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예수님의 생애(12. 예배) / 요 4:20-26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예배드릴 때, 목사가 설교할 때만 되면 성경책 보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보도 잘 봅니다.
예배시간에 괜히 뭐 잊어버리고 오신 분처럼 안절부절못하다 화장실을 가는지 들락날락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그런 분이 없습니다만 …
빚 받을 사람은 돈 꾸어준 사람을 찾습니다. 부모를 잊어버린 아이는 부모님을 찾습니다. 자식을 잊어버린 부모는 자식을 찾습니다. 하나님도 찾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23절 하반 절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아멘. 오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찾으시고, 만나실 것을 믿습니다. 지금 추석이 되어서 집에 가는 사람을 찾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찾으신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것 같습니까? 적다는 것 같습니까? 얼마 안되기 때문에 찾으시는 것입니다.
“찾으신다”는 동사 ‘제테오’는 ‘원한다, 요구한다’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배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이 있다고 말하는 곳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요즘 우리 예배를 보면 시간상으로는 1시간 가량을 드립니다. 예배 시간으로만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있으라고 하면 몸이 뒤틀리고 짜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실한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스스로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세가 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의 중요성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합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예배의 장소)
오늘 본문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에 지난주 말씀드린 것을 기억해 보셔야 합니다. 처음에 한 대화는 ‘생수’이야기 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대화한 것이 ‘남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이 여인은 ‘예배’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이것은 19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고백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유대인이고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이에 반목이 깊었던 예배장소 문제에 대해서 이 여인은 묻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인 선지자라면 이 문제를 알고, 선지자다운 답변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춘천에 가면 한림대학교가 있습니다. 이 학교의 일본어 교수 ‘사이토 아케미’교수가 있는데 이분이 쓴 「아케미 교수의 한국견문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일본인이 한국에 와서 겪는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중반쯤 가면 결국 올 것이 왔다는 ‘드디어 들이닥친 그 질문’이라는 소 제목이 있습니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한국사람에게 이 질문을 꼭 한번은 받게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질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름 아닌 ‘선생님,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였습니다. 아케미교수는 이 질문을 언젠가는 받게될 것을 염려하고 고민하는 모습이 이 책 처음부터 흐릅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질문을 받게된 것입니다. 아케미교수는 ’이 날이 올 것을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이상한 기분까지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때 눈치 빠른 여학생이 “잠깐 기다려!” 했지만 “조용해 봐. 지금 선생님께 중요한 질문을 했으니까”라고 남학생은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아케미교수는 “옛날에 매우 유감스러운 시대가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인들이 저지른 행위의 책임은 중대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무슨 판에 박힌 말처럼 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꼭 질문을 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마리아 여인으로서 유대인 선지자를 만났으니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물어본 것입니다. 이것은 준비된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생수’에서 ‘남편’으로 그리고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스룹바벨이 이끄는 예루살렘재건에 참여하지 못하고(스 4:1-6, 느 4:1-2), 아브라함과 이삭이 제사를 드렸던 곳이며, 모세가 제일먼저 제단을 세우고 희생을 드렸다고 생각하는 그리심산에 자기들의 성전을 세워 예배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곳은 모리아 산이며(창 22:2), 모세가 제단을 쌓은 곳은 에발 산(신 27:4)으로 나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억지를 쓰고있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그리심산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마리아에 성전이 건축된 것은 B.C. 322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알트(Alt)라는 학자는 알렉산더가 아시아에 출현하기 직전인 페르시아시대 말기 B.C. 4세기 중엽에 세워졌다고 주장합니다. 이후 예루살렘성전과 그리심산의 성전 갈등은 2백여 년 계속되다가 B.C. 129년 요한 힐카누스가 그리심산의 성전을 파괴하자 그 감정이 절정에 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성전이 없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에게는 땅 없는 서러움이나 마찬가지로 예배할 곳이 없다는 것은 큰 서러움입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여인의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는 말은 ‘우리들은 예배드릴 곳도 없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당신들끼리 예배드리니까 좋습니까?’하고 비꼬는 감정이 섞인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있다고 생각한 것은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신 12:5)에 근거를 두고 이 장소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해석되었습니다(대하 6:5, 7:12, 시 78:68).
이렇게 하나의 성전을 강조한 이유는
① 이방 나라의 우상숭배 풍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② 12지파로 분할된 이스라엘을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키기 위해서
③ 다윗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다윗 왕통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에 성전이 있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감정석인 질문에 대해서 2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배의 장소를 무시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에게도 새로운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마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직접 들었다면 이 말로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의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것은 예루살렘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예루살렘의 장소에 있는 성전을 지켜야 했다면 예수님이 멸망을 예언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법궤를 지키셨던 것처럼 보호하셨을 것입니다.

알고 예배하라(예배의 대상)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예수님은 장소 문제에 대해서는 관대하셨지만 예배의 대상에 대해서는 분명히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배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의 대상입니다. 누구에게 예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있었습니다. 어렴풋이 하나님을 믿고 있고 모세 오경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이들은 분명 이방신과 혼합되어 있었고 유일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하나님을 말하는 용어가 많이 있는데 보통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천상(天上)의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님”의 사상과 함께 여러 용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한겨레신문에 개신교인이 말하는 하나님은 문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잘못 사용된 것이고 하느님이 맞는 것이라는 기사가 나와 제가 신문사에 항의했습니다. 그랬더니 글을 써주면 내주겠다고 해서 하나님이 틀리지 않는 것이라고 독자투고란에 나온 일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나라에서 내려온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진정 하느님이 성경에서 말하는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뜻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단어들과 달리 하나님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의 ‘우리는’ 유대인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예배의 유일한 대상임을 확실히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모세를 통해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이라는 것과
②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의 완성자시라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예배의 방법)
23, 24절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이 원어에 ejn pneuvmati kai; ajlhqeiva/:(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를 직역하면 “영과 진리 안에서”입니다. ‘엔’은 …안에 라는 뜻이고 전치사 ‘카이’는 영과 진리를 하나로 묶고 있습니다. 즉 분리될 수 없는 하나를 말합니다. 왜 “영과 진정으로”예배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24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이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번역된 “프뉴마”에는 관사가 없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즉 여러 영 중에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하나님을 표현할 때 관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 1:5),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16), “하나님은 소멸하는 분이심이니라”(히 12:29)가 그렇습니다.
예배하면 뺄 수 없는 단골 성경이야기가 있지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만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를 물리치셨나요. 하나님은 고기를 좋아하는 식성을 가졌기 때문에, 양을 제물로 드리는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나요! 아닙니다. 그런 말을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가인의 예배가 실패하게된 가장 큰 이유는 제물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자신의 신앙적 자세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문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생각하면 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육체를 입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우리는 물질의 량, 돈의 액수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양과 액수가 아니라 질의 문제입니다. 금식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냥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진리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커밍 워크라는 사람은 성공의 요인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했는데 첫째는 지능, 둘째는 지식, 셋째는 기술, 넷째는 태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요인 중에서 우리의 태도가 93% 이상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 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는 어디서, 얼마나 큰 예배당에서, 얼마나 많은 헌금을 드리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느냐는 문제가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의 영으로”예배드리냐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때
예수님은 23절에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자도 25절에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고, 메시야가 오시게 되면 모든 것을 알려주신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속죄의 예배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내 죄를 대속해서 양을 죽이는 것은 속죄의 상징은 될지 모르지만 속죄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그분이 오셨습니다.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뻐서 뛰었습니다. 물길러 왔다가 다 잊어버렸습니다. 28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9절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아멘. 예수님은 사마리에서 이틀을 지내시면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행 8:14) 사마리아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서 사마리아의 우물가 여인을 기억하시면서 성령을 사마리아에 보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잘 드려지면 모든 것이 잘됩니다. 그러나 예배가 드려지지 못하고 잘못되면 모든 것이 안됩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보기에 일단은 되는 것 같이 보이는 것도 가라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못한 사람, 원망을 듣고 있는 사람이 “영으로서 진리로서”예배드리기 어렵습니다. 저도 가끔 부부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부부싸움하고 예배드릴 때 있잖아요. 정말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화목의 예배가 되지 않습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없이는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예배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주일 학교에서 헌금할 시간이면 눈을 감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사실을 주일 학교 선생님이 발견하고 한 번은 그 어린 학생에게 ‘너는 왜 헌금시간이면 헌금을 드리지 않고 기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주일학교 학생은 ‘선생님 저는 헌금 드릴 돈이 없어 그 대신에 저의 몸을 하나님께 드립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이 소년은 성장해서 목사가 되어 한국의 초대 선교사로 와서 사역한 언더우드입니다.

주앙교회에 오신 여러분 참 잘 오셨습니다. 주앙교회의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함께 예수그리스도가 구속해 주신 그 은혜로서 이와 같이 함께 “신령과 진정으로”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저는 꿈에서도 여러분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를 찾으셨고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멘.

사마리아

예수님의 생애(11. 사마리아) / 요 4:3-10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돼지를 잡아서 잔치를 합니다. 다른 짐승도 많은데 왜 돼지를 잡는지 이유를 아십니까? 주인이 소를 잡으려고 하니까 소가 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밭농사는 누가 합니까?”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럴 듯해서, 주인은 개에게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개가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집은 누가 지킵니까?” 그 말도 그럴듯해서 주인은 고양이에게 갑니다. 고양이가 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쥐는 누가 잡지요?” 그 말도 그럴듯해서 주인은 돼지에게로 갔습니다. 돼지는 잠만 쿨쿨 자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인은 잔치를 위해서 사명이 없는 돼지를 잡게 된 것입니다.
1950년대 세계 선교의 영웅 짐 엘리어트가 정글에서 피를 흘려 죽은 후 그의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답니다. “나의 사명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또 하나의 발자국을 남기셨습니다. 바로 사마리아로 가신 것입니다.

사마리아로 가시는 예수님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의 원문에는 e[dei(데이)가 있습니다. 이 말은 “반드시 ...을 해야한다” 또는 “틀림없이”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반드시 지나쳐 가시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길(사마리아)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남 유대에서 예루살렘이나, 갈릴리로 가려면 요단 동편으로 돌아서 가는 길은 대략 6일 정도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로 지나가면 3일정도가 걸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택하신 것은 시간적인 단축의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유대인이 사마리아 땅으로 지나서 가지 않은 이유는
B.C. 722년전 앗수르에 의해서 북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이 때 앗수르 사람들에 의해서 혈통과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왕하 17:24).
이로 인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깊은 반목이 생겼습니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이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마리아인들 역시 그들의 통행을 막았습니다.
이런 깊은 반목과 역사성을 뒤로하시고 꼭 이 길을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동사하나가 나옵니다. “통행하여야”로 번역된 dievrcesqai(디엘마코이)는 “가다, 통과하다”의 뜻입니다. 본문 4절을 원문으로 다시 번역한다면 [사마리아로 반드시 통과하겠다]가 됩니다. 본문의 뜻으로 보아 예수님은 사사로이 고집을 부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로 가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그에 순종하시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 길로 가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인 것입니다.

역사의 책임을 함께져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을 보면서 유대인들의 이기적인 면을 볼 수 있습니다. B.C. 722년 전에는 하나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자신의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살지 못해서 나라를 앗수르에게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이 앗수르의 혈통과 섞여있고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라고 상종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중국 땅에 사는 조선족 약 200만 명과 러시아 46만 명이 있습니다. 대부분 주변국의 해외동포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희생양으로 버려진 것입니다. 러시아에는 초기 거의가 농업 이민이었으나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 이민이 이어졌습니다. 고려인들은 그 땅에 재대로 정착하기도전에 스탈린의 이른바 대숙청 당시 연해지방의 한인들은 유대인, 체첸인 등 소수민족들과 함께 가혹한 분리차별정책에 휘말려 1937년 9월 9일부터 10월말까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이들은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졌는데, 당시 고려인 수는 17만 5000여 명으로, 이 가운데 1만 1000여 명이 도중에 숨졌습니다. 사실 이들이 없었다면 구 소련이 해체되고 선교사가 중앙아시아로 들어가서 빨리 정착하게 된 것은 고려인의 덕분이었습니다. 현재 중국선교도 비슷합니다. 사업도 그렇습니다. 조선족이 없었다면 중국에 정착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을 미국에 사는 캐나다, 호주 등 서방에 사는 분들과 어떤 면에서는 차별하고 있습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서방으로 가신 분들은 잘살려고 이민을 가신 분들이고 고려인이나 조선족은 대부분 이 민족의 아픈 역사 속에서 생겨난 분들입니다.
서울에 화양리가 있지요. 그 이름의 유래는
1970년 전까지 110번지 32호에 화양정이 있엇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고, 또 일설에는 회행리(回行里)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 단종이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이곳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송씨 부인과 이별하면서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하여 회행리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잘은 모르지만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속된말로 좀 노는 여자들을 “화냥년”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여자들을 보냈었는데 그들이 다시 돌아와 정착한 곳을 잡아준 곳이 서울 외곽의 강나루 아래랍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화냥년”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화양리”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사람들은 왕래하지 않고 멀리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민족의 희생양이었는데 말입니다. 일제 때는 우리가 나라를 지키지 못해 정신대라고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던 분들도 있습니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나라를 지키지 못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문제에 우리는 공동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바로 사마리아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수가에 도착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수가라는 야곱의 우물이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 때의 시간은 6절 “때가 제 육시쯤”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은 로마식 계산으로 오후 6시를 말합니다. 유대인의 시간으로는 정오 12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때 물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을 만납니다.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대답하기를 “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지금 물길을 그릇도 없다는 것을 모르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12년 혈루병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때도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사람이 많은데 누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는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얻으시지도 못할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까?
이 여인하고 대화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여인은 곧바로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이 어떻게 사마리아인에게 말을 건네냐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사마리아를 피해 다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과 상종치 않으려고 입니다. 즉 말하기 싫고 함께 있기 싫어서입니다. 유대인은 늘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죽여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기 많이 잡고, 주님을 알아보고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를 떠나소서”입니다.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떠나시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오는 유대인인 이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유대인이라면 자기에게 말을 걸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상하기는 이 여인이나 예수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더 그럴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대화하고 있다보니 예수님이 물 달라고 한 것은 순전히 대화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 사람이 고향을 묻고 나이를 묻고, 집안을 묻고, 학교를 묻는 것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다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분을 알고 상대를 카스트적인 개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잘못이지만 또 막상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면 대화가 안되지 않습니까? 어쩌면 대화를 시작하려고 사전 준비작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은 꼭 알 필요는 없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묻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이며 상대와 대화하려는 노력임에는 분명합니다. 아마 서양 사람에게 갑자기 그렇게 묻는다면 상당히 이상한 눈으로 처다 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에게 말을 건넴으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이 물을 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우물은 깊고, 물길을 그릇, 두레박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제6시(로마시간) 유대시간으로 12시인데 학자들 간에 이 시간 논란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유대식 시간 정오 12시가 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의 일기로 볼 때 보통 물긷는 시간은 태양 빛이 강하지 않은 오후 시간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우물에 바가지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왔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매일 이 시간에 물을 길으러 왔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물을 길을 줄 알고 왔는데 낭패 아닙니까? 다시 바가지 가지러 동네로 들어가야 하니까 말입니다. 이 여인은 부정한 여인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이 시간에 물 길러 왔던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예수님께 물도 드리지 못하고 자신도 물을 푸지 못하는 이 여인은 잠시나마 난감해 졌습니다. 이 때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어렵게 된 상황 속에서 물을 달라고 하신 이가 누구인지 알면, 그분이 생수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알아보면 문제가 있을 때 그분에게 구하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 기도하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알아보셨으면 그분에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물이 떨어졌을 때, 우리가 난감 할 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분은 무엇이든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제 대화가 재미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문제에서 영적인 문제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아주 무식한 여자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몰라보는 이 여인은 예수님께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면서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바로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십니다. 지금 문제는 ‘물’, ‘생명수’의 문제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어떤 물입니까? “샘물”입니다. 샘은 마르지 않습니다.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영원한 생명을 위해 솟아나는 물의 샘]이 됩니다.
구약에서 시편기자들은 영혼의 갈증을 물로 비유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에서는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
이 여인은 영원히 물을 해결해서 여기에 물길로 오지도 않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15절). 그런데 예수님은 난데없이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고 하십니다.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하고, 예수님은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분이 결혼하는 신부에게 축하 전보를 쳤습니다. 전보는 짧게 써야 하잔아요. 그래서 “요한일서 4:18”만 써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만 주례사가 요한복음 4:18로 잘못 알고 읽었습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결혼식장은 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졌습니다. 주례가 다시 보니 요한일서 4장 18절 이었습니다. “사랑안에서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였습니다.
우리의 갈급 한 심령에 영원히 물을 줄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에게서만 샘물이 나옵니다.
타이완에는 신을 사 가지고 와서 일년 동안 집에 모셔놓습니다. 그리고 별로 도움이 안되면 다시 사왔던 곳으로 가져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충전을 시킵니다. 즉 큰 신 옆에다 두고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집에 가져와 다시 일년을 지내봅니다. 그래도 별 도움이 안되면 다시 가져가고 다른 신으로 바꿔옵니다.
우리도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 조상신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 조선시대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유교’를 신봉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이해하는데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조상신이 생겨난 것입니다. 부모는 떠나도 언제나 자식을 위해서 돌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솔직히 이야기 해 봅시다. 우리도 나이가 들면 죽습니다. 어른이 되고 죽으면 무슨 능력이 생길 것 같습니까? 젊었을 때보다 더 힘이 없고 무능력해집니다. 그러다 죽는 것인데 죽어서 무슨 능력이 생기고 귀신이 됩니까? 치사하게 죽어서 자식들이 제사지내고 잘 대해주면 자식에게 잘해주고 안 해주면 자식 잘되는 것 해방 할 겁니까? 세상에 그런 부모는 없습니다. 죽어서 그럴 생각하지 말고 살아서 주님말씀하나라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능력이십니다. 그분만을 의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우리가 버린 곳입니다. 관심이 없어진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 계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주님은 결코 사마리아를 버리지 않습니다. -아멘-

예배의 문제
(요 4:20)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2)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 4:23)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5)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 4:26)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요 4:27)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니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요 4:28)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9)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 4:30)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 4:31)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요 4:32)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 4:33)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요 4: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5)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 4:36)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4:37)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 4:38)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요 4:39)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요 4:40)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요 4:41)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요 4:42)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여인

예수님의 생애(10.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여인) / 마가복음 5:25-34

“25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모노 뉴클레오시스란 병이 있습니다. 피에 단핵을 가지고 있는 세포들이 많아지는 전염병입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입맞춤을 하면 환자가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그 병에 걸리게 됩니다. 모든 병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린 사람과 있으면 건강한 사람으로 인해 감기에 걸린 사람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이 감기에 걸립니다.
올바른 소수가 잘못된 다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며 바른 사상이 잘못된 사상을 바꾸기가 힘듭니다. 좋은 말 열 마디보다 나쁜 말 한 마디가 더 힘이 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악한 사람보다 몇십 배, 몇백 배 더 건강해야 하고 영적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살아있지만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지 모릅니다. 이 여인에게 제일 안타까운 것은 건강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목사님 모임에 나갔었습니다. 공부할 때 함께 하신 분인데 그분은 저보다 신학을 20여 년이나 더 늦게 하신 분으로 나이가 있으십니다. 그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건강을 잃으니까 모든 사람이 떠나가고 다 소용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과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해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개인만 병든 것은 아닙니다. 교회도 병들 수 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욕심에서 축복만 받으려고 오시는 것이나 자신의 교회만을 위해서 큰 건물만 지으려는 욕심은 병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질책했습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6)고 했습니다. 이사야 때의 사람들은 병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 당시 때의 병들었던 자가 건강하게 된 사건을 통해서 오늘 우리도 말씀을 통해서 건강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건강을 잃어버린 여인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혈루증 병을 앓았습니다. ‘혈루증’은 혈관 조직이 약해서 혈관의 틈을 통해서 피가 흘러나오는 병을 말합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을 혈루증 병으로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한마디로 만성 질환입니다. 이 여인은 본문 26절에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12년 동안 병을 고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고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중하여 지고 가지고 있던 재산도 다 써버렸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제 더 방법이 없습니다. 병은 심하고 돈은 없습니다.
우리는 물밀듯 밀어닥치는 절망감을 이 여인에게서 봅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이 여인과 같은 사람들을 봅니다. 우리 중에도 이와 같은 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더라도 영적으로는 이 여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흔히 증권가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닥을 치면 언젠가 다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도 내려가고 내려가면 더 이상 갈곳이 없어집니다. 이제 희망이 보이는 것입니다.

희망이 보입니다.
이 여인에게 희망은 다름 아닌 병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27절 본문에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의원에게 가고 싶어도 갈 돈이 없습니다. 간다해도 지금까지 고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관한 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온 갈릴리와 유대지방에 퍼졌습니다. 사실 지금 노정도 예수님은 또한 병자를 고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기 위해서 가시는 노중에 이 혈루증 여인이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가깝게는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는 중이라는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회당장의 어린 딸은 더 중한 병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는 그가 죽었습니다.
이렇게 병자를 고치시는 능력이 온 이스라엘에 퍼져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믿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심할 바가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수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소문”이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생명입니다. 예수님 이름 자체로 구원이 일어납니다. 누구에게 일어납니까? 예수을 부르는 모든 사람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신약에만 “누구든지”라는 단어가 무려 196번 나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신분의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모두가 동일합니다.

(마 7: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10:14)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마 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 10: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마 11:6)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2: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
(마 12: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 15:5)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마 16: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8: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러분! 예수 믿고 특권층 행세하려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임을 부각시키려는 분이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은 차별을 하지 않으십니다. 부활과 심판에 있어서도 ‘누구든지’입니다. 즉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님께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의 여인이 예수님께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에 해당하는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해결 받은 비결은 무엇입니까?

믿음을 행함으로 옮겨야 합니다.
27절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이 믿음은 있었지만? 행함이 없었다면 그 믿음이 믿음입니까? 즉 행함을 통하여 믿음이 옮겨진 것입니다.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고 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 앞에서서 “제가 예수님을 믿으려고 했걸랑요.” 아니면 “제가 교회를 가려고 했는데요…”하면서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 예수님이 그래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하면서 모두 용서해 주실 까요? 기회는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시대인 지금입니다. 이 때가 지나가면 끝입니다.
이 여인에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일도 그렇게 쉽게된 것은 아닙니다. 많은 무리가 뒤섞여가고 있었습니다.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이 여인이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뒤로 와서”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정확한 상황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 틈에서 재빨리 뒤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앞에서만 보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다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바로 뒤입니다. 예수님의 뒤편은 좀 한가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리고 간 것입니다.
모든 일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차선이 최선이 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제일 좋은 컴퓨터를 사야 좋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차선으로 그 다음 사양을 선택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최선의 상태에서만 일하고 최상의 조건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차선이 곧 최선이라는 것을 잃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바울도 선교할 때 자신의 생각으론 당시 소아시아로 알려진 해안 지방의 도로를 따라 한바퀴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길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 바울이 ‘이제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자’라고 생각하고 돌아왔다면 그것으로 바울의 선교여행은 마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현재의 그리스지역인 지중해를 건너 유럽 땅을 밟은 것입니다.

믿고 행해야 합니다.
본문 28절에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데는 앞이나 뒤도 관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이 여인만 만진 것은 아닙니다.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이 말은 지금 사람이 많아 “예수님도 아시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누가 손을 대었는지 압니까? 또는 많은 사람이 데었는데 누가 대었냐고 물으심이 합당합니까?”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많은 사람이 손을 대었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믿고 행한 이 여인만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똑같이 교회에 나옵니다. 하지만 믿고 나와서 말씀을 듣는 분하고 “이 작은 교회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하면서 이영제 목사가 어디 설교나 좀 하는지 들어보자 하는 분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앞을 보려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잘 생기셨는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다투어 예수님을 보려고 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 없이 많은 사람 중에 앞에서 예수님을 본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 이런 식으로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건물과 목사의 브랜드가 하나의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데 사용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분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아시는 주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본문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었는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은 32절에서 누가 만진 것을 아셨습니다.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여자인 것을 아셨습니까? 제자들이 알려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대답을 못할 것을 아셨지만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이 상황을 통해서 제자들을 교육시키는데 활용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주님의 신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가시는 것과 여인이 만졌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앞에서 보지 않았지만 뒤의 여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여인은 모든 고백을 드렸습니다. 감격적인 대화입니다. 이미 병고침을 받았으나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교육과 말씀으로서 평안의 축복을 해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안 하셨으면 지금 일어난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또한 혈루병 여인은 몰래 예수님의 능력을 도둑질하여 고침을 받은 것 같아 떳떳하지 못하게 될 뻔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아시는 주님께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하심으로 영적인 축복까지 받게된 것입니다.
이미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다가오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앞이 아니라 뒤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믿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행함을 통해서 우리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개를 훈련시킬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마룻바닥에 아주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를 가져다 놓은 후 개를 데리고 온다. 개가 그것을 보고 뛰어가 그 고깃덩어리를 물면 몇 차례 개를 때려주고 고기를 빼앗아 놓습니다. 그 다음 또 그 자리에 고깃덩어리를 갖다 놓고 기다리면 개는 또 그것을 향해 달려듭니다. 그때 주인은 “안돼!”하고 명령을 합니다. 그러면 개는 멈칫하고 섭니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훈련을 하고 나면 개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고깃덩어리를 갖다 놔도 개는 그것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얼굴을 쳐다봅니다. 주인이 무엇이라고 명령을 하나? 개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행동할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가 물질을 가지고 와서 시험을 합니다. 세상의 인기와 권력을 가지고 와서 시험을 합니다. 그때 그것을 쳐다보지 말고. 먼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마귀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여러분!
자신 있게 주앙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교적 명령을 받드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뒤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그곳으로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부록
(마 7: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10:14)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마 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 10:42)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마 11:6)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2: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
(마 12: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 15:5)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마 16: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8: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
(마 19: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 20: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 20: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3:12)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 23:16)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마 23:18)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막 3:29)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막 3: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막 8:3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8)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
(막 9:37)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
(막 9:41)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
(막 9:42)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막 10:11)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막 10: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
(막 10:43)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막 10:44)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1: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
(눅 7:23)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눅 8:16)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
(눅 8:18)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
(눅 9:5)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눅 9:24)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6)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눅 9:48)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
(눅 11:33)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눅 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눅 12:10)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눅 14: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33)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8: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
(요 6:65)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
(요 7:37)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9:22)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
(요 10: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1:57)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행 2: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 3:23)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행 8:19)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행 25:11)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
(롬 2: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
(롬 8: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
(롬 10: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롬 10: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4: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고전 3: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 3: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 3: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8)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
(고전 3:21)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 8:2)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고전 8:3)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고전 8:10)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
(고전 9:15)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
(고전 10: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1: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고전 11:34)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남은 것은 …
(고전 12: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
(고전 14:37)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고전 14:38)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고전 16:11)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고전 16:22)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고후 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11:16)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
(갈 1: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
(갈 3: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
(갈 3: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갈 5:10)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
(갈 6: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엡 2: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5:6)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엡 5:29)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빌 3: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빌 3:15)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
(골 2:16)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8)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
(살전 3:3)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살후 3:10)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딤전 4:12)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딤전 5:8)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전 6:3)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 하면
(딤후 2: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
(히 3: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 4:11)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약 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23)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약 1: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약 2:10)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자가 되나니
(약 2: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
(약 4:4)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
(벧전 4: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벧후 2:19)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요일 2:5)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
(요일 2:15)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 4:15)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일 4: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
(요일 5:16)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
(요이 1:10)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계 3: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
(계 11:5)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하면 반드시 …
(계 13:9)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
(계 13:17)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4:9)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
(계 14:11)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
(계 16:15)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
(계 20: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 22:18)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
(계 22:19)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데로 가라

예수님의 생애(9.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데로 가라) / 누가복음 5:4-11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되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어느 목사님이 중국 북경에 가서 성도들을 방문했습니다. 가정예배 처소였는데, 그곳에서는 예배를 드릴 때, 외부에서 온 사람은 절대로 설교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일어서서 말하면 설교요, 앉아서 말하면 좌담이 되어 외부에서 온 사람도 앉아서 말하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좌담식으로 앉아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말씀 더하라는 회중의 권유에 따라 두 시간이나 설교를 했답니다. 이야기가 끝나 경청하던 청년 하나가 벌떡 일어나 소리칩니다. “오늘의 교양, 전적으로 접수합니다.” 공산당이 교양 할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접수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전적으로 접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 명령
고기를 잡으려면 고기가 있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지금 고기가 어디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깊은데”있다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고기잡고 빈 그물을 털고 있는 어부들의 심정이란, 하루종일 땀흘려 일하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경험을 하신 분들은 이해합니다. 허무하고 허탈한 것입니다. 저희 어머님이 지금도 저에게 하시는 말이 있는데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오다가 돌을 차면서 왔는데 하필이면 그게 앞집 가게 유리에 맞아 쨍그랑 깨졌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저를 알았기 때문에 가만히 계셨습니다. 차라리 혼을 내주면 좋은데 그냥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일 없이 집에 왔는데 저녁에 어머님이 일 다녀오시면서 하루 품삯을 그 아주머니에게 주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일을 생각하시면 그렇게 허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어부들은 밤새도록 고기잡이하고 빈 그물을 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깊은데로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지금 고기들은 아침이 되어서 깊은 데로 몰려있습니다. 이곳에 어망을 내리면 됩니다.
여러분 밑천 없는 분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시려면 어디를 가시면 되는지 아십니까? 돈이 굴러다니는데 가시면 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시장입니다. 시장에 가면 돈이 돕니다. 지금 시장은 또 형편이 다른가 봅니다. 즉 기회가 있는 곳에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할 일이 있는 곳에 가야합니다. 선교지에 가면 사회가 역동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불평만 합니다. 이건 아직 이렇고 저건 저래서 불만이고, 그러나 기회를 보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다 되어있으면 내가 필요 없지 않습니까? 아직 부족한 것이 있는 곳 그곳에 내가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깊은 곳입니다. 그곳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 명령에 따르기 싫었을 것입니다. 어망을 깨끗하게 했는데 이제 더 헛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다 고기잡이는 밤이 제일이지 이제 아침에는 적격이 아니다, 또 적당인 깊이가 제격이지 깊은 곳은 아니다, 고기잡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목수의 말을 듣다니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이와 같이 불합리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절) – 순종
처음에는 예수님의 이 명령에 베드로는 반신반의하였습니다. 그래서 변명을 합니다. “우리들이 밤이 되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을 안 해도 예수님은 지금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안 해도 될 말을 합니다. 이 말속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우리들이 한시간도 아니고 그것도 밤 세도록 잡았는데 얻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나가 고기를 잡아본들 잡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며 목수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적 배경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한들 얻을 것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바다로 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수님께 순종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은 누구의 말을 듣고 사는 것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철학이다라고 말합니다. 다 철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누군가의 철학을 이어받거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아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억지에 불과합니다. 부모로부터, 학교로부터, 사회로부터 사람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론, 환경에 영항을 받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책일 질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축복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자체가 축복입니다. 여러분 말씀에 의지하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의 배경에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말씀” 의지하였습니다.
신석구 목사는 어떤 장로와 길을 가던 도중에 자신의 목회 철학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장로님, 신바닥의 진리를 아십니까? 이 신바닥은 주인이 가자 하는 대로 순종만 합니다. 자갈길로 가자면 가고, 가시밭길도 지나가고, 더러운 오물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불평불만 없이 따라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목사나 장로는 자기 주장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백성의 길은 바로 순종의 길입니다.

가득 차는 육신적 축복(6-7절) – 축복
순종은 항상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삼상 15:22) 하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노하우(KNOW-HOW)만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포기할 때 비로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 인도의 성자 선다 싱이 네팔지방의 산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쳐 한치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모르는 사이지만 같은 방향으로 가는 길동무가 한 사람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그들이 추위와 눈보라를 헤치며 한참 가니 인적도 없는 외진 산비탈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싱이 동행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그냥 두면 틀림없이 죽고 말 거요.’
동행인은 펄쩍 뛰었습니다.
‘미쳤소? 우리도 죽을지 모르는 판에 어떻게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단 말이오’
그는 화까지 내면서 혼자 서둘러 떠나버렸습니다. 싱은 할 수 없이 쓰러진 사람을 등에 업고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한파는 갈수록 심해지고 기운은 떨어져갔으나 이를 악물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온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등에 업힌 사람도 싱의 따뜻한 체온으로 얼었던 몸이 녹으며 차츰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가자 마을이 나왔습니다. 희망이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을 입구에서 눈 속에 얼어죽은 시체 하나가 발에 걸렸습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 동행이었습니다. 이 판국에 누구를 돕느냐고 서둘러 간 사람은 얼어죽고, 죽어가던 사람을 업고 간 싱은 살게 된 것입니다.
경제불황이 닥치면서 우리 모두 그들처럼 혹한 속의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앞길은 전혀 보이지 않고 너나없이 불안과 절망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이기심의 만연입니다. 내 코가 석 자인데 어떻게 남을 돕느냐는 동행인 같은 사람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를 녹여주고 생기를 넣어줄 수 있는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서로의 체온입니다. 싱과 쓰러졌던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함께 나누면 죽음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그것은 사랑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누구나 어렵지만 자신을 잘 살피면 그 중에서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걸 다같이 주고받으면 어떤 역경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물을 던졌을 때 놀랍게도 엄청난 물고기가 잡혀 올라옵니다. 그물이 찢어지려 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청합니다. 그래 그들이 와서 고기를 퍼담는데 두 배에 잠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도 경험하는 바지만 어려울 때 도움 청하기는 쉬워도 넘칠 때 도움을 청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밤새도록 고생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지금 어떻게 고기를 잡았습니까?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것은 자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고기를 자기 혼자 가져도 누구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다른 배의 친구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의 마음, 동역하는 마음, 도움을 청하는 마음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혼자서 하면 매우 힘이 들지만 누가 옆에서 조금만 거들어 주어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우리를 위대한 인물로 성장시키는 비결이요 또한 상대편을 위대한 인물로 함께 자라게 하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협력자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7절까지는 이세상의 육신의 축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축복 받는 것이 이 세상의 것으로 끝난다면 그야말로 허무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 중에는 그래도 좋으니 돈벼락이나 한고 죽으면 소원이 없고 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의 안타까움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저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돈 한번 벌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고민해 왔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세상의 고난에 대해서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제 고향이 경기도 마석인데 그곳에 당시 서울에서 등산하러 오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갈증이 나고 물이 귀하여 아이스 통에 하드(아이스께끼)를 넣은 통을 가지고 천마산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산은 해발 812m입니다. 그곳에서는 하드 값을 배 이상 불러도 잘 팔립니다. 그렇게 돈맛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는 뒷전입니다. 어떻게 학교 빨리 마치고 돈벌러 가느냐 하는 것이 제 고민이었습니다. 학교를 마치자 마자 달려가 도매로 빵을 구하고 그 빵을 경춘선 기차에 올라가 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홍익회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아무나 팔면 되는 것으로 알고 빵을 팔다 홍익회 아저씨들한테 혼나고 내려온 적도 있습니다. 겨울방학 때는 탄광에 가면 돈을 번다기에 친구를 꼬셔서 강원도 황지 탄광촌에까지 갔었습니다. 더 할까요? 이 정도만 말씀드리면 저도 보통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런 저에게도 봄날의 햇빛이 따스하게 내려 쬐듯이 어느새 예수님이 제 마음에 들어오시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드렸던 고백이 저의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 – 회개의 고백
고기가 많이 잡힘을 보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9절 하반). “놀라고(담보스)”는 매우 두려움을 느끼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말문이 막히다와 같은 표현입니다. 어부들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밤새도록 잡아도 잡히지 않던 고기가 한배에 실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배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축복해 주시면 감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고기만 잡고 놀랐으면 되었지 베드로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갑자기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광채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가 드러난 것입니다.
아마 당시의 대제사장이나 율법사, 랍비들, 산헤드린공의회 회원 정도가 되면 죄인과 함께 있지 못하겠다고 떠났을 것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그냥 유대인들도 죄인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오히려 돌로 치려고 합니다.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을 위해서 죄인의 세상에, 죄인을 대신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취하리라(10절) – 예수님의 약속
베드로만 놀란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같이 동업하는 야고보, 요한도 놀랐습니다. 놀라서 떨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무서워 말라”고 하십니다. 이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진정시키십니다. 오히려 세례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모양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을 때보다 더 돌란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을 때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도했지만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만큼 자신들의 생각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기라고는 잡아보지도 않으시고 목수 일만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결과 넘치도록 많은 고기를 잡고 놀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렇게 고기를 잡았던 것과 같이 사람들을 사로잡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11절) – 제자됨
저는 솔직히 이 상황에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흔히 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신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따라가서 어떻게 할까?, 지금 저 많이 잡은 고기는 어떻게 하고? 그런 걱정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강력한 하늘로부터 오는 힘을 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배와 고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아멘
더 이상의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된 것이 제일 큰 축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도가 된 것이 제일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에서 한 가족과 같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여 선교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사역을 같이 하시는 분 가운데 한국인 아가씨가 한 분 있는데, 킴 윅스라는 맹인 아가씨입니다. 한국전쟁 때 실명을 했고 고아원에서 자라났는데, 어떤 미군 중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인디아나 주립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오스트리아에서 성악 수업을 하여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그녀가 예수를 믿고 놀라운 간증을 갖게 되어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집회를 할 때마다 간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녀의 간증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장님인 나를 인도할 때, 저 101미터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고 말하고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말합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분을 내가 믿고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 성실할 때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꼭 도착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10년 후를 알지 못합니다. 20년 후도 알지 못합니다. 또 알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보이시는 그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오늘을 살면 하나님은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내 생애를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그곳에 도달케 하실 것입니다.”
순종하면 지금도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역사 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이것은 주님의 영원한 명령입니다. 이 부름에 우리모두 아멘으로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