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라오려거든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3. 나를 따라오려거든) / 눅 14:25-33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를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사면장 마저 거부해버렸다
미국 서부개척 당시 텍사스 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무법천지인 그 때에는 총을 난사하는 등 많은 살인이 저질러져서,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 제정,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에 덕망 있고, 선량하고, 이웃으로부터 존경받는 아주 온순한 한 청년이 술집에서 실수로 살인을 했습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제 집행날짜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온 동리 사람들은 그의 사람됨됨이를 익히 아는지라,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 해서 구명 운동에 나섰습니다. 모두가 서명을 하고 탄원한 끝에, 드디어 특별사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지사는 사면장을 들고 감방에 있는 청년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이미 그 전의 온순한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못되고 포악해졌는지, 주지사를 향해서 폭언을 하고 거칠고 난폭한 행복을 했습니다. 뉘우치는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주지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게다가 청년은 사면장 마저 거부해버렸습니다. 자기를 구하려는 동리사람들의 은혜를 저버린 채, 그는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끝까지 가보아야 합니다. 끝이 좋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예수님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현세적 축복을 갈망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러한 기적을 또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사이에는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위에 등극하실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현세적 축복을 갈구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무리들과 같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의 본문을 선택하면서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것인데, ‘복음’이라는 것은 기쁜 것인데 제 설교가 지나치게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는 무거운 설교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기억합시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결코 무거운 멍에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살아갈 때 신앙생활은 더 힘든 것입니다. 주님은 현세적 문제만을 보고 따라오는 무리들에게 “돌이키사 이르시되”(25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잘 따라가고 있는 중인데 예수님은 “돌이키사”라고 했습니다. 진행을 정지시키시고 제동을 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왜 따라오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따라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따라오기를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심정을 두 비유로서 표현하셨습니다.

1.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를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집을 짓는데 집을 다 짓도록 그 비용을 계산을 하지 않고 짓다가 기초만 짓고 집을 완성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비웃음거리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에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시작은 용처럼 거창하지만 나중은 뱀처럼 별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비슷한 것입니다.
요즘 사이버 세상에서는 더 이런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제가 잘 사용하는 표현 중에 집은 짓다말면 보이는 것이라도 있는데 소프트웨어(프로그램)는 하다말면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지식 정보사회로 불리는 요즈음은 보이는 사회(하드웨어)보다 그런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있는데 엄청난 프로젝트입니다. 문제는 이 일을 하다말면 그야말로 안한 것 보다 못합니다. 그래서 잘 할 수 있는지, 끝까지 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느라고 요즘 잠을 못 잡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잘 판단해야 합니다. 끝까지 잘 할 수 있는 일만 시작하려고 기도합니다.

2.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위의 집을 짓는 비유보다 더 강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에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판단을 잘못하면 다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더 심각한 것입니다. 나는 1만 명의 군사이고, 적군은 2만 명의 군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빨리 화친을 청해서 무고한 군사를 죽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승산이 없는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비유의 목적은 ‘바른 판단’에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단순히 적이 많기 때문에 항복하라든가 아니면 적과의 싸움이 선과 악의 타협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요지는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바른 판단을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라”(되지도 않을 일은 처음부터 뜻하지도 말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따라오다가 그만두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끝까지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을 끝까지 보고 잘 판단해서 마라톤과 같이 골인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따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1. 자기 생명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합니다.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미워하지” misei’(미세이)는 문자적인 의미에서 심리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잘못이해하면 큰일납니다. 만일 그렇게 잘못이해하면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하면서 비관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내 생명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럼 “미워하지”(미세이)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부모를 제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좀 성장하면 친구를 제일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애인이 생기면 애인을 제일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면 남편을 아내를 자식들을 제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자신의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무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려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뜻을 따르려 하는 것인지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따르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도 우리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주님 앞에 나왔다면 똑같은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사랑을 정의할 때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합니다. 바로 바울 자신이 그렇게 살아간 사람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인이면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내가 져야할 것이라면 져야합니다. 우리사회가 일을 잘못 처리하여 막대한 손해를 입히면서도 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피하면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지고”에 해당하는 ‘bastavzw(바스타조)는 요 19:17에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주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참다, 운반하다”라는 뜻과 함께 동시에 “영접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지난번 우연히 TV을 보다가 좋은 영화하나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중간에 보아서 정확한 뜻은 잘 파악을 못했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은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바다가운데 있는 작은 원주민 마을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때로는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 죽을뻔 한일도 있었고, 처음에는 부족 사람들이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를 감동시킨 것은 나중에 선교본부에 사람이 나와서 이 사람이 한일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본부에서 이 사람을 부릅니다. 순종하고 돌아가는 데 잘 아는 다른 가까운 책임 있는 원주민에게 본부에서 ‘유골함’을 준비해서 주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 선교사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그 뼈를 이곳에 담아서 본부에 보내달라고 부탁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3. 자기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합니다.
33절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시점에서 듣는 무리들은 ‘잘못 따라 왔나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무 곳에서나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제자가 되려면…”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제자 되려면 들어야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2제자를 놓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무리들 앞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은 특별히 제자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전할 수 있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지 않는 분들이 제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바로 ‘헌금’입니다. ‘헌금’ 때문에 못나오는 분들 많습니다. 물론 교회가 ‘헌금’을 강조해서 믿음이 없는 분들을 좇아내는 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히 ‘헌금’을 강조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다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소유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남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임한 것이라고 믿고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와 같이”는 두 비유에 대한 결론입니다. 두 비유는 바른 판단을 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기를 바라는 비유입니다. 비유에 대한 결론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바르위크 마을에 사는 한 씩씩한 소년이 은행 창구에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 은행에 돈을 저축했으면 하는데요.”
그 말을 들은 은행 직원은 소년이 마을의 감리교 교회에 나가는 신앙 좋은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 좋은 일이구나. 존, 얼마나 저축하려고 하지?” “4달러예요.”
“그럼 통장은 네 이름으로 만들어 줄까?”
“아니 예요, 아저씨, ‘존 예이츠와 그의 친구’라고 해주세요. “소년의 말에 은행 직원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존의 친구가 누구지?” 소년이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에요, 저는 오늘 아침 첫 월급을 탔어요. 그래서 십일조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었어요. 이제 이 4달러는 하나님의 것이에요.
저는 단지 이 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뿐이에요.”

결론적으로 위의 세 가지는 모두 같은 뜻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나누어야 합니다.

▣ 소 대신 내가 밭을 갑니다
평안도에 가서 선교하던 미국 선교사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어떤 시골에 갔더니 웬 사람이 밭을 가는데, 소 멍에를 아버지가 메고 앞에서 끌면 아들이 뒤에서 그것을 잡고 밭을 갑니다. 하도 이상해서 가까이 가보니까 마침 아는 장로님입니다. “장로님, 어찌해서 이렇게 소가 메는 멍에를 메고 밭을 갑니까?” “예, 예배당 짓는데 소를 팔아 바쳤거든요. 그래서 소 대신 내가 밭을 갑니다.” 장로님의 그 얼굴빛은 여전히 밝고 감사와 찬송이 넘치더랍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것 같아도 그분만이 가지는 기쁨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 목회 철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큰 사람 만드는 것입니다.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
자신의 소유욕이 지나쳐 사적으로 남용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큰 사람 될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따라가는 사람 이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장애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2. 예수님과 장애인) / 요 9:1-7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미국의 한 보험회사가 100명의 젊은이가 65세에 이르렀을 때 어떤 형편에 놓이게 되는지에 대해 조사하였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1. 이미 죽은 사람(36명)
2. 가난하게 살며 가족, 친구 또는 정부의 원조를 받고 사는 사람(54명)
3. 일을 그대로 하고 있는 사람(5명)
4. 남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4명)
5. 성공적 삶을 살고 있는 사람(1명)
모두 성공지향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성공의 문은 100대 1의 좁은 문이었습니다.
이 통계는 성공으로만 보자면 100:1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미국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54명의 절반이 넘는 사람이 정부의 원조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애인 그러면 선천적 장애인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장애인 가운데 선천적 장애인으로 진단되는 사람은 장애인 전부 가운데 6%-10%에 불과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6%-10% 범주 안에 장애인들이 있어요. 이게 선천적 장애인지 후천적 장애인지 그 진단이 불가능한 확률이 10%정도라고 합니다. 나머지 80%는 다 후천적 장애인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는 인구의 10%이상은 장애인이란 것을 아십니까? 우리나라 인구가 5000만이라면 우리 나라에 장애인이 얼마나 될까요? 500만이 장애인이라는 통계입니다.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장애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저는 장애인 문제를 함께 나누기 앞서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라는 사실입니다. 장애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이 장애인의 운명을 살아가고 나하고는 상관없다는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교통사고로 인해 해마다 4만여 명이 넘는 사람이 장애를 입고, 산업재해로 3만 여명, 각종 질병 및 의료사고로 인해 3만 여명, 그리고 기능 장애를 수반한 기형아 출산율이 2.7%로 매년 2만여 명이 넘는 기형아가 출산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각종 대형 참사로 인한 장애발생이 더해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렇게 더해지는 장애인은 매년 10만 여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군대의 1개 사단병력이 1-2만 명으로 이루어집니다. 적어도 1년에 5개 사단에 해당하는 인원이 정상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체적 장애인만을 장애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정신적 장애가 더 문제입니다. UN장애인 권리 선언에 보니까 장애인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장애인이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신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원인으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홀로 서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선천적 원인이든 후천적 원인이든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삶을 유지하기 어려운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이미 우리 가족 중에 장애가 있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곧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장애를 함께 극복해 가지 않으면 우리의 삶을 올바로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장애를 극복하려면

1. 장애는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본문 2절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이면 누구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이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죄가 없이는 장애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출 20:5, 민 14:18, 례 16:15). 바로 이 죄의 결과로 장애가 생겼다는 편견 때문에 장애인을 소홀히 대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욥의 경우를 보면 자신의 죄 때문에 병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세 친구들은 죄에 대한 보응이라고 강변했습니다.
신약에 바울의 경우는 하나님이 자고 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눈에 질병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세 번 기도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응답은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장애가 죄의 결과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본문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장애인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더 교만해 질 것입니다. 장애인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아울러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분들에게 빗진 자라는 것입니다.

2.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제자들을 가르치신 시간들을 뺀다면 거의 모든 시간이 어떻게 활용하셨는지 아십니까? 한마디로 장애인과 함께 보내신 것입니다. 장애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태 세리의 집에서 식사할 때, 바리새인들이 보고 너희 선생이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이 소리를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막 2:17, 눅 5:31)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병든자와 함께 지내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장애인들을 위해서 오셨다면 우리 역시 그분들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먼저 장애인에게 붙여진 그 타이틀, 그 편견의 타이틀을 우리가 먼저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깊은 편견은 먼저 언어 자체에 대한 여과 없는 전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빨리 버려야 할 언어들 가운데 병신 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저도 팔이 부러져 초등학교 때는 한 팔을 기부스하고 다시 내리면 다른 팔이 또 부러져 기부스하고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기부스를 너무 많이 하다보니 늘 친구들로부터 ‘팔 병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지냈습니다. 심지어 한국 문화재 가운데는 병신춤이라는 문화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뿌리깊은 문화적 편견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번역학자들은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이 성경을 다시 번역한다면 성경의 언어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소경이란 말 대신에 어떤 말을 써야 합니까?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 장애인이 어색하기 때문에 새 번역 성경에는 ‘눈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성경이 바로 번역되어 새롭게 나왔는데 우리가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보는 성경은 ‘개역한글성경’으로 1962년 판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와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한 본문이 마태복음 11:5절입니다. 이 본문을 ‘개역한글성경(1962)’과 ‘표준새벅역’(1993)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개역한글성경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표준새번역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저 또한 병신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저도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남을 향해 돌 던진 한번 있습니다. 제가 살던 마석에, 지금은 성생농장에서 성생가구단지로 바뀌었는데 예전에 이곳에 나환자촌입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하고 이 곳을 지나다가 나환자촌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문둥병자라며 돌을 집어던지고 도망간 일이 있습니다. 그 때는 그분들이 무서웠습니다. 또 시골에서 소문이 어린아이 간을 빼먹으면 그 환자들이 낫기 때문에 어린이간을 빼먹는다는 헛소문까지 들었던 터라 필사적으로 돌을 던지며 도망간 일이 있습니다.

3. 장애에 대한 모세 오경의 오해
우리는 모세 오경의 창세기를 제외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보면 상처가 난 환자, 나환자 등을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구약의 사상에서 유대인은 장애에 대한 편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기록할 때 왜 그러한 기록이 필요했는가 라는 상황을 철저하게 면밀하게 연구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 당시의 이런 상황이 특별히 200만 명에 가까운 수많은 집단이 집단으로 광야에서 이동하고 있었던 상황 속에서 이 교훈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먼저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환자를 지속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거할 목적이지 사실은 그 사람 자신을 제거할 목적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군집된 공동생활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 그것이 어떤 전염병으로 발전할 우려 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일시적으로 격리하는 어떤 제도를 만든 것이지 사람 자체를 제거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에 보호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서 이런 명령들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레위기 19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19:9절부터 읽겠습니다. 레위기 19장9절 이하의 말씀은 광야 생활과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종의 사회정의의 규례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가나한 자들에 관해서 연약한 자들에 관해서 장애인들에 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접근해야 하겠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주목할 만한 말씀들입니다. 9절 이하를 보시면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추수를 할 때 반드시 넉넉하도록 추수의 이삭들을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기 위해서 항상 그것을 남겨두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에도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 하나님이 얼마나 가난한 사람, 또 나그네, 외국인은 자연히 편견 속에서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애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나그네, 장애인 이런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매우 균형 있게 연구하던 성경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의 이런 사람들에 관해 편애를 갖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슴이고 심정이예요. 11절 이하에서는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 다음에 정말 함께 주목하고 싶은 말씀은 사실은 14절입니다. 레위기 19:14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우리가 장애인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구약성경 안에서도 이미 밝혀놓았다는 말씀을 우리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였던 격리의 일시적인 현상은 그 죄를 초래하는 원인을 격리시키려는 하나님의 마음이지 사람 그 자체를 격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장애인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을 넘어서야 됩니다.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편견을 넘어설 때 우리는 좀 더 자유롭게 당당하게 장애인 이웃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4. 예수님처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가끔 안타까운 뉴스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려고 할 때 그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 학생이 한 학교나 반에서 공부하려고 할 때 부모님들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자기 집 값 떨어진다고 반대하고 아이들 교육에 방해받는다고 생각해서 대모 하는 분들 정말 사람도 아닙니다.
제가 한번은 약간 말이 불편한 자매와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서로 말을 하는데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예요. 그 자매는 말을 하려면 몸을 약간 비틀면서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말을 했거든요. 그 사람들이 왜 쳐다보는지 아십니까? 이런 장면을 많이 보지 않아서 그럽니다. 처음에 외국인들이 거리를 지나다니면 사람들이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쳐다보지 않습니다.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대하고 함께하다보면 익숙해집니다.
어떤 장애인 문제 연구소를 보니까 장애인들이 제일 크게 느끼는 불편이 뭐냐 하면 세 가지 제일 큰 불편 가운데 육체적인 불편은 맨 마지막이었습니다.
첫째 불편이 경제적 빈곤입니다. 장애인이 되면 동시에 경제적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돼요. 저는 정의로운 사회는 약자가 보호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의 발생은 개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상당히 사회적 책임이 큽니다. 우리 사회가 이런 산업재해를 발생시키고 그리고 교통 시설도 그렇고 그렇다면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교회도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두 번째가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소외감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된다는 소외감.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 그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중의 한 사람, 식구 중의 한 사람, 우리 지체 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 주님은 교회를 설명할 때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 부분의 지체라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 눈먼 장애가 있는 한 분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물론 이분 입장에서 보면 더 큰 선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렇게 장애가 있는 분들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장애가 있는 분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건강을 주신 것은 장애인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필요한 분들과 나누어 쓰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1.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 요 16:13-15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저는 제 발음이 정상인줄 알았는데 언젠가 부터 제 혀가 좀 짧은 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 소리는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짧은 혀도 믿지 않으시겠지만 가끔가다 잘 씹습니다. 입안의 혀도 내 마음대로 안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 주님이 아십니다. 그래서 돕는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도움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말을 배우면서 그 혀가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혀가 처음부터 짧고, 굳어진 것은 아닙니다. 습관이 굳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굳어진 혀는 펴지기가 어렵습니다. 보통 언어학자들은 7-8세가 되면 혀가 굳어지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 이민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엄마 배속에서 온 아이하고 한국에서 태어나서 들어온 아이하고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언어라는 것은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처럼 발음이 잘 안 되는 목사님 한 분이 6.25때 공산당에게 잡혔습니다. 공산당들은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그 자리에서 사형을 결정했습니다. 목사님의 차례가 되어서 공산당이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장로교 목사요”그랬습니다. 그랬는데 이 공산당은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장롱을 고치라고 했다는 겁니다. 부인이 아침에 나갈 때 혹시 장롱 고치는 목수 있으면 집으로 데려오라고 했는데 목사가 “장로교 목사요”그러니까 “장롱 고치는 목수요”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부산에 사시는 분이 한번은 저에게 “버니엘을 아십니까?”그러는 거예요. 제가 인터넷에 성경인명사전의 저자 아닙니까? 어지간한 이름은 알지요. 그런데 “버니엘”은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했더니 상당히 실망한 듯한 소리로 “목사님 버니엘’을 모르세요.” 그리고 다시 “정확히 말씀해 보세요?” 그랬더니 “브니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브니엘 해보세요.” 그랬더니 다시 “버니엘” 그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이 말 소리로 사람을 구분한 것이 나옵니다. 사사기 12장에 입다 선지자가 길르앗 사람과 함께 에브라임 사람과 싸웁니다. 그리고 패하여 도망하는 에브라임 사람을 잡기 위해서 요단 나루턱에 미리 도착하여 에브라임 사람을 잡습니다. 이 때 말을 하지 않고 가만있으면 누가 길르앗 사람인지, 에브라임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말을 시켜보는 것입니다. 삿 12:6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명이었더라”
이렇게 습관이 된 발음도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주님을 만날 때 거짓말을 시킬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이 다 아시는 것도 있지만 내가 아무리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안됩니다. 왜하면 양심이 소리를 지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1 “양심이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때에도 그렇습니다. 내 양심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잘 믿으세요. 거짓 믿음은 안됩니다. 주님이 다 아십니다.

오늘은 성령이 우리에게 내주(內主) 하시는 증거들을 8가지로 말씀드림으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자 합니다.

①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나의 사고 방식을 주님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합니다.
본문 13절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라고 하십니다.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②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합니다.
본문 14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성령은 오직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③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언제나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본문 14절 후 반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의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것을 알리십니다. 예수님의 것을 알리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알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할머님이 계셨습니다. 성경을 읽는데 인물만 골라서 읽으시는 것입니다. 성경 인명의 이름이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골라서 읽으시는 것이예요. 그래서 목사님이 할머님 성경을 모두 읽으셔야지 왜? 이름만 읽으세요. 그랬더니 할머님이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텐데 천국에 간 사람들의 이름이라도 알아 가지고 가야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독하다보면 오늘날 우리와 관계없어 보이면서, 지명이름이 너무 많이 나와 읽기 힘든 곳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부분이 여호수아 13장부터 21장까지 가나안 땅을 분배하여 12지파에게 지경을 나누어주는 장면입니다. 유다지파에게 준 곳 여호수아 15장 21-32절까지 읽으면 이렇습니다.
21 유다 자손의 지파의 남으로 에돔 경계에 접근한 성읍들은 갑스엘과 에델과 야굴과
22 기나와 디모나와 아다다와
23 게데스와 하솔과 잇난과
24 십과 델렘과 브알롯과
25 하솔 하닷다와 그리욧 헤스론 곧 하솔과
26 아맘과 세마와 몰라다와
27 하살갓다와 헤스몬과 벧벨렛과
28 하살 수알과 브엘세바와 비스요댜와
29 바알라와 이임과 에셈과
30 엘돌랏과 그실과 홀마와
31 시글락과 맛만나와 산산나와 르바옷과
32 실힘과 아인과 림몬이니 모두 이십 구 성읍이요 또 그 촌락이었으며
어때요 이해가 되시고 은혜가 됩니까? 여기서 은혜 받는 분이 있다면 대단한 것입니다. 지명들만 열거된 것 같지만 감동스러운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땅을 이제 분배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이 땅을 분배받는 각 지파의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만일 이 땅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이라면 얼마나 관심이 많겠습니까? 예를 들어
“주앙교회 성도들에게 분배해 주는 땅은 남으로 서울 경계에 접근한 성읍들은
석수, 관악, 명악과, 금정, 군포, 산본과, 부곡, 의왕을 지나 왕송저수지와 서수원까지이며 모두 이십구 성읍이요 또 그 촌락이었으며“라고 말하면 얼마나 관심이 많겠습니까? 정확하게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의 땅의 분배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의 우리 집과 땅에 대한 분배를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 생깁니다.

④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언제나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⑤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더욱 깊게 깨닫게 됩니다.
롬 5:20 “…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죄를 더욱 깊게 깨닫게 될 때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만원을 대신 값아 주었다고 생각하는 분은 많이 고맙다고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100만원 아니 더 많은 돈, 내가 도저히 값을 수 없는 돈을 값아 주었다고 생각하는 분은 더욱 감사하며 은혜가 될 것입니다.

⑥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점점더 죄악에 대해서 민감해 집니다.

⑦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⑧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최근의 북한 소식하나 전해드리겠습니다.
추운 겨울에 며칠을 걸렸는지 어렵게 탈북을 해서 중국에 도착을 한 강철(가명)과 진주(가명)는 북한에서 부모님과 살다가 중국으로 넘어온 남매입니다.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민가로 내려와 남매는 먹을 것을 청했습니다. 중국당국이 탈북자를 보호하면 벌을 주지만 같은 민족으로 모른 채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어린 남매를 모른 척 한다는 것은 곧 그들을 굶어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조선족 사회에서는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다 압니다. 그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그저 며칠을 따뜻한 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한참 후에 이들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부모도 오래 전에 탈북을 했다가 복음을 듣고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강철의 아빠는 북한에 돌아와 10일만에 열 한 명을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감격스런 첫 예배를 모여서 드렸습니다. 감시원들의 눈을 피해서 강가에 배를 띄어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강가에서 예배드리는데 군인들이 찾아왔습니다. “동무들 거동이 수상한데? 뭐하고 있었나?”그러는 것입니다. 순간 강철 아빠는 “아무 일 없습네다”그랬는데 욕을 퍼부으며 배를 수색하다가 감추어둔 성경책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 종간나 새끼들! 이거 뭐야?” 하면서 권총을 머리에 대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그 때부터 아버지는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북한에서는 성경 한 권을 소지하다 걸리면 6년형이 확정된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땡크 한대보다 성경 한 권을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그 후 어머니는 아빠가 잡혀갔으니 엄마가 전도해야 겠구나 하고는 과일을 팔러 다니며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남편과 가장 친했던 친구 분에게 한참 전도하고 있는데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알고 보니 남편친구가 스파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도 잡혀가 소식이 끊어진 것입니다.
두 남매는 따돌림을 당하여 늘 듣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안기부 공작원 새끼들!”입니다. 북한에서는 예수 믿다가 걸리면 안기부 공작원이라는 누명을 씌워 왕따를 시키는 것입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마을에서 쫓겨나 산 속에 들어가 굴을 파고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이들이 먹고 산 것은 뱀과 쥐였습니다. 강철은 “목사님 뱀을 잡을 때는 전기 줄이 최고입니다.” “그래?” “왠지 아십니까? 어떤 놈들은 대가리를 세워 덤비는 놈들이 있습니다. 이 때 전기 줄로 사정없이 내리치면 그 자리에서 뻗어버립니다. 뱀은 잡자마자 벗겨 곧바로 구워 먹으면 기가 막힙니다.” 남매는 뱀을 잡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맛있는 뱀을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나는 마을로 내려가 남의 집일을 해주고 감자를 받아온 적도 있지만 그 일거리는 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픈 어느 날 쥐를 잡기 위해서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옥수수 몇 알을 놓고 쥐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때 배고픈 쥐가 나타났습니다. 순식간에 내리쳐 쥐를 잡고 있는데 또 살이 찐 쥐가 나타나 그 쥐도 잡았습니다. 모두 세 마리를 잡아 물을 넣고 끓여 다른 반찬 없이 쥐만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쥐 잡아 먹을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 그게 먼데?” “절대 들이나 산에서 사는 쥐를 잡아먹으면 안됩니다. 등에 하얀 줄기가 있는 쥐는 출혈열 쥐입니다. 그 쥐를 먹으면 독이 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쥐 잡아 먹을 때는 집에 사는 쥐가 최고입니다.
이 아이들은 영양보충이 되지 않아 초등학생 2-3학년 정도의 상태였습니다. 진주는 지금도 다리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괴로워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들이 즐겨 부른 찬송은 45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였습니다.

강철이 언제 가장 힘들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한참을 머뭇거린 강철은 “엄마, 아빠가 잡혀가고 나서 갈 곳이 없었습네다. 그리고 먹을 것도 전혀 없었습네다. 그리고 마을에 구걸하러 다니는데 아세끼(아이)들과 아저씨들이 우리한테 ‘거지 새끼들, 안기부 공작원, 꽃제비’라고 놀릴 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한마디 더 들려주기를 “목사님, 하지만 감옥에 있는 아빠 엄마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네다. 감옥에 있는 부모님이 더 힘들지 이런 것이 뭐가 힘들겠습네까?”

배불리 먹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남조선에 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 내가 남조선에 가서 뭘 합네까? 나 같은 놈 누가 받아 주기나 한답네까? 북조선에 가서 예수님 전해야지요.”
그러다가 엄마, 아빠처럼 잡혀가면 어쩔려고“ ”그럼 잡혀가면 됩네다“
무섭지 않느냐고 했더니 “무섭긴 뭐가 무섭습네까? 일 없습네다(괜찮습니다).”
남매는 지혜롭게 토굴에서 납짝한 돌맹이를 가져다가 구들장을 만들고 아궁이도 만들고 불을 피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불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주변의 낙엽들을 모아 이불을 대신했습니다. 이들이 입고 있었던 옷은 거의 다 떨어져 이곳 저곳에 살이 삐죽삐죽 나와있었습니다.

남매의 기도제목은
1. 부모님이 하루빨리 석방될 수 있도록.
2.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3. 진주의 부어있는 몸과 질병의 치유를 위해서.
4. 남매의 꿈과 미래를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은과 금으로 자신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예수님으로 자신을 보입니다.

세상 사람은 은과 금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피 묻은 십자가로 세우려고 합니다.

 

[MIR 17기 개강] 하나님의 선교

제목 : 하나님의 선교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말튀스:순교자)이 되리라 하시니라”

1. 선교자의 자세
요즘 들어 세계선교에 대한 열의가 무척 높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계선교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기본적인 신앙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한 단순한 타 문화권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그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선교를 운운하기 전에 잠깐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면서 가족들이나 교인들과의 관계조차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코카콜라가 전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음료가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코카콜라 회사에서 내건 좋은 표어 때문이었습니다. 그 표어는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선교사는 가정과 교회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졌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다른 문화권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 비로소 그 복음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선교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최초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선지자들과 자기 아들과 자기의 성령을 보내심으로 선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들 되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를 보내십니다. 요한복음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행 8:1, 4절의 ‘흩어지다’는 헬라어 ‘디아스페이로’란 단어는 원래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뿌려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은 성장시키십니다.
마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우리 나라에서도 복음을 제일 처음 전한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우리가 언더우드, 아펜젤러만 기억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의주 땅에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등 네 분들이 로스 선교사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나게 됩니다. 압록강 하류 국경지방에 [고려문](高麗門, Korean Gate)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출입국 관리소와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 선교사들이 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 나라만 선교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일본도 중국도 다 받아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와서 조선 사람들을 찾던 중에 장사꾼으로 온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이런 분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 한국말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말만 배우고 서양 종교를 전하는 일 등은 하지 않도록 약속을 하고 함께 간 것입니다. 그러나 3년만에 본인들이 회개합니다. 믿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거기에서 이 네 분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그해가 바로 1876년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선교사가 들어온 것이 1885년이 되어서 입니다. 거기에서 한국말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이 분들이 1882년 누가복음, 요한복음, 1884년 마가, 마태복음을 번역해서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들어올 때 이 성경을 갖고 들어옵니다. 1887년에는 이 분들이 신약을 다 번역하고 압록강을 건너오게 됩니다. ‘이성하’라고 하는 분이 성경을 가지고 오다 여인숙에 투숙하였는데, 수상히 여긴 여인숙 주인에 의해 성경이 불태워 지고 압록강에 버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 성경은 들어오지 못하고 그 다음 서상륜과 백홍준이 성경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들은 성경을 모두 새끼줄로 만들어서 그것으로 짐들을 묶어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것을 모두 다리미로 펴서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 서상륜은 황해도 솔내로 들어옵니다. 솔내 마을이 58가정인데 50가정이 예수를 믿습니다.

4. 선교의 열매를 거두십니다.
시편 126:5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선교사 수
캘버리 컨텐더에 의하면, 이단종파인 몰몬교는 5만 5천명의 전임 선교사들을 가지고 있고, 여호와의 증인은 약 27만 명을 가지고 있는데, 기독교회의 선교사들은 다 합해도 단지 18만명 정도에 불과하다(워치만 미니-익스퍼지터 1997년 11월호). (캘버리 컨텐더, 1998년 1월 1일자.)
선교사 수는 미국 60,600명 / 인도 44,000명 / 영국 10,654명이며 한국이 현재 13,000여명을 파송하고 있습니다.

 

복이 있는 눈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0. 복이 있는 눈) / 눅 10:21-24

“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저는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빈혈이 좀 있습니다. 중학교 때 점심시간에 조회를 했는데 햇빛에 오래 서 있다가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청년 때는 서울역에서 헌혈하다가 얼굴이 하야케 변하고 현기증이 나서 간호사들이 놀란 적이 있어 그 이후부터 헌혈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년 전에 치과를 갈 때 겁이 나서 집사람 손잡고 갔습니다. 40넘은 사람이 부인 손잡고 치과에 오니까 의사 선생님이 여자였는데 쳐다 보시더라구요. 누구 손잡고 온 사람 있나 보니까 아이들이 엄마 손잡고 왔더라 구요. 아니나 다를 까 병원냄새 나고 속이 울렁울렁 하다가 얼굴이 하얘지고 화장실이 가고 싶더라구요.
제가 이렇게 된 데는 체질도 문제가 있겠지만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도 영향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보아서는 안될 충격적인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었을 때 저희 집 앞에 경춘선 기차가 다니는데 그 뒤쪽에 마을이 있어 사람들이 철길을 넘어 다녔습니다. 그 철길로 할아버지가 건너가시다가 기차가 오는 것을 다 피하지 못하고 한쪽 다리를 기차바퀴에 치이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까이 에서 목격한 것입니다. 발목이 다리에서 거의 잘라져 질질 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본 후로 몇 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현기증이 났습니다.
저는 지금도 영화에서 끔찍한 장면이 나오면 바로 채널을 돌립니다. 대부분 이런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살인하는 장면이라든가 남에게 상해를 입히는 장면들은 모두 봐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가 있었잖아요. 이 영화 나올 때 모방범죄나 유사사건이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실제로 모방범죄가 생겼습니다. 외국의 사례에서도 영화를 흉내내는 사건들이 많이 나옵니다. 모두가 보지 않아야 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거나 볼 수 있다고 다 보는 것은 복이 아니라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된 것 만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최고의 것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사람은
주님은 본문 21절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과 “어린 아이들”이 대조되었습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지혜와 슬기는 주님이 다른 곳에서 말씀하실 때는 좋은 것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마 7:24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막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눅 21: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그리고 마 25: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혜와 슬기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 숨겼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위에서 말한 본문의 뜻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율법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높은 학문이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만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이미 오래된 생각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지혜로운 현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위경 제4 에스라 12:35-38).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적 지식은 부족하지만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영국의 사상가 콜린스(J. A. Collins)가 어느 날 교회에 가다가 가난한 일꾼을 만나 나눈 이야기입니다. 콜린스는 ‘이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보자’라고 생각하고 대화한 것입니다.
콜리스 ‘어디를 가십니까?’
일꾼 ‘교회에 갑니다’
콜린스 ‘당신의 하나님은 크신 분입니까? 작은 분입니까?’
일꾼 웃으면서 ‘하나님께선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온 우주를 품어 주시지요. 그러나 제 가슴에 머무르실 수 있을 만큼 작은 분이시기도 합니다.’
후에 콜린스는 그 어떠한 사상집도 이 가난한 일꾼의 말이 준 감명을 따르지 못했다‘라고 술회했습니다.

아버지를 알려줘야 합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무엇이든 알려주어야 아는 것입니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독도를 ‘다케시마’이며 자기네 땅이라고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제 우리도 알려야 합니다. 알리지 않으면 지는 것입니다. 일제는 36년 동안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많은 일본말을 남겨놓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아직 까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말을 합니다.
‘삐까번쩍’ – ‘삐까삐까’로 번쩍번쩍이며 ‘쎄쎄쎄’ – ‘쎄쎄쎄’로 놀이동작을 말합니다.
‘싹쓸이’ – ‘쓰리’는 소매치기 이며 ‘아싸리’ -‘앗싸리’는 깨끗하게입니다.
‘쿠사리’ – ‘쿠사리’ 쇠사슬을 말하고 ‘몸빼’ – ‘몬뻬’ 여자 작업용 바지를 말합니다.
‘무대포’ -‘무떼뽀우’는 막무가내를 말하는 것이며 ‘요이땅’ – ‘요이땅’ 요이는 준비이며 ‘땅’은 총이 없을 때 총소리를 흉내낸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일제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우리가 모르는 것들입니다. 속히 버려야 할 말들입니다. 무엇이든 누군가가 알려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알려주신 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알려주신 것만이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신 분입니다.
본문 22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하셨습니다.
흔히 제일 알다가도 모를 사이를 부부사이로 말합니다. 그래서 부부문제는 “부부만 안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부모는 우리를 키워주면서 우리 또한 부모와 같게 교육되고 환경에 적응되어 살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부는 다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다가 만났기 때문에 많은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부부도 오래 살다보면 닮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닮지 않는 점도 있겠지요. 이것은 서로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똑같이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르면 다른 대로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는 우리가 다 모릅니다. 부부의 문제도 다 알 수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문제를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모릅니다. 주님이 알려 주셨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에게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닭장에서 병아리들이 함께 커 가는데 한 마리가 다른 닭들과 색깔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을 날아가는 독수리를 보았습니다. 당당하고 멋있게 날아가는 그 모습이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자신은 날수도 없는 닭이며 그것도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닭이 아니라 독수리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한 소년이 장난으로 독수리 알을 꺼내어 닭장에 넣었기 때문에 독수리로 자라지 못하고 닭처럼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어미 새가 길러주지 않으면, 가르쳐 주지 않았으면 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려주고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롬 10:14-15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복이 있는 눈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주님을 보고있는 제자들은 확실하게 복 받은 눈임에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보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선지자들(다니엘, 호세아, 아모스, 요나, 미가 등)이 보지 못한 분입니다. 그리고 왕들(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아 등)이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자들이 보고 있으니 이들이 얼마나 복 받은 것입니까. 구약의 선지자나 왕들은 메시야를 보지 못했고 복음의 선포를 듣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보았습니다.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들도 제자들과 같이 복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복음을 다 보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었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소리를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제일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진정 복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알려주시고 가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2절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계시를 받는 자”는 원문의 ‘아포칼륌토’로 “덮개를 제거하다, 나타내다, 밝히다”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바울이 회개하기 전 ‘사울’일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은 제자들을 잡아죽이려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도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다메섹으로 갈 때 홀연히 하나님이 비추는 빛을 보았습니다. 이 빛을 보고 그는 눈이 멀어 사람들에 의해서 직가라는 거리의 유다집으로 옮겨졌습니다. 4일 동안이나 앞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했습니다. 그 때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환상으로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그는 주의 제자들과 믿는 사람을 잡아가려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주님이 일러주신 명령이 부당하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행 9:15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음성을 들은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대로 사울에게 가서 안수했습니다. 바로 그 때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에 있던 덮개가 제거된 것입니다. 본문 22절과 같이 아들(주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즉 눈의 덮개를 제거하여 하나님을 보게 한 것입니다.
예전의 눈하고는 다릅니다.
예전에는 주님을 따르는 부활을 믿는 주님의 제자들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 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눈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눈의 덮개를 제거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일만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남위에 군림할 수 있을까? 명예와 욕심이 가득합니다. 그것만 보입니다. 주님이 우리 눈의 덮개를 제거해 주시기 원합니다. 그 때 우리는 아버지를 보게됩니다. 이 눈이 복이 있는 눈입니다. 아멘.

미국의 한 사업가가 호텔에서 방을 구하려 했으나 호텔이 만원이라 거절당하고 낙망하여 걸음을 옮기는데, 어떤 신사가 그에게 “지금은 어딜가나 방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니 자기와 동숙하자”라고 했습니다. 사업가는 안도의 숨을 쉬고 감사한 마음으로 동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을 제공한 그 신사가 자기 전에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자기와 사업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더랍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신사는 먼저 성경을 읽더니 또 열심히 기도하더랍니다. 그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헤어질 때 명함을 주고받았습니다. 신사의 명함에는 ‘윌리엄 제임스 오브라이엔’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해서 사업가는 그 신사에게 “국무장관의 이름과 똑같군요.”라고 했더니 그 신사는 겸손히 “네, 같은 인물입니다.”하더랍니다. 후에 사업가는 회상하기를 ‘나의 삶에 제일 큰 변화를 준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옛날 청교도들이 퓨리탄들이, 믿지 아니하시는 분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할 때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과 지금 우리가 제일 많이 쓰는 ‘예수 믿으세요 그리고 구원 받으세요’ 우리가 이런 말을 제일 많이 쓰겠죠? 그런데 청교도들이 전도할 때 쓴 말 가운데 이런 말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한번 따라서 해보세요. 사람이 두 번 태어나면 한번만 죽고요, 한번만 태어나시면 두 번 죽어요. 청교도들이 그렇게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두 번째 사망, 제2의 사망을 가리키고 있어요. 두 번째 사망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어떻게 쓰여있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21장 8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여기 무슨 단어가 나왔습니까? 둘째 사망, 둘째 사망, 거기다 줄쳐 놓으세요. 둘째 사망.

예수님 믿지 않는 분들은 죽으면 끝난다고 합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죽고 또 죽습니다. 그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그러나 두 번 태어난 사람,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한 사람들은 두 번 죽지 않습니다. 대신 두 번 태어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