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처럼 가르치라

예수님의 생애(8. 예수님처럼 가르치라) / 누가복음 4:31-37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여러분들은 교회에 나오시면서 기도하시면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데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아동교육가들은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든, 무엇이든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든 쉽게 손에 넣으면 인내나 노력이라는 소중한 정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자기 힘으로 성취해 나가는 기쁨을 모른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진 아이는 양보를 모른다고 합니다. 이 말에는 동의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것에 먼저 ‘하나님의 뜻’이라면이 전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그 믿음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교육을 받아야 하고 교육을 시켜야합니다. 교회에 오셔서 잠깐 눈감았다 뜨고서 기도했다고 무엇이든지 다 되어있으면 여러분 우리는 망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가지고는 순교는커녕 작은 고난에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이 됩니다. 환난이 오면 쉽게 무너집니다. 포기합니다. 아이들도 ‘스스로 인내에 도전할 때 아이는 행복의 첫걸음을 내디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셔서 인내와 사랑, 그리고 이웃과 나눔에 대해서 배우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가르칠 수 있을까?
오늘 설교의 제목에 의아심을 품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님처럼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물음입니다. 그런 의구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본래부터 “죄가 없으셨으며”(요일 4:15, 히 4:15), “죄를 범치 않으셨으며”(벧전 2:22), “죄를 알지도 못하신”(고후 5:21)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아무도 “죄로 책잡을”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예수 님을 우리가 어떻게 따라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바로 예수님의 인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처음 이 땅에 보내실 때(초림)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보통의 사람과 같이 탄생하게 하시고 자라게 하셨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마지막 재림할 때처럼 공중에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천사를 대동하고 큰 나팔을 불고 하늘에게 직접 올리워 가실 때처럼 초림하셨다면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부정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바로 우리는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성장하셨고(눅 2:52), 피곤해 하셨으며(요 4:6), 배고픔을 느끼셨고 목말라 하셨습니다(요 4:7-8). 또한 주님도 유혹을 받으셨고(마 4:1-10, 눅 4:1-12, 히 4:15), 눈물을 흘리셨으며(요 11:35, 38), 분노와(막 3:5) 슬픔과(마 26:37-38) 기쁨과(요 15:11, 17:13) 죽음을(요 19:30) 경험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모습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 방식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지 예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 자신이 예수님처럼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을 넘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모든 일을 똑같이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성령 하나님이 직접 도와주시고 그분이 교사이기 때문에(요 14:26, 16:12-19, 고전 2:10-16) 우리의 부족함이 채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있지만 가르쳐야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내가 너희에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만 하시고 우리에게 교수법을 가르치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교사였는가?
예수님에 대한 호칭 중에서 두 개 이상의 복음서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28개가 있는데 그 중에 ‘예수님(615번)’, ‘주님(191번)’, ‘인자(80번)’, 그리고 네 번째로 많이 나타나는 단어가 ‘선생(70번)’ 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처럼 선생님이라고 많이 부른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한마디로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3-14)
여러분!
선생님이라는 말을 들으려면 무엇을 해야 됩니까?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기적만 베풀었으면 선생이라는 말보다는 ‘요술사’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선생이라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가르치다. 가르치심의 단어는 54번이나 나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에만 관심이 많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정말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초자연적인 이적을 보고 이분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언제나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가난한 자의 모든 쓸 것을 공급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요술사가 아니라 교육가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장소를 보면
‘회당’(마 4:23, 9:35, 13:54, 막 1:21, 6:2, 눅 4:15, 6:6, 13:10, 요 6:59, 18:20),
‘예루살렘 성전 뜰’(마 21:23, 26:55, 막 11:15, 17, 12:35, 14:49, 눅 19:47, 20:1, 21:37, 요 7:14, 28, 8:2, 20, 18:20),
‘집’(눅 5:17-18, 7:36-50),
‘마을이나 동네에서’(마 11:1, 막 6:6, 눅13:22)
‘야외에서’(산에서 마5:1-2), (호숫가의 배에서 막4:1, 눅 4:3), (거리에서 눅 13:26)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람들
서기관들(마 8:19-22, 눅 9:57-62, 막 2:6-10)
바리새인들(마 12:1-8, 19:3-9, 22:41-46, 눅 14:12-14)
대제사장과 장로들(마 21:23-46, 막 11:27-12:12, 눅 20:1-8)
사두개인들(마 22:23-32, 막12:18-27, 눅 20:27-44)
율법사(눅 10:25-37, 눅 11:45-53, 눅 14:1-6)
세례요한의 제자들(마 9:16, 11:2-6)
제자들(마 17:19-20, 막 9:14-29, 눅 10:1-20)
회당장(눅 13:14-17)
여인들(눅 10:38-42, 눅 11:27-28)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때와 장소, 대상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기회만 있으면 가르치셨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가르치다보면 선생님이 이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가르치지 않으면서 선생이라는 말을 듣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정말로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하라!

질문과 대화
예수님이 하신 질문은 복음서에 모두 304개 나옵니다. 이중에 겹치는 것을 빼고도 225개의 다른 질문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토록 많은 질문을 던지신 것은 가르치신 내용이나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대화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사실과 반대되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동의를 얻기 위해서, 잘못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등입니다.
그러나 결코 사단하고는 대화하지 않는 예수님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도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많이 하신다는 것은 그만큼 대화를 많이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부부간에도 많은 대화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내 주장은 강하게 하는데 대화하는데 익숙하지가 못합니다. 대놓고 화내는 것이 대화가 아닙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대화입니다. 예수님이 질문을 많이 하셨다는 것은 대화하기를 좋아하신다는 뜻입니다. 요즘말로하면 상담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가셨다는 뜻입니다. 대화는 일방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상대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장난감을 자녀의 동의 없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하면 교육이 안됩니다. 어쩔 수 없이 장난감을 버려야 한다면 아이에게 직접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사주고 쉽게 버리면 그 아이는 물건의 소중함을 모를 것입니다.

확실함
본문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교육은 “아마”라든지 “그럴 것이다” 혹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등의 불확실한 상상적인 이야기는 없습니다. 언제나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와 같이 명확히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의 지도자인 랍비나 서기관, 율법연구가들은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라든지 “랍비는 이렇게 말했고, 율법과 예언가들은 이런 말을 했다”였습니다. 즉 오랜 전통으로부터 내려오는 방법이고 이것을 잘 할수록 많은 학식이 있는 선생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에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7)고 했습니다.

겸손
거만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칭송과 찬양을 받으려 했던 율법학자들과 랍비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겸손을 보여주셨고 그것을 명하셨습니다.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2-14)곻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직접 오신 목적에 대해서도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과는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지적하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11-13)라고 하셨습니다.

일관성
우리(한국)의 교육은 이 문제를 일찍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바닷가의 ‘계’에 대한 비유를 잘 사용합니다. 자신은 옆으로 가면서 자식들에게 ‘앞을 보고 똑바로 가라’고 해야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만 됩니다. 학생들에게, 자식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한참을 그 이유의 타당성을 이야기하고 정작 자신이 담배를 피우면 학생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목사가 어려운 것은 말하는 것, 설교하는 것만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말한 대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으로만 선교하는 것은 무의미 합니다. 그저 큰 교회의 단점을 자격지심에서 꼬집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내가, 우리교회가 바르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말한 대로 실천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조금도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요 14:6)라고 말씀하시고 진리로 사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고(마 5:43-48) 자신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신이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지키시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정신은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인다”고 어거스틴은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사랑과 고난에 대해서 말씀만을 하시고 자신이 그와 같이 살지 않으셨다면 제자들이 모두 순교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선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모습대로 우리도 본을 받는 것이고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종적인 교육인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도 인류 역사상 제일 위대한 이 교육 대열에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복음

예수님의 생애(7. 천국복음) / 마태복음 4:17, 마가복음 1:15, 누가복음 4:43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눅 4:43)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그 때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모아 두었다 땔감으로 사용했습니다. 부잣집은 돈을 주고 장작을 많이 사다 놓습니다. 저희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산에가서 직접 나무를 해와야 했습니다. 아버님은 장사를 하시기 때문에 여러 장터를 옮겨 다니십니다. 그래서 집에서 어머님하고 저하고 나무하러 갑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님은 밤이 되어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무를 하셨습니다. 저는 무서워서 “그만 가 엄마!”라고 보챘습니다. 그러면 저희 어머님은 “그래 조금만 더 참아”하시면서 점점 어두워지는데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맘놓고 일할 수 있는 것은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둔 밤일지라도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그 맘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갈 집이 없는 나그네는 해가 지기 전에 벌써 ‘오늘은 어디서 하룻밤을 묵어갈 것인가?’하고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영혼이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죽음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낙엽이 떨어져 굴러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그리 슬퍼하지 않습니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 다가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돌아갈 집이 예비 되지 않은 영혼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낙엽을 보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돌아갈 곳이 없다면 큰 낭패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을 가지고 성공했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은 우리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1. 기독교의 슬로건
역사상 새롭게 등장하는 모든 사상은 하나의 슬로건이 있습니다. 불란서 혁명의 표어는 “자유, 평등, 우애”이며 이슬람교의 표어는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은 없으며 모하메드는 하나님의 사도이시다”입니다. 무슬림들은 이 표어를 기도할 때마다 반복합니다. 앞부분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뒤 부분은 ‘모하메드만이 하나님의 사도’로 인정하는 잘못된 고백입니다. 북한의 표어는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입니다. 위대한 사상가나 단체는 모두 슬로건이 있습니다. 요즘 기업의 슬로건은 아마도 손님을 왕같이 모시는 최고의 서비스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름대로의 슬로건이 있는데 기독교의 최대 슬로건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말씀의 제목을 따라합시다. “천국복음”입니다.
복음서에만 “천국,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100회 이상 언급되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핵심주제이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도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8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눅 10:8-9)고 하셨습니다.

2. 예수님 설교의 중심 주제
예수님의 첫 설교 제목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입니다.
그 유명한 산상복음의 팔 복에서 처음 말씀하신 것도 천국입니다.
(마 5: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루터는 “율법의 방망이로 얻어맞은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천국은 회개한 자의 심령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찌할꼬”의 찔림에 몸부림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구약이 없는 곳에 신약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회개가 없는 곳에 사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난하다”는 말은 “나에게는 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실제의 의도 없지만 혹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철저하게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그 때 천국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팔 복의 마지막 여덟 번째도 천국입니다.
(마 5: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 역시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요한복음 3장 1-12절까지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관원(70명의 산헤드린회원 중 한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밤중에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그는 세상 적으로 볼 때 더 필요한 것이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솔직히 자신도 선생의 위치에 있었지만 천국에 관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공부 많이 하면 천국에 관한 문제가 해결됩니까? 아니면 국회의원쯤 되면 천국에 관한 문제가 해결됩니까? 아니면 사장님, 회장님쯤 되면 천국에 관한 문제가 해결됩니까? 안됩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예수님께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전한다는 소문이 유대에 다 퍼져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에서 이영제 목사가 주일날에 예수님에 대해서만 설교한다고 소문이 나야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수 있는 분들이 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같은 표적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3:2).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마음을 아시고 묻기도 전에 천국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3-5)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증거하신 말씀도 천국입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이라는 말이 예수님께 처음 나온 말이 아닌 것도 알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천국사상이 흠뻑 들어있는 민족입니다. 구약성경에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4)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천국 사상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천국으로 변질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로마의 통치와 압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이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행 1:16)라고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현대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민족주의자들을 발견합니다. 이탈리아의 마지니, 중국의 손일선, 인도의 간디, 베트남의 호치민과 같은 사람들은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민족으로 볼 때 민족을 새롭게 발전시키는 혁명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는 최선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민족주의자가 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의 민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역사상 제일 지독한 민족주의자들을 말하라면 ‘유대인’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요 4:9)“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유대인이 범한 실수 중 큰 것은 첫 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라고 소리친 것이고, 두 번째가 성전을 이방인에게 닫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유대인들과 이방인의 뜰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진 경계선이 있습니다. 〔이방인은 이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 누구든지 이 규칙을 위반하는 자는 죽임을 당한다.〕입니다. 그러면 다른 이방인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산에 예배할 곳을 만들어 놓고 나름대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나라”사상은 있었지만 이처럼 왜곡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처럼 잘못된 천국을 바로잡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민족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그의 친구들의 것입니다. 천국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이 땅의 물질주의 적인 것이나 정의를 실현한다고 공평을 말하면 공산주의처럼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또한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
(고전 6:9)“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 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 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고전 6:10)“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갈 5: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엡 5:5)“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
(살후 1:3-5)“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리라”
(약 2:5)“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벧후 1:5-11)“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가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천국으로 갔더니 천국 문에 천사가 떡 버티고 서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곳에 온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꿈이었지만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이 안에 누가 들어가 있습니까? 로마 카톨릭 신자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장로교인들은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아니! 로마 카톨릭 사람이라면 몰라도 장로교 신자들은 왔을 텐데 그러면 성공회 교인들은 몇 명이나 있습니까? 그 사람들도 없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럼 감리교인들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누가 있습니까? 이곳에는 교파를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예수 믿는 사람만 있소. 그 다음에는 천사의 안내를 받아 지옥문에 갔는데 거기도 문지기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여기도 혹시 카톨릭 신자가 들어왔습니까? 예, 많이 들어왔습니다. 장로교인들도 있습니까? 네, 많이 왔습니다. 성공회 신자도 있습니까? 예, 많이 왔습니다. 그럼 감리교신자도 있습니까? 예, 많이 왔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아니! 감리교인들도 왔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이곳에 어떤 분이 들어왔다는 말입니까? 거듭나지 못한 사람, 예수님을 건성으로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만 들어왔습니다. 거기에서 요한 웨슬레가 꿈이었지만 엄청난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장로교를 믿습니까? 감리교를 믿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스코틀랜드 성도들이 박해를 받아 사방으로 흩어져 황무지와 토굴 속으로 숨어 다닐 때 적은 스칼취의 한 사람을 잡아 “스코틀랜드의 모교회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대답하기를 “스코틀랜드의 깊은 산골에서 기도하는 남녀 젊은이들이 모인 곳, 그곳이 바로 스코틀랜드의 모교회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같이 누가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모인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앙교회가 이와 같은 교회인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입니다.
(마 5: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팔 복의 첫 번째도 마지막 여덟 번째도 천국입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예수님께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 있는 사람을 말하겠다.”하시고 만일 “시험을 본다든가, 달리기를 한다든가, 돈일 많이 벌어야 한다든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한다든가”하셨으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심령이 가난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천국이 저희 것이랍니다. 할렐루야

 

나의 빛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26. 나의 빛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하나님께서 넷째 날에 창조한 것은 해와 달과 별의 빛입니다. 태양에 빛이 없으면 이 지구 위에 사람들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이나, 날 짐승이나 벌레도 살 수 없습니다. 햇빛이 없으면 식물도 자랄 수도 없습니다. 식물이 꽃을 피지 못하고 곡식이 성장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빛이 없으면 금수 초목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인생들까지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캄캄한 밤에 전등불이 없으면 작은 촛불이라도 켜야합니다. 캄캄한 밤에 불이 있어야 합니다. 불 없이 잠시라도 지내기가 힘이 듭니다. 빛은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입니다.
우리의 현대문명은 빛의 문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컴퓨터나, 텔레비전, CD플레이어 등은 알고 보면 모두가 빛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전자기기들은 레이저에서 방출되는 광선을 이용하여 우주 통신, 정밀 공작 등에 널리 응용되고 있습니다. 병원에 의사들이 현대최신 기계(엑스레이)를 가지고 사람의 내부를 들어다 봅니다. 이것은 다 빛의 작용입니다.
우리나라 포항제철에 만든 ‘포항방사광가속기(PLS : Pohang Light Source)’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체 부지는 660,000㎡로서 이중 조성한 부지는 110,000㎡이며 축구 경기장으로 비교하자면 약 20개 정도의 크기에 해당하게 되는데, 8개 동의 건물은 42,000㎡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재 방사광가속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12개국뿐이며, 더욱이 ‘포항방사광가속기’처럼 광범위한 영역의 빛을 만드는 최첨단 3세대형 가속기는 6개국밖에 없습니다.
단일 실험 장치로서 건설비가 무려 1400억원이 소모되었고 건설 기간만도 5년여 남짓 걸려 완성되었습니다. 이 장치는 에너지가 25억 전자볼트를 이용하여 전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보통 실험실에서 얻을 수 있는 적외선, 자외선, X선 보다 그 밝기가 몇백만 배에서 수억 배에 달하는 강력한 빛이 나타납니다. 이 빛을 이용하면 생명공학, 의학, 4G D램 이상 초고집적회로 등 첨단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을 선도할 ‘미래를 밝히는 빛’이라고 말합니다. 빛이 없으면 현대문명도 이만큼 발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로 선포하신 두 번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축제 기간인 초막절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두 가지 의미 있는 예식행사가 있는데 하나는 성전 제단에 물을 끌어들이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좋은 기회를 교육에 활용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라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신 동기가 된 예식입니다. 4개의 황금 촛대를 밝히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젊은 제사장이 사닥다리에 올라 황금 촛대에 점화함으로 온 성전과 예루살렘을 빛으로 밝히는 상징적인 행사인 것입니다.
이 두 예식은 초막절에 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것을 상징화 한 것입니다(출13:21-22, 14:19-25).
요1:5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예수님을, ‘어두움’은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빛이 계속하여 세상에 비취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으로 온통 덮혀 있어서 어디를 보아도 빛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빛이 비취고 있지만 어두움이 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과 빛은 서로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공존할 수도 없고 합쳐질 수도 없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이 빛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에는 ‘이기지 못한다’(overcome)는 뜻이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무리 강해도 빛이 비취면 단숨에 물러갑니다. 우리는 어두움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두움에 파묻혀 그럭저럭 살아가고, 빛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은 희망과 기쁨이 없습니다. 세상을 보고 잘 살아보려고 노력들 하시지만, 미안하지만 세상에서 그것을 얻으실 수는 없습니다. 혹 얻었다고 해도 영원한 것이 못되며 오히려 여러분을 착각 속에 빠지게 하여 영원하신 빛을 바라볼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쁨과 소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빛이십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라고 말했습니다. 하바국은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합 3:4)하셨습니다.
모세와 대화하실 때도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신 방법중의 하나로 빛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빛으로 말씀하신 것은 그가 곧 하나님 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빛으로 오실 것을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시27:1, 잠6:23).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를 가리켜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사 49:9)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이 누가복음 1:78-79에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요1:4-9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해 주심으로 이 예언된 말씀들과 이루어진 말씀에 대해서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16에서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하나님이 빛이시고 예수그리스도가 빛이시니 당연히 우리도 빛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4)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라고 했습니다.

단체의 [신곡] 가운데 나오는 내용입니다. 단테가 한번은 지옥에 가서 구경을 합니다. 한 구석에 가보니 여러 사람들이 등에다 무거운 돌을 지고서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있습니까?” 그가 말하기를 “저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에 교만해서 허리를 굽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올라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 하기 때문에 그 연습을 하느라 저 모양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리 허리를 굽히는 것을 배웠더라면 얼마나 좋을 뻔했습니까?
우리가 빛을 발한다는 것은 높은 지위나 명예가 있어서만 비추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개인택시기사 한 분 소개할까요. 이분 성함은 강박수입니다.
이분은 낙천적인 성격에 하나님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눈 비시시 부비며 일어난 아내는 “당신은 매일 뭐가 그렇게 신나요?”라고 묻는다. “당신은 가서 잠이나 한잠 더 푹 자구려”하면서 아내를 두드립니다. 강집사는 휘파람을 불면서 “하나님 오늘 으싸으쌰~ 한번 살아볼 텐데 하나님 오늘도 팍팍 밀어주세요? 달구지도 잘 굴러가게 하시구요. 아무리 사랑스럽지만 다른 달구지하고 절대 키스는 안됩니다.”하면서 집을 나섭니다.
첫 번째 만난 손님은 길 저쪽에서 안경쓰고 손을 높이 흔드는 여자. 예전 같으면 안경쓰고 특히 여자를 이른 아침부터 태우면 재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손 흔드는 사람은 무조건 OK
“어서 오십쇼! 굿모닝!” 형식적인 아침인사가 아니라 씩씩하고 우렁찬 소리로, 그러나 손님은 요즘같이 무서운 세상에 혹시? 긴장을 하면서도 아니지. 기사양반 성질 건드렸다간 나만 손해보지… 하는 쪽으로 사고가 진전되면서 마지못해 ”네 좋은 아침입니다.“ 조용히 말합니다. 강집사는 손님의 표정을 흘깃 거울 속으로 바라보니 표정은 좋은 아침이 아니다.
”어디로 모실갑쇼?“ ”세브란스 영안실이요!“ ”저런 누가 돌아가셨군요.“ ”네가 젤 존경하는 친척분 한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요새는 왜 그리 폐암이 부쩍 많답니까?“ ”그분은 술, 담배도 안하셨는데…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처음엔 귀찮았는데 이제 대화가 되었습니다. ”어느새 다 왔습니다. 이거 섭섭합니다. 살다보면 또 만나겠지요. 건강하세요“
두 번째 여자손님. 무엇에 쫓기는지 아니면 무엇을 쫓는지 여간 급하지가 않았다.
“기사 양반 남대문으로 빨랑 갑시닷!” 사뭇 명령조다. 그렇다고 기분 나빠할 강집사님이 아닙니다. “아마 누가 기다리시는 모양이죠?” 여자는 흘깃 쳐다보면서 뭐 이딴사람이 다 있어? 데려다주고 돈만 챙기면 되지 하는 눈치입니다. 강집사님은 이럴 때는 음악을 틀어줍니다. “클레식을 좋아하실 것 같은데…. 어디 베토벤 없나?”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음악은 달콤한 뽕짝을 틀어줍니다. 일단 클래식으로 허영의 사다리를 타본 여자는 뽕짝의 추억에 조금씩 풀어집니다. “사실은 내 돈 떼어먹고 도망간 여자가 남대문에서 장사를 한데지 뭐예요. 지금 안가면 못 만날까봐 잠도 설치고 지금 갑니다.” “아이쿠 오래 되셨나요?” “5년도 넘었어요. 내가 받은 고통은 말로 다 못해요. 이혼까지 할 뻔했어요.” “그러게 사람일은 한치 앞을 모른답니다.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하고!” 여자는 이제 손뼉이라도 칠 기세였다. “맞아요. 맞아!”
이렇게 이야기하다가는 밤 세웁니다. 저녁때로 갑니다. 어둑어둑 해질 때 아파트 입구에서 할머님 한 분을 태웠습니다. 며느리로 보이는 젊은 여인은 돈을 두둑이 주면서 “말죽거리에 가면 박 의원이 나와있을 겁니다. 그곳에 안내해 드리면 돼요!” 그러나 할머니는 내릴 곳이 다가오자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며늘애가 날 버린 거라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우.” 말로만 듣던 신종 고려장에 직접 동참을 한 꼴이 되었다. 하도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할머니를 다시 집으로 모셔다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집이 몇 동 몇 호인지 아십니까?”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할머니는 서글픈지 고개만 저으며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태웠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한참을 해매고 수소문해서 그 집을 찾았다.
골치아픈 암 덩이리 하나를 치운 것으로 생각했던 며느리는 돌아온 할머니를 다시보자 경악을 했다. “아니 누가 당신더라 남의 집일에 감 나라 콩 나라 하랬어?” 시퍼런 여자가 늙어가는 강집사에게 퍼붓는 소리다. “돈도 푸짐하게 주었는데 눈치껏 내려주기만 하면 될 거 아냐?” 더 이상 대화가 안 되는 이 여자와 말할 가치를 없어서 무뚝뚝하게 “주인 양반 안 계십니까?” “남의 주인을 왜 찾아? 외국 출장 중인데 왜?” ‘아 남편 없는 틈을 타서 시어머니를 버리시겠다? 하이고 잔머리 한번 요란하게 군리셨군 그래?’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래도 당신 남편을 낳아주신 분 아니오? 잘 좀 돌봐드리십시오!”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오늘은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았지만 가는 길에 서울역에서 아줌마가 탔습니다. “아자씨, 이거 보고 요기로 데려다 줘유.” 얼굴에 기미가 덕지덕지 낀 시골 아줌마는 주소, 약도, 전화번호까지 적힌 너덜~너덜~한 종이를 내민다. 아줌마는 시골에서 더 이상 먹고살기가 힘들어 가족 대표로 여관집에서 식모 살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월급은 130만원인데 이 액수에 황홀해 있었습니다. 꿈이 부푼 아줌마에게 말도 못하고 약도를 따라 그 앞에 내려드리면서 ‘하나님 이분이 어린양 아닙니까? 지켜주세요.’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일하시면서 힘들고 어려우시면 가까운 교회에 나가세요. 그곳에 아줌마를 지켜주실 하나님이 계십니다.”라고 말할 때 고쟁이 속바지에서 돈을 꺼내주려는 아줌마에게 웃으면서 “아줌마 서울에 오신 것을 기념으로 제가 무료 서비스합니다. 돈은 그만 두십시오.” “아자씨, 시방 머라고 하셨당가유? 돈을 안내도 된다구유?” 강집사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줌마는 모두지 믿을 수 없다면서 말합니다. “아니 왜유? 밸일도 다 있구만유. 서울가면 코 베어간다고 조심하라고 하든디 다 거짓말 이네유? 아자씨 참말로 공짜란 말이어유?” 강집사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아줌마 행복하게 사세요. 꿋꿋하게 사세요. 예수님 믿으시구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앗 뜨거워 앗 뜨거워 주님의 사랑”을 찬양한 졸라맨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표현된 주님의 사랑인데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웨일즈에 나이 많은 설교자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유능한 노인이고 훌륭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 거북하지만 그는 비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예리한 비평가였습니다. 어느 기회에 그는 두 사람이 강사로 되어 있는 두 집회의 마지막 시간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신학교 교수들이었습니다. 처음에 한 강사가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설교를 마치자마자 이 문제의 설교자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빛만 있지 열은 없군”하고 말했습니다.
두 번 째 강사가 설교했는데 그는 전번 설교자 보다 나이가 많고 다소 열정적이었습니다. 그가 설교를 마쳤을 때 그 냉소적인 교수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고 “열만 있지 빛이 없군”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경우에 있어서 그분들은 다 바른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설교자가 다 결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빛과 뜨거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뜨거움이 없는 빛은 결코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빛이 없는 뜨거움은 영구한 가치가 없습니다. 모르지요. 지나가는 비처럼 당분간 화끈하는 효과가 있을지.

빛은 불에서 나옵니다. 불은 뜨겁습니다. 사람의 몸도 차가우면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잃으면 금방 차가워집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뜨거운 것입니다. 사랑하면 뜨겁습니다. 한마디로 불이 납니다. 차가운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불타오릅니다. 그리고 빛이 발산됩니다. 뜨거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 표적

예수님의 생애(6. 처음 표적) / 요한복음 2:1-11

“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우리 나라 최고기온이 연일 경신되고 있습니다. 35도는 이제 ‘그것도 더위냐’ 할 정도로 별 것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름에는 무서운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더위도 식힐 겸 제가 무서운 이야기 하나 해 드릴께요.
45층 짜리 아파트 꼭대기에 사는 잉꼬부부가 있었습니다. 꼭 퇴근시간을 맞추어 함께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엘리베이터가 고장난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45층까지 올라갈 생각을 하니 암담했습니다. 그래서 지루함을 잊고 재미있게 올라가기 위해서 번갈아 가며 무서운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처녀귀신, 몽달귀신 등 갖가지 무서운 이야기가 다 나왔습니다. 드디어 44층까지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는 아내가 이야기를 할 차례였습니다. 아내는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남편을 기절시킨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여보, 나 수위실에서 열쇠 안 찾아왔어.”
이렇듯 사람들은 뜻밖의 결과에 깜짝 놀랍니다. 오늘 본문도 깜짝 놀랄 사건이 소개됩니다.

갈릴리의 작은 마을 가나에서 혼인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정확히 누구의 혼인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친척 중의 하나이거나 제자들의 친척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 제자들이 초청을 받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1-2주간에 걸쳐 길게 진행됩니다(창29:27, 삿14:12).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이 잔치에 예상외로 많은 손님이 왔습니다. 이 때는 혼인 잔치가 끝날 무렵이었기 때문에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막바지에 이른 잔치 집의 흥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주인으로서는 기분 좋은 잔치를 망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 마리아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진 이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4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어머니를 부를 때 사용한 “여자여”는 한글개역성경에서 어색한 표현으로 들리게 번역되었습니다. 원어의 guvnai(귀나이) 존칭 호격으로 “여성, 부인”을 뜻하며, 그리스에서는 자신의 아내를 다정스럽게, 그리고 최고로 높여 부르는 존칭어입니다. 이 말은 왕후를 부를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사용하는 “마담”이라는 단어도 프랑스에서는 여성을 높여 부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프랑스 대사관에서 한국정부에 건의도 하고 압력도 가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화가 되어버려서 정부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한 것은 포도주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마리아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다시 표현한다면 “나에게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다면 그것은 마리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에 의해서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묻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들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리아도 잘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와 자신의 육신 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두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의 여러 경우를 예수 이상으로 신격화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격렬한 어조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거의 다 빼앗아버린 미친 헛소리라고 말했습니다. 본문은 이런 일을 염두 해둔 예수님의 질문이었습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4절 하반)
w{ra(호라) “정한 때”는 일반적으로 지정된 시간을 말합니다(눅14:17, 행3:1).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의 시작을 자신이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 때를 기다려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때를 회피하거나 서두르지는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운전하실 줄 아시지요. 처음에 면허증 따고 너무 기뻐서 운전면허 시험장 나무껍질이 벗겨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면허증 교부 받아 가지고 그것만 쳐다보고 오시다 나무를 받아서 껍질이 다 벗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 운전할 줄 알면 운전하고 싶어서 몸살이 납니다. 이런 증상은 1년 이상 간답니다. 차만 보면 운전하고 싶은 겁니다.
아마 우리가 능력이 있으면 못써서 몸살이 났을 겁니다. 태권도 처음에 배워보세요. 내가 정말 힘이 쌘 건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한번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괜히 시비를 겁니다. 싸움에 자신 있는 것 같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진짜 고수는 길거리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러시아 선교사님 한 분 중에는 합기도 9단에 태권도 7단의 소유자입니다. 그런데 몸집도 작고 선교사가 고단 수의 운동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어설픈 사람들이 조금 힘이 있으면 사용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있는 사람은 결코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직 한번도 사용해 보지 않으셨기 때문에 시험을 해 볼만도 하신 데 안 하십니다. 사실 처음에 사단이 시험할 때 그 능력 사용하시기를 시험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믿음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에 섭섭하기보다는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고 말했습니다. 따라합시다. 기적은 믿음에서 일어난다. 기적은 순종에서 일어난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됨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6절) 유대인의 집 입구에 놓인 이 항아리는 민19:1-22에서 유래한 정결 의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는 매우 큰항아리로 약 70-120리터 정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항아리가 6개이면 적어도 420리터에서 720리터에 달하며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충분히 마실 양이 들어갑니다.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기적은 일어났는데 그 흔한 주문 같은 것 하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컨데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어라”라고 명령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잘 보세요. 그런 말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본문은 ‘물을 항아리 아구까지 채우고 그냥 그 물을 떠다 주어라’고만 했습니다. 이후에 일어나는 기적도 대개가 하나님께 미리 감사의 기도를 하시거나 교훈을 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 밖에 없습니다.
“아구까지 채우니”는 그들이 100% 순종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순종이란 하다말면 소용이 없습니다. 99% 순종하고 한번 거역하면 그것은 거역한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순종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기적을 일으키게 합니다.

하루의 전투가 끝나고 나서 지휘관이 그날의 전투 상황에 대해 장교들과 함께 평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이 물었습니다. 어느 군인이 그 날 가장 탁월한 군인이었는지 생각들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어느 장교는 가장 탁월한 군인은 그 날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군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장교들은 이 군인, 저 군인 자기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지휘관은 말했습니다. “아니오. 여러분 모두가 다 틀렸어요. 오늘 전장에서 최선의 군인은 적을 죽이려고 칼을 들어 막 내리치려는 순간 퇴각 나팔 소리를 듣고 적을 치지 않고 팔을 내리고 나팔 소리대로 후퇴한 군인입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오늘의 가장 고귀한 일인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순종함으로 된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땅에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7:7-8절에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이 출애굽기 6:8절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의 시작은 이렇게 합니다.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마 1:1-2) 하나님의 세계는 순종의 믿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건축 설계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설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많은 손님들은 이미 마음속에 원하는 모양의 집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모양대로 설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만약에 제가 설계한 것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은 몹시 못 마땅해 합니다”
물론 집이야 자신들이 원하는 모양으로 설계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들의 삶을 자기가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설계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서 설계하신 인생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연회장은 오늘 우리로 말하면 주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주례처럼 잠시 교훈적인 주례사만 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연회가 마칠 때까지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연회장은 신랑, 신부를 잘 아는 동네의 어른이며 잔치에 제공되는 음식을 감별하는 임무도 연회장에게 있었습니다. 포도주를 연회장에게 먼저 갖다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에 의해서 좋은 포도주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서 보통은 먼저 좋은 것을 내어놓고 술이 어느 정도 취한 다음에, 한마디로 맛을 잘 모를 때 나쁜 것을 내놓는 것이 일반인데 잔치 끝 무렵에 좋은 포도주가 나온 것입니다. 한마디로 당시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형식주의에 이미 오래 전부터 빠져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우리의 양반 풍습하고 비슷합니다. 유교문화에서 나온 풍습이야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백성에게서 형식주의가 나온 것은 믿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바뀐 것입니다.
옛날 백제에서는 불교 행사의 하나로 짐승을 놓아주는 날이 있었습니다. 불교 중생의 자비에서 나온 풍습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래 자비 사상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 형식만을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날에 놓아주려고 짐승을 잡아 가지고 있다가 그날 놓아주는 난센스가 있었습니다. 꼭 흥부처럼 제비의 멀쩡한 다리를 부러뜨려 다시 고쳐주는 선심처럼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이런 형식주의로 변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오늘 혼인잔치의 주인은 사실 정말 좋은 포도주를 숨겨놓았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와 같은 칭찬을 듣게 된 것입니다.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9절)
그러나 정녕 이 연회장은 이 좋은 포도주가 어떻게 나왔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마리아의 부탁대로 예수께서 무엇을 시키든지 그대로 할,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순종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오지 않으시는 분들이 교회에 다니는 재미를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순종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눈빛만 보아도 압니다. 목자는 양을 알아봅니다. 양은 자기의 목자를 알아봅니다.
여러분! 연회장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 기적을 예수께서 일으켰다는 것을 알게된 이 하인들이 복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믿게되기 때문입니다.

영광을 나타내고, 제자들이 믿음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절) 우리는 예수님의 처음 기적에서 이 기적의 목적이 두 가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혼인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져 좀 창피하고 문제가 생겼다고 합시다. 솔직히 그것이 예수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처음에 예수님은 스스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간청과 순종하는 하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을 보고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솔직히 본문을 해석해온 지금까지의 입장을 보면 혼인집 주인의 난처한 입장을 너무 많이 부각시켰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혼인집의 안타까운 사정은 익히 알겠지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다시 따라합시다. 기적은 믿음에서 일어난다. 기적은 순종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적을 절대로 자신의 이익과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주신 능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만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이 기적을 통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께서 친히 능력을 나타내신 적이 없으시고 이 기적이 처음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이 기적은 표적이 된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도 하나님의 주신 헌금예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개인에게 주신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재능,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의 이익을 위해서, 내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 미련한 것이며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의 생애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를 좇으라

예수님의 생애(5. 나를 좇으라) / 요한복음 1:35-51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처음 만남(부모님)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친구와 선생은 선택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인생은 만남입니다. 우리 서로 인사하십시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너와 나의 만남이 있었기에 인생은 시작됩니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현재 만나는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최선을 다해 선을 베푸는 일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처음 하신 일
본문은 예수님과 첫 제자들의 만남에 대해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하신 사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제자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길러주어야 고마움을 모른다는 뜻으로 “머리 검은 짐승은 기르지 말라”는 비하 적인 발언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선교에 대해서만 20여 년 연구하고 고민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선교를 위해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란 질문을 늘 스스로 던지는데 역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을 가르치는 일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처음 사역의 시작이 제자를 만드시는 일부터 하십니다. 그리고 다음 요한복음 2장에 첫 번째 이적인 잔치 집의 포도주가 없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일이 소개됩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처음제자 두 명은 세례요한을 따라다니던 사람인데 예수님께 옵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이 36절에서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소개하면서 따라갔습니다. 두 명중의 한 사람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40절)인 것을 밝혔습니다. 본문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사실 안드레가 처음 예수님께 온 제자인데도 불구하고 소개할 때 “베드로의 형제”로 말합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말하면 안드레가 소개된다는 것입니까? “베드로”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임과 동시에 그의 활동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한 제자는 누구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사도요한”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 성경을 누가 쓰고 있습니까? 요한입니다. 요한 자신은 다른 제자가 나올 때는 모두 빠짐없이 그 이름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유독 자신이 있는 곳에서는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요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을 좇아오자 예수님은 첫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을 구하느냐?(38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본문 “구하느냐”(제테이테:zhtei’te)는 ‘찾아다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물어보다, 질문하다’로도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너희가 찾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지금까지 “메시야”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제자들만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모두, 아니 인류가 찾고있었던 것입니다. 이 동사는 구원에 관계되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마 18:12, 눅 19:10). 본문은 요한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첫 말씀입니다. 이것은 죄악 된 세상에서 “사람이 참으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두 제자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참 진리를 찾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랍비”(@Rabbiv)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에게 랍비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부모가 부르고, 랍비가 부르면 랍비에게로 먼저가야 합니다. 모든 우선 순위가 랍비에게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랍비라는 것은 단순히 학문을 가르치는 선생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인도해야 되는 전적인 선생인 것입니다. 유대인이 왜 오늘날도 세계의 중심이 되는 민족이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선생을 믿고 따르는 절대적인 교육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따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와 보라!(39절)
고 하셨습니다. “오다”(에르코마이:e[rcomai)는 말은 “미래 중간태 직설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것은 구원에 대한 예수그리스도께 나오는 사람에게 초청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생각하는 구원이 여기에 있다. 참 잘 왔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내용과 관계없이 갑자기 요한은 시간을 말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1절)
정확히 옮기면 “우리가 찾던 메시야를 발견했다”입니다. 이 제자들은 메시야를 간절히 소망했기 때문에 먼저 세례요한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메시야를 만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시몬’에게 전했습니다. ‘시몬’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유대인이면 누구나 “메시야”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시몬’역시 그랬을 것입니다. ‘시몬’은 구약시대 ‘시므온(쉬메온)’ 12지파의 한 지파의 자손으로 야곱의 둘째 아들의 명칭과 동일한 이름입니다(창 34:25-31). ‘시므온’은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베드로’역시 성미가 급합니다. 이런 급하고 충동적인 성격의 소유자 ‘시몬’을 파악하신 예수님은 앞으로는 ‘게바(베드로)’로 불러지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슬픈 일이 닥칠 때 “오! 하필이면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기쁜 일이 일어났을 때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오! 하나님 이런 일에 나에게 일어난 것을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좇으라
43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셨습니다.
“좇으라(아콜루데이:!Akolouvqei)”는 현재 명령형으로 지금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지금까지 예수님의 부르심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도 첫 번 제자들처럼 예수님 만난 것을 나다나엘에게 전합니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첫 번 제자들이 예수님을 소개한 방법과 지금 빌립이 예수님을 소개하는 방법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 제자들(안드레, 요한)이 베드로에게 전한 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입니다. 베드로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따지고 묻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곧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전한 두 제자의 말도 간결하고 명확했습니다.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나름대로 조금 더 자세한 소개를 한다고 복잡하게 말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여기 까지는 “메시야”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길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처음부터 안 해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인식이 “나사렛”을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국회에 신청한 법안 중에 하나가 사람을 고용할 때 일과 무관한 개인적인 정보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엄격하게 제한하는 법률입니다. 이 법은 업무에 관계된 일과 상관없는 “출신지역, 가족사항 등”을 의무적으로 적도록 한 인사양식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록들은 사람들을 개인의 능력과 관계없이 단순히 “어느 지역의 출생이다. 누구의 자손이다.” 라는 것으로 사람을 바르게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빌립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구태여 처음부터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을 말할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앙교회로 사람을 인도할 때 목사인 저에 대해서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 만일 “이영제 목사님은 경기도 마석에서 출생한 분입니다.”라고 소개하면 “복음하고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마 전해듣는 사람들이 “그래서 어쨌단 말이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빌립의 소개에 대해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
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을 알고있었습니다(미 5:2).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마을로 율법주의자들은 이 지역을 여러 모에서 무시했습니다(요 7:52). 특히 학문적인 견지에서 나사렛에서는 큰 인물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강경한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와 보라”는 말로 강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는 반신반의하면서 빌립을 따라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다가오는 나다나엘을 보고 예수님은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47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장점을 파악하셨습니다. 그리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은 겉과 속이 진실하고 같다는 말입니다. 이런 칭찬하는데 기분이 좋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칭찬하면 고래도 춤을 춘다”는 책도 있습니다.

격려와 칭찬은 삶의 활력소가 됩니다. 화학을 전공하는 한 학생이 중간고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시험문제는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님의 생애(4. 사탄아 물러가라) / 마태복음 4:1-11, 마가복음 1:12-13, 누가복음 4:1-13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 4:1-11)

한 경건한 남자가 만원버스를 타고 가는데 버스가 심하게 흔들리는 바람에 옆에 앉아있던 아줌마에게 몸을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즉시 마음속으로 “주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차가 기우는 바람에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몸이 쏠렸습니다. 그러자 이 남자가 이번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사람들은 시험에 직면하게 될 때 하나님이 이런 환경을 허락하셨다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시험은 그런 종류의 시험하고는 다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단과 대 전쟁이 이었습니다. 어떤 설교에 대한 책에 보니 설교제목도 잘 정해야 하고 특히 사람들의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광야 대 전투”로 해 보았다가 그냥 제 스타일대로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목도 물론 중요하지만 늘 말씀의 본질에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말씀에 젖어 드시기 바랍니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본문 1절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고 했습니다. 같은 사건이 마가복음은 두절을 사용하며 아주 간단하게 기록했는데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막 1:12-13)고 했으며 누가복음 4장 1절은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라고 했습니다.
공관복음서 모두가 “성령에게 이끌리어”라고 했습니다. 시험을 받는데 왜 성령에게 이끌리셔서 가셨습니까? 예수님의 시험은 ‘마귀에게 이끌리어’ 받은 시험이 아니라 “성령에게 이끌리어” 받으신 것입니다. 성령에게 이끌리셨다는 것은 마귀의 시험(도전)을 받아들이셨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사단이 처음부터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거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성령에게 이끌리어”입니다. 원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시험 또한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마귀를 멸하려 오신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역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단의 시험을 받아들인 것은 이제 사단과의 정면대결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 사단에게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1절 “그 때에”는 예수님 세례 직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마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아담 이후 마귀가 왕 노릇하며 지내온 시대가 종말을 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 차단하는 것이 마귀의 생각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도 시험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를 시험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때는 사역초기였습니다. 지금도 사단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을 시험합니다. 처음부터 방해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시험을 이겨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십 일을 금식하신 후에
본문 2절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시험할 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주 마귀는 영악합니다. 보통은 금식기도를 못하도록 처음부터 방해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 마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굶주린 상태에서 육체를 입으신 약점을 파고들었습니다.
우리도 시험을 당할 때에 마귀는 우리가 열심히 찬양하고, 기도할 때는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직후 낙망에 떨어지거나 육체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찾아옵니다. 시험에 떨어진 학생에게 다가옵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여러분! 마귀를 지나치게 무서워해도 안되지만 얕봐도 안됩니다. 마귀는 영적인 존재입니다(엡 6:11, 12). 마귀는 원래 천사가 타락한 것인데 에스겔 28:12에 보면 천사 중에 탁월한 존재였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잊어버렸던 부끄러운 과거도 다 알고 있습니다. 나에 대해서 아는 것 만 아닙니다. 우리 조상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귀는 사람에게 들어갑니다. 사실 여러분 마귀가 행동을 강하게 안 할 뿐이지 성령을 받지 않은 분들은 마귀가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내버려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가면 그 성령을 몰아내려고 찾아옵니다. 그래서 시험을 당할 때는 육체적으로 약할 때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성령이 충만할 때이기도 합니다. 바울도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했습니다. 영악한 사단은 예수님께 3번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시험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험(물질적 약점)
본문 3절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것이 사단의 첫 번째 시험입니다. 사단의 이 시험은 세 가지를 집중 공격하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실제로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사단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야! 그까짓 꺼 한번 시험해 봐라! 여기 돌들이 널려있지 안냐! 네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아니냐?”고 유혹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큰 일을 위해서 너를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런데 광야에서 굶어 죽어서야 되겠느냐?”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만 배고픈 것이 아닙니다. 이 시절의 사람들은 로마 압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양식이 없어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단은 예수님께 “이제 네가 이 많은 돌들로 떡을 만들어 너도 먹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면 좋지 않냐?”는 유혹입니다.
이 그럴듯한 사단의 유혹에 대해서 예수님의 대답은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단의 말에 귀가 솔깃하여 넘어갔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니까 한번에 넘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실제로 배고프지 않고 떡이 완전히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예수님)는 하나님을 말씀을 듣지, 너(사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제가 왜 그토록 성경을 읽으라고 권면 합니까! 성경말씀 그 자체가 우리 믿음의 뿌리요,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사단의 말대로 예수님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였다면 예수님은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위해 오셨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의 배고픔조차 이해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시험(정신적 허영)
본문 5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광야 40일 기간에 금식만 하신 것이 아니라 금식기도를 하셨다고 믿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도하시겠지만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은 인류 대 구속사역을 위해서 어떻게 공생애를 준비해 나가 실까,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에 사단은 그럴듯한 제안을 해 온 것입니다.
공생애 시작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되면 얼마나 사역하기 쉽겠냐?”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복잡하게 성전에서 가르치지 않아도 되고, 무식한 제자들을 불러모을 필요도 없을지 모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능력이 있는데 무엇을 고민하느냐?”는 유혹입니다.
성전은 해발 750m의 고지 위에 약 54m의 높이로 세워졌기 때문에 성전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을 느끼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일 예수께서 사단의 말대로 했다면 서커스단의 묘기처럼 사람들에게 한번은 박수갈채를 받으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매일처럼 그런 광대 같은 일만을 하라고 예수께 부탁을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눈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았지만 표적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8-39)

세 번째 시험(본질적인 영적 신앙의 문제)
본문 4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시험했습니다. 이 시험의 주체는 마귀입니다. “천하 만국”이 사단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운행하십니다. 사단을 이해할 때 한가지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사단은 파괴하는 것, 죽이는 것은 하지만 살리는 것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 이러한 시험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담은 사실 이 시험에 넘어간 것입니다. 사단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강하고 호되게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체 명령 481개인데 그 중에 마태복음에 162개가 나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는 그 중에 첫 번째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에 사단은 굴복했습니다.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단에 완전히 떠나거나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되겠다고 하실 때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마 16:22). 이 때에도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호통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참기 어려운 고통 중에 계실 때도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마 27:40)고 조롱하며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의 싸움은 사람이 아니라 사단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단의 방해였습니다. 우리 속담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롬 1:28-29)라고 했습니다. 사단을 이기는 것은, 모든 불의를 이기는 것은 하나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성경의 다른 기록은 제자들이 함께 다니면서 목격한 사건 위주로 되어있는데 예수님의 시험은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에 의해서 전달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었을까요?
첫째, “시험을 당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따를 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꿈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당하고 어려움이 다가올 때는 쉽게 낙망해 버립니다. 바로 이 때 우리는 우리와 같이 육체를 입고 오셔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신 예수님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이 사단을 이기실 수 있는지를 통해, 우리 또한 사단의 시험을 이기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2:18-3:1) 예수께서 당하신 시험이 있었기에 시험 당하는 우리들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능히 도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어떤 병원에서 젊은 간호사가 처음으로 간호 책임을 지고 의사를 도와 수술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봉합하는 차례가
되었을 때 간호사가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사용한 가제는 모두 12개인데 11개밖에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다 빼냈습니다. 자, 이제 상처를 꿰매도록 합시다.“ “안돼요, 분명히 12개를 사용했습니다.”
“내가 책임지겠소. 봉합합시다.”
“선생님,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 간호사의 태도는 완강했습니다.
마침내 그 의사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미소를 띄면서 자기의 한쪽 발을 치워 마루 위에 떨어져 있던 12번째의 가제를 보여 주었습니다.
“미안하구려. 내가 당신의 성실성과 능력을 시험해 보았소. 당신은 훌륭한 간호사가 될 자격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의 자녀들을 극심한 시험에 빠뜨리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참모습을 살피십니다. 욥이 그 전형적인 실례입니다. 험한 시험과 고난을 극복하고 나서 욥은 말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참고] 사탄은 시험의 대상자를 선택한다. 아담을 유혹하려고 하와를 택했고 하와를 넘어뜨리려고 뱀을 택했다.
① 처음 믿으려는 이
② 은혜 받았다고 자랑하는 이
③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이(요셉 그리고 밧세바)
④ 열심 있는 이(교만, 이단, 분쟁의 씨)
⑤ 불평분자(가롯 유다 옥합을 깨친 여인에게 구제를 종용)
⑥ 신앙의 잠을 자는 이 (잠자는 동안 가라지를 원수가 뿌리고 감)들은 시험받을 대상들이다.

사탄의 시험 목적은
① 성도를 낙심케 하여 기도 줄을 끊으려 한다.
② 회개치 못하게 하려고(가롯 유다)
③ 감사가 멎게 하고
④ 충성치 못하게 하려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