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9. 부활의 증거) / 눅 24:1-12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11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새날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역사상 오늘만큼 의미가 깊은 날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주일을 성수 하는 것은 구약의 안식일이 아닌 새로운 날 부활 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민족으로 택하게 하셨다면, 오늘날에는 부활일(주일)을 지킴으로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레물린에 가면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이 깨져있기 때문에 울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종의 높이는 5.4m, 무게는 219톤 가량 됩니다. ‘자유의 종’의 무게가 0.9톤입니다. 이 종이 깨진 이유는 쇳물을 주조틀 내에 부었을 때 그곳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물방울 하나가 주조틀 안으로 들어가 종에 틈이 생겨 금이 간 것입니다.
이 물방울처럼 작은 의심이 생겨 부활을 의심하지 말고 온전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이 물방울과 같습니다. 전체의 신앙을 망가트립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1. 예수님은 죽은자를 살리심으로 자신의 부활도 알렸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생전에 죽은 사람 두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것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8:41절부터 나오는 12살 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한 두 사람이 보는데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집에는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를 보려고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조롱하는 무리들이 한 말을 통해서도 증명하고 있습니다.
눅 23:35-37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여기서 ‘구원’이라는 말은 ‘살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은 살렸으면서 예수님 자신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느냐는 말입니다. 이들의 조롱이 오히려 예수님이 생전에 살린 나사로와 야이로의 딸 그리고 죽어가는 수많은 병자들을 살리신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들의 말대로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에서 십자가에서 뛰어내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벽한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증거
본문 6절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것을 수 차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대답입니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나왔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도 무덤 속에서 있다가 살아나실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사역이 점점 마지막을 향해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제자들에게는 모든 사실을 솔직히 말해줄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 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본 것은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살아나 기전에는”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제자들에게는 숙지시키시고 군중들에게는 암시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미래예언을 잘한 사람으로 알려진 한 사람을 꼽으라면 사람들은 ‘미셸 노스트라다무스’(Michel Nostradamus, 1503~1566)를 꼽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 생 레미라는 곳에서 태어난 유태인입니다. 이 사람이 예언가로 알려진 것은 오랜 작업 끝에 완성된 『백시선』이라는 책 때문인데, 그가 친구들에게 “이 책 속에 세계의 미래가 모두 담겨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말 그의 예언이 맞는 것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저서를 지금까지 수많은 학자들이나 판문가 고서적 애용 가들이 읽어보고 자기들이 예언을 조금씩 바꿔서 거짓으로 일궈낸 것들이 전부입니다. 실제 그의 예언은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노스트라 다무스가 나폴레옹, 히틀러를 예언한 것, 핵무기를 예언한 것, 지구멸망을 예언했다는 것 등은 모두가 후세 인들이 덧붙여 꾸며낸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의 종말에 대해서도 이 사람의 이야기를 부풀려 흥미 거리로 만들어 사람들을 믿게 한 것입니다. 그의 예언이 맞은 것이 있다면 그의 책 후반에 장난기처럼 쓴 것입니다.
“이 이야기들을 종교가나예언가 자신의 부를 축적하려는 자,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남을 속이려는 자로부터 멀리하소서 후세에 내가 예언한 것을 믿으려는 자가 있으면 처단하소서 그리고 누구도 모르게 하소서 내가 죽고 수세기가 지난 후에 이 예언의 기일이 전부 끝났을 때 열 수 있도록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에 얽매여 백성을 속일 것이오”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왜 썼는지 의심이 갑니다. 이런 이야기로 볼 때 노스트라다무스는 이 책을 통해서 사람들을 농락한 것입니다.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들고 끊임없이 자기가 한 말을 현재처럼 후세 인들에 의해서 살이 붙어져 거짓이 돌아다닐 것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천재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후세 인들이 농락 당하는 것이 우습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이렇듯 농락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 예언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하고는 다른 분입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능력을 가지고 계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완전히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분입니다.

3. 빈 무덤
먼저 말씀드린 것이 예수님의 예표와 예언이었다면 빈 무덤과 수의들은 부활의 실증입니다. 말씀하시던 것이 사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인봉되었습니다. 인봉이 무엇인지는 아시지요? 이스라엘의 무덤은 우리처럼 땅에다 묻는 것이 아니라 돌 굴로 된 것이며 이 속에다 시체를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로 입구를 막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입구를 인봉한 것입니다. 인봉을 하게되면 누가 돌을 굴렸다가 다시 닫게되면 표시가 납니다. 한마디로 몰래 시체를 훔쳐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인봉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면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경우입니다.
첫째는 인봉하고 서있는 파숫군과 예수 적대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쳤다는 가정입니다. 여러분! 흔히 상식적으로 살인사건이 나면 살인동기가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인 동기가 없으면 그 사람을 살인자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죄인의 몸으로 죽었습니다. 사람들의 원성이 높았습니다. 스스로 십자가형을 집행한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예수의 시체를 훔쳐간다는 말입니까? 그럴만한 명분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마 27:64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고 빌라도에게 청하고 무덤을 굳게 지켜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를 동시에 증명합니다. 자신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치지 않았다는 증명이고 둘째로 제자들이 훔쳐갈 것을 방지한 것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훔쳐갔다는 억지 주장입니다. 예수님 부활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이것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리아와 여자들이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제자들에게 고했을 때 본문 11절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라고 한 말은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제자들의 행동에서도 전혀 앞뒤가 맡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부활은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저는 압니다. 제 경험으로 비쳐 볼 때 증명이 안되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부활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믿음을 성령께서 주시기를 원합니다. 부활을 믿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으면 반드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종교로는 부활이 안되지 않습니까?
불교에도 부활과 비슷한 의미인 ‘열반’이라는 말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부활하고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주이십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어디 가서 물건을 사게 되면 “이것이 제일 비싼 것입니까?”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독일사람들은 “이것이 제일 튼튼합니까?”라고 묻고,
불란서사람들은 “이것이 최신형입니까?”라고 묻는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뭐라고 물을 것 같습니까?
“이것, 진짜입니까?”라고 한답니다. 너무 불신사회에서 살아서 그런 것일까요?
아무리 그래도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이후에 제자들의 증거를 보면 가룟유다 대신에 제자를 뽑을 때
(행 1:22)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 4:1)…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행 4: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 17:18)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고전 15: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종교개혁자 칼뱅은 세상을 떠날 때에 오직 한 절의 말씀에 의지했습니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을 25번 외우면서 이 말씀에 의지하고, 승리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지조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을 철새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철새는 아무 생각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북극에서 남극으로 이동하는 철새들은 15,000km를 단 한치의 오차 없이 이동한다고 합니다. 철새는 태양, 성좌를 기준 삼아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강풍에 휩쓸려가다가도 제 위치로 돌아오는데 그 원리까지 사람들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또 태양의 위치를 통해 방향, 위도, 경도까지 정확하게 계산해 이동하는 것도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류학자들은 철새의 뇌가 자석처럼 지구의 자기장 방향을 파악해 이동하는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우리는 철새처럼 정확하게 주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곳에 우리의 영원한 길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부활을 전하는 주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 이루신 사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8. 다 이루신 사랑) / 요 19:28-30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우리말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땅속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보다 자식이 죽은 것이 가슴아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불효 중에 불효가 부모님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귀 암으로 17년 동안이나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귀 암은 암 덩어리가 바깥으로 돌출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도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 지켜보는데 자식이 아닌 부모님이지만 정말 보는 사람이 어떻게 해 드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한가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저 아프지나 말고 하나님 편히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지난주에 저희 어머님 장례식 중에 와서 예배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감사헌금을 하니까 저희 집사람이 “그것은 좀 이상한데…”라고 했습니다.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제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말기 암 환자는 마지막에 너무나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것을 저는 몇 번 보았습니다. 그래서 “고통 없이 하나님 데려가 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들어주셨으니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실 때는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그곳을 지나다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별의 아픔과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님의 임종을 지켜보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우리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스스로 죽이셨으니 그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도 우셨습니다. 눅 23:44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이 어두움이 임하여”라고 했습니다. 마 27:51에는 땅이 진동했습니다. 하늘이 울고 땅이 운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울음소리였습니다. 이 모진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원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본문은 “이 후에”라는 접속어를 사용하면서 얼마의 시간이 경과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 시간에 공관복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를 조롱한 사건(마 27:29-44)과 한 강도의 구원받은 것(눅 23:40-43)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내용을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은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조롱소리, 한 강도의 구원받은 것 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다 이루었다”를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깊게 살펴봄으로서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기 원합니다. 여기에는 세가지 뜻이 있습니다.

1. 육체적 고난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고난받는 여러 인물이 나옵니다. 그 중에 고난의 대표를 뽑으라면 욥일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도 예수님의 고난하고는 다릅니다. 욥은 하나님께 그 믿음을 시험하려는 사단에 의해서 시작된 것입니다.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결국 욥의 나중은 고난 전 보다도 더 많은 축복으로 끝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 또한 고난을 받은 인물 중에 하나입니다. 형들의 시기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로 꿈을 해석하여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과 출애굽하여 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로 그의 기력이 떨어지지 아니한 상태에서 죽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고난이나 죽음이 인류를 구원해 내기 위한 고난과 죽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 마지막을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육체적으로 받는 고난은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2.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율법을 위반하며 심지어는 율법을 폐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 5: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으면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십자가가 필요 없어도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안식교나 유대교를 이단시합니까? 그분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율법에 매이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는다면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만으로는 안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우선 순위를 정해두는 것이 연구 과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율법 중에 먼저 지켜야 할 것과 나중에 지켜야 할 것을 구분해 놓지 않으면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마 22:36)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묻습니다. “크니이까?”는 “어느 것을 먼저 지켜야 합니까?”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제일 된 계명은 실천적으로 말한다면 부모의 장례였습니다. 시체는 부정한 것이고 장례는 모든 순위 중에 최고였습니다. 부모의 장례을 위해서는 율법을 강론하다가도 가야되고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다가도 가야합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장례가 최우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렇지 않았습니다.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1-22)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유대인에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최고의 계명 즉 우선 순위가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 것입니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마침이 되시는 것입니다(롬 10:4).

3. 최후 승리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공생애가운데 내내 따라다녔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려고 할 때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미 그 때 사단은 자신이 처한 입장을 알고 예수님의 사역을 처음부터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로 굶주린 예수님께 빵(음식)으로 시험합니다. 세상을 자기가 다 줄 수 있는 것으로 위장하여 자신에게 절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높은데서 뛰어내려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단은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 따라다닙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들어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조롱하며 시험합니다. 급기야는 가룟유다에게 들어가 예수님을 팔아 넘깁니다.
그러나 창세기에 예언된 대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예수님의 발꿈치 정도를 해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했습니다. 완전한 승리를 얻으신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예배드리면서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어머님의 시신을 장례식장에 모셔놓고 와서 예배드리는데 어머님의 죽음에 슬픈 것이 아니라 “사단에게 질질 끌려 다니면서 다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일 예배도 제대로 성수하지 못한다면 어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까? 부모의 장례 우리가 치르지 않는다면 죽은 자들이 치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별다른 일도 없는데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떡합니까?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 부끄럽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단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패배한 삶을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마지막에 “영혼이 돌아가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원문으로 ‘파라디도미’인데 이 뜻은 ‘넘겨주다, 내 맡기다’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가상칠언중에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입니다. 이것은 서로 같은 뜻입니다. 다만 본문에서 “돌아가시니라”고 번역했을 뿐입니다. 본문도 누가복음처럼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로 번역해도 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지난 토요일에 돌아가셨는데 저희 집사람하고 어머님 손을 꼭 붙잡고 “하나님 아버지 부족한 종의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편안히 모셔주세요. 이를 위해서 주님이 오셨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을 하고 났는데 바로 그 순간 어머님 숨이 멈추셨습니다. 한때 저희 어머님이 죽음에 대해서 두려우신 것 같았습니다. 검은 그림자가 보이면 당신을 데리러 누가 왔나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가 있으셨습니다. 제가 그 때 “엄마! 엄마는 하얀 천사가 와서 모셔가기 때문에 절대 겁내실 것이 없어!”라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혼은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멘.

요한과 베티는 이제 갓 태어난 아들과 네 살 된 딸을 데리고 깊은 산골에서 농장을 하며 살고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남편 요한은 읍내로 장을 보러 떠난 뒤 베티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장작더미로 같습니다. 그 때 장작더미 속에 있던 독사가 뛰어 나오면서 베티의 다리를 물었습니다. 베티는 순간 장작을 들어 뱀을 내리쳐 뱀은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린 다리는 부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곳에 집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장에서 돌아오려면 최소한 1주일은 걸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베티는 부엌으로가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어린 아들과 네 살 된 딸을 돌봐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베티는 1주일이상 아들과 딸이 먹을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먹을 것을 만들면서 네 살 된 딸에게 말합니다.
“너도 이제 네 살이 되었으니까 네 동생을 잘 돌봐 주어야 한다. 엄마가 먹을 것을 만들어 놓고 엄마는 오랫동안 잠을 자야하니까 동생하고 엄마가 만들어 놓은 것을 먹으면서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해!”
그녀는 온 몸에서 땀이 비오듯하면서 손가락에 힘이 하나도 없어져 갔지만 음식을 만들어 놓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계속 음식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죽어야 될 시간이 지났는데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베티는 “네가 살아있다니…” 몇 시간동안 음식을 만들면서 땀을 흘려 독이 혈관을 통해서 빠져 나왔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녀를 살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살립니다. 아멘.
미국에 사는 이사벨이라는 부인은 해산을 하다가 갑자기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는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그 부인은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많은 재산을 허비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병 치료를 포기하고, 나머지 돈으로 당시 한국 동란 중에 고생하는 전쟁 고아를 위하여 보내 주었습니다.
그것을 기금으로 해서 부산에 고아원이 생겼는데. 후일 그 고아원은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사벨 부인은 그 후로 1년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 모인 가족과 친지들은 이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치료비를 한국에 보내서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놀랐습니다.
부인의 최후의 치료비에 의해서 세워진 그 학교가 창립된 지 2주년이 되던 날, 그의 남편인 데이비드 씨가 초청을 받고 창립 기념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아내가 치료비를 모아서 보내 세워진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그는 매우 감격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 학교의 교사가 건축 중에 재정이 부족하여 곤란을 당한다는 사정을 들을 데이비드씨는 미국에 있는 자기의 집과 재산을 저당 잡혀서 약 6만 불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오늘날 4,500여 명의 학생들이 교육받고 있는 부산의 이사벨 여자중고등학교입니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보다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 속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다시보는 주기도문(우루과이의 한 작은 성당벽에 주기도문이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루마니아 감옥에서 있었던 일
리챠드 범브랜드 목사가 약 30명의 크리스챤들과 함께 루마니아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감옥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감옥 속으로 밀쳐 던져졌는데, 침침한 감방 속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가 알아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갔다. 감방 속의 모든 크리스챤들은 곧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던 비밀경찰의 대위였다.
그가 왜 감옥에 들어 왔는지 너무나 의아해 하는 크리스챤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에, 열 두 살 된 소년이 자기를 면회 왔다고 하여 사무실로 들여보내라고 했다. 수줍어하며 자기의 사무실에 들어오는 소년의 품에는 아름다운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져 있었다. 소년은 입을 열어서 말을 했다.
‘대위님, 당신이 우리 엄마와 아빠를 체포해 가신 분이에요. 오늘은 우리 엄마의 생일이에요. 나는 엄마의 생일이면 꼭 꽃다발을 사서 엄마에게 선물하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려 왔어요. 그런데 금년에는 당신이 우리 부모님을 체포해 갔기 때문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꽃을 선물할 수 없게 되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크리스챤이기 때문에 나에게 늘 가르쳐 주시기를,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나에게는 지금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이 꽃으로 대위님의 애기들의 어머니를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어서 가지고 왔어요. 이 꽃다발을 대위님 부인에게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대위는 그 소년의 꽃다발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소년을 부둥켜안고 눈물로 울었다고 했다. 그 후로 그의 마음에는 양심의 가책과 회개가 왔고 남은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바람개비에 붙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어느날 유명한 챨스 스필젼 목사님이 농촌을 방문하는 중에 어떤 농장 건물 꼭대기에 세워 놓은 바람개비가 있어서 보았더니 그 뱅뱅 돌아가는 바람개비의 꼬리에다

예루살렘 입성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7. 예루살렘 입성) / 요 12:12-16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것인줄 생각났더라”

예수님이 예루살렘 올라가시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난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황금마차를 타시든지 아니면 적어도 군마 정도는 타셔야 어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나라의 대통령도 그 나라에서 제일 좋은 차를 탑니다. 만일 대통령이 티코(소형자동차)를 타고 나타나셨다면 사람들이 과연 대통령으로 인정을 하겠습니까? 반대로 대통령 부인이 값싼 가짜 다이아몬드 반지를 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진짜라고 믿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는데 그것도 어린 새끼나귀입니다. 예수님의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시는지 모르지만 어린 나귀는 고생 좀 했을 겁니다. 지금 미국에 있는 김능수 전도사님이 제주도에 신혼여행 갔다가 조랑말을 탔는데 그분이 좀 덩치가 있거든요. 조랑말이 다리를 후들후들 떨어서 불쌍해서 얼른 내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세상의 다른 왕들과는 달랐습니다. 겸손의 모습으로 오신 왕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왕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도 예루살렘으로 가신 주님을 따라가는 신앙이 되십시다(마 16:24).

예루살렘에 가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지금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어린 시절에 대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한번 언급되는데 바로 12살 때 예루살렘에 갔다가 어머니 마리아를 잊어버린 사건입니다. 눅 2:41-50에 나옵니다. 유월절을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어머니 마리아는 얼마나 많은 사람가운데 섞여 있었는지 예수님이 함께 가지 않는 것을 몰랐습니다. 친족 중에 끼어있는지 알았습니다.
본문에 “명절에 온 큰 무리가”라고 나옵니다. 역사가들은 이 당시 예루살렘에 모이는 사람들의 수가 270만 명 정도로 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서로 잃어버리는 일이 많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동행하지 않는 것을 모르고 간 길이 하룻길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금은 무심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또한 예수님이 어려서 여러 사람들에게 붙임성이 있어 잘 지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선생들과 묻기도 하며 성경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혼자 보낸 날이 4일입니다. 한마디로 4일 동안 성전에서 성경공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성인이 되면 누구나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냅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12살 때부터 매년 예루살렘에 가셨을 것입니다.
공생애 사역초기에도 예루살렘에 다녀오셨습니다. 그 때 하신 일은 성전정화였습니다. 대략 20여 번은 예루살렘성전을 찾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많이 예루살렘에 가셨었는데 지금 예루살렘 가시는 것 자체가 새로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에 가셨던 것하고는 두 가지의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1. 사람들의 관점에서
예수님이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중입니다. 베다니에 들른 것은 이곳에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계시는 이곳에 몰려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만 보려고 모여든 것이 아니라 살아난 나사로도 보려고 온 것입니다(요 12:9). 나사로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의 인기는 기적과 이적을 베푸신 고로 이미 유대지방 전체에 퍼져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공생애기간이 3년이었는데 사역초기에 올라가셨고 한번은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여든 군중들이 이왕 예루살렘에 왔는데 예수님도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시는 모습을 보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마 21:7-8, 막 11:7-8, 눅 19:36)에 보면 더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장면에 나옵니다. 그러나 요한은 본문과 같이 요약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오늘 본문 말씀을 누구의 입장을 더 따르겠다는 것입니까? 요한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공관복음에서 전한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요한은 이 사실을 크게 장황하게 펼쳐놓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군중들의 외침은 고난을 향해 가는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이 순간만큼은 군중들과 함께 흥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것은 아닌가? 아주 이번 기회에 밀어붙여서 예수님을 왕위에 앉혀놓고 자신들은 평소에 꿈꾸어 왔던 대로 영의정, 우의정이 되어 치리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군중들이 비록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찬송은 했지만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선민사상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의 왕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요한이 또 한가지 이 사실에 대해서 축소해서 전하는 것은 바로 이 군중이 일주일만 있으면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빌라도의 재판장에서 소리지른 장본인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손바닥 뒤집듯이 말이 바뀌는 이 사람들의 소리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한의 입장에서는 그 이후에 전개될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에 대한 사건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모릅니다. 십자가를 지시러 올라가시는 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사람들 앞에서 멋있게 보이고 화려하게 보이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진실한 구원이 무엇인지 아직 모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 곧 십자가를 지시는 문제를 알고 계십니다. 이제 그 때가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찾으신 예루살렘입니다.
제가 동남아 여행을 패케지 상품으로 두 번 다녀왔습니다. 제돈 들여서 간 것이 아니라 어떤 회사에서 다녀오라고 해서 갔던 것입니다. 이때 다른 팀에서 오신 나이든 어르신들이 계신데 어디를 가면 그렇게 눈여겨보시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언젠가 또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나이든 어르신들은 그렇게 눈여겨보실 수가 없어요. 언제 이곳에 오나 싶어서 그러신 것입니다. 다시 못 오실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지나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이제 사랑하는 제자들과 수많은 병자들과 눈물 흘리며 죄악에 고통스러워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성도 헐릴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쓸쓸한 가을저녁 같습니다.
그러나 이모든 무거운 짐을 벗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때가 되어 이 예루살렘을 찾으신 것입니다. 단순히 부르짖는 군중들의 목소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호산나 찬송하지만 얼마 있으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를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3일 길을 갑니다. 3일이면 흔히 사람 마음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아브라함이 칼을 빼 들고 이삭을 치려하는 것을 보시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3일 길을 가는 동안 변하지 않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삭의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 아브라함만 알고 있었고 자신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떠나는 길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물론 이삭은 아브라함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왜 하필 나이었냐고 아버지에게 대들지 않았습니다.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롬 9:7)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가는 길은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비록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만 지금은 그들의 입에서 찬양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왕에게 뿌렸던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흔들며 환호했습니다. 이때 시끄럽게 한다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제자들을 좀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눅 19:40절에 나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 자체가 예수님이 임의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시는 것입니다. 15절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공관복음에서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마 21:1-3, 막 11:1-3, 눅 19:30)
마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구약성경 스가랴 9: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를 인용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해당된 말씀인지 제자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을 때는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 16절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것인줄 생각났더라”

지금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 뿐이셨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지옥의 고통을 당해야 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나귀를 타신 예수님에 대해서조차도 이와 같이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처음 하실 때부터도 이미 당신의 십자가를 염두 해 두신 말씀이십니다. 공생애 초기에도 이미 마태복음 10장에서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시면서 마 10:38절에서는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별 의미 없이 받아들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 십자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왜 예수님이 흉악한 죄인들이 죽어야 하는 십자가형을 말씀할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저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후 공개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적대자들이 있는 예루살렘에 스스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밀히 일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신앙고백을 받았을 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막 8:27-30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 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여짜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②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을 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눅 8:54-56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③ 예수님의 형제들이 비밀히 행동하시는 주님을 비난했습니다.
요 7:1-5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 함이어라”
④ 예수님은 유대지방에서 가능한 은밀히 활동했습니다.
요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은밀히 하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는 공개적입니다. 한마디로 죽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숨길 것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훈련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 21:15-16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눅 19: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눅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했습니다.
눅 20: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이 가르친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은 재판석에 말씀하시기를
요 18:20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도둑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할머니랍니다. 할머니는 도둑이 생각할 때 별 것 아닌 것 훔쳐가는 데 “야 이놈이 차라리 날 죽이고 가져가라”하면서 소리지르면 대책이 없답니다. 스스로 십자가를 선택하시는 예수님을 말릴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는 것입니다.

달리는 기차의 한 창문 쪽 좌석에 어떤 젊은이가 매우 초조하게 앉아있었습니다. 특히 사람이 지나갈 때는 몸을 움츠리며 안절부절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노신사가 이를 보고 넌지시 말을 건넸습니다.
“이봐 젊은이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나?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겠네.”
고개를 푹 숙인 젊은이는 경계의 눈빛을 띠고 노인을 처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노인의 따뜻한 눈길에 마음이 놓였는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파 회사에서 작은 횡령을 했는데 그것을 안 사장이 다른 회사의 기밀 품을 빼내 오는 것에 동행을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가담을 했는데 그만 들켜서 경비를 사장이 죽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교묘하게 자신에게 죄를 다 뒤집어 씌여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자가 되어 도망을 다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노신사는 언제까지 이렇게 다닐 수는 없으니 자수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법정은 겁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신사는 지금 나에게 한 것처럼 법정에서도 말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청년은 노신사의 말대로 자수했습니다. 변호사를 살 돈도 없지만 노신사가 말한 대로 진실만을 고백하겠다고 생각하고 법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소란스런 법정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기차 안에서 고백했던 노신사가 앉아있는 것입니다. 이제 진실을 말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6.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 마 16:21-23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미국의 유명한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통증에 관한 연구를 했습니다. 통증을 느낄 때 그 통증을 약하게 하기 위해서 아스피린을 먹습니다. 그런데 통증을 느낄 때 자기의 과거 추억 중에서 좋은 것을 생각하면 아스피린이 미치는 영향보다도 더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발표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은 아스피린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심지어 마약보다도 더 강력하게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대개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에 대한 생각을 했고, 실패한 사람은 실패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클린턴 부부 이야기입니다. 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가 주유소에 갔다가 우연히 힐러리 여사의 옛 남자친구를 만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클린턴이 부인에 물었습니다. “당신이 저 남자와 결혼했으면 지금 주유소 사장 부인이 돼 있겠지?” 그러자 힐러리가 되받았습니다. “아니 바로 저 남자가 미국 대통령이 되어 있을 거야.”
생각이 여러분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면에서는 환경보다도 내가 생각하는, 내 마음과 내 생각이 크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도 바뀝니다. 그리고 운명도 바뀝니다. 여러분! 인생을 새롭게 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생각부터 올바르게 하시기 바랍니다. 생각부터 새로운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 생각 중에 제일 되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은 베드로
“이 때로부터”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사람들이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3-16절)라고 고백한 때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분위기를 보아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지금이 고난에 대해서 말할 때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고백으로 제자들의 신앙이 이 말씀을 받을 만 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곡하게 만류했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이 대답으로 인해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엄청난 충격적인 책망을 듣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단이 틈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시험이 옵니다. 인본주의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영과 육이 함께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육체를 위한 일과 영을 위한 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육체를 위해서 일하는 것인지, 아니면 영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육체를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영을 생각하지 않고 육체만을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6:20-27절에 보면 예수님의 비유에 거지 나사로가 있습니다. 부잣집 대문 앞에서 구걸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지나가던 개가 거적데기를 핥고, 한마디로 노숙자처럼 생활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그러나 부잣집 주인은 지옥에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로 사는 사람은 모두가 잘못되었고 반대로 모두 노숙자로 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극단적인 비유를 들으셨습니까? 그만큼 육체보다는 영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육체는 100년을 못삽니다. 하지만 영은 영원히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하셨습니다. 즉 육이 영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이 육을 살리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우리에게는 육과 영은 동시에 존재하지만 영에 비해서 육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가 살아가는데 모든 것이 영 중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해서 하루에 밥 세끼를 먹어야 한다면 영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면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하나,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헛수고가 아닌가? 등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면 고통스럽고, 또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이 정말 안타까워서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정말 마음이 좋은 분입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 옆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려고 하던 꿈을 버려야 합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슬피 웁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울음소리를 잘 들어보면 모두가 자기 한탄에서 운다고 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라고…’하면서 운답니다. 남편의 죽어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갈 것이 한심스러워서 운다고 합니다. 결혼이 진짜 무엇인지 아십니까? 결, 결론적으로 혼, 혼자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만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들의 영을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는데 출애굽기 16:26-27에 보면 모세가 안식일에는 주시지 않기 때문에 나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27절 “제 7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을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안나오고 공부하면 잘할 것 같아요. 여러분! 해 봐서 알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일만 한다고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무엇이 내 삶에 우선 순위인지 분명히 정해 두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하나님의 일이 보입니다.
본문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방법을 설명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십자가는 지고 있는데 자기 이름으로 지고있는 분이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그렇습니다. 내가 했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를 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내가” 빠져야 합니다. 내가 있으면 자기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대신에 누가 들어가야 합니까? “주님”입니다. 지금 이영제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설교를 하는 것입니까? 이영제 목사가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육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을 보시는 분들은 주님이 하시는 것을 보십니다. 아멘.
베드로는 아직까지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자기의 욕심이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 아는 분이 전화가 왔습니다. 어느 곳에 장로님이 한 분 계신데 지금 교회를 쉬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이분이 하시는 말은 자기는 평신도가 와서 교회를 가자고 하면 안가고 꼭 목사가 와서 교회를 가자고 하면 혹시 갈지 모른다고 저에게 가서 전도해 가지고 모시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전화한 것입니다.
잠시 기도하면서 생각한 것은 장로님도 시험에 드실 수는 있습니다. 베드로도 시험에 들었고 사단이 들어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려고 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 제가 모셔 올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모셔다 놓고 그분 대접하느라 상당히 바쁘지 않을까 생각해서 감당이 안될 것 같아 원래 다니시던 교회, 장로로 피택하신 교회가 있을 것이니 그곳으로 다니시는 것이 좋겠다 싶어 그곳 교회로 안내하라고 했습니다. 지난 한번은 또 교회가 어느 교단이냐고 물으시는 장로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해는 됩니다. 신학과 신앙이 같은 곳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래저래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전주안디옥교회 이동휘 목사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합니다. “성도는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아멘.

훗날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만을 생각했습니다.
육체만을 생각하다 한 때 예수님의 엄청난 책망을 들었던 베드로는 훗날 영혼의 귀중함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깨닫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아멘.
베드로와 같이 변화되는 주앙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 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는데 특별히 제한을 두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 하고 싶다고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목사가 구약시대의 제사장하고는 물론 차이가 있지만 구약 시대의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을 감당했었고 지금의 목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집행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지파 사람이어야 하지만 그 중에서 육체적으로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레위기 21:16-23절까지 제사장 될 수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저는 특별히 19절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라고 나옵니다. 제가 왜? 특별히 이 구절에서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제가 손 부러졌거든요. 구약성경에서 손이라고 하는 것은 팔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팔이 부러져 군대 현역을 못 가고 방위를 받았습니다. 총 쏘고, 훈련받는데 별로 지장은 없는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 아니면 살맛이 없는 세상이 될 뻔했습니다. 군대도 현역으로는 오지 말라지요, 구약시대에는 제사장도 못되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수 있는 자격도 없지요.
그러나 로마서 10:12-13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사우나 이발소에 머리를 깍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아저씨는 갈 때마다 당신이 한 때 청와대에서 머리를 깍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나 청와대에서 머리깍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아멘.
우리 주앙교회는 개척한지 얼마 안되어 작아서 성가대도 없고, 아직까지 각 부서도 없고 해서 오히려 봉사할 수 있는 기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없는 것이 많기 때문에 또한 할 일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맡겨진 직분과 사명 열심히 감당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