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 거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9. 주 안에 거하라) / 본문 : 요한복음 15:4-11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이미지는 그림을 통해서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빨간색으로 걸친 홍포와 구레나룻(髥 whiskers)수염 그리고 길게 느리워진 머리모양입니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네 자신의 것”이라는 쇼는 무대 배경에 두 장의 컬러 슬라이드로 끝이 납니다. 한 장의 슬라이드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여호와 하나님이고 또 하나는 달력에 그려진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그리고는 이런 대화가 오갑니다.
하나님 : 아들이여!
예수님 : 예, 아버지
하나님 : 대체 언제 그 머리를 깍을 작정이냐?
물론 이것은 사람들의 상상에서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수염은 권위를 나타냅니다. 성인 유대인들은 수염을 기릅니다. 그리고 빨간(자주) 색의 흉포는 왕의 옷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이러한 모습을 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외모와 관련해 성경은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한가지 있다면 이사야가 예언한 부분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입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예수님도 외모로 취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을 마음에 그립니다. 그리고 그 예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편견으로 만들어낸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님의 내면적 모습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입니다. 포도원은 다른 종자들을 섞어 재배하지 말도록 되었습니다(신 22:9). 그래야만 순수한 포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경기도 마석에 살았었는데 큰집이 강원도 양구에 있습니다. 아버님이 강원에 사셨기 때문에 강원도 찰옥수수가 맛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자를 가지고 오셔서 심으셨습니다. 처음 한해는 강원도 찰옥수수처럼 되는데는 그 다음해에 다시 심으면 보통 옥수수처럼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 ‘들포도’라고 비유했습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사 5:4)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온전히 하나님 안에 거하심으로 참 포도나무가 되신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에 달려있는 가지 역시 참 포도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맹자왈, 공자왈이라고 말할 때 맹자, 공자가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성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모두가 자신이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혼자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는 고백을 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요 5:19) ‘보지 않고는’ 본문을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보지 않는 한’입니다. ‘에안 메(eja;n mhv)’ ‘만일 …하지 않는다면’이 문장 전체를 현재 가정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항상 보고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만 행하시겠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8)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전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계심을 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하나가 되셔서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주) 안에 거하라
오늘 본문 말씀에 ‘내 안에’라는 말이 5번나오고, ‘너희(저) 안에’가 3번, ‘사랑 안에’가 3번나옵니다. 모두 ‘…안에’라는 말이 모두 11번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은 이토록 간절히 주님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첫째,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됩니다. 그것이 주님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이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사무실에 전화가 잘 안 걸려오는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계속하려고 하는데 제가 그냥 끊어버렸습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데 왜 기분이 별로 일까요? 그것은 기계소리였습니다. 미리 입력해 놓은 음성으로 기계적으로 들려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소리가 아닙니다. 나와 대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기계가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르십니다. 일방적으로 하실 것 같으면 벌써 끝났는지 모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토록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주 안에 거하는 것은 “사랑 안에 거하라”입니다. 9, 10절에는 ‘사랑 안에’로 나옵니다. 주 안에 라는 말은 사랑 안에 입니다. 아기가 엄마와 함께 하는 것은 단순히 엄마 안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집 앞에는 그의 소유인 작은 공터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공터에 쓰레기를 버렸습니다. 쓰레기장이 되어 버린 공터에서는 악취가 풍겨 났습니다. 부자는 돈을 들여 쓰레기를 치웠습니다.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그러나 며칠이 못되어 또 쓰레기가 쌓였습니다. 팻말의 강도를 높여서 벌금을 내게 해도 쓰레기는 치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에서 나이 많은 아버지가 부자 아들의 집을 찾아 왔습니다. 노인은 쓰레기 때문에 연신 불평하는 아들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노인은 공터로 가서 팻말을 뽑아 쓰레기와 함께 태워 버리고 철조망도 걷어 버렸습니다. 삽과 괭이로 공터를 다듬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무엇인가 정성껏 심었습니다. 공터가 깨끗해졌습니다.
며칠 지나 비가 한번 내리고 다시 며칠이 지나자 공터에는 새싹이 돋아났고 이내 먹음직한 시금치가 되었습니다. 노인은 커다란 팻말을 세웠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조금씩 뜯어 가십시오.”
사람들은 더 이상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시금치 철이 지나거든 철 따라 꽃을 심으려무나. 쓰레기를 치우는 것보다 돈도 덜 들 거다.”
내(주) 안에 거하면 얻게되는 5가지 축복
첫째, 과실을 절로 맺습니다. “4 …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5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가지는 저절로 과실이 맺혀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께 붙어만 있으면 과실이 맺힙니다. 우리가 과실이 없다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7절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가 있지만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기도는 육신의 안목과 우리의 육체적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과 뜻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리되어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버려진 가지입니다. “이루리라”는 말씀은 ‘이미 이루어 졌다’는 완료형입니다. 마가복음 11:24의 “구하는 것을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목사님인 우찌무라 간조가 그가 죽을 때 이런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내 평생 나와 함께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기도한대로 내 뜻대로 안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됐다면 형편없는 인간이 될 뻔했습니다. 그것이 내 뜻대로 안됐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결국 내 뜻에 플러스 알파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축복 이전엔 반드시 연단이 있고 그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됩니다.
셋째, 8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구약시대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겠습니까? 이미 주님께서 다 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무엇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마지막 하신 말씀처럼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이루어진 것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넷째, 8절 하반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주님 안에 있어야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있어야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1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고 주님이 직접 결론을 내려 주십니다. 주님은 기쁨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그 길은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명절 때가 되면 집안 식구들이 모입니다. 다른 분들이 저보고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답니다. ‘술을 먹을 줄 아나, 세상의 별 다른 취미가 있나, 운동을 할 줄 아나’ 제가 생각해도 정말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기쁨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영원한 기쁨입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저자 안요한 목사님은 본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예수님안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그늘이 너무나 지겹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를 쓰고 주님을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일류대학도 나오고, 예쁜 아내와 결혼도 하고 미국유학에 오를 수 있는 길도 열리고, 승승장구하였습니다. 그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어. 하나님을 떠나서도 잘 되잖아!”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도 떠나고 미국유학 허가 통지서도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거지가 되었습니다. 구두닦이 소년 전진호라는 학생이 빌어다 주는 빵 몇 조각으로 전전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서 그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 붙어있어야 합니까? 물론 참 포도나무이지요. 우리는 교회에 달라붙어야 합니다. 여기에 붙으라고 자꾸 말하고 있습니다. 붙지 않으면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붙으면 열매를 맺는다, 많은 열매가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은 붙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붙는 종교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달라붙듯이, 거지 바디매오가 달라붙듯이 우리는 주님에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나의 평생 자자손손 주님의 교회에 달라붙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달라붙으면 승리합니다. 열매가 맺어집니다. 아무리 문제가 많고 시험이 많을지라도 교회생활에 주님께 달라붙는 일에만 성공하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4:3-4보면 바알브올을 좇는 모든 사람은 진멸하셨고 4절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사도행전 11장 19절로부터 보면 스데반이 순교한 후에 그리스도인이 흩어져서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저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냅니다. 안디옥에 도착하여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행 11:23)라고 했습니다. 주께 붙어 있으면 됩니다.
오늘 설날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주앙교회에 붙어있는 여러 분들이야 말로 주님께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아무 것도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뿌리로부터 영양분이 올라와야 열매를 맺습니다. 가지인 우리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가지가 할 일은 붙어있는 겁니다. 교회 생활하다보면 때로는 시험이 옵니다. 성도간에 목회자와도 섭섭한 마음이 들 때도 생깁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붙어있는 겁니다. 그런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주님께서 충만한 기쁨을 주십니다. 이 기쁨을 맛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