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하며 가르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 행하며 가르치라) / 본문 : 마태복음 5:18-19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1971년 이탈리아 영화제작자 피에르 파올로 파솔로니(Pier Paolo Pasolini) 때문에 영화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 사람은 동성연애자요 막시스트로 공공연하게 알려진 인물인데 그가 감독한 “마태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때문입니다. 개봉되기 전까지는 화면에 예수님이 나온다는 정도로만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기존 그 어떤 영화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파솔리는 영화가 완성되자 이 영화를 교황 요한 23세에게 헌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황이 이 영화를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탈리아 플로렌스 지방에 여행할 때 교황이 행차하자 엄청난 교통체증이 발행했습니다. 그 여파로 오도 가도 못하게된 파솔로니는 호텔 방에 갇혀 무료함을 달래느라, 탁자 옆에 비치된 신약성경을 집어들고 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을 읽어가던 그는 뭔가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대본 없이 마태복음을 유일하게 대본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파솔로니는 이 영화를 이탈리아 남부에서 빠듯한 예산으로 예수님이 살았던 팔레스타인과 같은 지역에서 먼지가 풀풀 날리며 잿빛 풍경들을 연출하며 찍었습니다. 파솔리니의 이 영화는 평화와 사랑의 정신이 담긴 영화로 예수님을 다시 보게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따르던지 따르지 않던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어떤 사람이 반대한다고 뒤집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선택권은 내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파솔리니가 성경을 자세히 보게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깨닫습니다. 자기가 이전에 알고 있던 그런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다시 봅시다. 자세히 봅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행함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엄청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는 영적으로만 계시던 하나님이 신약에서 육체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의 모습을 입고오신 것은 행함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거침없이 합니다. 욥기 10:4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욥이 살던 구약시대까지만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처럼 육체를 입고 사람처럼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대답할말을 찾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입고 오셨을 뿐만 아니라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시험이 있습니다.
욥의 이런 기도는 예수님이 시험 당하실 때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인간의 모습을 입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볼 때 예수님은 분명 보통 사람하고는 달랐습니다. 그분은 분명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능력이 있다는 것 또한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성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사단이 그런 시험은 안 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만한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얼마 있다가 오병이어의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것을 이미 사단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단의 시험은 한마디로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의 모습으로 능력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단의 시험에 응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 시험으로 사단의 모습은 드러났고 예수님의 모습은 감춰졌습니다. 예수님이 완벽하게 승리하신 것입니다.
사단의 시험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십자가 없이도 면류관을 주겠다는 제의였습니다. 거짓 복음서가 있는데 위경 복음서들입니다. 이것은 이미 교회로부터 거짓문서로 판단을 받은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황당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린 예수가 진흙으로 참새를 만들어 숨을 쉬어 생명을 부여하고, 말라비틀어진 물고기를 물에 던져 넣어 기적적으로 헤엄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친구들을 염소로 둔갑시키기도 합니다. 만화책에나 나올만한 그런 “슈퍼소년”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때로는 그런 예수님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따르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십자가에 무참히 못 박혀 죽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굳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천사나 보내고 구약시대처럼 직접 능력을 일으키시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그 자체로 좋아하셔야 합니다. 부모님이 멀리 여행 갔다고 돌아오시는데 자식이 반갑게 뛰어나옵니다. 처음에 부모님은 나를 만나려고 저처럼 기쁘게 뛰어오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품에 안길 줄 알고 팔을 넓게 벌리려는데 자식은 부모님 손에 있는 선물꾸러미를 낚아채어 가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손에 있는 선물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와 같으면 안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같은 시험은 안 하지만 비슷한 시험을 합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가느냐?”, “집에서 얼마든지 혼자도 신앙생활 할 수 있지 않느냐?”, “바쁜데 오늘은 쉬어라?”, “너 쓸것도 모자라는데 네가 아니어도 교회에 부자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감사헌금은 안 해도 된다“ 등 수 없는 유혹을 오늘도 해옵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내 욕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 자신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유혹도 그렇습니다. 아담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나라도 자신만을 위해서 땅 투기, 집 투기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나라 망합니다.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
행하며 가르치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가르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염려가 있다면 그것은 가르치지 않아 당신을 명령을 잊어버릴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4: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받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천국에서도 등급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행함은 천국에서 상급이 있습니다. 자신이 실천하면서 했는지 아니면 입으로만 했는지에 따라서 등급이 구분됩니다. 우리모두는 천국에 안가 보았으니까 이 등급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와 “크다”라는 말이 대조를 이룹니다. 이 차이는 상당한 것입니다. 진짜 상급에 욕심이 있다면 천국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이 땅에서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가능합니다.
저는 “과연 이 시대에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이 있다면 누구일까? 그런 분을 찾으려면 신앙영웅에 관한 책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흔히 축복을 받아 잘 산다는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병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 등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에 제일 큰 부자들 중에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일 오래 사는 사람들 역시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누구일까?”를 찾다가 선교사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사람들이 영웅시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아는 여 선교사님 중에는 남편을 잃고 선교지로 가신 분, 선교지에서 남편을 잃고 자식들과 함께 선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낮선 환경으로 한때는 고국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름한철 몇 일 덥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일년365일 30도를 넘는 선교지역이 태반입니다. 아니면 극동 시베리아에서 추위와 싸우며 지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가 인터넷을 통해서 “미션매거진”이라는 매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선교사가 왜 다릅니까? 이분들은 자기만 잘 살겠다고 가신 분들이 아닙니다. 때로는 노 부모님을 한국에 그냥 두고 가신 분, 자식들은 아무 것도 모르지만 부모를 따라 아프리카로 떠난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선교사님들이 주님의 말씀을 행하며 가르치는 분들이 아니겠습니까?
내 욕심을 가진 분들은 선교 못합니다. 자기 욕심이 있는 분들은 해서도 안됩니다. 오직 우리에게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다 선교지에 가있지는 않지만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방법을 선택하셨는데 그것은 포기와 유사한 것입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방법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다 압니다. 상대방이 거절하면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의 말처럼 “하나님은 나치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의지를 통해서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러한 길을 스스로 따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기 이틀 전까지 본회퍼의 설교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독일 국민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사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여 결국 지도자는 그릇된 모습으로 바뀌어갈 것입니다.” 그의 설교를 내보냈던 방송사는 히틀러의 세력으로부터 폐쇄 당했습니다. 본회퍼는 인쇄물을 이용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군중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강제로 중단되었습니다. 본회퍼의 저서들은 모두 이 시기에 출간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진정한 사도가 되라(The Cost of Discipledhip)』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버리고 살아야 된다고 부르짖었습니다.
1939년 본회퍼가 뉴욕을 방문했을 때 그의 친구들은 그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본회퍼는 “만약 이 순간의 시련을 독일 국민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전쟁이 끝난 후에 그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독일로 직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히틀러의 잘못된 점을 늘 지적하며 다녔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사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수감자들로부터 설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사야서의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이 설교를 마지막으로 교수대에 올라 처형되었습니다.
일본 기독교사에 보면 1552년부터 1616년까지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이 기간에 예수를 믿은 사람이 놀랍게도 20,00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점점 기독교가 왕성해가자 일본 왕을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며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622년에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사형에 처한다고 공포하여 기독교인들은 지오미오 섬에 있는 시니아바라 도시로 피난 가 마지막 순간까지 방어하며 싸우다 결국 3개월을 버티다 일본군에 의해 20,000여명이 대학살 당했습니다.
이 모든 순교자들이 행하며 가르친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존 번연이 읽고 『천로역정』을 썼다는 『기독교 순교사화』(Martyrs) “세상이 감당치 못한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의 책 뒤에 보면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았으나 세상을 넘어선 사람들,
부귀영화보다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 사람들,
그래서 세상이 감당치 못했던 사람들!
고문도, 옥에 갇힘도, 배고픔도, 단두대도, 화형도
주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빼앗지는 못했다.
기독교의 역사는 그들의 땀과 눈물과 피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에 새겨져
우리로 주님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게 한다!
갈라디아서 6장 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