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4. 크리스마스) / 본문 : 누가복음 2:1-7
“1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아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제가 중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그 때는 교회에 나가기 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몇 일 지나서 교회 옆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시골교회라 정말 마구간 같은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성극에 사용했던 용품들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저는 호기심에 가까이 가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로 사용했던 것 같이 보이는 아기인형도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그 아기 인형을 우리 집으로 가져오고 싶었지만 도둑질을 하는 것 같아서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 아기 인형이 기억납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언제 그런 연극이 있었는지 잊어버리고 버려진 아기 예수 인형처럼 예수님을 버리시거나 잊으시면 안됩니다.
미국에서의 어떤 심리학 교수 한 분이 40명 여명의 학생들에게 단어 연상 테스트를 실시했습니다. “크리스마스”란 단어를 주고, 생각나는 것을 하나씩 적어보게 한 심리 테스트였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트리, 가시나무, 선물, 칠면조, 휴일, 캐롤, 산타클로스, 사슴” 등 모두 각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를 적어낸 학생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는 무엇입니까? 혹 예수가 빠져있는, 예수가 버려진 크리스마스는 아닌가 생각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오직 예수’를 위한 날입니다. 따라합시다. ‘오직 예수’. 성격이 급하신 분은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줄여서 “오 예~~”입니다. 따라합시다. “오 예~~”
언제인가 일본에서 여자중학교 2학년 학생이 수석을 다투던 동급학생을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 아이 생각에는 그 놈만 죽이면 자기가 수석을 독차지 할 수 있을 것이란 경쟁심 때문에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경쟁사회가 갖다주는 비극을 잘 설명해줍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보면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야기의 요점은 달리기를 잘하는 토끼라도 나태해서 상대의 추격을 우습게 알고 낮잠을 자면 질 수 있다는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어른중심의 이야기입니다. 거북이 입장에서 보면 이 게임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달리기를 하는데 거북이는 너무나 불리한 신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북이가 잘 하는 것으로 할 수도 있는데 처음부터 토끼에게 너무 유리한 게임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창의성을 무시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경쟁심을 유발시키는 이야기하나를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 20:26-28에 나옵니다. “26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성탄절기가 되면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성탄절은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는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크리스마스(Christmas)의 단어 뜻은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을 축하하는 경배의 날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정확한 크리스마스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언어인 헬라어에 보면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단어인
헬라어 명사는 주격으로 쓰면 (시그마)가 붙여져 ‘크리스마’를 주격으로 사용하면 (크리스마스)가 됩니다. 즉 ‘그리스도(크리스마)’ 는 예수의 공적직함으로 구약에서는 제사장, 선지자, 왕에게 기름부음으로 그 직능을 수행한 것인데, 신약에서는 오직 예수께 이 용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 가지의 직능의 완성자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신의 직분을 어떻게 완성해 가셨습니까?
사람들 위에 군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자랑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사람인척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가 능력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일 많이 사용한 자신의 신분을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人子입니다. 즉 나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는 단순한 것입니다(미국의 힘, 러시아의 힘).
1969년. 미국의 나사는 우주비행사를 달에 보내려는 중요한 순간에 볼펜을 우주에서 사용할 수 없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볼펜은 중력에 의해 잉크가 밑으로 흘러내리는 원리를 이용해 볼에 묻혀 쓰는 것이었으니 무중력 상태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나사는 10년 동안 120만 달러의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우주는 물론이고 바다 속에서도 쓸 수 있는 볼펜을 개발해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우주인들은 … 그냥 연필을 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의 섭리적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가 예언 성취를 위해서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아구스도는 호적령을 내려 인구조사를 통해 세금을 징수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아구스도는 자신이 통치하는 백성들을 정책적으로 이용해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임으로 막강한 나라를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다른 것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대로(미 5:2)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베들(집) 레헴(빵, 떡) 두말이 합쳐져서 된 것입니다. 즉 그 뜻은 ‘빵집’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요 6:35, 48)으로 오셨습니다.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요 6:50)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이 땅에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구약 시대에 에브랏(창 48:7, 룻 1:2, 삼상 17:2), 에브라다(미 5:2)로 불렀습니다.
그 곳에서 라헬이 죽었고(창 35:19), 룻기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 곳이요, 다윗이 나서 자란 곳(삼상 16:1, 삼하 23:15)이어서 다윗의 동네로도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요즘처럼 좋은 의료기기가 갖추어진 병원에서 탄생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뜻하고 훈훈한 안락한 방에서 탄생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관(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해산할 여인을 몰인정하게 방치해 버린 민심이었습니다. 누구도 곧 해산할 여인에게 방을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메시야의 탄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사실을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1)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가 되어 저학년 담임선생님이 자기가 맡은 반의 학생들을 데리고 성극을 해야 했는데 무척 똑똑하고 영리한 학생 둘을 골라 한 아이는 마리아를 시키고 한 아이는 수염을 달고 남장을 하여 요셉으로 분장케 했는데 그 이 학년 반에는 왈레스라는 키가 크고 못생긴 일 학년에서 낙제를 한번 했고 또 이 학년에서도 낙제를 한 공부는 못하고 아주 우둔한 학생 하나가 있는데 비록 못 생기기는 했지만 마음은 선량한 아이였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도대체 이 학생에게 무엇을 시켜야하나 하고 생각하다가 생각해 내기를 연기의 대사가 제일 짧고 간단한 역으로 나오는 즉 여인숙의 주인 영감으로 분장 시켜 성극을 연습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바퀴가 달린 목마를 끌고 무대에 나타나서 여인숙의 문을 두드리면 여인숙 주인이 안에서 나오게 되 있고 요셉이 여인숙 주인을 향해서 “주인님, 호적을 하려 온 사람입니다. 여관방마다 만원이고 이 추위에 아내는 해산할 때가 되었고 어디 쉴 곳이 없으니 방 하나 만 빌려 주십시요.” 하면 여인숙 주인이 “안됩니다. 모두 만원이어서 절대로 안됩니다.” 하고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가면 주인으로서의 제일 장면이 끝나고 다시 요셉이 대문을 두드리면 다시 주인이 호롱불을 들고 나와서 “글쎄,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하고 들어가는 것으로 여인숙 주인의 대역이 끝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성극으로 말미암아 전 미국에 큰 화제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 같이 연극이 시작되어 장내는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마리아와 요셉이 하룻밤을 자고 가자고 하니까 여인숙 주인이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하는 장면입니다. 주인이 거절을 하고 들어가자 마리아와 요셉이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어찌하나? 이 추운 겨울날에 여관방마다 만원이고 어디다시한번 사정을 해보자.”하고 요셉과 마리아가 대문을 두드리니 주인이 두 번 째 나타나 “안됩니다. 만원이라 절대로 안됩니다.” 하고 거절하고 들어가면 여인숙 주인의 역할은 끝나는 것인데 주인이 두 번째 나와서는 할 말을 못하고 멍하니 서있기만 합니다.
담임선생님이 급히 막 뒤로 뛰어가서 대사를 읽어 줍니다. “안됩니다. 만원이라서 절대로 안됩니다.” 선생님의 그 말을 받기만 하면 되는 데 전혀 못하고 난처한 얼굴로 서 있기만 합니다.
선생님이 “왈레스야 빨리 하고 들어와야지” 세 번, 네 번 재촉하며 대사를 읽어 주니까 할 수없이 “만원이 되어서” 한마디 해 놓고 또 멍하니 서있고 또 선생님이 재촉하니까 “안됩니다” 하고 멍하니 서있고 퍽 난처한 듯이 머뭇하고 서있습니다. 선생님이 “절대로 안됩니다.” 한마디만 하고 들어오라고 막 뒤에서 재촉을 하니 그제야 이 어린 소년이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 흘리면서 낮은 음성으로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절대로 안됩니다. “말끝을 흐려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로 대문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성극은 계속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무대 동쪽으로 천천히 목마를 끌고 사라져 나가면서 “아, 어찌할꼬, 이 추위에 이렇게 먼길을 지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왔는데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 하면서 요셉이 추워서 떨고 있는 마리아의 등을 어루만지며 한숨 짖고 있는 이 장면에 자기의 대사를 끝내고 사라졌던 왈레스 소년이 문틈으로 이 장면을 내다보고 있다가 후다닥 뛰어 나왔습니다.
자기차례도 다 지나고 연극의 각본에도 없는 장면입니다. 여인숙 문을 박차고 뛰어나와 막 퇴장하려는 요셉과 마리아를 불렸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리 좀 오세요.” 성극을 지도하던 선생님은 물론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졌고 놀랬습니다. 장내는 모두 긴장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영문을 모르고 오라고 부르는 대로 다시 여인숙 대문 앞에 왔습니다.
여인숙 주인의 두 눈에는 언제부터인지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 여인숙 방은 손님들로 인해서 만원입니다. 그렇지만 손님, 내 방이 있습니다. 내 방에라도 모시겠습니다. 이 추위에 이렇게 피곤하고 무거운 몸으로 어디를 가시렵니까 ? 자 어서 들어갑시다. 내 방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소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긴장하여 보고 있던 청중들은 눈물과 감격에 사무쳐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열광적으로 보내었고 막은 조용히 내렸습니다.
이것은 마음씨 좋은, 사람들은 좀 우둔하고 모자란다고 하는 왈레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천사들은 당시 똑똑하고 율법을 연구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렸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먼 이방지역의 동방의 박사들하고 당시 천시 받는 직업이었던 목자들에게 메시야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는 초라하게 짐승의 먹이통에 누우셨습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현장이었지만 이는 분명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10절). 화려한 왕궁에서의 탄생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큰 기쁨을 이렇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마가도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죽음의 덫에 걸려 있는 인생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영원한 사망에서 어쩔 줄 모르는 인생에게 주님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참이 없는, 진실이 없는, 꼬여 있기만 한 이 세상에 이제 참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한 희망입니다. 기쁨이 분명합니다. 우리를 구원할 구주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따뜻한 사람들을 만들어 냅니다.
한 도시에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부부 짐과 델라가 살았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각각 걱정이 되었습니다.
서로에게 선물은 하고 싶은데 너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편 짐은 아내의 긴 머리에 꽂을 머리핀을 사기로 마음먹고 갖고 있던 시계를 팔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내 델라는 남편에게 시계 줄을 선물하기로 하고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 팔았습니다.
두 사람은 시장으로 나가 선물을 구입했습니다.
짐과 델라는 서로를 기쁘게 할 마음으로 거의 같은 시간 집에 도착했습니다.
짐은 머리핀을 들고 아내의 머리에 꽂아 주려고 했으나 아내의 머리는 이미 짧게 깎여 있었습니다.
델라 역시 시계 줄을 들고 있었으나 남편에겐 이미 그 시계가 없었습니다.
준비된 선물은 쓸모 없게 됐었지만 부부는 부둥켜안고 행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은 추위를 녹입니다.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간호사가 주사를 놓기 위해 병실에 들어가니 환자가 침대에 누워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간호사 : 누구한테 편지를 쓰시는 거예요?
환자 : 응. 나한테.
간호사 : 뭐라고 쓰셨는데요?
환자 : 그거야 받아봐야 알지.
여러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받아보아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결정하지 못하고 내 편리함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 자신을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위하여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당신을 위하여 구세주가 오셨습니다.’고 힘있게 성탄의 종소리를 울리는 복음의 메신저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