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의 여섯 가지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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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생애(17. 바리새인의 여섯 가지 화) / 눅 11:42-52

“42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오늘은 1517년 10월 31일에 로마카톨릭의 이른바 면죄증(免罪證)에 대한 95개 반박문을 독일 비텐베르그교회 정문에 마틴 루터가 붙임으로 16세기 종교개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 날입니다. 현재 우리 개신교회가 로마카톨릭과 구분하여 지켜오게 된 날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종교개혁’일로 지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제일 큰 종교개혁을 주도한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에센파, 사두개파, 바리새인(파리사이오이파)) 으로부터 종교개혁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신앙노선은 에센파의 숙명론과 사두개파의 자유 선택적 입장의 중간 노선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제일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잘못을 6가지로 지적하셨습니다. 로마카톨릭으로부터 개혁한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도 예수님이 지적한 6가지 문제에 모두 걸려있습니다.
사람에게 제일 지독한 욕이 있다면 역사적으로 잘못을 저질러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독일 나치 같다고 한다든지, 한국에서는 일본인을 비하하는 ‘쪽발이’ 같다든지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치욕스런 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 같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과오를 저질렀던 바리새인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재점검하고 잘못된 것이 있다면 고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 바리새파 사람이나 로마카톨릭의 잘못만 지적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잘못을 돌아보지 못하면 우리 또한 그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섯 가지 잘못을 지적하실 때 “화 있을찐저”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저주나 복수의 말이 아니라 oujai(우아이)라는 ‘슬픔의 탄성’ 소리입니다. 왜 이런 안타까운 탄성을 하셨겠습니까? 바리새인이라는 말의 뜻이 ‘분리’입니다. 즉 자신들의 신앙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로마 카톨릭보다 잘 믿겠다고, 바르게 하겠다고 분리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들보다 못하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바리새인을 보고 탄식을 질렀던 oujai(우아이) ‘화 있을찐저’라고 탄식하실 것입니다. 이 탄성의 소리는 안타까움에 대한 소리입니다. 슬픔의 소리입니다. 우리를 보고 이 탄식을 주님의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마음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화(외형적 신앙)
“42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언 듯 보아 잘못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것이 잘못이지 십일조를 이렇게 잘 구분하여 드리는 신앙이 잘못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곡식, 포도주, 기름 같은 주요 농산물은 십일조를 드릴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레 27:30-33, 신 14:22-29). 그리고 예수님도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들이 드리는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십일조의 문제가 아니라 십일조만 드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공의와 사랑”은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사람들은 자주색에 가까운 빨간색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영국 시내 버스의 색이 빨간 색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빨간색을 사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체통입니다. 아일랜드 공화국이 영국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독립을 강조하기 위해서 빨간색이 아닌 녹색을 우체통에 칠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체통으로 생각하지 않아 다시 빨간색으로 칠했다고 합니다.
만일 여자들의 립스틱이 빨간 색이 아니라 녹색으로 칠하고 다니면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쳐다볼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빨간색이냐 녹색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편지를 넣는 우체통이라는 것과 그 입술이 빨가냐 녹색이냐 보다는 그 입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일 것입니다. 전통과 습관은 때로는 본질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와 같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정한 규범들이 본질은 없어지고 껍데기만 남으면 안됩니다. 따라합시다. “형식에 빠져서 진실을 잃지 말자” 아멘.

두 번째 화(명예욕과 교만)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는 교권적 교만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변화 가운데 제일 반길만한 것은 예전에 교회 강대상 뒤에 높은 나무의자가 죽~ 놓여져 있었는데 이제 그런 것이 없어져서 좋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높은 단상에 앉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무를 충실히 하기보다는 외적인 자리에 탐욕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설교하실 때 늘 뒤에 성령님이 앉아 계신다고 생각하시고 인사하고 설교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마음속으로 주님이 바로 뒤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설교하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명령을 지키려는 것이지 그분의 이름을, 능력을 통해서 내가 높아지려면 잘못입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은 세속적 명예욕입니다. 바리새인이 종교 지도자로서 문안 받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사 받을 수 있도록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왜 지적하셨습니까? 자신들은 으례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Noke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위(胃)와 같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음식으로 그것을 채우느냐가 아니라, 안에 들어있는 음식을 얼마나 소화시키느냐가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회의가 있어서 목사님들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도 오시고 다른 많은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긴 테이블인데 가운데 자리에 김삼환 목사님 자리만 따로 마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앉기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김목사님은 “제가 왜 그곳에 앉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더 연장하신 분들도 있고, 목회의 선배로 생각할 수 있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김삼환 목사님은 그 자리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겸손이 필요합니다. 자주 대접을 받다보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이 생기고 당연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합시다. 전주안디옥교회 이동휘 목사님의 목회철학입니다. “우리에게는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아멘.

세 번째 화(자신의 잘못을 은폐)
세 번째로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무덤을 만들면 그곳에 표시를 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곳이 무덤이라는 것을 알려서 그곳을 밟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민수기 19장 16절에 보면 무덤에 닿으면 7일간 부정하게 됩니다. 즉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여 또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나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평토장한 무덤인 바리새인과 같이 됩니다. 저는 오늘 로마카톨릭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설교할 수도 있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들의 잘못으로부터 개신교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바래새인이 안되려면 말입니다.
공관복음에서 마태(마 23:27)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기록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무덤”같다고 했습니다. 본문은 은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마태역시 외적 치장에만 열을 올리는 바리새인을 표현해 결국은 이 또 한 진실을 은폐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이 말하기를 ‘무덤에 표시를 하라는 것입니까? 말라는 것입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덤은 무덤일 뿐입니다. 그것에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습니다. 즉 나 자신 그대로를 보이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결국 신앙적으로 포장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주앙교회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됩니다. 하지 않은 것을 한 것처럼 말할 필요도 없고, 또 없는 시설을 있는 것처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포장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 그것만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한 신사가 길을 걸어가다가 맹인소녀가 동전 통을 앞에 놓고 앉아있는 것이 불쌍하게 생각돼 지갑에서 1만원 짜리 지폐 1장을 꺼내 넣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소녀가 눈을 크게 뜨고 큰 액수에 놀라는 눈치로 지폐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신사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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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생애(16.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눅 7:11-17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틴 마틴이라고 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한창 청년 때 아리따운 아가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부모들도 좋아하고 본인들도 좋아하여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하고는 얼마나 좋아하는지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첫아이도 낳기 전에 병들어 손도 써볼 여유 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시신 앞에서 울고 울다가 밤이 되었을 때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는데 아버지가 볼 때에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밤새도록 몽유병 환자처럼 정신없이 어디론가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밝아왔습니다. 동이 터오기 시작하자 정신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서있는 앞에 큰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그 강에 빠져 죽을 뻔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뛰쳐나갈 때 아버지가 뒤 좇아 온 것입니다. 구경하려고 따라온 것입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붙잡아 주려고 한 것입니다.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없이 묵묵하게 밤새도록 아들의 뒤를 따라다닌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부모의 심정만이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돌봐 주십니다. 우리가 정신없는 지경에 이르러도 하나님은 나도 모르게 그림자처럼 따라와서 우리를 돌봐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광경이 나타납니다. 누가는 죽은 사람이 12절에서 ‘그 어미의 독자’, ‘어미는 과부’라고 설명해 줍니다. 독자인 아들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던 이 여인에게 더 이상의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여인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 남고 말았습니다. 로마 압제하에 있던 이 당시의 여자들은 자기 생계를 꾸려간다는 것은 너무나 고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 하나만을 의지하면서 꿋꿋하게 살던 이 여인은 외로움과 슬픔 이외에도 혈통이 단절되어 혼자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속담에 늘 한숨을 짓는 사람을 일컬어 ‘젊은 과부 한숨 쉬듯’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만큼 과부로서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회적 관심을 가져야할 대상
성경은 과부에 대해서 특별히 사회적 관심을 가져야할 대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슥 7: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말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외식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막 12: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고 책망 하셨습니다.
또한 과부의 작은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 12:42-44)
약 1:27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긍휼
예수님은 과부의 독자가 죽은 딱한 사정을 그의 슬피 우는 울음소리를 통해서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이 소리는 예수님만 들은 것이 아니며 예수님과 함께 따르던 수많은 무리들이 함께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리와 장례무리와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사람이 많았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에서 나타난 병고침이나 신유의 은사들의 대부분은 병자 자신이나 부모, 친인척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에 간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살리실 때는 누가 요청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렬과 부딪힌 장례무리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것입니다. 본문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과부의 사정을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실 때는 모두 그 원동력은 사랑이었습니다(마 14:14, 20:34). “불쌍히 여기사”의 원문 splagcnivzomai(스프랑크니조마이)는 ‘창자까지 뒤틀려지는 열정적 아픔’을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불쌍히 여기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측은히 여기시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괘씸히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끝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여러분들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어려운 것 같으면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은 눅 4:25-26에서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면 무조건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과부만 보면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제일 악한 사람은 바로 그 과부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눅 18:4-5 비유 중에서 “4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평소 관심이 과부에게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 과부들의 사정을 익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 제일 비참한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독자가 죽은 나인성 과부의 울부짖는 소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마음은 그의 아들을 살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14절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함께 한 두 무리들에게는 돌발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관에 손을 데는 일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레 22:4, 민 19:11). 예수님의 이런 행동으로 상여를 메고 가던 자들이 멈춰 섰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은 세마포로 싼 시체에 뚜껑 없는 관을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이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동굴 같은 곳에 시체를 같다놓기 때문에 관은 이동할 때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시체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문이외에 두 사람을 더 살리신 기사가 나오는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눅 8:40-56)과 나사로를 살리신 것(요 11:17:44)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는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셨습니다. 나사로는 무덤 밖에서 명령만 하셨습니다. 오늘 과부의 독자는 관(시체)에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말씀으로 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대신 것은 사랑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메시야 되심을 입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것 외에 성경은 몇 번의 사건을 더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은자를 살리신 것에 대해서 별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먼저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 간곡히 부르짖었습니다(왕상 17:17-24).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그 시체 위에 거듭 엎드렸습니다(왕하 4:32-37). 베드로는 도르가의 시체 앞에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행 9:36-43).
죽은 자를 살릴 때 예수님과 선지자(엘리야, 엘리사)나 제자(베드로)의 방법이 다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일어나라’ ejgeivrw(에게이로)고만 하셨습니다. 그에 비해 선지자나 제자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즉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말합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입니다. 지금 일어나야 합니다. 죽은 시체에게 명령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주신 분으로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메시야 곧 하나님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롬 8:2, 고후 1:10, 딤후 1:10).

둘째,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요 2:19, 요 24:36-49). 그러나 그것을 믿는 것이란 싶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과부의 아들과 아이로의 딸과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과 아울러 자신도 부활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또한 성도들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전 15:13)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악 된 세상의 죽음에 지배당하는 분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전적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자신을 죽음이 지배할 수 없기에 그분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또 언젠가는 죽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 영생을 소유하려면 나인 성의 과부도 이제부터는 아들 제일 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아들이 주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주가 되어야 합니다.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물론 지금 살리시기 때문에 울지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이 여인이 또 울게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가장 불행한 경우의 반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아들이 살아나면서 제일 행복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 때 아들만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물질 축복이 주어진 사람이 물질만 바라보면 안됩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프랑스에 샤르황제가 세상에서 도대체 행복한 사람 그것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굴까 생각하다가 그 당시 시인으로 굉장히 명성이 높은 따소라고 하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따소가 황제 앞에 섰습니다. “내가 한가지 고민이 있어서 그러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시인 따소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거야 하나님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화가나서 “이 사람아, 내가 하나님을 물었나?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란 말이오” 이번에도 시인 따소는 망설이지 않고 “그거야 뻔하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뭐가 뻔한건가?” “가장 행복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 그리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 샤르황제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나도 이제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겠다’고 다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기적 같은 일에 참여할 수도 있고 목도 할 수도 있고 돈을 주고도 볼 수 없는 그런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동행의 은혜가 즉 그런 체험의 은혜가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6절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라고 했습니다. 죽은 아들을 살리시고 어미에게 주셨습니다. 사실 주님이 살리셨으니까 주님이 쓰시겠다고 해도 말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주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욥은 자식이 죽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와 현재 함께 할 수 있는 자녀를, 남편을, 아내를, 부모님을 보내주신 것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혹 아무도 없어도 욥과 같이 고백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의 길

예수님의 생애(15. 제자의 길) / 마 8:18-22, 눅 9:57-62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오늘 설교는 아무 교회에서나 아무에게나 편하게 할 수 있는 설교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즉 수준이 아주 높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앙교회는 모두가 예수의 제자되는 교회이어야 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오늘 말씀을 전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세 부류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장 15절에 보면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명이나 되더라.” 11장 24절에 보면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리”란 초대교회 당시,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는 참석한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신자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에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4장 32절에는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5장 14절에는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믿는 사람’이란 ‘신자’를 말합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확실히 믿고 신앙고백하는 신앙 인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험과 고통 중에서도 신앙의 변화가 없이 꾸준하게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보다 더 좋은 신앙인이 바로 세 번째 부류인 ‘제자’입니다. ‘제자’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예수와 동거동락하며,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으며, 예수와 함께 그의 영광에도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며 예수님을 위해서 희생할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부르사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능력과 권세도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막3;13-15).
신약성경에서는 “제자”라는 명사가 265번, “제자가 된다”는 동사가 25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제자’라는 말은 헬라 원문에 ’마데테스‘라고 합니다. 이것은 ’배우는 자’ 또는 ‘같은 방향으로 가면서 같이 행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께 나오는 사람들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은 두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필요에 따라 나오는 사람입니다. 병고침, 베고픔, 출세를 위해서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만일 자신이 아프지 않거나 배고프지 않으면 주님께 나오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미 출세했기 때문에 교회에 나올 필요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출세하지 못했지만 교회에 나오면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하지 못한 것을 보상받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예전에 한번 ‘완장’이라는 드라마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떻게 해서 완장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완장에 자부심을 가지고 큰 벼슬한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주번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주번을 하면 완장을 찹니다. 어린 마음에 그 완장이 대단히 자부심을 느끼게 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공산당의 당 간부들은 붉은 완장을 찹니다. 그 완장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봉사하는 봉사의 완장이라는 의미보다는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권위의 완장입니다. 겉에 보이는 완장만 차지 않았지 교회에 나오면서 이러한 완장을 찬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주앙교회야 개척 1년 된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 이런 분들이 없습니다만 우리 스스로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둘째, 주님이 인기가 있기 때문에 따라가려는 사람들입니다. 18절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그랬습니다. 지금 주님의 인기는 매우 높습니다. 본문 8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8장에서만 예수님이 고쳐주신 사람은 ① 2-4절 문둥병자를 고쳐 주었습니다. ② 5-13절 백부장의 간청으로 그의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주었습니다. ③ 14-15절 베드로의 장모 열병을 고쳐주었습니다. ④ 16절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한마디로 지금 예수님의 인기는 절정입니다. 함께 따라다니던 제자들의 어깨는 상당히 우쭐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 나온 사람 둘이 있습니다. 물론 밀고 댕기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서기관’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1절에 “제자 중에 또 하나가”라고 소개됩니다. 이로 보아 ‘서기관’으로 소개된 이 사람 역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공관복음에서 마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가 처음에 나온 “제자”이고 본문이 두 번째 “제자”라고 나타난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제자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예수님으로부터 충분한 가르침을 받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이 이제부터 가르치시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성숙된 믿음이나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지금 쫓으라
이 서기관은 예수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좇으리이다’ 원문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어디로 가시는 중이든지’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모두 현재형입니다. 과거에 믿었던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 다음에 믿을 것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미리 믿어 가지고 그 오랜 시간 교회에 다니면서 시간 없애고 돈 없애고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참 머리가 좋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생각을 가지고 돌아온다 해도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믿음이란 그렇게 계산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믿음의 현재형은 과거와 미래를 담보한 현재형입니다.
“좇으리이다”의 ajkolouqhvsw(아콜루데오)는 ‘따르다, 닮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인기 절정이기 때문에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이 제자는 상당히 흥분되어 있는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가 한 고백은 잘못은 아니지만 상당히 자기 도취에 빠져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에게 제자가 되어 따라 가야하는 참 길을 설명하십니다.

모 대학교수가 [한국 기독교인의 의식구조]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특별히 사회학적 측면에서 연구 조사한 것을 발표했습니다. 이 중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느냐”라는 질문에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으로 나누어 조사를 했습니다. 긍정적인 면에서는 착하다. 선하다. 진실하다, 상냥하다, 친밀감이 간다. 성실하다, 친절하다 등이며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교회에 출석을 강요해서 싫다. 말이 많다. 위선적이다. 잘난척한다. 자기 도취에 빠져 있다 등입니다. 특히 여기서 말이 많다라는 뜻은 정말 말이 많다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말이 있는 만큼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행위가 있고 말이 많으면 말 많다는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행위가 없으면 자연히 말만 남게 되고, 그러니까 말이 많다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차대전 때 일본군은 태국 콰이강에 다리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동남아를 모두 점령하려는 전략 가운데 가장 큰 계획으로 군사와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영국군 포로를 이용, 콰이강의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군은 중요한 장비를 잃어버렸습니다. 일본군은 영국 포로들이 조직적으로 작업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로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총부리를 들이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장비를 숨긴 자는 자수하라. 만일 셋을 셀 때까지 자수하지 않으면 모두가 총살이다. 하나, 둘… 셋”을 외치려는 순간 한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내가 숨겼습니다.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순간 즉석에서 총성이 울리고 그 포로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일본군 창고에서 그 장비가 발견되었습니다. 일본군이 그곳에 잘 간수해놓고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말라
서기관이었던 제자의 고백에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는 말씀으로 대답을 대신하셨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대답으로 제자 되는 것을 거절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절한 것으로 굳힐만한 다른 증거는 없습니다.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가져야 될 자기 부정, 희생, 봉사, 고난 등을 깨우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우의 굴이나 새의 거처는 잠시 지낼 처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처소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부터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사정은 같았습니다. 그분의 일생이 이 땅에서는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오병이어 같은 기적이나 물로 포도주 만드신 기적, 그렇게 많은 병자를 고치셨으면 얼마든지 집 한 채나, 서당 같은 것을 만들어 ‘가말리엘’보다 유대 랍비들의 집보다는 더 나은 것을 준비하실 수 있었을 텐데… 서점에 가보면 10억 만들기, 10년 안에 집 마련하기 등 부동산 관련 책들이 많습니다. 아마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생활은 그야말로 실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관점은 무엇입니까?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 이것만이 예수님이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이 세상의 안식처나 부귀 영화를 위해서, 인기를 얻으시려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욕심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할 것과 영원한 천국을 위해서 때로는 고난과 죽음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세상의 잣대로 성공과 실패로 구분하는 지상의 물질 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이 기뻐하는 교회라면 다시 한번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젊은이 둘이서 깊은 시내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건너가는 도중 한 청년이 다리 밑을 보니까 강물이 소용돌이를 치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을 자꾸 내려다보면 그 청년이,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것을 본 다른 친구가 그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위를 봐! 하늘을 봐!”
그렇습니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은 여러 장벽을 바라보면 도저히 뚫고 나갈 수 없을 것 같지마는 위를 바라보고 믿음을 가질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자의 우선 순위
21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두 번째 제자가 부탁했습니다. 자식으로서의 ‘효’와 예수님을 따르는 문제에 대해서 우선 순위를 혼동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전도여행 가시는데 이 제자의 집에 부친이 죽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연로한 아버지를 모시다 그가 죽으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인지의 의미는 문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모를 모시는 것은 제5계명에 근거하고 있습니다(출 20:12, 신27:16). 부모를 공양해야 하는 것이나 죽어서 장례에 참석해야 하는 것은 모두 최고 급선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경우이든지 복음전도 사역보다 우선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 유교에서는 국가의 충신이나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을 똑같이 보았습니다. 그만큼 효를 강조한 대목입니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공무원이나 군인은 부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나라의 급한 일이 있으면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을 충신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어찌 한 나라에 충성하는 것보다 못하겠습니까?
오늘날은 학생이 영어를 배운다면 영어만 배우면 그만입니다. 선생의 성품이나 가정생활 또는 그 분의 철학을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영어만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선생과 학생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에서는 독본이 따로 없으며 그 랍비의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랍비 자신 전체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랍비와 제자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배우고, 따르고, 순종하고, 절대 수락하고, 절대 신뢰하고 절대 신앙하는 것이 제자였습니다. 이 뜻의 좋은 격언으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에서 보여 주십니다. “너희는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여기서 말하는 멍에는 죄짐을 의미하거나 매고 어려운 세상에서 사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멍에는 내가 당하는 모든 일, 내가지는 십자가 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뜻입니다. 내 운명과 같이 가면서 나와 같이 가면서 나와 같이 보조를 맞추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어느 골방에서 명상이나 하며 책이나 참고하면서 예수를 배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멍에를 매고 나와 함께 가면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 따르면서, 본받으면서 예수님을 배우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학자 존 네이스빗은

복음서 속의 복음

예수님의 생애(14. 복음서 속의 복음) /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금까지 제가 설교할 때 본문의 말씀이 비교적 길었던 것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최대한 성경 본문 안에서 설교하려는 뜻이 있습니다. 둘째는 성경의 배경을 충분히 이해시키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딱 한 절입니다. 그것도 우리모두가 외우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Luther)는 이 말씀을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은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한 절에 모든 복음의 핵심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①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 ② 방법은 독생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 ③ 범위는 누구든지 ④ 목적은 영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토록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십자가를 지게 한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다름 아닌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입니다. 다른 설명과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사랑을 5살 때인가 사랑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모든 것을 다 주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믿지 않으시는 눈친데 고백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5-6살 때인가 우리 집 뒤에 사는 예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집은 아빠가 목수이셔서 나무를 켜고 문짝 같은 것을 만들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나무 조각이 많은데 저는 그것을 가지고 놀기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막대 달린 사탕을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래도록 먹으려고 천천히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아이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에요. 제 사탕을 먹고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 아빠에게 신세진 것도 있고 해서 사탕을 빨다말고 ‘너 먹어, 그런데 조금만 빨다 도로 줘야해’하고 손을 내밀었더니 얼른 받아 빨아먹었습니다. 그 애는 조금이라도 더 빨아먹으려고 쭉쭉 빠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불안했습니다. 사탕이 자꾸만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하며 ‘야 이제 줘’하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 애는 아주 주지 않을 눈치였습니다. 이제 사정은 내가 다급해 졌습니다. 그 때 그애 엄마가 ‘밥 먹어야지’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애는 사탕을 그제 서야 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나무막대기가 다 나온 사탕을 돌려 받았습니다. 저는 이때 사탕(사랑)을 주면 아주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
테일러 스미스(Taylor Smith)목사는 기독교의 핵심은 다음 세 문장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God is),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God is love),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God loves you).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은 kovsmo”(코스모스)인데 원어에서 이 용어는 죄로 물든 타락한세상을 말합니다. 이 단어가 처음 나오는 곳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마 4:8)입니다. “천하 만국”으로 번역된 것이 ‘코스모스’입니다.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눅 11:50)의 “세대”에 원문에는 ‘코스모스’ 단어가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의 “세상”역시 ‘코스모스’입니다.
구원의 대상은 아담이후로 죄악이 물든 이 땅의 모든 사람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입니다. 그러나 나로 볼 때는 복수가 아닌 단수로 나 개인입니다. 나를 위해서 주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 ‘세상을’에 자기 이름을 넣어서 읽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이영제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원문의 ‘세상’ kovsmon(코스몬)에서는 명사. 주격, 남성형, 단수로 나옵니다. 복수가 아닌 단수인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단 하나다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나는 유일한 존재로서 오직 나를 위해서 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세상에 제일 비참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 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 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는 불필요하다는 느낌과 같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29명을 살해한 시대의 살인마로 불리는 유영철씨(34)가 최근에 구치소에서 자살을 시도하려다 실패했습니다. 그는 유가족에게 남긴 편지에서 ‘사죄한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유영철씨는 경찰 조사 등에 따르면 유씨는 노동일을 하는 부모 사이에 3남1녀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14살 무렵 아버지가 간질환으로 사망한 뒤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고, 공고 2학년 재학중 절도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됐다. 학교는 이때 접었고, 이후 사회에 진출해 갖가지 직업을 떠돈 것으로 알려졌다. 21살 때(99년) 마사지 안마사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으나, 무려 14차례 특수절도 및 성폭력 등 범행을 저질러 10여년을 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2002년 전주교도소 수감 중 부인이 이혼소송을 제기, 이혼을 당했습니다. 지난해 6월 만기 출소한 유씨는 전화방을 통해 알게 된 여인과 교제했으나 전과자와 이혼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절교당했습니다.
경찰은 이같은 일련의 과정과 불우했던 어린 시절 때문에 사회와 여성에 대한 혐오증을 키워온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자신의 불행이 부자들 때문이며, 여성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부유한 사람과 여성에 대한 무차별적 살해 동기를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오늘 예수그리스도는 말씀은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며, 따라서 아무도 하나님께 불필요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유영철씨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더라면 이러한 끔찍한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라도 그가 예수 믿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게 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 받게 하는 것’입니다. 정종엽이 생일이 조금 지났는데 늦게 안 누나들이 옷을 선물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도 못 받아 본 옷 선물을 받아서 좋겠네’ 그랬더니 종엽이가 하는 말 ‘저도 누나들 생일에 다시 돌려줘야 하는데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돈이 있다고 내 것을 내가 사면 세상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사랑이 담긴 선물이기 때문에 값으로 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먹고삽니다.
-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이민섭 작사, 작곡)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소요리문답에 보면 1번에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이뇨?”라고 묻습니다. 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고전10:31, 롬11:36)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시73:25, 요17:22-24)”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지역에 있는 선교사님들과 하는 말 중에서 ‘여기서 산다는 것이 선교입니다’라고 하곤 합니다. 여러분! 힘드시죠. 우리(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곧 선교입니다. 열심히 삽시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선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에서 더 좋은 선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곧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사랑하면 주고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이것은 사랑의 성질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려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주고싶은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랑은 저절로 주고 싶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앞에 있으면 좀 치사하지만 밤 먹는데 맛있는 반찬 더 먹는 것도 보기 싫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먹으면 좀더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먹는 모습이 줄줄 흘리고 먹어도 보기 좋습니다. 요일 4:16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사랑 자체가 무엇입니까?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합니다. 데가볼리의 거라사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돼지를 기르면서 좀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었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용납하시지 않자 그들은 예수를 좇아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딱 하나만 포기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어떠한 행복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우리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18-19 우리가 얻은 구원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금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모든 시민의 가슴을 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신앙의 도전을 주었던 한 어린 소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어린 소년의 이름은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였습니다. 라이언은 13살 때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았는데 수혈을 잘못해서 그만 에이즈(AIDS)에 걸리고만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어른들의 부주의로 소년의 인생은 이제 죽음의 길에 놓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변함없이 너무나 밝게 학교 생활을 하였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하였고, 그를 염려하는 부모님을 위로하면서 기쁘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신문 기자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소년의 이야기는 신문에 매일 게재되었고 텔레비전 등의 매체에서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레이건 대통령, 또 도널드 트럼프라는 거부 부동산 업자, 마이클 잭슨 등 유명 인사들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가 선물도 주고 위로하며 관심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후 라이언은 5년 동안 살다가 결국 18살에 죽었습니다.
이 소년이 죽기 전에 그의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내용이 한 크리스천 잡지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이제는 네게 아무 것도 해 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다오. 아빠, 전 지금까지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아무도 아빠 같은 선물을 준 사람은 없었어요. 아빠는 저에게 죽어서도 천국에 갈 수 있는 티켓을 선물로 주셨잖아요. 바로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어요. 아빠 때문에 교회에 나가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선물로 얻었는걸요. 이 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을 거예요” 하고 주님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선택
우리는 평생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은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선택권을 우리에게 넘겨주셨습니다. 즉 공은 우리에게 넘어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냐 믿지 않느냐의 결정 그것은 우리 인생에 제일 중요한 결정입니다. 여러분 중에서는 아마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잘 모르고 교회에 오셨을지 모릅니다. 그런 분에게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땡 잡았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남편과 아이들 잘 되게 해 달라고, 물질 축복이나 더 받아보려고, 병이나 나아보려고 교회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구원받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입니다. 또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늘 선택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고 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즉 들어오는 자에게 주실 선물을 잔뜩 싸놓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입니다. 우리는 좀 단순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복잡하신 분은 죄송하지만 예수 믿기가 힘듭니다. 따지고 따져도 물론 하나님께 당할 사람은 없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 9:10)라고 했습니다. 세상 똑똑하게 산다고 하지만 예수 안 믿으면 제일 미련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뭐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헛 똑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신병원의 환자가 벽에 휘갈겨 놓은 글씨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글을 조지 베벌리 세아(George Beverly Shea)라는 가수가 곡을 붙어 노래해서 유명해졌습니다.
404.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1.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2.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위의 영화 쇠할 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 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우리의 죄 사했으니 그 은혜 잊을까
3.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제일 좋은 선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제일 위대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나의 주로 받아들일 때 이야기입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영원한 집은 이제 막 짓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지어져 있습니다.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 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고 하셨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영접을 받습니다. 베트남의 정영식형제가 있습니다. 영사관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국에서 국빈으로 국회의원이나 장차관이 올 때 만 공항에 나와 영접합니다. 그런데 제가 베트남에 가니까 영사관 출입증을 달고 공항 안에까지 영접을 나왔습니다. 정씨 집안이 인사 잘하지 않습니까? 90도 각도로 공항에서 몸을 굽혀 인사합니다. 솔직히 이 기분 받아본 사람이 아니면 아무나 모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주님은 천군 천사를 대동하고 다시 오셔서 당신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영접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영접을 반드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떠나시기를 구하는 거라사인 사람들

예수님의 생애(13. 떠나시기를 구하는 거라사인 사람들) / 눅 8:26-39

“26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35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이번 주 토요일이 한글날입니다. 한글을 잘 연구해보면 우리 민족의 모든 비밀이 들어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는 ‘죽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첫 마디가 ‘피곤해서 죽겠다’입니다. 좋아도 죽겠다고 하고 슬퍼도 죽겠다고 합니다. ‘우스워 죽겠고, 재미있어 죽겠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심지어는 죽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계도 죽고, 불도 죽고, 맛도 죽는다고 합니다.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얼마나 살고 싶었으면 ‘죽겠다’라는 말이 이렇게 변화되었겠습니까? 솔직히 이 말은 진짜 죽고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죽도록 살고싶다’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했습니다. 여러분! 진짜 살고 싶으시면 나는 죽고 예수가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기막힌 사람하나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가 찾아간 마을의 불안
본문 27절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이 사건이 당시에 잘 알려진 사건이기 때문에 공동복음에 모두 기록되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3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 이는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5 고 소개했으며 마태복음 8장 28절에서는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귀신들린 사람 때문에 거라사 지역의 불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귀신들린 이 사람은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할뿐만 아니라 이 지경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여러 번 사람들은 이 사람을 묶어두기도 했었고, 쇠사슬까지 동원했었지만 그것도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길을 가로막고 있을 때는 지나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사라에게 들어간 귀신은 예수님이 이 귀신을 내어 좇기 위해서 “내 이름이 무엇이냐”고 하셨을 때 “군대라”(30절)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군대의 단위는 군단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600여명이 최소인원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최소 600개 이상의 귀신이 들어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귀신이 하나만 들어와도 사람은 제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런데 600개가 넘는 귀신이 한사람 몸 속에 있으니 이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군대귀신이 들린 이 사람 때문에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거라사 지역에 도착하시자 바로 이 사람을 만나십니다. 성경은 이 사람을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이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문제의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님은 만나십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능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학의 존재와 더불어 생각할 때는 상당한 능력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맨손으로 3m웅덩이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 나오기 어렵습니다. 군대 귀신들린 사람의 문제는 사람이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들의 근심과 불안은 더 커져만 갑니다. 무엇인가에 제한이나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은 고삐 풀어진 소처럼 됩니다. 바로 귀신들린 사람과 마찬가지 상태가 됩니다. 얼마 전 영국에서는 사고로 죽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의 육체를 또 다른 사고로 몸이 다 망가진 사람에게 이식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것은 공감하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의 육체로 바뀐다는 것은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이제 육체와 정신(머리)를 합쳐놓아 또 다른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과학의 능력을 억제하지 못하면 귀신들린 사람처럼 이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불안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문제에 접근하셨습니다. 그리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인간의 윤리 도덕을 푸는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는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들
어린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되는 것은 교육의 문제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막아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과 살아보지 않은 아이들은 예의를 모릅니다. 거라사가 있는 데가볼리 지역은 여러 민족과 종교들이 갈릴리나 유대 지역에 비해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몰아내실 때 귀신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32-33절). 이 돼지 떼는 비탈길로 내리달려 호수에 빠져죽었습니다. 귀신들이 한 마리씩 돼지에게 들어갔는지 여럿이 한 마리에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많은 돼지가죽은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분은 돼지가 아깝고 돼지 주인에게 허락도 없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서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아무리 많은 돼지보다 한 사람의 생명이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돼지는 부정한 동물로 사육하는 일은 유대인에게 금지되어있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레11:7-8).
돼지를 사육한 것은 공공연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돼지는 불결한 짐승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도 돼지와 가까이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데가볼리지역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의 신앙은 금지된 일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변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하는데 왜 나만해서는 안 되느냐는 생각입니다. 데가볼리 지역은 이방 풍습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란 예루살렘이나 유대지방 보다는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더 어려운 환경이라고 해서 이해하시고 봐 주십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정신차려야 합니다. “어떤 교인을 보니까?, 어떤 집사 보니까?, 어떤 목사도 하는데, 다른 사람 다 하는데”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그분들 지옥가면 따라 갈 겁니까?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남들이 다 한다고 해서 안될 하나님의 금지된 명령을 따라하지 맙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기보다는 쉽게 주위의 사람들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가 삶의 영역에 관여하면 싫어합니다.
솔직하게 오늘 말해 봅시다. 그리스도가 찾아오심으로 이익을 볼 때는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삶과 관계되어 손해를 끼치면 싫어합니다. 데가볼리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주인, 우리 시간의 주인, 우리 관계의 주인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주님의 제자인척 하는 사람은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주인이 되는 것은 싫어합니다. 자기 멋대로 하면서 ‘주님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재산에 손해를 입히셨다면 그것은 더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해를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마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많은 사람이 떠날 것입니다. 정신차립시다. 지금 이 세상의 문제 때문에 영원을 영혼을 버리시면 안됩니다.
제가 일본에 갔을 때 어떤 한인교회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얼른 보아도 보통 여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었는데 밤에 일하러 나가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말하기 곤란합니다. 그분들의 삶이 전적으로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생활이 되려면 그 직업을, 하던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밤에는 나가 죄를 짓고, 교회에 나와서는 헌금을 많이 드리며 순한 어린양처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분들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아직까지 주님에게 굴복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비슷한 경우의 상담을 한 스크로지(Graham Scroggie)목사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이 여인에게 성경을 펴들고 성경이 지시하는 대로하자고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사도행전 10장 베드로의 환상 부분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늘에서 커다란 보자기가 내려왔고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났는데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때 스코로지 목사가 말하기를 이 말에 모순이 있습니다. “주여!”라는 말과 “그럴 수 없나이다”라는 말은 함께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단어 중에 하나를 지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둘 중에 하나를 지울 것을 일러주었습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떠났다 돌아왔을 때 이 여인은 성경 책 앞에 머리를 푹 숙이고 “그럴 수 없나이다”에 줄을 그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못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주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추방
37절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이 말씀을 솔직히 표현하면 ‘이 동네에서 나가라’입니다. 그들에게 문제거리엿던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쫓아내어 멀쩡하게 만들어 주었는데도 이들은 예수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습니다. 이제 귀신들린 이 사람이 고침을 받았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더 이상 길을 갈 때 떨며 마음을 조아리지 않아도 됩니다. 걱정거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예수님이 떠나가실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 이유는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입니다. 그들이 진짜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귀신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 개입하시는 예수님입니다. 한사람이 귀신들렸다는 것은 조금 불편할 수 있지만 자신들의 이익은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한 처사입니다.
윌리암 기븐 2세는
‘이기심이 지나치면, 당신을 위해 일할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다.
바로 당신. 그러나 만일 당신이 문제점을 지닌 허다한 사람을 도와준다면,
당신을 위해 일할 사람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금문교(Golden Gate Bridge)라는 아름다운 다리가 있습니다. 엷은 구름에 쌓인 다리를 보면 대단히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를 찾는 관광객들은 으레 금문교 다리를 찾아가 본답니다.
그런데 그 다리에서 해마다 투신자살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1964년에는 한국 청년 한 사람이 투신 자살을 했습니다. 그곳의 신문들이 자살한 청년의 신분을 비교적 자세히 밝힌바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미국에 유학을 와서 힘든 공부를 마치고 영주권을 획득하여 부동산업에 종사하며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도 마련했고 돈도 있을 만큼 있었으며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자살을 해야만 했을까?
그의 주머니에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그 유서에 자살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 이유인즉 사랑하는 여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애인은 학생이었습니다. 가난한 학생인지라 그 청년이 애인의 학비를 다 대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졸업을 하자마자 그 청년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했기에 세상이 모두 그를 버렸다고 생각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세상에 흔히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참고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 청년이 자기 중심의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청년의 행위는 모두가 자기 중심이었습니다. 애인에게 학비를 대어줄 때도 자기중심이었고, 자기를 고이 길러 유학까지 보내주신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도 잊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지방을 떠나십니다. 그들이 원치 않았기 때문에 떠나십니다. 그러나 이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구주가 아닙니까? 그들이 원하지 않은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결정이었습니까? 말로다 설명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사마리와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바쁘신 예수님을 붙잡고 오히려 더 계시다가 갈 것을 권해 이틀을 거기서 계셨습니다(요 4:39-42).

한 가닥 희망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거라사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쫓아냈지만 희망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 명의 증인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람은 귀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동네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가실 것을 말했지만 이 사람만은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를 간구 했습니다. 희망은 누구입니까? 귀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귀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군대 귀신은 들리지 않았었지만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온갖 종류의 귀신이 들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거라사지방에 완전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지역의 희망은 바로 귀신 들렸다 고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제일 문제였던 사람이 이제는 제일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이렇게 변합니다. 제일 골치 거리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 사람이 방법이 없습니다. 손을 델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했습니다.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귀신들렸던 자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저는 주앙교회 성도님들만 보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성장하실 수가 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마 여러분도 속에 들어가 보면 예수님이 아니면 이렇게 되지 않으셨겠지요?
저도 말할 것 없습니다. 저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이미 타락했습니다. 소주 두 병을 중2때 마셨습니다. 그 때 다방이라는 것을 알아 가지고 들락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마담누나들이 이뻐 하니까 자주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예수님 안 만났으면 뭐가 되었을지 한심하다못해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이 귀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주님 앞에 섰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이지요. 따라합시다.
정말(참) 다행입니다.
정말(참) 잘되었습니다.
정말(참) 감사합니다. -박수한번 칩시다.-
모두가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여기에 남겨둔 것은 다시 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오시지 않을 것이면 이 사람을 데리고 가셨을 것입니다. 여기에 남겨둔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곳에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이곳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오시지 않을 것이면 모두 데려가셨을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지역을 한번 더 통과하셨는데 마15장에 막7장에 나옵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나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데가볼리 지방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지금, 사마리아 지역에서는 우물가에 나왔던 여자와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