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하는 교회(2)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7. 선교하는 교회(2)) / 본문 : 사도행전 1:6-8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명령이 성경에 481가지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나를 따라오너라”(마 4:19),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 7:13), “내 어린양을 먹이라(요 21:12) 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은 사람에게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단아 물러가라”(마 4:10, 마 16:23, 막 9:25),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마 5:8)고 사단을 향해서 명령하셨습니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할 수도 옆에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물러가라고 하면 물러가야 하고 나오라면 나와야 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눅 8:54),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고 하신 것 모두가 그대로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연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에게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막 11:14) 그리고 이 무화과나무는 말라죽었습니다.
바다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 8:26-27)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명령어 중에 마지막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구관데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누구보다도 실천해야 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영국의 작가이며 기독교 변증에 강했던 루이스(C.S. Lewis)는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제일 없애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옥의 개념이다.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해도 거짓이 아니라면 나는 어떠한 대가라도 치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것이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변경시킬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는데 양쪽 다리가 거의 없는 장애인이 나왔습니다. 그 분은 길가에서 액세서리를 판매하는데 꼭 강아지를 함께 데리고 다니는 겁니다. 한번은 잠시 장애인 주인이 혼자 일을 보러 갔는데 그 강아지는 그 쪽을 한참을 바라보며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주인이 나타나자 꼬리를 치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 장애인은 그 강아지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연을 묻자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기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그분들은 자기를 이용했다고 했습니다. 13살까지 다락방에서 다른 일도 못하고 혼자 지냈답니다. 그리고 지금 성인이 되어서 그 집에서 나왔는데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주는 것이 지금 함께 다니고 있는 강아지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버림받았지만 강아지는 자신을 따라 어디든지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이 강아지 보다 못한 사람들입니다.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마지막 명령을 성실히 따르는 주님의 일꾼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사람들이 묻는 것하고 예수님의 대답이 다르기 때문에 ‘동문서답’에 해당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을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땅문하답’입니다. 사람들은 땅의 것을 질문하고 예수님은 하늘의 일,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땅의 일이 아닙니다. 하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땅의 생각을 신학적인 용어로 ‘인본주의’라고 하고 하나님의 생각, 하늘의 생각을 ‘신본주의’라고 말합니다.

인본주의 자들이 만들어 낸 철학적인 나라가 공산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 사람들의 생각대로 잘살기 위한 나라를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중국이 공산주의가 되면서 그 때 선교하던 존 메도우(John Meadow)선교사에게 공산군 장교하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네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100년 이상 일했으면서도 중국을 교화하지 못했소. 당신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수백만의 사람들에 대해 가슴아파하고 있소. 그러나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중국에 들어 온 지 10년도 안 되지만 공산주의를 모르거나, 스탈린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선교사들이 100년 동안에 하지 못한 일을 우리는 10년만에 했으며 중국을 우리의 사상으로 물들여 놓았소.”
이 말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숨기고 있습니다. 거짓의 영이 있습니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은행이 1950년대에 있었던 모택동의 경제개발계획인 ‘대약진운동’기간에 중국인 2천 7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캄보디아를 점령했을 때는 300만 명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처음에 명분은 다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한 것도 못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잘 살 수 없습니다.

피지(Fiji)섬이 처음에 무역의 길이 열렸을 때, 무신론자이며 인본주의자인 무역상이 그 섬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는 피지 섬의 추장과 대화를 하던 중에 그 집에 십자가와 성경이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선교사의 허튼 소리를 받아들이다니 참 부끄러운 일이군요.”
그 때 추장이 대답했습니다. “저기 큰 하얀 돌 보이십니까? 그 돌은 몇 년 전만 해도 사람의 머리를 쳐서 골을 꺼낼 때 사용하던 것입니다. 또 저기 큰 화덕 보입니까? 저것은 우리가 제사를 드릴 때 사람의 몸을 굽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당신 말대로 선교사의 허튼 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당신의 머리는 깨지고 몸은 화덕 위에 구워져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인본주의 위험을 극복해야 합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지만 공산당은 만들지 못합니다. 헌법이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볼 때 미국은 인본주의에 물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또 다른 곳에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입니다. 이것 또한 인본주의를 만들어 냅니다. 미국이나 우리 나라는 공산주의 때문에 인본주의가 성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경제 블록을 만들면서 작은 나라와 작은 생산 시설, 농업은 모조리 망해가고 있습니다. 이 결과 세계는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상류층 20%사람들이 거의 모든 물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나머지 극빈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1.6%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빈부의 차이는 50배입니다. 지금도 한해에 굶어죽는 사람이 2천만 명이 넘습니다. 여러분! 이 숫자가 실감이 안 나시나본데 1.5초만에 한 명이 굶어죽는 것입니다. 이 숫자도 세계보건기구가 밝힌 열병, 합병증 등으로 죽은 것은 빠진 수치입니다.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이 누구의 것이지요? 그러면 여러분의 지갑은 누구의 것입니까? 또 여러분의 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아르헨티나 오르티스 목사님이 성도님들에게 집문서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모든 성도가 집문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어떻게 할까 회의를 했습니다. 다시 돌려주면서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용권만 있습니다.”하고 돌려주었습니다.

경제의 양극화 현상은 선교에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에는 “배고픈 사람에게는 귀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선진국 사람들은 너무 배불러서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유럽 교회가 시들기 시작한 것은 GNP 2만 불이 넘기 시작하면서부터 랍니다.
세계는 중산층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중산층이 없는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 나라의 경우만 보면 압니다. 물가상승률이 대폭의 증가세를 보인 지난 1998년, 우리 나라 범죄율 역시 큰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자살율 역시 같은 양상을 보였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의 자살율은 외환위기 직후 30%까지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범죄율의 증가폭이 다시 꾸준히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 2003년 3.4%, 2004년에는 3.9% 증가했고 작년 통계가 아직 집계되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그 증가폭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측합니다. 자살율 역시 지난 2002년 이후 매년 10%이상 늘어 외환위기 직후 8,569건이었던 건수가 지난 2004년, 11,523건까지 늘었습니다.

한마디로 인본주의는 그것이 공산주의든 물질만능주의든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한국선교사가 13,000여명 해외에 파송되어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선교사들이 서양 선교사들에 비해 일을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한국선교사들은 서양 선교사들에 비해 지원되는 선교비가 적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선교사들은 늘 기도합니다. 경제적인 선교비 모금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러시아에 처음 같을 때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고르바쵸프 구 소련 대통령하고 우리 나라 김영삼 대통령이 제주도 신라호텔에서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신라호텔 전경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러시아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우리 선교사들도 한국에 그런 별장 하나쯤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러시아 사람들은 ‘다차’(별장)라는 것이 있습니다. 겨울에는 모스크바 같은 시내에서 공장 다니며 지내다가 봄과 여름이 오면 ‘다차’에 갑니다. 공산당이 시외에다가 가정마다 오두막 같은 집과 농토를 나누어 준 것입니다. 여기서 농사짓고 살다가 다시 겨울이 되면 시내 아파트로 들어가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도 선교사님들 중에는 다차를 따라다니며 선교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 당시 선교사들은 그저 우리를 잘 사는 사람으로 보아주니 선교하기 싶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IMF가 왔습니다. 그리고 한 선교사님이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고 카드를 주니까 카드를 받더니 그 카드를 구겨버리더랍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망한 나라 카드는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선교사님은 그 때까지는 자신이 선교하는 줄 알았는데 대한민국이 선교하는 구나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사님들은 다시 기도하게 되었지요. 저는 그 때 인도에 선교 여행 중에 있었습니다. 인도 뱅갈로르에 있는데 선교사님들하고 교육하려고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날 IMF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현지 신문은 아시아의 한 마리용이 떨어졌다고 하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쓴 것입니다. 여자 선교사님들은 울기도 했습니다.

이런 한국 선교사님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복음을 전달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선교사님들은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가운데서 일하기 때문에 늘 하나님께 먼저 매달리는 심정이 있습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해외에는 공관원들과 기업들에 나온 주재상사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진국에는 유학생들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사실은 선교사님들이 제일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물질로 선교하지 않으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 가운데 있지만 이 세상과 분리되도록 불러낸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의식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거룩함과 영성의 결여, 잃은 자에 대한 관심의 약화는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교회는 영적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가르침과 사회활동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토저(Tozer)라는 분은 죽기 전에 이런 예언자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비참하게도 기독교는 신약성경이 요구하는 것의 수준 이하에 머물러 있다. 우리 생활에서 세속화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오늘날 교회의 분위기는 영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부터 멀어질 때 이 세상의 방법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는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구세군을 창설할 때 품었던 비전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을 주께 돌아오게 하는 일에 대해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품었던 생각은 그의 구호에서 나타납니다. “영혼을 위해서라면 극한 상황까지라도 가자.”고 했습니다. 생명을 바쳐서라도 영혼 구원을 하자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의 ‘증인’은 mavrtu”(말튀스) ‘순교자’를 말합니다. 최후의 증인이란 순교의 정신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의 끝까지는 보이는 땅만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e[scato”(에스카토스)는 ‘최후의, 마지막까지’의 뜻도 있습니다. 보이는 끝까지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 할 수만 있다면…”인 것입니다.

우리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보고 가야합니다. 지금은 깨어 정신을 차릴 때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 나타난 것 같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오직 기도할 것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우리의 이익만 쫓다가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놓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들이 성전 미문 에서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전했습니다. 우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엇이든 가지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주앙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한가지 운동을 펼치기를 원합니다. 12시 정오가 되면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5분 동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 낮에 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무슬림들은 하루 5번 정한 시간에 기도합니다. 우리가 한번이라도 정해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먼저 기도할 제목은 4월 16일이 부활주일입니다. 이 주일을 총동원 전도주일로 정합니다. 정오가 되면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전도 대상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4월 16일은 한 명이라도 초청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찬양하십니다.
 

선교하는 교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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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36. 선교하는 교회(1)) / 본문 : 사도행전 1:6-8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말에 ‘동문서답’(東問西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쪽을 묻는데 서쪽을 대답한다는 뜻입니다. “묻는 말에 대하여 아주 딴판인 엉뚱한 대답”을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들리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엉뚱한 대답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환송식이라고 할까요? 오늘 본문은 이 땅에서 예수님께 사람들이 질문한 마지막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이 땅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이 마지막 질문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승천은 아주 갑자기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인 사람들의 질문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입니다. 모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유대인입니다. 이들은 아직도 구약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을 예수께 질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도 하셨고 다시 모여서 계획을 잘 짜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 이후 예수님께서 승천하신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때가 지금이냐는 것입니다. 지금 해방이 이루어지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7-8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십니다. 이 땅의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지 않습니다. 답답합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한 기한은 하나님께 권한이 있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짤막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는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 사람들과 같을 수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회복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은 유대 민족적으로 소원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지금 이 땅의 나라들 가운데 같은 민족이 분단되어 있는 민족이 없습니다. 예멘이 있었는데 1990년 통일되었습니다. 이제 이 지구에 유일하게 한 민족이 분단된 나라는 남북한입니다. 하나님 남북한이 언제 통일되겠습니까?”라고 주님께 질문하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 땅의 자신의 나라였습니다. 그래도 나라를 말하는 사람은 큰 사람이지요.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축복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어떻게 축복을 받아야 “이제 되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의 목사(K.P. Yohannan)가 미국교회를 방문하고 ‘멍에를 메고 잠든 나라’라는 제목으로 쓴말입니다.

나는 미국 교회를 보며 재벌 기업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카펫트와 멋진 의자들과 에어콘과 휘황찬란한 내부장식을 보며 놀랐다. 많은 교회가 그리스도와는 거의 상관이 없거나 아예 관계없는 활동에 쓰는 체육관이나 친교실을 갖고 있었다.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특별 찬양 같은 것들이, 때로는 설교마저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기보다는 즐기기 위한 것 같았다.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다건너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는 고사하고 자기 도시의 빈민의 문제도 외면하고 있었다. 그 모든 풍족함 중에서도 그곳에는 말할 수 없이 가난에 찌든 몇백만의 빈민이 살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외로 이사했으며, 빈민들은 시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이라고 생각되는 활동에는 즐겨 참여하지만 복음에 대한 책임은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는 5,000개 가량의 기독교 서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7,010 민족 중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갖지 못한 종족이 5,100민족이 됩니다. 또한 오늘날 인쇄되고 있는 성경의 85%가 영어를 읽을 수 있는 9%의 사람들을 위해 영자로 인쇄되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평균 한 가정에 4권의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이 지구상의 80%의 사람들은 성경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백만 명이 넘는 전임사역자가 있는 축복 받은 나라입니다. 성도 230명당 1명의 전임사역자가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약 7만 명의 전임사역자가 있습니다. 전체 국민 642명당 한 명의 전임 사역자 이며 성도 수로는 176명당 한 명이 전임 사역자입니다. 이것은 미국을 능가하는 수치입니다. 여러분 축복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는 27억의 사람이 단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선교지에는 50만 명당 한 사람의 전임사역자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선교지로 가야하는 이유입니다.

선교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본문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성령과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물질로 노력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단체에서 훈련받는 것은 세상 적인 조건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안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성령 받으면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 하면 힘듭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지칩니다. 시험이 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보면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선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하나님의 지혜가, 순결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frovnimoi:프흐로니몬)라는 말의 어근의 뜻은 고삐를 매다, 자갈을 먹이다 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25장의 슬기로운 처녀 비유에서 나옵니다. 열 처녀 중에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이 처녀들은 깨어 있었던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막 13:37)고 하셨습니다. 깨어있는 사람이, 깨어있는 교회가 선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선교의 부정적 요소

폭발적인 세계인구의 증가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전세계 인구를 선교학자들은 1억 6천만 명으로 봅니다. 이 인구의 수가 배로 늘어나는데 1,200년이 걸렸습니다. 또 배로 늘어나는데 550년이 걸렸습니다. 또 배가되는데 140년 걸렸습니다. 또 배가되는데 70년, 또 배가되는데 39년이 걸렸습니다.
60억이 넘는 세계인구의 33%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이중에 개신교는 14.74%, 천주교 14.87%, 러시아정교회 3.35%를 합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천주교 국가였던 필리핀, 브라질도 우리가 선교하러 갑니다. 이들의 신앙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천주교는 일단 그 나라에 들어가면 정착하기 위해서 지나친 현지 상황화(토착화)를 서둘러 그 지역의 문화와 혼합이 되었습니다. 심한 경우는 원주민들이 섬기는 우상이 마리아로 바뀌었을 뿐 예전에 우상을 따르던 습관대로 다 합니다. 기독교의 예수정신은 없습니다. 성경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전 세계인구의 이슬람인이 20%가 넘습니다. 이들은 예수가 아니라 마호멧을 따릅니다. 이슬람을 믿는 분들은 자녀를 많이 납니다. 현재 증가율대로 25년이 지나면 이슬람이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됩니다.
문제는 단순한 숫자적 증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말하기 싫지만 기독교의 서구인들은 대부분은 껍데기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명목상 그리스도 인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일생에 교회를 세 번 가는데 태어나서 한번 가고, 결혼식 때 가고, 그리고 죽어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슬람 믿으시는 분들의 신앙심이 우리보다 더 열심인 것 같습니다. 하루에 여섯 번 예정된 시간에 기도하는데 담요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도할 때 어디를 가나 깔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홍콩에서 비행기 갈아타기 위해서 기다리는데 이슬람 믿으시는 분인지 공항 귀퉁이로 가시더니 담요 같은 것을 깔고 자신들의 성지 메카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비행기 안에서도 뒤에 가서 기도하는 분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식사 기도한번 하는 것도 눈치보며 할 때가 있습니다. 한국에 와있는 이슬람 분들이 아무 고기나 먹지 않으니까 미리 예식을 치룬 고기를 배달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심이 이슬람을 믿으시는 분들보다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가 선교하는 정신에서 이미 밀리고 있는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본문 : 누가복음 5:17-26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우리부부는 대화의 소재가 많지 않습니다. 부부의 문제를 없애려면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이 대화를 해 보았어야지요. 대화하라니까 대놓고 화내는 것이 대화인줄 안답니다.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기 주장하는 것이 많습니다. 저희는 요즘 서은이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그런데 주일날은 꼭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설교를 하고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여러분이 은혜를 받았는지를 물어봅니다. 저희 집사람도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한 음식 맛있게 먹었냐는 것입니다. 열심히 밥상 차린 사람의 심정이나 제 심정이 같을 것입니다. 열심히 먹어주는 식구가 있기에 열심히 만드는 것입니다.

요리를 맛있게 한다고 소문난 오리 농장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요리사는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요리해서 손님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농장 음식점에 큰 잔치가 있었습니다. 음식점 주인은 오리요리가 맛있는 이유에 대해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오리를 기를 때 특별히 신경 써서 사육해서 고기가 맛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주방장은 주인의 말에 서운해 했습니다. “오리도 좋지만 주방장이 신경써서 요리를 했기 때문에 맛있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해 주면 좋은데 안 하는 겁니다. 하루는 주방장이 오리 다리를 하나만 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인이 뭐라고 하는지 두고보자.“ 손님들 앞에서 한참 오리고기 자랑을 늘어놓던 주인은 오리 다리가 하나밖에 없다고 하자 당황해 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이 돌아간 후 주방장을 불렀습니다. 왜 오리다리가 하나냐고 했더니 주방장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원래 오리다리가 하나잖아요?“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화가 ”나서 나를 바보로 아는 거야?“ 하고 오리농장으로 갔습니다. 마침 오리들이 한발을 들고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주방장은 오리를 가리키면서 ”보세요. 오리다리가 하나잖아요?“ 주인은 화가 나서 손뼉을 쳐서 오리들을 깨웠습니다. 그리고는 ”저걸 똑똑히 보아라“ 그러자 주방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주인님이 손뼉을 치니까 오리들이 숨겨두었던 다리 하나를 내놓잖아요! 저에게도 요리를 잘한다고 손뼉을 쳐주신다면 저도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일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지붕을 뚫고 내린 중풍병자를 고치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이렇게 무리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 앞에 나가서 칭찬을 듣지 못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공관복음 기자 모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말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마가가 가버나움 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는데 몇 명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4명이라고 말해줍니다. 그것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붕이 분명히 ‘기와를 벗기고’내렸습니다. 팔레스타인 집들은 옥상이 평평하게 만들고 그 주변에 기와를 덮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번 설교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팔레스타인의 집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당시 지붕을 쉽게 뜯어낼 수 있는 집이라고 말한 것 또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의외로 쉽게 넘어갑니다. 누가 같지가 않습니다. 누가는 의사이면서 역사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과 검증된 사건이 아니면 잘 다루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루는 사건은 아주 정밀하게 기록합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자세히 기록한 사람입니다(눅 1:3). 그런데 본문은 마가보다도 더 정확한 내용을 전달해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복음서 본문을 다룰 때 비교적 상세히 소개된 본문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다른 복음서로 정하지 않고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사건을 보는 관점입니다. 핵심을 놓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 핵심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입니다.

협력자들
오늘 본문에는 아주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협력입니다. 예수님 앞에 병자들이 나온 다른 사건들은 자신이 걸어나왔습니다. 아무리 중한 병자라도 심지어는 소경이나 문둥병자 조차도 직접 예수님 앞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병자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인 이 환자는 자신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 병자를 들고 예수님께 가야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천했습니다.
중풍병자는 이로 보아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랍비도, 제사장도, 바리세파 사람도, 서기관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친구들은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오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친구가 있습니까? 평소에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런 친구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이 사람은 친구들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 11:11)고 말했습니다. 눅 12: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온 사람들은 바로 이런 친구들이었습니다.

실천하는 믿음
친구들이 저를(중풍병환자) 침상에 누인 체 데리고 왔을 때는 갈릴리 여러 마을과 더 아랫마을 유대와 예루살렘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소문이 지난번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로 전국에 퍼졌습니다. 이렇게 멀리서 온 사람들은 신분도 높은 분들입니다. 감히 저희 같은 사람들은 옆에서 평생에 한두 번 함께 지내면 영광이랄까 그런 신분 높은 양반들이 온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입니다. 이분들은 저희 같은 사람하고는 다릅니다. 율법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경건한 사람들로 율법준수를 엄격하게 지키는 양반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예수님 주위에 가득 했습니다.

예수님 주의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있어 제가 정상인 몸이라도 혼자의 몸으로도 비집고 들어가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친구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지간한 친구라면 그냥 돌아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정말 저에게는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들입니다. 제 친구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갈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남의 집을 뚫는다는 것은 요즘말로하면 기물 파손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남의 물건을 함부로 파손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모르지 않았을 제 친구들은 저를 위해서 그런 부담을 감수해 가면서 기왓장을 뜯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저를 예수님께 내려놓은 것입니다. 제가 지붕에서 내려질 때 온통 사람들의 시선은 내게로 쏠렸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은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들은 그가 누구라도 꾸중을 듣지 않고 병고침은 물론이요 칭찬 받은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무리한 방법을 시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시라면 나무라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특징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들은 행동 외에 아무 말도 예수님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저희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는 물론이며 이 친구를 함께 달아 내린 친구들입니다. 이들이 “저희”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행동에 감격해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 갈릴리 땅에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자신만을 아는, 입으로만 토론하는 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저만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하고는 분명 다른 사람들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이들을 향한 예수님 첫 번째 말씀은 병이 아니라 사람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말과는 달랐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전 예수님이 제자들하고 마지막 만찬을 할 때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죄 사함”입니다(마 1:21). 이 말씀을 예수님께 직접들은 사람은 본문의 중풍병자와 누가복음 7:48의 시몬의 집에 들어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던 여자입니다. 두 사람만이 예수님께 직접 죄가 사해졌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은 오늘 처음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반발하는 종교지도자들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병고침을 받고자 나왔다가 생각지도 않은 큰 축복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21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러한 의논이 일어난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이들이 사용한 “참람”(blasfhmiva”:블라스페미아)은 ‘신성모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모독을 말하는 것입니다(계 13:6).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실 때는 세 가지 경우였습니다. ① 죄를 사하실 때(막 2:7) ② 메시야 이심을 주장하실 때(막 14:64) ③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실 때(요 10:30)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심리를 알고 즉시 반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질문은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가언적 양도논법’으로 반대자들을 꼼짝없이 만들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확실한 반박을 못하시면 매우 곤란해지십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들고 나온 것은 적당한 불쾌감이 아니라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신성모독’ 죄는 당장 끌어내어 돌로 쳐죽여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와 같은 일을 행할만한 고위층 지도자들이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23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입니다. 표면상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이 더 쉽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면 병이 나아야 되고 즉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당장 증명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생각할 때는 더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죄를 사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유일하게 예수님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눈에 보이는 병도 고쳤습니다.
인자선언
이 때 예수님이 처음 사용한 말이 있습니다. 24절 “인자가 땅에서…”입니다. 예수께서 제일 많이 사용하신 자기표현입니다. ‘인자’(ajnqrwvpou:안드로포스)는 복음서에 90여 회 나옵니다. 그 중에서 누가복음에만 26회 나옵니다. 이 단어는 스데반이 한번 사용한 것 위에는 모두가 예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지금 제일 처음으로 ‘인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니도데모의의 대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오실 메시야를 소개할 때 ‘인자’가 장차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단 7:13). 사람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이 말은 반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단 중에 자칭 예수가 있습니다. 모두가 가짜이지요. 이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우깁니다.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스스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하십니다. 그가 원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자연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즉시 병이 나았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4절)고 하셨습니다. 침상에 누워있던 사람이 침상을 들쳐 매고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영생의 약속과 육체의 질병도 깨끗하게 해결 받았습니다.

누가는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이야기 해 줍니다.
26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현현하시는 역사 앞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표현한 말은 “기이한 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기이하다”는 ‘예상을 넘는다’는 뜻으로 “오늘날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일을 보았다”입니다. 사람의 이해력으로는 이 사건을 설명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교회를 떠나기 싫어 늘 교회에서 지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아다녔습니다. 평일에 예배드리는 교회는 부흥회 하는 교회입니다. 그 때 부흥 강사목사님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교회 2층은 관중석이고 1층은 은 자리요 교회 앞자리는 금 자리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다보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흥하는 교회일수록 앞자리부터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거나 정체된 교회들은 앞자리가 잘 채워지지 않습니다. 음악회나 운동장에 가도 앞자리가 더 좋은 자리입니다. 조금이라도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으로 다음주부터는 조금 앞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 사건의 관중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관중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시기를 바랍니다. 중풍병자를 들고 나갔던 친구들처럼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중풍병자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병은 중풍병자만 고침을 받았지만 구원의 역사는 모두에게 일어났습니다. 병은 걸릴 수도 나을 수도 있지만 구원은 다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사해 주셔야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나온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 역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대로 예수님은 받아주셨습니다. 고쳐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사람, 의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 부르짖는 사람, 찾아오는 사람은 모두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중풍병자의 친구처럼 내가 친구를 고쳐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데리고 주님께 갈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아파서 병만 고치러 나갔지만 주님은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주앙교회 성도여러분에게도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성령이 오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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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34. 성령이 오시면) / 본문 : 요한복음 16:13-15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네덜란드의 화가 고흐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화가가 되기 전에 탄광에서 광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광원들을 적극적으로 전도했으나 점점 자신이 그들에게 휩쓸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동자가 포장지로 옷을 만들어 입고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등에는 포장지에 쓰인 글이 그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깨지기 쉬운 물건이니 취급에 각별히 유의하시오” 고흐는 그때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인가! 그는 그날부터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왕성한 전도활동을 펼쳤습니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강해지려는 자는 약해지고 나약함과 죄악을 낱낱이 고백하는 자는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보다 약하지만 정직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저는 올 겨울에 기침으로 한참 고생을 했습니다. 설교를 해야하는 목사로서는 괴로운 일입니다. 날씨가 조금만 춥거나 미세한 먼지나 심지어는 냄새에도 기침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침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육체가 연약한 것인가와 이렇게 민감한 목처럼 나는 하나님께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본문 말씀은 요 16:1 “내가 이것을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께 가고 고난이 찾아오는데 그 때 제자들이 실족지 않게 하시려고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힘든 시간이 올 것인데 제자들에게 12절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고 하시면서 이 말씀만을 특별히 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본문 13절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오시면’은 o{tan(호탄)은 ‘언제든지, 양쪽까지’의 뜻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는 때는 언제든지 입니다. 일정한 때에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진리가운데’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모든’(pa’”:파스)이라는 단어를 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모든
제가 목사가 될 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 때 제일 문제가 된 것 중의 하나가 마 28:20절의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의 ‘모든’이라는 말에 걸렸습니다. 네가 잘하는 것만 가르치라든지, 한가지만 잘 배워서 그것을 가르치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모든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한가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제 자신을 바라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예수님이나 가능한 것이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어떻게 이 부족한 종이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때 주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이 “네 말이 맞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 저는 안 되는 것입니까?” “아니다. 네가 하려고 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대단한 착각을 한 것이지요. 내가 목사가 되니까 내가 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때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하도 창피해서 하늘을 못 쳐다봅니다. 내가 해 보려고 한 것이 우습지 않습니까? ‘모든’이라는 말은 구약식으로 표현하면 ‘전능’이 됩니다. 어떻게 사람이 전능할 수 있습니까? 전능하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하셨습니다. “다”(pa’”)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이 모든 것을 친히 가르치십니다. 목사가 모든 것을 가르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하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5-7)

진리
‘모든 진리 가운데로’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할이 진리가운데 인도하는 것입니다. 역할로 보면 성령은 진리가운데 인도하는 것이 되지만 속성으로 보면 성령 자신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철학이 다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모두가 진리는 하나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나왔으니 그 진리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나지 않은 사람들의 진리는 다 다릅니다. 물론 어떤 부분은 성령의 일 부분과 생각이 일치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분들이 성령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일 부분의 생각만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뿐입니다. 이 부분을 확대하여 해석하면 다 똑같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천주교와 불교가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만 따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 진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 같은 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 진리가 다 같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성령은 어디서 나왔느냐가 중요합니다.
“13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령은 하나님께서 나온 것입니다. 성령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진리’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 오지 않은 사람에게서 난 진리라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요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성령을 알게되고, 보게되고, 받게되는 것입니다.

인도
“인도하시리니” 성령의 역할이 인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되지 성령을 받아야 되는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성령은 주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주님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데 인도함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우리가 왜 열심히 기도해야 됩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능력 있게 행하기 위해서도 성령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받을 뿐만 아니라 충만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맹장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담당의사는 건망증이 매우 심한 사람이어서 수술을 하다 그만 메스를 환자의 뱃속에 넣고 봉합을 해 버렸습니다. 나중에 실수를 깨달은 의사가 다시 뱃속을 열었는데, 이번에는 가위를 넣고 봉합을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또 뱃속을 열고 있는데 수술 예정시간이 지나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났습니다. 수술 과정을 알게 된 그 환자는 어이가 없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차라리 지퍼를 다쇼, 지퍼를!’

성령을 받는 방법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 계명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바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해서 보내 주시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주는 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내가 사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그것이 성령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받아야지요. 선물하나 못 받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제일 큰 선물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프린스턴대학의 전신인 뉴저지대학에 총장으로 있던 워터폰박사가 어느 날 교회에 갔더니 한 장로님이 “박사님, 감사합시다.” 그러더랍니다. “박사님, 제가 지금 한 2마일 밖에 있는 저 마을에 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까지 올 때에는 마차를 타고 옵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 나오다가 언덕으로 내려오는데 말이 그만 무슨 소리에 놀라서 냅다 뛰는 바람에 마차 바퀴가 빠지고 몇 바퀴 뒹굴었습니다. 아이쿠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툭툭 털고 일어나 보니 아무 데도 상한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박사가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 언덕을 수천 번이나 오르락내리락 했는데도 오늘까지 무사했으니 내가 더 감사하지요.”

우리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할 일 뿐입니다. 불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중국 용정에 갔을 때 한족 학생들과도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 못하는 운동을 한다고 빙 둘러서서 배구를 하는데 제 쪽으로 멀리 날아온 공이 교회 운동장 밖으로 나가 길거리로 굴러가는 것입니다. 그 공이 마차와 차가 혼합해 다녀 위험하겠다 싶어 욕심을 내어 그 공을 잡으려고 가다가 엎어져 한국에서 6개월 동안 치료받고 해 넣은 치아 3개와 새 치아 한 개가 부러졌습니다. 위 치아가 거의 다 빠진 것입니다. 얼굴과 팔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때 지금까지 선교지 다니면서 큰 사고 없이 다닌 것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어느 모임에서 연설이 조금 길어지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듣던 낸시 부인이 쪽지에다가 짧게 하라고 쪽지에 써서 비서를 시켜 단상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람에 날려 쪽지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신문 기자가 주워서 보니까 KISS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자는 레이건 대통령부부는 저렇게 나이가 많은데도 참 로맨틱한 부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KISS라는 단어는 ‘Keep it short, stupid’이란 약자였습니다.
말을 길게 한다고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수 년 전에 전신마비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제대로 못하지만 시를 써서 큰 은혜를 끼치는 송명희 자매가 간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대신 간증을 하고 나중에 본인이 두 마디를 했습니다. 한 마디는 ‘여러분! 예수의 고난의 흔적이 있습니까?’ 다른 한 마디는 ‘여러분! 바울의 선교적 고통이 있습니까?’ 젖 먹은 힘을 다해 두 마디를 겨우 했는데 그 날 참석했던 성도들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때 저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은혜를 끼치는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 말씀 속에 역사 하시는 성령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선물만큼 큰 선물은 없습니다.
시편은 ‘인도’가 35번 이상 나와 성경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곳입니다. 다른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위주로 되어있지만 시편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시편 기자들이 말한 것처럼 인도함이 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시는 시 23편입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제가 잘 사용하는 방법으로 다시 읽습니다. 일인칭 단어인 ‘나 또는 내가’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는 것입니다.

1 여호와는 영제의 목자시니 영제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영제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영제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영제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영제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영제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영제의 원수의 목전에서 영제에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영제의 머리에 바르셨으니 영제의
잔이 넘치나이다
6 영제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영제를 따르리니 영제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