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4. 크리스마스) / 본문 : 누가복음 2:1-7

“1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아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제가 중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그 때는 교회에 나가기 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몇 일 지나서 교회 옆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시골교회라 정말 마구간 같은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성극에 사용했던 용품들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저는 호기심에 가까이 가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로 사용했던 것 같이 보이는 아기인형도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그 아기 인형을 우리 집으로 가져오고 싶었지만 도둑질을 하는 것 같아서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 아기 인형이 기억납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언제 그런 연극이 있었는지 잊어버리고 버려진 아기 예수 인형처럼 예수님을 버리시거나 잊으시면 안됩니다.

미국에서의 어떤 심리학 교수 한 분이 40명 여명의 학생들에게 단어 연상 테스트를 실시했습니다. “크리스마스”란 단어를 주고, 생각나는 것을 하나씩 적어보게 한 심리 테스트였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트리, 가시나무, 선물, 칠면조, 휴일, 캐롤, 산타클로스, 사슴” 등 모두 각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를 적어낸 학생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는 무엇입니까? 혹 예수가 빠져있는, 예수가 버려진 크리스마스는 아닌가 생각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오직 예수’를 위한 날입니다. 따라합시다. ‘오직 예수’. 성격이 급하신 분은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줄여서 “오 예~~”입니다. 따라합시다. “오 예~~”

언제인가 일본에서 여자중학교 2학년 학생이 수석을 다투던 동급학생을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 아이 생각에는 그 놈만 죽이면 자기가 수석을 독차지 할 수 있을 것이란 경쟁심 때문에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경쟁사회가 갖다주는 비극을 잘 설명해줍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보면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야기의 요점은 달리기를 잘하는 토끼라도 나태해서 상대의 추격을 우습게 알고 낮잠을 자면 질 수 있다는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어른중심의 이야기입니다. 거북이 입장에서 보면 이 게임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달리기를 하는데 거북이는 너무나 불리한 신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북이가 잘 하는 것으로 할 수도 있는데 처음부터 토끼에게 너무 유리한 게임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창의성을 무시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경쟁심을 유발시키는 이야기하나를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 20:26-28에 나옵니다. “26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성탄절기가 되면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성탄절은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는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크리스마스(Christmas)의 단어 뜻은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을 축하하는 경배의 날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정확한 크리스마스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언어인 헬라어에 보면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단어인

헬라어 명사는 주격으로 쓰면 (시그마)가 붙여져 ‘크리스마’를 주격으로 사용하면 (크리스마스)가 됩니다. 즉 ‘그리스도(크리스마)’ 는 예수의 공적직함으로 구약에서는 제사장, 선지자, 왕에게 기름부음으로 그 직능을 수행한 것인데, 신약에서는 오직 예수께 이 용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 가지의 직능의 완성자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신의 직분을 어떻게 완성해 가셨습니까?
사람들 위에 군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자랑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사람인척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가 능력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일 많이 사용한 자신의 신분을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人子입니다. 즉 나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는 단순한 것입니다(미국의 힘, 러시아의 힘).
1969년. 미국의 나사는 우주비행사를 달에 보내려는 중요한 순간에 볼펜을 우주에서 사용할 수 없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볼펜은 중력에 의해 잉크가 밑으로 흘러내리는 원리를 이용해 볼에 묻혀 쓰는 것이었으니 무중력 상태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나사는 10년 동안 120만 달러의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우주는 물론이고 바다 속에서도 쓸 수 있는 볼펜을 개발해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우주인들은 … 그냥 연필을 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의 섭리적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가 예언 성취를 위해서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아구스도는 호적령을 내려 인구조사를 통해 세금을 징수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아구스도는 자신이 통치하는 백성들을 정책적으로 이용해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임으로 막강한 나라를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다른 것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대로(미 5:2)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베들(집) 레헴(빵, 떡) 두말이 합쳐져서 된 것입니다. 즉 그 뜻은 ‘빵집’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요 6:35, 48)으로 오셨습니다.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요 6:50)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이 땅에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구약 시대에 에브랏(창 48:7, 룻 1:2, 삼상 17:2), 에브라다(미 5:2)로 불렀습니다.
그 곳에서 라헬이 죽었고(창 35:19), 룻기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 곳이요, 다윗이 나서 자란 곳(삼상 16:1, 삼하 23:15)이어서 다윗의 동네로도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요즘처럼 좋은 의료기기가 갖추어진 병원에서 탄생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뜻하고 훈훈한 안락한 방에서 탄생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관(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해산할 여인을 몰인정하게 방치해 버린 민심이었습니다. 누구도 곧 해산할 여인에게 방을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메시야의 탄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사실을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1)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가 되어 저학년 담임선생님이 자기가 맡은 반의 학생들을 데리고 성극을 해야 했는데 무척 똑똑하고 영리한 학생 둘을 골라 한 아이는 마리아를 시키고 한 아이는 수염을 달고 남장을 하여 요셉으로 분장케 했는데 그 이 학년 반에는 왈레스라는 키가 크고 못생긴 일 학년에서 낙제를 한번 했고 또 이 학년에서도 낙제를 한 공부는 못하고 아주 우둔한 학생 하나가 있는데 비록 못 생기기는 했지만 마음은 선량한 아이였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도대체 이 학생에게 무엇을 시켜야하나 하고 생각하다가 생각해 내기를 연기의 대사가 제일 짧고 간단한 역으로 나오는 즉 여인숙의 주인 영감으로 분장 시켜 성극을 연습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바퀴가 달린 목마를 끌고 무대에 나타나서 여인숙의 문을 두드리면 여인숙 주인이 안에서 나오게 되 있고 요셉이 여인숙 주인을 향해서 “주인님, 호적을 하려 온 사람입니다. 여관방마다 만원이고 이 추위에 아내는 해산할 때가 되었고 어디 쉴 곳이 없으니 방 하나 만 빌려 주십시요.” 하면 여인숙 주인이 “안됩니다. 모두 만원이어서 절대로 안됩니다.” 하고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가면 주인으로서의 제일 장면이 끝나고 다시 요셉이 대문을 두드리면 다시 주인이 호롱불을 들고 나와서 “글쎄,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하고 들어가는 것으로 여인숙 주인의 대역이 끝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성극으로 말미암아 전 미국에 큰 화제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 같이 연극이 시작되어 장내는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마리아와 요셉이 하룻밤을 자고 가자고 하니까 여인숙 주인이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하는 장면입니다. 주인이 거절을 하고 들어가자 마리아와 요셉이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어찌하나? 이 추운 겨울날에 여관방마다 만원이고 어디다시한번 사정을 해보자.”하고 요셉과 마리아가 대문을 두드리니 주인이 두 번 째 나타나 “안됩니다. 만원이라 절대로 안됩니다.” 하고 거절하고 들어가면 여인숙 주인의 역할은 끝나는 것인데 주인이 두 번째 나와서는 할 말을 못하고 멍하니 서있기만 합니다.
담임선생님이 급히 막 뒤로 뛰어가서 대사를 읽어 줍니다. “안됩니다. 만원이라서 절대로 안됩니다.” 선생님의 그 말을 받기만 하면 되는 데 전혀 못하고 난처한 얼굴로 서 있기만 합니다.
선생님이 “왈레스야 빨리 하고 들어와야지” 세 번, 네 번 재촉하며 대사를 읽어 주니까 할 수없이 “만원이 되어서” 한마디 해 놓고 또 멍하니 서있고 또 선생님이 재촉하니까 “안됩니다” 하고 멍하니 서있고 퍽 난처한 듯이 머뭇하고 서있습니다. 선생님이 “절대로 안됩니다.” 한마디만 하고 들어오라고 막 뒤에서 재촉을 하니 그제야 이 어린 소년이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 흘리면서 낮은 음성으로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절대로 안됩니다. “말끝을 흐려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로 대문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성극은 계속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무대 동쪽으로 천천히 목마를 끌고 사라져 나가면서 “아, 어찌할꼬, 이 추위에 이렇게 먼길을 지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왔는데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 하면서 요셉이 추워서 떨고 있는 마리아의 등을 어루만지며 한숨 짖고 있는 이 장면에 자기의 대사를 끝내고 사라졌던 왈레스 소년이 문틈으로 이 장면을 내다보고 있다가 후다닥 뛰어 나왔습니다.
자기차례도 다 지나고 연극의 각본에도 없는 장면입니다. 여인숙 문을 박차고 뛰어나와 막 퇴장하려는 요셉과 마리아를 불렸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리 좀 오세요.” 성극을 지도하던 선생님은 물론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졌고 놀랬습니다. 장내는 모두 긴장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영문을 모르고 오라고 부르는 대로 다시 여인숙 대문 앞에 왔습니다.
여인숙 주인의 두 눈에는 언제부터인지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 여인숙 방은 손님들로 인해서 만원입니다. 그렇지만 손님, 내 방이 있습니다. 내 방에라도 모시겠습니다. 이 추위에 이렇게 피곤하고 무거운 몸으로 어디를 가시렵니까 ? 자 어서 들어갑시다. 내 방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소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긴장하여 보고 있던 청중들은 눈물과 감격에 사무쳐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열광적으로 보내었고 막은 조용히 내렸습니다.

이것은 마음씨 좋은, 사람들은 좀 우둔하고 모자란다고 하는 왈레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천사들은 당시 똑똑하고 율법을 연구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렸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먼 이방지역의 동방의 박사들하고 당시 천시 받는 직업이었던 목자들에게 메시야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는 초라하게 짐승의 먹이통에 누우셨습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현장이었지만 이는 분명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10절). 화려한 왕궁에서의 탄생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큰 기쁨을 이렇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마가도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죽음의 덫에 걸려 있는 인생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영원한 사망에서 어쩔 줄 모르는 인생에게 주님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참이 없는, 진실이 없는, 꼬여 있기만 한 이 세상에 이제 참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한 희망입니다. 기쁨이 분명합니다. 우리를 구원할 구주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따뜻한 사람들을 만들어 냅니다.

한 도시에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부부 짐과 델라가 살았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각각 걱정이 되었습니다.
서로에게 선물은 하고 싶은데 너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편 짐은 아내의 긴 머리에 꽂을 머리핀을 사기로 마음먹고 갖고 있던 시계를 팔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내 델라는 남편에게 시계 줄을 선물하기로 하고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 팔았습니다.
두 사람은 시장으로 나가 선물을 구입했습니다.
짐과 델라는 서로를 기쁘게 할 마음으로 거의 같은 시간 집에 도착했습니다.
짐은 머리핀을 들고 아내의 머리에 꽂아 주려고 했으나 아내의 머리는 이미 짧게 깎여 있었습니다.
델라 역시 시계 줄을 들고 있었으나 남편에겐 이미 그 시계가 없었습니다.
준비된 선물은 쓸모 없게 됐었지만 부부는 부둥켜안고 행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은 추위를 녹입니다.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간호사가 주사를 놓기 위해 병실에 들어가니 환자가 침대에 누워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간호사 : 누구한테 편지를 쓰시는 거예요?
환자 : 응. 나한테.
간호사 : 뭐라고 쓰셨는데요?
환자 : 그거야 받아봐야 알지.

여러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받아보아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결정하지 못하고 내 편리함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 자신을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위하여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당신을 위하여 구세주가 오셨습니다.’고 힘있게 성탄의 종소리를 울리는 복음의 메신저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를 기다린 사람 시므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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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23. 주를 기다린 사람 시므온) / 본문 : 누가복음 2:25-33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은 유대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이름가운데 하나입니다. 시므온보다 더 많이 나오는 이름은 ‘시몬’입니다. 베드로의 별명이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시몬도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시므온이 나오는 곳은 레아가 낳은 야곱의 둘째 아들(창 29:33)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이후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의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1절에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요 교사로서 니게르라고도 부르는(행 13:1)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이름은 시몬, 요한 만큼 이스라엘에서 많이 사용하는 이름중의 하나입니다. 흔한 이름이다보니 어떤 학자들은 당시 잘 알려진 유대랍비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버지이며 그가 A.D. 13년에 산헤드린회장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추측일 뿐 정확한 근거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세상의 어떤 직위에 있었던 사람이냐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보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을 기다려온 시므온이 소개됩니다.

첫째,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부모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소개될 때도 의인이요, 흠이 없고 계명과 규례대로 행했다(눅 1:6)고 했습니다. “의롭고”(divkaio”:디카이오스)는 “정의로운, 공정한, 흠 없는”이라는 뜻인데 한가지 더 있습니다. 이 단어는 “적당한”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우리말에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기를 때, 아이가 하는 대로 놔두다보면 버릇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통제가 안됩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이들을 통제하다보면 반항을 하거나 힘이 없는 것을 알면 복종을 합니다. 이런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반항아가 되든지 아니면 창의성이 떨어지고 시키는 것 외에는 알아서 잘 못하게 됩니다. 이러니 아이 키우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의롭다”는 말이 어려운 것입니다.
제가 몇 일전에 오랜만에 목욕탕에 갔습니다. 때가 많이 나와도 저는 손으로만 때를 밉니다. 그런데 쉽게 해보려고 다른 사람이 다 사용하는 이태리타월로 오른쪽 다리와 팔뚝을 밀어봤습니다. 정말 잘 밀리더라구요. 그래서 재미도 있고 해서 살살 더 해봤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저는 지금 오른쪽 팔, 다리가 아픕니다. 너무 밀어서 그렇습니다. 때를 닦은 것이 아니라 살가죽을 벗긴 것 같습니다. 적당한 때는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부과에 사람이 많은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때를 너무 밀어서 생긴 것이 많답니다. 적당히 밀어야 합니다.
의롭다는 말에는 깨끗하다란 의미보다는 적절히, 공정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심을 잡는 중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위로”(prosdecovmeno”:파라클레시스)는 “간청, 애원”이라는 뜻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주님을 간절히,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영감 받은 선지자 없이 침묵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이런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간절이 사모했습니다. 에리미야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고 한 말씀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시므온처럼 위로 받기 위해서는 간절히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조목사님 아들 조수아 하고 캄보디아에 갔었습니다. 24개월이 조금 안된 아이 입니다. 너무 어렸습니다. 낮선 외국에서 부모님이 안보이면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없으면 그 다음에는 접니다. 만일 나 까지 떨어지면 이 어린아이에게는 정말 큰일입니다. 그래서 바지가랑이 잡고 계속 울어댑니다. 6.25때 전쟁고아들 보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울고 또 울어도 부모가 오지 않습니다. 다 죽었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만납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세째,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5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이렇게 세 번 “성령”이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시므온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므온은 26절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평생을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면 살았습니다. 시므온의 소원이 하나 있다면 자신이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시므온의 뜻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는 이제 주님을 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조지 베버리 쉐아(George Beverly Shea)옹의 이야기
1928년 황금의 바리톤 목소리를 소유한 목사의 아들이었던 한 그리스도인 청년이 돈이 없어 대학을 중퇴하고 보험회사 세일즈 맨이 되었습니다. 우연히 방송국 공개홀에서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NBC방송국의 전속가수로 활약해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23세였습니다.
그 앞에는 이제 돈과 인기가 보장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그가 좋아하는 교회에서 그리고 복음집회에서 찬양할 기회가 날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며 기도하던 그가 자기 집 응접실 피아노앞에 앉았을 때 어머니가 평소에 좋아하여 10년을 애송해온 신앙시 한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시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 제 목소리, 제 존재, 제 젊음 모두 주를 위해서만 드리겠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멜로디를 어머니가 애송하는 신앙시에 맞추어 작곡을 시작합니다.
이날 탄생한 찬송이 찬송가 102장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조지 베버리 쉐아(George Beverly Shea)옹의 이야기입니다.
그후로 그는 전도자 빌리 그래함을 만나 그와 더불어 평생을 동역하며
찬양과 간증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역에 헌신하게 됩니다.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것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존귀하고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96세인데 아직도 찬양사역을 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이분이 시므온 같은 분 아니겠습니까?

“이제는”(Nu’n:뉜)으로 시작하는 시므온의 찬양은 일명 ‘시므온의 고별송(Nunc Dimittis), 이제는 떠나가게 한다’로 14세기동안에 걸쳐 즐겨 찬송가로 부르고 기도문으로 낭독해 왔습니다.
시므온은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에서 자신과 하나님을 분명히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주재(despovth”:데스포테스)”로 불렀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에서 “주(퀴리오스)”와 함께 사용되는 “주인, 주권자, 절대자”를 말합니다. 신약에서 56회 사용되었는데 25번은 하나님을 직접 부르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시므온 자신은 “종(dou’lo”:둘로스)”으로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제일 많이 사용하기도 하지만 의미를 잘 모르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어떠한 경우라도 순종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죽을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 의미 없이 주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므온의 노래 본문 30-32절 함께 읽겠습니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노래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을 보았사오니”입니다.
시므온은 ‘메시야’를 보았다고 하지 않고 구원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어질 역사를 본 것입니다. 메시야를 통해서 구원이 구체화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본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일어날 구원의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사역이 어린 아기 예수를 본 시므온은 알았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 갓난아기이지만 예수를 본 시므온은 즐겁고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이 완성된 시대에 살아갑니다. 얼마나 복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둘째, 이방인의 구원을 선포한 것입니다.
“…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라고 말합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선민 사상으로 가득 찬 유대인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시므온 성령의 인도함으로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기 예수는 장차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을 위한 구원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강도해서 말합니다. “만민, 이방”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남기신 마지막 명령도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입니다. 복음은 특정 민족과 혈통에게 제한될 수 없습니다. 빛이 비추이면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피부가 검거나 희다고 해서 빛이 골라 비추지는 않습니다.
로마의 시인 테르툴리아누스는 말합니다. “햇빛은 하수구까지 고르게 비추되 햇빛 자신은 더러워지지 않는다.” 훌륭한 사람은 진흙 속의 진주 같아서 진흙과 함께 있을지라도 주위 환경에 오염되지 않습니다.

칼 막스 이야기
오래 전(1830년대) 어느 날 독일 트리에(Trier)에 살던 유대인 소년이 그의 법률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유대인인데 왜 유대인 회당에 안가고 교회(독일 루터교회)에 나가요?’
아버지의 대답은 전혀 신앙적인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외면(왕따) 당하지 않고 이 땅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단다’
본래 이 소년의 할아버지는 유대인 랍비였습니다.
그의 큰아버지도 역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랍비였습니다.
그러나 현실 감각이 빠르고 세상 이치에 밝았던 이 소년의 아버지는
유대인들에 대한 사회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개신 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심의 경험이 없었던 그는 자기 아들에게 아무런 신앙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었습니다.
나이 6살에 유아세례를 받게 했지만 그것이 이 소년을 믿음의 아들로 자라나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자라던 이 소년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교회를 완전히 떠납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 1847년 그는 엥겔스라는 사람과
영국 런던에서 유명한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칼 막스(Karl Marx)입니다.
결과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만일 이 소년이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면
세상의 역사는 얼마나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교회 안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은 교회 안에서 자라나고
교회를 출입하며 살아가면서도 믿음을 배우지도 못하고 믿음을 지키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은 예비하여 비추시는 하나님의 빛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면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희망이 없던 인류에게 빛이 비추었습니다. 흑암 과도 같았던 이 땅에 한줄기 빛이 되어 오셨습니다.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과 대가를 요구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학문을 배워 전진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땀을 흘려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주님은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사랑은 주어도 주어도 부족한 것이고, 다 주고도 또 부족한 것이 없나 뒤돌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악은 악으로이길 수 없습니다. 미움은 미움을 증오를 낫습니다. 주님의 방법이 옳습니다. 사랑으로만 우리의 문제가 치유될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비춰주시는 빛입니다. 모두 이 빛으로 나오시며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죄인에게 하신 말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2. 죄인에게 하신 말씀) / 본문 : 누가복음 15:1-2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성서주일은 200년 전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영국 웨일즈에서 성경 한 권을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은 가난한 소녀, 메리 존스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영국 런던의 한 종교인 모임에서 전해지면서 성경 보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성서공회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현재 전 세계 142개국에 성서공회가 조직되어 성경 보급사업이 수행되고 있으며 이들 나라의 성서공회는 성서공회가 아직 조직되지 못한 이웃나라에 성서를 보급하는 사업을 지원하고 있는데 이를 모두 합치면 230여 개 나라에서 성서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선교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그 성장이 빨랐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이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초대 장로교회는 이런 말을 사용했습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장로교회가 아니다.’ 그만큼 장로교회는 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은 의인이 아닌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왔다고 했습니다. 어떤 죄인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삽니다. 그러나 어떤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죽습니다.
성경에 ‘말씀’이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나타나는 본문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입니다(마 13:18-23).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결론은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마 13:23), “말씀을 듣고 받아”(막 4:20),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고 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다는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때 출애굽기 3:5절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죄인이 하나님을 만난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것을 고백했기 때문에 그것이 신성모독죄로 판단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판단하게 된 것 역시 죄인들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나폴리의 총독인 오수나 공작이 한번은 죄수들이 노를 젓는 배를 시찰한 일이 있었다. 총독은 죄수를 한 사람씩 만나서 어떤 죄를 짓고 여기에 오게 되었는가 물었다. 죄수들은 한결같이 누명을 썼다느니, 함께 죄를 지은 자가 자기에게 죄를 다 뒤집어씌웠다느니, 판사가 공정한 판결을 내리지 못했다는 등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죄수는 이렇게 말했다.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1.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 본문 : 마가복음 2:13-17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원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제가 섬기는 한국컴퓨터선교회(KCM)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가 산학협력을 맺고있어 2006년도 학생 선발에 특별전형으로 신학과, 선교학과, 기독교교육학과, 선교영어학과에 각각 1명을 추천할 수 있습니다. 추천하는 학생은 고교내신성적과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보지 않았어도 됩니다. 그런데 무조건 합격이 되는 것은 아니며 두 가지 시험을 봅니다. 성경고사 20%(200점), 구술면접 80%(800점) 총점 1,000점으로 뽑습니다. 수능성적은 미 반영입니다. 우리나라 대학을 이 정도로 들어가는 것이면 거의 그냥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추천을 아무나 해주나요? 또 추천되었다고 학교에서 아무나 뽑나요? 구술면접이 80%반영됩니다. 이게 제일 쉬운 것 같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제자를 뽑으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뽑으시냐 하면 다른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는 사람을 뽑습니다. 한마디로 죄인을 뽑습니다. 아마 제가 대학교에 전과가 있거나 현재 죄인을 추천하면 떨어질걸요? 면접이 80%아닙니까 그러니 안되지요. 차라리 시험을 보면 관계없을지 모릅니다.

범죄의 전과가 있는 분이 직장을 구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또다시 범죄의 길을 가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노력을 하지만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이 변명이 되어 죄를 짓는 것이 합리화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는 정치적으로는 혼란했지만 도덕적으로, 율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던 때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만들어놓은 계명은 248개의 지켜야할 계율과 365개의 금지조항과 613개의 세세한 규정을 나누어 놓았습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1,521개의 수정 조항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예수님이 산헤드린공회 같은 정계나 교계로 진출하시려면 자기관리를 잘하셔야 합니다. 꼭 그런 곳에 가시지 않더라도 랍비의 칭함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시려면 자기관리를 잘하셔야 합니다.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은 특히 이 사회에서는 사람들에게 눈총 받는 일을 하면 안됩니다. 제사장과 랍비, 바리새인의 세력을 절대 무시하시면 안됩니다. 이 상류층 지도자 그룹을 무시하고는 유대 사회에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신경을 전혀 안 쓰십니다. 아예 사람들의 눈은 의식조차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식사하자고 하면 거절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집이 누구의 집이던 관계없습니다. 너무 시장하셔서 그럴까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또 제사장이나 고고한 집에서는 부르지도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대의 100부장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기 집으로 예수님을 초청할 수는 없고, 자기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중에 찾아오지 않습니까. 이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은 바리새인들과 당시 주류사회가 볼 때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바리새인보다는 비천한 세리를 칭찬했습니다.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최초로 밝힌 것은 다섯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여인 에게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 마지막 용서했던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있는 강도입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이 낳은 유명한 기독교인입니다. 그는 시장 아버지와 첩이었던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이었을 때 양친이 모두 죽었으며, 그는 가족 농장으로 보내져 계모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신체적으로 학대를 당했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였으며, 남은 생애 동안 외로움의 상처를 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왜 나 같은 것을 낳았느냐고 부모를 원망하면서 성장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몸이 약해 검사해 보니 폐결핵 3기였습니다. 그는 소망 없이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담 모퉁이에 우두커니 기대서서 역시 자기 생을 비관하고 있을 때에 북 치고 나팔을 불면서 지나가는 구세군 전도대를 만났습니다. 저들이 전도하면서 외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