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할 일꾼이 모이는 교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1. 추수할 일꾼이 모이는 교회) / 마 9:36-38

“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스코틀랜드에서 인도로 선교하기 위해서 갔었던 알랙산더 더프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평생을 인도에서 선교를 했습니다. 평생을 선교하고 나이 많아 선교를 마칠 때가 되어서 본국으로 돌아와 후임자를 모집했습니다. 인도에서 선교할 사람을 모집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외치고 다녀도 아무도 모집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무 실망했습니다. 그는 결국 실신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와서 치료하고 다시 회복되어 일어나서 교회 목사님께 내가 하던 말을 다시 마치기를 원하니 다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빅토리아 여왕은 자원병을 모집할 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해서 지원했는데 우리 주님은 이렇게 지원병이 없으니 이제 내가 죽어도 다시 인도로 가서 죽어야겠다고 호소를 했습니다. 이 때 많은 젊은이들이 헌신하고 인도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에도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교회 역할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가 다시 맡아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운동이나 윤리, 도덕 교육도 해야합니다. 하지만 진짜 교회의 역할은 주님이 하시던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 주앙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는 오늘 주님이 하신 말씀에 귀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찬양이나 기도를 힘있게 하시면 육체에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크게 소리지르며 기도하면 창자나 배가 땡깁니다. 유대인들은 창자에 동정심이나 긍휼이 담겨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자가 감정이 담긴 기관으로 여겼습니다. 바로 “민망히 여기시니” ejsplagcnivsqh(스플랑크논)라는 말은 창자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창자에서부터 올라오는 동정심이나 긍휼, 아픔 속에서 나오는 배가 땡기는 아픔을 말하는 것이 ‘민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무리를 보시고 이런 아픔을 느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신 것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여러분!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면 ‘민망’할 것이 없습니다. 배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아픔을 가진 긍휼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의 죄인을 구하러 오셨기 때문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민망히 여기신 이유는 “목자 없는 양”같아서 입니다. 양에게 목자가 없으면 양은 갈 길을 잃습니다. 좋은 꼴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이리가 와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양에게 목자가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이와 같은 상태입니다. 백성을 바른길로 인도해야할 책임 있는 지도자들(목자)이 삯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만 쫓았으며, 대접받기만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이 무리들은 목자가 없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고생하며” ejklelumevnoi(에크뤼메노이)의 원 뜻은 ‘가죽을 벗기다, 칼로 썰다’에서 온 말입니다. 양의 가죽을 벗길 때의 아픔을 말합니다. 우리 속된 말에도 남의 것을 갈취 할 때 사용하는 표현 중에 ‘홀라당 벗겨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겨두는 것이 없이 모두 빼앗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와 같이, 양을 위해서 좋을 꼴을 먹여줘야 할 목자가 오히려 양의 가죽을 홀라당 벗겨먹는 것입니다.
“유리함이라”는 술에 만취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극심한 절망적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어린양들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창자가 찢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느끼신 아픔 ‘민망’ 입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같은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이 지구촌의 사람들이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아픔이 있을 때 우리는 선교할 수 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습니다.
37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추수는 때나 시기를 나타내고 있어 마13:49에서는 세상 끝과 그 때 있을 심판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의미보다는 영혼구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복음과 진리를 받아들일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시던 2000년 전에도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지금은 더 많습니다. KCM에서 발행한 2002년 세계선교지도에 보면 단일종교로 제일 많은 것은 이슬람으로 20.99%입니다. 개신교는 14.74%이며 카톨릭이 14.87%로 기독교를 약간 앞섭니다. 두 개신교와 카톨릭을 합하여 기독교로 볼 때 32.90%입니다. 물론 이 통계만을 가지고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는 영혼인지는 잘 모릅니다. 유럽과 남미 등에서의 기독교는 이미 형식적으로 변화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6.78%이며 힌두교는 4.25%입니다. 그리고 현재 세계인구는 61억 정도 되는 것으로 봅니다.
세계기도정보 책자를 준비한 WEC의 패트릭존스톤과 함께 일한 제이슨의 보고에 의하면 가난한 나라일수록 인구밀도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이 독립교회에서 급속히 증가추세를 보여왔고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영국성공회가 성장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선교사 분포를 보면 불행하게도 기독교 국가에서 73%선교사가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5%의 선교사만이 종족선교를 하고 있으며 8%의 선교사가 이슬람 지역에서 그리고 유대교와 힌두교를 위해서 1%씩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세계 교회의 1.7%의 성도가 십일조를 하고 있으며 1%의 선교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 헌금 중 1.25%의 선교헌금이 미전도 지역 선교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온 세상에 추수할 영혼이 얼마나 많은 지요. 이들이 우리의 손길을, 주님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에만 많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대한민국도 선교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한국교회가 지속적으로 부흥하지 않고는 앞으로 선교를 잘하기 어렵습니다. 아직 한국은 개신 교인을 아무리 많이 잡아도 25%이상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천주교 7%, 불교 23%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은 어디 갔습니까? 기타 종교는 1% 미만입니다. 무교가 47%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무교가 이렇게 많은 나라는 없습니다. 찾아보세요. 단 5%가 무교인 나라가 있는지요. 찾기가 어렵습니다. 다 어떤 종교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타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도하면 그들이 종교를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무교보다 전도하여 결실을 맺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이 얼마나 전도하기 좋은 나리입니까? 제가 선교사 교육을 할 때 꼭 이 말을 합니다. 여기서, 한국에서 전도하지 않던 사람이 해외에 있다는 그 자체로 선교사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열심히 전도하던 사람이 다른 곳에서도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추수할 것은 이렇게 많습니다. 그러나 일꾼이 부족합니다. 예수님 때는 세례요한과 제자들,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먼저 죽었습니다. 수많은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이 추수하는 일꾼이 되어야 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추수를 방해하는 집단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일꾼이 부족한 것입니다. 독속에 갇힌 계들이 살아 나오려고 올라오면 밑에서 다른 계들이 올라가는 계의 뒷다리를 잡고 늘어져 같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한 마리도 못나옵니다. 하나님의 추수하는 일꾼은 희생합니다.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 추수꾼 입니다.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해야 합니다.
38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직물공장에는 다음과 같은 불문율이 있습니다.
“실이 얽히면 무조건 공장장에게 보고하시오.”
어느 날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여공이 작업을 하는 도중에 실이 얽혀버렸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풀려고 하면 할수록 실은 더 얽혀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그제야 그녀는 공장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왜 즉시 보고하지 않았느냐는 공장장의 질책에 그녀는 겁먹은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공장장님, 저는 최선을 다해서 얽힌 실을 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공장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공장장인 나에게 보고하는 일이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부딪치는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맡겨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의지대로만 행하려고 하면 더욱 풀기 힘든 실타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보고하고 맡기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을 것이 하러 밭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미 익어서 곡식을 거두어야 합니다. 조금 있으면 서리가 내리고 눈이 오면 겨울이 됩니다. 이 때는 추수할 수 없습니다. 추수할 곡식이 다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일을 하다 보니 추수꾼이 턱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추수하는 일꾼이 부족하면 어떡해야 합니까? 이 밭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 주인에게 일꾼을 더 보내달라고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다 추수하지 못합니다. 일꾼이 더 있어야 합니다.
“보내어 주소서” o{pw” ejkbavlh/(호포스 에크발레)는 강제력이 동원된 말입니다. o{pw”(호포스)는 ‘어떻게 하든지’라는 말이며 ejkbavlh/(에크발레)는 ‘잡아 빼다, 쫓아내다, 내밀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일하는 일터에 사람이 부족하니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을 더 빼내어서, 어떻게 하시든지 밭으로 일군을 더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일꾼은 자기가 원한다고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주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야 합니다. 이 밭의 주인도 하나님이며 이 밭의 일꾼을 보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앙교회에도 일꾼이 부족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도 일꾼이 부족합니다. 온 세상에 선교를 생각하면 더욱 일꾼이 부족합니다. 기도합시다. 일꾼을 보내달라고 한번 기도합시다.

추수는 감사한 것입니다.
일꾼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추수는 감사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저는 우리 주앙교회가 이 기쁨을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추수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제가 얼마나 행복한 시대에 사는지 구약의 예레미야를 보면 압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요시야 13년(B.C. 627)에 활동한 선지자로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될 것을 예언해야 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하기 싫었습니다. 예언 그 자체를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나라,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한다는 예언을 하기 싫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하기 싫은 일이겠습니까? 단순히 멸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희 파괴됩니다. 예레미야 6:11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고 했습니다. 또 이들의 모습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레미야 8:1-3 “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 방백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거민의 뼈를 그 묘실에서 끌어내어 2 그들의 사랑하며 섬기며 순종하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아래 쬐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3 이 악한 족속의 남아 있는자, 무릇 내게 쫓겨 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왕, 선지자, 제사장들의 묘가 도굴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치욕스러운 것입니다. 그 뼈들이 무덤에서 나와 굴러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은 차리라 죽는 것이 났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백성들 때문에 기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미리 예레미야 7:16절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너를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기도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해도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결심은 섰습니다. 그 뜻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오직 예정대로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일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다릅니다.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라고 하실 때는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라고 하시고 응답하실 뜻이 없으시면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왜요.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죽어서 천국에 갔답니다. 그런데 창고하나가 있는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필요했던 물건이 그곳에 잔뜩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저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땅에서 기도하면 주려고 했던 것이다”라고 대답 하셨답니다.
우리가 청하는 분은 “주인에게 청하여”입니다. 주인이면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인입니다. 우리가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일꾼을 보내주소서”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실하기로 이름난 영국의 한 부부가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하고자 선교사로 지원해서 훈련을 받고 아프리카로 떠났습니다. 선교사부부는 열심히 배운 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10년이 되도록 한 명의 결신 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의 친구가 선교하면서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선물로 보내주겠다는 것입니다. 선교사 부부는 머리를 맞대고 생각한 것을 말했습니다. 부부는 똑 같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성찬식에 필요한 각종 성구들을 보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찬식은 당장은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꼭 우리 신디가 몇 달째 저렇게 있는 것하고 같겠지요. 그리고 몇 년 후 10년 동안 사역한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원주민들이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련해 두었던 성찬 기구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믿고 준비하면 때가 되면 추수하게 됩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추수하는 일꾼이 모이기를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단순히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여 큰 교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수 없는 손길이 있으며 영혼이 있습니다. 그들을 추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추수하는 밭은 하나님의 밭입니다. 그러기에 일꾼 역시 하나님이 보내주셔야 합니다. 우리 주양교회에 하나님을 위해 추수할 일꾼이 모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아홉까지 복②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0. 아홉까지 복②) / 마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①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②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③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④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⑤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⑥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⑦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⑧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⑨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어떤 군목이 최전방에서 군목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벌통을 쳐서 꿀을 땄습니다. 아주 좋은 꿀을 따서 부대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광고를 하여 누구든지 빈 그릇을 가지고 와서 꿀을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군인은 박카스병을 가지고 와서 꿀을 받아갔고 어떤 군인은 물통을 가지고 왔고, 어떤 이는 밥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군목은 빈 병에다 꿀을 가득히 넣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항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공평하지 않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군목이 대답하기를 “누가 박카스 병을 가지고 오라고 했나? 나는 빈 그릇을 가져오라고 했고 그 빈 그릇대로 채워줬을 뿐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여러분들이 가져온 그릇만큼 담길 것입니다. 오늘 입을 크게 벌려 하나님 주시는 모든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구 복 가운데 오늘은 다섯 번째 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⑤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은 70인 역에서는 ‘엘레오스’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사랑이라는 뜻의 ‘헤세드’와 ‘라하밈’의 ‘동정’이라는 뜻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이 용어는 구약에서 종과 주인사이에, 또는 친지들 사이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라하밈’은 ‘렉헴(자궁)’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자기 태를 찢고 나온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이 긍휼인 것입니다.
유명한 솔로몬 왕의 재판입니다. 한 어린 아기를 두고서 두 어머니가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솔로몬은 짐짓 칼을 가져오라고 분부합니다. 그 아이를 두 쪽으로 나누어 반쪽씩 가지라는 판결입니다. 이 명령을 듣고 진짜 아이의 어머니는 제 자식을 생각하여 “락하밈”이라고 했습니다. “락하밈”을 개역성경은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가슴이 메어지는 듯하여”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아이의 진짜 어머니는 왕에게 그 아이를 제 자식이라고 거짓으로 우기는 여인에게 주고 죽이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이 모정이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50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지는 크리스천의 형제애로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긍휼은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곧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긍휼’입니다.
이 세상에서 형제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습니다. 출 33:19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편의 간구하는 기도문중에 ‘긍휼’은 40번으로 제일 많이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시 4: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난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시 25: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면 우리는 갈대가 없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왔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하셨습니다.
지난주에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 옷자락만 베고 간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다윗이 그와 같은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에 삼상 23:21절에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쫓아다녔던 사울이 다윗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⑥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있는 사람이 청결한 사람일 것입니다.
마 11:29절에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온유와 겸손’한 마음은 청결한 마음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기를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너 자신을 알라(Gnoti Se Auton)”는 지혜의 철학이 나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뉴턴은 말하기를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저 해변가의 모래 한줌과 같은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사람입니다. 약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TV드라마에 보면 간혹 가정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여 두 집 살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정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만일 또 더 좋은 조건과 또 사랑이 생기면 떠날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가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히 10:22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아멘.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물론 영적인 뜻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본다는 뜻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출 19:21, 33:20, 삿 6:22).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은 고후 1:22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이 곧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9절 “화평케 하는 자는 ⑦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하면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란 뜻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을 이루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엡 2:14-18에 그 뜻이 다 나타나 있습니다.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노벨(A.NOBEL)은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하였습니다. 이 다이나마이트는 굉장한 파괴력을 가지고 인류에게 공헌할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벧은 이 무기의 두려움과 공포를 씻기 위하여 노벨상을 제정하여 인류 평화에 공헌한 사람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는 길을 열게 되었습니다. 영어의 다이너마이트는 헬라어 ‘뒤나미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뜻은 ‘능력’입니다. 진짜 능력은 파괴하는 살상 무기가 아니라, 폭력이 아니라 ‘화평’입니다.

예수리스도가 화평(평화)의 왕(사 9:6-7, 눅2:14, 요 14:27)입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는 일이 없다’(Broadus)고 했습니다. 세상을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⑧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자신의 문제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의”를 위해서 자신의 문제가 아니지만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은 어떻게 보면 쓸데없이 당하는 고통같이 보입니다. 구태여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국가적으로 민주주의를 얻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고통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분들을 잊으면 안됩니다. 미국에 건너가 현대적 국가를 이룬 영국의 청교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유로운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습니다. 이런 것이 다 의를 위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고통 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을 거부해서 생기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70년대에 구로 공단에 일하러 올라온 시골 아가씨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80년대에 구로공단 지역의 한 교회에 전도사로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주일날 일하는 공장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달 내내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교회 다니려면 쉬는 직장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월급을 주일에 일하는 회사보다 절반밖에 받지 못하지만 직장을 옮겼던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 그것이 공의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축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었던 복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사람이란 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부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11-12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⑨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지막 아홉 번째의 복은 여덟 번째의 ‘의를 위하여’를 설명구로 보아 팔 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8번째의 복이 포괄적으로 ‘의’를 이야기했다면 9번째는 구체적으로 “나를 인하여”로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인 것을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핍박과 고난을 말합니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거나 핍박을 당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축복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대할 때는 부끄럽습니다.
중국과 베트남에는 아직 자유롭지 못해서 교회를 함부로 세울 수 없습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먼저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세우는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승인 받지 못한 중국교회 지도자가 일년에 한번씩 공안부에 끌려가 다시는 하지 말라고 얻어맞고 나오는 것입니다. 어렵게 시작해서 30-40명 모이면 지도자가 끌려가 매맞고 나오니까 교회가 다시 해산되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몇 년 했는데 최근에 끌려갔다가 나왔는데 너무 많이 맞아서 반신불수 상태가 되어 풀려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성도들은 이제는 흩어지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50여명이 모두 모여 예배를 강행했다고 합니다. 이런 절차가 없으면 교회 승인 받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본문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 제자들 보다 먼저 있었던 구약의 선지자들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채찍을 맞았습니다(렘 20:2),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돌에 맞았습니다(대하 24:21),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므낫세가 통치하는 기간에 톱으로 켜 죽었다고 합니다(Alford). 우리 나라에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당한 분들이 많습니다. 일제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분들도 있고, 공산당에 불복하여 순교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하나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기쁨으로 순교하는 것을 자청하신 분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편안한 상태에서 믿는 것 같아 너무 행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두렵기도 합니다.

영국의 천재 소설가 버나드 쇼의 외모는 추남으로 생겼지만 그의 천재성과 재치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정도로 탁월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탁월한 사람일수록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었다고 합니다. 이 버나드 쇼에게 악취미가 있었는데 조금만 심장에 이상이 있으면 자기 주치의를 너무 자주 부른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치의가 와서 ‘이 정도 증상은 이렇게 하면 안정이 되니 저를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일러주어도 계속 주치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주치의도 자기 일할 시간을 많이 뺏겼답니다. 어느 날 주치의가 버나드 쇼에게 충격을 좀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연극을 꾸며 기절하니 침상에 누워있던 버나드 쇼가 벌떡 일어나서 의사를 깨우고 물수건으로 얼굴을 적시고 자기의 심장병 약을 가져와 먹이고 간호를 한다고 들락날락 정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구리 눈은 이상하리만큼 크고 높은 곳에 있습니다. 머리에 눈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잘 보이기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전자 속의 개구리’라는 말을 아십니까? 주전자에 개구리를 집어놓고 물을 끓이기 시작하면 개구리는 너무 따뜻해지는 물에 그만 잠을 살살 잡니다. 자신이 죽어 가는 줄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적이 오는 것을 보고 살길을 찾을 수 있는 개구리이지만 스스로 안주해서 죽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은 이런 깨어있기를 바랍니다.
지구촌의 온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깁시다. 지금도 우리의 도움을 호소하는 손길을 잊지 맙시다. 마음이 청결한 상태를 유지합시다. 두마음을 품지 말고 오직 일편단심 주님만을 바라봅시다. 세상을 화평케 만드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가 가는 곳에 화평을 만들어 갑시다. 그리고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아도 고난이 와도 그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잊지 맙시다.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이 있다면 기쁨으로 이기십시오. 여러분에게 큰 상급이 있습니다. 아멘.
 

아홉까지 복①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19. 아홉까지 복①) / 마 5:1-6. 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①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②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③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④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⑤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⑥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⑦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⑧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⑨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한국교회 성도를 보고 지나치게 축복신앙을 강조하고 또 믿고 있다고 우리 스스로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좀 솔직해 집시다. 복을 싫어하십니까? 세상에 복을 싫어할 사람이나 민족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우리민족은 복에 대한 강한 집착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 복(福)자를 많은 곳에 보이게 새기고 장식했습니다. 어려서 수저에 福자가 새겨진 것을 사용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늘 복을 생각한 것입니다. 문을 나가고 들어올 때도 볼 수 있도록 문창이나 여름에 치는 발 같은 곳에도 예외 없이 福자를 새겼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오강에도 福자를 새겼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먹고사는 것, 정상적으로 배설하는 것이 모두가 복입니다.
상서(尙書)에 오복이란 수(壽 ; 오래 삶), 부(富 ; 많은 재물), 강녕(康寧 ;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함), 유호덕(攸好德 ; 어진 덕을 닦음), 고종명(考終命 ; 하늘이 내린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라 했습니다. 보통 이(齒)가 5복중의 하나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강녕’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도 오복 중에 하나여” 하는 말은 우리 몸의 대문 격인 입안이 건강하지 못해서야 몸도 마음도 편안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이가 좋지 않아 그 아픔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정말 이가 튼튼하다는 것은 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복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복에 대한 관점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것하고 우리가 생각한 것이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서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는 바로 산상보훈이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9가지 복은 핵심이요 요약입니다.
한때 인도의 국부로 불렀던 모한다스 간디를 사람들이 “마하터마”(위대한 영혼)이라고 불렀습니다만 그는 언제나 이 말을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겸손하고 위대한 인도의 아버지에게 어느 날 젊은 대학생이 방문하여 ”마하터마 간디 선생님, 어떻게 하여야 우리 인도 국민들이 잘살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때 그가 “우리 인도 국민이 잘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보훈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습니다만 늘 곁에 성경을 두고 이 산상보훈의 말씀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그의 인도독립을 위한 무저항운동이 바로 여기 산상보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산상보훈은 천국시민의 성품과 삶에 대한 귀중한 말씀입니다. 천국백성은 이렇게 되어야하고 또 이렇게 살아야합니다.

8복이 아니라 9복을 말씀하심
오늘 본문의 말씀은 흔히 산상보훈으로 팔복으로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나는 복은 9가지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3절부터 11절까지 ‘복이 있나니’는 원문에 매 절 처음에 나타나는 단어로 makavrioi(마카리오이)로 ‘축복, 행복’이라는 복수입니다. 저는 복을 좋아해서 8복으로 말하기보다는 9복으로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복이 하나 빠지면 되겠습니까? 하나라도 더 받아야지요.
그러면 전통적으로 팔복으로 보는 이유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0절과 11절에 나오는 복의 구분을 하지 않고 11절은 10절의 설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복이 있나니’를 9번으로 구분하셨기 때문입니다.
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와 11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를 구분한 것입니다. 8번째 복은 “의”를 이야기했고, 11절은 “예수님을 위해서”를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받는 것을 별도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용으로 보려면 6절 “의에 주리고”와 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용상으로는 7개가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7가지로 보든 8가지로 보든 9가지로 보든 크게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저는 많은 것이 좋으니까 9개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몇 개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평행구절인 누가복음 6:20에서는 “가난한 자”라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심령’(마음)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 영적인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가난’이라는 것은 마음부터 나옵니다. 마음이 가난하면 가난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부자면 부자입니다. 그럼 그런 마음의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본문 말씀을 서민들이 사용하는 말로 번역한다면 “마음이 거지(빈민)인 자는”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가 “가난한 자”로만 기록한 것에 오히려 더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는 부자에 비해서 교만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기댈 곳에 없습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힘들 때, 억울할 때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오직 의지할 것은 주님 밖에 없는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가난은 오히려 제일 큰 축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바로 이런 자에게 천국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후 8:1-2절에 보면 ‘마게도니아 교회들은 가난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은혜를 받고 환난과 많은 시련을 이겼습니다. 그리고 극한 가난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헌금을 넘치도록 드렸다고’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비운 자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욕심이 없었습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 다윗과 일행이 그일라에 있을 때 삼상 23:16-18 “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18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나단에게 욕심이 있었다면 아버지 사울왕을 이어 왕이 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인 다윗에게 왕위를 넘겨주었습니다. 요나단은 마음이 가난한 자 이었습니다. 요나단의 이러한 약조로 다윗은 엔게디 황무지(삼상 24장)의 굴에 있을 때 사울이 군사 3천과 함께 굴에 들어와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를 맞이하였지만 다윗은 그의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물론 다윗도 훌륭하지만 요나단의 이러한 약조가 없었다면 다윗도 어떤 행동을 취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성경에 진짜 마음이 가난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왕권도 그분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마음뿐이셨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도 요구하시는 것이 이 마음입니다.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사람은 상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흔히 ‘속상하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속상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속상한 것이 이웃집 아이가 우리 아이보다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아니면 나보다 더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기 때문에, 또는 나보다 더 빨리 승진했기 때문에 속상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속상한 것은 죄가 이 땅에서 왕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병든 사람을 보면 속상합니다. 죄에 빠져 있는 사람을 보면 속상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사단의 방해가 속상한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애통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입니다. 그가 쓴 책의 제목이 ‘예레미야와 애가‘입니다. ’애가‘라는 말은 ‘어찌하여…’라는 탄식과 비통의 감정을 말하는 ‘에카(ekah)’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백성은 포로 끌려갔습니다(B.C.587). 그래서 그는 5개의 애가를 지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의 백성들이 사단의 하수인 노릇하는 것을 애통해야합니다.
이런 아픔이 우리에게 있으면 주님은 위로해 주십니다. 위로는 paraklhqhvsontai(파라칼레오)로 ‘곁으로(para)’와 ‘부른다(kalevw)’의 합성어입니다. 위로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가야합니다. 주님의 곁으로 우리를 부르는 것이 ‘위로’입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이 눅 2:25 ‘이스라엘의 위로’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 14:16)가 되시기 위합니다.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이란 말은 시편 36:11(LXX)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뜻은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있을 때에도 의로운 자를 하나님께서 끝까지 보살피신다는 것을 굳데 믿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사랑과 같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도 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땅’에 대해서는 마태복음에만 45회에 걸쳐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 특정 지역(4:15, 9:26), 하늘과 땅(천지 5:18, 35),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6:10, 9:6), 육지(14:24), 온 세상(12:40)로 나타나지만 본문의 땅은 창 15:18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축복의 약속의 땅입니다.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주리고”는 인간의 욕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무엇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욕구가 ‘의’에 있는 사람은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회적 관심을 위해서, 불의한 사람들을 위해서 노력하는 분들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것도 전혀 틀리다고는 할 수 없으나 세상의 정치적 이념에서 어느 쪽의 이익을 위하여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의’라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축복에 관한 것으로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로 보아 그 욕구가 충족됨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의’를 그토록 이루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신호 형제를 보면서 그것을 느낍니다. 지난번에 종엽이가 신호형제에게 ‘이번 박사학위 마치면 제일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는데 신호형제 대답이 ‘나는 파키스탄을 가고 싶다’고 했답니다. 선교하고 싶은 욕구 그것이 의입니다. 저나 여러분들이 주앙교회를 부흥시켜 하나님의 나라에 꼭 필요한 교회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의’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바램이요 소원입니다. 우리는 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할렐루야-

사실 제가 구태여 8복이라고 하지 않고 9가지 복이라고 했지만 몇 개이든 간에 가만히 보면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는 사실은 하나임을 발견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그곳에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길거리에 금발의 미녀가 헐레벌떡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한쪽 가슴을 내어놓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의아하게 쳐다보고 급기야는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며 왔습니다. “당신은 지금 풍기 문란이오. 당신이 내놓은 왼쪽 가슴 노출 죄로 체포할 수 있소” 그러자 그 여인은 “오 마이 갓. 웨어 이즈 마이 베이비” 이 말을 경상도사투리로 바꾸면 “아이고 우짜꼬, 내 아이는 어디 갔노?”입니다. 내용인즉 그 여인은 버스 안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다가 버스가 내릴 때 서둘다가 아이를 버스에 두고 내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은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짜 이상한 사람, 정신나간 사람은 생명의 주님을, 천국을 믿기만 하면 준다는데 가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곰을 잡으려면 곰이 다니는 길목에 큰돌을 달아놓으면 된답니다. 곰이 가다가 돌에 텅~하고 부딪히면 곰이 생각하기를 “예전에 없던 것인데” 하고는 다시 한번 텅~하고 부딪혀 봅니다. 곰은 더 큰 충격을 받게되고 머리가 얼얼해 집니다. 그러나 곰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텅~하고 부딪힙니다. 그러면 추는 더 멀리 나라 갔다가 돌아오며 곰의 머리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점점 세게 받습니다. 그러면 제아무리 단단한 곰의 머리라도 배겨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새로운 복을 곰처럼 머리로 들이받고만 있는 것은 아닌 지요? 예수님 말씀하신 복은 안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은 천국이냐 지옥이냐 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신약에서 의에 주린 대표적인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가 로마서 15:28-29에서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29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열매로서 예루살렘교회에 구제헌금을 전달해 주는 것을 마치고 서바나(스페인)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에 구제금을 전달해 주고 체포됩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감옥살이를 2년 합니다. 그리고 죄수로 포송줄에 묶여 로마 감옥으로 호송됩니다. 그리고 그의 바램이었던 서바나(스페인)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갈 때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가고자 했던 서바나가 이제 우리가 전해야할 땅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되어서 내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애통해하며, 온유한 마음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되어서 바울이 이루지 못했던 스바나(땅 끝)까지 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자의 삶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18. 제자의 삶) / 눅 12:22-32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목숨은 귀한 것입니다.
저희 집사람 친구 사모님이 있는데 이분이 얼마 전 유방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지난번에 만나서 대화를 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누워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목숨이다. 세상에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숨 앞에서는 다른 것이 없어서 불평을 한다든가 하는 것이 너무 사치스런 고민이요 문제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본문 23절에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24절에 “까마귀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까마귀를 부정한 새로 말씀하셨습니다(레 11:15, 신14:14). 왜 까마귀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까? 부정한 새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까마귀를 돌보시는데, 하물며 이런 부정한 새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하나님의 일꾼들, 제자들을 위해 준비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74:19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목숨이 귀한 것이기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기에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이것은 어떻게 우리가 목숨을 사용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22절 하반절에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25절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헬라어 ‘키’ hJlikiva(헬리키아)는 ‘키, 나이, 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팔꿈치부터 손까지 말하는 한 규빗(창 6:15)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키를 이야기하지만 본문에서는 시간(시 39:5)의 개념으로 보아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우리의 생명을 늘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26절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우리가 할 수 없는,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주 작은 일입니다. 우리가 염려한들 되지 않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헛수고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올해 일본에 태풍이 10여 개가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지진 공포까지 겹쳐있습니다. 첨단과학으로 무장한 일본이지만 하나님이 바람한번 불고, 땅좀 흔들리게 하니까 아무 힘도 못씁니다. 하나님이 만일 태양을 조금만 더 쬐면 온도가 한 평균 20도만 더 올라가도 난리가 날겁니다. 반대로 해를 조금 물리거나 가려서 한 20도만 더 추워 지만 지구는 살아가기가 힘들어 질 겁니다. 하나님께 이런 일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일입니다. 출애굽기 15:8에 홍해를 가르신 것의 표현이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콧김한번 불었더니 바다 물이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채기 한 번하시면 지구가 마구 흔들릴지 모릅니다. 열왕기하 20:8-11에 보면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징조를 보이라고 이사야에게 말합니다. 히스기야는 생각하기를 태양이 10도를 나아가는 것보다 뒤로 물러가는 것이 더 어렵겠다고 생각되어 물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기도하고 난 후에 태양은 10도를 물러갔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먹을 것에 대해서는 까마귀(새)로 비유했으며, 입을 것에 대해서는 백합화로 비유를 들고 계십니다.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라고 하십니다. 인간에 비하면 형편없는 가치를 가진 들풀의 꽃, 그리고 그 유한성이 있지만 그것이 살아있을 때는 솔로몬의 영광보다도 더 귀하게 하나님이 보살피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망정 현재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한다면,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우리들이 입을 것 때문에 문제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요즘이야 대한민국 사람들은 먹고 입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40년 전쯤에는 먹고, 입고 사는 문제가 제일 큰 문제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2004년 10월 22일 수출 2,000억 달러 넘어섰습니다. 금년 연말까지 하면 2,500억불쯤 한다고 합니다. 정확히 40년 전인 1964년에 1억 달러를 돌파하고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수출의 날로 정했습니다. 당시에는 수출 1억 달러 목표를 할 수 있을까 의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40년만에 1억 달러에서 2,000억 달러가 된 것입니다. 지금 국민 소득이 1만 달러 정도인데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2만 달러가 되어야 한답니다. 그러면 수출은 4,000억 달러가 되어야 한답니다. 수출전선에 있는 분들 정말 고생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노력해서 된 것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축복해 주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작년 2003년 2월 10일 ‘케몬스 윌슨’이 90세에 세상을 떠나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난지 9살 때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미국의 경제가 최악인 대 공황 때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는 청년이 되어서 50불을 빌려 팝콘 장사를 해서 1,700불을 법니다. 이 돈으로 집을 구합니다. 그리고 집을 다시 담보로 돈을 빌려서 쥬크박스(노래방 같은 것)를 만들어 몇 년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동업자에게 배신을 당해 망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낙담하고 죽기로 작심하고, 아내에게 “여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했오.”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아직 당신은 한가지 하지 않은 것이 있어요. 나는 당신이 기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부터 ‘케몬스 윌슨’은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던 어느날 가족과 함께 워싱턴에 가서 값싼 호텔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호텔이 너무 더럽고 지저분했습니다. 그 때 그는 값싸고 좋은 호텔을 만들 수는 없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싼 호텔을 드디어 하나 구해서 영업에 들어갑니다. 그 때 그는 호텔의 3대 원칙을 세우게 됩니다.
첫째.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둘째. 십계명을 지킨다.
셋째. 손님을 활금율의 원칙에 따라 대접한다. 어린이에게는 돈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 정신으로 세계적인 홀리데인 호텔의 최고부자가 됩니다.

이제 우리들에게는 먹고, 입고 사는 문제가 남의 이야기처럼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지구촌에,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에 보면 20명은 영양실조이고, 1명은 굶어 죽기 직전인데 15명은 비만입니다. 이 마을에는 한해에 28명씩 태어나고 10명은 죽습니다. 그 중에 3명은 굶어죽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사는 지구촌에는 이렇게 죽어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이 사는 유대는 그야말로 로마가 좋은 것, 먹는 것, 돈이 될만한 것은 모두 빼앗아가 전쟁물자로 사용했습니다. 유대지방에 남은 것은 거의 없습니다. 정말 살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자연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대부분의 제자들은 갈릴리 어부출신입니다. 갈릴리바다는 이들에게 생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어부라는 것은 아주 좋은 직업입니다. 왜냐하면 고기만 잡으면 그래도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모든 것을 버리고 무턱대고 예수님을 따라나선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제자들이 오죽 배가 고팠으면 안식에 하지 못할 밀 이삭을 따먹었겠습니까? 저는 오늘 너무 행복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내려가서 배부를 만큼 점심을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박수로 영광을 돌립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에 비하면 오늘날 먹고, 입는 문제로 솔직히 하나님의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좀더 나은 생활, 편리하고 고급스러운 생활을 위해서 주님의 제자가 못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할 문제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솔로몬보다 더 잘먹고 입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나아갑시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십시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1절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입니다. 물질적 관심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물질의 축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영적 축복을 구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물질적 축복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2차 대전 중에 한 비행기 조종사는 비행 훈련을 받으면서 교관으로부터 비행의 기본에 대해서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