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기도하라①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5. 이렇게 기도하라①) / 본문 : 마태복음 6:9-10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캐나다에서 목회 하시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목사님이 서울에서 부 목사님으로 계실 때 겪었던 일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너무 길게 기도를 하시는 겁니다. 주일저녁에 집사님이 하도 길게 기도하시니까 나중에 성도님들이 주무시는 겁니다. 누가 좀 이제 말려 줬으면 하고 생각할 때 목사님이 다가가셔서 집사님에게 줄이시라는 신호로 가까이 가서 바지춤을 잡고 살짝 당겼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이 손으로 탁 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사단아 물러가라!” 그러시고 계속하십니다. 이쯤 되면 이제 말릴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아이스크림을 놓고 기도하는데 어찌 오래하는지 국내의 정치문제를 비롯해서 세계의 기아문제, 선교 등의 기도를 합니다. 이런 기도를 흔히 세계일주 기도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 15분하고 났더니 아이스크림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라면 놓고 이렇게 길게 기도하면 라면이 배가되는 축복을 보게됩니다.

제가 시골교회에 다닐 때 주일저녁 예배 때 있었던 일입니다. 작은 교회다 보니 봉사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한 분 한 분을 위해 기도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으로 시작해서 주일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성가대원들
그리고 피아노 치는 강…
또 다시 피아노 치는 강…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다시 피아노 치는 강…
하시면 기억하실 것 같아서 그렇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또 다시 피아노 치는 강…
하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떤 분이 킥킥 하시는 것입니다.
드디어 많은 성도들은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다행히 목사님께서 피아노 치는 강 자매로 마무리하시게 하였습니다.

기도를 단순히 좀 길게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또한 공중 기도에서는 좀더 잘 하려고 하다가 그만 이런 실수를 하게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단순 실수보다는 정말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기도할 때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3세 가지 주의를 주셨습니다. “첫째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둘째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셋째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의 세 가지 경우처럼 이방인과 같이 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누가복음 11:1절에 보면 “…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11장과 본문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제자들은 이제 새로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줄 필요성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 답안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의 ‘이렇게’(Ou{tw”:후토스)는 단지 자구적(字句的)인 답습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앞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쓸모 없는, 아무 효과도 없는 즉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기도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공허한 기도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하려면” 지금부터 말씀하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즉 정신과 내용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그 순서상의 방법까지도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배운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자기생각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하면 되지 무슨 기도를 배울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하라”(proseuvcesqe:프로슈케데)는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이러한 기도를 단 한번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마다 이러함 모범을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이렇게”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는 먼저 대상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그래서 먼저 부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화를 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전화를 걸어야 비로써 대화가 가능합니다. 내가 원하는 사람과 전화하기 위해서는 전화번호를 바르게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원하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미 기도의 대상이 정해졌다면 어느 정도는 할 말이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전화해 놓고 말 안 하면 전화한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또 어떤 분은 전혀 그 사람에게 필요 없는 말을 합니다. 마치 엄마 불러놓고 아빠한테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직 말을 못하는 아이가 전화통을 잡고 늘 “어버버…”그러면서 노는 겁니다. 그런데 하루는 길게 “어버버..”하면서 전화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엄마가 받아보니까 저 쪽에서도 똑 같이 어떤 아이가 “어버버…”하면서 둘이 통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끼리 전화를 해서 한번 만나자고 했습니다. 만나서 보니까 저쪽 아이가 엄청 덩치가 큰 것입니다. 그리고 놀다가 한방 맞고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전화벨만 울리면 피하는 겁니다. 전화에 해한 좋은 나쁜 추억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화한 상대가 말을 잘 받아주고 또 내가 기분 좋게 내 마음을 다 터놓고 이야기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자기 이야기만 하고 끊는 분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말만 먼저 잔뜩 늘어놓고 마치 예의 없이 전화를 뚝 끊는 분처럼 한다면 하나님도 기분 나쁘실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해야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이란 이름은 ‘두려움’을 의미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란 단어는 두려워서 입술에도 올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이름을 발음하거나 쓰기 위해서는 ① 목욕을 하거나, ② 오랜 세월 기도한 후, ③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거룩한 옷을 입고 불렀습니다. ④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 이름이 나오면 묵음으로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그저 ‘아도나이’ 즉, ‘주님’이라고만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구약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아버지와 같이 가까운 분으로 다가오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내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생각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 이름만으로도 존귀하신 분입니다. 영원토록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로 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하셨던 분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핍박가운데서 인도해 주시며 홍해를 가르시며 마른 아론의 지팡에 움이 돋게 하시며, 바위에서 샘이 나게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이며 우리 죄를 속하려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또 부르고 또 불러도 또 부르고 싶은 거룩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간구 3가지, 나 자신을 위한 간구 3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 첫 번째 간구가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간구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요청입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 115:1)
캠블 몰간은 “기도의 첫째 목적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얻으려는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구하는 활동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순서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요 12:28)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이요, 구원하신 목적, 우리가 추구할 최고의 사항입니다. 아버지가 높아지면 아들도 높아집니다.

성경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이름은 ‘여호와’로 7,040회이고, 다음은 ‘하나님’으로 4,000회, 사람으로는 ‘다윗’으로 1,000번 정도, ‘여호와 하나님’은 11,040회나 나옵니다. 가히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그 분의 품성을 의미합니다. 이름은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신 인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나루에서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레 24:16) 한 것은 상대 장사의 성품을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속성, 규례, 말씀, 사역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이 뜻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며 그 분의 독특성과 하나님 됨과 성품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고 했습니다.
파스칼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케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고 말씀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 실현에 있습니다. “나라이 입하옵시며”는 주기도문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기원입니다. 여기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막 4:11, 막 30:9) 혹은 ‘천국’(마 3:2, 마 4:17, 마 5:3), ’왕국‘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제일 처음으로 전파하신 말씀이요, 주님의 전도의 목적이요, 주님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또 천국이 임하는 것은 성도들의 최종 목적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란 간구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서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 건설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기뻐하며 이것이 자신의 삶의 목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은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였습니다.
계속되는 사역 중간 역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였습니다.
끝도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세 가지 시간적인 영역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과거의 것으로써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마 8:11, 눅 13:28). 또 현재의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는 현재의 사실입니다. 또한 미래의 것으로 이해되는 천국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끝 날에 비로소 완성되는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힘써 일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구원받기 위함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뜻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6-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하신 말씀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요 6:38-39절에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속성이 있습니다. 첫째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히 6:17) 사람의 뜻은 잘 변합니다. 아침에 목적한 것이 저녁에는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둘째 불가항력적이어서 누구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롬 9: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셋째 결국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사람의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국 어찌하든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왜 이런 기도를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참여하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나를 포함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갑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에게는 다 광고하고 나만 빼고 가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나와 함께 가시기 위함입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아멘으로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사 때 개척한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매일 예배를 드린 후 축도 대신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항상 마쳤습니다. 세월이 흘러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이제 축도 할 수 있다는 기분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물론 목사 안수 받은 다음 주일날 성도들에게
첫 번째로 할 축도 연습을 무진장했습니다. 모든 분들이 다 웃으시겠지만요. 드디어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이제축도 할 시간이었습니다. 전 자신 있게 손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은혜와… 축도 초반부를 시작하는데 어딘 선가 이제는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 은혜와 라고 따라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여기저기서 다 따라하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하늘아버지의 거룩하신 은혜와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그만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로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기도문으로 갔다가 다시 축도 문으로 갔다가 왔다갔다 하다보니 그냥 아멘이 되었습니다.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우리 사모가 축도를 모르고 즉 주기도문인지 잠시 착각하고 따라했고 초신자들이 성도들은 축도가 뭔지도 몰랐고 사모가 따라하니 따라했던 것입니다. 예배를 마친 다음에 성도들이 하는 말! “목사님 ! 주기도문을 잊어버리시면 어떻게 해요?”
“목사님 때문에 우리도 착각했잖아요.” 하는 것입니다. 사모가 따라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저만 완전히 망신당했습니다.
 

기도할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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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54. 기도할 때에) / 본문 : 마태복음 6:5-8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 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 내용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내한하여 얼마 안되어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드린 기도문입니다.

저는 이 기도문을 성경처럼 읽고 또 읽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힘들다고 느껴질 때 더 많이 읽었습니다. 어느 한 구석 외식적인 흔적이 보이질 않습니다. 솔직 담백하면서도 결코 구부러지지 않은 믿음을 가진 기도입니다.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했지만 결코 불만이 섞여있지 않았습니다. 이 기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2-3)라고 한 말처럼 불평의 내용도 없습니다. 반대로 언더우드는 눈물로 기뻐할 날이 올 것인데 그날을 위해 현재의 믿음을 붙잡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언더우드가 이 기도를 드린지 63년이 지난 1948년 5월 31일에 대한민국 첫 국회가 열렸습니다. 이날에 국회의원들 전원이 기립한 가운데 이윤영 목사님이 기도하고 대한민국 국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복을 내리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셔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셨으며 세계인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써 역사적인 환희의 날이 우리에게 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드러나게 하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 아직까지 남북이 둘로 갈린 이 민족의 고통과 수치를 씻어 주시고 우리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민생의 도탄이 오래 갈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만 확대될 것이오니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속히 이 땅에 임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독립을 주신 하나님, 이제는 남북의 통일을 주시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어떤 자세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기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기도는 그 어떤 행동보다 더 즉각적인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5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 7절 또 기도할 때에… 세 번 나옵니다. 이 말씀을 명심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때에”라고 번역된 호탄(o{tan)은 “언제든지”라는 뜻인데 가정법 현재시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규칙적인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 기도의 효능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잘못된 기도를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인간세상에서 볼 수 있는 제일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 대표적인 기도가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는 기도입니다. 외식하는 자는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① 악하면서도 선을 가장(pretence)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남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2:15-18).
② 자기 만족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남을 속이는 유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경건한 체 하지만 금방 발각됩니다(9:1-5). 예수님 때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③ 외식을 하면서도 자신과 하나님을 위해 가장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유형입니다. 가장 완벽하게 외식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으면 그 행위를 보는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이런 외식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기도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미래형으로 이 말을 듣는 이후로는 허황된 위선적인 잘못된 기도를 하지 말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런 외식의 유형에 대해서 두 가지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이 사람들의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경건 생활을 알리려는 수단으로 하루 세 번씩 회당에 올라가 기도드렸습니다(눅 18:9-14, 행 3:1, 10:9). 또한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자세는 엎드려서(민 16:22, 단 7:17, 계 11:16), 무릎을 꿇고(대하 6:13, 눅 22:41, 행 9:40), 또 앉아서(삼하 7:18), 또는 서서(삼상 1:26, 막 11:25)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신체적 자세를 지적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동기를 문제삼고 게신 것입니다.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들어주실 기도란 없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철이 없던 시절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도사 때 삼각산에 올라가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바위에 그럴듯한 모습으로 앉아 목소리는 오고가는 사람이 다 들을 정도로 목청을 높여 “주여~” 소리를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마치 경건한 척하는 유대인들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드릴 때 얼마나 내 자신이 하나님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거짓말이 탈로 난 어린아이처럼 왜 창피한 것 있잖아요.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예수님이 공적 기도를 금하신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초대 교회의 공적 기도에 대해서 금하지도 않으셨으며 오해하지도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했으며 사도행전 1:24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가룟유다 대신에 제자를 뽑을 때 하신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어도 합심하는 기도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공중에 나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외식하는 자의 기도와는 반대의 개념으로 하나님과 자신과의 만남을 소중히 생각하는 그런 장소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골방”(tamiei’ovn:타메이온)은 “창고, 밀실”을 말하는 용어인데 이 어원은 “자르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세상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밀실은 정치하는 곳이 아닙니다. 밀실은 하나님과 기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민족의 선지자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사 26: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언이 말씀으로 마지막 때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전에 문설주에 피를 발라 유대인의 표시를 함으로 하나님이 애굽의 장자는 모두 죽이고 이스라엘의 집은 유월하신 하나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골방”은 우리를 환난 날에서 피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 65:24) 하나님은 우리 한국사람보다 더 성격이 급하신 것 같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뜻대로 드려지는 기도는 부르기 전에, 말을 마치기 전에 들으십니다.
스펄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종종 예배 장소에 있으면서도 거룩하지 않은가?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기도 골방에 들어가는 것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밀은 좋아하지만 그 밀을 빻지는 않는다. 그들은 옥수수를 얻게 될 텐 데도 그것을 모으러 들판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은 기도의 골방을 떠나기보다는 사자 굴에서의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기도의 골방이 되기를 바랍니다.

7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산상수훈에서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세 번나옵니다(5:47, 6:32). 본문은 두 번째 나오는 것입니다. 갈릴리 지방은 이방 지역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의 출입이 잦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섞여 살고있어 이방인의 관습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5, 6절에서 잘못된 유대인의 기도의 문제를 지적하실 때는 기도의 동기적 측면으로 기도의 장소와 태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본문에서 이방인들과 비교를 통해서는 내용적 측면을 강조하셨습니다. “중언 부언”(battologhvahte:밭타로게세테)은 이곳에 단 한번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 단어의 어원을 우리가 분명히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단순하게는 이 단어의 뜻은 “지루하게 재잘거리다”입니다. 별 의미 없는 말을 반복적으로 길게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일종의 이방인들이 행하는 주문(呪文)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주문을 하루종일 외운다거나 몇 번을 반복하면 효력이 강화되어 들어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하는 어리석은 신앙관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기도에 있어서 전혀 반복적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언부언이란 중요하지도 않으면서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정말 간절히 기도할 것이 생기면 다른 것은 생각도 안 납니다. 오직 그 문제만 간절합니다. 밤새도록 그 기도만 하게 되지 다른 기도는 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밤새도록 같은 내용을 반복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잡히시기 전날 밤 온 밤을 새우며 기도 하셨습니다. 그 때 반복적으로 같은 내용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합당한 기도입니다. 마땅히 드려야할 기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8절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하면 우리의 기도는 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일학교 유치부 교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기도하려는데 계속해 우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다가가 물어보았습니다. “왜 울지?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거란다. 울지 말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애기해봐 착하지?”
“선생님 그게 아니에요. 지금 기도하려니까 생각났는데, 제가 어젯밤 아빠를 위해 기도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미키 마우스’를 보느라 잊어 버렸어요. 우리 아빠가 아프거든요. 하나님이 내가 기도를 안 해서 우리 아빠 병을 낫게 해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선생님.”
우리도 이 아이와 같이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의 일이 잘 안되면 네가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지 않아서 그런가? 열심히 기도하지 않아서 그런가? 말씀을 읽지 않아서 그런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우리처럼 그렇게 옹졸하신 분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구하면 주고 그렇지 않으면 주시지 않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수동적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만큼 적극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우리는 은혜아래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감사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축복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천합니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3. 추천합니다) / 본문 : 요한복음 6:27-29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이영제를 추천합니다.
왜냐하면 반장이기도 하지만 행동도 바르고 좋은 점이 나름대로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제를 추천합니다.
우리 반 좋은 아이들 추천 / 추천자:이영제 추천인:지강현
이 글은 상해한국학교 4학년 1반 네이버 카페에 올려진 내용입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은 이 아이들과 같이 서로 추천하고, 추천 받을 수 있도록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저는 미국비자를 받으러 갔다가 4번을 떨어진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에 인터뷰하러 갔는데 영사관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직업이 목사라고 하니까 “당신 선배들이 약속을 안 지켰기 때문에 당신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목사님들이 돌아온다고 하고 미국 가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눌러앉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나는 다르다, 그분들하고 나는 다르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알겠다”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데이콤에서 무료 연수시켜 주겠다고 하고, 또 L.A. 한국인의 날에 초청을 받아 가야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또 비자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소득신고서류를 제출하라느니, 통장사본을 제출해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저는 소득이 옛날이나 지금이 없는 사람입니다. 통장 역시 지금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뭐하나 보여줄 것도 제출할 것도 마땅치 않은 것이지요. 가나 마나 였지만 혹시나 하고 갔었지요. 그러나 역시나 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0년에 미국비자 10년짜리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궁금하시지요? 제가 뭐 변한 게 없는데요. 그것은 바로 추천이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추천서류를 첨부 안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들 떠도 안보더라구요. 그런데 이번에는 추천인이 다 아는 분이었습니다. 미국 빌리그레함센터에서 빌리그레함 목사님의 사인이 있는 서류가 첨부된 것입니다. 그리고 인터뷰하러 갔는데 벌써 물어보는 것이 다르더라구요. “미국 가시려고요.” “예” 그리고 끝났습니다. 10년짜리 비자를 받았지만 10년이 넘게 걸린 비자였습니다. 너무 좋아서 그 비자 쓰다듬고, 쳐다보고 오다가 나무 들이받아 미국대사관 주변의 나무는 껍데기가 다 벗겨졌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서류 동봉해서 안됩니다. 도 닦아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추천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이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추천만 가능하다고 말하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추천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오늘 본문 27절 “…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 유일하게 추천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메시야’ 특별히 보내신 분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추천하셨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성경에서 인치심을 받았다는 말고 ‘증거’를 받았다는 말은 모두 하나님이 추천해 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각 지파별로 인 맞은 자의 수가 나옵니다. 주님이 추천한 사람의 수라는 것입니다. “인치신”으로 번역된 원문 ‘에스프라기센(ejsfravgisen)’은 ‘인봉하다, 표시하다, 증명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들을 때 연상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구전 자료인 미쉬나(Mishan)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흠 없는 것을 제사장들이 조사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물로 드려지는 양이나 염소가 흠이 없으면 승인하는 표시로 도장을 찍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흠 없는 제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본문 27절은 재미있게 구성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질문을 역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그런데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라는 것입니다. 세 구분으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부분에서 확인된 것입니다.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입니다. 하나님의 추천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뒤에 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요한복음 6장 1절에서부터 오병이어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그 느낌이 달랐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늘 궁금해하던 이 분이 누구의 능력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요 12:49-50) 예수님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치신 자”라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은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오병이어와 같은 일이 얼마든지 자주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또한 우리를 추천해 주시지 않습니까.

독일의 어느 작은 마을에 피아니스트가 살았습니다. 그는 피아노 독주회를 준비하고 지방신문에 광고를 내는데, 당시의 유명한 음악가인 리스트의 제자라고 자기 소개를 합니다. 물론 거짓입니다. 리스트를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연주회가 있기 며칠 전 리스트가 이 마을에 오게 되었습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거짓이 탄로 나면 음악가로서의 자신의 일생은 끝장나고 마는 것이 됩니다. 전전긍긍합니다. 아무리 후회를 해도 이제는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리스트가 마을에 왔을 때, 그는 백 배 용기를 내어 리스트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빕니다. “제가 선생님의 이름을 도용했습니다. 제가 아직 부족함이 많은 피아니스트인 주제에 감히 당신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러자 리스트가 조용히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당신은 크게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앞에서 한번 연주해보시오.” 연주를 시킵니다. 그는 벌벌 떨면서 리스트 앞에서 피아노를 칩니다. 리스트는 연주를 들으면서 중간중간 멈추게 하고 고쳐줍니다. 연주를 마치자 리스트가 그에게 말합니다. “단 한번이라도 내가 당신을 가르쳤으니 이제 당신은 분명히 내 제자입니다. 그리고 연주회에서 당신 연주가 끝나면 제가 한 곡 연주를 하겠습니다. 관객들에게 그렇게 소개하십시오.” 그 연주회는 엄청난 기쁨과 영광의 연주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인일 때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떨어진 명령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양식을 주님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사실상 할 일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썩지 않는 양식,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데 이 양식을 주님이 주시겠다고 하니 이해가 안됩니다. 그래서 다시 주님께 질문합니다.
28절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영생을 위한 양식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그 양식을 만든다면 불로초를 만드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을 위한 양식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먼저 추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영생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믿음 위에는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28절에서 질문할 때의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의 ‘하나님의 일’(e[rga:에르가)은 복수로 나와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대답하실 때 ‘하나님의 일’은 (e[rgon:에르곤)으로 단수형으로 나옵니다. 사람들은 무슨 여러 가지 일을 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단 한번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을 믿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인치심을 받아들일 차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추천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직 나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유일하게 구원해 주실 분임을 인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다시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께 추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음악에 관계된 이야기 하나 더 하지요.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지휘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 1867-1957)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9살 때 첼로와 작곡 공부를 시작하였고 20세가 되던 해에 리오데자네이로의 이탈리아 오페라단에 입단하여 첼로 연주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오페라단의 지휘자는 성격도 괴팍하고 실력도 부진했습니다. 단원과의 마찰이 심했는데 결국 솔로가수와 사소한 언쟁을 벌이다 짐을 꾸려 그곳을 떠났습니다.
‘이를 어쩐담…’
오페라가 무대에 올려져야 하는 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은 것입니다. 느닷없이 지휘자가 없어지자 모두들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토스카니니를 지휘자로 임명하자고 추천했습니다. 하지만 지휘를 하려면 이 곡 전체를 외우고 있어야 했습니다. 토스카니니를 추천한 사람은 바로 솔로가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의 나이 겨우 20살이었습니다. 그 곡을 완전히 외우고 소화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 그 중에 제일 많은 단원이 말했습니다. “한번 시켜봐서 손해 날 것 없으니 이 자리에서 지휘를 시켜 보도록 합시다.”
이렇게 해서 토스카니니는 생전 처음 지휘대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가 곡 전부를 외우고 있는 것은 물론이요 그의 지휘는 완전히 사람들을 그 곡 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 오페라의 상영은 대단한 찬사를 받았습니다.
토스카니니는 준비되었던 지휘자였습니다. 그가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그 기회를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강력하게 추천해 주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다시 올 때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늘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당시의 죄악상을 보면서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박국 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이 하박국 2:14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오늘날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온 세상 가득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양을 돌보느라(삶의 우선 순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2. 양을 돌보느라(삶의 우선 순위)) / 본문 : 마태복음 5:22-24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A.D. 78년, 하얀 수염을 흘러내리며 베들레헴이라 불리는 마을 근교에 있는 오두막에 한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소년이 달려와 물었습니다.
“이스마엘 할아버지, 나는 오래 전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할아버지께서 언덕에서 양치는 목동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들었어요. 그 아기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얘기해 주세요. 할아버지께서는 그분의 부모님을 보셨나요? 정말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가 경배했나요?”
잠시 후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래. 나는 그때 그 목동들과 함께 있었단다. 그러나 나는 양을 돌보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에 굳이 가보려고 하지 않았단다. 결국 나는 그분을 볼 수 없었지.”
‘양을 돌보느라…’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목적과 우선 순위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리되지 않으면 뒤죽박죽이 됩니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에 주신 말씀 중에 ‘먼저’라는 말을 사용하시면서 세 번에 걸쳐 사람의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분문 말씀은 그 중에 처음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아 이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남의 문제, 죄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성품을 갖게 된 것은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죄를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죄를 범한 자를 돌로 치거나 문둥병 갖은 병이 생기면 진 밖으로 나가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와 전염병이 그 무리 안에 퍼질까 염려해서 내려진 조치입니다. 이런 배경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남의 죄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는 형제에 대해서 두 가지 욕을 하고 있습니다. 욕을 하기 전에 따라 다니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대상이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씨족 사회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한 형제입니다. 남에게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형제에게 그러면 되겠습니까? 제일 답답한 분들이 자기 가족에게 함부로 대하는 분들입니다. 아마도 너무 편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요?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너무나 쉽게 생각합니다. 아마 다른 분들이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데 유독 아내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실 욕 안 합니다. 형제에게 제일 가까운 분에게 합니다.

두 가지 욕은 “라가”(@Rakav:흐라카)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텅빈, 무가치한, 우둔한, 멍청이”라는 말입니다. 또 한가지의 욕은 “미련한 놈”(Mwrev:모로스)으로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이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히브리어 ’모레‘라는 말을 연상시킵니다. 이 말은 도덕적인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라가‘라는 말은 ’어리석은 놈‘으로 지적 수준이 떨어진다는 저급하다는 말이며, ’미련한 놈‘(모레)는 ’추악한 녀석‘이라는 말로 인격적으로 천박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욕은 상대방에게 참혹한 상처를 남깁니다.
이런 욕을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자신은 늘 선생의 위치에서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에서 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 1:7)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3:1에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중에 언제나 나는 가르치는 위에 있는 선생이고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배워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지간에도 부부사이에도 자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만 자녀에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그러면 아이들은 속으로 “아빠 머리에 피 마르면 죽어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이가 제일 좋겠습니까? ‘친구’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부도, 자녀간에도 친구처럼 되면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상대방에게 이런 치명적인 상처를 남겨 놓은 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막 7:11)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급한 것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형제와 화목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해결이 안되면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공회에 잡히게 된다는 것은 사법적으로도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줍니다.
구약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하나님이 찾으실 때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출 12:5, 민 28:11, 19, 겔 45:18) 하나님은 흠 없는 제물을 찾으십니다. 상처가 있는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도 육체적으로도 흠이 있으면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레위기 21:17-21 보십니다. “17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18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19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20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21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장애인은 차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흠 없기를 바라는 것인지 우리를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저도 팔이 부러졌습니다. 구약시대 같으면 레위지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이기적인 내 자신의 모습을 보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예물이 이러할 진데 예배 또한 그런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상대방에게 욕한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지옥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예물은 하나님이 받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은 “양을 돌보느라”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은 위해 쫓아다니면서도 자신 때문에 상처받은 영혼들에게는 무관심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도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선악간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빠르게는 이 땅에서 선악간에 그 축복과 저주가 임합니다. 그러나 이 생애에서만 다 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죽음 이후에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잘 이해가 안되지만 분명히 성경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광기에 휩싸여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목숨을 전쟁터로 내어 몰았던 나치 히틀러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한사람의 장군이 있습니다. 히틀러의 프랑스에 있는 애틀란틱 전선을 무너트리기 위해 공격 임무가 아이젠하워 장군 견장에 붙은 네 개의 별 위에 떨어졌습니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101공수 비행단 병사들과 함께 작전 전야를 보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경이의 독수리”라고 불렀습니다. 병사들이 비행 준비를 완료하고 장비 점검을 끝냈을 때 아이젠하워는 일일이 병사들을 찾아다니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비행사 중 상당수는 그의 아들 또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들을 대하듯이 병사들을 대했습니다.
한 종군 기자는 호주머니에 두 손을 깊이 찔러 넣은 채 C-47기가 이륙하여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장군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했습니다.
이어 장군은 숙소로 돌아가 책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펜과 종이를 꺼내 메시지를 기록해 나갔습니다. 그것은 패배시 백악관에 전달될 메시지였습니다.
“우리의 상륙 작전은 …… 실패로 끝났습니다. …… 육해공군 모두가 최고의 용기와 헌신을 다해 작전에 임했습니다. 만약 이 작전에 어떤 과오나 실패가 있게 된다면 그 책임은 모두 내게로 돌려져야 할 것입니다.”
아이젠하워는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아니라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주님은 마태복음 7장에 가서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내게는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는 바로 자신이 스스로 선생이라는 착각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내 자신의 문제를 먼저 돌보고 나서 또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앞의 31절에 보면 “무엇을 먹을까 …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또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는 먹고사는 문제도 큰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일상에 지나지 않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든지 하고 심지어는 동물들도 하늘에 나는 새도 그와 같이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더 다른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먼저 주일부터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예배하며 기도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 입니다.
소련의 레닌 공산정권은 교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7일 동안 일하고 8일에 쉬게 하여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결과 국가적인 생산지수가 30%나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바꾸어 5일 일하고 6일째 쉬도록 했으나 마찬가지로 생산이 늘지를 않았습니다. 레닌은 할 수 없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7일에 쉬게 하였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도 기독교를 박해하기 위해 주일성수를 방해하였으나 레닌과 마찬가지 결과를 보았습니다. 주일성수를 방해하였던 레닌 공산주의나 히틀러 정권은 멸망하였습니다.
분단 다음 해인 1946년, 북한에서는 김일성 정권의 주도하에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11월3일에 실시하게 되었다. 이날은 주일이었습니다. 교회는 주일에 실시하는 선거를 반대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교회 지도자들이 투옥과 강제노동을 당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 들은 박해를 당하면서도 주일을 성수 했습니다.
오늘날, 별 큰 이유도 아닌데 주일을 지키지 않는 교인들을 우리는 많이 봅니다. 옛날에 우리 선조들은 주일을 지키려고 목숨을 내놓기까지 했었는데, 오늘날 우리는 별 이유도 아닌데 쉽게 주일을 범합니다.

6.25 전쟁 후 가난한 시절에 강원도 동해의 어느 마을 어느 권사님은 주일에 양식 배급을 준다고 하는데 양식 받으러 가지 않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양식 보다 주일성수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 권사님은 아들 형제를 데리고 서울 약수동에서 교회 개척을 했습니다. 교회 이름은 형제교회입니다. 늘 기도하며 살던 권사님은 교회에서 기도하는 중에 고요히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두 아들중 형은 지금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목사님이 되었고 둘째 아들은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여 집사님 한 분이 어느 날 목사님에게 찾아와서는 “목사님, 제가 하나님을 웃겼더니 하나님이 제 기도에 응답하셨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물어보니까 이러한 내막을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오랜 시간동안 우리 남편을 위해 금식하고 통곡하며 기도도 해 봤지만 소용없었어요. 오히려 남편은 교회에 나올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요지부동이었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예배 때 남편 구두를 교회 가지고 나와서 강대 상에 놓고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구두가 먼저 나왔사오니 주인도 이 구두 따라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요.
제가 기도하긴 했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우스워서 한참을 웃었지요. 그래서 그날 다른 기도는 하나도 못하고 실컷 웃다가 돌아갔는데 그 다음 주일날 남편이 갑자기 저를 따라 교회 간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더니 요즘 계속 교회에 나오고 있답니다. 제가 하나님 한 번 웃겼더니 제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본문 : 마태복음 16:13-17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어려운 신학을 꼬집는 일화로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난해한 신학자인 폴 틸리(Paul Tillich)가 주님이 이 땅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 날에 예수님를 만났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가이샤랴 빌립에서 베드로에게 물었던 중요한 질문을 폴 틸리에게 묻는다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폴 틸리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목적론적 근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뭐야!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려운 말이나 신학이 마치 수준 있는 신학이나 설교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는 짧게 그리고 핵심 있는 내용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이 주앙교회 성도 여러분의 고백도 되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인생의 의미나 삶의 목적을 찾고 싶어하는 깊은 갈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직업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 ‘되느냐’ 보다 무엇을 ‘하느냐’에 가치를 둡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쉬지 않고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무엇을 소유했는가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짓습니다. 이들은 새 차, 새 집 또는 새 옷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연연하고 마음을 졸입니다. 항상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뿐인 진리는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존재는 그저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는 잡동사니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바로 아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우리의 가치관 목적의식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여론
예수님께서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회적 평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예수는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은 지식으로 예수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나의 지식으로 또는 사람의 지식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소위 “4대 성인”중의 하나라고만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TV나 신문에 불교행사에 카톨릭 신부나 개신교 목사가 참석해서 예불하는 행위를 보여주며 “종교계가 마음을 합하고 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이런 영향하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물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이것을 반대하는 개신교 목사는 이 시대를 거스리며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하는 목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의 마음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성인중의 한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2000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복음주의 자들이 209개국으로부터 1만 7천여 명이 모여 자신들의 복음주의적 입장을 재 천명하는 “암스테르담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이 선언문의 내용들 속에는 ‘우리는 타종교인들에게도 예절 있는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복음 전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타 종교인에 대해서 배타적 태도로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동네로 통행하시고 유대인으로서는 만날 수 없는 여자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대화하셨습니다. 타 종교인과 대화 할 수는 있으나, 우리는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uniqueness)의 진리를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의 대답을 잘 보십시오.
14절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나 여전히 예수를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모두 사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 또는 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몰라본 사람들
“가로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4)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각각 느끼는 데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따라 다녔습니다. 창세기부터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많은 제사장과 왕들을 통해서 그렇게 누누히 약속하시고 약속하셨던 분이 실제로 오셔서 그 증거들을 또한 그렇게 많이 보여주셨건만 양을 잡으면서도, 성경을 읽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것의 실체 되신 그 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이들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포로로, 노예로, 식민지로 고통을 당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예수를 몰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게 봤지만 그들은 전혀 틀리게 보고 있는 것이고, 그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희미하게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 –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채찍질하시며 정화시키시는 모습과, 부정과 부패를 일삼으면서 형식과 제도에 빠졌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아”하며 책망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약대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외치면서 헤롯 같은 권력자의 비리를 꾸짖으면서 시대와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세례요한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는 그러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를 개혁하려고 오신 게 아닙니다. 비슷하게 생각을 했지만 전혀 예수님을 잘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썩어빠진 제도와 권력을 향해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드셨던 민중의 지도자로 여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일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오신 분은 아닙니다. 아무리 제도를 바꾼다 해도 하나님을 떠나 죄와 저주와 사단에게 빠져 있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사회를, 세상을 개혁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 – 5병2어로 오천명을 먹이고, 물위를 걸으시고, 소경을 고치시고 하는 엄청난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리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구약시대 최고의 신비한 능력을 소유했던 엘리야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러 오신 엘리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시기 위해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신비한 능력을 보이시기도 하셨지만 그 능력자체를 보이시기 위함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수련회를 하면 무엇인가 불을 받아야 하고, 방언을 하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계속 무언가 신비한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일생을 보냅니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쓰러지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비한 어떤 체험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정말 잘못 본 것입니다.

예레미야 – 민족과 국가의 아픔과 고난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눈물의 선지 예레미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셨던 예수님을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식사하셨으며 불쌍한 고아인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유하시기를 기뻐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본 받으라고 오신 게 아니십니다. 예수를 믿어서 하는 가장 고귀한 일이 마더 테레사와 같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돕는 자선사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체 자선만이, 박애주의만이 최고의 선인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 가난을 조장하고 빈곤을 가져다주는 근본적인 존재한테 이용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박애주의를 보여주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레미야로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히 착각을 한 것입니다.

선지자중의 하나 – 산상보훈을 비롯해서 성경을 풀어서 권세 있게 말씀을 전해 주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훌륭하게 전달 해주는 훌륭한 선지자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훌륭한 가르침과 삶의 지표를 제시하시는 인생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요 선지자적인 요소가 있으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착각한 것이고 잘 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가 따라야 되고 실천해야될 삶의 규범을 제시하시고 가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행위자체와 말씀자체를 지키고 실천하는 게 기독교라면 기독교도 이슬람교나 불교나 똑같은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들도 마호멧을 석가모니를 존경하고 그 들이 제시한 삶의 규범과 원리와 실천강요를 따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호멧처럼, 석가처럼 우리에게 규범을 던져주시고 하늘나라에 가신 분이 아니십니다. 종교를 창설하시고 교리를 실천하고 율법과 규범을 실천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선생으로만, 선지자중의 하나로만 여기기 시작할 때 기독교는 종교에 빠지고 제도에 빠지고 교리에 묶이게 되고, 생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형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에 빠지고 윤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천할 무언가를 가르치고 떠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생명으로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관심은 이 질문으로 대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한 제자들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못된 버릇하나가 있습니다. 눈치입니다. 아마 전 세계에서 눈치하면 한국사람일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눈치가 너무 빨라 속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내 심중의 마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하셨습니다. 나의 고백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베드로의 고백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디서 배워서 알게된 것이 아니며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혁가도 박애주의자도, 신비운동가도 아니신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수 천년동안 하나님의 가슴속에 감취었던 비밀이 터지는 순간이요. 수 천년 동안 그의 조상과 선진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요. 모든 고통받고 저주가운데 있던 인류가 기다리던 소리였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이 단어 하나에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가 다 들어있습니다(골 2:3). 그리스도안에 하늘과 땅이 통일됩니다(엡 1:10). ‘그리스도’이 단어 하나에 창 1장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록 마지막에 나타나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다 포함된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이 이름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 후에 세상은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이 발견하고 미친 듯이 전세계로 들고 뛸 수밖에 없었던 그 이름 ‘그리스도’입니다. 원형경기장에 죽어가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칼과 창 앞에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도 찬송하게 만들었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그리스도
우리는 눈치가 빠르니까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카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도 받았고 “이제 따라만하면 되지”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각기 다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의사로 믿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인정이 많으신 은행장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입학 시험장에서 인심이 후한 체점관이나 심판관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세상의 출세와 성공의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범 답안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가는 병원이나 은행으로 생각하고 내 사업의 방패막이로 생각하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는 때로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결국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을 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필요할 때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수와 함께 한 몸이 되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후의 일입니다. 한번은 각료들과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각료들은 인사를 드릴 때에 너무 송구스러웠습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로 하여금 구차한 일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각료들은 대통령에게 건의하였습니다. “각하,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 나라의 어머니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일하게 하고 어머니는 쉬시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통령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그런 의견을 건넸습니다. 그때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대통령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일하라 하셨으므로 나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나는 일할 것이오.”

여러분! 손을 가슴에 얹어봅시다.
진심으로 예수가 나의 주님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을 차례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행위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 봉사하는 것, 헌금하는 것, 전도하는 것, 선교하는 것은 모두가 행위입니다. 이것이 다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입니까?
요한계시록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