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보다 귀한 생명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5. 천하보다 귀한 생명) / 눅 9:23-27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지난 22일 25세의 한 젊은 연예인(이은주)의 자살로 사회적 패닉증상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중스타의 죽음은 연예계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마치 아는 사람, 친한 사람이 죽은 듯한 심리적 충격을 안겨줍니다. 자신이 좋아하던 드라마나 영화속 주인공이 현실에서 사라짐으로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허상과 현실을 구분해야 합니다. 일본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욘사마’ 열풍도 알고 보면 허상인 것입니다. 그가 실제 인물이기는 하지만 드라마 속의 인물을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허상 속에 살아가지는 않나 우려가 됩니다. 이번에 자살한 연예인은 모두가 의아해 합니다. 왜!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는지 얼른 납득이 안가는 것입니다. “돈과 명예, 일을 하고 싶었다.” 등의 내용은 더욱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부모님이 모두 살아 계시는데 자신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는지 보통 사람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만족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에게 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독일속담에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여인은 향기 없는 꽃과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좀더 넓게 이해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바로 믿게 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의 것에 비전을 두지 않습니다. 목적을 삼지 않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 세상을 보고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다가아니며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생명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대로 우리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생명입니다.
창세기 1:26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자연이나 동물에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말이 없습니다.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지음을 받은 사람은 창 1:31절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을 지으시고는 “좋았더라”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지으시고는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물과 식물들을 사람을 위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창 1:28-30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동물이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까? 동물이 아무리 똑똑해도 하나님을 찾지는 않습니다.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범죄한 인간에게는 허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 된 것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면 동물보다 그저 머리가 좀 나을 뿐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것을 고쳐야 합니다. 다시 원상복귀 되어야 합니다. 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죄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범죄 한 죄인들뿐입니다. 성경이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선열들 또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이런 죄인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죄를 없게 하는 것이 예수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원상복귀 시키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고전11:1).

하나밖에 없는 생명입니다.
본문 25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행 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베드로와 사도들이 산헤드린공의회 앞에서 증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입니다(요 14:6).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분이십니다(요 6:35). 우리 각자는 이 생명을 좌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결코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이 아닙니다. 잘 간직하고 , 받아 누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를 착각하여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잘못 아는 데서부터 엉뚱한 생각, 엉뚱한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인터넷상의 자살 사이트는 계속해서 단속을 하는데도 생겨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이 자기의 것인 줄 알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알고 생명을 죽일 방법을 찾아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내가 내 생명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내 생명을 찾으시면…. 지체 없이 떠나야 할 내 생명입니다(눅 12:20). 여러분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세요. 조금도 함부로 생각하지 마세요. 내 생명의 주인 되시는 주님 앞에서 소중하게 잘 가꾸어야 합니다.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생명입니다.
고전 8: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형제를 대신하여, 아니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피로 값 주고 사셨다는 말씀입니다(행 20:28).
여러분! 우리 목숨은 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피로서 죽을 죄인을 사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행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을 불러모은 곳,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셨습니다(마 18:20).
여러분! 성도들의 몸값을 계산할 수 있습니까? 그냥 사람의 목숨도 계산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주님의 피로산 성도의 몸값은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영원합니다.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며 이 땅의 모든 삶이 정리됩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신 것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물질을 조금 더 가지고 살았느냐, 아니면 명예와 권세를 누리며 살았느냐,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살았느냐, 건강하게 살았느냐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모두가 죽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정리될지 모르지만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착각하는 것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죽으면 다시 심판을 받게되어 있습니다.

1892년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윌 피어비스란 남자는 은행강도로서 도망을 치다가 은행 문지기를 쏘아 죽였다는 죄목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본인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했으나 그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가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는 증인이 있었습니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 이 사람이 진범이라고 단정한 7명의 배심원들은 그의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에, 사형수는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죽을 수 없다. 나는 무죄다. 죄 없는 사람에게 올가미를 씌워 죽이려는 이 배심원 놈들아 나보다 네 놈들이 먼저 죽을 테니 두고 보라!”고 발악을 했으나 그는 끝내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날 사형수의 시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가 죽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판명된 것입니다. 이에 법관은 그를 다시 죽이려고 했는데 그것을 강하게 반대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고장의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한 번 죽인 사람을 하나님이 되살려 놓았는데 인간이 어찌 주님의 뜻을 거슬리고 다시 죽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법관과 목사의 논쟁으로 8년 동안이나 형 집행을 못하고 있었는데 사형수는 어느 날 무죄로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조라는 이름을 가진 사형수가 사항을 당하면서 은행 문지기를 죽인 사람은 자신이라고 실토하였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단 한가지
본문 24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할 때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생명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렇게 귀한 존재이기에 우리의 삶을 헛되이 살아서는 안됩니다.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생각할 때 열심히 살게되어 있습니다. 열심히 살다보면 주님이 부르실 날이 있습니다. 그 때 아멘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가시면 됩니다. 성도 여러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사단이 이기지 못합니다. 건들지도 못합니다. 주님의 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앙모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최근에 아주 감동적인 얘 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중학교 선생님의 얘기예요. 중학교 1학년을 가르치고 있는 여 선생님, 그리스도인 여 선생님의 얘기입니다. 자기 반에 가르치는 학생이 하나 있는데 아주 우수한 학생이었대요. 아주 top. 성 적이 아주 제일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왔던 학생이었는데 한 1년 동안에 이 학생이 망가져 가는 거예요.. 점 점 성적이 뚝뚝 떨어집니다. 반항적 인 아이가 되어가고 불량한 학생이 되어갔습니다. 점차 친구들이 그를 따돌리기 시작합니다. 선생님들도 그를 문제아로 취급하기 시작합니다. 친구가 없어요. 그는. 점점 반항적이 되어가고 그는 점점 학교 수업을 거부합니다. 선생님이 ‘이유가 있겠지.’ 이 학생에 대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알아봤습니다. 그랬더니 부모가 별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별거하고 있다 는. ‘그랬구나’ 환경조사서를 봤더니 배경이 기독교인이예요. 자기도 기독교인이니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어느 날 양쪽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 선생님이.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걸어보니까 따로따로 있어요. 이미. 같은 집에 있지 않고 따로따로 있었습니다. 아들 성적문 제로 의논하고 싶다고 학교에 오실 수 있냐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 소에 양쪽 부모를 학교에 같이 오시게 합니다. 와서 보니 깜짝 놀랐어 요. 혼자뿐인 줄 알았는데 자기 아내가 있거든요. 자기 남편이 있거든요. 처음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고 이 선생님에게 아주 좀 안 좋은 태 도로 나오시더래요. 그리고 설명을 드렸대요.
“이 아드님의 이 성적을 도울 수가 있는지 그리고 제대로 자 기 인생의 페이스를 찾으려면 두분 중의 한 분의 도움 가지고는 안되고 두 분의 도움이 다 필요하기 때문에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두 분을 다 학교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선생님에게 충격이 되었던 이 학 생의 시험지 답안지하나를 보여드렸답니다. 이 선생님이 영어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는데 답안지에, 어느 날 답안지에 한문제도. 답을 하나도 안 쓰고 낙서를 해버렸대요. 전체를.. 그의 일종의 반항이었죠.
그런데 이 학생의 휘갈겨 쓴 낙서에 맨 마지막부분에서 이 학생의 마음속에 있었던 진실을 이 선생님 이 본 것입니다. 거기다 빨간 줄을 쳐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걸 좀 보시죠.”

휘갈겨 쓴 낙서의 밑바닥에 숨어 있었던 이 학생의 진실한 독백이 기록되어있었습니다.
“아빠 엄마 난 누구하고 살아? 난 누구하고 살아? 이혼하면 누구하고 살아? 아빠 엄마 난 누구하고 살아.. 아빠 엄마 난 둘 다 필요해. 난 둘 다 필요해”
그리고 또 한마디 마지막에 맨 구석에
“아빠 엄마 우리를 사랑해? 아빠 엄마 우리를 사랑해?”
보여준 순간, 순간 아버지가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엄마도 고개를 떨어뜨립니다. 깊은 정적이 지났습니다.
“두 분이 기독교 배경을 가지고 있지요? 저도 그리스도인 입니다. 기도해 드릴까요?”
선생님이 이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기도하자 순식간에 교무실은 통곡의 장으로 변합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합니다. 이 것이 이 가정의 회복의 전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합쳤어요. 이 부부 는. 그리고 이 아이는 다시 인생의 길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쓴 글을 제가 직접 읽어봤는데
“맨 마지막에 함께 기도하고 교정을 나서는 이 부부. 이 학생의 아버지 와 엄마. 교정을 나설 때 나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내 생애에서 이것보다 더 귀한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이웃을 살리는 축복. 저와 여러분은 이웃을 살리는 자일까요? 죽이는 자일까요? 기도하십시다.

반석 위에 세워 주시는 교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4. 반석 위에 세워 주시는 교회) /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교황 인노센트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청의 발코니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교황은 13세기에 교황권을 크게 휘두른 사람이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의 대신학자였다. 이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썼는데 이 책을 보고 회개한 사람중의 하나가 노예상인 ‘존 뉴톤’입니다. 이 사람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썼습니다.
그 때 마침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 시로 돈주머니가 수송되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을 본 교황은 “저기 봐요. 이제는 `금과 은은 내게 없노라’고 교회가 말하던 그런 시대는 지나갔소.” 그러자 아퀴나스가 이를 받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앉은뱅이더러 ‘일 어나 걸으라’고 교회가 말할 수 있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 속하게 될 때,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의지하게 될 때, 이미 하나님의 능력은 사라진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모두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보다, 예수님 보다 그것들을 먼저 의지하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반석은?
예수님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이름으로 예수님은 페트로스(Pevtro”) 남성형 고유명사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반석” 페트라(pevtra/) 여성형 명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제자 베드로를 말씀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 반석”이 무엇을 가리키느냐가 중요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해석은 제자 “베드로”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성경을 깊이 보지 않으면 그렇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혼란을 초래하는 것은 “베드로”이름이 ‘돌, 반석’으로 예수님이 “반석(페트라) 위에”라고 하신 뜻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 반석”이라고 하신 것과 베드로의 이름을 연관지어서 혼란을 일으키면 제대로 해석을 못합니다. 그러면 “이 반석”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6절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한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 베드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한 신앙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 고백을 한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 베드로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가 아무리 예수님의 수제자라고는 하나 그 또한 인간임이 분명합니다. 23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반대했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엄청난 책망을 듣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반석을 세우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는 있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신앙 고백을 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주앙 교회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에 살면서 물을 찾아 목말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은 큰 바위를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바위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바위가 깨지면서 엄청난 물이 솟아 나와 목마름을 해결하고 새 힘을 얻어 살았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를 가면서 목이 말라 지치고 죽을 위기에 있을 때 바위를 터뜨려 생수를 마신 기사가 두 군데가 나옵니다. 그 하나는 출17장의 사건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한달 반쯤 되었을 때 신 광야를 지나서 목이 말랐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르비딤 어느 바위로 인도하여 모세의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거기서 나오는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또 하나는 40년이 지난 민20장의 사건으로 바란 광야를 지나 가데스라는 곳에서 목이 마를 때 이스라엘을 그 곳 어느 바위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곳에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위에 명령하여 물이 나게 하라 하셨는데 모세는 감정이 북받쳐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쳐서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40년간 사는 동안 신령한 바위가 함께 따라 다녔는데 그 바위는 그리스도라 했습니다. 생수를 주시는 분, 생명을 주시는 분이 교회의 반석이 되십니다.

주님의 교회
예수님은 “내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가 된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교회가 됩니다. 그리나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이시면 예수님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회사가 주주총회를 하면 제일 많이 주식을 가진 사람이 그 회사의 주인이 됩니다. 교회는 기초석이 없으면 무너지기 때문에 교회의 기초가 제일 중요합니다. 즉 교회를 세우신 분이 그 교회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내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교회(에클레시아:ejkklhsiva)는 성경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입니다. 즉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처음으로 예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이 뜻은 “불러내었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죄 때문에 떠난 사람들을 예수님은 다시 부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모인 사람들이 있는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불러 모은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교회”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주님이 불러모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아멘.
요한복음 21장 15-17절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 보시고 베드로가 대답을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을 주십니다. 같은 질문을 세 번했는데 예수님은 그 때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 “내 양을 치라”(16), “내 양을 먹이라”(17)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내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양입니다. 사람의 양이 아닙니다. 사람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서 구원받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단 두 마디로 감동적인 설교를 한 목사님으로 유명합니다. 단 두 마디는
“ ‘인간보다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여기 사람과 하나님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11-32절에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탕자’ 사람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시는 아버지’, ‘용서하시는 아버지’, ‘감싸주시는 아버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변화되고 회개되고 새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모든 것이 내 중심이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 바울, 스펄전, 칼빈, 로이드 존스, 빌리 그래함 목사님 모두, 역사상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나 설교자라고 해도 예수님의 도움 없이는 단 한 생명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워 주시는 교회
“내 교회를 세우리니”의 “세우리니”(oijkodomhvsw:오이코도메소) 원문의 뜻은 “내가 세울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미래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셔서 죄 사함을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세운다”가 됩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 한군데 더 나옵니다. 막 14: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드려 일으켜 세우실 교회를 말한 것입니다. 교회의 의미가 분명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림으로서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단순히 사람이 많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초청에 응한 사람들의 모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제가 1986년 컴퓨터선교회 시작하기 전에 미국에 계신 ‘모리스쎄룰로’목사님을 모시고 잠실 실내체육관과 광림교회에서 전도학교를 열었습니다. 그 때 이분이 주장하기를 당시 현재 전세계 교회의 실내에 들어와 꽉 차게 서서 예배를 드려도 세계인구의 단 2%도 수용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2%가 아니라 단 1%도 수용을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제일 작은 지하실 교회라고 해도 그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것이며 백악관이나 청와대보다도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며 축복의 장소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웅변가요, 정치가인 다니엘 웹스터(Daniel Webster)는 워싱톤에 살면서도 교회는 촌 교회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워싱톤에 있는 교회에서는 그가 출석할 때에 교역자들이 높여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촌 교회에 갔을 때에는, 설교자가 그를 모르기 때문에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얼마든지 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듣기 위하여 촌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는 성도들이 모인다면 그 교회는 반드시 성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참 음성을 외면하면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주앙교회 주님이 세워주신 것인 줄 믿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이렇게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아멘. “권세”는 문자적으로 ‘대문’을 말합니다. ‘음부의 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은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죽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죽었다고 할 때는 분명히 구분을 해야 합니다. ‘일시적으로 죄의 육체가 죽었다’고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이미 영원한 생명에 들어간 것입니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숨을 거두었을 때 죽었다고 하지 않고 행 7:60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누가 뭐라고 하든지 유명한 성경 주석가 윌리암 바클리가 40년 동안 교회를 봉사한 다음에 한 말에 동의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교회를 믿는다.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부패하고 사람들 눈에 허물 투성이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그래도 믿을 것은 교회 밖에 없다는 것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리고 한 때 좌절에 빠졌던 미국인들에게 소망을 불어 넣어주었던 백만인의 애인이라고 불리웠던 노만 빈센트 목사가 한 말도 저는 전적으로 수긍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교회는 우리의 모든 희망이 실현되는 곳이다.’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꿈,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지만 남몰래 숨기고 있는 소원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은 교회라는 말입니다.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나라도 21세기에는 교회에 희망을 걸어야 된다고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믿고 교회에서 건강한 신앙 생활을 할 때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질 것을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복 주시기 위해서 불러모은 백성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미시간주에 리차드 디한이라는 유명한 방송 설교가가 있습니다. 같은 시에 어떤 문제가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질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3. 피할 수 없는 질문) / 마16:13-17(막8:27-30, 눅9:18-21)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영국의 런던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꼭 찾고 싶어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유명한 웨스트민스턴 사원입니다. 저도 이 교회를 방문했었는데 오래 전에 이 사원을 방문했던 방문객들의 입에서부터 이런 흥미 있는 일화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방문객들이 이 유명한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들을 인도해 주던 안내자가 있었습니다. 이 안내자는 사원에 대한 역사적인 내력과, 그리고 무덤에 묻혀 있는 지나간 세기의 찬란한 영웅들의 삶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또 현재 그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가를 정황 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이 끝난 후에 안내자는 방문객들을 향해서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아니오아 주에서 이곳을 방문했던 어느 여신도 한 사람이 안내자를 향해서 던진 질문이 있습니다. 이 질문이 유명한 일화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과 내력에 관해서 훌륭한 설명을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질문을 한가지만 하겠습니다. 최근에 이 사원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이 뜻밖의 질문 앞에 대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안내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화는 오늘의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종교나 혹은 교회의 이름으로 수없이 교회 안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 모임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와 내용은 무엇이며, 오늘 우리가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 모든 형식과 허상은 그 내용과 어떤 관련이 되어져야 하는지 우리는 뒤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은 당시 제자들에게만 한 질문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임할 질문입니다.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지리설명과 서언 - 프리젠테이션 참고]
예수님이 오늘 질문을 한 곳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입니다. 이곳은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와는 다른 곳입니다(행 10:1). 본문의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 북방 약 40km 지점으로 헬몬산 기슭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은 약 345m에 위치한 작고 조용한 마을입니다(막 8:27). 이 마을은 원래 작은 마을이었는데 헤롯 대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 빌립’(눅 3:1)에 의해서 커진 마을입니다. 마을의 이름이 “가이샤라 빌립보”라고 붙여진 이유는 ‘헤롯 빌립’이 로마 황제 ‘디베료 가이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가이사랴’라고 하였고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추가하여 ‘가이샤라 빌립보’라고 지었습니다.
또한 ‘헤롯 빌립’은 이곳에 황제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한가지를 더 만들었는데 그것은 ‘황제의 신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이 지역의 구약시대 이름은 ‘바알갓’(수 11:17) 또는 ‘바알 헤르몬’(삿 3:3)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알 갓’은 ‘행운의 바알’이라는 뜻이고 ‘바알 헤르몬’은 헤르몬 산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바알 우상을 섬기던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구약의 이름으로 보나 현재의 이름으로 보나 우상이 만연한 곳입니다. 깊은 산과 바다 근처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상을 많이 섬깁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상의 땅에 도착하셔서 자신에 대한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 태국에 갔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우상이 많은 줄 몰랐습니다. 절도 많지만 우상이 길가에 작은 탑을 만들어 그 안에 손바닥만한 우상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 깔린 것입니다. 선교사님들과 자연스럽게 하게 된 이야기는 이렇게 우상이 많은 곳에서는 더 열심히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도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통해서 믿음을 확실히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부르신 이름 인자
“13…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본문을 원문에서 직역하면 “나는 스스로 인자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말하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인자’라고 표현하셨는데 공관복음서에만 69번 나오고, 사복음서에는 81번나옵니다. 단 두 번(눅 24:7, 요 12:34)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예수님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성을 입으시고 오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기가 신으로 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그럼 당신이 사람이지 신이야?”라고 말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라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자신을 ‘신’이라고 말하지 않고 스스로를 ‘인자-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질문
예수님은 먼저 객관적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제자들은 ‘더러는 … 더러는 … 어떤이는’이라는 연결 어가 사용됩니다. 사람들이 아직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한 메시야 이심을 알지 못하고 의견이 분분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한 사람 정도로는 보고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가장 최근에 폭발적인 영적 능력(눅 1:17, 80)을 행하고 있었으며 엘리야는 구약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백성들의 타락을 꾸짖고 선지자로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사람입니다(왕상 19:10, 왕하 1:11, 말 4:5-6). 예레미야는 백성을 위해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며 백성을 긍휼히 여긴 선지자입니다(렘 9:1, 14:17). 그리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통 사람으로 보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 믿으세요.”그러면 “나도 예수를 믿지, 그분은 좋은 분이야”정도로 끝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도의 힌두교가 그런 양상을 보입니다. 힌두교의 신중의 하나로 예수님을 모신다고 하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이런 상태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고백으론 안됩니다.

주관적 질문을 던지십니다.
“15절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제 사람들의 생각과 관계없이 내 생각을 말해야 합니다. 이 질문은 당시 12제자에게만 내려진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단 한 사람도 피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누구에 의해서도 대신 대답되어질 수 없는 질문입니다. 또한 질문은 대충 얼버무거나 피할 수도 없습니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꾸며서 말하거나 조작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나의 중심을 아시는 분에게 중심에서 나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삼상 16:7). 이 한마디의 말이 나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꿈에서 소리질러 보신 적 있으시지요. 막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소리가 질러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이 질문에 꾸며서 대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예수님의 질문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한 마디는 예수님에 대한 가장 완벽한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야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인자’라고 스스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로 인성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신분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는지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말에 흡족해 하셨습니다. 물론 조금 있다가 21절에서부터 보면 예수님이 고난받으실 것을 말씀하시자 “그리 마옵소서”하는 바람에 엄청난 책망을 듣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백만 생각합시다.
여러분! 때로는 자녀가 다 지키지 못하지만 말로만 해도 부모는 고마운 것입니다. 자식이 지금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때가 되면 정말로 집을 지어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전의 아버님들은 그런 허풍 같은 말씀을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머님들은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아버님이 고마운 것입니다. 그런 말도 하지 않으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여자들은 별을 따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당신을 위해서는 별을 따다 줄 수도 있어!”라고 말하는 남자가 좋은 것입니다. “야 그걸 어떻게 따다주니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라!”라고 하면 그 남자는 그 즉시로 차이는 겁니다.
이런 얄미운 아들도 있습니다. 일곱 살짜리 철이는 금붕어를 몇 마리 키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싫증이 났습니다. 결국은 철이 엄마가 금붕어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는 데 지친 엄마는 하루는 철이에게, “금붕어를 내다 버리든지 누구한테 주든지 해라, 알겠니?”하고 말했습니다. 얼마 뒤 슬그머니 나타난 철이가 엄마에게 직접 만든 카드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그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어머니께 귀여운 금붕어를 선물로 드립니다. 철이로부터.“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고백에 축복해 주십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이렇게 부르신 것은 이래 적입니다.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하셔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때는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가 사용되었는데 아람어는 평상시에 제일 편하게 꾸밈없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즉 고향 사투리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신 말씀 중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도 아람어입니다. 사도요한이 요한복음 22:20절에 사용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도 아람어 “마라나타”입니다.
“바”는 아람어로 ‘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의 아들 이런 식으로 부른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이렇게 어르신들이 부르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희 아버님 함자는 ‘헌’자 ‘국’자를 쓰십니다. 그래서 ‘헌국이 아들 영제’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팔레스틴이나 중동에서는 이런 식으로 부릅니다. 예수님이 “바요나”그러셨는데 그러면 시몬의 아버지 이름이 무엇입니까? ‘바’가 아버지라는 뜻이니까 ‘요나’입니다. 히브리어로 ‘요하난’(요 1:42)이 베드로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이 뜻은 ‘비둘기’입니다. 즉 평화라는 의미도 담겨있는 것입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본명으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베드로를 부르신 것은 매우 친근한 의미도 있지만 천연적인 신분인 상태로 부르신 것입니다. 즉 갈릴리 어부의 아들로서 참다운 신앙고백을 한 것은 자신의 지혜로, 지식으로, 신분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고백이 사람의 혈육에서 나지 않음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이러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무엇이 복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이 복입니다. 다른 것이 복이 아닙니다. 제일 큰복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원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만 살아 계십니까? 예수님도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계신다는 것은 곧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세상에서 말하는 서정적인 의미에서 말이나 글이 살아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 삼위일체이신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말씀도 살아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일찌기 비상한 위험과 공포에 직면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될 때, 기운 없이 멍청히 앉아,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비비드! 비비드!” (vivid! vivid! – 그는 살아 계시다! 그는 살아 계시다!) 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서도 희망이고, 인류 전체의 희망입니다. 고난 속에 빠졌어도 선지자가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고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비비드”의 신앙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는 내과의사 출신으로 영국의 청교도 출신의 후예로 1940년대에 활동한 목사입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확실한 소명을 가지고 설교한 목사님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한번은 이분이 웨일즈 지방에서 설교하기를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고 바닷가로 피서 가시려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가족이 죽었을 때 교회로 오시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즉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이왕 교회에 다닐 것이면 확실히 구원의 은혜를 받으며 다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한다고 여러분이 보이지도 않는 분을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인줄 모르는 분들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분들은 돈이 제일인줄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식교육 시키는 것이 제일인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건강이 최고인줄 알고 있습니다. 다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들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살아 계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으니 감사드립니다.” 아멘

죄인임을 고백할 때 알게 하십니다.
주님을 따를 때 알게 하십니다.
겸손할 때 알게 하십니다.

양 계명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2. 양 계명) / 마 15:1-9, 막 7:1-13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 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양 계명’입니다. ‘두 계명’으로 하려다가 ‘양 계명’으로 했습니다. 중국동포들은 2천년을 양 천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2천년으로 말해야지 양 천년이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그럼 남쪽에선 ‘양팔이라는 말을 안 씁니까?’그러는 것입니다. 숫자가 계속해서 이어질 때는 ‘양’이라는 말보다는 그냥 수를 말하는 것이 맡고요, 단 두 가지나 서로 다른 것을 말할 때는 ‘양’으로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양’이라는 것은 다른 두 가지의 경우를 뜻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양 계명이 나옵니다. 7절에 ‘사람의 계명’과 8절에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이 두 가지의 계명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1956년 5월 8일 조용한 영국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로열 코트 극장이 그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극이 끝나고 막이 내려지자 사람들은 양편으로 갈라졌습니다. 한 쪽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고, 한쪽에서는 조소 섞인 야유가 튀어나왔습니다. 관객들은 찬, 반 양쪽으로 갈라선 것입니다. 왕관처럼 근엄했던 《타임스》지도 이 문제에 끼어 들었습니다. 세익스피어의 극이 아니면 좀처럼 거들떠도 보지 않던 런던 시민들로부터 이와 같이 튼 인기를 얻은 주인공은 무명 작가였으며, 삼류 배우에 가난한집 자식인 빈털터리 존 오스본 이었습니다. 《분노의 얼굴로 돌아다 보라》는 3막 5장의 희곡 한 편을 상연하여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진 것입니다. 결국 승리는 오스본의 것이었습니다. 이 날을 오스본의 날로 재정 된 것뿐만이 아니라 영국의 안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젊은이들의 다이너마이트 같은 분노를 터뜨린 날입니다.
극중에서 런던은 지저분하고 음산한 독특한 스모그에 더러워진 노후한 건물들이 노출되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저분하고 자욱한 안개와 같은 영국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랫동안 영국 사람들은 교양과 신사도, 체면을 그 안개로 감춘 것입니다. 위장한 것입니다. 거짓이요 위선이라는 이야기입니다. 18세기의 스크리블러스 클럽 문인 회원들은 영국인의 위장과 위선을 풍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설들이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 포프가 쓴 《우물경愚物經》, 게이가 쓴 《삼문三文 오페라》과 의사였던 아버스넛이 쓴 《존 불의 역사》 등입니다. 존 불은 주인공의 이름이지만 ‘거세지 않은 황소’를 말하는 것인데 영국의 속물을 야유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영국인을 존 불이라고 불렀습니다. 한없이 근엄한척하고 살아가는 영국의 위선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 정도에는 비교되지 않는 진짜 위선자들이 나타납니다. 위선자의 원조라고 하면 지나칩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배경설명]
본문 1절에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곳은 갈릴리입니다. 한마디로 서울에서 시골의 촌마을에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파견된 것입니다. 중앙에서 시골에 유능한 관리들을 뽑아서 보낸 것입니다. 이들이 왜 파견되었을까요? 이미 갈릴리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이 중앙에 보고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예수님의 활동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무너뜨리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경쟁 상대로 보고 어떻게 하든지 꼬투리를 잡아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경쟁상대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아니라 사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회를 엿보던 중 드디어 빌미가 될 수 있는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 중에 몇 명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본 것입니다. 손을 씻는 것은 유대인에게와 중동지방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정결 예식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도 더러워진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자들 몇 명이 어째서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게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고고한 척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하고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의 수도에 사는 깨끗한 사람들하고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더럽고 싶어 더러운 사람들이 아니라 갈릴리 지방의 특징상 바닷가에서 살던, 어부들이 많은 예수님 제자들은 손을 씻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평소에 하던 버릇대로 떡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볼 때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러면 그렇지 무식한 것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1936년 올림픽에서 우수 민족을 자랑하던 독일이 미국에 패했을 때 나치스들은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우리는 짐승과 경주해서 진 것뿐이다. 사람들끼리의 게임에서는 우리가 이긴 것이다.” 미국 선수들의 대부분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가해진 모욕적인 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러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서 이런 촌사람들과 자신들을 비교한다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해있을지 모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5절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 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어찌하여”라는 말속에는 ‘어떻게 그렇게 무식하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해 오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세 가지로 말씀 드립니다.

첫째,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6절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대해서 손 씻지 아니한 것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이들의 근본적인 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즉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어떻게 말해야 그나마 이해하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구약성경인용은 적대자들을 물리치실 때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자체가 진리이시고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실 만큼 당신의 진리가 미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이사야보다, 엘리야보다 훨씬 크신 분이며 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아멘.
그런데 왜? 예수님이 이사야의 성경을 인용하시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 해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납득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 근거를 그들의 수준에서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해외에서 본 것을 그냥 말하면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행 가이드 책을 보여주면서 말하면 고개를 끄덕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하고만 있을 때는 구약성경에 있는 것을 말씀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구약성경에 있는 것만 말씀하셨다면 새 교훈이 아닙니다. 또한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예언한 것을 보여주니까 예수님께 달려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 새롭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인정하는 선지자가 말한 것에 대해서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야의 글을 인용하시기 전에 이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라고 하십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25번 나오는데 복음서에서만 22번나옵니다. 모두가 예수님이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이중에 마태복음 23장에만 7번이 나옵니다. 모두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외식”(外飾) ‘휘포크리테스(uJpokrithv”)’는 ‘연극배우’라는 뜻으로 자신을 속이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속과 겉이 다른 이중 인격자, 위선자라는 말입니다.

둘째,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는 자들입니다.
6절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사 29: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본문 5절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예수님께 질문할 때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은 ‘구전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전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계명이외에 보다 상세한 율법이 적힌 것을 말합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더 이상 선지자가 나오지 않았고 율법을 제 해석하고 문서화된 체계적인 가르침이 필요하여 사회의 발전과 필요성에 맞추어 집대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탈무드’ B.C. 300-A.D. 800년 사이에 구전을 율법화 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제1부인 미쉬나(Mishna:‘반복’이라는 뜻)와 제2부인 게마라(Gemara:’보완’이라는 뜻)로 구성된 것입니다.
탈무드의 내용자체가 모두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제자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것 자체가 잘한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좀더 본질적 문제로 접근해 가면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다”는 것입니다. 즉 이제 껍데기만 남은 것입니다.

서커스단의 곰은 피리를 불면 춤을 춥니다. 서커스단의 곰은 자기 마음으로 춤을 배운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길들여진 것입니다. 뜨거운 철판에 곰을 올려놓으면 뜨거워서 자연히 펄쩍펄쩍 뛰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사람은 옆에서 피리를 불어 줍니다. 이러한 일이 수없이 반복되면 곰은 뜨거운 철판 위에 올려놓지 않아도 조건 반사적으로 피리만 불어도 춤을 추게됩니다. 그러나 이 곰에게 기쁨이 있습니까? 서커스단의 곰처럼 구전으로 내려오기 때문에 아무 감정도, 마음도 뜻도 없으면서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유전의 법”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교묘히 피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고르반’(코르반:하나님께 드림)이라고만 하면 그만이 되는 재산법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출 20:12, 신 5:16절의 십계명 중에 제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그리고 출 20:12절은 “아비와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부모님 잘 섬겨야 합니다. 이것은 ‘유전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땠는지 아십니까? 자기 재산을 두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코르반” 그 뜻은 ‘하나님께 드렸다’입니다. 그러니까 내 재산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에 부모님을 위해서도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입니까?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두 얼굴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이상 부모를 잘 섬겨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일만 조금 잘 되게 해 달라고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이것이 외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같은 말씀을 8, 9절에 연속적으로 하십니다.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하고 있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 십자가를 잘라 주셨는데, 그녀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요단강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사람들이 십자가를 강에 걸치고 그것을 다리 삼아 건너가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도 자기의 십자가를 걸치려 했지만 길이가 너무 짧아 걸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 자매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무거운 십자가를 불평 없이 지고 갈 수 있었습니다.

몇 일 있으면 우리 나라 최고 명절인 설날입니다. 이 날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하는 날로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더 잘 믿는다고 만든 “사람의 계명”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법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유교에서 내려온 전통이든 어디서 생겨났든 관계없습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마십시오. 죽은 귀신을 부르기 위해서 상을 차리고 절하지 마십시오. 사람의 유전을 따르려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부모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이, 우리들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의 유전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와 같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는 말씀을 하나님께만 적용하지 마시고 먼저 부모님에게 적용시켜 보세요. 올 설날부터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존경해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