 몇 시간을 따라다니며 저는 마음속으로 “주님 저 닭을 잡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저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므로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 저는 문득 저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에 이사와서 천하보다 귀한 잃은 영혼들을 찾으려고 이렇게 열심히 이 집 저 집을 다니지 아니했는데 고작 암탉 한 마리 잡으려고 이런 열심을 가지다니, 나도 별수 없는 속물에 불과하구나. 저는 닭을 따라 다니다가 결국 자신의 무지와 게으름을 발견했습니다. “주님 잃은 영혼들을 찾으러 이와 같은 열심을 가지고 이 집 저 집을 다니게 하옵소서. 종에게 믿음과 지혜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겁니다.
중국복음화에 문을 연 사람으로 알려진 허드슨 테일러는 아버지로부터 “성경을 사랑하거라. 하나님은 절대 거짓말을 안하신단다. 그분은 너희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실패하지도 않으신단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공부에 흥미를 잃고 문제아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교장으로부터 더 이상 학교공부를 시킬 수 없다는 통지를 받고 그는 집에서 놀며 아버지와 함께 약국 일을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제임스 테일러)는 불어, 라틴어를 가리키며 산수도 직접 가르쳤습니다. 허드슨은 두 명의 누이동생들(아벨리아 세 살 아래, 루이자는 여덟 살 아래)과 함께 자랐습니다. 산수를 가르치며 아이들이 재미 없어하면 재미있는 화재로 바꾸었는데 “면적이 영국의 100배나 되고 표면 중 사람이 살 수 있는 부분의 10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요.” “맞았어. 만일 중국인이 1m 간격으로 쭉 한 줄로 늘어선다면 지구를 일곱 바퀴나 돌게 된단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훗날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허드슨 테일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명령을 받았으면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령의 사명입니다. 주앙교회 성도들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전령이심을 믿고 복음을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