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 거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9. 주 안에 거하라) / 본문 : 요한복음 15:4-11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이미지는 그림을 통해서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빨간색으로 걸친 홍포와 구레나룻(髥 whiskers)수염 그리고 길게 느리워진 머리모양입니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네 자신의 것”이라는 쇼는 무대 배경에 두 장의 컬러 슬라이드로 끝이 납니다. 한 장의 슬라이드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여호와 하나님이고 또 하나는 달력에 그려진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그리고는 이런 대화가 오갑니다.

하나님 : 아들이여!
예수님 : 예, 아버지
하나님 : 대체 언제 그 머리를 깍을 작정이냐?

물론 이것은 사람들의 상상에서 그려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수염은 권위를 나타냅니다. 성인 유대인들은 수염을 기릅니다. 그리고 빨간(자주) 색의 흉포는 왕의 옷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이러한 모습을 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외모와 관련해 성경은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한가지 있다면 이사야가 예언한 부분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입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예수님도 외모로 취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을 마음에 그립니다. 그리고 그 예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편견으로 만들어낸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님의 내면적 모습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비유를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입니다. 포도원은 다른 종자들을 섞어 재배하지 말도록 되었습니다(신 22:9). 그래야만 순수한 포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경기도 마석에 살았었는데 큰집이 강원도 양구에 있습니다. 아버님이 강원에 사셨기 때문에 강원도 찰옥수수가 맛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자를 가지고 오셔서 심으셨습니다. 처음 한해는 강원도 찰옥수수처럼 되는데는 그 다음해에 다시 심으면 보통 옥수수처럼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 ‘들포도’라고 비유했습니다.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사 5:4)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온전히 하나님 안에 거하심으로 참 포도나무가 되신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에 달려있는 가지 역시 참 포도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맹자왈, 공자왈이라고 말할 때 맹자, 공자가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성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모두가 자신이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혼자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는 고백을 하셨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요 5:19) ‘보지 않고는’ 본문을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보지 않는 한’입니다. ‘에안 메(eja;n mhv)’ ‘만일 …하지 않는다면’이 문장 전체를 현재 가정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항상 보고 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만 행하시겠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8)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전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계심을 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하나가 되셔서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주) 안에 거하라

오늘 본문 말씀에 ‘내 안에’라는 말이 5번나오고, ‘너희(저) 안에’가 3번, ‘사랑 안에’가 3번나옵니다. 모두 ‘…안에’라는 말이 모두 11번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은 이토록 간절히 주님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첫째,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됩니다. 그것이 주님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이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사무실에 전화가 잘 안 걸려오는 전화기에서 벨이 울렸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계속하려고 하는데 제가 그냥 끊어버렸습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데 왜 기분이 별로 일까요? 그것은 기계소리였습니다. 미리 입력해 놓은 음성으로 기계적으로 들려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소리가 아닙니다. 나와 대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기계가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르십니다. 일방적으로 하실 것 같으면 벌써 끝났는지 모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토록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주 안에 거하는 것은 “사랑 안에 거하라”입니다. 9, 10절에는 ‘사랑 안에’로 나옵니다. 주 안에 라는 말은 사랑 안에 입니다. 아기가 엄마와 함께 하는 것은 단순히 엄마 안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집 앞에는 그의 소유인 작은 공터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공터에 쓰레기를 버렸습니다. 쓰레기장이 되어 버린 공터에서는 악취가 풍겨 났습니다. 부자는 돈을 들여 쓰레기를 치웠습니다.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그러나 며칠이 못되어 또 쓰레기가 쌓였습니다. 팻말의 강도를 높여서 벌금을 내게 해도 쓰레기는 치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에서 나이 많은 아버지가 부자 아들의 집을 찾아 왔습니다. 노인은 쓰레기 때문에 연신 불평하는 아들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노인은 공터로 가서 팻말을 뽑아 쓰레기와 함께 태워 버리고 철조망도 걷어 버렸습니다. 삽과 괭이로 공터를 다듬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무엇인가 정성껏 심었습니다. 공터가 깨끗해졌습니다.
며칠 지나 비가 한번 내리고 다시 며칠이 지나자 공터에는 새싹이 돋아났고 이내 먹음직한 시금치가 되었습니다. 노인은 커다란 팻말을 세웠습니다.
“필요하신 분은 조금씩 뜯어 가십시오.”
사람들은 더 이상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시금치 철이 지나거든 철 따라 꽃을 심으려무나. 쓰레기를 치우는 것보다 돈도 덜 들 거다.”

내(주) 안에 거하면 얻게되는 5가지 축복

첫째, 과실을 절로 맺습니다. “4 …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5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가지는 저절로 과실이 맺혀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께 붙어만 있으면 과실이 맺힙니다. 우리가 과실이 없다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7절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가 있지만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기도는 육신의 안목과 우리의 육체적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과 뜻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리되어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버려진 가지입니다. “이루리라”는 말씀은 ‘이미 이루어 졌다’는 완료형입니다. 마가복음 11:24의 “구하는 것을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목사님인 우찌무라 간조가 그가 죽을 때 이런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내 평생 나와 함께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내가 기도한대로 내 뜻대로 안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됐다면 형편없는 인간이 될 뻔했습니다. 그것이 내 뜻대로 안됐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결국 내 뜻에 플러스 알파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축복 이전엔 반드시 연단이 있고 그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됩니다.

셋째, 8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구약시대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겠습니까? 이미 주님께서 다 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무엇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마지막 하신 말씀처럼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이루어진 것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넷째, 8절 하반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주님 안에 있어야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있어야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1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고 주님이 직접 결론을 내려 주십니다. 주님은 기쁨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직 그 길은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명절 때가 되면 집안 식구들이 모입니다. 다른 분들이 저보고 무슨 재미로 사는지 모르겠답니다. ‘술을 먹을 줄 아나, 세상의 별 다른 취미가 있나, 운동을 할 줄 아나’ 제가 생각해도 정말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이 알 수 없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기쁨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영원한 기쁨입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저자 안요한 목사님은 본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예수님안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그늘이 너무나 지겹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를 쓰고 주님을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일류대학도 나오고, 예쁜 아내와 결혼도 하고 미국유학에 오를 수 있는 길도 열리고, 승승장구하였습니다. 그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어. 하나님을 떠나서도 잘 되잖아!”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시력을 잃고 장님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도 떠나고 미국유학 허가 통지서도 휴지조각이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거지가 되었습니다. 구두닦이 소년 전진호라는 학생이 빌어다 주는 빵 몇 조각으로 전전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서 그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 붙어있어야 합니까? 물론 참 포도나무이지요. 우리는 교회에 달라붙어야 합니다. 여기에 붙으라고 자꾸 말하고 있습니다. 붙지 않으면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붙으면 열매를 맺는다, 많은 열매가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은 붙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붙는 종교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달라붙듯이, 거지 바디매오가 달라붙듯이 우리는 주님에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나의 평생 자자손손 주님의 교회에 달라붙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달라붙으면 승리합니다. 열매가 맺어집니다. 아무리 문제가 많고 시험이 많을지라도 교회생활에 주님께 달라붙는 일에만 성공하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4:3-4보면 바알브올을 좇는 모든 사람은 진멸하셨고 4절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사도행전 11장 19절로부터 보면 스데반이 순교한 후에 그리스도인이 흩어져서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저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냅니다. 안디옥에 도착하여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행 11:23)라고 했습니다. 주께 붙어 있으면 됩니다.
오늘 설날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주앙교회에 붙어있는 여러 분들이야 말로 주님께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아무 것도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뿌리로부터 영양분이 올라와야 열매를 맺습니다. 가지인 우리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가지가 할 일은 붙어있는 겁니다. 교회 생활하다보면 때로는 시험이 옵니다. 성도간에 목회자와도 섭섭한 마음이 들 때도 생깁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붙어있는 겁니다. 그런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주님께서 충만한 기쁨을 주십니다. 이 기쁨을 맛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보를 빼어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8. 들보를 빼어라) / 본문 : 마태복음 7:1-5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술은 파리, 정치는 시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 이야기입니다. 정치는 시골뜨기나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귀부인(마담)들이 살롱에 앉아서 정치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남의 집 스캔들을 말하는 것보다 더 교양이 없는 행동으로 평가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총리의 이름은 몰라도 ‘앙리나 지단’같은 스포츠 스타들은 다 안다는 것입니다. 또한 되도록 이면 정치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밖에 다른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지만 결국 우리는 편을 가르고 있고 또 거기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생겨나는 심리적 영향이 더 큰 문제인 것입니다.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비판하는 버릇이 생깁니다.
우리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은 자신에게 똥이 묻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보단 자신에게 묻은 똥이 남에게 묻은 겨보다 덜 더럽다고 굳게 믿고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난 발끝에 약간 묻었지만, 넌 몸 전체에 겨가 묻었잖아? 그러니 네가 더 더러워’라는 식입니다.

노먼 메일러는 흑인해방을 거부하는 미국의 젊은 세대를 향해서 ‘백색의 흑인’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얼굴빛은 희어도 그들의 마음과 말은 흑인들 보다 더 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가는 방법은 예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면 됩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 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1. 비판하지 말라(1절)

티를 찾고 있는 사람 중엔 목사의 설교를 삐딱하게 듣거나 자기 표준에서 빗나간 것만 찾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항상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듣는 일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서 자신이 승진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기 눈의 들보가 있는 사람입니다.
‘비판하다’의 원문은 크리노(krivnw)는 ‘정죄하다, 결정하다, 판결하다, 언도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낱말의 시제는 부정과거형(krivnete:크리네테)로 단 일회적인 행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심판자가 오직 한 분임과 동시에 한번의 심판만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심판자는 세상 끝 날에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한다면 계속의 의미가 담긴 현재 가정법이 사용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똑 같은 죄인으로서 엄격한 의미에서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죄인과 의인으로 선고할 수 없습니다(롬 2:3, 약 2:12, 13, 5:9). 다른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한에 침해하는 것(롬 14:10)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권한에 침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 됩니다.
본문을 다른 말로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남을 저울질하지 말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허물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데, 내 허물 주머니는 뒤에 달고 다니고 남의 허물 주머니는 앞에 달고 다니기 때문에 내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보이는 것입니다.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4절)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페스(!vAfe”) 용납하다, 허락하라’는 이 말은 아주 강압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이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아주 강한 어조입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다른 경우에서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전에 대화한 내용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완강하게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 없음을 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꼭 해야된다는 바로 이 단어 ‘‘아페스(!vAfe”) 허락하라’를 사용하셨습니다(마 3:15).
저는 이 말씀이 특히 우리 한국사람은 깊이 명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민족에 비해서 이 말씀을 어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우리는 집단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속력이 강합니다. 서울월드컵 때 붉은티를 입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응원하는 모습을 보고 외국인들은 적잖이 놀랐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가면 문제가 없지만 자칫 잘못하면 아주 위험한 경우에 빠집니다. 흔히 여론 제판 같은 것을 합니다. 국민이 모두 나서서 사람을 잡습니다.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끝없는 용서뿐입니다.
둘째는 강압적인 태도입니다. 이것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자신이 옳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자주 충돌하고 남을 이해하고 협력하는 것이 잘 안됩니다. 지난번 식당에서 밥 먹는데 옆에 있던 청년, 학생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 외국유학경험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외국에서 토론할 때 한국학생처럼 강조하는 사람이 없답니다. 다른나라 학생들은 다른 생각을 말하면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하는 정도인데 우리는 그 사람의 생각을 고쳐주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편견을 버려야합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강압적인 태도로 밀어붙이면 안됩니다. 설득하고 이해를 시켜서 스스로 판단하도록 만 돕도록 해야 합니다.

클라크 목사는 평양신학교에서 강도학을 가르쳤는데 그의 설교 평은 아주 유명했습니다. 그가 누구라도 설교를 잘했든 못했든
평해 줌으로써 당사자도 좋은 설교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졸업 때가 되면 그 동안 닦은 기량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그 평을 듣는 과정이 있습니다.
한번은 김은석 학생의 차례가 되어 설교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당시교계를 풍자하는 동시에 다른 교파는 별것 없고 장로교만이 진짜 기독교라는 내용을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지금 엉망입니다. 성결교는 울고불고해서 성가시고, 감리교는 소식이 감감하고, 구세군은 북치고 떠들어서 귀찮고, 장로교가 장관입니다.” 설교가 끝나자 학생들은 여기 저기서 웃고 왁자지껄하는 가운데 어떤 학생들은 ”그거 진짜 설교다“라고 하며 농담반 진담반 조로 떠들썩했습니다.
잠시 후에 클라크 목사가 등단하여 설교에 대한 평을 하였습니다. “이 설교 참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없습니다.” 설교에 진실성이 결여된 점을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은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첫째, 자기 일을 등한히 하는 사람이 남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둘째, 자기 허물을 정당화하기 위해 남의 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셋째, 내게 같은 경험이 있을 때 다른 이를 모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르게 지도해주고 위해주어야 할 대상을 더 괴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제가 치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의사가 치료를 하면서 “아프시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조금 아픕니다. 그러나 참을 만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의사는 “제가 힘듭니다”라고 하면서 5분 또는 10분 씩 쉬어가면서 치료를 했습니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환자의 아픔을 체감하는 의사라면 훌륭한 의사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약점을 나의 아픔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2.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5절)

오늘 본문의 제목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본문에서는 ‘들보를 빼라’는 명령은 하셨는데 어떻게 들보를 빼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사람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여”(5절)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나온 것입니다. 외식을 걷어내면 됩니다. “외식하는”이라는 뜻은 ‘연극하다, 꾸미다, 속이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꾸민 것입니다. 이것은 아벨과 가인이 하나님 앞에 드렸던 제사에서 가인이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바로 이 외식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짜라는 것입니다. 아벨이 하니까 샘이 나서 따라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강조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행위가 진정인지 아닌지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들보는 한마디로 허영입니다. 또 다른 표현이 가능한데 구약성경에서 많이 나온 단어입니다.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사용됩니다. 신명기 7: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경우로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신앙을 우상숭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갈수록 아이들 교육이 심각한 상황입니다. 교회 나오시는 분 자녀들도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내 밀리고 있습니다. 자녀의 달란트와 원하는 것은 관계가 없고 부모님이 원하는 명문대를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녀를 잘 교육하는 마음을 왜 이해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명분에 허영에 빠져서 외식하는 자와 같이 자녀를 키우지 않아야 합니다.

아들 3형제를 불러놓고 아버지는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스무 살 될 때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그 대가로 승용차 한 대씩을 사주겠다. 자신이 있는지 자기의 의향을 말해봐라.”
그러나 고등학교 다니는 맏아들이 말했습니다.
“약속만 꼭 지켜주신다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다음에 중학교 다니는 둘째가 말했습니다.
“스무 살은 곤란하고… 한두 살쯤 줄여줄 수 없어요?”
낙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 꼬마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아버지 그런 말을 왜 진작 하지 않았어요!”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악해져가고 있다는 조크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실입니다. 위선이 아닙니다. 명분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람을 원하고 계십니다. 껍데기를 벗어야 합니다. 인간의 허영이란 죄의 모습에서 기인한 외식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께는 그래야 합니다.

3.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라(5절)

예수님의 말씀은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 바른 판단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칼빈도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무조건적인 판단의 기능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바리새인들과 같이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하는 것을 염두해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롬 2:1).

이웃에 대한 험담을 잘하는 아낙네가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든 단점을 먼저 들춰내 헐뜯어 친구가 별로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친정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역시 아낙네는 창가에 앉아 어머니에게 이웃집의 불결함에 대해 험담을 해댔습니다.
“저기 봐요. 옆집 빨랫줄에 널린 옷들이 너무 더러워요. 세탁을 엉터리로 했나봐요.”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자세히 봐라. 이웃집 빨래가 아니라 너희 집 유리창이 더러운 거다.”

유리창을 닦으면 제대로 보입니다. 들보를 빼면 밝히 보입니다(5절). 밝히 보면 형제의 눈속에 티까지도 빼내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고 하셨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게되는 장면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 죄를 사함 받아야(죄를 제거해야) 남도 바르게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 죄를 사함 받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옳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주님 앞에 무릎 꿇음으로, 순종함으로 내 고집을 버리고 들보를 빼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손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7. 예수님의 손길) / 본문 : 마태복음 8:1-4, 막 1:40-44, 눅 5:12-14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미국의 어느 주일학교의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날 함께 공부할 주제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었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보다 친밀하게 느낄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다음과 같은 활동을 준비했습니다. 먼저, 준비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고 난 후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 에 대해서 각자 느끼는 대로 그림을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자 아이들의 그림을 둘러보던 교사의 눈길은 이색적인 그림 앞에서 멈추게 되었습니다. “아! 아 그림 정말 멋진걸, 무얼 그린거지?”
선생님의 감탄 섞인 질문에 이 그림을 그린 한 여자아이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며 대답했습니다.
“이건요, 하나님의 손이에요.”
“오, 그래? 그런데 좀 이상하구나, 하나님의 손이 왜 이렇게 길지?”
그러자 그 아이는 커다란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이 뿌듯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습니다.
“그건요 간단해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돌보시려면 분명히 하나님 손은 이렇게 길거예요.”(G. D. James)

오늘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주앙교회에 미치실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의 말씀’ 시리즈로 설교하는데 오늘은 말씀을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행위 한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손길입니다. 예수님의 손이 닿았던 곳은 모두 회복되었습니다. 병자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예수님이 손을 잡고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났습니다(막 1:30-31).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마 9:25, 막 5:41). 심지어는 예수님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열두 해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의 병도 낳았습니다(눅 8:43-48). 예수님의 손은 치유의 손입니다.
신명기 16:15절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의 복이 예수님께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손을 내미시고, 손을 붙잡으신 것을 별 것 아닌 행동으로 생각하기 싶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이 문둥병자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부정한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레 11:40, 13:46).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에 갇혀있는 분이 아닙니다.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므로 병이 예수님께 온 것이 아니라, 역으로 예수님의 능력이 깨끗한 능력이 병자에게 옮겨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극적인 경우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문둥병자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의 병고침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께 나온 많은 병자들 중의 한 이야기로 싶게 넘겨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야기는 공관복음의 모든 저자가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세 저자 모두 기록내용이 충분하지 않습니다. 남자라는 것, 문둥병자라는 것, 결단한 것은 나와있지만 나머지 사항은 의문이 많습니다. 즉 이름과 과거에 어떻게 지내고 살았던 사람인지 등이 전혀 기록하지 않은 것입니다. 구태여 기록자 입장에서 변명을 하자면 수많은 사람가운데 갑자기 돌출적인 행동으로 예수님께 뛰어나온 이 사람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음은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병원처럼 기록카드를 작성하고 진찰 받고 병을 고친 것도 아니니 당연하다고 생각은 됩니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은 너무 큽니다. 그런 나머지 저는 오늘 설교에 있어서 금기사항처럼 되어있는 성경에 다 기록하지 않은 점을 상상의 나래를 펴서 말씀을 드려보려고 합니다. 우리말에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장을 바꿉니다.

제가 문둥병이 걸리고 나서 내게 손을 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손을 대지도 않았지만 저 역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댈 수도 없었습니다. 사람의 감촉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손길이 닿은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단 한차례도, 우연히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흔해빠진 일이 내게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의 악수가 아내와 딸의 포옹이 그 옛날의 느낌을 찾아보려고 꿈속에서나 느껴보려고 잠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내게 다른 사람이 손을 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도 내 몸에 부딪히는 일도 없습니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을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무리 속에 몸을 부딪히며 어깨를 비벼댈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의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거리에 나다녀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랍비들도 나에게 거리를 두었습니다. 나의 집에 가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회당에도 들어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야말로 접촉해서는 안될 대상이었습니다. 문둥병자 입니다. 아무도 내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오늘까지…

제가 이 남자의 사연을 상상해 보는 것은 신약시대에는 문둥병이 가장 무서운 병이었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은 온 몸이 패여 문들어지는 병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실제로 이 문둥병 환자를 본적이 있습니다. 손과 얼굴이 문들어지고 살갗이 벗어졌는데 어린 나이에 차마 눈뜨고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문둥병의 유형 중에는 말초신경이 마비되어 손가락과 발가락은 물론 손발이 통째로 떨어져 나가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한 개인의 신체적으로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적 결과도 심각했습니다. 문둥병은 전염병으로 통했기 때문에 문둥병자는 거주지로부터 추방되어 격리 당했습니다. 한마디로 문둥병이 걸렸다는 것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내와 자식들 친구들 사회로부터 완전히 버림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청천벽력 같은 일입니다.

벌써 기억이 흐려지는데 어느 해 봄이었습니다. 밭에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손가락에 감각이 무뎌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러다 말겠지 하고 지냈습니다. 한 손가락이 그러더니 점차 다른 손가락도 그랬습니다. 환절기가 되면서 완전히 손에 감각이 없어졌습니다. 아내에게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바깥일은 물론 집안에서 청소하는 일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심해져서 옷을 입는 것조차 힘겨워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수를 하려고 대야에 손을 담갔습니다. 물이 붉은 빛으로 변했습니다. 손가락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어디에 빈 것이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감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당신 옷에도 묻었어요.”아내가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아내는 내 뒤에서 나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순간 이제 더 이상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사장에게 보고하러 갈 때 저도 함께 갈까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아니오. 혼자 가겠소.” 속에서는 같이 가자고 하는데 입에서는 이렇게 나왔습니다. 나는 돌아서는 순간 아내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딸 아이 얼굴을 한번 만졌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어깨도 조용히 만졌습니다. 이것이 제가 다른 사람의 감촉을 느낀 마지막입니다. 오늘까지…
제사장은 나를 만지지 않았습니다. 붕대로 둘둘 말린 내 손을 보고, 슬픔에 잠긴 내 얼굴을 보더니 잠시 있다가 제사장은 입을 가리고 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손을 내민 뒤 “부정하다.”라고 한 마디만 말했습니다. 나는 이 한마디선언으로 가족과 농장과 친구와 미래를 모두 잃었습니다. 제사장에게 원망은 없습니다. 규정대로 하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아내는 옷 보따리와 빵 몇 조각과 동전을 들고 성문으로 날 찾아왔습니다. 아내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내를 본 이후에 내가 만난 모든 이들은 얼굴조차 똑바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기분을 우리는 다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격리나 차별에 대해서 이혼하신 분들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인들도 압니다. 실직해 보신 분도 조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못 배우신 분들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고 한쪽 귀와 코도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나님께 원망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짖을 했다고 이래야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그랬듯이 나 같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지 한번도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몇 주 전 나는 내가 일구던 밭을 보려고 동네에 갔습니다. 멀리서나마 아내의 얼굴과 딸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풀밭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나무 뒤에 숨어서 한참을 보았습니다. 해맑고 밝은 모습에 얼마나 마음이 끌렸는지 잠시 나 자신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문둥병자가 아니라 나는 농부였고, 아버지였고, 동네 아저씨였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에 도취되어 나도 모르게 나무 뒤에서 걸어나와 등등 꼿꼿이 펴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그 때 아이들이 나를 보았습니다. 뒤로 물러설 겨를도 없이 눈에 띄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은 “문둥이다”하고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모두 떠난 자리에 한 아이가 남아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누군가를 찾는 눈치였습니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꼭 내 딸 같았습니다. 내가 오늘 이런 행동을 한 것도 그 아이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이후에 나도 모르게 성격이 불같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이제 죽든지 살든지 해야되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 때 마침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나는 분노에 찾습니다. 참으로 도전적이었습니다. “그래 내가 더 잃을 것이 무엇이 있냐!”는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셨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고쳐야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죽이든 재앙을 더 내리든 고치든 결단을 내든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길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보는 순간 언제 내가 원한이 있었는지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토록 내 마음에 평온을 찾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꿇어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입을 떼시기도 전에 저는 그분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바로 그 때 어디선가 “문둥이다. 부정하다”하면서 돌이 날아왔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나에게 나가오셨습니다. 나는 가만히 꿇어 앉아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손이 내 몸에 닫을 때 내 몸은 뜨거워졌습니다. 내 몸에 손을 댄 것은 아내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느껴보지 못할 줄 알았던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만졌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사장에게 가고있는 중입니다. 제사장에게 보이고 내 아내를 마음껏 끌어안을 것입니다. 내 딸의 얼굴과도 비벼볼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단순히 문동병만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나를 존중해 주셨습니다. 아무도 만지지 않는 더러운 내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무가치한 자가 주님의 만지심으로 주님의 손길로 존귀한 자가 되었고 새 삶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물 속에 빠져 가는 베드로를 보시고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은 저희들에게도 예수님이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잡기만 하면 됩니다. 부디 예수님의 손길을 필요 없다고 뿌리치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들도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기를 바랍니다. 오늘 임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 주앙교회 모든 성도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중국 교회의 한 지도자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루는 기차 여행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석한 세 사람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카드놀이를 하기로 하고 그 형제에게 함께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중하게 사양했지요. 그러니까 세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카드놀이 할 줄 모르십니까?’라고 묻더랍니다. 형제가 조용히 웃으며 ‘할 줄은 알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손은 두었다가 무엇을 하시게요?’ 즉시 돌아온 반문에 그 형제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손은 제 손이 아니라서요. 달리 할 일이 있어서요.’ 세 사람은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자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자기가 최근 예수 믿게 된 동기와 신앙을 간증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신의 몸이 주님의 몸이 되고 자신의 손도 주님의 손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주님의 손으로 카드놀이 하는 것을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아 사양한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대답은 무엇보다 성경 적인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거룩은 무엇을 안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손으로 입으로 몸으로 하나님의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자신의 시간과 존재를 하나님의 일에 드려 보십시오. 죄를 지을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가운데 삶의 진정한 기쁨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6. 예수님과 열두 제자) / 본문 : 요한복음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유일하게 남기신 것이 있다면 빈 무덤과 열두 제자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시고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특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이고, 같은 지역 출신이며, 같은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또 공통점이 있다면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성인 남성들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보통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양한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다양한 배경과 직업과 모습은 예수님이 팀을 형성하시는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분명히 팀 형성을 위한 응집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성격도 달랐지만 직업도 달랐습니다. 직업이 다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알려진 제자는 네 명은 어부였으며(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는 세리, 시몬(베드로가 아닌)은 로마 정권을 전복시키고 독립된 유대국가를 세우려는 열성 당원이었습니다.

사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자신의 욕심이 있어서 따라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이 같은 열두 사람을 택해서 함께 있게 하시며 훈련시켜 나가며, 하나님을 섬기는 본을 보여주시며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눅 11:1). 예수님이 제자를 가르치신 유일하신 방법은 모범을 보이심으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사랑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요한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 직후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을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요 15:9).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요 15:12) 서로 사랑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행한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사랑할 것과 자신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사랑을 드러낼 것을 세 차례 당부하셨습니다(요 14:15, 21, 23).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마 16:17)고 말씀해 주신 것과 배신할 것을 아셨지만(눅 22:34) 그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32절).

제게 기억나는 강아지 하나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우리집은 우물이 없어서 물지게로 물을 길어다 먹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2-3학년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물지게를 낑낑대고 지고 오다가 그만 모자를 어디다 떨어뜨리고 온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모자 하나도 귀했습니다. 그런데 제 뒤에 따라오던 우리집 강아지가 모자를 물고 온 것입니다. 얼마나 신기 한지요. 훈련받지도 않은 똥개였는데 이 개는 다른 개하고는 좀 달랐습니다. 아버님이 어제 장에서 사온 것인데 신기했습니다. 시골에서 이런 개는 처음 보았습니다. 저는 이 강아지 이름을 얼룩얼룩한 털 모양이 있어서 바둑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때부터 부모님과 누나는 이제 그 개는 네 개이니까 네가 알아서 밥도 주고 똥도 치워주고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좋다고 했습니다. 모자 물어다 준 것에 반한 것이지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지겨워 지는 것입니다. “같이 놀 때만 네 개”라든지 “내가 원할 때만 네 개”라고 하면 좋은데 그게 아닙니다. 병이 들었을 때나, 부유하게 되었을 때나, 가난하게 되었을 때나, 진자리 마른자리나… 그 때 퍼뜩 든 생각이 “나는 이제 꼼짝없이 매였구나”입니다. 연애는 끝난 것입니다. 신혼여행도 끝났습니다. 우리는 서로 묶여 있었습니다. 이제 바둑이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의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영속성이라고 합니다. 이 영속성은 사람을 질리게 합니다. 어떤 때는 나를 처다 보는 바둑이가 이유 없이 그렇게 미웠습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반갑다고 멍멍멍’ 그것도 지겨웠습니다.
이제 저도 병이 든 것입니다. 이 병명은 “매임병(病)”(stuckititis)입니다. (stuck란 “꼼짝없이 갇혔다”는 뜻이고 Ititis란 거창한 병명처럼 보이고 싶을 때 아무 단어에다 붙이는 말입니다.) 「맥스 의학용어집」은 이 병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습니다.

“매임병은 숨쉬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발병하는 것으로 특히 출생과 죽음 사이에 찾아온다. 매임병의 증세는 짜증이 늘고 화를 잘 내며 속에 쌓이는 것이 많아진다. 매임병 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은 ‘누구?, 무슨?, 왜?’라는 말이 들어가는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지?, 내가 그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왜 어머니 말을 듣지 않았을까?”

이 사전에서는 매임병의 처방으로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도망간다. 싸운다. 용서한다’입니다. 첫 번째 도망(도피)가는 길을 택한 사람은 다 버리고 다른데 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는 것은 그곳에서 똑같은 증상이 재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정은 전쟁터가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 처방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똑같은 사람들을 한 두 명도 아니고 12명을 365일 3년이 넘도록 봐야했습니다. 똑같은 길을 가고, 똑 같은 배를 타고, 똑 같이 밥을 먹고 가야했습니다. 정말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실 때 꼴 볼 견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제자들은 3년이 넘는 시간동안 말 그대로 동거동락 했습니다. 서로에게 더 이상 감출 것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나 예수님이나 다 들어 난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동안 제자들은 반응은 다른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고’(막 10:24, 참조26절), 심히 놀랐다(32절). 때로는 주님이 하시는 일에 의문을 제기한 적도 있었습니다(요 11:8).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고(요 2:22, 17:8), 그분이 메시아란 사실을 인정했으며(마 16:16, 막 8:29, 눅 4:20), 경배했습니다(마 14:33, 28:17, 눅 24:52-53).

예수님은 제자들이 부당한 비판을 당할 때 변호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보고 비난할 때, 주님은 다윗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진설병을 먹은 일을 호세아 6장 6절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을 옹호하셨습니다(마 12:1-8). 또한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은 것을 장로들의 유전을 범했다고 비방할 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유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므로 그 주장은 유효하지 못하며 오히려 외식하는 자들이라고(마 15:1-9) 이사야 29장 13절의 말씀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비난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눅 5:33-35). 네 번째 주님이 제자들은 변호하신 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 왕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자자들을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간결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37-40) 한 마디로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사랑은 값싼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매우 강도 높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제자들을 칭찬만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점은 언제나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적어도 이런 부분이 복음서에 열 다섯 번에 걸쳐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고, 꾸짖으시고, 엄중히 경고까지 하셨습니다(표 참고).

번호
성구
사건
예수님의 반응
분류
1
마 8:23-26,
막 4:40
풍랑을 만나 물에 빠져 죽을까 두려워한 제자들
“어찌하여 부서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심
믿음의 부족
2
마 17:17,
막 9:19,
눅 9:41
간질병 소년을 고치지 못한 아홉 제자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하심
3
마 16:22-23,
막 8:32-33
자신의 죽음과 베드로의 부인을 미리 말씀하심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고 하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해부족
4
마 26:40, 45,
막 14:37, 41,
눅 22:46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잠든 베드로, 야고보, 요한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5
눅 22:49-51,
요 18:10-11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베드로
“검을 집에 꽂으라”고 하심
6
눅 9:54-55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믿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불사를 것을 구한 야고보와 요한
돌아서셔서 그들을 꾸짖으심
7
마 19:13-14,
막 10:13-16,
눅 18:15-17
예수님이 어루만져 주시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라고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을 꾸짖은 제자들
제자들에게 분노하시고 겸손과 신뢰의 모습을 보이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임을 설명해 주심
8
막 9:38-39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에게 그 일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 요한
요한에게 “그를 금하지 말라”고 하심
겸손함의 부족
9
막 10:35-40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아 권세를 누리기를 원한 야고보와 요한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하심
10
막 10:41-42,
눅 22:24-30
야고보와 요한의 분수를 모르는 교만한 요구에 분개한 열 제자
섬기는 자자 가장 큰 자라고 하심
11
마 26:33-34,
막 14:29-30,
눅 22:33-34,
요 13:37-38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함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하심
12
요 21:21-22
요한의 장래에 관해 질문한 베드로
베드로에게 요한에 관해서는 알것이 없다고 하심
13
마 26:6-13,
막 14:3-9,
요 12:4-8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을 비판한 제자들
“가만 두어라…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하심
그리스도께 드려야하는 영예에 대한 인식 부족
14
막 16:14
부활한 주님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은 제자들
그들의 불신을 꾸짖으심
다른 사람들의 증거에 대한 인식의 부족
15
요 20:27-29
예수님을 만져보기 전에는 부활하신 것을 믿지 않겠다고 한 도마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심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 뿐 아니라 유대인이 아닌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역이 성공할 것을 확신하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고 치유 사역을 감당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마 10:1, 막 3:14-15).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자신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40). 이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이 하늘로 올라간 후에는 제자들이 자신이 한 것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2).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님을 증거했고(요 15:27), 제자들을 길러냈으며(마 28:19),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행 1:8). 예수님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권세와 함께 주신다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이 이상 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은 종이 아니라, 학생이 아니라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요 15:13-15).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가 죽은 후(AD 96년) 사도 요한은 밧모섬의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에베소 교회로 돌아왔을 때 전승에 의하면 그의 18번 설교가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였다고 합니다.
그가 몸이 불편하여 제자들이 부축하여 설교단 의자에 앉게 하면서 “선생님, 오늘은 우리에게 새로운 말씀을 들려 주십시오”하면 그는 백발의 노구로 두 손을 들면서 “소자들아 내가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틴 루터 킹 목사가 노벨상을 수상하는 연설에서 말한 것처럼 “아직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그것은 사랑입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사회를 그리고 우리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유일한 대안도 아직도 주님 가르치신 사랑뿐입니다.

제자들은 비록 부활 후에 증거하는 사람들의 말도 믿지 않았지만 반대로 예수님은 끝까지 믿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확신했습니다. 잘 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처럼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면, 제자가 있다면 그들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격려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제는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더 이상 방황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주인을 만났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면,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면 우리의 일생이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증인’(mavrtu”:말튀스)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순교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온갖 자신의 권리들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육체와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며(갈 5:24), 자신들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롬 6:11). 내가 증인이 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런 대가없이 복음이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나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냥 따르라는 것은 아닙니다. 보장이 있습니다.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앙교회 성도 여러분! 이러한 주님을 따라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를 따라 살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5. 예수를 따라 살자) / 본문 : 요한복음 8:12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사람은 무엇을 따라, 누구를 따라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을 여행하는데 해는 뉘엿뉘엿 져 갑니다. 길을 잃었습니다. 방향을 잃었습니다. 해 지기 전에 오아시스를 만나야 되는데, 그리고,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마침내 모래 위에 있는 발자국을 발견하였습니다. ‘먼저 간 사람이 있구나’ 이 발자국을 따라가면 오아시스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발자국을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발자국을 따라가도 끝이 없는 거예요. 너무나 이상해서 자세히 보았더니, 그게 바로 자기 발자국이었습니다. 자기 발자국을 한평생 따라간들, 어찌 그에게 “새로운 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계속 사막을 맴돌 뿐이었습니다.
새해가 되면 다시 한번 우리 삶의 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말레이시아에서 목회 하시는 목사님의 이야기가 그곳에서 살다 보니까 그곳 사람과 비슷해진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님들이 한 자리에 모이셨을 때 한 이야기가 ‘우리는 철이 없어!’라고 했습니다. 철없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일년 내내 더위가 계속되니까 철이 지나는 것을 모르고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철이 없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1월이면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철을 만나게 되고 이 때 다시 철이 들기 시작합니다. 한해를 잘 설계하고 다짐하고 시작하게 되니까 말입니다. 진짜 철이 들려면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1. 구약 사람들은 법궤를 앞세우고 살았습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민족을 인도할 때 행진하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 지파들이 법궤를 중심으로 감싸고 진군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때에는 법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백성들이 좇아가게 합니다(수 3:3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리고 언제나 이 언약궤가 앞에 나아갔습니다. 수 3: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고 했습니다.
왜 언약궤를 앞세워야 했습니까? 언약궤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이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언약궤가 가면 사람도 가고 언약궤가 멈추면 이스라엘 백성도 멈추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사람이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힘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앞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시대의 빛은 법궤였습니다. 이것만 따라가면 되었습니다.

2. 예수를 따라 살려면…
구약시대 사람들이 법궤를 따라 살았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따라 어떻게 살아야하겠습니까? 오늘 본만 말씀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이라고 하셨습니다. 빛을 따라 살면 됩니다. 식물들이 빛이 있는 곳을 바라보듯이 우리도 빛을 보면 됩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사람도 빛을 보고 나아가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어두움으로 들어가면 죽음뿐입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독일 소도시(Guetersloh)를 짙은 안개 속에 운전하던 두 운전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둘 다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차는 흠집 하나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나중에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이들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하도 안개가 짙어 중앙선조차 잘 보이지 않자 둘 다 운전석 창 밖으로 목을 내놓고 달리다가 맞은편에서 목 내놓고 달려오던 상대방 이마를 서로 박치기 한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세계 유일의 이마 정면 충돌사고였습니다. 사람은 빛으로 나와야 하며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없는 세상은 이보다 더한 끝없는 충돌 사고가 이어질 것입니다.

첫째, 예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이런 들을 수 있는 귀를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씨 뿌리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마음이 완악한 자들은 들으려고 해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다 열린 분들입니다. 완악한 분은 교회 안 옵니다. 아니 못 오는지 모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예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지금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다른 음성을 따라가면 안됩니다.
아이를 잊어버릴 때 보면 아이가 잠시 다른 곳에 눈길을 주면서 부모님을 잊어버립니다. 요 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자기 목자의 음성이 아니면 따라가면 안 됩니다. 여러분 어디 잠깐 가셨다가도 누가 이상한 소리 하거든 얼른 일어나야 합니다. 계속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헌금 드리라고 말 안 한다고 좋다고 가만히 앉아 있다보면 아주 집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 세대를 풍자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둘러앉아 T.V를 보고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화면에서 뽀뽀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때 네 살 짜리가 말하기를 “뽀뽀 하는 거야?”하고 묻자.
다섯 살 짜리가 “저건 키스라는 거야”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섯 살 짜리 꼬마가 “그런데 키스하는 게 좀 서툴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이 세대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TV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창 19:23-26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롯의 가족에게 이곳을 떠나라고 말합니다. 롯은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이성을 빠져 나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롯의 아내는 화려하고 큰 성 소돔과 고모라가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은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 19:17)는 말씀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세상을 뒤돌아 볼 필요가 없습니다. 미련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다 재산을 탕진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 지역의 아이들이 예전에는 “탄광과 새까만 시냇물을 그렸는데 이제는 전당포나 자살하는 사람을 그린답니다”
부흥사 무디는 “회개란 꽃 병 속에 넣은 주먹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가리가 좁은 꽃병 안에서 주먹을 움켜쥐면 손을 뺄 수 없습니다. 돈 명예 지위 권력 구습과 옛 생활 등을 고집하면 회개는 어렵습니다. 주먹손을 비운 ‘열린 손’이 회개입니다.
제가 예수님이 대해서만 오랫동안 설교하는 것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을 들은 주앙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금방 알아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음성을 따라가시라고 예수님 말씀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가라
요 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화합니다. “영감! 영감 죽으면 나도 곧 따라갈게” 바로 본문의 뜻이 이와 같습니다.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순교할 것을 명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당부드릴 것이 있다면 결단입니다.
본문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다 좋은데 결단이 안되고 행동이 안되어서 주님을 못 따라 가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그것이 제일 큰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는 예수님을 직접 따라가면 되었지만 지금은 교회에 나오시면 됩니다. 교회 출석한다는 것이, 여러분! 생각에 따라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면서 또한 제일 쉬운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시는 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첫 걸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참된 길인지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삶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저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예수를 따라 살게되면 이 땅에서도 반드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요.

집사와 집
경상남도 어느작은도시에서 목회 하는 김목사님은 어느 주일 처음으로 교회를 나온 신입교인 한 사람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교회출석 잘하고 예수 잘 믿으면 세례 주고, 집사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교회 나오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신입교인은 김목사님의 말을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면 ‘집을 사’주겠다는 말로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집 사줍니까?”
“그럼요, 목사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가난했던 이 신입교인은 집이 없어 남의 집에 전세 들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김목사님의 말에 감동을 받아 열심히 교회출석을 했습니다.
만 1년만에 학습 세례까지 다 받았습니다.
3년이 되던 신년 초에 그 신입교인은 서리 집사로 처음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 해 가을 어느 날, 그 집사는 목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전세방을 면하고 자기 집을 구하게 되어 이사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사감사예배를 드린 후 그 집사는 목사와 여러 교우들 앞에서 고백할 게 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처음 제가 교회에 나왔을 때 예수만 잘 믿으면 집 사주신다고 해서 열심히 교회에 다녔는데, 목사님이 집사 주신 뒤로 정말 제가 이렇게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시편 63: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잠언 11:19 “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고 하십니다. 주앙교회 성도여러분! 2006년도 한해 뿐 아니라 우리 평생에 예수님만을 따라 살아 우리 다시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