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민이 기도하는 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8. 만민이 기도하는 집) / 막 11:15-18

“15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여러 해 전, 미국의 아폴로 13호가 달나라를 향해 발사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지구로부터 20,000마일 떨어진 곳에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산소 통이 깨져 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비행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본부인 휴스톤을 향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연락을 했습니다. 그 때에 지휘 본부에서는 북극성을 바라보면서 방향을 잡아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전 미국 국민이 고장난 캡슐을 몰고 오는 우주인들을 위해서 오전 9시를 기해 함께 기도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도 우주선 안에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과학적 산물이 고장났을 때 전 미국 국민이 기도한 것입니다.
얼마 후에 고장난 아폴로 13호는 태평양에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미 해군 군함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해군 군목의 손을 잡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Thanks God. Praise the Lord!)”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 주간의 타임지 표지에 그들의 기도하는 사진이 살린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첨단 과학만능의 시대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도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응답 받을 수 있습니다.

배경설명
요 2:13-22절에 보면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과 돈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상을 업으셨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같은 사건이 아니라 비슷한 사건이 두 번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역 초기에 약 3년 전에 성전에 들리셨을 때와 같이 똑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고쳐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일주일만 있으면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스스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사람들은 장사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깡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분개하시는 이유는?
1) 3년 전과 똑같이 잘못을 시정하지 않고 성전경비의 비호아래 계속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2) 대제사장(가야바, 안나스)을 비롯한 제사장들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상인들이 장사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3) 사람이 많이 모이는 명절(유월절) 때 폭리를 취하는 상업적 행위입니다.
4) 제물은 흠이 없는 것으로 집에서 조사해보고 가지고 와야 하는데 갑자기 돈을 주고 사는 행위입니다.
5) 흠이 있는 제물이라도 성전에서 산 것이면 무조건 제물로 드릴 수 있게 한 것입니다.
6) 로마와 헬라의 화폐를 성전화폐로 바꾸어 주는데 강제적으로 반 세겔의 성전세를 바쳐야 했습니다(17:24-27).

종교지도자들이 이권에 개입되면 그 때부터 타락의 길로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8:18-19절에 보면 시몬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돈을 줄 테니 자기에게도 안수해서 성령을 받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행 8: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돈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돈을 사랑하게 될 때는 무엇이든지 돈으로 하려고 합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아니라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에 대해서는 히 13: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한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세속화되면 안됩니다.
1900년 대 영국교회가 침체기에 접어들 때 교회들은 나름대로 교회의 부흥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달려오다 보니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연의 임무는 망각한 채 세상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따라하거나 그런 시설로 변모해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단순하게 장터가 필요해서 교회가 그것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스포츠 센터시설을 갖추고 운동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전도 목적으로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교회들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시설을 만들고 좀더 가까이 다가가 전도한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교회들은 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의 심각성을 깨닫고 1930년 12월 30일(화요일) 아베라본 샌드필드에서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를 비롯한 11분의 목사, 장로가 모여 이런 것을 교회에서 금지할 것을 선언했습니다(로이드존스의생애, p77).
1.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체험을 솔직하게 교환하며, 우리의 실패와 고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을 스스로 선언한다.
2. 신앙적이 아닌 것은 무엇을 막론하고 그것은 죄이기 때문에, 신앙적이 아닌 활동은 각자 스스로 절제할 것을 선언한다.
3. 아래의 특별한 기도제목을 위하여 날마다 30분씩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선언한다.
a) 신앙부흥 운동을 위하여
b) 서로를 위하여
4. 우리는 웨일즈 장로교회의 선언을 받아들이지만 특별히 우리의 목회에 아래사항을 추가한다.
a) 우리의 성도들에게 회심과 중생을 강조할 것이다.
b) 모든 성도들은 죄사함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c) 모든 성도들은 성화되어가고, 성령을 받아들이고, 갈라디아서 5장 22절의 성령의 열매가 성도들의 생활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교육받고 지도받을 것이다.
5. 교회는 바자회나 음악회 등과 같은 세상의 수단과 방법에서 손을 씻을 것을 선언한다.

2. 기도는 만민이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사야 56:7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 56: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8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만민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민족입니다. 유대인만의 구원이 아닌 모든 민족이 구원을 받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은 모든 민족에게 개방된 것이며 누구든지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를 대제사장과 성전 치리자들은 장사판을 벌여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모시고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슬프신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인색합니다. 그들의 속마음은 이방인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돈 바꾸어주는 사람들은 로마와 헬라에서 온 것입니다. 유대인만 온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기도를 위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장사로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희생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은 이것으로 자신의 죄가 깨끗해지며 천국에 간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즉 이 제사 행위로서 천국에 간다는 것을 믿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속죄의 형식으론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KCM에서 베다니 미전도종족 번역을 마쳐가고 있고, 그 중에 주요종족을 뽑아서 책으로만 만드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업이 약 5년간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인터넷에 있던 영문 자료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좋은 자료가 영문으로 제공되지 않아 아쉬움을 달래면서 우리가 다운받아 논 것을 KCM에서 제공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찾던 자료를 정신호 집사님이 우연히 검색하다 다시 찾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홈페이지를 다시 디자인했을 뿐만 아니라 미전도 종족 개념을 다시 정리하고 각 나라의 미전도 종족도 다시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에 미전도 종족이 얼마나 있을 것 같습니까? 북한사람하고 또 중국의 한족, 몽골, 러시아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북한에 거주하는 미전도 종족입니다. 저희가 베다니 책을 만드는 이유는 책 제목에서 알 수 있습니다. “베다니 미전도 종족 기도정보(땅 끝을 향한 기도지침서)”입니다. 이 책을 보고 기도하라고 펴내는 것입니다.

3. 성전(교회)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거룩한 장소라는 뜻입니다. 사람만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높은 세상의 최고 권력을 가진 미국의 백악관이나 청와대도 거룩한 곳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계신 곳을 거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단이 있는 곳을 우리는 반대로 사악한 곳이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거룩한 곳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와서 할 일은 기도입니다. 교회에는 교재가 있지만 사교장은 아닙니다.
기도는 어디서나 해야합니다. 한마디로 때와 장소의 구분이 없습니다.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이지만 더 전적으로 기도만을 위해서 구분된 장소가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조차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의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전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화할 때 자기혼자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내 말만 하고 일어나서 갑니다. 이것은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필요한 것만 열거하고 갑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는 것만이 기도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크게 보면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 또한 기도입니다. 우리의 필요한 것을 아뢰는 기도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니까요.

지금 개축하고 있는 예루살렘성전은 처음부터 잘못되었습니다. 해롯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스룹바벨의 제2성전을 개축한 것으로 주전 1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8년 후에 헌당되었고 주후 64년에 이르러서 완전히 새 성전으로 완성되었으나 6년이 지난 주후 70년 디도(Titus)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서 완전히 파멸되었습니다. 이 성전은 성도들의 믿음으로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로마가 선심을 쓴 성전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제사장들은 뇌물과 같이 지어주는 건물만을 좋아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건물이 어떻게 성전이 될 수 있습니까? 성전은 믿음으로 지어진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그곳을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죠지 뮬러는 역사상 기도응답을 가장 많이 받은 분으로 알려졌습니다. 5만 번 이상의 기도응답을 받은 죠지뮬러(1805_1898년)는 프러시아인으로 크로펜스타트에서 출생했습니다.
아버지의 주머니를 상습적으로 뒤져 돈을 훔칠 정도로 문제아였던 그는 1825년 11월, 어느 토요일 저녁기도모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회심하게 됩니다.
1835년 할레대학을 졸업한 그는 선교사로 영국으로 건너가 브리스톨 애슐리 다운에 고아원을 세워 2천명이 넘는 고아들을 기도로 양육했습니다. 1898년 3월10일 93세의 일기로 소천하기까지 그는 15만 명의 고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 주었고 오늘날까지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죠지 뮬러가 가장 시간을 많이 들여 한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삶을 나누었던 5명의 친구들의 구원 문제를 위해서 기도한 일입니다. 뮬러는 다섯 명의 친구를 위해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안 믿는 친구가 두 사람입니다. 뮬러는 이 두 친구를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무려 52년간 두 친구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안 믿습니다. 뮬러는 이제 노년이 되어서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이 가까와 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요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7. 사랑하는 제자 요한) / 요 21:20-23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덴마크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자가 말을 타고 시골로 사냥을 가면서 빈민촌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시골길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습니다. 천사같이 아름답고 깨끗한 여인이었습니다. 왕궁에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끝없이 생각나고, 그리웠습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여인에게 내 사랑의 진실을 믿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첫째 고민이었습니다. 둘째는 신분의 격차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합니다. 신분의 격차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릴 수 있을까? 배우고 못 배우고, 가난하고 부하고가 문제 안됩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겠는데….. 그리고 세 째로, 잘되고 못되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문제가 있든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네 째로, 어떻게 하면 그녀도 내가 저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내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고, 저도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이것을 고민했습니다. 물론 연구도 했습니다. 주변의 의견도 구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그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왕궁에서 입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사는 시골 마을로 가서 조그마한 방을 하나 세 얻고 목수가 됩니다.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풍습을 배우고,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순박한 생활 속에 엄청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동네 사람들과 부지런히 사귀었습니다. 마침내는 그 여인하고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듯 모든 넋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왔다,라고. 비로소 이 여인은 왕자의 엄청난 사랑을 알고, 믿고, 깨닫고 받아들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후가 되었습니다.

1. 요한의 이름
레오날도 다빈치(Leonardd da Vinci)는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 소녀처럼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흰 손을 겹치고 있는 요한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십대의 말기에 주 예수를 만났을 때에는 비록 사도들 가운데서 나이가 가장 어리며 나약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를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붙여주셨습니다(막 3:17). 이 형제들은 베드로 못지 않은 과격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다빈치가 그린 그림에서 나타난 것처럼 예수님은 요한을 완전히 변화 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 또한 요한과 같이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요한의 초기 생활
형제인 야고보와 함께 요한은 가버나움에서 베드로, 안드레와 고기를 잡으며 살았습니다. 요한의 아버지는 세베대였습니다(마 10:2). 고기잡이는 근육을 발달시키는 힘든 노동입니다. 거센 파도를 헤치면서 노를 저어야하고 그물을 힘들게 털어 내야 합니다. 때문에 손바닥에는 못이 박힙니다. 뙤약볕 아래서 그물을 수선하는 일은 구리 빛 얼굴로 만듭니다.
안드레와 함께 요한은 세례 요한에 의해서 예수님께 인도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몇 말씀을 나눈 요한은 그가 구세주임을 확신하였습니다. 요한은 육십년이 지난 뒤에도 처음으로 예수님과 대화한 감격적인 시간인 시간을 회상했습니다. 이 순간부터 예수님은 요한의 생애에 빛이 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의 가장 사랑 받는 사람”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처음 만난 후 요한은 고기잡이하러 돌아왔으나 나중에는 예수님과 동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고기잡이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베드로, 안드레와 함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하여 큰마음을 먹고 아버지와 배와 고기와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3. 요한의 성품
1)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믿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불사를 것을 요구한 요한
눅 9:53-55절(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데 유대인과 오랜 반목사이에 있는 사마라인들이 그 길을 막고 나섰습니다. 사마리아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 유대인은 그보다 더 사마리아인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 또한 유대인인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가는 길을 막은 것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구원주이신 예수님의 길을 막는 사마리아인에 대해서 분개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누구를 멸하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심판주가 아닌 구원주로 오신 것입니다. 바로 이 말을 할 때 앞장선 사람이 야고보와 요한 형제였습니다.

2) 예수님의 좌 우편에 앉아 권세를 누리기 원한 야고보와 요한
막 10:35-38절(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 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좌 우편에 앉기를 주님께 부탁한 제자 역시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3)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에게 그 일을 중단하도록 요구한 요한
어느 마을로 복음을 전하러 가던 중에 요한은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동요하는가 보려고 요한은 앞으로 다가갔다. 귀신들린 한 소년이 땅 위를 뒹굴면서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받은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미처 손도 쓰기 전에 낮선 사람이 귀신을 쫓아낸 것입니다. 그 소년은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뒤틀다가 조용해지더니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선한 일도 내가 하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와서 이렇게 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요한은 “내가 해야 되는데 알지도 모르는 사람이, 예수님 제자도 아니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다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사람에게 “감히 어떻게 당신이 주님의 이름을 쓸 수 있단 말이오? 도대체 당신은 무슨 권능이 있길래 이런 일을 하오?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권세도 받지 못한 사람이요. 나는 주님의 가까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이요. 이전에 나는 당신을 본 일이 없오. 결코 주님의 이름을 쓰지 마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말할 수도 없으며 예수의 이름으로는 일도 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요한은 몰아쳤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여쭈었습니다(막 9:38). 예수께서는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한자니라”(눅 9:50)고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위의 세 가지 사항만 보아도 요한은 우리가 아는 데로 결코 성격이 온순하다든가 남을 포용할 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자신만 알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쫓아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요한의 변화
어느 정원사가 정원의 흙을 보고 “너는 어떻게 그처럼 좋은 향기를 풍기느냐?”고 물었더니 진흙은 “사람들이나를 장미꽃 옆에 두었기 때문이랍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성급하고 이기적인 청년 요한은 성인이 되어 온유한 성격으로 변했습니다. 요한의 잘못된 야망은 없어졌습니다. 편협한 외곬수적 성격도 사라졌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격렬한 성격의 청년에서 남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요한이 복음서뿐만 아니라 서신과 계시록도 썼다고 봅니다. 약 일 세기 전에 일부 학들이 “요한서신을 쓴 사람이 과연 사도 요한이냐”하는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들은 복음서의 요한과 서신의 요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요한을 야망으로 가득 차 있고 화를 잘 내며 도량이 좁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비하여 요한서신의 기록자인 요한은 사랑의 정수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주 예수에 의하여 우뢰의 아들에서 사랑의 사도로 변한 것입니다.

요한이 이렇게 변하는 데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의 인격 속에는 타고난 성격이 항상 깃들어 있기 때문에 폭발적인 잠재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함께 해주시는 권능과 근엄한 용모는 여러 갈래로 찢어진 요한의 옳지 못한 정력을 온유한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5. 요한이 보여준 사랑
우뢰와 같은 요한의 성격이 온유하게 변한 것은 십자가와 초대교회에의 성심과 용감성도 설명해 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가 어느 사도보다도 먼저 예수님에게로 다시 돌아온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멀리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을 때 요한은 용감하게 대제사장의 집 뜰로 들어갔습니다(요 18:15-16).
예수님이 심문을 받던 그곳에서 요한은 베드로도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종을 해쳤기 때문에 겁에 질려 베드로가 숯불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을 때 요한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재판장에게로 곧장 들어갔습니다.
모든 사도 가운데서 오직 요한 만이 십자가 옆에 서서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적들이 악의에 찬 독설을 내뿜을 때에도 요한은 도망치지 않고 적들의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들은 제자도 유일하게 요한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바라보시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하시고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가리키며 “보라, 네 어머니라”하셨습니다(요 19:26-27).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마리아를 모셔온 후 요한은 다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으려고 서둘러 되돌아갔습니다. 오직 요한 만이 “내가 목이 마르다” 또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고개를 떨구시고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온 것과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사한 사실을 말한 것도 요한 뿐입니다(요 19:38-42). 요한은 용감했으며 최후까지 예수님께 헌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살인마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어린양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요3:16) 유명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요한은 책임감으로서의 사랑뿐만 아니라 사도직의 징표로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가”(요 13:34-35)하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상기시켜 주었다. 요한은 그의 저술에서 오십 번 이상이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사랑 받는 요한은 예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믿었으며 밤을 새워 고리를 잡은 후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본 제자였습니다(요 20:8, 21:7).

요한의 사랑은 무조건 온유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직설적이며 강한 성품으로, 거짓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서슴치 않고 경고했습니다(요일 1:6, 2:4).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당부했습니다.(요2 10). 또 디오레베는 교만하여 사악한 말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세상에 공개했습니다(요삼 9:10). 요한의 우뢰 같은 성격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그의 강경한 어조도 사랑과 겸손으로 변화되어 나타납니다.

은혜 속에 살고 성장하는 것에 관하여 요한의 생애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요한은 불같은 성급한 성격을 서서히 가라앉히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권세에 순종했습니다. 여든 살이 되어서라도 사랑하며 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요한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성도들에게 그의 삶을 통해서 어떤 문제와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를 보면,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사랑의 훈련”입니다.
요한 처럼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3: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라고 말한 것처럼 주님의 가슴에 깊이 기대고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면서 그 주님의 호흡을 느낄 때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부부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남편에 대한 아내의 불만은 커져갔고 가정의 화평이 깨지자 부부는 고민 끝에 각자 종이상자를 하나씩 준비하여 서로에게 불만이 생길 때마다 불만 내용을 글로 써서 그곳에 집어넣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달 후 상자를 서로 바꾸어 보기로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발을 씻기는 선생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6. 발을 씻기는 선생) / 요 13:12-17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중세 어느 수도원에 수도원장이 수도사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원장은 어느 수도사에게 오늘은 당신이 설교하라 갑자기 시켰습니다. 무척 당황한 수도사가 강당에 올라갔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청중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설교할지 아십니까?” 아무도 알리 없었죠, 청중들이 모릅니다. 그랬더니 수도사가 “나도 모릅니다”하고 내려왔어요.
수도원장이 화가 나서 다음날 또 갑자기 시켰습니다. 그러자 이 수도사가 올라가서 전날과 똑같이 묻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어떤 설교할지 아십니까?” 어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청중들이 오늘은 “예. 압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알면 됐습니다. 다 아는데 무엇 하러 설교합니까?”
수도원장이 노발대발하면서 다음날 또 시켰습니다. 수도사가 올라가서 똑같이 묻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설교할지 아십니까?” 어제 그제 속았기 때문에 청중 절반은 예, 절반은 아니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수도사가 말하길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내려왔습니다. 크게 혼날 줄 알았는데 수도원장이 우리 수도원에서 했던 설교 중에 가장 뛰어난 설교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의 표어가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깨닫는 자가 희생하고 섬기면 모르는 자가 배우게 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섬겼으니 너희가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자, 먼저 깨닫는 자가 섬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조건적인 선생 허락
예수님은 마태복음 23:8-12절에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선생(랍비)들은 대접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자신에게 몸을 굽혀 인사하는 것을 즐기고, 잔치 집에 가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이 선생님을 대접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선생 자신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
예수님은 당시 선생(랍비)들 하고는 달랐습니다.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자를 고쳐주고 이적을 행하니까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모함하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 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중에 어느 계명이 …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마 19:16) 어떤 사람이(율법을 잘지킨 유대인)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마 22:16) 자기 제자들(바리새인)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요 3:2) 그가(니고데모-로마관원)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막 10:51)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막 9: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본문 13-14절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주요, 선생이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을 씻기신 것을 전제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선생이 되려고 한다면 남의 발을 먼저 씻겨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지 주인이 어떻게 종의 발을 씻어줍니까? 지금 식으로 한번 이해해 봅시다. 운전기사가 있다고 합시다. 운전기사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어야지 주인이 나가서 운전기사 문을 열어준다면 이해가 되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로 대접받고자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단이나 사이비라고 말하는 자칭 교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 싶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이비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예수님처럼 남의 발을 씻기는 사람인지 아닌지 보면 압니다. 예수님은 선생하고 싶으신 것이 아닙니다. 대접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틴은 25불을 자기고 고향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왔습니다. 그는 작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등록금은커녕 당장 먹고 지낼 돈도 없었습니다. 누가 버린 헌 자동차를 집으로 삽고 일자리를 구했는데 그는 점심을 싸갈 수도 없었습니다. 일꾼들은 나무 밑에 모여 식사를 하는데 마틴은 배고픔을 달래며 혼자 그늘 아래 누워있었습니다. 그 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감독의 목소리가 들여왔습니다.
“젠장 이놈의 마누라, 나를 코끼리로 아나봐, 혼자서 이걸 다 어떻게 먹으라고. 이봐 누가 샌드위치와 케익 한 조각 먹어주지 않겠나?”
마틴은 기꺼이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후 감독은 계속해서 마누라 음식을 허비하는 불평을 늘어놓았으며 마틴은 오히려 그로 인해 배고픔을 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틴은 보름이 지나 금료를 받고 감사의 말을 전하려고 사무실에 들렸는데 사무실에 감독은 없고 여 사무원만 있는 겁니다. “감독님 들어오시면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감독님 부인에게 센드위치 잘 만드신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러자 그 사무원 놀라며 대답했습니다.
“감독님은 시내에 잇는 조그만 모텔에서 혼자 살고 있어요. 부인은 5년 전에 돌아가셨답니다.”

발을 씻어주세요.
1) 발은 제일 더러운 부분입니다.
깨끗한 것은 만지고도 싶고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발은 신체 중에서 제일 더러운 부분입니다. 냄새가 나는 곳입니다. 더러운 곳입니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예수님은 남의 더러운 곳을 씻어주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잘해서가 아니라 잘못한 것을 사해주는 것입니다.

2) 발은 신체의 제일 끝입니다.
심장은 하루에 10만 번의 움직임으로 피를 전신의 구석구석에 보내는 작용을 하고, 심장에서 가장 먼 발은 그 움직임으로 온 혈액을 다시 심장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해야하는데, 요즘은 문명의 발달도 교통수단도 많이 발전을 하면서 발의 움직임을 덜하게 되면서, 발의 피로를 느끼고, 발이 차가워지며, 다리의 부종이 비만이 되고, 혈행의 장애로 관절에 문제가 많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끝까지,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3) 발은 돌아다닙니다.
발은 가만히 있으면 병 생깁니다. 가능한 한 자주 움직여 주면서 피를 다시 돌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절도 운동을 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종을 시켜서 발을 씻어 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직접 손님에게 발을 씻어준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선생은 본을 보여야 합니다.
본문 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가장 훌륭한 제자 훈련은 백만 마디의 말로써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직접 삶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지난 수요일 케냐에서 오신 선교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한국 선교사님들은 너무 도시에 있으면서 부족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도 안돼 지만, 부족에게 가는 분이 드물다는 겁니다. 그런데 서양 선교사님들은 시간만 있으면 부족마을에 간답니다. 신학교를 도시에서 하지만 학생들 집에 방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환경에서 왔는지 방문해서 그 가정에 복음을 전할뿐만 아니라 학생의 생활을 이해하므로 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지난번에 종엽이네 집에 방문했지 않습니까.
발로 뛰고 돌아다니다 보면 일이 됩니다. 지난 화요일(2005.5.10) 전세계 생물학계가 흥분하는 놀랄 만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북미대륙과 유럽일부 지역에만 있다고 알려진 허파 없는 미주 도룡뇽(lungless salamamander)-한국명(이끼 도롱뇽)이 한국에서 서식하고 있는 것이 지난 5일 영국의 과학 전문지인 ‘네이처(Nature)’ 논문을 통해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이 도롱뇽은 꼭 도마뱀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아마 저도 어려서 시골에서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똑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알려졌는지 아십니까?
지난 2003년 4월 대전 장태산 야산에서 기독교계 대전국제학교의 미국인 과학교사 스티븐카슨(Stephen J.Karson)씨가 학생들에게 돌을 뒤집어 어떤 생물이 살고 있나를 관찰하도록 했다가 우연히 발견된 것입니다. 카슨교수는 이 도롱뇽을 UC 버클리 대학의 생물학자인 데이비드 W. 웨이크박사에게 전했습니다. 웨이크 박사는 허파로 호흡하는 아시아 도롱뇽과는 달리 혀, 발목, 두개골을 가졌고 특히 허파 없이 피부 호흡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번 발견은 놀랄만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생물지리를 변경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끼 도롱뇽은 한국 내에 최소한 16군데 정도 있는 것으로 보이나 정확하게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한국 사람이 아닌 미국인 교수에 의해서였습니다. 지금쯤이면 한국도 이러한 생태계조사는 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 교수는 발견을 못하고 왜 미국 교수가 발견을 했습니까? 우리는 앉아서 가르치고 미국 사람들은 발로 뛰면서 현장 교육을 하는데 익숙해서 그렇습니다. 알아서 교과서 잘 만들어 놨겠지? 이것만 잘 가르치면 되지? 하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이렇게 교육을 받다보니 발로 뛰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장을 확인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실천하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제 운동도 해야하지만 몸으로 해야 합니다. 저도 다음달에 러시아와 동유럽 선교지를 방문하는데 제 자신이 보고, 배우려는 목적이 많습니다.

선교지에 가면 한국에서 자란 우리하고 미국에서 자란 한국인 2세가 다르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성장한 분들은 자기 것을 오픈하고 사역한답니다. 그런데 한국 분들은 감춘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짜 진돗개는 사람이 와도 짓지 않는 답니다. 개가 짓는 이유는 자기가 겁나니까 짓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돗개는 사람이 와도 짓지 않는 것은 자기가 무섭지 않은 겁니다. 왜냐하면 주인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도적질하러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똥개는 주인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도 짓습니다. 그러다 주인에게 한 대 맞지요. 수준이 비슷하면 싸웁니다.
자기가 자신이 없으면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 있는 사람은 보여주려고 합니다. 여러분! 초등학교 다니면서 선생님이 물어보지요. 그 때 내가 아는 문제면 나 시켜달라고 ‘저요. 저요’하지요. 그런데 모르면 꼬리 내리고 고개 숙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자신 있게 그러나 겸손하게 행동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더 겸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16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크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다시 보냄을 받는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육체적 질서로 보면 절대로 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부모님께 효도하면 복이 있는 것입니다. 경우 없고 건방진 자식들은 부모님이 나이 드시고 힘없다고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집의 자식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많이 배우시지는 못했지만, 아는 것이 부족하지만 부모님은 부모님이십니다. 아멘.
인천에 가면 인천에서 두 번째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인천제이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1948년에서 시작한 교회인데 김덕수 전도사님이 개척해서 1951년 이승길 목사님이 부임하고, 1957년 이삼성목사님(77년 총회장)이 부임하고, 그리고 지금 이건영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십니다. 이 교회의 자랑은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교육자 전원이 은혜롭게 은퇴하고 후임목사가 원로 목사님을 잘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 후임자 문제로 고심하고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현재 이건영 목사님에게 부탁해서 목사님이 정해주시면 90%는 따르겠다고 말하는 교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이 교회의 목사님들이 섬기는 자세로서 먼저 성도가 아니라 원로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을 잘 보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뒤집어 업고 다시 시작하고 잘 해보겠다는 의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먼저 해 놓으신 분들에 대한 감사와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려도, 빨리 납득이 안 되는 일이 있어도 함께 기도하며 서로 섬기는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2개의 대야가 나옵니다. 하나는 빌라도의 손을 씻었던 대야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었던 대야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도록 하고서 책임지지 않겠다는 회피의 대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야는 사람을 섬기고 더러움을 씻는 대야였습니다. 섬김의 대야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아 섬김의 선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5. 서로 사랑하라) / 요 15:9-12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친자식들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부모들의 모임이 최근 결성돼 유사한 처지에 놓인 40여명의 부모들이 회원으로 가입, 매주 월요일 정신과 치료를 병행해 서로의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자녀들의 학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정신과 상담 도중 자녀들로부터 매맞는 부모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 8개월 전(95년3월30일 기준) 이 모임을 결성한 여성 정신심리분석학자 살비아 베인스텐은 “이 모임은 무엇보다 이 같은 불행의 근본적인 책임이 가해자인 자녀가 아닌 부모 자신의 무분별한 애정에 있음을 인정토록 하면서 해결점을 찾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들 부모의 대부분은 자녀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무조건 충족시켜 주는 그릇된 교육관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그런 가정의 자녀들은 어른들에 대한 존경심이나 부모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제 능력이 크게 부족해 친부모를 구타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분석합니다(1995.3.30일자 동아일보 해외토픽).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잘못 인식된 것이 하나있습니다. 유교사상이 지배하던 시절에 기독교가 단순히 조상신에게 절하지 않고 부모제사를 지내지 않으니까 조상도 부모도 모르는 불효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교와 같이 하지 않는다고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교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 이상으로 성경은 엄격한 교훈을 주십니다.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중에 5개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5개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계명입니다. 이 대인관계 계명 중에 첫 번째 계명이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얼마나 엄격한 교훈이 있는지 아십니까? 유교도 이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1) 출 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2) 출 21: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라”
(3) 잠 23: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
(4) 잠 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는 엄한 교훈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계명을 지키셨다고 하시며 우리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1. 사랑은 서로 해야 합니다.
본문 9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서로”라는 관계를 우리는 남과는 잘 비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일 중요한 관계에 있어서는 “서로”라는 말을 적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서로”는 제일 가까운 사이에서부터 적용해 나가는 것입니다. 파도가 일어날 때 가까운 원안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는 서로였습니다. 하나님만 일방적으로 아들을 사랑하시고 그것으로 마친 것이 아닙니다.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켰고 그 사랑 안에 거했습니다. 육신을 입은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부모님을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마음 자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명기 6:5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를 경외(fear)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사랑(love)하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하고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만약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이라면 율법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짐이 되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면 율법을 위한 희생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자기 희생이 의무적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이유가 단순한 자기 축복에 있었다면 그것 또한 오래가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 한국교회가 축복신앙의 논리에만 매달려 있다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식이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받고자 외식 적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하고 같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신 31: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조건적으로, 부모님을 조건으로 섬기는 사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단 국물이 다 떨어지면 더 이상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2. 계명은 지켜야 합니다.
본문 10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 계명”도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가운데 많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에 우선해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계명”입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는 땅을 사고 팔 때와 같은 “매매 증서”에 사용되었습니다. 출 24:12 십계명에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계명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19:7-8, 24:3-8)라고 응답하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이 언약 속에는 “이스라엘 자손대대로 여호와 말씀을 전수시키겠다”는 맹세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신 28:1-68, 32:7).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먼저 계명을 잊지 않도록 해야했습니다. 알아야 지킬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옷단 끝에 술을 만들어 명령들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마나 손목에 매며, 하나님의 말씀을 문설주에 써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신 6:6-9). 그리고 율법 책에 기록해서 후손에게 전해주었습니다(신 30:10).
아울러 하나님이 내려주신 율법은 사람이 일 점 일획이라도 변경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신 12:32). 하나님의 계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반드시 지켜야될 중차대한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단순하게 이다음에 효도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먼저 진정으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켜야될 것을 우리는 얼마나 가르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늦게 받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녀들이 다 성장했다면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자녀들에게 효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난 자식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께 대적한다면 그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계명은 조금이라도 범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며 반드시 속죄제를 지내야 했습니다(레 4장).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업신여기면 죽게됩니다(민 15:31). 솔로몬은 그의 생에 말년에 계명을 범했습니다(왕하 11:31-39). 이로 인해서 왕국이 분열되었고 므낫세와 같은 악한 왕들이 나왔고 결국 다윗 왕가는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느 1:8).

3. 사랑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본문 1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제일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빼고는 인간을 정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면 인간 또한 동물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인간을 감동시키며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냉혈인간이라고 부릅니다. 피도 눈물도 감정도 없는 사람을 일컬어 부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눈물도 피도 뿌립니다.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하루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들의 가정에서 먼저 사랑이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가정에 사랑이 없는데, 부모자식간에 사랑이 없는데 다른 어디에서 사랑이 자라난다는 말입니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저도 이제 부모님이 안 계십니다. 잘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랑과 감사를 왜 못하는지 아십니까?
시 104:24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부부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나보다 하나님이 나보다 아내가, 남편이, 그리고 부모님들이 하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랑하게 됩니다.

저희 어머님은 17년 동안 귀 암 이라는 병으로 고생하셨습니다. 평생을 시골에서 사셨기 때문에, 도시 아파트에서는 답답해서 못사시겠다고 하시면서 동네사람들과 홀로 사셨습니다. 저는 가끔 한번씩 찾아가 뵙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사시다 거동이 불편하셔서 저희 집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오시던 첫날 제가 발을 씻겨 드렸더니 “내 아들 효자네”그러시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 어머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단 한번인데 어머님은 “내 아들 효자네”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님은 저를 위해서 수 없이 발을 씻겨 주었을 것입니다. 어디 발뿐이겠습니까?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양주동) 노래의 가사처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자랄 때의 어머님들은 지금 어머님들과 그 고생은 비교가 안될 것입니다. 그 때는 세탁기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입니다. 차가운 얼음을 깨뜨리며 겨울에 냇가에 가셔서 빨래를 하셨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정말 허리한번 필시간 없이 하루종일 노동에 시달리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식들 먹여 살릴 걱정을 하시면서 당신은 고기 뼈만 발라 드시면서 자식들 좋은 것 하나 더 먹게 하려고 희생을 아끼지 않은 분들입니다.
우리어머님이 사시던 뒷집에 현욱이네라고 있습니다. 현욱엄마는 치매로 15년을 넘게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현욱 엄마만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 것이 아니라 손자, 손녀들까지 모든 집안 식구들이 잘 모셨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현욱엄마 같은 사람이 없다고 면사무소에 몇 번을 들려서 상 주어야 된다고 추천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어머님 돌아 가셨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면에서 조사가 왔더라는 겁니다. 이 집안 식구들이 얼마나 효도하는지 알아보려고요. 그런데 조사 나온 분이 치매환자인 시어머니 머리에 비녀가 꼿혀있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물어보지도 않더랍니다. 15년이 넘도록 치매환자를 돌보면서 시어머니 머리 감겨서 깨끗하게 비녀를 꽃아 드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귀찮으니까 대부분 머리를 홀딱 밀어 논답니다. 그래서 현욱엄마 말로는 면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주는 제일 좋은 상을 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상 받으려 고는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에게 정말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서 부모님 섬기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뿐만이 아니라 바로 부모님의 심정을 깨닫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린이의 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4. 어린이의 나라) / 막 10:13-16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여러분! ‘어린이 날’이 좋을까요? ‘어린이 나라’가 좋을까요?
어린이날은 하루이지만 어린이의 나라는 매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이 같은 사람들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는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많은 장난감도 없었습니다. 몇 안 되는 장난감들이기에 소중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는 깡통, 고무줄, 돌맹이, 그리고 막대기가 전부였습니다. 고무공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정말 귀한 것입니다. 이런 것만 있다고 불만을 느끼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 몸으로 때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타기입니다. 그래도 친구들과 날이 어두워지도록 놀았으니 불만이 있을리 없습니다. 빈곤했던 시대이지만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오늘날의 어린이들은 불쌍합니다. 어린이날은 있는지 모르지만 어린이 나라가 아닙니다. 어른들 중심의 나라입니다. 이것을 고쳐야 합니다.

1. 어린이를 자유롭게 하라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오는데 막으면 안됩니다. 이들이 비록 어린이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은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어린이들을 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어린이들에게 사용된 원문 ‘파이디아’는 6-14세 정도의 어린이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 용어는 야이로의 12살 된 딸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평행본문인 눅 18:15에서는 갓난아기를 말하는 ‘브레페’가 사용되었습니다. 누가는 더 어린아이들로 본 것입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갓난아기에서부터 10여세가 된 좀 큰 아이들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 생각에는 유대의 랍비들에게 비추어 보면 결코 잘못된 행동은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이 지금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제자들의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이 당시의 일반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상당히 화를 내셨습니다. 14절 “분히 여겨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각과는 달리 제자들이 반대되는 행동을 임의로 하고 있기 때문에 화를 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용납하고”는 아이들을 괴롭히지 말고 하고 싶은 데로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정도는 아시겠지요. 지금 아이들을 자유롭게 하라는 것은 그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행동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일학교 강습회 때 가끔 강사로 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강조하는 것은 아이들을 자유롭게 교육시키라는 것입니다. 자유는 결코 방종이 아닙니다.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는 아이들은 혼을 내야합니다. 하지만 만사에 아이들을 쥐잡듯 잡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스스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일시적으로 순종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아이들도 자유 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무한한 창의성과 긍정적인 생각들이 나옵니다. 지나치게 어른들의 스케줄에 맞추어 어린이들의 입장과는 관계가 없는 학교가고, 학원(영어학원, 태권도학원 등)가고 바쁘게만 지내는 것은 어린이들의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정말 부모님이 생각할 때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 외에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에게 자유를 주세요? 그것이 그 어떤 교육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만져주셔야 합니다.
오늘본문의 시작은 엄마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왜?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왔습니까?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정의 문제, 우리 아이의 문제, 질병의 문제, 모든 문제가 예수님이 만져주시면 해결됩니다. 우리교회도 예수님이 만져주셔야 합니다.
저는 그런 것 잘 안 하는데 오늘은 한번 해야겠습니다. 어떤 교단이나 목사님은 예배 때마다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아픈 곳이 있으시면, 또 원하는 것이 있으시면 그곳에 손을 얹으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치료해 주실 것을 믿으세요. 비록 내 손을 얹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육체의 질병 주님이 만져주세요. 주님 만져주시면 깨끗이 치료될 줄 믿습니다. 아멘”
마태복음 9:20-22에 보면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의 생각에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쫓아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만지는 순간 예수님의 능력이 그 여인에게 갔습니다.
“20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님의 첫 이적사건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혼인집에서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옵니다. 이 일이 왜 가능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그 집에 계시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가정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교회는 세 곳에 계셔야 합니다. 따라합니다. 첫째, 내 마음속에 둘째, 우리 가정에 셋째, 성도가 함께 모인 곳 교회에 이것이 교회의 삼위일체입니다. 어떤 분은 보이는 교회에는 잘 나옵니다. 그런데 가정에 교회가 없습니다. 그러면 가정이 바로 인도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모신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만져주십니다.
어떤 분은 가정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니까 수도원쯤으로 분위기가 바뀌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끔 특별한 분이 있기는 하더라구요. 너무 영적이라 제가 아는 한 분은 신혼여행을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어떤 수도원에서 수도원생들이 많이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수도원에 들어가 탐정해 보았더니 그 수도원 원장이 너무 경건주의를 강조하는 분이어서 하루 종일 도무지 웃지 못하게 금지하는 것입니다. 웃으면 벌을 받을 만큼 엄격하게 훈련을 했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수도생들이 오히려 병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너무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가 어렵습니다. 숨이 막힙니다. 질식됩니다. 인간미가 넘치고 때로는 실수를 하지만 그것이 용납되는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으며 감싸주는 가정이 오히려 건강한 가정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라
본문 15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단코”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충 하는 척 해 가지고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결단코”는 다른 말로 하면 “절대로”입니다. “받들지”에 해당하는 원문은 “환영하다, 영접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환영해야 합니다. 영접해야 합니다. 누구처럼 해야 합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해야 됩니다. 어린이의 장점은

1) 단순합니다.
어른들의 세계는 좀 복잡합니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계산적입니다. 사람을 사귀고 봉사를 하며 어떤 모임에 참석을 할 때도 항상 이것 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인가 계산을 합니다. 심지어는 결혼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이것이 얼마나 나에게 유익이 될 것인가 수지계산을 맞추어 보고 결정을 하고 결단을 합니다. 그만큼 어른의 세계는 이해 타산적입니다. 그러나 어린이의 세계는 다릅니다. 자기가 좋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외식과 형식이요 위선입니다. 제 이야기라 좀 그렇습니다만, 베트남에 선교사로서 제일 처음으로 들어간 김영관 선교사님 부부가 계십니다. 이분이 저만 보면 저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씀합니다. 저는 단순하다는 겁니다. 제가 생각해봐도 저는 참 단순한 사람입니다. 복잡하면 계산을 못합니다.

2) 어린이는 모든 것이 신비스럽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바라보는 어린이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참 신기하고 신비롭습니다. 그래서 부모나 어른들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왜 코는 하나인 데 눈은 두 개이고 손가락이 다섯 개냐 등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부모는 쓸데없는 것을 묻는다고 야단을 치면 안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 모릅니다.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습니다. 사실 다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포기한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신비롭게 세상을 바라보세요. 봄이 되면 죽은 것 같았던 나무들이 파랗게 새 싹이 나고 푸르러 지잖아요. 제가 여기 있는 화분 죽이고, 밖을 내다보면서 하나님은 하나도 안 죽이시는데 우리는 여기 있는 나무 두 그루를 죽였습니다. 자연은 사람이 손을 안대면 다 잘 산답니다. 그런데 사람이 손을 데면 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신비스러운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가슴이 뛰는 것은 남녀의 사랑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 신비하고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3) 정직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거짓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원래는 거짓말을 모릅니다. 가끔 어린이들이 너무 솔직히 말해서 어른들이 당황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 캐나다에 있는 목사님이 아들하고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그만 방구를 ‘뿅’하고 낀 것입니다. 그 때 옆에 있던 권사님이 목사님 아들 엉덩이를 치면서 “이놈 방구 소리도 크네”그랬는데 목사님 아들은 말을 이제막 하는 수준인데 “나 아녜요! 나 아녜요!”하는 겁니다. 제일 잘 실수하는 것이 전화에다 대고 “엄마가 없다고 그러 라고 그래요” 아이들은 정직합니다. 어른들이 거짓말을 가르쳐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리더스 다이제스트지가 몇 년전 이런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지갑에 50불씩 넣고 주소를 써넣은 다음 1000개의 지갑을 세계 여러 도시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그 나라 사람들이 정직하게 그 지갑을 돌려주는가? 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100% 돌려주었습니다. 싱가폴은 90%, 한국사람은 70%를 돌려주었습니다. 꽤 괜찮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참 감사할 일입니다.
미국은 68%, 독일이 48%, 러시아는 43%, 필리핀이 40%, 이태리는 35%, 중국은 30%, 멕시코는 21%가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태리나 중국이나 멕시코 가서는 지갑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뒤에 숨어 있다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잘 살펴보았다. 또한 돌려주는 사람들은 만나 인터뷰도 했습니다. 어떤 스위스의 한 어머니는 그 지갑을 아이가 주어서 어머니에게 주자 그 지갑 속에 돈 50불 짜리를 얼른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한국의 아버지는 아이에게 그 돈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돌려주라고 말하면서 신앙인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모든 크리스천 가정이 이렇게 되면 한국사회가 달라지고 변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가끔 한국서민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만원 짜리 내고 그냥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아줌마가 뛰어나오면서 거스름돈 받아가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외국인들은 가끔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한국 기업들이나 정치를 보면 거짓이 판을 치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인 것 같은데 의외로 한국사회는 특히 서민사회가 더 정직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4) 어린이는 미래지향적입니다.
어린이는 과거가 없습니다. 어린이에게는 미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삶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입니다. 노년은 과거에 살고, 장년은 현재에 살며, 어린이는 미래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항상 꿈꾸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도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항상 앞만 향해 나가도록 강조합니다. 캄캄한 밤에도 항상 새벽을 바라보는 소망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루어 진 것처럼 현실화해서 살아가고,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앞당겨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즉 소망 중에 바라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4. 어린이에게 축복하시는 예수님
저에게 여기서(주앙교회에서 지금) 한 사람에게만 축복하라면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헌금 제일 많이 하신 분? 아닙니다. 최서은(7개월 된 아기)이에게 할 것입니다. 불만 없으시죠? 왜 그렇습니까? 제일 어리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세상을 제일 많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축복을 해 주면 제일 해주고 싶은 어린이들 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닙니다. 앞으로 많은 날을 살아가야 할 어린이들입니다.
본문 16절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이 장면은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과 평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축복하시니라”는 평범한 축복하고는 다릅니다. 원문에 ‘kateulovgei:카튜로게이’는 ‘뜨겁게 축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 앞에 ‘kajta;:카타’라는 단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 단어는 집중적인 힘을 나타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축복은 어린이에만 아니라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 율법적으로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천국이 바로 그들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태리 나폴리의 어느 공장에서 잡일을 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하여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는 음악에 소질이 있어서 훌륭한 음악가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에게 ‘너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공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 소년은 너무 낙심이 되어 알아 눕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격려했습니다. ’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있다. 매년 네 음악실력이 향상되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좀더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보자’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음악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수년이 지나간 어느 날, 그는 수많은 관중이 모임 무대 위에서 감격에 넘치는 노래를 부리게 되었고 수천의 관중들이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 관중 한 구석에 앉아있던 어머니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분! 이 소년이 누군지 아십니까가? 20세기 초대 오페라의 황금시대를 연 테너 엔리코 카루소였습니다.

한 신부가 미사를 집례하면서 포도주를 엎지른 아이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빨리 꺼져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유고의 독재가 ’티토‘가 되었다. 그러나 한 신부는 포도주를 엎지른 아이에게 ’너는 커서 신부가 되겠구나‘ 하고 격려했습니다. 그가 자라서 유명한 TV설교자 ’풀톤 쉰‘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말 한마디 축복도 한 어린이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처럼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어린이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축복이 오늘 우리에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