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비유(3) 천국 보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3. 비유(2) – 천국비유(3) 천국 보화) / 본문 : 마 13:44-46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미국의 부호 록펠러는 돈을 버는데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벌어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배를 사서 고철을 실어 나르는 사업을 하고 있던 어떤 날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배가 짐을 잔뜩 싣고 오는데 폭풍우를 만나서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부랴부랴 보험을 들었습니다. 보험 회사에서는 왠일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파선되지 아니하고 무사히 귀환하였습니다. 록펠러는 보험료로 낸 500달러가 아까워서 몇 일 동안 밥을 못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상당한 부자가 되었음에도 그의 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가리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기상천외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은행 빛을 얻어서 미국에 있는 석유를 사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십여 일 동안 있는 대로 사들이니 미국에 있는 석유가 동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 때를 이용해서 자기 회사 석유를 15배를 받고 팔아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트러스트 방지법이 생겨낫습니다. 이렇게 욕심을 부리며 살던 록펠러에게 죽을병이 생겼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처방을 내립니다. 살기 위한 열 가지 이상의 규칙이 내려졌습니다.
그는 이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기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를 알게 되었고 믿음을 찾게 되어집니다. 믿음의 놀라운 능력과 새로움을 알게 되었고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참다운 삶의 길을 찾게 되었고 록펠러 재단을 세워서 보람있는 여생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천국비유 중에서 세 번째로 예수님은 두 가지 간략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44절 이 한 절의 비유를 보면서 여러분 무슨 생각이 듭니까? 저는 처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 글을 써 보시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어떻게 이 짧은 절 하나에 이렇게 많은 뜻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대하면서 놀랄 뿐입니다.
제가 설명을 달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밭아 나갔다가 우연찮게 보화를 보게된 것입니다. 밭에서 일하고 있던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데 쨍그랑하는 소리가 나서 파 보았더니 그 밭 속에 아주 놀라운 보물 상자가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귀중품을 땅 속에 감추어 두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유대법에 의하면 찾는 사람이 임자였습니다. 이 농부는 보물 상자를 일단 감취 놓고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보물이 묻혀 있는 밭 전체를 샀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보화를 캐려고 갔던 것이 아닙니다. 그저 보통 때처럼 농사일을 하려고 밭에 갔습니다. 이 사람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흔히 있었던 남의 농사를 대신 져주는 소작입니다. 이날에 밭을 갈러갔는지 혹은 씨를 뿌리러 갔는지, 수확을 하려고 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밭에서 우연찮게 보화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 보화를 발견한 농부는 그 보화를 그대로 놔 둘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그것을 잘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밭이 자기 밭이 아닙니다. 소작인은 알았습니다. 그 밭이 보화라는 것을… 이 밭은 이제 보통 밭이 아닙니다. 보화가 있는 밭입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실천합니다. 망설일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속히 그 밭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파는데 망설일 것이 없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제일 좋은 진주를 구하려고 나선 상인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제일 좋은 진주를 만난다면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사려고 찾아다니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찾아다녔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진주를 찾았습니다. 드디어 이 진주를 만났습니다. 이 상인도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가 그토록 바라던 진주를 만났기 때문에 자기의 전부를 주고 그것을 샀습니다.

이 두 비유의 요점은 위대한 보화인 복음,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들의 특성과 행위에 있습니다. 이 같은 면에서, 보화를 발견한 자와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동일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만나게 된 동기입니다. 첫 번째 사람,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찾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연히 그 보화를 보게된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이런 분이 있습니다. 처음에 얼마만큼 보화인지 모르고 교회에 왔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냥 한번 따라와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화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처럼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별로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살기 바빠서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내 욕심에서 마음이나 편안해 보려고, 축복 좀 받으려고 교회에 나왔는데 복음을 대하고 영생을 얻게되는 축복을 얻었습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경우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노라”(사 65:1).
내가 진정 주님을 먼저 찾지 않아는 데도 불구하고 주님을 만나셨다면 여러분은 농부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주고 천국 밭은 사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유형입니다. 이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하나님을 찾았으며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한 동안은 찾지 못했었습니다. 마치 캄캄한 밤에 다니는 것처럼 길이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길을 찾았습니다. 진주를 만난 것입니다. 복음을 만났습니다. 찾는 자에게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라고(마 7:7)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길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으리라”(요 10:9)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두 비유에서 복음을 받게 되는 방법은 달랐지만 그 이후부터는 생각과 행동이 동일했습니다. 먼저 그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것의 가치를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가치가 인정될 때 비로소 다음 행동이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자에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가치가 인정된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세 째로, 그들은 보화를 구입하기 위해서 모든 소유를 팔았습니다.
네 째로, 그들은 보화를 얻었습니다.
저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지금도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가난한 사람의 특징중의 하나가 일을 쉽게 포기해 버린다는 겁니다. 없어서 못한다고 체념을 너무 빨리 해 버리는 겁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난은 게으름 때문에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9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나 10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11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6:9-11) 이런 사람에게 성경은 말합니다. “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7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잠 6:6-8)

상인이 진주를 보고 가치를 인정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진주를 구하고 있었고 그것을 만나는 순간에 알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우연이지만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보화를 보고 발로 차거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잘 보관하고 갔습니다. 보화를 발견했다면 여러분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아내를 함부로 대는 분, 남편을 함부로 대하는 분, 자녀를 함부로 대하는 분은 보화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까이에 있는 분이 보화입니다.
아무튼 보화는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보화를 보고도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바보이거나 아니면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개나 돼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는 이러한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천국을 영생을 한다는 데 그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얻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최소한 한번쯤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나고 나서 땅을 치고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119:10).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도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10). 그리고 또 이렇게 외칩니다. 잘 들어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 119:127-128).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고백하기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밭과 진주의 소유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팔았다는 것입니다. 원래의 소유자는 팔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은총을 팔지는 않습니다. 이 비유는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점은 그 보화를 알아보게 되고 그것을 얻고자 결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방법대로 해야 그것을 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구원을 파시지는 않습니다. 이 비유가 구원을 값으로 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다만 이사야 55:1과 같은 의미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그러면 농부와 상인이 다 팔아 샀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찬송가 384장에서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버릴 찌라도”라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돌아오기 전에 제일 귀하다고 생각한 것을 다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 밖에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 소유를 다 파는,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를 복음화 시키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습니다. 이분들은 자기의 모든 것을 주고 천국을 사신 분들입니다.
한국에 들어오려고 시도한 최초의 선교사는 영국 웨일즈 출신의 로버트 제레마인 토마스 목사입니다. 이 분은 잘 아시는 대로 대동강으로 해서 평양으로 들어오려다가 타고 있던 배의 선원들과 평양 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져 끝내는 순교 당하고 맙니다. 1866년 9월3일의 일이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참수형을 당하기 직전까지 자기가 가지고 온 한문 성경을 구경꾼들을 향해 던지며 복음을 외쳤습니다. 이 성경을 받아 읽고 뒤에 한국교회 초기의 전도자 가운데 하나가 된 분이 있습니다.

죠지 베벌리 쉐어(George Beverly Shea)라는 캐나다 출신의 복음성가 가수가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의 일원이 되어 전도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죠지 베벌리 쉐어는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굵고 아름다운 바라톤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라디오의 전속 대중가수가 될 행운의 기회가 와서 그 길로 나가려고 할 때 어머니 성경책에서 쪽지를 발견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금이나 은보다 차라리 주 예수를 가지리
큰 재물 갖느니보다 차라리 주 예수의 것 되겠네
큰 집과 넓은 땅 갖느니보다 차라리 주 예수 가지리
못 밖힌 손에 이끌림이 차라리 나으리라

바로 찬송가 102장의 가사입니다. 이 찬송시는 시카고 한 감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뤼 밀러 목사의 부인(Mrs. Rhea F. Miller)이 적어놓은 글을 죠지 베벌리 쉐어의 어머니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글을 보고 은혜를 입어 단숨에 곡을 붙였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는 다음과 같이 의역되었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천국의 보화를 산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거룩한 대열에 합류하게됨을 감사드립니다. 아멘.
 

천국비유(2) 가라지를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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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61. 비유(2) – 천국비유(2) 가라지를 조심하십시오) / 본문 : 마 13:24-30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예전에 본 어떤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한 사람이 다리에 피를 흘리며 산 속으로 도망갑니다. 적들이 사냥개를 몰고 피 냄새를 맡으며 쫓아갑니다. 사냥개들은 점점 그에게 가까이 옵니다.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한 그는 한참을 도망가다 강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강에 몸을 담그자 집요하게 따라오던 사냥개의 추적이 멈췄습니다. 사냥개들이 더 이상 피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죄 문제를 집요하게 고소하는 사냥개와 같은 사탄의 소리를 잠재웁니다. 십자가는 큰 은혜의 강입니다. 그 은혜의 강에 몸을 담그기만 하면 누구라도, 그 어떤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용서받습니다.
등산을 하다 갑자기 산불이 나서 불길이 밀려오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요? 내 주위에 맞불 을 놓으면 됩니다. 그리고 다 타 버린 장소에 서 있으면 불길이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내가 내 죄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먼저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서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 오늘도 천국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진 땅입니다.
“천국은 … 과 같다”는 말은 관용적인 표현으로 ‘X의 경우는 Y의 경우와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천국은 …한 사람의 경우와 같으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와 같습니까?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의 경우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좋은 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된 반면 본문에서는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될 성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을 말합니다. 오늘 서은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두 번째 맞이하는 생일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서은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자기 가슴을 두드리면서 자신을 가리켰습니다. “제 밭에 뿌린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게될 사람입니다. 자기 밭에 나쁜 씨를 뿌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밭이 있다고 칩시다. 여러분 밭에다 나쁜 씨를 심겠습니까? 나쁜 씨는 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즘 보면 서울 사람이 시골 땅 사 가지고 농사를 짖지 않으면 벌금을 내니까 자기는 농사짓지 않고 다른 사람일 시켜서 대충 농사짓는 것처럼 시늉을 냅니다. 이것은 땅 투기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 그 땅에서 무엇을 얻는 것은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밭에 아무 것도 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아무 것도 심지 않았으니까 아무 것도 없어야 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심지 않은 밭에 가보십시오. 잡초만 무성하게 자랍니다. 주인이 심지 않았는데 어느새 잡초가 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심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잡초를 심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밭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그래야 잡초가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잡초가 있는 것처럼 세상 근심과 사단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제 밭은” 세 가지의 경우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 자신의 밭입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야 합니다.
둘째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만이 떨어져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세계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땅이 아닙니다.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운행하고 계십니다. 시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입니다.

원수가 뿌리는 가라지
25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잘 때에”는 농부의 태만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가 농부 모르게 슬그머니 뿌리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원수에 대한 보복으로 상대방의 밭에 가라지와 같은 독초를 뿌리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가라지는 (zizavnia)지자니온 이라는 독보리의 일종으로 ‘가짜 밀’이라고도 부릅니다. 싹의 모습이 밀이나 보리와 비슷한데 이삭이 나기까지는 구분이 어렵습니다. 잘못 알고 이것을 먹었다가는 구토 설사의 증상이 일어나며 심할 경우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 가라지는 예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악한 자의 아들들”(38)입니다. 사단의 자식들입니다.
가라지는 특징은 위장성입니다. 가라지는 싹이 난 다음부터 추수 때까지는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까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잘 분간이 되지 않게 위장되어 있습니다. 처음 싹이 나와서 상당기간은 잠복해 있습니다. 이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같더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나쁜 행위입니다. 사단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뿌린 씨 위에 한번 더 뿌려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구약시대 레 19:19과 신 22:9에서 다른 씨앗의 종류를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섞어 뿌리는 것은 두 종류의 곡식 중에 어느 하나도 제대로 수확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이 다른 종류의 씨를 뿌리면 양분을 나눠가져야 하므로 한가지도 제대로 안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순수성과 비타협적인 신앙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세상과 혼합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결실할 때에
26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언제까지나 숨어있을 수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본색이 들어 납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하면 “결실할 때”입니다. 결실할 때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습니다. 그 나무나 식물은 열매로서 그 씨앗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기 이전에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7:17). 성장기에는 감출 수 있을지 모르나 추수기에는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27절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종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좋은 씨 사이에 어떻게 가라지가 섞여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의문은 하나님께서 좋은 세상을 만드셨는데 어떻게 악이 이 세상에 들어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은 이 대목에서 악이 세상에 있게된 이유를 굳이 설명하려하시지 않고 이 악이 존재한다는 것과 분명한 것은 마지막 날에 완전히 파멸 당할 것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롬 16:20, 요일 3:8, 계20:2, 10).

28절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원수는 적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적 그리스도가 뿌려놓은 씨에 대해서 뽑아버리기를 청했었습니다. 이런 일이 실제상황으로 일어났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을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막고 나선 것입니다. 못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있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라고 했습니다.
이런 청을 하는 것은 ‘때’(kairov”:카이로스)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라지를 빨리 뽑아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정해진 때가 있습니다. 그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심판을 나를 통해서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사실상 심판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 자신이 먼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도 요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하시면서 요 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란 결국은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간혹 믿음이 잘못된 분들을 봅니다. 하나님이 권능을 주면 마치 자기가 이 세상을 심판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것은 교만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29절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가라지를 지금 당장 뽑아내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알곡이 뽑힐 가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리고 약한 곡식은 가라지를 뽑을 때 자칫하면 함께 뽑힐 수가 있습니다. 가라지를 남겨두는 것은 가라지를 위함이 아니라 알곡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알곡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 가라지를 심은 사단의 열의보다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점심 시간에 도쿄의 한 경찰서에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점심 시간에 도착한 돈가스 도시락에 폭발물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경찰이 출동하여 그 도시락에 폭탄이 들어있는 것으로 단정하고 조심스레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폭발물 해체 전문가들이 총 출동했습니다. 1차 준비 작업으로 하이로드젠 용액을 사용하여 도시락 상자를 냉동시켰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 정도 폭발물 해체를 위한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 십 명의 전문가들이 엑스 선(X-ray)으로 냉각된 돈가스 상자를 조사했을 때, 그들은 돈가스 외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 때 돈가를 배달한 소년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는 “아까부터 제가 말했잖아요. 방금 튀겨낸 돈가스에서는 재미있는 소리가 난다고 말이에요.”라고 흥분하며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불안한 심리상태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말해줍니다.

올해로 미국에서 911테러가 일어 난지 5년이 지났습니다. 미국은 911 테러 주동자로 이라크를 지목했고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미국인의 절반이상이 테러리스트 공격을 막지 못할 것이란 설문결과가 나왔습니다. 테러 공포는 미국인의 생활에 아직도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미 여론조사기관 퓨 리서치 센터(the Pew Research Center, PRC)가 2002년 발표한 ‘세계인의 생각’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 응답자의 72%가 테러와의 전쟁에 반대하고 있으며, 73%는 미국의 외교정책이 다른 나라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는 조사 대상 44개국 중 최고 수준이며 특히 아시아지역에서는 최고라고 합니다. ‘미국의 일방적 외교정책’과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두 질문 모두에 대해 50% 이상이 반대의 목소리를 낸 국가는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것은 당시 여중생 압사 사건 재판결과가 나오기 전인 7월 28일부터 8월 10일 사이에 조사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단이 뿌려놓은 가라지가 있습니다. 멍청하게 앉아서 당하고만 있으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응징하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다 심판하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미국이 911테러로 이라크를 응징하고 만족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폭의 실수로 또한 아무 연고 없이 왜 다쳐야 하고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당한 사람이 많습니다.

‘죽음’이나 ‘마지막 심판’이라는 말을 아주 우습게, 장난끼 있는 말로 가볍게 다루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곰처럼 우직한 사람들도 있고, 세상적으로 보면 용감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어리석게 담이 센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화가 페루지노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임종할 때 성직자가 급히 찾아와서 마지막으로 기도를 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페루지노는 “나는 회개하지 않고 죽는 사람이 저 세상에서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보고 싶소”라며 성직자의 기도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천국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남자가 천국 문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천국 안에서 아름다운 음악 소리, 맛있는 음식 냄새, 향기로운 꽃 내음이 바람결에 실려 왔습니다. 천국 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만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들어가도 되나요?” 물었습니다. 문지기는 사정없이 지금은 안 된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였습니다. 남자는 하는 수 없이 문지기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오래 기다린 후에 지금은 들어가도 되나요? 물었습니다. 문지기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그렇게 하루, 한 달, 일 년, 십 년을 기다리면서 이제는 들어가도 되나요? 물을 때마다 문지기는 안 된다고 하였고 그 남자는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오래 오래 기다리다가 마침내 처음으로 한 가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문지기에게 묻습니다. “내가 이렇게 오랜 동안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 이외에는 아무도 이 문을 찾아 온 사람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문지기는 “다른 사람은 이 문으로 들어 올 수 없어, 이 문은 당신만을 위한 문이니까 말이야, 이제 슬슬 문을 닫아야겠군” 하더니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 남자는 문지기가 안 된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문지기가 허락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가 이런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태도를 버리고 기다림 이상의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고 하였다면 그 남자는 천국 문을 들어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남자가 천국에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불타는 소망과 뜨거운 용기가 있었다면 문지기와 대판 싸움을 벌리거나 문지기를 확 밀어버리고라도 찬란한 천국 안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많은 교인들이 이 남자를 많이 닮았습니다. 교인들은 말씀의 문, 기도의 문, 찬양의 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가 그 충만한 영적 축복을 누리지 못 하고 그 문을 지키고 있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영성 생활도 그렇습니다. 영성 생활의 문 앞에 앉아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유치원 아이들 마냥 하나하나 안내하고 일러 줄 때까지 기다립니다. 융통성도 없습니다. AAA 방식대로 하라 하면 AAB는 절대 안되고 꼭 AAA 그대로 해야 복 받는 줄 알고 있는 우리 한국 교인들에게 카프카의 소설 심판에 나오는 천국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이 남자의 이야기는 참 좋은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30절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가라지와 곡식이 가는 길이 다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결론일 뿐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결론입니다.
 

천국비유(1) 씨와 결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1. 비유(1) – 천국비유(1) 씨와 결실) / 본문 : 마 13:1-23

“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사람은 태어날 때 마음속에 별 하나를 갖고 태어난 데요.
반짝반짝, 뾰족뾰족 예쁜 별이요.
우리가 자랄수록 별도 무럭무럭 자라죠. 그런데 그 별은 …
우리가 나쁜 짓을 할 때마다 맘속에서 핑그르르 돈 대요. 왜 나쁜 짓을 하면 찔린다고 하잖아요? 그건 마음속의 그 별이 돌기 때문이래요. 별의 뾰족한 부분이 맘을 찌르는 거죠. 그렇게 우리가 나쁜 일을 할 때마다 별은 계속 돌아가요. 그런데, 나쁜 짓을 하도 많이 한 사람은 하나도 안 찔린다고 하잖아요. 그건 맘속에 사는 별이 계속 돌면서 뾰족한 부분이 다 닳아서 그런 거래요. 닳고닳은 별은 조금씩 작아져서, 그렇게 우리 맘에서 죽는 거래요.
별은 사람처럼 한번 밖에 태어나지 않아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착한 일을 하면 별은 다시 자라난 데요.
지금, 내 마음속에 있는 별은 잘 자라고 있나요?

복음서에서 이적과 표적은 약 30여가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는 자세히 나누면 49개 주제별로 크게 분류하면 27개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로 보아 예수님은 크게 두 가지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내신 이적 중에서는 병 고침이 약 22번으로 제일 많이 나타납니다. 다른 표적으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 오병이어 등의 이적입니다. 이 모든 이적사건보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비유의 말씀이 더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배에 오르시고 사람들은 해변에 둘러앉았습니다. 당시에는 음향시설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들려지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예수님은 등지고 서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바람을 타고 해변에 둘러 선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었습니다.

천국의 비유
이렇게 많은 비유들 중에 첫 비유의 말씀을 만나려면 신약성경을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읽기 시작하여 12장까지 4분의 1을 읽은 다음에 비로소 오늘 본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13장에는 갑자기 변화가 일어나는데 13장에는 한 두 개의 비유가 아니라 무려 7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있어 “천국비유”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단순하게라도 예수님이 지금 무엇을 전달하러 오신 것인 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천국입니다. 예수님 앞에 왔던 세례요한도 천국을 전파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마 3:2).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마 5-7장은 천국윤리로 8-12장까지의 이적들은 천국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천국복음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 첫 번째가 ‘씨 뿌리는 비유’로 잘 알려진 오늘 본문입니다.

씨와 결실의 비유
일반적으로 오늘 본문의 비유제목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또 어떤 분은 “씨와 밭”으로도 말합니다. 모두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씨와 결실”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씨가 뿌려지는 목적은 결실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8절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입니다. 결실이 없다면 씨뿌림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결실을 위해서 우리는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오늘 첫 비유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친절하게 이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그 설명 부분은 10절부터 35절까지 이어집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즉 마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집나간 둘째 아들,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누가 제일 기뻐했을까요?
“아버지” 예 맞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제일 싫어했을까요? 큰아들?
아닙니다. “살진 송아지!”
딱딱해진 마음을 풀고 말씀에 열중하시라고 드린 말씀입니다.

첫 번째 마음의 유형은 길가인 사람입니다.
4절 “뿌릴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입니다.
길가는 씨를 뿌려서 결실 치 못하는 땅입니다. 길가는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땅입니다. 순수했던 마음위로 세상 철학이 지나갑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을 배웁니다. 잘못된 지식이 지나갑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서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폭력과 상업주의 적으로, 물질 만능의 세계로 흩고 지나갑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딱딱한 마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 자랄 수가 없습니다. 이 완악한 마음은 죄입니다. 로마서 1장은 이런 사람들을 잘 나타냅니다. 로마서 1장 22절에서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으나 새들이 와서 먹어버립니다. 새들은 사단을 상징합니다.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 죄의 결과입니다.
중무장을 한 군인들이 탈진하여 초죽음이 된 갈릴리 나사렛의 한 목수를 둘러싼 채 마구 구타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채찍질은 명령이었습니다. 이 나사렛의 목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도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죽어 가는 자에게 침을 뱉으며 쾌감을 맛보는 인간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침 뱉음이란 몸에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침은 몸에 고통을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에 수치를 주기 위한 행동입니다. 군병들은 그리스도를 초라하게 만듦으로 자기가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이 군인들은 마음이 딱딱한 길가인 사람입니다.

두 번째 마음의 유형은 얄팍한 사람입니다.
5절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씨가 떨어지면 묻히기는 하는데 깊이 묻히지 못하고 살짝 덮이게 되어 해가 나면 쉽게 말라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설명에서 20-21절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부류의 사람은 많습니다. 저는 선교회를 20년 이끌어 오면서 선교하겠다고 온 여러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저에게 까지 온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선교하겠다고 나름대로 작정하고 왔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정말 참 사람은 얼마 못 만난 것 같습니다. 대부분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없으면 가버립니다. 선교는 하되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그렇게 하고 싶은 겁니다.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질 생각은 거의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기쁨 때문에만 교회에 오는 분들은 위험합니다. 처음 접근은 그렇게 될 수 있지만 끝까지 그렇게만 신앙생활 할 수는 없습니다. 아프리카 선교하시는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그곳에는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가 즐겁게 해주면 많이 오고 주는 것이 없고 재미없으면 안 옵니다. 우리 주앙교회에서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해야하지만 자신의 기쁨만을 구하면 안됩니다. 얄팍한 신앙은 결국 무너집니다. 기초가 없는 신앙입니다. 땀흘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마음의 유형은 세상에 빼앗긴 마음입니다.
7절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22절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눈이 어두워 있는지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지요. 심지어는 교회 나오는 목적도 재물을 얻기 위해 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도도 잘 들어보면 그 내용이란 자신의 재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문제는 재물을 위해서 아무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도 교회도 이 일을 위해 이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우니라”(마 19:23),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 “화 있을 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저는 처음에 ‘바다 이야기’가 텔레비전을 통해 나왔을 때 잘 몰랐습니다. 우리 집에서 교회 오는 길에 보면 ‘바다 속으로’라는 음식 집이 있습니다. 바다의 계를 파는 작은 음식 집입니다. 그래서 바다 계가 또 무슨 음식감염처럼 문제를 일으켰나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성인오락실에 있는 사행성 게임기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래가 나오면 아마 대박인 것 같습니다. 제일 높은 점수로 딴다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런데 그 고래라는 놈이 나오기 전에 상어가 먼저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상어가 나와서 왔다갔다하면 이제 조금만 더하면 고래가 나오지 않을까 해서 자꾸만 하게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처럼 재물에 대한 욕심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서히 자꾸만 더해집니다. 지금 가게가 잘 되기 때문에 주일에 비우는 것을 염려하신다면 조심해야 됩니다.

네 번째 마음의 유형은 열린 마음입니다.
8절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비유의 초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땅은 열린 마음으로서 옥토가 씨를 받아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결실 함과 같이 복음을 받아들여 이와 같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많은 수고를 해야 열매를 맺는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열매맺는 조건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전도자에게 완전한 헌신에 대한 두려움에 관해 말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지 못하겠어요. 그분이 비참하게 될지도 모를 선교지로 나를 보내 실까봐 두렵거든요.” 전도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느 춥고 눈 오는 날 아침에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반쯤 얼어붙은 채 당신이 있는 유리창을 쪼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어린 새가 당신에게 붙들려 자신을 먹여 주도록 완전히 당신의 통제하에 그를 맡겨 버린다고 상상해 보세요. 이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 손안에 움켜쥐고 눌러 죽이겠습니까? 아니면 피난처와 따뜻함과 먹이와 보호를 베풀겠습니까?”
전도자의 말뜻을 알아들은 아가씨의 두 눈이 빛났습니다. 여러 해 후 그녀는 다시 그 전도자를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과거에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밝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선교지에서 일하게 하셨어요. 이제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열린 마음만이 복음을 받아 결실 합니다.
여러분은 마음 문이 열려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하실 수 있는 분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옥토와 같이 열린 마음이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이 물음에는 대답을 하셔야 합니다. 아멘 그렇다면 문제는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땅이란 그 본성을 스스로 바꿀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할 때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요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했습니다.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딱딱한 땅을 갈아엎으시고 바위를 들어내시고 가시떨기를 뽑아버리십니다.

에스겔 36:25-27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부자청년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슬픈 표정으로 돌아갔습니다(눅 18:20-27).
이 광경을 보고있던 사람들이 구원의 문제가 엄청난 것을 인식했습니다. “듣는 자들이 가로되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26)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 같은 표현을 마태복음 19:26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놓은 사람들에게 들어오셔서 모든 축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되는 일은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놓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열매는 절로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무가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절로 되는 것입니다. 나무 자신이 피고 싶고 맺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향해서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열고 주님만을 바라보면 저절로 열매를 맺게됩니다.

미국의 카놀 산도스씨는 60세에 파산을 당했습니다. 그는 수백만 달러의 빚을 지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산도스씨는 자살할 생각으로 밤늦게 병원문을 나섰습니다. 그때 어디에선가 찬송가 432장이 애절하게 들려왔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 주 너를 지키리 / 주 날개 밑에 거하라 / 주 너를 지키리 ~~”
찬송은 조그마한 교회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꿇어앉아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산도스씨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교회의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무거운 짐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리고 새 출발에 대한 힘이 솟아났습니다.
그는 자본금이 없었기 때문에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번 돈으로 통닭 집을 운영했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산도스 치킨입니다.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시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열고있지 않은 것입니다.
 

요한이 말한 것이 다 참이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0. 요한이 말한 것이 다 참이라) / 본문 : 요 10:40-42

“40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예수님이 설교하신 것 중에 중요한 것만 뽑아 말할 때 7대 강화라고 합니다. 이중에 요한복음 10장은 마지막에 설교하신 것입니다. 이 설교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10장 1절 “아멘, 아멘”으로 시작하신 예수님의 언어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아멘은 예수님의 언어적인 도장입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목자와 양의 비유, 선한 목자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선한 목자란 양을 위해 목숨을 주고 거짓 목자는 양을 늑탈하고 헤친다고 하셨습니다.

몹시 추운 겨울날 어린 소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유리창 너머로 가게 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푸른 목걸이 참 예쁘네요. 이것 싸주세요.”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그러니?”
“우리 언니요. 저는 엄마가 없어서 언니가 저를 키워 주셨어요. 언니에게 줄 선물을 찾고 있는데 이 목걸이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언니도 좋아할 거예요.”
“돈이 얼마나 있니?”
“제 저금통을 털었어요. 여기요. 이것이 전부예요.”
소녀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모두 쏟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목걸이의 가격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돈이었습니다. 소녀는 목걸이 가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슬그머니 소녀 몰래 정가표를 떼고는 예쁘게 포장해서 주었습니다.
“집에 갈 때 잊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젊은 여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서 푸른 목걸이를 내어놓으며 말했습니다.
“이 목걸이 이곳에서 파신 물건이 맞나요? 진짜 보석인가요?”
“예 저희가게 물건이 맞습니다. 그리고 아주 좋은 것은 아니지만 진짜 보석입니다.”
“누구에게 파셨는지 기억하시나요?”
“물론입니다. 예쁜 소녀였지요.”
“그 아이에게는 이런 보석을 살 돈이 없었을 텐데요.”
그러나 가게 주인은 젊은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 소녀는 누구도 지불할 없는 아주 큰돈을 냈습니다. 자기가 가진 전부를 냈거든요.”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잊지 않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놓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더 큰 것으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하시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19). 그 중에 많은 사람은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생각했습니다(20).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합니다(31).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40절에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는 피신해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이제 그 결실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또 요한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지금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된 것인지는 마태복음 3:5-9에 보면 나옵니다.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불편한 장소로 오세요.
당시 유대광야는 모이기에 편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루살렘, 온 유대, 요단강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병고치는 은사집회를 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귀신을 쫓는 능력을 보여준 것도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흔히 했던 축복성회를 한 것도 아닙니다. 아니면 성경공부나 강해 설교를 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외친 소리는 논리성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단순하면서도 정직하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토해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전한 말씀은 자력 있는 쇠붙이처럼 무섭게 사람들의 영혼을 끌어당겼습니다. 아모스가 예언한 것처럼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말라기, 스가랴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영적인 기갈 상태와 더불어 정치적, 경제적 갈등을 겪고있었습니다. 지금 장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수님의 예언대로 A.D 70년이 되어서 성전이 다 무너졌습니다. 남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껍데기를 남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남겨놓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마 3:6)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더러운 것이 얼마나 묻었는지 보려면 거울에 비쳐보아야 합니다. 또 밝은 빛에 비쳐보면 됩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죄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이니까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다 드러나게 됩니다. 로마서 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들어가지 않으면 죄를 모릅니다. 마치 빛이 없어 더러운 것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이 남들 앞에서 죄라고 고백하는 것은 극히 가벼운 것들입니다. 내놓아도 별로 부끄럽지 않은 것만 죄라고 인정할 뿐입니다. 진짜 깊은 죄들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끄집어 내지 못하고 본인 자신도 무서워서 꺼내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지없이 우리의 죄를 노출시킵니다. 그리고 이 죄는 깊은 뉘우침과 아울러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고백과 더불어 지난날의 죄에 메여있던 죄를 눈물 콧물 흘리면서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합니다.
진정한 영적 부흥은 죄의 고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속에 깊이 박혀있는 죄가 빠져 나오지 않고는 아무리 은혜 받고 싶어도 은혜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어도 만나지지 않습니다. 죄가 노출되면 씻을 수 있습니다. 이 죄는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이 자연적으로 물러가듯이 하나님을 말씀을 받는 순간 물러갑니다.

가라지가 섞여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나온 사람들 중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온 사람도 있지만 이중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세 그룹의 종교집단이 있었습니다. 엣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인입니다.
엣세네파는 결혼하지 않고 은둔과 경건주의 삶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를 두었고, 사해 근방에 모여 집단 생활을 하면서 주로 성경을 필사하는 사본 작업을 했습니다. 이 그룹은 예수님때 제일 예수님과 충돌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은둔과 성경필사에만 매달린 결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자주 예수님과 충돌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바리세파와 사두개파입니다. 바리새파는 엣세네파와 달리 도시에 살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지키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분리주의자’입니다. 이들의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육체의 부활도 천사의 존재도 믿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교리적으로는 완벽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형식과 교만에 빠져있었습니다.
또 한 그룹은 사두개파입니다. 이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에서 그 이름을 땄습니다. 이들은 제사장 그룹이면서 공회원 그룹으로 종교적, 정치적으로 최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적인 입장은 바리새파와 아주 다른 입장을 보였습니다. 모세 오경만 믿고 천사도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타락한 집단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사람들 틈에 끼어 세례요한에게 나왔습니다. 이들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 세례요한의 인기가 높고 이 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인지 구경나온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이런 식으로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또 장사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솔직히 표현한다면 “나도 하나님을 믿으니까 가봐야지! 이것들이 모여서 뭐하나?”생각하고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잘 다녀야 합니다. 나도 성경을 믿으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교회는 다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교회에 왜 다녀야 되는지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일 필요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경은 가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세례요한은 강한 어조로 이들을 질책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합니다. 예수님 외에 이렇게 외친 사람은 세례요한뿐입니다. 경력한 메시지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타락한 이유가 있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에서 활개를 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순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있는 유머입니다.
1등급 = 암소집사….교회의 짐을 다 짊어지고 가며,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람
2등급 = 양 집사….목사님이 이끌면 이끄는 대로 순종하는 사람
3등급 = 막대기집사….자기 할 일은 다 알아서 하지만, 넘치는 충성은 하지 않는 사람
4등급 = 비행기집사….띄워주고 칭찬하면 좋아하지만, 아니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
5등급 = 미꾸라지집사….요리조리 잘도 핑계 대며 빠지는 사람
6등급 = 개구리집사….아무 데나 퐁당퐁당 끼여들고 간섭하구, 구설수를 만드는 사람
7등급 = 염소집사….질투하는 자 잡아당기며 갈라놓고 흩어놓고, 높은 곳에만 올라가려는 사람
8등급 = 서서잡사….술도 잡수고, 담배도 잡수는 사람
여러분은 몇 등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여러분! 사람이 본질이 변해야 합니다. 아무리 화장을 바꾸고, 옷을 바꿔 입어도 안됩니다.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그 본성 나올 수 있습니다.
요한의 이 강력한 메시지를 듣고 난 후에 사람들은 누가복음 3장 10절 이하에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어떻게 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이 때 세례요한이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 3:11) 이 말을 듣고 있다가 당시 유명한 세리들이 또 질문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이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눅 3:13)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억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군인들이 또 묻습니다. 군인들에게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4)고 했습니다. “강포하지 말라”는 힘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억지로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 26:20)고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세례요한이나 바울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목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까지가 할 일입니다. 더 할 수도 없으며 더 한다고 말해도 큰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한계는 분명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사도바울이 위대하다는 것은 자신들이 한 일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세례요한은 매우 훌륭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똑 같지는 않을 수 있지만 비슷한말을 다른 성인들도 했습니다. 타종교에도 사람의 근본과 윤리에 대해서 한 말이 있습니다.

41절 …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위대한 것입니다. 예수께 대해서 세례요한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바로 이 장면 때만에 세례요한이 위대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께 사람을 인도하면 그것이 최선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르치고 교육시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종적인 선은 예수께 사람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쫓겨 세례요한이 처음 세례 주던 곳으로 피신 오셨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오래 전에 세례요한에 의해서 뿌려졌던 복음이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동내에서 예수님이 지금 하신 어떤 설교나 능력 행하심이 없습니다. 본문 42절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는 바로 마 3:11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에게 성령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영국 더블린의 홀튼씨 부부에게 샴 쌍둥이(Siamese twins, 몸은 하나에 머리는 둘, 팔은 넷, 다리는 둘, 내장은 모두 각기 가지고 있으나 간과 골반은 하나인 기형아), ‘아일리쉬’와 ‘캐티’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1992년, 그들이 세 살 반되었을 때, 분리 수술하다가 캐티는 사망하고 아일리쉬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소아과 전문의사들과 여러 전문의사들이 1년 동안 연구 조사한 결과 분리 수술하여 둘 다 살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술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수술 후 혼자만 살아남은 왼쪽의 ‘아일리쉬’는 옆에 늘 함께 얼굴을 맞대고 있었던 ‘캐티’가 보이지 않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하셨습니다. 우리 옆에 늘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눈만 뜨면 아일리쉬 옆에는 캐티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제일 큰 충격이 있다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항상 내 옆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머리요 나는 몸입니다. 주님이 생각하시면 우리는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네가 샴 쌍둥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