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8. 비유(8)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본문 : 눅 13:22-30

“22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29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오늘은 종교개헉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 위텐 베르그 성 교회 문 위에 못을 박는 망치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실 여느 못박는 소리와 다를 바 없는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망치질로 인해 삽시간에 온 유럽은 뒤집혔고 난리가 났습니다. 내용은 바로 로마 교황청의 잘못된 구원관을 지적하는 95개 논제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시대는 교회란 오로지 카톨릭뿐이고 누구든지 로마 카톨릭에 반항하거나 어긋나는 교리를 가르치면 법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위클리프, 후스 등, 여러 신학자들도 종교개혁을 부르짖다가 불타죽었습니다. 고대나 중세에는 왕의 말이면 법 이였습니다. 이 시대는 왕도 교황에게는 꼼짝 못하던 때였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권위가 하늘같이 높았고, 개혁을 부르짖다가 사람들이 처형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개혁을 부르짖는 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이요 휘발유 들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이었습니다. 로마황제 칼 5세는 1521년 의회를 소집하고 루터를 종교재판에 회부합니다. 이때 카톨릭의 대표가 루터가 쓴 책을 지적하며 “이 책들이 네가 쓴 이단 서적들이냐?” 고 물었습니다.
루터는 “예, 제가 쓴 책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루터는 살기 위해 자기가 쓴 책들을 태우고 로마 교회에 무릎을 끓을 것인가, 아니면 신앙과 양심을 위해 끝까지 버티느냐? 는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이때 죽기를 각오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 책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기록한 글들이요 영혼의 구원을 취급한 글들이니 나는 결코 버릴 수도 태울 수도 없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장차 나도 하나님 앞에서 너를 부인하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도리가 없습니다. 나의 양심은 말씀 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는 달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루터가 지은 찬송이 바로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여러 지역을 다니실 때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이 사람의 질문이 구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단 답형으로 ‘그렇다, 아니다’라고만 대답 하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의 질문으로 보아서 아마 구원 얻는 자가 적었으면 좋겠다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질문할 때는 자기가 얻고자 하는 답으로 유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사람 역시 구원받는 사람이 적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됩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 중에서 아주 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저런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실망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쉬운 질문으로 한다면 “주님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지요.”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단 답형으로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그런 대답이 이 사람에게 아무 유익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이 많고 적은 것은 이 사람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문제입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은 것은 천국 문을 통과한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천국에 들어갈지 아닐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천국이 얼마나 좋으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이 기대하고 질문한 것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지 않으심으로서 답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이미 언급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산상수훈이 끝날 때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또한 마태복음 끝 부분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언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비유입니다. 어리석은 여인들은 신랑이 도착했을 때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애원했지만 한번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마 25:1-13).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문이 되심을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요 10:7, 9)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라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으로 상징되는 것입니다. 문이 왜 필요합니까? 문은 걸러내기 위함입니다. 마치 추수 군이 쭉정이와 알맹이를 구분할 때 바람에 날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쭉정이는 날아가고 알맹이는 아래로 떨어집니다. 이런 과정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요 14:6)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에 있어서는 핵심적인 것이지만 다른 종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창시자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종교들은 진리의 방법들에 대한 집합체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내용들은 창시자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종교들은 창시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른길로 가라고 요구하기보다는 “나는 길이요.”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진리를 찾으라고 요구하시지 않으시며 “나는 진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을 찾고 얻으라고 하시지 않으시며 “나는 생명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이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를 가리켜 “새롭고 산길”(히 10:20)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는 저로 말미암아 …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고 했습니다.
미국 뉴욕에 살고있는 한인교회 집사님이 평생 살도록 전도한 명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은 작정하기를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면서 기도했습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저쪽에서 처음으로 걸어오는 사람에게 전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머리가 반짝 반짝 빛나는 사람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러한 풍경을 보는 것이란 싶지 않습니다. 미국 뉴욕한가운데서 한국 스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 집사님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아닌데요? 하필 스님입니까? 그러나 주님의 음성은 가서 전도해라! 그래서 무조건 다가가서 “스님 교회 갑시다”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이 하는 말이 “그럽시다”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교회로 모시고 갔습니다. 이 날이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작은 교회에 스님이 들어오니 불빛이 반사되어 교회가 훤히 빛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제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이 스님이 타겟입니다. 전도의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날의 본문은 바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였습니다. 설교를 다 마치고 목사님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구원하셨다고 믿는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오직 스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온 교회 성도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님도 일어난 것입니다. 스님의 고백은 지금까지 진리를 찾아 헤맸지만 진리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요한복음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날로 이 스님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분이 누구냐 하면 한국불교계에서 미국 동부의 심장부인 뉴욕에 절을 세우기 위해서 한국에서 뽑아서 정탐을 보낸 스님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서 뉴욕거리를 걷다가 그만 여 집사님을 만나 구원을 얻게된 것입니다. 나중에 이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평생을 중 생활을 했는데 달리 할 것도 없으니 신학교를 가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추천으로 신학교에 가서 졸업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목회하고 계십니다.

로마서의 처음 세 장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증거 합니다. 우리의 도덕성이 아무리 높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이 아무리 많이 쌓인다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말합니다.

문은 열려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이 문이 좁은 문이라는데 많은 실망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교훈에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인 것은 사실이나 이 문은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열려있다는 것은 조만간 닫힐지도 모른다는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열려있는 이 문으로 들어가는 자에 대해서 특정한 부류의 사람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종과 사회적 지위, 학력이나 업적을 따지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들어가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이 선택은 바로 나의 몫입니다.

요즘은 이런 설교제목으로 설교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으려고 교회에 왔는데 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목사님들의 설교제목을 뽑아보았습니다. 대부분 축복에 대한 설교는 많이 했습니다. 좁은 문이나 고난에 대한 설교는 안 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설교는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을 편협 되게 여러분에게 전달할 마음도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할뿐입니다. 다윗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고통가운데 있을 때 많은 시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솔로몬은 너무나 평온한 시대를 맞이하면서 자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하게 되었고 결국은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로마교회가 멸망하게된 이유는 자신들의, 기득권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곳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편안함과 안주함을 위해서 이용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부패의 원인입니다.
마틴 루터는 좁은 길을 간 사람입니다. 그가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던 힘은

1. 기도의 힘입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문에 95개조항의 「개혁선언문」을 붙여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다. 당시 평범했던 그가 어떻게 절대권력의 교황의 세력과 맞설 수 있었을까. 루터는 그것이 기도라고 말합니다.『만일 내가 새벽에 두 시간 이상을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날의 승리는 마귀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나에게는 너무나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날마다 세 시간 이상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 기도가 모든 일을 지탱해 나가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찬송 384장 2절의 가사같이 마귀의 힘이 강하기에 우리가 내 힘만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 싸워 주실 때 이기게 되는데 이 예수님의 힘을 빌려 올 수 있는 길은 다름 아닌 기도입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통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2. 말씀의 힘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요한복음 16: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의 말씀을 너무나 소중히 여긴 나머지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무릎을 꿇으며, 기어가면서 운반할 가치가 있는 말씀이다!”
루터는 위텐벨그 성에 유폐되어 있는 동안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대업을 완성했습니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확립한 것은 정치적 술책이나 무력의 힘이 아니라 바로 거룩한 말씀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루터는 후에 그 사실을 이렇게 진술하였습니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설교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나는 달리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은 잠을 자거나 나의 친구 필립과 암스도르프와 함께 있는 동안에 말씀은 군주나 황제로서는 결코 손상시킬 수 없는 교황권을 그처럼 힘없이 약화시켰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말씀이 모든 것을 해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즐겨 사용하는 네 마디 말이 있답니다.
첫 번째는 “이 정도는 괜찮겠지”
두 번째는 “딱 한 번인데 뭘”
세 번째는 “너는 아직 젊어”
네 번째는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해

잔치 잔치 열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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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67. 비유(7) – 잔치 잔치 열렸네) / 본문 : 마 22:1-14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영국의 설교가이자 ‘천로역정’의 작가인 존 번연이 있습니다. 그는 베드퍼드셔의 벽촌에서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갔습니다. 겨우 읽기 쓰기만을 배운 그는 16세 때에 크롬웰의 의회군(議會軍) 수비대에 들어갔습니다. 1647년 의회군이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였는데, 그때 신부가 가지고 온 2권의 책 《천국에의 길》 《신앙심과 실행》을 읽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국교회를 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 국교회인 성공회의 박해로 1660년 비밀집회 금지령 위반죄로 체포되어, 베드퍼드 감옥에서 12년간의 감방 생활을 하게됩니다. 감옥에 가두었는데 매일같이 소리를 지르며 감옥에서 설교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감옥바로 앞에 담장을 높이 막았습니다. 그러나 존 번연은 누군가는 듣겠지 하고 벽을 향해 더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간수장이 회개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갇혀있는 것이 이해가 안되다고 하면서 감옥문을 열어 놓을 테니 가고 싶은 곳을 갔다 고라고 했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가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다시 돌아가라’ 그리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때에 감찰사가 순시를 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여기 유명한 설교가가 있다는데 그 사람이 있냐”고 했습니다. 그럼 그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했습니다. 간수장은 간이 콩알만해 져 가지고 갑니다. 가기는 가는데 큰일입니다. 그런데 왠일입니까? 존 번연이 있는 겁니다. 정작 놀란 것은 간수장이었습니다. 감찰사가 돌아가고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분명히 아까 감옥을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성령님이 돌아가라고 해서 돌아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간수장은 목사님 언제든지 문을 열어 놓을 테니까 자유롭게 나가시고 성령님이 돌아가라고 하실 때 오시면 됩니다.“하고 감옥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하늘에서 이런 존 번연을 위해서 잔치가 열립니다. 순교자들을 위해서 잔치가 열립니다. 선교사님을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잔치가 열립니다. 그러나 먼저 어린양이신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서 잔치가 열립니다.

본문 비유는 그 의미하는 바가 사실상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왕은 하나님으로,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처음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고 실제로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1-12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자기 땅에 오매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지난주의 ‘잃은 비유’와 마찬가지로 이 비유는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d[서 큰아들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는 남편으로 성도는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사 54:5), 구약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이후에 요한계시록에도 나오며 절정을 이룹니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계 19:7-9)

잔치에 청함
왕은 천국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왕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오라고 청했습니다. 이 잔치는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입니다.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왕은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3)고 했습니다. 혼인잔치(가무스:gavmou”)는 복수로 나옵니다. 이것은 혼인잔치가 여러 날 계속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결혼 축제는 보통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이 잔치에 종들을 보내어 미리 손님을 청해 둡니다. 그러나 당일에 나가서 또 손님을 청하는 관습도 있었습니다(에 5:8, 6:14). 더군다나 지금 혼인 잔치치는 왕자의 혼인잔치로 비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아주 엄밀하고 신중하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왕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오기를 싫어하거늘” 싫어하다(oujk h[qelon:우크 에델론)은 미완료형으로 왕의 초대를 끝끝내 원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왕이 초대했는데 가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재차 청함
4절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다른 종들”은 그 동안 보냈던 종들과 다름을 말해줍니다. 구약에서 보냈던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종들”은 신약시대 예수님 앞에 왔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외친 “세례 요한”(마 4:17)과 더불어 70인 전도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눅 10:9, 11)고 외친 자들을 말합니다. 이미 이 때는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안 오는 겁니다. 왕이 초대한 자리에 오지 않는 것은 반역을 말합니다. 왕은 계속되는 잔치에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라고 말해줍니다. 잔치의 준비가 무르익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지금 들어오면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다 준비되어 있다는 겁니다. 천국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입니다.

잔치에 불응한 이유
오늘 이 말씀을 읽다가 보면은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갖게됩니다. 왜 처음에 초대받았던 자들은 잔치에 참석하지를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그들이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5절 말씀처럼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하나는 밭으로 하나는 상업차로 가고” 더욱이 6 절에는 초대를 외치던 종들을 잡아 죽였다니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왜 그렇게 계산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왜 거절했는지 저 나름대로 생각해보건 데 잔치에서 얻을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잔치에 가는 것보다는 밭으로 가는 것이 상업을 하러 가는 것이 더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배에 나오지 않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왜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 예배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철저하게 계산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에서 별로 얻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나치리 만큼 계산적으로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 참석 안 해도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일로 보내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계산적으로 사는 이들이 수고를 해서 얻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누구나 잔치에 오세요.
이제 주인은 문을 활짝 열어놓습니다. 잔치 집의 음식은 누군가는 먹어야 합니다. 초청한 사람들이 오지 않았으니 이제 문을 열고 누구나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종들을 9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고 합니다. 여기에 두 사람의 종류가 나타납니다. “만나는 대로”와 “악한 자나 선한 자나”입니다. 한마디로 닥치는 대로입니다.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들은 초청에 응했다는 사실입니다. 왕이신 주인의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원래부터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딤전 2:4). 천국잔치에 응하기만 하면 선한 자나 악한자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인종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롬 1:16). 문제는 우리 죄의 심각성이 아니라 초청을 받고 나오지 않는 문제입니다. 자신의 죄 보다 죄 사함의 초청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예복을 입으세요.
거리에서 데려온 사람들 때문에 혼인잔치가 흥이 돋우어졌습니다. 손님은 가득 찼는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복을 입고있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11절). 왕자의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간다는 것은 초청을 거부한 사람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왕을 모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대통령 만나서 악수하고 몇 일 동안 손을 씻지 않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왕을 만나고 그것도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는 것은 왕을 무시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충성해야 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됩니다. 대충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애인을 만날 때는 준비합니다. 옷을 이것저것 바꿔 입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올 때는 대충 옵니다. 이렇게 되면 안됩니다. 좋은 옷 두셨다 다 무엇하시려고요. 예쁜 옷 입고 오세요.
진짜 예복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양의 피로서 깨끗하게 된 성도를 말합니다(계 19:8). 이것이 우리의 예복입니다.

지난주에는 네팔에 다녀왔습니다. 어는 길에 한 여자 선교사님이 함께 왔습니다. 전주병원에 진단 받으시러 간다고 했습니다. 무슨 진단이냐고 했더니 암을 수술했는데 방사선 치료받으러 가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네팔에서는 내전이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공산당이 중요한 관공서를 다 점령하고 있습니다. 정당과 계속 협상하고 있는데 그 만료 기간이 다 되어간답니다. 그리고 제 협상은 실패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공산당이 시내로 들어왔습니다. 선교사님이 운영하고 있는 학교에도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숙식을 하겠다고 합니다. 선교사님은 그것만은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떤 일이 앞으로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암 수술을 받고 죽도록 충성하는 여 선교사님의 모습이 마음에 선합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보았습니다. 옆서에 보니까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에레베스트 산에 오를 수는 없지만 마음에 간직할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경험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초청에 응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시며 예복 입은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포도원 일군들(2)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6. 비유(6) – 포도원 일군들(2) ) / 본문 : 마 19:30-20:16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3 또 제 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우간다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이 이런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그곳에 가서 보니까 사람들이 하도 못살고 굶어죽어 가는 것을 보고는 “온 세상 마귀가 우간다에 와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요즘 제가 보기에는 “온 세상 마귀가 북한에 가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 하는 말이 남쪽에 십자가가 너무 많아서 마귀가 발붙일 곳에 없어 북한으로 다 갔다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온 세계가 남북한의 문제로 우리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UN에서는 연일 북한문제로 회의가 열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북한을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에도 성도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비록 이제 믿기 시작했지만 그들 또한 하나님이 같은 달란트를 주실 줄 믿습니다.

가만히 보면 목사님들도 저마다 늘 강조하고 반복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에게만 한 이야기 또 한다고 하지 마세요. 다 비슷합니다.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도 즐겨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즐겨 하시던 말씀은 형태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같습니다. 마태복음 18:4, 23:12, 누가복음 14:11, 18:14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 위대해 질 수 있는지를 말씀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이것은 예수님의 공식입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7)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함께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30절입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바로 이 말씀이 오늘 본문 16절 마지막에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구절 사이에 오늘 본문 말씀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이에 괄호 안에 놓인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포도원 품군’ 이야기는 “나중 될 자와 먼저 될 자”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이해하면 됩니다.

포도원의 일군들이 주인과 약속하고 일하러 들어오는 시간이 다릅니다. 첫 번째 사람은 ‘하루(12시간)’입니다. 그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은 제 3시, 그 다음은 6시, 9시, 11시에도 들어옵니다. 하루 열두 시간 일하는 것으로 계산해서 첫 번째 사람은 하루종일 12시간을 일하는 것이고, 그 다음 사람은 3시에 들어왔으니까 9시간을, 그 다음은 6시에 왔으니 남아있는 6시간을, 9시에 들어온 사람은 3시간만, 11시에 온 사람은 1시간만 일하면 됩니다. 그러나 주인 시간에 관계없이 모두 품삯에 대해서 미리 한 데나리온에 계약합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임금을 계산합니다. 사실 서로에게 얼마를 받기로 하고 들어왔는지 모르고 일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계산할 때 보니까 다 똑같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인이 계약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인의 계산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하시고 여기서 비유를 마치고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시각 장애인 강영호(박사) 교수의 말 가운데 “장애인은 불편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습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는 시각장애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많은 불편은 느끼고 있지만 절대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새겨둘 만한 교훈입니다. 어떤 때는 없는 자가 불평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있으면서도 더 불평할 수 있습니다. 속담에 “남의 밭에 콩이 굵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 것도 좋은 것입니다.

이 비유 자체는 명확하지만 사실 난해한 성격으로도 이해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을 설정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시다 고 우리는 말하고 가르치는데 마치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먼저 와서 많이 일한 사람에게 많이 주면 그것이 공평한 것 아닙니까? 만일 오늘날 실제로 이렇게 임금을 계산한다면 고용된 사람들은 이 때 불편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데모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회사를 운영한다면 파산에 이를 것입니다. 이러한 난해한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본문은 수많은 해석이 시도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일찍 들어온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해석합니다. 일을 시간으로만 계산해서 일의 노동을 측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일찍 왔지만 신문이나 보고 대충 시간 보내고 가는 사람과 늦게 왔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을 뒷바침 할만한 어떠한 근거도 본문에는 없습니다. 주인의 노동량에 따라 임금을 계산하고 있다는 어떤 주장도 하지 않습니다. 작업량에 강조를 두고있기 보다는 주인의 은혜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15). 만일 일의 노동량으로 계산하신다고 했으면 일찍 온 사람이 일단은 유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날 우리는 죽도록 일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일하는 것은 역시 상을 받기 위함입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면 좀더 적극적인 열심히 우리에게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점이 역시 있습니다. 대가를 바라고 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은혜로 일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비유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았다는 그 사실만으로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치 일찍 부름을 받았던 일군처럼 나중에 불평을 터뜨립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듭되는 재 초청에 스스로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합니다. 그를 멸시합니다. 이런 이유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자신들의 교만입니다. 우리들도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 당시 유대인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직업과 물질을 통해서 사람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이 받았던 선교사의 피 값을 잃어버리고 마치 우리가 잘나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자만하면서 경제력이 없ㄴ믄 사람들과 선교지의 사람들, 북한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야기 속의 포도원 주인은 참 좋은 주인입니다. 우선 주인은 포도원의 일꾼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은혜로운 부름을 합니다. 일꾼을 한번만 부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일꾼을 부릅니다. 새벽에 일꾼을 부르러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시간으로 오전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에도 일꾼을 불렀습니다. 이렇게 계속 일꾼을 부르고 있는 이 주인은 참 은혜로운 주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골고루 주고 있는 주인입니다. 그리고 일꾼을 조건 없이 부릅니다. 왜 여기 있느냐 내 포도원에 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포도원 주인은 우리가 경외하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포도원을 세워놓고 일꾼으로 계속 부르고 계십니다. 조건 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주인의 그러한 부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꾼을 계속 부르는 이 은혜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세상이 심판을 받고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부르기 위해서 아직도 하나님의 심판은 종말을 고하지 않고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부름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조건 없는 부름 때문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일하러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에는 불변의 질서가 있습니다. 주인과만 계약을 맺었습니다. 2절에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이 품꾼들과 한 데나리온씩의 약속을 하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주인과 부름 받은 품꾼의 계약입니다. 이 계약은 불변합니다. 절대로 파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주인의 뜻이 우선하고 있습니다. 이 계약을 잘 살펴보면 부름 받은 품꾼의 의지나 조건이 아니고 주인의 의지와 주인의 뜻대로 하루 한 데나리온씩 약속한 것입니다. 이렇게 주인이 품꾼들을 불러서 한 데나라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일을 시키는 이것은 은혜입니다.
7절에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있느냐.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불러주심으로서 인생의 실업을 면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지 아니하면 인생은 실업자가 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할 일이 없거든, 직장에서 쫓겨나거든 교회에 와서 열심히 일해 보세요. 지나치게 먹고사는 것 염려하지 마세요. 저를 보면 아시잖아요. 진짜 실업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포도원에 이른 아침부터 보냄을 받은 이 사람들은 왜 마지막에는 그렇게 슬픈 인물로 나타났습니까?
첫째, 계약을 하려고 합니다. 2절 “저가 품꾼들과 약속하여…” 맨 처음 사람들의 경우에만 되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계약을 맺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을 명문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 곧 그들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도 의식하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저희 때보다는 더 그런 것 갔습니다. 저는 묻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뻤든지요. 주일학교 교사라는 직책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둘째, 일을 평가합니다. 이 정도 일한 것이 얼마를 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역시 평가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간직하여 둡니다. 그들은 얼마나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하였으며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종일 더위와 수고를 견딘 것을 간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한 일만 생각합니다.
셋째,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기뻐하는 대신에 비참해지고 불평하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모든 것은 은혜로 되어진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실에서 결과되어진 것입니다. 가장 심각하고 무서운 일은 그들의 마음속에 집주인이 불공평하다는 감정을 가진 것입니다. 자신이 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점입니다.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에게 청년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저도 아프리카에서 선생님처럼 훌륭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의욕에 넘치는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청년에게 지시한 일은 땔감나무를 해오고, 물을 길어 오고,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싫증이 난 청년은 박사에게 따지듯 물었습니다. “박사님, 저는 박사님처럼 훌륭한 일을 하러 왔지, 이렇게 장작이나 패고 물이나 긷고 청소나 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작은 일에 헌신하는 마음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큰 봉사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어떠한 계약도 맺을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 불러 주셨든지 간에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기쁨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봉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조차 싫습니다. 봉사 그러면 마치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선심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계약보다 더 무서운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심에 감사하여 내게 주신 축복가운데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것이 또한 감사한 것입니다.

천국비유(1) 씨와 결실

예수님의 말씀(61. 비유(1) – 천국비유(1) 씨와 결실) / 본문 : 마 13:1-23

“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2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3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쌔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사람은 태어날 때 마음속에 별 하나를 갖고 태어난 데요.
반짝반짝, 뾰족뾰족 예쁜 별이요.
우리가 자랄수록 별도 무럭무럭 자라죠. 그런데 그 별은 …
우리가 나쁜 짓을 할 때마다 맘속에서 핑그르르 돈 대요. 왜 나쁜 짓을 하면 찔린다고 하잖아요? 그건 마음속의 그 별이 돌기 때문이래요. 별의 뾰족한 부분이 맘을 찌르는 거죠. 그렇게 우리가 나쁜 일을 할 때마다 별은 계속 돌아가요. 그런데, 나쁜 짓을 하도 많이 한 사람은 하나도 안 찔린다고 하잖아요. 그건 맘속에 사는 별이 계속 돌면서 뾰족한 부분이 다 닳아서 그런 거래요. 닳고닳은 별은 조금씩 작아져서, 그렇게 우리 맘에서 죽는 거래요.
별은 사람처럼 한번 밖에 태어나지 않아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착한 일을 하면 별은 다시 자라난 데요.
지금, 내 마음속에 있는 별은 잘 자라고 있나요?

복음서에서 이적과 표적은 약 30여가지가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는 자세히 나누면 49개 주제별로 크게 분류하면 27개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로 보아 예수님은 크게 두 가지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내신 이적 중에서는 병 고침이 약 22번으로 제일 많이 나타납니다. 다른 표적으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 오병이어 등의 이적입니다. 이 모든 이적사건보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비유의 말씀이 더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배에 오르시고 사람들은 해변에 둘러앉았습니다. 당시에는 음향시설이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들려지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예수님은 등지고 서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바람을 타고 해변에 둘러 선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었습니다.

천국의 비유
이렇게 많은 비유들 중에 첫 비유의 말씀을 만나려면 신약성경을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읽기 시작하여 12장까지 4분의 1을 읽은 다음에 비로소 오늘 본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13장에는 갑자기 변화가 일어나는데 13장에는 한 두 개의 비유가 아니라 무려 7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있어 “천국비유”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단순하게라도 예수님이 지금 무엇을 전달하러 오신 것인 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천국입니다. 예수님 앞에 왔던 세례요한도 천국을 전파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마 3:2).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을 받으신 이후에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마 5-7장은 천국윤리로 8-12장까지의 이적들은 천국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천국복음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 첫 번째가 ‘씨 뿌리는 비유’로 잘 알려진 오늘 본문입니다.

씨와 결실의 비유
일반적으로 오늘 본문의 비유제목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또 어떤 분은 “씨와 밭”으로도 말합니다. 모두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씨와 결실”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씨가 뿌려지는 목적은 결실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8절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입니다. 결실이 없다면 씨뿌림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그 결실을 위해서 우리는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오늘 첫 비유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친절하게 이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그 설명 부분은 10절부터 35절까지 이어집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즉 마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집나간 둘째 아들,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누가 제일 기뻐했을까요?
“아버지” 예 맞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제일 싫어했을까요? 큰아들?
아닙니다. “살진 송아지!”
딱딱해진 마음을 풀고 말씀에 열중하시라고 드린 말씀입니다.

첫 번째 마음의 유형은 길가인 사람입니다.
4절 “뿌릴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입니다.
길가는 씨를 뿌려서 결실 치 못하는 땅입니다. 길가는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땅입니다. 순수했던 마음위로 세상 철학이 지나갑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을 배웁니다. 잘못된 지식이 지나갑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서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폭력과 상업주의 적으로, 물질 만능의 세계로 흩고 지나갑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딱딱한 마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 자랄 수가 없습니다. 이 완악한 마음은 죄입니다. 로마서 1장은 이런 사람들을 잘 나타냅니다. 로마서 1장 22절에서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으나 새들이 와서 먹어버립니다. 새들은 사단을 상징합니다.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 죄의 결과입니다.
중무장을 한 군인들이 탈진하여 초죽음이 된 갈릴리 나사렛의 한 목수를 둘러싼 채 마구 구타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채찍질은 명령이었습니다. 이 나사렛의 목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도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죽어 가는 자에게 침을 뱉으며 쾌감을 맛보는 인간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침 뱉음이란 몸에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침은 몸에 고통을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에 수치를 주기 위한 행동입니다. 군병들은 그리스도를 초라하게 만듦으로 자기가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이 군인들은 마음이 딱딱한 길가인 사람입니다.

두 번째 마음의 유형은 얄팍한 사람입니다.
5절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씨가 떨어지면 묻히기는 하는데 깊이 묻히지 못하고 살짝 덮이게 되어 해가 나면 쉽게 말라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설명에서 20-21절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부류의 사람은 많습니다. 저는 선교회를 20년 이끌어 오면서 선교하겠다고 온 여러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저에게 까지 온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선교하겠다고 나름대로 작정하고 왔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정말 참 사람은 얼마 못 만난 것 같습니다. 대부분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없으면 가버립니다. 선교는 하되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그렇게 하고 싶은 겁니다.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질 생각은 거의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기쁨 때문에만 교회에 오는 분들은 위험합니다. 처음 접근은 그렇게 될 수 있지만 끝까지 그렇게만 신앙생활 할 수는 없습니다. 아프리카 선교하시는 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그곳에는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가 즐겁게 해주면 많이 오고 주는 것이 없고 재미없으면 안 옵니다. 우리 주앙교회에서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해야하지만 자신의 기쁨만을 구하면 안됩니다. 얄팍한 신앙은 결국 무너집니다. 기초가 없는 신앙입니다. 땀흘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마음의 유형은 세상에 빼앗긴 마음입니다.
7절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22절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물에 눈이 어두워 있는지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지요. 심지어는 교회 나오는 목적도 재물을 얻기 위해 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도도 잘 들어보면 그 내용이란 자신의 재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문제는 재물을 위해서 아무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도 교회도 이 일을 위해 이용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에게 경고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우니라”(마 19:23),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5), “화 있을 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저는 처음에 ‘바다 이야기’가 텔레비전을 통해 나왔을 때 잘 몰랐습니다. 우리 집에서 교회 오는 길에 보면 ‘바다 속으로’라는 음식 집이 있습니다. 바다의 계를 파는 작은 음식 집입니다. 그래서 바다 계가 또 무슨 음식감염처럼 문제를 일으켰나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성인오락실에 있는 사행성 게임기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래가 나오면 아마 대박인 것 같습니다. 제일 높은 점수로 딴다는 이야기이겠지요. 그런데 그 고래라는 놈이 나오기 전에 상어가 먼저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상어가 나와서 왔다갔다하면 이제 조금만 더하면 고래가 나오지 않을까 해서 자꾸만 하게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처럼 재물에 대한 욕심은 단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서히 자꾸만 더해집니다. 지금 가게가 잘 되기 때문에 주일에 비우는 것을 염려하신다면 조심해야 됩니다.

네 번째 마음의 유형은 열린 마음입니다.
8절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비유의 초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땅은 열린 마음으로서 옥토가 씨를 받아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결실 함과 같이 복음을 받아들여 이와 같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많은 수고를 해야 열매를 맺는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열매맺는 조건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전도자에게 완전한 헌신에 대한 두려움에 관해 말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지 못하겠어요. 그분이 비참하게 될지도 모를 선교지로 나를 보내 실까봐 두렵거든요.” 전도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느 춥고 눈 오는 날 아침에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반쯤 얼어붙은 채 당신이 있는 유리창을 쪼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어린 새가 당신에게 붙들려 자신을 먹여 주도록 완전히 당신의 통제하에 그를 맡겨 버린다고 상상해 보세요. 이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 손안에 움켜쥐고 눌러 죽이겠습니까? 아니면 피난처와 따뜻함과 먹이와 보호를 베풀겠습니까?”
전도자의 말뜻을 알아들은 아가씨의 두 눈이 빛났습니다. 여러 해 후 그녀는 다시 그 전도자를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과거에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밝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선교지에서 일하게 하셨어요. 이제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열린 마음만이 복음을 받아 결실 합니다.
여러분은 마음 문이 열려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하실 수 있는 분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옥토와 같이 열린 마음이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이 물음에는 대답을 하셔야 합니다. 아멘 그렇다면 문제는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땅이란 그 본성을 스스로 바꿀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할 때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요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했습니다.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딱딱한 땅을 갈아엎으시고 바위를 들어내시고 가시떨기를 뽑아버리십니다.

에스겔 36:25-27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부자청년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슬픈 표정으로 돌아갔습니다(눅 18:20-27).
이 광경을 보고있던 사람들이 구원의 문제가 엄청난 것을 인식했습니다. “듣는 자들이 가로되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26)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 같은 표현을 마태복음 19:26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놓은 사람들에게 들어오셔서 모든 축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되는 일은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놓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열매는 절로 맺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무가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절로 되는 것입니다. 나무 자신이 피고 싶고 맺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향해서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열고 주님만을 바라보면 저절로 열매를 맺게됩니다.

미국의 카놀 산도스씨는 60세에 파산을 당했습니다. 그는 수백만 달러의 빚을 지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산도스씨는 자살할 생각으로 밤늦게 병원문을 나섰습니다. 그때 어디에선가 찬송가 432장이 애절하게 들려왔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 주 너를 지키리 / 주 날개 밑에 거하라 / 주 너를 지키리 ~~”
찬송은 조그마한 교회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꿇어앉아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산도스씨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교회의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무거운 짐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리고 새 출발에 대한 힘이 솟아났습니다.
그는 자본금이 없었기 때문에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번 돈으로 통닭 집을 운영했는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산도스 치킨입니다.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시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열고있지 않은 것입니다.
 

구원비유(1) 잃은 양, 은전, 아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4. 비유(5) – 구원비유(1) 잃은 양, 은전, 아들) / 본문 : 눅 15:1-32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복음서에는 비유가 짧은 것까지 분류하면 약 49개, 크게 구분하면 27개 정도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비유 4가지를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구원에 관한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함께 중요한 비유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의 비유, 잃은 은전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가 모여있기 때문입니다. 라일(J.C. Ryle)감독은 이 비유들에 대해서 “성경에서 본 장보다 더 인간의 영혼에 유익을 주는 장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라일 목사님의 말처럼 우리에게도 오늘 소중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비유의 배경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꼬투리를 잡았던 것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졌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아니꼬웠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리와 죄인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하시고 그들과 함께 다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당시에 돈과 권력은 있지만 인격적으로 존경받지 못하며 배신자처럼 취급받았던 사람입니다. 죄인들은 예수님이 가까이 했던 사마리아의 우물가의 여인이나, 간음죄로 잡혀온 여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잘 모르거나 바리새인들이 정해놓은 세밀한 율법 조항들을 지키기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깍아 내리는데 급급했지만 예수께서는 이 비유로서 죄인들을 위해서 오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성품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을 정당한 것이며 마땅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렸지만 잊으시지 않으신 하나님
세 비유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은전을 잃어버리고, 세 번째 비유에서는 아들을 잃어버립니다. 이 비유는 모두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비참함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잃어버렸다는 것은 버린 것하고는 다릅니다.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원래 소유했던 주인의 마음입니다. 제가 예전에 한달 동안 정말 열심히 일해서 야근 수당까지 받은 월급을 기숙사 가방 밑바닥에 숨겨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돈이 없어진 것입니다. 잃어버리면 얼마나 허망하고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그 돈을 찾아보려 했으나 찾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쯤은 무엇을 잃어버렸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잃어버렸지만 그 시간이 오래되면서 또한 잊어버렸습니다. 잊어버렸다는 것은 그 가치에 둘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치가 없으면 하나님은 잊으셨을 것입니다.
세 비유속에서 나타난 것은 모두 잃어버린 것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소유자는 찾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 이 가치가 잘 나타납니다. 4절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주인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은 겨우 1%인데 신경 쓰지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잃은 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전 하나 때문에 신경쓰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유자는 열심히 찾았습니다. 이 세 비유는 주인이 찾는다는데 있습니다. 윌리엄 테일러(William M. Taylor)는 이 하나만으로도 이 비유들이 지니고 있는 정념(pathos:파토스)을 잘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뉴욕에 가면요 인형 병원이라는 게 있답니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 이래저래 고장이 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속상해 합니다. 그러면 이걸 가지고 가서 수리를 합니다. 그 수리하는 공장을 인형 병원이라고 했어요. 아이들은 인형을 가지고 놀다 팔이 하나 떨어지면 “얼마나 아플까?” 그러고 이걸 붕대로 싸매고 수술실에다 놓고 왔다가 다음날 가서 찾아옵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은 인형 값보다 돈이 더 비싸집니다. 비싸도 그렇게 합니다. 왜? 아이가 인형을 사랑하니까요. 그 인형이 소중하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경제적 논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장 났으면 “내 버려”, 부러졌으면 ”까짓 거 던져버려라 또 사줄게.“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게 바로 인간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 몰라요. 인형 하나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또 인형 하나가 나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도 있고 다시 행복할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오늘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여기에 멀쩡하게 있지만은 이 목자는 그게 아니에요. 잃어버린 양, 아주 지극히 사랑하게 됩니다.

사실은 스스로 떠났던 것입니다.
먼저 두 비유에서는 찾는 주인의 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잃어버린 비유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잃어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지막 비유인 세 번째에서 드러납니다. 일명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에게서 재산을 분할 받아 가지고 집을 떠납니다. 그리고 허랑 방탕하여 다 탕진합니다. 인간의 처절한 배고픔과 고통 속에서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아버지를 떠난 아들의 모습입니다.
양은 원래 본능적으로 먹이를 따라 이동합니다. 그래서 그냥 놔두면 눈앞의 풀만 뜯어먹으며 이동 하다가 자칫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이사야는 우리를 가리켜 다 양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풀만 따라가다가 위험에 직면하게되는 양처럼, 육신의 정욕과 출세, 물질만 따라다니다가 어린양이 낭떠러지에 걸려있는 모습처럼 우리도 그런 자리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우리를 찾으시는 아버지
요한복음 10:11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선언하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죽어 가는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9:10절에서는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확실히 주님은 우리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우리를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세 가지 비유들을 모아 하나로 보면 놀라운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슬퍼하시고, 찾아다니시고, 기뻐하시는 모습이 발견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찾아다녀지고 찾아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11절부터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죄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비유 하나에 타락한 우리 인간의 모습, 그러나 찾으시고 긍휼히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구원의 복음에 대해서 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복음서 속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왜곡된 자유의지를 보여줍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권위에 무조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욕구는 어떤 면에서는 타당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욕과 아버지의 은총을 거부하고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길을 떠났습니다. 물론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에서 꼭 탕자가 이곳의 비유처럼 잘못되기만을 기다리는 아버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마치 그렇게 되기를 기다렸다는 것이 아버지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홀로 설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실과를 따먹은 아담은 범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의지가 곧 죄인 것입니다.
둘 째로 자유 의지의 결과는 아주 비참한 경지에 이릅니다. 베드로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 실례로서 들려줍니다.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 2:6-14)
인간의 참된 축복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끝임 없이 강조하는 것이 하나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그것이 곧 저주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로 들어오면 그것이 축복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셋 째로 모범적인 회개자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모습에서 말 그대로 탕자만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모범적인 회개자의 모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타락과정이 일곱 단계로 묘사되고 다시 회복단계를 7단계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타락해 가는 과정 ①자기 고집(13) ②이기심(13) ③분리(13) ④육욕(14) ⑤영적빈곤(15) ⑥비천함(16) ⑦굶주림(16)과 회복해 가는 과정 ①깨달음(17) ②결심(17) ③회개(18) ④돌아옴(19) ⑤화목(20) ⑥새 옷을 입음(20) ⑦즐거움(22)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해서 타락했는지도 말해주지만 어떻게 회복하는지도 보여줍니다. 그 동안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 타락 쪽에 무게를 두었다면 이제는 회복해 가는 과정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타락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21절에서는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을 포기합니다. “알맞지 않다”는 “합당하지 않다”로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아버지의 아들로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품군의 하나”로 일시적인 고용을 하는 그런 품군처럼 아버지를 만납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자만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마땅히 구원받아야 활 상황이 아니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감사할 줄 앓아야 합니다. 주의 종으로서 만도 만족함을 얻어야 합니다.

아버지
오늘 비유가 가르치는 것은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이 누가복음 15:20절에 나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멀리 떨어져 오고 있는 아들을 알아봅니다. 매일 같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는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회개의 말을 듣기 이전이었습니다.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측은히 여겼습니다. “측은히 여기다”의 원문의 뜻 splagcnivzomai(스프랑크니조마이)는 ‘도와주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버지는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맞이합니다. 입맞춤은 무조건 적인 용서를 뜻합니다(삼하 14:33).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고 하십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혔다는 것은 완전한 아들로 인정된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가락지는 인장을 말합니다. 인장을 아들에게 주었다는 것은 권한을 넘겨준 것을 말합니다. 신도 신기었습니다. 이 신은 이제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기 위해 우리를 보호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십니다. 아버지의 환대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3)고 했습니다. 원문에 재미있는 단어하나가 나타납니다. 살진 송아지라는 단어 앞에 ‘톤’(to;n)이 나옵니다. 이것은 송아지가 준비되어 있었음을 말합니다. 아들이 오면 잡아줄 송아지였습니다. 마치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바쳐질 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해서 준비시켜둔 어린양과 같은 것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 15:24) 아버지는 잃었다가 다시 만난 아들로 인하여 즐거워하십니다.

노란 손수건 이야기 아시죠.
미국 플로리다해변으로 향하는 버스안은 바캉스를 떠나는 젊은이들의 들뜬 분위기로 가득했다. 그 틈에 한 중년의 사나이가 몸을 잔뜩 움츠린채 앉아 있었다. 허술한 옷과 덥수룩한 수염과 굳게 닫힌 입술….한 소녀가 사나이에게 접근해 어렵게 대화를 시작했다. 사내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뉴욕 교도소에서 4년 동안 복역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오. 아내가 나를 맞아줄 것인지 불안하오.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소. 오늘 출소할 것인데 나를 받아주겠다면 집 앞의 커다란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놓으라고 했소. 만약 노란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내 인생은 끝나는 것이오”
승객들은 모두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버스가 마을에 이르자 승객들은 손에 땀을 쥐며 참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탄성을 질렀다. 수 백개의 노란 손수건이 환영의 깃발처럼 참나무에서 춤추고 있었다.

우리 나라 버전도 하나 있습니다.
저는 옛날 우리 부흥 목사님이 한 얘기인데, 우리 한국에 옛날 얘기겠죠. 그러나 가슴 촉촉한 감동이 오랜 세월이 지나간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오래 전에 아마 조선시대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아들 하나가 아버지한테, 오늘 본문에 나간 얘기 비슷하게, 나 아버지하고 살기 싫다고 나가겠다고, 그래서 떠나 가버렸어요. 가출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떠나갈 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애비는 너를 기다리겠다. 너가 외롭거든 말이야, 춥거든 그리고 집 생각이 나거든 너 마음에 아무 걱정 말고 돌아와. 아버지는 기다릴 꺼야. 그때가 가을 이였는데 집 앞에는 단풍나무가 있었습니다. 너 말이야 가을이 되면 이 단풍이 붉게 물들면 그때마다 나를 생각하길 바란다. 이 애비가 기다리고 있다고, 저 빨갛게 물들어 가는 단풍처럼 아빠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이 단풍잎은 말이야 너를 기다리는 애비의 마음이야. 그런데 뭐 떠나가는 아들이, 떠나가는 아들이 그런 아버지 말이 들어왔겠어요? 귀에, 귓전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떠나가서 마음대로 사는 겁니다. 자, 다 재산 낭비해 버리고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떨어진 다음에, 달리는 살 방법이 없었을 때 아버지 말이 자꾸 생각나는 거죠. 그때서야, 아버지가 약속했는데, 가을이면 기다리겠다고, 단풍이 무르익으면 기다리겠다고, 그래서 가을철 단풍이 무르익으니까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애. 아버지는 나를 받아주실꺼야, 맞아, 그분이 하신 말씀도 있으니까, 동일한 시간에 아버지는 아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식이 이제는 돌아와야 하는데, 그런데 그 해 따라서 그 가을철 단풍잎이 너무 쉽게 떨어져 버렸어요. 자기 집 앞에 단풍나무의 단풍잎이 너무 쉽게 떨어진거에요. 혹시 이 자식이 돌아오다가 단풍이 떨어진거 보면은 애비의 마음이 변한 줄 알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해서 집안식구에게 이상한 일을 부탁했습니다. 홑이불 가지고 오라고, 다 집에서 홑이불 꺼내 가지고, 거기다 단풍잎 색깔로 홑이불 마다 물들였습니다. 그리고 일찍 떨어진 단풍나무에 그 홑이불을 걸어 놓았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 아버지는 아예 지붕을 이 단풍잎 홑이불로 지붕을 다 덮어버렸습니다. 그 해 가을, 돌아오든 이 아들, 멀리서 자기 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단풍나무를 먼저 찾았습니다. 그런데 단풍나무에 빨간 단풍 색갈든 홑이불이 걸려 있는 거에요. 지붕 위에도,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울먹이면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으로, 그는 집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천국비유(4) 그물 안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4. 비유(4) – 천국비유(4) 그물 안에) / 본문 : 마 13:47-51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저는 교회사역외에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역을 하고있습니다. 요즘 심혈을 기울여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선교를 위한 전문검색입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검색’이라는 단어에 민감해져 있습니다. 몇 일전 집사람하고 이야기하다가 ‘요즘 검색이 강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역시 남편이 고민하는 것을 아내도 고민하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수준이 높은데… 요즘 검색이 구글과 한국에서는 네이버, 엠파스 등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검색이 강화되었지요. 그러나 아내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캐나다를 몬트리올을 가는데 벤쿠버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답니다. 갈아타는 시간이 3시간인데 공항에서 검색이 강화되어서 빨리 나가지 못하면 비행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답니다. 그래서 공항검색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데 우리가 너무 무엇인가에 집착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뜻을 왜곡하면 안됩니다. 내 방식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자신이 다니던 초등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연설할 때 이 한마디를 연속해서 강조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결코, 결코,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많은 설명보다는 한가지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교육적 효과를 더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이 비유설교로 네 번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 중에 네 가지가 천국비유입니다. 오늘은 천국비유의 마지막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반복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러한 반복이 마태복음 13장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곳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 4개중에 한 가지 비유속에 나오는 요점들이 적어도 하나이상이 다른 비유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음의 천국비유에서 천국의 역사는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비유에서는 이 밭에 가라지를 마귀가 심어놓았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 비유에서는 밭에 우연히 일하러나간 농부가 보화를 발견하고 자기의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이 세 비유들은 밭으로 시작해서 밭으로 마쳤다는 것이 동일합니다. 처음 비유에서는 성장을 두 번째 비유에서는 가라지를 뽑아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알곡을 다치지 말게 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오늘 비유는 밭이 아니라 갑자기 바다로 가십니다. 그러면 오늘 비유는 연관성이 없냐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늘 비유의 요점은 그 동안 줄기차게 주님이 언급하셨던 가라지의 마지막 때를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오늘 비유는 두 번째 비유와 제일 유사합니다. 쭉정이와 알곡이 마지막 때는 함께 모입니다. 그리고 다시 갈라집니다. 오늘 그물비유 역시 고기들이 함께 모입니다. 그리고 다시 갈라집니다. 이것이 똑같은 결론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밭의 비유보다는 그물비유가 더 마음에 와서 닿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비유의 뜻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제자들이 어부였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실 때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0)는 말씀을 연상하실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 비유를 설명할 때 사람들을 그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이 비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전도와 선교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이 비유를 주님이 하신 목적은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모았다가 나누는 분리에 있습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 곡식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가라지들은 불에 태워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비유는 똑 같습니다. 고기들도 하나로 모였다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나누어집니다.

나쁜 고기의 결말이 나옵니다. 첫째는 “… 28 내버리느니라” 둘째는 “49 천사들이 … 악인을 갈라내어” 셋째는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악한자가 가라지를 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경우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심판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아주 커다란 배를 가지고 기업적인 형태의 어업을 제외하고 사람이 직접 강이나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투망식’이라는 방법인데, 사람이 그물을 던져서 천천히 끌어올리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후리식’인데, 양쪽에서 그물을 서로 잡고 끌어서 고기를 잡는 방법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이 말씀에 의하면 천국은 그물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천국이라는 그물에는 ‘각종’이라는 말에서 보여지듯이 ‘모든 고기’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일단은 모으는 아주 ‘활동력’이 강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런 천국과는 아주 다르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은 서서히 ‘천국’으로 입성하여 보겠습니다. 천국이라는 그물 안으로 잡혀 들어가는 고기가 되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천국은 그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각종’ 물고기를 모을 수 있는 그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천국은 아주 빡빡하게 짜여져 있는 그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아니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천국’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밝혀 줍니다. 하지만 이 천국은 그물과 같아서 물위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물이 물고기를 모으는 동안에는 물고기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열심히 먹이를 먹고 무리 져서 헤엄쳐 다닙니다. 천국은 이처럼 세상 속에서 깊이 잠겨 있습니다. 세상과 구분하여 천국을 말하는 사람이나 천국을 마치 볼 수 있는 것처럼 속이거나 아니면 천국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상태의 것으로 말해서도 안됩니다. 열심히 먹이를 먹으면 천국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말씀에 드러나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천국이라는 그물을 바다에 치시는 분”이시며(47절), 나중에 “물가로 그물을 끌어내실 분”(48절) 그리고 그물에 든 고기들 가운데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릴 분”입니다. 이 분은 드러나지 않지만 엄청난 권위와 권세를 가진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물이 물 안에 있는 동안에는 이런 권위와 권세에 대하여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천국이라는 그물로 둘러 쳐 있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이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그물이 고기에게 그물 치는 시간을 통보하고, 그물을 거두어들이는 시간을 통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기가 있을법한 곳에 그물을 내립니다. 그물이 바다에 들어와 있을 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저 일상적인 생활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시간입니다. 우리들이 변화가 없다고 지루해 하는 시간, 아무리 기도하고 찬양을 해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시간 일상적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까지 일하고 잠자고 깨어나는 그런 시간들 인생의 희노애락이 끊임없이 계속되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시간 이런 시간들이 바로 천국에 들어 있는 생활이며, 시간입니다.
천국이 인간들에게 임재하고, 우리들 곁으로 다가온 것은 우리들 의지와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천국 안에 있었던 시간동안 내가 얼마나 “좋은 물고기”(48절)가 되는가는 순전히 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원하심과 계획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좋은 사람” “복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미 오래 전 골고다에서 보혈로 우리들을 죄 없이 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율법이나 시, 역사를 통하여서 우리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서부터 세례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복음의 광고판 같은 선지자, 예언자”들은 많았습니다.
그리고 천국이라는 그물로 우리들을 둘러 쳐주셨습니다. 좋은 고기는 이런 환경을 하나님의 “보호”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믿음으로 성장하여서 하나님의 좋은 일꾼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하지만 질 나쁜 고기들은 이런 환경을 “간섭, 속박”으로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그물을(천국) 속박으로 여긴다면,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천국이라는 그물을 속박으로 보느냐, 아니면 보호로 보느냐에 따라서 좋은 고기가 되느냐, 나쁜 고기가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우리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인들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애굽의 고기가마와 채소를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비밀을 말씀하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예수와 사람들을 구분하여 적으로 돌려세우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천국이라는 그물은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줍니다. 우리들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들의 구원을 향한 계획과 실천에 열중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는 그 날에 하나님의 “좋은 것”에 대한 선택에 우리들은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확신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늘 의식하고 그 손길의 따사로움에 자신을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결정에 하나님의 자리를 비어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결단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을 윤리적으로 “착한 행동”으로 보는 그런 이상한 그리스도인의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들을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은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충실한 좋은 일꾼”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거나,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자원하고 싶다면(이런 마음들이 스스로 내적인 깊은 심령 가운데서 솟아나는 사람이야말로 “좋은 사람”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게 도리 것이고, 스스로의 삶의 가장 귀하고,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하나님을 위하여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현재 우리들의 삶과 생활과 우리들의 全영역에 깊이 내려져 있는 하나님의 그물을 의식하는 사람들만이 행할 수 있는 삶의 모습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만이 48절의 말씀처럼 “좋은 것”으로 인정받게 되고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들림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생활에 전 영역에 깊이 침투하여 있는 이 천국이라는 그물은 이제 “물가로 끌어내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물이 고기가 가득한가? 하는 그물 주인의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그물주인은 좋은 고기가 많은가? 하는 부분이 아니라 그물에 가득 고기가 들어 있는가? 하는 부분으로 끌어올리는 시점을 결정합니다.
너무 많아서 그물이 상해서도 안되며, 너무 적어서 별로 수확이 없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물이 끌어올려진다는 것은 반드시 모든 사람들에게 천국이라는 실체를 보여줄 것이며, 그 천국은 그물 안에 있는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물을 끌어올린 사람의 손에 의하여 “좋은 것”으로 “그릇”에 담겨져야 만이 진정한 천국을 소유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어부들이었던 제자들은 늘 이렇게 일을 해왔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나쁜 고기라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고기는 따로 모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 끝 날에는 “그물이 가득 차는” 시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하나님의 시간으로 모든 것을 교정하시는 그 세상 끝 날은 모든 성도들이 환난을 받고 힘들어하는 시기일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보다는 그물이 가득 차게 되는 시기입니다. 어부가 끌어올릴 시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물을 끌어올릴 시기를 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강조하시는 것은 “좋은 사람”, “의인”들이 받아 누릴 특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 “악인”들이 누릴 엄청난 고통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반드시 악한 사람들에게는 보응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천국이 드러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이 모든 것을 구분하십니다. ‘심판’(judgement)이라는 단어가 한글과 영문에서는 모두 판사나 입법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원어에서의 “심판”(크리시스)은 문자적으로 “구분하다”라는 말입니다.

주인은 대충 고기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러한 실수는 하시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고기 하나 하나를 점검하십니다.

우리가 좋은 고기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점검을 늘 해야합니다. 물론 오늘 비유는 나쁜 고기의 심판에 있습니다. 우리는 나쁜 고기가 되지 않기 위하여 늘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손길에 의하여 “좋은 것”이라는 판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며, 풀무불의 고통을 면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울며 이를 간다”는 것은 스스로를 향한 한탄입니다.
“왜 내가 그때에 교정하지 못했을까?”
“왜 내가 그때에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했을까?”
여기서 이를 갊이 나타납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평생 이를 갈면서 억울한 삶을 한탄하시면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현재 힘들지만 일시적인 회개와 겸손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비로 여기서 “천국”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의 구분이 이루어지고, 훗날 이들의 인생과 결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평신도 신학자이고 문학가, 변증가였던 영국인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결코 벼랑이 아니다, 지옥을 향한 길은 밋밋한 내리막길이다. 사람들은 그 길을 기분 좋게 걸어간다.”
이 말은 무척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갑자기 떨어지는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는 밋밋한 내리막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