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보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5. 네 보물) / 본문 : 마태복음 6:19-21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세계선교지도를 그리는데 국가분류에 어려움을 격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타이완입니다. 타이완은 1911년 10월 10일 중국 본토에서는 역사적인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이 날은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이 부패한 청나라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 날입니다. 타이완에서는 이 날을 국경일로 정하고 있으며 혹은 쌍십절이라 하여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경축행사를 벌입니다. 1949년 10월 1일에 이르러서는 뻬이징에서 중국공산당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자 장개석 총통이 이끄는 국민정부는 대만해협을 건너와 중화민국의 임시 수도를 타이뻬이에 수립, 장차 중국대륙과의 통일을 실현시키는 것을 국가 제1의 과업으로 정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중국 본토의 정치인들은 반대로 늘 기회만 있으면 타이완을 중국으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타이완의 통화는 뉴 타이완 달러(NT$)입니다. 환율은 현재 타이완 1NT$당 한화로 약 40원 정도입니다. 그리고 타이완은 세계에서 외화보유국이 제일 많은 나라중의 하나입니다. 작은 나라 타이완이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언제 중국 본토에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한 심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비상시를 대비해서 US 달러로 저축해 놓거나 바꿀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지금 사용하는 뉴 타이완 달러는 버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 돈은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에 상황이 변화되어도 필요한 돈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말기에 실제로 이런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원래 북부가 고향인 사람이 일 때문에 남부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북부가 이겨가고 있습니다. 만일 남부의 통화만 가지고 있다면 북부가 통일할 때는 남부의 통화가 필요 없어집니다. 그래서 눈치 빠른 사람은 북부의 통화로 바꿀 수 있는 금이나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물질만 가지고 있다가 주님이 임하시면 이 세상의 것은 아무 쓸모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필요한 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아주 귀한 보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옛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은행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이기 때문에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땅은 하늘과 반대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영원한 미래가 없는 순간적이며 변화무쌍한 이 세상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쌓아 두지 말라”(Mh; qhsaurivzete:메 데사우리제테)는 현재형입니다. 시제를 넣어 번역한다면 ‘쌓아 두기를 그만 두라’입니다. 이는 그릇된 행위를 단호히 끊어버릴 때가 왔음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하던 행위들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다니고 예전에 하던 행위는 행위대로 합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이삿짐 나르는 날짜를 골라서 갑니다. 결혼할 때 사주봅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예전의 행위대로 계속 쌓아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것은 이 땅에, 현세적으로 보이는 것에 집착하여 최선의 가치와 행복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물질 관을 정리해 봅니다.
① 이 땅에 쌓인 제물과 보화가 최상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② 탐욕이 가득하면 지상의 재물에 애착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모으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③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때는 물질이 우리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④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재물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을 풍족히 소유해야만 만족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은 것으로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노벨상은 스위스의 알프레드 노벨이란 과학자가 제정한 상입니다. 노벨은 다이나마이트를 만들어 벼락부자가 된 사람으로 모두가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알프레드 노벨 죽다. 인류를 멸망시킬 살상무기를 개발하여 재벌이 된 사람 죽다’라는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깜짝 놀라 신문사에 항의해보니 자기 형님의 죽음이 오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벨은 그 오보기사 때문에 삶의 중대한 전기가 왔습니다. 형님의 부고를 잘못 기록한 기사지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 훗날 내가 죽고 나면 세상은 나를 이렇게 평가하겠구나’라고 회의가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다 기탁하고 세계와 역사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한 사람에게 이 상을 주라고 제정했습니다.

이 땅은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서는 좀 먹습니다. 좀(sh;”:세스)은 옷이나 음식을 해치는 일종의 세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처지를 가리켜 “나는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욥 13:28)고 말했습니다.
동록(rust)은 (brw’si”:브로시스) 금속의 부식(corrosion)을 말합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셀라}”(시 39:11)라고 했으며 이사야는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사 50:9, 51:8)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떠난 부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1-2)고 했습니다.
모두가 이 땅에 쌓아둔 재물이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을 말한 것입니다. 물질이 스스로 부패하든지 아니면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집들은 흙벽돌을 쌓아 만들었기 때문에 도적들은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외부로부터도 결코 안전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을 원문으로 보다가 번역성경에 나오지 않은 한가지 더 강조되는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호푸(o{pou)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어디든지, 어느 장소든지, 어느 곳에서든지”입니다. 이 단어가 본문에 19, 20절에 두 번씩 21절에 한번 모두 5번이나 나옵니다. 이 땅에 안전한 곳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숨겨둘 만한 곳은 어디에든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땅에 피할 곳은 없습니다. 이 땅의 어디에든지 숨길 곳은 없습니다.

하늘에 쌓아 두라
‘땅’과 달리 하늘은 안전합니다. 안전성뿐만이 아니라 영원, 지속성과 거룩성도 있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하는 것은 쓰레기가 아닙니다. 보물입니다. 보물을 쌓아두어야 되지 여러분 만일 쓸데없는 것들을 쌓아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목사와 그리고 유대 랍비가 한자리에서 교회 치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야기 도중에 헌금에 대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은 하나같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목사가 말했습니다. “저는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위에 서서 하늘로 헌금 전부를 던집니다. 그리고 원 밖으로 떨어진 돈은 교회 사업에 쓰고 안으로 떨어진 돈은 제 생활비로 씁니다.”그랬습니다. 천주교 신부가 두 번째로 입을 열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방법을 씁니다만 조금 다릅니다. 저는 한 줄을 그어놓고 헌금을 위로 던져 왼쪽으로 떨어진 것은 하나님 사업에 오른쪽에 떨어진 것은 제가 사용합니다.“ 역시 이 방법이 제일 합당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랍비가 말합니다. ”저도 당신들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약간 다른 방법을 씁니다. 저는 그냥 서서 돈을 위로 던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거두신 것은 하나님 몫이 되고, 땅에 떨어진 것은 제 몫이 됩니다.“
물질을 뜻 깊게 사용하기 위해서 때로는 저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아놓은 물질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을 뽑으라면 저는 자식에게 물질만을 남겨주는 분을 뽑겠습니다. 이것은 자식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보물이란 여러분이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21절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내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것, 보물은 나의 인격의 중심이 됩니다. 또한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의 지, 정, 의를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마음이 빼앗겨 순식간에 그 사람의 행동과 방향과 가치관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명예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는 분명 야망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고, 돈을 최고로 여기는 자는 돈의 노예가 되며, 쾌락을 제일 좋아하는 자는 필연코 방탕에 빠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1-2절에서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로 정립하여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둘째는 인간과의 관계이고 셋째는 물질과의 관계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열심히 일하라. 열심히 돈을 모으라. 그리고 열심히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바치라”고 말했습니다. 돈은 벌기도 어렵지만 바로 선용하기란 더 어려운 것입니다. 돈은 바로 사용할 때 빛이 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에 보면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말씀했습니다.
왜! 하늘에 우리의 보물을 쌓아둡니까? 그래야 그곳에 우리의 소망이 있게 됩니다. 이 세상의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그 물질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 소망할 수 있도록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보물을 맡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른 다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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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44. 어른 다 됐네) / 본문 :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부족함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이 행복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고립되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은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할 뿐 양보할 줄 모릅니다. 대부분 각 가정에서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처음에 유치원을 갑니다. 유치원에 가면 미끄럼틀에서 놀고 싶은데 형들이 먼저 타고 놀고 있습니다. 순서를 기다렸다가 타야하는데 자기가 먼저 타겠다고 우깁니다. 똑똑한 아이들은 뒤를 돌아보고 엄마가 없으면 자기가 힘이 없는 것을 알고 포기합니다. 이것은 마음속에서 스스로 양보한 것하고는 다릅니다. 힘만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가 빼앗아 타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나타나면 엄마의 힘을 믿고 계속 땡깡을 쓰는 것이지요.
이것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아이들에게 먼저 선수를 치는 것입니다. 작은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킨 아이에게 “어른 다 됐네.”라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전철을 탈 때도 미리 약속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앉지 말고 서 있자.”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갈 때도 “가게의 물건에 손대면 안 돼.” 대부분의 아이들은 엄마하고 외출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가지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아이에게 말하면 안됩니다. 한가지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게 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어른 다 됐네.”

예수님이 바로 이렇게 제자들을 교육시키셨습니다.
본문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이 때는 아직 예수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기 전입니다. 이제 막 부름을 받아 온 제자들에게 갑자기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교육적 효과를 얻어내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늘 예수님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셨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월요일에 행주산성을 다녀왔습니다. 일산에 살 때 1년 동안을 그 옆으로만 지나다녔지 한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들려보았습니다. 그런데 소풍 온 학생들인지, 학습을 나왔는지 초등학교 3, 4학년으로 보이는 학생들과 남자 선생님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옆을 지나가다가 선생님이 화가 나셔서 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한 남자 학생에게 “야! 너 죽을래”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던 제가 다 무안했습니다. 말 잘 안 듣는 아이들 통솔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저도 조금은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이 자꾸만 학생들을 그런 식으로 대하면 학생이 받은 그 상처는 어디 가서 누구에게서 치유 받겠습니까? 집에 가서도 창피해서 선생님에게 그런 말 들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합니다.
“너희들 청소 그렇게 밖에 못하겠어!” 하는 것 보다 “너희들 어른 다 됐네. 청소 잘 할 줄 믿을 깨” 미리 선수를 치는 것입니다.

칭찬 한 마디가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학창시절 결코 천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담임 선생님은 “이 학생은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적힌 성적표를 받아든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낙담해하는 아들을 오히려 달래며 “아들아, 너는 다른 아이와 다르단다. 네가 다른 아이와 같다면 너는 결코 천재가 될 수 없어”라고 칭찬하며 격려했습니다. 이러한 칭찬과 격려로 아쉬타인은 변한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수만 톤의 가시는 벌 한 마리 불러모으지 못하지만 한 방울의 꿀은 수많은 벌떼를 불러모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칭찬은 바로 이 꿀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칭찬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처음 만난 나다나엘에게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즉시 주님을 향해서 세 개의 호칭을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밝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즉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17 절)라고 화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2명의 이방인을 칭찬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자신의 부하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예수님께 이 백부장의 말을 듣기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군대는 백부장이 군졸들을 대할 때는 병들면 한마디로 의가사 제대시키면 그만입니다. 자신의 병사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 신경 써야 할만큼 한가한 군대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보고 기이히 여겼다고 한 것은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을 보고 기이히 여길 수는 있으나 예수님이 사람을 보고 기이히 여긴 것은 없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로마 군대의 백부장에게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고 칭찬하셨습니다.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셨을 때 수로보니게 마을에 사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나와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산다고”말함으로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

찰스 필모어는 “칭찬과 감사의 말은 에너지를 확대시키고 해방시킨다. 칭찬은 약한 육체에 건강을 주고 두려운 마음에 평온과 신뢰를 주며 상처난 신경에 휴식과 힘을 준다. 또한 우리는 칭찬을 받으면 기뻐한다. 식물도 사랑을 베풀면 잘 자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핸리 고더드 박사는 ‘앨고 그래프’라는 피로 측정기를 사용하여 몹시 피곤해 하는 학생들에게 칭찬의 말을 해 주면 그들의 육체적 에너지가 급상승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관심과 기대를 갖고 칭찬해 주면 그 대상자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되어 분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칭찬은 자신감을 줍니다.

“어른 다 됐네.”라는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자신감이 들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계속 어린아이처럼 땡깡만 부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어린이들에게 학습의 동기를 부여합니다. 학습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동기 부여입니다. 동기만 부여되면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학습에 동기 부여가 없으면 학습 효과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동기 부여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인가 배우고 싶은 욕망을 느끼도록 합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네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배우는 자에게 집중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시작하실 때 ‘진실로’(마 5:18, 26, 6:2, 5 등), ‘들을 지어다’(마 11:15, 13:9, 43, 막 4:9, 23, 눅 8:18, 14:35), ‘들으라’(마 13:18, 15:10, 21:33, 막 4:3, 7:14, 눅 9:44, 18:6) 그리고 ‘보라’(마 10:16, 11:10, 12:41, 42, 49, 막 3:34, 10:33, 14“41, 눅 7:25, 27, 34, 10:3, 19; 11:31, 32, 44, 13:7, 30, 32, 35, 18:31, 21:29, 22:10, 31, 요 4:35, 5:14, 16:32)고 하시면서 시선을 집중시키셨습니다.

둘째로 소망을 주셨습니다.
산상 수훈을 시작하실 때,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그리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마 5:3-5)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이것이 복이 있다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던 사람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밀려나 있던 즉 엄격한 규율에 의해서 지켜지는 신앙적 행위들은 가치가 있어 보이던 시절에 보이지 않던 마음을 읽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복된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셋째로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한마디로 화가 나서 꽁하고 있는 사람은 손을 내밀지 못합니다. 우리 속담에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사람은 하나님께 죄를 짓고 멀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에게 물을 좀 달라”(요 4:7)고 하시면서 먼저 청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각자 개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야(눅 10:41), 삭개오야(눅 19:5), 베드로(눅 22:31, 요 1:42)의 이름을 직접 부르셨습니다. 나다나엘의 경우도 그랬지만 삭개오의 경우도 한번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신적 능력으로 이들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셨다는 사실에 다 감동한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이 성탄절 메시지 발표할 때 보면 각 나라의 말로 한마디씩 합니다. 그 때 자신들의 말로 한마디하는 것에 사람들은 감격해 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부른 것에 비하겠습니까. 마지막 날에 내 이름을 불러주실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는 말씀과 이이어서 “너희는 나의 친구라…”(요 15:14-15)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오랫동안만 다닌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했습니다.
어느 욕심이 많은 왕과 덕망이 있는 학자의 대화입니다.
왕 :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고 훌륭하게 사는 길이오?
학자 : 욕심 부리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왕 : (피식 웃으며) 아니 그거야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니오?
학자 : (미소를 지으며) 폐하!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여든 살 된 노인도 실천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랍니다.

어느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집사님은 매일 하는 자녀의 세상 과외수업 시간은 2시간이 짧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예배시간 1간 30분이 길다고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어른 다 됐네.”와 같이 믿음을 줍니다. 확신을 줍니다. 자부심을 줍니다. 우리 우리가 행동할 때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도우십니다. 이제 더 이상 연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의 빛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정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3. 하나님이 주신 가정) / 본문 : 눅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1997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장관을 열 네 명을 임명했는데 일곱 명이 거절했습니다. 그리스토퍼 국무장관도 안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가정 때문이라는 겁니다. 나는 가정으로 돌아가서 가정에서 자녀들과 함께 지내고 싶다라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안 불러줘서 못 갑니다. 아마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할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만은 않습니다. 가정은 장관이상으로 높이는 사회일수록 그 사회가 건강한 사회, 복 받는 사회입니다. 가정은 어떤 빌딩보다도 더 높은 집이 가정의 집이고, 어떤 산보다도 산 위에 있는 집이 가정의 집인 것입니다. 이 땅에 가정보다 귀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모든 생명에게 주신 선물은 가정이라고 하는 집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모두가 가정 중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가정의 종교입니다. 가정을 버리고 떠나 혼자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또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도 가정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함으로 방주를 만드는 것도 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낳아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도 그 시대의 한 족장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이 리브가와 함께 쌍둥이를 낳아서 살아가는 이야기, 야곱의 열 두 형제와 함께 복을 받는 족장들의 이야기, 모두가 가정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로 넘어가면서 모세 가정이야기가 나옵니다. 룻기서에는 남자들이 다 죽고 없어 한 가정이 멸망을 당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방 여인이지만 룻을 통해 시어머니(나오미)를 잘 모시고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을 통해서 다윗 가문을 일으킵니다. 사무엘상으로 가면서 한나(남편 엘가나)가 낳은 아이 사무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은 전부 가정 이야기인 샘입니다.

천국은 가정이고, 가정은 작은 천국입니다. 천국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아들이 있는 것처럼, 가정에도 부모와 자녀가 있습니다. 천국에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 신부인 성도들이 있는 것처럼, 가정에도 신랑과 신부가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사랑하는 부부가 사는 가정은 보이는 낙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최초의 축복의 장소요, 인간의 진정한 안식처인 것입니다.
교회는 또한 가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마가의 집이었고, 에베소 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이었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의 집이었고,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는 가이오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모든 청소년의 문제도 가정에 문제가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열 명 중 여섯 명의 아이들은 술 먹는 집 아이들에게서 청소년이 탈선한다라는 겁니다. 술 먹는 부모의 자녀들은 탈선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다섯 명 가운데 세 명은 부부가 가정불화를 일으킬 때 자녀들의 성격이 잔인해지고, 난폭해지고, 잘못된다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네 명 가운데 세 명은 부모의 허락을 받아 아무데나 가는 아이들이 결국 잘못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벽돌쌓기를 하면서 노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하도 열심히 쌓고 집중해서 놀고있기에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너 뭐 만들고 있는 거니”하니까 아이가 대답하기를 “쉿 조용히… 교회를 만들고 있어요!”그러는 겁니다. 아버지는 기특해 하면서 “그 동안 교회 가서 떠들고 장난만 노는 아이인줄 알았는데 교회를 만들고 있다니”라고 생각하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조용히 하라는 거지?” 그 때 아이가 대답하기를 “다 자고있잖아요. 깨우면 안돼요.”라고 하더랍니다. 이 아버지는 교회 가서 졸은 것이 아니라 아주 주무신 모양입니다.

교육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삶이 교육입니다. 아이들은 본대로 따라합니다. 우리가 성경책 보면서 넘기니까 서은이가 책보면서 넘기잖아요. 교회 와서 아이가 저렇게 잘 적응할 수 없습니다. 원래 어린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은이를 보면 참 기특합니다. 아마 서은이도 갑자기 교회에 나왔다면 못 견딜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 나오고 태어나서 바로 교회에 오게되니까 적응을 한 것이지요. 성경보고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자란 아이는 세상아이들과 다른 겁니다. 부모님들! 조금 귀찮아도 자녀와 함께 교회 나오시기 바랍니다.

17세기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두 그림을 보시겠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두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니다. 가정은 열심히 땀 흘리고 부지런히 일해야 가정이 축복을 받고 건강한 가정이 되는 겁니다. 열심히 일하는 곳에 가정의 위로와 은혜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가정은 땀흘려 거둔 것을 가지고 먹고사는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은 돈으로 꾸미는 것은 아닙니다. 땀으로 꾸며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겁니다. 이런 모습을 자녀들이 보고자라야 합니다.
우리는 “축복”하면, 나의 노력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축복”이란 아무공로 없이 받은 은혜인 “구원”과는 달리, 뿌린 대로 거두고, 심
은대로 열매 맺으며, 내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땀 흘려
서 모은 재산을 속아서 한 순간에 날리거나 또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고 있습니까? 이렇게 노동의 신성함을 거부하고, 수고하고 땀 흘리기를 싫어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입니다(살후 3:10하). 하나님조차도 6일 동안 일하시고, 수고하셨기에 창조의 기쁨을 맛보셨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밀레 그린 두 번째 보면 밀레 그림에 두 부부가 같이 마주서 있는 모양이 아름답고 행복한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 같이 보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마주 보면서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이 그림 속에 있습니다. 또한 이 그림은 서로 겸손히 고개 숙인 모습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기도하는 모습니다. 기도로서 한 마음이 될 때 진정한 하나님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D.W. 게랄드(Gerald)는 “행복이란 우리 자신의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지, 남의 집 정원에서 뽑는 것이 아니다”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어디에서 뽑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온 가족이 한 마음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고 싶지 않으십니까?
꽃이 만발하고 향기 가득한 정원으로 가꾸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 수 있을까요?
신명기 6:2절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요.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여호와를 경외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무서운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를 우습게 생각하는 자식은 문제가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를 우습게 생각하는 자녀 하나님도 우습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자녀 부모에게 순종합니다. 부모가 나중에 자녀들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느냐! 그것은 한마디로 부모하기 나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로 키우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해서는 예배하며 기도하고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돈주고 학원은 보내도 가정에서 예배하며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등한히 하는 가정이 많습니다. 학원에서 사람 만드는 것 아닙니다. 지식은 조금 나아질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때로는 우리도 장관직도 사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가정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윌리암 하킹은 ‘가정이 없는 곳에 국가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역사가들은 나라가 망하기 전에 가정이 망한다고 합니다. 가정이 건강한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정 다 팽개치고 나라일 한다고 다 나가면 가정이 망하고,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1809년 가난한 구둣방 가정에 둘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주위에서는 이 아이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의 미래를 내다보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면 꼭 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성경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아이가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는 풍토병에 걸려 숨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숨지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이야, 너는 부자나 위인이 되기보다는 성경을 힘써 읽는 사람이 되라” 그리고 어머니는 성경 책 한 권을 남기고 이었습니다. 이후 이 아이는 자라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미국에서 30년 전에 가정생활 강의로 이름난 제임스 해치 교수가 행복을 위해서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입을 열라(open mouth)는 것입니다. 부부간이나 부모와 자녀간에 대화가 없으면 서로 마음을 닫는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다. 연애시절처럼 말을 많이 할수록 행복의 수치는 올라간다고 지적했습니다. ‘대화’하라는 것입니다. ‘대’놓고 ‘화’내는 것이 대화가 아닙니다.
둘째는 귀를 열라(open ear)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려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귀를 닫아버리면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는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함께 계획을 세우라(make schedule)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함께 하라는 의미입니다.

존 웨슬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세 가지 질문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첫째, 너에게 준 시간을 어떻게 관리했느냐?
둘째, 너에게 준 재산을 어떻게 관리했느냐?
셋째, 너에게 맡긴 자녀를 어떻게 양육했느냐?
유대인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곳에 직접 계실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냈습니다. 어머니가 계신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어머니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어머니의 손이 가는 곳에 하나님의 손이 가는 것이며, 어머니가 일하는 곳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오던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우리가 진정 울어야 할 것은 내 영혼을 위해서입니다. 내 가정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세워지는 가정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으로 알고 열심히 가꾸고 만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키산맥 해발 3.000m 높이에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 끓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어야 합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발휘합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共鳴)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끓는 나무”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 온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찾아오는 매서운 바람 때문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내는 사람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