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만 구하는 자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1. 표적만 구하는 자들) / 마 16:1-4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어떤 노총각에게 요정이(천사?) 나타나 한가지 소원만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그랬습니다. 이 말을 들은 청년은 세 가지를 한가지처럼 빨리 말했습니다. ‘돈, 여자, 결혼’이요.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소원이 이루어졌대요. ‘돈 여자하고 결혼한 것입니다’ 욕심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제가 늘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정직 하라’입니다. 그리고 정직한 사람은 자기가 심지 않은데서 거두지 않는 것입니다.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의 심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짜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짜를 좋아하는 것도 비 정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병든 자 가난한 자의 친구로 오셔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불쌍히,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의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다.’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단순히 표적만을 구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실 때는 마음이 동했습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방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사단의 역사로 귀신들리고 병이 들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런 동기 없이, 이유 없이 표적을 나타내시지는 않습니다.

표적만 구하는 자들은
1) 예수를 시험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한 적이 있습니다(마 4:1).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자신들의 신앙체계만 고집하고 예수님을 선입관을 가지고 대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예수님을 음해 하려는 생각만 있는 자들입니다.

2) 자신은 노력하지 않고 말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말로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와 행함이 있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속죄하는 고백(회개)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너갈 때 뒤에는 바로의 군대와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바다를 가른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지금 구하지 않으면 죽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표적을 보여줄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출애굽기 17:10-12절에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아말렉과 싸울 때에도 모세가 손을 들고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수고가 있어야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홍수가 나서 섬처럼 고립된 마을에 사람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살려달라고요. 그런 하나님의 도움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왜! 나를 구원해 주시지 않았냐고 따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배도 보냈고, 헬리콥터도 보냈지만 너는 그것을 타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노력이 동반된 것입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 그렇게 행해야 합니다. 공부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시간을 정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돈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3) 진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 좋아하십니까? 진심으로 예배하는 자를 좋아하십니다. 진심이나 진리에 응답하는 말이 아멘입니다. 아멘의 뜻이 진리와 진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아멘하는 자를 좋아하십니다. 아멘은 순종의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 표적만 구하는 이 사람들은 진실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정말로 기적이 필요해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증한 것입니다. 여러분 돈도 무조건 많이만 모아놓으려고 하지 마세요. 돈도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합니다. 만일 네게 돈이 있다면 바르게 사용하세요. 무조건 물질의 축복만 간구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잘 쓸 수 있는 사람, 그런 그릇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하신다고 하셨습니다(사11:4).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고 판단이 정직하시기 때문입니다(시119:137).

4) 악하고 음란한 자들입니다.
본문 4절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 21:13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강도가 악한 사람입니다. 강도의 특징은 요 10:1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 10:8절에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러한 강도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악한 사람입니다.
예레미야 시절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를 예레미야 3:2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 너의 행음치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지금 얼마나 음란한 세대인지 모릅니다.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서 돌아다니는 음란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원래 모텔이라는 곳이 가족이 여행을 하면서 하룻밤 묵고가는 곳이 모텔입니다. 그래서 고속도로 옆 같은 곳에 이런 숙박시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하루면 갔다가 오는데 왜 모텔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한 것이 없으면 미안해서 달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그런 마음을 갖아야 합니다. 꼭 악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자신만 알고, 달라는 사람을 보면 가까이 하기 싫어집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주기를 좋아합니다. 베풀면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5) 천기는 분별할 줄 아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틴 사람들은 하늘의 변화에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일기예보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늘을 자주 관심 있게 처다 보게 되었습니다. ‘저녁 하늘이 붉으면 다음날 맑은 하늘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날이 궂겠다”는 찌푸린 날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폭풍우가 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들은 “천기”(하늘에 나타나는 자연적인 제현상)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 일어나야 할 최대의 사건, 표적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농사를 짖고 살아가려면 천기를 알아야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정치이야기하면 안 빠집니다. 심지어는 정치인 주변의 인물들까지 꿰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연애 인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스포츠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출세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식이나 경제에도 상당히 높은 관심이 있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것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처럼 살아가는데 필요해서 ‘천기’를 잘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살아가려면 시대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시대의 표적을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최대 표적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나가 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을 ‘요나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시대의 표적을 분별해야 합니다. 본문 3절 하반 절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최대의 표적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제일 큰 표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와 함께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시대의 표적입니다. 바로 이것을 분별하고 전도하고, 선교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을 몰랐던 사람처럼 정치와 경제, 연예계에 대해서는 훤히 알면서 이 시대의 표적에는 무관심한 자들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인도의 선교사로 갔던 한 핀란드 여인이 그만 심한 폐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돕던 중 이번에는 탈곡기에 한쪽 팔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겹치는 고난에 그 여인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기도했습니다.”주님, 저는 이제 오른팔이 없습니다․.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그 여인은 왜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오직 무엇을 할지를 물었습니다. 참으로 귀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탓인 양 하나님을 향해 “왜 이런 일이 저에게 일어나야 합니까”하고 따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 속에 ‘왜’라는 말 대신에 ‘무엇’이라는 말이 먼저 떠올린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감사하게 전개될까요.
우리 한국 성도들은 아직도 기복 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모든 일이 범사에 잘돼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약속을 받은 우리들이기에 그분이 가신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칠 때에도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몇 년 전에 가나에서 풍토병으로 어린 딸을 잃은 한국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곳 풍습에 따라 사흘 동안 장작불에 딸의 시신을 태우면서 견디기 힘든 슬픔 속에 선교를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헌신의 행군은 계속되었고 주님께서는 많은 결신 자와 함께 현지에 학교 병원을 세우는 등의 열매를 허락하셨습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한 차원 성숙된 눈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표적만 구하면 예수님은 떠나갑니다.
본문 4절 하반 절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떠나가시면 끝입니다. 예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비전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람이란 말만 무성하지 창조의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창 4:16).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할 때, 민수기 12:9-10절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10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니까 10절에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통령이 떠나면 호위하던 모든 사람이 함께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면 하나님의 모든 축복도 떠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떠나가면 성령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돕는 천사가 떠나갑니다. 축복이 떠나갑니다. 여러분! 우리는 착각하지 맙시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 무엇인가 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 없이는 하나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영국의 한 광고회사가 큰상을 내걸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런던까지 가장 빠른 시간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묻는 퀴즈를 내었습니다.
워낙 상품이 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응모했습니다. 비행기가 가장 빠르다느니, 기차를 타고 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느니, 새벽에 지름길로 승용차를 운전하고 오면 가장 빠르다느니 등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고 실제 시간을 재어보면서 서로 자기들 아이디어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상을 탄 사람의 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먼길이라도 무척 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거리 계산법입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떠나가게 만드는 것은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욕심입니다. 자신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하나님이 해 주신다고 말만 하는 자들입니다. 공짜만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란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예배와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주앙교회에서, 우리가정에서, 내 삶에서 떠나지 않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깃털보다 가벼운 짐을 지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0. 깃털보다 가벼운 짐을 지세요) / 마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도시 빈민지역과 농어촌의 가난한 중고생들 가운데 68%가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며, 61%가 가출충동을 느낀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부스러기선교회가 최근 선교회에 소속된 도시 빈민지역과 공단지역, 농촌지역의 25개 공부방에 다니는 초.중.고등학생 4백3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교생은 3백19명 중 1백8명(33%)과 92명(31%)이 각각 자살이나 가출을 생각한 적이 있는 반면, 중고생들은 1백36명 중 93명, 84명이 각각 자살과 가출을 생각한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결혼적령 인구(남 26-30세 여 23-27세)의 남녀성비 불균형이 심화돼 2011년에는 여자 1백명당 남자가 1백25.1명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어, 현재 남자 중고생이 결혼할 때쯤이면 20%정도는 장가가기가 힘들어 진다고 합니다. 치열한 신부 쟁탈전이 벌어지고 중국 연변처녀, 베트남 처녀까지 외국으로부터 색시감을 데려오는 일도 비일비재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여성 1명이 가임기간 동안 갖는 평균자녀수인 합계 출산율은 지난 70년 4.5명에서 80년 2.7명, 90년 1.6명 수준으로 계속 낮아져 왔으며 지난 95년에는 1.74명으로 다소 높아졌으나 2005년에는 1.71명으로 다시 낮아질 전망입니다. 출생아 수도 지난 70년 1백만7천명에서 80년 86만5천명,90년 65만7천명 등으로 낮아졌으며 앞으로도 소폭 감소세를 지속해 오는 2015년에는 59만 명에 그칠 것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노인인구는 자꾸만 늘어나고 젊은 사람들이 작아져 그만큼 국가적으로 큰짐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설교가 비처(Beecher)는 말했습니다. “사람은 한 가지 일을 하면서 세 가지 고생을 한다. 일 하기 전에 실패할까 걱정하느라 고생이요, 일 하면서 수고하느라 고생이요, 일 끝나고 결과를 걱정하느라 고생이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각자 지고 갈 수밖에 없는 짐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호이 코피온테스:oiJ kopiw’nte”)는 노동을 하여 피로를 느끼고 쇠약해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스스로 많은 일을 해서 스스로 피곤에 지친 상태입니다. 언젠가 설문 조사한 것을 보니까 한국남자 40대가 세계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일에 지친 상태입니다. 몸에 병이 들 정도로 쇠약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제 쉬지 않으면 병이 듭니다.
“무거운 짐진 자”(페포르티스메노이:pefortismevnoi)는 성경전체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화물의 짐, 뱃짐’을 의미합니다. 이 짐은 타인에 의해서 지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어른들도 무거운 짐이 있지만 학생들 또한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금요심야 예배드리고 나오면서 옆 건물 학원에서 나오는 학생들을 보았습니다. 밤 11-12시가 되었는데도 학원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빨리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또 학교를 가야합니다. 어른들이 너무 무거운 짐을 어른들이 지우게 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짐은 율법과 유전의 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에게 강조하여 지우게 했다고 예수님이 책망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23:1-4).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다 내게로 오라)
우리가 수고하고 짐진 자 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은 초청하십니다. 마 11:25절에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한 두 사람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저는 우리 주앙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온유한 사람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자꾸만 대들고 따지고 잘난 체 하면 제가 감당이 안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도 성격은 바뀌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아주 안 뀌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남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특히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한다는 것을 생각도 못했습니다. 사람만 보면 얼굴이 빨개져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여자만 보면 얼굴이 빨개집니다. 아니 빨개지는 것을 제가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지금은 좀 얼굴이 두꺼워 졌나 봅니다. 이렇게 얼굴이 빨개지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간혹 저도 모르게 그 옛날 성격이 마음속 깊이 있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습니다. 혹시 나는 안될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한 분이 있다면 다음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으로 초대하십니다.
왜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 하셨겠습니까? 단순히 예수님이 온유한 분이다. 겸손한 분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높임을 받으시려고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신 것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저처럼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신 분들은 무서운 사람을 보면 피해 다닙니다. 무서운 사람을 보면 무섭지요. 지금 자기 스스로 만든 일들 때문에 지쳐있는 사람들, 자기와 관계없이 짐을 지우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완강한 분이 나타나서 다그치면 도망갑니다. 여러분! 잘못하고 집 문 앞에서 망설이신 적이 있으시지요? 들어갈까 말까? 그 때 갑자기 누가 큰 소리를 지른다거나, 문을 콱 열고 나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가지 않고 숨어버립니다. 그런데 온유한 아빠가 나오셔서 온유한 음성으로 “어서 와라. 잘 왔다. 얼마나 너를 기다렸는데”라고 말하며 맡아 준다면 집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일로 지쳐있고 병들어 있는 사람들은 신경이 날카롭습니다. 차를 운전해 가면서 조금 천천히 가보세요? 앞 뒤, 양쪽에서 난리가 날겁니다. 조금 천천히 가는 것을 못 봐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람들이 지금 지쳐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지치고 병들어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려면 온유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화낼 때가 아니라 온유할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지어야 합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좋아하는 사람하고 짝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신학기만 되면 제일 신경 쓰이는 것 중의 하나가 짝입니다. 짝 잘못 만나 보세요? 일년이 고생입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때 남녀 공학을 다녔습니다. 중학교 때 1,2,3반까지 있는데 1반은 남자 반이고, 2반은 여자 반입니다. 그럼 3반은? 남녀합반입니다. 여기 들어가는 제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불행하게도 남자 반에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3반 남학생들이 부러웠습니다. 거기다 짝이라고 지저분하고 공부도 못하면 더 실망이지요.
29절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짐승들에게 무거운 짐들을 지게 하여 그것들을 부리기 위해 씌우는 도구로서 당시 팔레스틴에는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짐승이나 노역자가 함께 메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멍에를 메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하고 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멍에”(쥐고스:zugov”)라는 단어의 뜻은 원문으로 “짝짓기”입니다. 우리 주님과 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메면 그 짐이 무거울까요? 가벼울까요? 여러분! 학교에서 짝 한번 잘 만나도 일년이 기쁜 것입니다. 멍에를 벗어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짐을 다 내동뎅이치고 도망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짐을 지는데 예수님과 함께 지라는 것입니다.

하루는 새 한 마리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누룩을 조심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9. 누룩을 조심하라) / 마 16:11-12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어느 날 염소는 주인에게 귀여움을 받는 나귀를 질투하며 계책을 꾸몄습니다. “얘, 나귀야 ! 우리 주인은 온종일 너를 부려먹기 위해 겉으로만 아껴주는 척하는 거야. 내일 네 등에 짐을 싣고 개천을 건널 때 일부러 넘어져 보면 너를 미워하고 무거운 짐을 다시는 싣지 않을 테니까?”
열심히 일만 하던 나귀는 그만 염소의 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나귀의 다리는 많이 다쳤고 귀한 짐들이 물에 젖었지만 주인은 급히 수의사를 불러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치료를 마친 수의사는 당분간 나귀에게 일을 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염소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자신이 주인에게 신임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수의사는 “나귀의 다리가 빨리 낫기 위해서는 염소의 간을 내어 먹이고 그 피를 마시게 하면 됩니다”라는 말을 농부에게 하고는 가 버렸습니다. 나귀를 아끼던 농부는 할 수 없이 염소를 잡아 간과 그 피를 나귀에게 먹였습니다. 이 모습을 오늘 말씀을 전하게 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제일 많은 세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들의 잘못을 마태복음 3:7에서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책망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아무 증거도 없이 이런 독설을 퍼부었겠습니까? 이미 이들은 누가 보아도 자기들의 배만 부르려고 하고 자기들의 위신만 중요하지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멀어져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 고와와 객을 돌보지는 않고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은 고사하고 유대인들에게조차도 빛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최대 방해꾼으로 등장합니다. 우리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새인처럼 사두개인처럼 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형식적인 율법주의자요, 전통주의자로 자기 힘으로 이룬 의를 강조했습니다. 이들의 의식과 유전은 위선적이며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마침내 영적 무지와 죽음을 초래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제일 큰 적대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수 없는 기적과 이적들, 그리고 말씀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고 오직 반대만을 일삼았습니다.
마 9: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막 7: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 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끝까지 부딪히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도(이적과 기적), 말씀으로도 예수님께 상대가 안되었습니다. 이런 부류가 택하는 것은 솔직히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너무 깊이 관여되어 있는 관계로 그곳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택한 것은 예수님을 죽여야겠다는 것입니다.
마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모든 것을 예수를 모함하고 죽이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바르게 보려고 하는 자세가 없습니다. 자기들의 안경을 끼고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사두개인
모세 오경만 인정하고 부활과 영생과 사후의 영원세계 및 귀신의 실제를 거부하는 현세주의, 이성주의, 자유주의, 기복주의적 이론가들입니다. 사도행전 23:8절에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마 22:23절에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하셨는데 이 대답으로(마22:24-34) 이들은 놀라고 있었습니다. 이 때 짜기라도 한 듯 바리새인들이 다시 의기 양양하여 예수님께 나옵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마 22:34) 그리고 계명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우리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되지 않으려면
1. 잘못을 인정하면 됩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시작하면 일이 자꾸만 꼬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낀 것입니다.
잘못 인정하기 그렇게 싫을까요?
초등학교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쉬는 시간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교실을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남자아이들 몇이 신발을 신은 채 책상 위에 올라가 이리저리 뛰고 난리입니다. 혼 좀 내려고 “자, 책상 위에 올라간 사람 앞으로 나와”했더니 한 학생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교실 안은 갑자기 조용해지고 놀던 아이들도 급히 제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얼른 나오지 않고 뭣해. 선생님도 몇 사람 봤는데.”
그래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어허 참, 옆반 아이들이 와서 그랬나?”
아이들이 나오면 꾸짖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며 들여보내려고 했는데 아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안되겠다 싶어, 아이들 이름을 불렀습니다.
“정진영, 너 책상 위에 올라갔잖아!”하자, 진영이는 오히려 화를 냅니다. “저만 그랬나요, 뭐.”
“물론 너만 그런 건 아니지만, 네가 책상 위에 올라간 건 맞지.”
진영이는 “으이구, 쟤도 그랬단 말예요”하며 다른 아이를 가리킵니다. 이 아이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한 아이가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 댁엔 놀러 갔습니다. 그 아이는 새총놀이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아이가 쏜 총이 병아리의 급소를 명중시켜 죽인 것입니다. 당황한 아이는 부랴부랴 죽은 병아리를 땅에 묻었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웃집 아이가 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 일 이후로 그 아이는 이웃집 아이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만 했습니다. 무척 괴로운 나날이었습니다. 참다 못한 아이는 외할머니께 자기가 한 일을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할머니는 기꺼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아이는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죄책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모두 아뢰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라는 말씀은 연약한 우리들에게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전통과 유전을 우선하면 안됩니다.
그것을 모두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유전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우선될 수 없습니다. 우선 순위를 잘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먼저 따라야 합니다.
전통의 좋은 점이 있지마는 전통 때문에 발전하지 못하는 것도 많이 있어요. 또는 전통이 우리로 하여금 가리키려고 했던 진정한 본질 그 본질에 다가서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 요인으로 종종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배드리는 순서와 심지어는 교회의 모습 같은 것까지도 전통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3. 영생과 부활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영의 세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천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사두개인의 모순 점은 모세 오경을 보는데 있습니다. 즉 모세 오경에도 하나님의 영적인 능력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까지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경에서 남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잘못을 알았으면(집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싶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 10:28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바리새파로부터 벗어난 두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마가복음 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공회원’이라는 것은 당시 산헤드린공의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회는 이스라엘의 최고 기구입니다. 로마 속국이었지만 이 회의에서 모든 일을 결정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그 전날 밤에 예수의 재판이 이루어졌을 때 없었습니다. 너무나 급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회가 공식적으로 가동되지 않고 졸속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아리마대”에 사는 “요셉”을 말하는 것으로 그가 이곳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리마대”의 뜻은 “높이 있음”입니다. 이 지대가 높은 곳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서북 32km 지점 현재의 벨라(Shephelah) 지방 구릉지대에 있는 렌티스(Rentis)입니다. 다른 대부분의 회원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달려올 수 있었지만 요셉은 “아리마대”로부터 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잡히심과 재판, 처형소식을 듣고 빨리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형이 끝난 뒤에 도착한 것입니다. 요셉은 목숨을 걸었습니다. 빌라도에게 당당히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집안의 새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냅니다. 분명히 당시의 산헤드린공의회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습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아리마대 사람 요셉만큼은 그 깊고 깊은 수렁과 같은 제사장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소굴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저는 역사상 제일 소신 있는 사람을 뽑으라면 아리매대 요셉을 선택하겠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빌립보서 3:5절에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말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26:5절에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파가 “가장 엄한 파”라고 소개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데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던 바울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사도행전 8:3절에 보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했습니다. “잔멸”은 교회를 아주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의 개처럼 충성을 다 바치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것도 교회의 성도들을 대제사장에게 고발하고 믿음을 방해하려고 일러바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행 9:4) 하면서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한마디에 그는 고꾸라졌습니다. 이후로는 그가 더 이상 사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바리새파였을 때는 큰 자라고 자처했지만 예수께 돌아와서는 스스로 “작은 자”라고 이름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사울”이 아닌 “바울”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완전히 바리새파로부터 빠져 나왔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청년으로부터 신앙상담을 했던 내용입니다.
이 청년이 시골 보건소에 내려갔는데 이곳에 계신 분들이 약값에서 그리고 다른 행정을 이상하게 하고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입의 얼마를 이 청년에게도 주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부정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갓 내려간 이 청년이 거절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 뇌물인지? 공돈인지를 받지 않으면 그 조직으로부터 자기는 왕따를 당할뿐더러 계속해서 그곳에서 근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너무 결백한 척 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요즈음은 설교도 그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식으로 해야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결단을 내립시다. 가만히 있다보면 우리 또한 똑같은 바리새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들의 교훈을 쫓아가는 것은 모두가 누룩입니다.

오래 전에 한 여객 열차가 뉴욕으로 가던 중 다른 열차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고가 났었습니다. 그 사고로 5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당시의 열차 운행은 기차역에서 무슨 표를 받아 가지고 출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열차 조종사도 심한 부상을 당해 죽었는데 죽기 전에 그는 노란 종이 하나를 손에 쥐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된 명령인 이 노란 티켓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사고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잘못된 표하나가 열차를 충돌시키고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잘못된 교훈이 사람을 영원히 죽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다른 곳에도 도덕적인, 윤리적인, 어느 정도의 교훈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말이나 이론들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막고 있다면 그 또한 누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예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아멘

우리의 오병이어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8. 우리의 오병이어) / 막 6:35-44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명이었더라”

[배경설명]
예수님은 몇 시부터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셨는지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 설교를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과 청중들은 말씀을 듣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간은 어느새 저녁때가 다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있습니다. 남자만 5,000명이 되니까 여자와 어린아이를 합하면 20,000명쯤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금쯤 말씀전하는 것을 중단하고 해산해야 무리들이 저녁을 사먹든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고 건의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건의에 대해서 예수님은 의외의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모여있는 2만 여명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답하기를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했습니다. 200데나리온이면 당시 한사람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 이었으니까 한 사람이 약 8개월간 벌어야할 돈입니다. 요 6:7에서 빌립은 200데나리온을 사용해도 청중들을 먹이기에는 부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식으로 계산하면 5,000원짜리 도시락을 2만 명에게 준다고 하면 1억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주 똑똑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세관원출신인 마태가 있었고 회개를 맡은 가룟유다도 있어 샘에는 밝았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러한 고민에 직접 참여하십니다.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확인된 음식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이것도 어떤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도시락으로 서민이 먹던 보리떡과 물고기 몇 마리가 전부였습니다(요 6:9). 지금 먹어야할 사람의 양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마디로 누구 코에 붙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이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청중들도 가진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모자라 꼭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가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어도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럼 왜 이 작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한 큰 것을 가진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십니다. 하나님은 많이 가진 사람들의 것은 관심이 없으십니다. 기드온을 택하실 때도 제일 작은 집안의 막내를 뽑으신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는 지도자가 될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을 뽑으실 때도 너무 많아 줄이십니다. 결국은 300명으로 미디안의 수많은 군사를 상대해서 싸우게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적은 것이로되 생명이 있습니다.
베드로도 복음을 전하면서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합니다. 베드로가 아무 물질도 주지 않고 말로만 한 것처럼 보입니까? 베드로는 그의 삶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한 때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그가 예수님께 고백한 것처럼 그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마 26: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오늘 우리 주앙교회도 우리에게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윤인수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중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윤인수가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닦이를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윤인수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윤인수는 열심히 일을 한 대가로 돈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그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돈을 내놓았습니다. 돈을 받아 든 어머니는 윤인수의 등을 두들겨 주며 “십일조를 먼저 떼자”고 말합니다.
윤인수는 버럭 화를 내며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인가, 하나님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나의 눈은 멀게 했고 엄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느냐”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꼭 쥔 다음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지 못할 상황으로 끌고 가십니다. 이제 파악이 되셨으면 “해산하라!” 명령을 하셔야 하는데 오히려 무리를 지어 앉게 하십니다.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떼로, 떼를지어”는 U자 형태로 앉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식사 대열입니다. 시골에서 초,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야외로 소풍가면 각 반마다 또는 마을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식사할 수 있는 상태로 자연스럽게 구성되지 않습니까? 바로 그와 같은 상태로 앉은 것입니다.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숫자는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른 공부는 몰라도 숫자 계산하나만큼은 잘했습니다. 누가 있어서요? 세리 출신 마태와 회개를 맡고있는 가룟유다가 있지 않습니까? 아마 베드로와 어부출신인 다른 제자들도 고기가 몇 마리 정도 잡혔는지는 세었으니까 숫자 계산은 아마 빨랐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100% 순종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왜! 해산하지 않고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십니까? 또 무엇을 하시려고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다 이해한 것을 행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지나치게 자신의 논리로 모든 문제에 접근합니다. 자기가 이해가 안되면 안 하는 겁니다. 그런 분은 순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순종이란 내가 이해되지 않지만 나의 주가 시키면 하는 것입니다.

멕시코에 있는 쿠이케텍 인디언과 체르탈 인디언의 방언에는 `믿는다’라는 말과 `순종한다’라는 말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 단어에 두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안 초기 선교사들은 미개한 인종의 언어라서 언어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언어는 불완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그들은 두 단어를 구별하려는 문명인들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들 언어의 불완전성은 문명인들에게 깊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두 말이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믿으면 순종하게 되지 않습니까? 순종한다는 것은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옳은 것입니다. 오히려 문명인들이 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리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주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41 예수께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가 예수님께 드려졌습니다. 그냥 있으면 여전히 한 어린아이가 먹을 양뿐이 안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드려졌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그냥 100원이요, 10만원이요, 100만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드려지면 다릅니다. 예수님이 축복을 하시고 남자만 5,000명이 먹었습니다. 그것은 물질의 양과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고기가 다섯 마리였기 때문에 5,000마리로 늘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청중이 먹고 남았습니다.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모자라지 않습니다. 충분합니다. 남는 축복이 있습니다.
단순히 오병이어의 기적이 기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구원자시요, 생명의 떡으로 친히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것도 주님께 드려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주앙교회에서도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멘.

어려서부터 꼽추로 자라 굉장히 우울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나 같은 불구자를 과연 받아줄 것인가? 누가 나 같은 사람과 결혼해 주겠는가?”
그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 같은 느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뒤에서 “꼽추! 꼽추!” 하면서 그를 놀렸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어린 소년이 그를 세우더니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등에 지고 가는 게 뭐예요?”
그는 생각했습니다.
“웬 꼬마가 나를 놀리고 있네. 왜 아이들까지 나를 괴롭히지?”
그러나 그는 무심코 “혹이란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사랑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저씨, 나는 그걸 믿을 수 없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세요. 하나님은 사람에게 혹 같은 것은 주지 않으세요. 아저씨 등에 있는 것은 천사의 날개가 들어 있는 상자예요. 아저씨가 죽을 때까지 겸손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고 다니면 어느 날엔가 그 상자가 열리고 날개가 펴져서 아저씨는 그 날개로 아름다운 하늘나라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소년의 말을 듣고 그만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아름답고 많은 돈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이것이 우리의 오병이어입니다.

바울은 고전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것, 약한 것, 부족한 것”이 무조건 이기거나 좋은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택하셨을 때, 그리고 순종하고 나왔을 때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일 맺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27. 아름다운 열매일 맺자) / 마 7:16-20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꽃은 스스로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향기는 스스로 향기롭다고 말하지 않아도 향기로운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진실한 것입니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은 따뜻한 가슴을 가졌노라고 말하지 않아도 따뜻한 것입니다.
새 해에는 진실한 마음과 따뜻한 가슴으로 사랑의 손 내밀 수 있는 사랑의 향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시나무에 포도가 열리지 않으며, 엉겅퀴에 무화과가 열리지 않습니다.
그 나무를 보면 그 열매의 종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나무입니까? 가시나무, 엉겅퀴입니까? 아니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입니까?
말하지 않아도 된다 구요? 포도나무, 무화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시나무, 엉겅퀴는 사단의 역할을 합니다.
인간 타락의 결과로 먹을 것 대신에 먹지 못할 것이 열리는 것이 가시나무와 엉겅퀴입니다. 창 3:18에 하나님은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고 하셨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에덴 동산에 이런 못된 나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가시가 남습니다. 민 33:55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치 않은 결과로 우상이 남은 것입니다. 이 우상이 가시역할을 합니다. 삿 2: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지난 26일 인도네시아 슈마트라섬 근처에서 64년 알래스카 지진이후 40년만에 가장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보통은 7.0만 넘으면 위험한 것인데 이번 지진은 9.0의 강력한 지진으로 핵폭탄 270개를 터뜨린 것과 같은 위력이라고 합니다. 1000km에 걸쳐 바다에서 발생한 이 지진은 순식간에 해일을 일으켜 사방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말할 것도 없고 몰디브의 수도 3/2을 잠기게 했습니다. 인도와 스리랑카, 태국의 남부를 중심으로 휴양지인 푸켓을 덮쳐 사망자만 100,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지역은 주종교가 불교, 힌두교, 이슬람 국가들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태복음 24:7-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할 때인 것 같습니다.
가시나무, 엉겅퀴에서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없는 것은 처음부터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씨가 자랄 수 없습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의 종교로는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가시나무인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마 13: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라고 하셨습니다. 가시는 자라게 하는 것을 막습니다. 이 비유의 설명을 마 13:22절에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시는 두 가지입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입니다.

하루는 송사리 잠자리 개미 등 셋이 함께 모여 놀고 있었습니다. 송사리가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