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51.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6.25 동란 때 있었던 일입니다. 황해도 봉산군에 계동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에 장로님 일곱 분 중에 네 분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강덕기 장로님이라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의 순교 일화입니다. 공산당원들이 그 분을 죽일 때 아주 비참하고 잔인하게 죽였다고 합니다. 그 분을 나무에 묶고 두 눈을 뽑아버렸습니다.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분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두 눈이 빠지고 나니까 오히려 하늘 나라가 밝히 보이는구나!” 그리고 평안한 목소리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찬 431장>이었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찬송소리가 울려 퍼지자 공산당원들은 치를 떨면서 따발총의 개머리판으로 내리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분은 순교의 최후를 장식했던 것입니다. 그 후 전세가 역전이 되어 국군이 북으로 진격하여 그 마을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공산당원들이 다 도망가버리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지역에서 온갖 만행을 다 저질렀던 공산당 두목이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동네 청년들에게 붙들렸습니다. 청년들은 밧줄로 그 공산당 두목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순교 당했던 강장로님의 아들에게 마음대로 죽여서 원수를 갚으라고 했습니다. 원수의 모습을 보면서 강장로님의 아들은 두 눈에 눈물을 죽 흘렸습니다. 이윽고 입을 열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거룩한 순교를 헛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나의 원수이지만 나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 말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갔다고 합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모세의 율법시대와 예수님의 은혜 시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용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는 죄대로 상은 상대로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대에는 다릅니다. 용서를 전제로 모든 것이 진행됩니다. 용서가 없다면 신약도 구약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이 잘못된 성경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두꺼운 구약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원래 하나님의 법이 이렇게 무섭구나!’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대로 우리를 다루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갈 수 없는 중죄인들입니다. 오늘 이러한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우리모두 죄 용서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
구약시대의 사람들도 용서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간구는 자신의 죄만을 위한 간구였습니다. 저는 구약의 시편을 좋아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시가 많습니다. 시편을 읽어가노라면 하나님이 지으신 오묘하신 세상에 대해서 눈이 열립니다. 그리고 감사의 무궁한 찬양이 흘러나오게 만듭니다. 하지만 신약과 다른 한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편은 최소한 73편 이상이 다윗이 쓴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다윗 사상이 배어있다고 보면 됩니다.
시편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의 높으심과 찬양, 지으신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의 표현, 광야에서 이끌어내신 이스라엘 백성의 감사, 그리고 정직한 자에 대한 축복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상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 28:4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시 58:10 “의인은 악인의 보복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위의 두 구절만 보아도 구약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용서가 없습니다.

용서하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용서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심판 주로 오셨다면 우리는 끝입니다. 우리가 감사한 것은 용서의 주님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용서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어느 마을에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서로 원수로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만나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싸우고, 헤어지면 서로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중에 A라는 청년이 마음을 고쳐먹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그 동안 B라는 청년과 항상 다투었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B라는 청년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만나면 싸우게 되고 그러면 또 후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A라는 청년이 피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때 B라는 청년이 먼저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어쭈, 야 임마. 너 교회에 다닌다며. 웃기고 있네” 그리고는 순식간에 A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겼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인해 A는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쥔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도 돌려대라.’ 화는 났지만 꾹 참고 이를 악물고 왼편 뺨을 돌려댔습니다. 그랬더니 B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빈정댔습니다. ‘이 녀석이 누구를 놀리는 거야 뭐야?’ 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왼편 뺨도 후려갈겼습니다. A는 오른편 뺨과 왼편 뺨을 연속적으로 얻어맞고 정신이 아찔해졌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더니 갑자기 양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내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기 때문에 내 책임은 다 했어. 이제는 네가 맛 좀 봐야겠다. 너 어디 한번 죽어봐라!” 그래서 싸움이 평소보다 더 커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인을 통해서도 배우라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식으로 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비난과 저주만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말속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즉 남의 눈의 들보를 보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좋은 구석이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좋은 점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가르침은 “뱀”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뱀이 원수이지만 뱀도 좋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로 그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상대편의 약점만을 늘어놓으며 그 사람을 죽일 사람으로 몰아붙이기 전에 배울 것을 먼저 배우라는 것입니다.
망해 가는 기업을 통해서도 길거리의 노숙자를 통해서도, 지하철에 강아지 태우고 탔다가 오물을 치우지 않고 내린 사람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는 것입니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문의 핵심입니다. 죄의 용서가 없이는 주님께 용서를 바랄 수 없습니다.
막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고 하십니다.

독일 나치 시대 때 라벤스부르크 수용소에서 온갖 고문과 학대를 받았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여사가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그녀는 독일 사람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간증과 설교에 많은 감명을 받곤 했습니다. 한번은 설교를 마친 후 입구에서 청중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와 인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앞이 캄캄해지고 말았습니다. 온 몸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손이 서서히 떨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본 사람은 다름 아닌 포로수용소에서 자기의 옷을 벗기고 채찍질과 고문을 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언니도 그 사람의 손에 죽었던 것입니다. 상대방은 알아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어찌 그 사람의 얼굴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동안 그 사람을 기억하며 얼마나 치를 떨었겠습니까? 마음속으로 그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 사람만큼은 제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동안 그녀는 용서를 수없이 외쳐왔지만 막상 자기 앞에 용서해야 할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녀는 몸이 굳어버린 것입니다.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먼저 그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라” 그녀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말할 수 없이 엄청난 주님의 사랑은 느끼고 마음속에 한없는 기쁨과 평안이 넘쳤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23:34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오늘 본문은 가상칠언 중에 제일 첫 번째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 자체가 우리의 죄 용서함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로 하나님께 제일먼저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의 죄는 속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다시 한번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죄 용서함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일고 또 읽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서 이와 같은 기도를 해 주시다니요.

두 사람의 일본 농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한 농부가 가파른 비탈길에 계단식 논을 만들고는 그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물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물길이 완성되자 지켜보고 있던 다른 농부가 바로 아래 자기 논을 만들고 논에 구멍을 내서 물을 자기 논으로 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처음 논을 만들었던 농부가 화가 났습니다.
‘얌체같이… 물길을 만드는 수고도 않고 남의 논물을 받아가다니…’
화가난 농부는 목사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그를 용서하게. 그리고 계속해서 물을 대시오’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다시 목사님을 찾아와 또다시 찾아와 아래논의 농부는 마음의 가책도 없이 계속 물을 빼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하나요? 라고 또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또 다시 ‘그가 스스로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계속해서 물을 대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자네가 먼저 그 논까지 물을 대주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농부는 그 다음 논까지 물을 대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래 논을 만든 농부가 첫번 농부를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남을 용서하면 에수님과 같이 구원받는 성도를 얻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도대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마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70×7=490 번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숫자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7의 숫자는 거룩한 하나님의 수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하게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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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생애(50. 진리) / 요 18:37-38

“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어느 날 해가 말했습니다. “나뭇잎은 초록색이다.” 그런데 달이 “나뭇잎은 은색이다.”라며 우겼습니다. 다시 달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늘 잠만 잔다.”그러자 해가 “아니야 그들은 언제나 움직인다.”라며 우겼습니다. 달이 “그러면 왜 땅이 조용하냐!”고 물었고 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누가 그러더냐! 땅은 언제나 시끄러운데.” 이렇게 해서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바람이 나타났습니다. “쓸데없는 논쟁을 하고 있구나.”며 그들이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나는 하늘에 해가 떠있을 때도 불고 달이 떠 있을 때도 분다. 해가 빛을 비추는 동안에는 나뭇잎은 초록색이며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달이 비추는 밤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져 사람들은 잠을 자고 고요하며 나뭇잎은 은빛이 된다. 구름이 달빛을 가리우면 나뭇잎은 검은 색이 되기도 한다. 너희들은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쪽의 관점만으로 내 것이 뫘다고 고집들을 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다른 하나의 진실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한가지의 단면만을 보면서 사물과 사람을 판단하려 한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하나의 사실은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빛이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우리의 육신의 오감으로 확인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궁극적인 실제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분적으로 보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시고 심령의 보이지 않는 진실을 꿰뚫어 보시는 온전한 진리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서 증거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이 진리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진리를 동양에서는 도(道)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가야할 참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말라기 선지자는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 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 2:6)고 예언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요 5:33)고 했습니다. 우리의 관점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중심은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해와 달이 아닙니다. 나의 철학이나 내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과 예수님의 생각과 다르면 모든 것을 수정하고 고쳐야 합니다. 이것을 거부한 나라를 저는 보았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분명하게 다른 환경을 보고 왔습니다.
러시아 모스크바와 상뜨빼쩨르부르크, 핀란드 헬싱키, 스웨덴 스톡홀럼, 그리고 에스토니아 탈린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사진을 마음대로 찍기가 어려웠습니다. 사람들도 밝은 표정이 아니었지만 아무 데나 잘못 카메라를 드리대다가는 큰일 나는 수가 있습니다. 사진 금지구역이 많기 때문입니다. 경찰이나 군인을 찍는 것은 불법이며 잘못하면 다 압수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외국 회사가 세워놓은 큰 마켓 같은 곳에서도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럽 핀란드로 넘어 오면 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 나라들은 얼마나 자유가 있는지 지나칠 정도입니다. 얼마 전까지 국경 수비대가 파업을 해서 입국 심사도 하지 않고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비대 경찰을 사진 찍으려고 하면 포즈를 취해줍니다. 아예 사진을 찍으라고 관광객을 위해서 근위대 교대 장면을 연출해 주지 않습니까. 얼마나 자유가 있는지 모릅니다.
중세에 건축된 교회를 방문했는데 이 교회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려면 달팽이 굴처럼 되어 있습니다. 올라갈 때 유럽사람들은 벽 쪽으로 바싹 붙어있으면서 우리가 올라가는 길을 비켜 주었습니다. 저는 올라가는 사람을 위해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는 것이구나 하고 내려올 때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이 또 벽 쪽으로 먼저 붙어 서 있는 것입니다.
선진국 국민이 된다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나라를 누가 만들어 갑니까? 어디 외국에서 온 사람이 만들어 줍니까?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황무케 됩니다.
저는 땅을 보면서 축복 받은 땅과 저주받는 땅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나라는 망합니다. 그 방법은 땅을 황무케 하는 것입니다.
“(레 26:32)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사 42:15)내가 큰 산과 작은 산을 황무케 하며 그 초목을 마르게 하며 강들로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며“ 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땅이 황무하게 된 곳이 어디입니까? 아랍국가들입니다. 석유가 나와서 축복 받은 것으로 생각하여 마호멧이 예언한 곳에서 석유가 나왔다고 하면서 그를 섬깁니다. 하지만 분명 그 땅은 황무케 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성지 순례 가셔서 이런 땅이 무슨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냐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은 분명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땅이 황무하게 되는데는 비가 오지 않으면 됩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황무하게 됩니다. 사막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절에 “그러므로 단 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비가 꼭 필요할 때 와야 하는 단비가 오지 않으면 곡식이 안됩니다. 늦은 비가 안 오면 한해 농사 중에 하반기 농사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반기 때 우리는 배추와 무 등을 심습니다. 겨울을 대비하는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농사중에 반이 망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이스라엘 땅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중국이 사막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베트남도 약간의 사막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보았는데 사막이 되는 것이 순식간입니다. 바람이 바닷가에서 불어오기 시작하면 사막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모래바람이 내륙으로 불면서 큰산을 덮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 하나가 하루사이에 사막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안에 있으면 샘이 넘칩니다.
신 8:6-7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라고 했습니다.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의 국기는 모두 십자가입니다. 색깔만 다릅니다. 이 나라들은 세계최고의 선진국들입니다. 국민소득 4만 달러에 이릅니다. 모두가 잘 사는 나라들입니다. 사실 이곳이 기후적으로는 그렇게 살기 좋은 땅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척박한 땅을 잘 가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서로 양보하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세계 1등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교만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만을 부르며 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이상주의 철학이 사람들을 망가트렸습니다. 중국이 이 모델을 따라갔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며 감시하는 나라는 안됩니다.

구 소련이 멸망당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소련이 붕괴될 때 제일 먼저 독립한 나라가 제가 방문했던 ‘에스토니아’입니다. 70년을 구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것입니다. 가서 얼른 느끼는 것이 이렇게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그 동안 억눌리며 살았을까? 독립하기를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구 소련이 단순히 경제력이 무너지고 다른 나라들을 관리를 못하기 때문에만 독립시킨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자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고르바초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왜 다른 나라로 독립시켜 주었습니까? 고르바초프가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것만큼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롭게 살 권리를 우리가 제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시 119:151)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
(시 119:160)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

주님이 진리이십니다.
(요 14: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이 진리입니다.
(요 16:13)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여러분!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다른 나라들도 저절로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철학을 가지고 인간의 제일 좋은 길을 찾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논리들은 모두가 패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진리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진리이십니다. 성령님이 진리이십니다.
자유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지금도 상식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러시아 경찰이 이유 없이 자동차를 잘 잡고 시비를 걸기 때문에 경찰청에서 전 경찰에게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확실한 위반이 확인되지 않은 차는 잡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아무 차나 잡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설명해 주면서 왜 잡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그런 명령받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신문을 보여주면서 여기 있지 않냐고 했더니 ‘나는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사람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러시아에 있다가 스웨덴으로 가는 순간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유 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 나아가면 더 진정한 자유를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우리모두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9.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 마 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존 낙스(John Knox)는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부르짖으면 기도하지 않는 한 나라보다도, 한 민족보다도 훨씬 큰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도하시러 간 곳이 ‘겟세마네’라는 작은 동산입니다. 예루살렘 동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인데 감람산 기슭에 있습니다. 아람어 명칭은 ‘기름 짜는 틀’(oil press)입니다. 이곳에서 감람산의 기름을 짰기 때문에 생긴 이름입니다. 이곳에 예수님이 기도하던 장소가 있었습니다(눅 21:37, 22:39). 기름을 짜는 곳에서 예수님은 피와 같은 땀을 짜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지금은 이곳에 ‘땀흘린 교회’(The Chaple of the Sweat)가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땀을 흘려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기도합니다. 기도제목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릅니다.

예수님의 기도제목은
39절 하반 절에 나오는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입니다.
기도는 나의 소원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의 필요를 말하는 것과 같다.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는 아버지의 판단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나의 소원을 아뢰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라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는 기도는 아무리 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 기도는 응답이 없다고 했습니다(약 4:3).

① 나의 원대로
예수님의 원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죽지 않고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십자가의 죽음을 면케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참 사람이십니다. 38절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라는 표현에서 인간적 고뇌가 깊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지금 나이가 33세입니다. 인간적인 나이로는 아직 한참 때입니다. 지금 죽기에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기도 속에는 십자가를 영원히 지시지 안겠다는 것이 아니라 미루어 달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십자가상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육체적으로도 어머니를 더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더 가르쳐야 하는데… 하시는 아쉬움도 있으실 것이고 아직도 병들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사람들과 좀더 함께 하셔야 하는 아쉬움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과도 너무 빨리 해어지게 되는 섭섭함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육체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도 피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창으로 찌르면 아픕니다. 예수님도 목이 마르십니다. 예수님도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육체적 아픔 위에도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런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이 예수님의 고뇌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예수님은 혼자 고민만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② 아버지의 원대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예수님 기도의 결론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까지 아들 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에 거스리는 기도를 하지도 않으셨지만 하나님도 기뻐하심으로 모든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오천명이 넘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의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모든 기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기도하시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것 외에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이 중요한 기도를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최고의 기도는 순종입니다. 순종 없는 기도는 자기 고집, 아집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순종할 줄 아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기도 제목은
41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기도제목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만 제자들의 기도제목은 다릅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는데 따라오는 여자들을 보고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부모님이 돌아 가시면서도 누구 걱정합니까? 자식걱정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지만 고통이 있으시지만 제자들에게, 자신을 행하여 우는 여인들에게 자기 자신의 믿음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주기도문(마 6:9)에서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의 모든 내용이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마 6:13절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이 기도를 할 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은 두 가지로 다가옵니다.
첫째는 영적 곤경에 처하는 것이고, 둘째는 육체적 곤경에 처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올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영적 곤경에 처하는 시험이 훨씬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영적 곤경에 처하는 것보다 육적 곤경에 처하는 것을 더 두렵게 생각합니다.
잠 18:14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고 했습니다. 사람의 심령은 육체적 곤경과 시험을 능히 이기게 합니다. 그러나 심령이 상하면 육체적 곤경도 이길 수 없을 뿐더러 육체의 능력으로는 심령의 곤경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오늘 기도는 한마디로 말하면 실패입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당부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함께 기도한 제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왕의 나라에서 좌우편의 보좌는 탐이 났어도 정작 예수님의 간곡한 기도의 장소에서 그들은 모두 졸았습니다. 예수님은 마 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상황과 십자가를 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깨어있기를 당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혼자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수시로 체크하셨습니다. 눅 22:41에 보면 “돌 던질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수시로 돌아보시려고 이 정도 거리를 두셨던 것입니다.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①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②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③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④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⑤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⑥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중에 모두 6번이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지 못한 이유는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배 때, 기도할 때 조는 분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안타깝습니다. 깨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얼마나 피곤하면 지금 졸까”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하루종일 예수님 따라서 다녔을 것입니다. 정말 피곤한 사람들하고 하루종일 있었습니다. 병 고쳐 주어야지요, 바리새인, 서기관들과 입씨름해야지요. 정말 지금 조는 것이 어떤 면으로는 이해됩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곳은 안락한 침대가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야산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잠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다 이해한다해도 지금 상황은 그래도 그렇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제일 간곡한 기도를 하는 마지막 밤인데… 본문의 제일 가슴 저려오는 구절이 어디입니까? 46 ⑥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칫 예수님의 이 기도는 무의미한 기도가 아니었는가 생각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잔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열어주시지 않았지만 잔을 마실 수 있는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심령을 강화하는 기도였습니다. 심령이 강건해 져야 육체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였고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에 매어 죽게 되는 것이라면 이를 감당 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는 기도를 하셨을 때, 하늘의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눅 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하나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린다면 세상에 필요 없는 기도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힘을 얻도록 도우십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통하여 힘을 얻게 되자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눅 22:44). 땀방울 속에 피가 맺혀 있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 장면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는 처음 기도와는 달리 천사로부터 힘을 얻어 간절히 기도할 때에는 “죽음을 이길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실 때에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아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후 죽음을 이겨야 만이 모든 택한 백성들을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필사적인 기도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깨어있지 못하고 시험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졸아도 성전 안에서 조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에 오면 조니까 오지 말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졸아도 교회에가서 좁시다. 하고 일으켜 세워서 모시고 와야 합니다. 조는 사람은 예수님도 못 말렸습니다. 본문 45절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바로 이렇게 무능력한 우리를 돕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또 다른 이유는 시험 당한 성도들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험 당하여 고민하는 성도들을 도우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
빌리 썬데이(Billy Sunday)는 “어떤 마귀도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녀를 빼앗아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나라의 운명이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선교사를 깨우며 그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루즈벨트(Roosevelt)대통령은 “기도하는 어머니들은 미국의 가장 귀한 자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자산은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비상기도는 하늘나라의 싸이렌을 울리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합심해서 비상기도를 올리면 하늘나라에 싸이렌이 울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마치 119로 신고하면 소방차가 와서 불을 꺼주듯이 우리가 비상기도를 올리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간절히 해야합니다.
한 청년이 교회의 목사님의 찾아가, “목사님, 기도는 어떻게드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 청년을 데리고 강가로 갔습니다. 목사님은 청년의 옷을 벗게 하고는 무턱대고 손을 끌고 강으로 들어갔습니다. 깜짝 놀란 청년은 “아니, 목사님. +
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려는 것일세”라고 말한 다음, 갑자기 청년의 머리를 잡아서는 물 속으로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물 속에서 발버둥을 치며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제 서야 그 목사님은 청년을 건져내 주었습니다. 겨우 살아난 청년은 숨을 몰아 쉬며 ”아니, 목사님. 제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 물 속에서 죽여 달라고 했습니까?” 라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그래, 물 속에 있으니까 어떻던가? 숨을 쉬고 싶지? 살고 싶다는 생각 밖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을 거야! 이것이 바로 내가 자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일세. 기도는 바로 그렇게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의 마음도 바로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익사직전에 우리가 살기 위해 결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게 할 수 있으며, 우리의 믿음도 보다 더 성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