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히 보시는 주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 귀히 보시는 주님) / 본문 : 마가복음 12:41-44

“41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코카콜라하면 전 세계인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세계제일의 브랜드입니다. 국제적으로 미국의 외교관은 없어도 코카콜라는 들어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코카콜라의 본사는 미국 애틀랜타에 있습니다. 코카콜라가 이렇게 전세계 198개국 이상에 들어간 것은 이 회사의 사장 때문입니다. 그는 완전히 코카콜라에 미친 사람입니다. 사장은 늘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혈관 속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른다.” 그리하여 하루에 8억 병씩 팔리는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회사로 성장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몸 속에는 예수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뜨거운 피가 흘러야 합니다. 불타 올라야 합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욕심의 피가 흘러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의 물질의 피가 흘러서는 안됩니다. 생명의 복음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오늘도 생명의 주님의 피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정한 가치

가난한 과부를 말하는 원문의 프토코스(ptwcov”)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극빈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말씀하신 부자와 반대되는 말입니다. ‘두 렙돈’은 ‘작은 것’이라는 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틴에서 사용되는 가장 작은 유대의 동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1/128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지금 노동자의 하루 임금을 5만원으로 계산해서 1/128로 나누면 390원이 조금 넘습니다. 그러니까 400원이 안 되는 돈을 헌금함에 넣은 것입니다. 이 돈은 부자가 바친 돈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만큼 적은 금액입니다.
예수님이 이 광경을 목격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모이게 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진실로”는 원어에서 ‘아멘’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지금 가르침이 신실성과 권위로 인준할 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산술적 가치로 말하면 비교도 안 되는 헌금이지만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신앙적 가치에 있어서는 역전된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산술적 가치를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신앙적, 질적 가치로 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것 같지만 평범하지 않은 분입니다. 반대로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지만 보통사람이셨습니다. 그래서 진짜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기란 어려운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도 여실히 그런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는 청년에게는 과격하게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나누어주라고 하셨으면서 정작 과부가 내는 ‘두 렙돈’을 가장 가치 있게 평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강퍅함에 실망하셨고,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모습에 격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한 믿음에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모든 사람보다 많이 한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본문 44절 함께 읽습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더 이상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자기의 생활비 전부입니다. 이제 그는 돌아가면 아무도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식구도 없을 것입니다. 저녁밥을 해 놓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 돈으로 빵 하나라도 사서 먹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전부’를 드렸다는 것은 생명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시한부 인생에게는 시간이 소중합니다. 흘러가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내가 만나고 있는 이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내게 있는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된 사람과 되지 않은 사람을 우리는 금방 구분할 수 있습니다. 된 사람은 작은 것을 소홀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되지 못한 사람은 작은 것을 소홀히 여깁니다. 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1원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 의해서 제일 작은 가치로 여겨지는 것을 제일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께 있어서는 결코 작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기억하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의 이름으로 작은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도 결코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에 비유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욕심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이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 조그마한 돌멩이를 금으로 변하게 한 다음 물었습니다.
“이것 갖고 싶지?” 그러자 그 남자는 눈빛이 변하면서 말했습니다.
“네, 그런데 이왕이면 더 큰걸 주세요.”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좀더 큰돌을 금으로 변하게 한 다음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이것 갖고 싶지 않니?” 그러자 그 사람 역시 더 큰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세 번째 사람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돌을 금 덩어리로 만든 다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욕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것 갖고 싶지 않니?”
그 청년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돌을 금으로 만든 다음 물었습니다. “이것 갖고싶지 않니?”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욕심이 없는 사람을 만났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 순간 그 청년이 말했습니다.
“저 하나님, 돌을 금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현재에 만족할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비전과 소망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재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기쁨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주어도 없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신 작은 것 소중히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싱거는 오랫동안 가난과 병으로 누워서 투병 생활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가족의 생계는 물론이고 집안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 가정을 잘 꾸려 나갔습니다. 그의 부인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삯바느질을 했습니다. 싱거는 아내의 사랑과 정성에 여러 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싱거는 병상에 누워있으면서 어떻게 고생하는 아내를 도와줄 수 없을까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바느질하는 아내를 도울 방법을 찾았습니다. 쉽게 바느질하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재봉틀을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이 재봉틀의 이름을 아래를 위해 만든 싱거라고 붙였습니다. 그는 물론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귀합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당하실 때 사단은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뀌었습니다(마 4:8). 그러나 주님은 그것에 가치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천하만국이 하나님 아버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질에 가치를 두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에 가치를 두셨습니다.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만큼은 물질이 아닙니다. 예수님 만큼은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교회도 최고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한 생명입니다.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것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하만국을 다 주어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생명, 이 영생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과 적지 않은 격론을 벌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안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 역시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것이지 사람보다 안식일이 먼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식에 웅덩이에 빠진 양의 비유를 들어서 ‘너희들은 양이 안식일에 구덩에 빠지면 꺼내주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마태복음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누가복음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당신의 아들을 주셨고 우리를 구원해 내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소중한 자녀입니까?

흑인 지도자 말콤엑스는 흑인으로 백인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백인을 미워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백인인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부를 희게 하려고 크림을 바르고 머리를 염색하고 백인이 되려고 무척 노력을 했습니다. 백인이 되지 못하자 더욱 비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절대로 백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백인이 되지 말고 흑인이 되자. 흑인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검은색은 아름답다.” 이때부터 “흙색은 아름답다”라는 말이 흑인 사회의 모토가 되었습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친구들이 찾아와 비아냥거립니다. 네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고있다고 합니다. 욥은 그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욥 23:12)라고 했습니다. 그가 부자일 때, 행복하게 살 때에도 밥을 먹는 일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아름답게 빛나는 스카프를 본적이 있으시겠죠? 좋아하시는 분은 몇 장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스카프의 미의 절정은 오색찬란한 그 색채에 있습니다. 그런데 스카프에 채색시키는 염료는 연지벌레로 만든다고 합니다. 이 벌레는 아주 작습니다. 선인장 잎사귀 밑에서 눈에 띄지 않게 양분을 섭취하며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자랍니다. 이 작은 벌레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빛을 내는 스카프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것, 작지만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가장귀한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