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비유(2) 가라지를 조심하십시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1. 비유(2) – 천국비유(2) 가라지를 조심하십시오) / 본문 : 마 13:24-30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예전에 본 어떤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한 사람이 다리에 피를 흘리며 산 속으로 도망갑니다. 적들이 사냥개를 몰고 피 냄새를 맡으며 쫓아갑니다. 사냥개들은 점점 그에게 가까이 옵니다. 지칠 대로 지쳐 기진맥진한 그는 한참을 도망가다 강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강에 몸을 담그자 집요하게 따라오던 사냥개의 추적이 멈췄습니다. 사냥개들이 더 이상 피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죄 문제를 집요하게 고소하는 사냥개와 같은 사탄의 소리를 잠재웁니다. 십자가는 큰 은혜의 강입니다. 그 은혜의 강에 몸을 담그기만 하면 누구라도, 그 어떤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용서받습니다.
등산을 하다 갑자기 산불이 나서 불길이 밀려오면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까요? 내 주위에 맞불 을 놓으면 됩니다. 그리고 다 타 버린 장소에 서 있으면 불길이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내가 내 죄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먼저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서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 오늘도 천국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진 땅입니다.
“천국은 … 과 같다”는 말은 관용적인 표현으로 ‘X의 경우는 Y의 경우와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천국은 …한 사람의 경우와 같으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와 같습니까?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의 경우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좋은 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된 반면 본문에서는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될 성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을 말합니다. 오늘 서은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두 번째 맞이하는 생일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서은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자기 가슴을 두드리면서 자신을 가리켰습니다. “제 밭에 뿌린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게될 사람입니다. 자기 밭에 나쁜 씨를 뿌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밭이 있다고 칩시다. 여러분 밭에다 나쁜 씨를 심겠습니까? 나쁜 씨는 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즘 보면 서울 사람이 시골 땅 사 가지고 농사를 짖지 않으면 벌금을 내니까 자기는 농사짓지 않고 다른 사람일 시켜서 대충 농사짓는 것처럼 시늉을 냅니다. 이것은 땅 투기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 그 땅에서 무엇을 얻는 것은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밭에 아무 것도 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아무 것도 심지 않았으니까 아무 것도 없어야 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심지 않은 밭에 가보십시오. 잡초만 무성하게 자랍니다. 주인이 심지 않았는데 어느새 잡초가 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심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잡초를 심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밭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그래야 잡초가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잡초가 있는 것처럼 세상 근심과 사단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제 밭은” 세 가지의 경우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 자신의 밭입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야 합니다.
둘째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만이 떨어져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세계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땅이 아닙니다.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운행하고 계십니다. 시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입니다.

원수가 뿌리는 가라지
25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잘 때에”는 농부의 태만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가 농부 모르게 슬그머니 뿌리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원수에 대한 보복으로 상대방의 밭에 가라지와 같은 독초를 뿌리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가라지는 (zizavnia)지자니온 이라는 독보리의 일종으로 ‘가짜 밀’이라고도 부릅니다. 싹의 모습이 밀이나 보리와 비슷한데 이삭이 나기까지는 구분이 어렵습니다. 잘못 알고 이것을 먹었다가는 구토 설사의 증상이 일어나며 심할 경우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 가라지는 예수님의 설명에 의하면 “악한 자의 아들들”(38)입니다. 사단의 자식들입니다.
가라지는 특징은 위장성입니다. 가라지는 싹이 난 다음부터 추수 때까지는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까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잘 분간이 되지 않게 위장되어 있습니다. 처음 싹이 나와서 상당기간은 잠복해 있습니다. 이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같더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나쁜 행위입니다. 사단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뿌린 씨 위에 한번 더 뿌려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구약시대 레 19:19과 신 22:9에서 다른 씨앗의 종류를 섞어 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섞어 뿌리는 것은 두 종류의 곡식 중에 어느 하나도 제대로 수확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이 다른 종류의 씨를 뿌리면 양분을 나눠가져야 하므로 한가지도 제대로 안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순수성과 비타협적인 신앙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세상과 혼합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결실할 때에
26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언제까지나 숨어있을 수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본색이 들어 납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하면 “결실할 때”입니다. 결실할 때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습니다. 그 나무나 식물은 열매로서 그 씨앗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기 이전에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7:17). 성장기에는 감출 수 있을지 모르나 추수기에는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27절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종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좋은 씨 사이에 어떻게 가라지가 섞여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 의문은 하나님께서 좋은 세상을 만드셨는데 어떻게 악이 이 세상에 들어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님은 이 대목에서 악이 세상에 있게된 이유를 굳이 설명하려하시지 않고 이 악이 존재한다는 것과 분명한 것은 마지막 날에 완전히 파멸 당할 것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롬 16:20, 요일 3:8, 계20:2, 10).

28절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원수는 적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적 그리스도가 뿌려놓은 씨에 대해서 뽑아버리기를 청했었습니다. 이런 일이 실제상황으로 일어났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을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막고 나선 것입니다. 못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있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라고 했습니다.
이런 청을 하는 것은 ‘때’(kairov”:카이로스)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라지를 빨리 뽑아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정해진 때가 있습니다. 그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심판을 나를 통해서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사실상 심판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나 자신이 먼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도 요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하시면서 요 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란 결국은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간혹 믿음이 잘못된 분들을 봅니다. 하나님이 권능을 주면 마치 자기가 이 세상을 심판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것은 교만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29절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가라지를 지금 당장 뽑아내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알곡이 뽑힐 가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리고 약한 곡식은 가라지를 뽑을 때 자칫하면 함께 뽑힐 수가 있습니다. 가라지를 남겨두는 것은 가라지를 위함이 아니라 알곡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알곡에 대한 주님의 관심이 가라지를 심은 사단의 열의보다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점심 시간에 도쿄의 한 경찰서에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점심 시간에 도착한 돈가스 도시락에 폭발물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경찰이 출동하여 그 도시락에 폭탄이 들어있는 것으로 단정하고 조심스레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폭발물 해체 전문가들이 총 출동했습니다. 1차 준비 작업으로 하이로드젠 용액을 사용하여 도시락 상자를 냉동시켰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 정도 폭발물 해체를 위한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 십 명의 전문가들이 엑스 선(X-ray)으로 냉각된 돈가스 상자를 조사했을 때, 그들은 돈가스 외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 때 돈가를 배달한 소년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는 “아까부터 제가 말했잖아요. 방금 튀겨낸 돈가스에서는 재미있는 소리가 난다고 말이에요.”라고 흥분하며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불안한 심리상태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말해줍니다.

올해로 미국에서 911테러가 일어 난지 5년이 지났습니다. 미국은 911 테러 주동자로 이라크를 지목했고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미국인의 절반이상이 테러리스트 공격을 막지 못할 것이란 설문결과가 나왔습니다. 테러 공포는 미국인의 생활에 아직도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미 여론조사기관 퓨 리서치 센터(the Pew Research Center, PRC)가 2002년 발표한 ‘세계인의 생각’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 응답자의 72%가 테러와의 전쟁에 반대하고 있으며, 73%는 미국의 외교정책이 다른 나라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는 조사 대상 44개국 중 최고 수준이며 특히 아시아지역에서는 최고라고 합니다. ‘미국의 일방적 외교정책’과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두 질문 모두에 대해 50% 이상이 반대의 목소리를 낸 국가는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것은 당시 여중생 압사 사건 재판결과가 나오기 전인 7월 28일부터 8월 10일 사이에 조사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단이 뿌려놓은 가라지가 있습니다. 멍청하게 앉아서 당하고만 있으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응징하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다 심판하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미국이 911테러로 이라크를 응징하고 만족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폭의 실수로 또한 아무 연고 없이 왜 다쳐야 하고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당한 사람이 많습니다.

‘죽음’이나 ‘마지막 심판’이라는 말을 아주 우습게, 장난끼 있는 말로 가볍게 다루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곰처럼 우직한 사람들도 있고, 세상적으로 보면 용감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어리석게 담이 센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화가 페루지노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임종할 때 성직자가 급히 찾아와서 마지막으로 기도를 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페루지노는 “나는 회개하지 않고 죽는 사람이 저 세상에서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보고 싶소”라며 성직자의 기도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천국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남자가 천국 문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천국 안에서 아름다운 음악 소리, 맛있는 음식 냄새, 향기로운 꽃 내음이 바람결에 실려 왔습니다. 천국 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만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들어가도 되나요?” 물었습니다. 문지기는 사정없이 지금은 안 된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였습니다. 남자는 하는 수 없이 문지기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오래 기다린 후에 지금은 들어가도 되나요? 물었습니다. 문지기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그렇게 하루, 한 달, 일 년, 십 년을 기다리면서 이제는 들어가도 되나요? 물을 때마다 문지기는 안 된다고 하였고 그 남자는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오래 오래 기다리다가 마침내 처음으로 한 가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문지기에게 묻습니다. “내가 이렇게 오랜 동안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 이외에는 아무도 이 문을 찾아 온 사람이 없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문지기는 “다른 사람은 이 문으로 들어 올 수 없어, 이 문은 당신만을 위한 문이니까 말이야, 이제 슬슬 문을 닫아야겠군” 하더니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그 남자는 문지기가 안 된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문지기가 허락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가 이런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태도를 버리고 기다림 이상의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고 하였다면 그 남자는 천국 문을 들어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남자가 천국에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불타는 소망과 뜨거운 용기가 있었다면 문지기와 대판 싸움을 벌리거나 문지기를 확 밀어버리고라도 찬란한 천국 안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많은 교인들이 이 남자를 많이 닮았습니다. 교인들은 말씀의 문, 기도의 문, 찬양의 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가 그 충만한 영적 축복을 누리지 못 하고 그 문을 지키고 있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영성 생활도 그렇습니다. 영성 생활의 문 앞에 앉아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유치원 아이들 마냥 하나하나 안내하고 일러 줄 때까지 기다립니다. 융통성도 없습니다. AAA 방식대로 하라 하면 AAB는 절대 안되고 꼭 AAA 그대로 해야 복 받는 줄 알고 있는 우리 한국 교인들에게 카프카의 소설 심판에 나오는 천국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이 남자의 이야기는 참 좋은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30절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가라지와 곡식이 가는 길이 다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결론일 뿐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결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