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51.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6.25 동란 때 있었던 일입니다. 황해도 봉산군에 계동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에 장로님 일곱 분 중에 네 분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강덕기 장로님이라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의 순교 일화입니다. 공산당원들이 그 분을 죽일 때 아주 비참하고 잔인하게 죽였다고 합니다. 그 분을 나무에 묶고 두 눈을 뽑아버렸습니다.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그 분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두 눈이 빠지고 나니까 오히려 하늘 나라가 밝히 보이는구나!” 그리고 평안한 목소리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찬 431장>이었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찬송소리가 울려 퍼지자 공산당원들은 치를 떨면서 따발총의 개머리판으로 내리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분은 순교의 최후를 장식했던 것입니다. 그 후 전세가 역전이 되어 국군이 북으로 진격하여 그 마을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공산당원들이 다 도망가버리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 지역에서 온갖 만행을 다 저질렀던 공산당 두목이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동네 청년들에게 붙들렸습니다. 청년들은 밧줄로 그 공산당 두목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순교 당했던 강장로님의 아들에게 마음대로 죽여서 원수를 갚으라고 했습니다. 원수의 모습을 보면서 강장로님의 아들은 두 눈에 눈물을 죽 흘렸습니다. 이윽고 입을 열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거룩한 순교를 헛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나의 원수이지만 나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 말을 남기고 조용히 물러갔다고 합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모세의 율법시대와 예수님의 은혜 시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용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는 죄대로 상은 상대로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대에는 다릅니다. 용서를 전제로 모든 것이 진행됩니다. 용서가 없다면 신약도 구약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구약이 잘못된 성경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두꺼운 구약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원래 하나님의 법이 이렇게 무섭구나!’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대로 우리를 다루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갈 수 없는 중죄인들입니다. 오늘 이러한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우리모두 죄 용서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
구약시대의 사람들도 용서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간구는 자신의 죄만을 위한 간구였습니다. 저는 구약의 시편을 좋아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시가 많습니다. 시편을 읽어가노라면 하나님이 지으신 오묘하신 세상에 대해서 눈이 열립니다. 그리고 감사의 무궁한 찬양이 흘러나오게 만듭니다. 하지만 신약과 다른 한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편은 최소한 73편 이상이 다윗이 쓴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다윗 사상이 배어있다고 보면 됩니다.
시편의 전체 주제는 하나님의 높으심과 찬양, 지으신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의 표현, 광야에서 이끌어내신 이스라엘 백성의 감사, 그리고 정직한 자에 대한 축복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상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 28:4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 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시 58:10 “의인은 악인의 보복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위의 두 구절만 보아도 구약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용서가 없습니다.
용서하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용서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심판 주로 오셨다면 우리는 끝입니다. 우리가 감사한 것은 용서의 주님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용서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어느 마을에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서로 원수로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만나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싸우고, 헤어지면 서로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그 중에 A라는 청년이 마음을 고쳐먹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그 동안 B라는 청년과 항상 다투었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B라는 청년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만나면 싸우게 되고 그러면 또 후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A라는 청년이 피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때 B라는 청년이 먼저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어쭈, 야 임마. 너 교회에 다닌다며. 웃기고 있네” 그리고는 순식간에 A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겼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인해 A는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습니다. 주먹을 불끈 쥔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도 돌려대라.’ 화는 났지만 꾹 참고 이를 악물고 왼편 뺨을 돌려댔습니다. 그랬더니 B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빈정댔습니다. ‘이 녀석이 누구를 놀리는 거야 뭐야?’ 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왼편 뺨도 후려갈겼습니다. A는 오른편 뺨과 왼편 뺨을 연속적으로 얻어맞고 정신이 아찔해졌습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더니 갑자기 양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내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기 때문에 내 책임은 다 했어. 이제는 네가 맛 좀 봐야겠다. 너 어디 한번 죽어봐라!” 그래서 싸움이 평소보다 더 커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인을 통해서도 배우라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약 식으로 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비난과 저주만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말속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즉 남의 눈의 들보를 보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은 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좋은 구석이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좋은 점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가르침은 “뱀”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뱀이 원수이지만 뱀도 좋은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로 그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상대편의 약점만을 늘어놓으며 그 사람을 죽일 사람으로 몰아붙이기 전에 배울 것을 먼저 배우라는 것입니다.
망해 가는 기업을 통해서도 길거리의 노숙자를 통해서도, 지하철에 강아지 태우고 탔다가 오물을 치우지 않고 내린 사람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는 것입니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문의 핵심입니다. 죄의 용서가 없이는 주님께 용서를 바랄 수 없습니다.
막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고 하십니다.
독일 나치 시대 때 라벤스부르크 수용소에서 온갖 고문과 학대를 받았던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여사가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그녀는 독일 사람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가는 곳마다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간증과 설교에 많은 감명을 받곤 했습니다. 한번은 설교를 마친 후 입구에서 청중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와 인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앞이 캄캄해지고 말았습니다. 온 몸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손이 서서히 떨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본 사람은 다름 아닌 포로수용소에서 자기의 옷을 벗기고 채찍질과 고문을 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언니도 그 사람의 손에 죽었던 것입니다. 상대방은 알아보지 못했어도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어찌 그 사람의 얼굴을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 동안 그 사람을 기억하며 얼마나 치를 떨었겠습니까? 마음속으로 그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 사람만큼은 제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동안 그녀는 용서를 수없이 외쳐왔지만 막상 자기 앞에 용서해야 할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녀는 몸이 굳어버린 것입니다.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먼저 그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라” 그녀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말할 수 없이 엄청난 주님의 사랑은 느끼고 마음속에 한없는 기쁨과 평안이 넘쳤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23:34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오늘 본문은 가상칠언 중에 제일 첫 번째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 자체가 우리의 죄 용서함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로 하나님께 제일먼저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의 죄는 속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다시 한번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죄 용서함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일고 또 읽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서 이와 같은 기도를 해 주시다니요.
두 사람의 일본 농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한 농부가 가파른 비탈길에 계단식 논을 만들고는 그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물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물길이 완성되자 지켜보고 있던 다른 농부가 바로 아래 자기 논을 만들고 논에 구멍을 내서 물을 자기 논으로 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처음 논을 만들었던 농부가 화가 났습니다.
‘얌체같이… 물길을 만드는 수고도 않고 남의 논물을 받아가다니…’
화가난 농부는 목사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그를 용서하게. 그리고 계속해서 물을 대시오’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다시 목사님을 찾아와 또다시 찾아와 아래논의 농부는 마음의 가책도 없이 계속 물을 빼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하나요? 라고 또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또 다시 ‘그가 스스로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계속해서 물을 대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자네가 먼저 그 논까지 물을 대주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농부는 그 다음 논까지 물을 대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래 논을 만든 농부가 첫번 농부를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남을 용서하면 에수님과 같이 구원받는 성도를 얻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도대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마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70×7=490 번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숫자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7의 숫자는 거룩한 하나님의 수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하게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