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청지기의 지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2. 비유(12) –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 / 본문 : 눅 16:1-9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2006년도 얼마 전에 시작한 것 같은데 이제 달력이 한 장만 남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나오는데 낙엽 한 잎이 내 얼굴에 떨어져 스쳐가는 것입니다. 묘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나도 이 낙엽처럼 떨어지겠지, 내 생명이 떨어질 때 추한 모습이 아니라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을 낙엽은 우리에게 운치를 느끼게 합니다. 그렇게 지저분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 죽을 때는 그렇게 추할 수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아름다운 생애를 살다가 주님께 돌아가 주님 품에 안기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난해한 비유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청지기는 매우 교활하고 불의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의 하는 짓도 악한 이들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주인으로부터 파면을 통보받고 사후 대책에 부심하다가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냅니다. 쉽게 생각하면 장부를 허위 조작하여 채무자들의 환심을 사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자신이 살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이 방법의 재치에 감탄한 주인은 오히려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청지기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청기임을 먼저 명심해야 합니다. 청지기라는 것은 나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오는 날에는 반드시 셈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진실하고 선해야 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 12:42)라고 하십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고 합니다.
요셉도 청지기 생활을 했고, 총리가 된 후에 자기 집에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아주 충성스러운 청지기의 모범을 보여줍니다(창 39:4-5). 주인이 보던지 보지 않던지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성스럽게 합니다.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모두 빌려 쓰는 청지기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빌린 것입니다. 영원한 내 것은 없습니다. 생명도 소유도 자녀들까지 다
일시적으로 위탁받은 것뿐입니다.

미국의 어느 가정에서,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밖에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자기 언니들에게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25전 짜리 돈을 들고, “나 이거 오늘 벌었다.”고, 돈을 벌었다고 신바람 나서 자랑을 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어떻게 돈을 벌었느냐?” 했더니, “내가 버스를 타려고 하는데, 운전대 옆에 있는 그 돈 넣는 함이 있는데, 거기다 넣으려고 하니까 키가 작아서 발버둥을 하고 넣으려고 하는데, 뒤에서 사람들이 밀어버렸어요. 그만 뒤로 밀려나서 그대로 저쪽으로 나와 버렸어.” 하는 거예요. “나 오늘 공짜로 버스를 타고 돈 벌었다!”고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그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이 놈아, 너는 우리 윌리엄스 가문의 가장 높은 자랑인 명예, 즉 정직함을 25전에 팔아먹은 놈이다!”고 하면서 통곡하며 울었답니다.

불의 한 청지기의 불의는 무엇입니까?
청지기가 주인행세를 했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 자신이 청지기인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청지기에게 위탁한 일을 주인의 뜻대로 운영해야 합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이 주인인줄 착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이런 청지기는 악한 종입니다(마 24: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4:49-51) 자신이 주인인줄 알고 착각하게 되는 것 이것이 제일 문제입니다.
오늘 비유에는 언 듯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이 청지기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관리인인 것과 자신의 능력의 한계와 약점, 그리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주인의 평가와 거기에 따르는 상벌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고 말했을 때 그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변명하려는 기색 없이 당연히 올 것이 왔다는 담담한 태도로 앞날을 위한 설계에 몰입합니다.
어떻게 보면 얄밉고 화도 나게 하는 태도이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집착하거나 고심하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언젠가 우리들의 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평가가 필연적임을 명심하고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거나 핑계할 수는 없습니다.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역사 안에서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둘째, 이 청지기는 자기에게 남은 기회와 권한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하나님은 활용하는 지혜를 칭찬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비유 중에 달란트의 비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경우 그는 받은 것을 묻어두었다가 그것을 주인에게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려고 하는 노력이나 생각이 전혀 없었던 종의 태도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은사도 믿음도 능력도 지식도 활용해야 합니다. 활용하지 못할 때 한 달란트의 가치는 보존할 수 없음은 물론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활용의 결과이며 미문의 앉은뱅이가 걷게 된 것도 활용의 결과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해안에서 폭풍우로 조난을 당한 배가 한 척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그때 마을사람들은 난파선의 선원들을 구출하려고 어선들을 동원해 수많은 생존자를 구원해 냈습니다. 그러나 워낙 배가 작고 한사람도 더 태울 수 없는 형편이어서 난파선의 틈에 끼어있는 한 선원을 보고도 그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남아있던 생존자의 구조를 위하여 지원자를 찾는데 마침 한 청년이 그 모험에 지원을 하고 나섰습니다. 그때 청년의 어머니는 한사코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남편도 바다에서 죽은 바가 있을 뿐 아니라 큰아들도 원양어업에 나간 지 수년이 되도록 소식을 모르고 있는 형편이어서 이아들마저 희생이 되면 혼자만 남게 될 것이라고 애원을 하며 지원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마지막 생존자 한 사람을 살리려고 구조작업에 나섰습니다. 어머니는 애를 태우면서 아들의 성공을 빌었으며 마침내 아들은 마지막 생존자를 태우고 돌아왔는데 바로 그 생존자는 생사를 모르던 그 어머니의 큰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을 추구하고 의로운 일을 도모하면서, 악행을 일삼는 자들보다 얼마나 소극적이고 기피 적인가에 대하여 깊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쓰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풍성한 수확을 쌓아 놓고 내 영혼만을 위한 욕심으로 고마운 이웃 또는 불우한 이웃은 전혀 잊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내게 맡기신 주인의 것으로 주인의 기뻐하실 이웃을 위하여 투자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말처럼 내가 가지고 있을 때, 내가 쓸 수 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셋째, 미래를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눅 16:3-4) 한 것은 훗날을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시 71:18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더 먼 훗날, 죽음 후 심판 받을 날을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요일 4: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 하니라” 영원히 없어지지 않은 것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눅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그 방법으로
첫째, 빚진 자,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지혜입니다.
눅 16: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라고 불어봅니다. 여기서 청지기가 사문서를 위조한 변조사건으로 보여지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는 청지기가 증서를 마음대로 변조를 해도 되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1) 첫 번째 변조 사건
누가복음 16: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주인이 오기 전에 급히 서류를 다시 꾸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름은 감람나무에서 얻는 것으로서 연료와 식용으로 사용하는 기름입니다. 한말은 헬라어 바투스는 약 23 리터로서 모두 2,300 리터입니다. 감람나무 한 그루에서 25리터를 얻을 수 있다고 하면 약 92 그루에서 얻는 기름입니다. 그래서 50%를 감한 50 말이라고 쓰도록 했습니다.
(2) 두 번째 변조 사건:
눅 16: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한 석은 헬라어 코투스로 약 360 리터 혹은 20말에 해당 합니다. 밀 백석은 100 에이커에서 나는 소출이라고 합니다. 20%를 감한 80석이라고 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문서 위조가 아닙니다. 청지기가 자기 재량으로 할 수 있는 업무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새로 쓴 증서가 정당한 가치인데 그 동안 청지기가 착취하기 위해서 억울하게 부과했던 것을 본래의 가치로 되돌려 준 것으로 생각됩니다. 청지기가 자기의 이득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착취를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자신의 잘 못을 알고 마음을 바로 돌린 것으로 보입니다.
잠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둘째, 주인의 인정을 받은 지혜입니다.
한 때 부정직했지만 주인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인의 본심을 알고 그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내리셨습니다.
① 불의 한 재물로 영원한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눅 16: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② 재물은 더 큰 것을 위한 준비입니다.
재물은 우리에게 더 큰 것을 주기 위하여 시험용으로 주신 것입니다.
눅 16:10-12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③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두 주인을 똑 같은 존경심으로 섬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지금도 하나님보다 돈의 신을 섬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돈의 신을 맘몬이라고 합니다.
NIV 성경은 마태복음 6:24절을 “God and Money”라고 했지만 KJV는 “God and mammon”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의 케사르(Caesar, Gaius Julius)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본국으로 돌아올 때였습니다. 로마의 전성기에 온 세계를 장악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황제는 군중들의 환호성과 함께 큰 영광을 누립니다. 이 때, 그는 번쩍거리는 면류관을 벗으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겨우 이것이 전부냐? 도대체 이게 무엇인데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생명을 바친다는 말이냐?” 이것이 전부냐! 여러분, 끝을 알고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별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무엇을 섬기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청지기입니까? 불의한 청지기입니까? 신실한 청지기입니까? 주님의 것을 내 것인 것처럼 살아오지 아니했습니까? 내가 주인행세를 했으면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불의한 행동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됩니다. 주님(주인)은 셈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 때는 이 비유의 불의한 청지기처럼 살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속히 셈을 하게 될 그날을 생각하면서 되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진정한 부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1. 비유(11) – 진정한 부요) / 본문 : 눅 12:13-21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소크라테스의 사랑하는 제자였던 희랍이 낳은 세계적 철학자인 플라톤(B. C. 427-347)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약관 28세의 청년이었습니다. 스승의 죽음을 몹시 애석해 하던 플라톤은 스승을 가리켜 말하기를,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지혜롭고, 가장 정의로우며, 가장 선한 사람이었다!”라고 찬탄하여 마지않았습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스승을 잃은 슬픔에 그는 12년이나 긴 세월을 실의와 절망과 허무에 싸여서 이집트로, 시실리로, 이탈리아로 돌아다니며 방황하였다. 나이 40이 되어서야(B. C. 387)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철학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세 가지를 감사합니다. 첫째는 내가(야만인이 아닌) 희랍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 보다도 하나님께 더욱 감사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소크라테스 시대(age of Socrates)’에 태어난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감사한 것은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이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이요,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주님이 아직 오시기 전에 구원받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것입니다. 너무 빨리 태어나서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었거나 너무 늦게 태어나 더 말세 때에 나지 않은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 휘테라는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주일 설교할 때마다 그 주에 있었던 일 중에 꼭 한 가지씩 감사할 조건을 찾아 감사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한번은 그 지역에 큰 태풍이 몰아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최악의 한 주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주일 아침이 되자 성도들은 오늘 아침만은 목사님이 감사할 조건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 날 아침에도 여전히 감사기도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 감사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난 주간과 같은 최악의 재난이 항상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감사 합니다”

제가 선교회하며 주앙교회를 개척한 것을 아닌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분들이 물어보는 것이 “성도가 몇 명인가요?”입니다. 저도 다른 분들에게 똑같이 물어본 경험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저에게 “야! 너네교회 몇 명 나오냐?” 그렇게 물어보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너는 정말 나의 뜻을 전달했느냐?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느냐?”라고 질문하실 것 같습니다.

자신의 욕심으로 가득 찬사람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에 한 사람이 무례하게 말씀을 가로막고 자기 형이 자기와 유산을 나누려 하지 않으니 형에게 명해 재산을 나누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 12:11-12) 이런 말씀을 하고 계셨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형과 제산분배 문제로 예수님께 자기 일을 해결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잡혀가게 되면 무슨 말을 할까 미리 걱정하지 말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비장한 각오로서 전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산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이 사람의 부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탁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람의 부탁이 배경이 되어서 예수님은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비유로서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 부자가”라고 하셨는데 이 사람은 이미 부족한 것이 없는 부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풍년이 들어 곡식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소출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나누어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곡식을 쌓아둔 부자의 생각은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이와 똑같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오늘 밤이라도 거두어 가면 그렇게 쌓아둔 물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입니다.

재산의 오용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시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를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시 14:1, 53:1). 그런데 오늘 본문의 어리석은 자는 재물에 사로잡힌 사람을 가리켜 말합니다. 구약의 어리석은 사람과 신약의 물질에 빠진 사람을 똑같이 보고 있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신론자입니다. 예수님께 나와 자신의 재산을 찾아달라고 부탁한 이 사람도 무신론자입니다. 오늘날에도 실질적인 무신론자인데
마치 이 사람처럼 자기 재산 찾으러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축복만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왜 이 사람들이 어리석습니까?
자신의 물질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세상 안에서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축복입니다.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누군가 주신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16)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기 때문에 재산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왜 재산을 오용합니까?
재산이 하나님께로 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재산은 우리를 자기 몰입, 물질주의, 다른 이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빠뜨립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 사람이 하나님의 일(선교)을 못합니까? 바로 이 물질 문제가 대부분 영향을 미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무너뜨린 다음에 작은 아이성에서 참담한 패배를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일로 옷을 찢으며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유를 찾아보니 아간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바쳐야 할 전쟁에서 얻은 것을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 금 오십 세겔을 감추어 놓았습니다. 이 한 사람의 죄로 인해 이스라엘이 대패한 것입니다(수 7장).

솔로몬을 망하게 한 것 역시 사치하다가 삶을 망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께 드리려 한 것을 드리지 않아 죽고 말았습니다. 물질로 하나님을 속인 결과입니다(행 5장). 바울은 선교 여행 중에 돌아간 한 형제에 대해서 말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 갔고”(딤후 4:10). 바울은 이후에 디모데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
성경은 돈 자체가 악이라거나 재산 그 자체가 악을 만들어 낸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잘못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성경을 오해하여 자신들이 마치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천사처럼 행사하면서 남의 재산을 빼앗아 공유 재산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사유 재산을 존중합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중에 제 팔 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출 20:15)고 합니다. 이 계명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임의로 취하면 안 되고 다른 사람도 나의 재물을 임의로 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에게서 재산에 대한 해결책은 재산의 축적이나 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재물을 온전히 평가하고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어리석은 이유
예수님께서 어리석다고 하신 진짜 이유는 단순히 재물의 남용에 잇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어리석은 주된 이유는 재물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재물 때문에 잊어버린 그의 영혼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결국 없어질 것이지만 영혼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의 가치와 내 물질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랍비 한 사람이 나귀등에 닭 한 마리와 천막 그리고 등불을 싣고 길을 가고 있습니다 .목적지에 다다르려면 한참은 더 가야 할텐데 이미 날이 어두워 길가에서 유숙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민가는 한참 떨어진 것 같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커다란나무 밑에 천막을 치고서 자리를 잡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성경을 읽고자 등불을 켰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등잔불을 꺼버리고 말았다. 그는 성경을 덮고 기도를 하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이 되어 천막 사이로 비쳐드는 햇빛에 눈이 부셔서 잠을 깬 랍비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날마다 꼬끼오 소리로 나를 깨워 주던 닭이 어찌 오늘은?’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나간 랍비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나무에 묶어 두었던 닭과 나귀는 맹수에 찢겨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행 중이라 지치고 피곤한 자신에게 왜 이런 변고가 생겼는지, 은근히 하나님이 원망스럽기까지했습니다. 자신이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가 생각하니 이젠 화가 났다. 그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닭과 나귀가 참혹하게 찢겨 주는 그때에 자신은 곤히 잠을 잤으며,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는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살아 있구나 내가 살아 있어 하나님은 내게서 닭과 나귀를 앗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날 살려 주신 것이었구나! 하마터면 난 감사해야할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고 불평을 할 뻔했구나. 난 잃은 것이 아니라 얻은 게야. 노아처럼.”

하나님께 대한 부요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이 세상의 것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것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물질문명에 도취해서 살아가는 현대인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했습니다. 별로 외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리라는 생각은 현대인의 향락적 가치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가진 성공한 사람처럼 살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평가해 볼 때 어리석은 삶은 아니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1) 어리석은 부자는 마지막 종말과 결산이 있음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미래가 없고 현실만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평안하고 부유한 삶을 살 때 마지막 종말이 찾아온다는 것을 잊고 살기 쉽습니다. 우리가 일회적인 인생을 후회 없이 살고 값있게 살려면 언제인가 종말이 찾아오고 그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내 삶에 대한 결산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어리석은 부자는 사는 목적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이 부자는 삶의 목적이 겨우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도는 짐승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동물적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기만 생각하였습니다. ‘나’란 말이 무려 6번 반복됩니다. “내가 어찌할꼬.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리라.”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모든 것을 보고 생각합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질 것을 예언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2 이하에 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했습니다.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해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3) 어리석은 부자는 사명이 없이 살다가 죽었습니다.
사람은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존재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은 잠깐 왔다가 가는 세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습니다. 돌아갈 본향이 없는 삶이 가장 고독하고 불행한 삶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게 된 것을 알았을 때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어 주셨습니다. 사랑과 섬김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만이 참으로 길이 남을 값진 것임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면서 떡과 잔을 가지고 이것은 너희를 위해 찢기는 나의 살이요, 흘리는 나의 피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상에서 자기 생명까지 남김없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가장 고독하고 비참한 사람은 할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가장 고상하고 행복한 사람은 남을 섬기고 봉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선교사 왕 박사는 동남아를 여행하던 중에 자기의 소유물을 도둑에게 모두 잃었다. 잃어버린 물건들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하여, 신문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코트와 양복과 셔츠를, 잃어버렸지만 아직도 나는 예수님의 의의 옷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나는 돈을 다 잃어 버렸지만 하늘나라 은행에 예금해 둔 나의 재산은 아무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나는 성경책도 잃어 버렸지만 아직도 나의 기억 속에 넣어둔 성경구절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나의 설교 원고를 다 잃었지만 아무도 나의 속에서 우러나오는 메시지는 절대로 도적해 갈 수가 없으니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준비하는 신부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0. 비유(10) – 준비하는 신부들) / 본문 : 마 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신랑이 신부를 맞이할 때 준비된 신부를 맞이합니다. 신부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세계의 풍습은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신부가 신랑을 위해 준비해 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것은 신랑집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시집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시집가지 위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신랑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시집가는 것을 대충 생각하고 성의 없이 준비하는 것은 신랑을 모독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물이나 패물 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랑을 존중히 여긴다면 신부는 단장할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식 날이 되면 신부는 신랑을 위해서 제일 아름답게 꾸미고 결혼식장에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재미있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부와 신랑,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 본문(엡 5:25-30)은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부부 생활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를 교훈 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가르치면서 바울은 부부의 관계, 신랑 신부의 관계를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에 빗대어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관심은 부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와 예수님, 예수님과 교회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야 합니다.

‘윌리암 바클리’라는 유명한 성경 주석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40년 동안 교회에서 봉사한 다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교회를 믿는다.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부패하고 사람들 눈에 허물 투성이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그래도 믿을 것은 교회 밖에 없다는 것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리고 한 때 좌절에 빠졌던 미국인들에게 소망을 불어 넣어주었던 백 만인의 애인이라고 불리웠던 노만 빈센트 목사는 ‘교회는 우리의 모든 희망이 실현되는 곳이다.’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꿈,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지만 남몰래 숨기고 있는 소원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은 교회라는 말입니다. 저도 전적으로 이 말에 동의합니다.
왜! 교회에 그런 소망이 있습니까?
교회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나라도 21세기에는 교회에 희망을 걸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고 교회에서 진정한 신앙 생활을 할 때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질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이할 준비된 신부(교회, 나)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전도하는 방법에 있어서 많은 곳에서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버지 다음으로 전능자로 왔으니 나를 따라와야 한다”라고만 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교육할 때 “배워서 남 주냐?”그랬습니다. 너 자신을 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착각을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주를 위해서 한다는 생각입니다.
태국에서 코끼리가 눈물을 흘렸답니다.
코끼리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에게 많은 상금을 걸고 코끼리 울리기 대회가 있었답니다. 발로 차고 간질러 보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했지만 코끼리는 눈만 깜박거릴 뿐 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코끼리 귀에다 데고 뭐라고 하고 오니까 코끼리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코끼리 귀에다 뭐라고 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분이 코끼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 한국 가서 목회 할래!”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물론 목사님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목회가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제 동기 목사님이 한 분계십니다. 이분하고 이야기할 때 목사가 참 좋은 직업이야! 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보통 직장생활해도 그만한 어려움과 고통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너무 목사만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얼마나 세상에서 살기가 힘듭니까? 제가 일산에서 협동목사 할 때 그곳 목사님은 부교역자들을 주일, 월요일 날도 모두 출근을 시킵니다. 보통 교회는 월요일에는 교역자는 휴무입니다. 이유인 즉은 모든 성도들이 평일날 일하고 교회 와서 봉사하는데 왜 교역자는 그렇게 하지 못하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제가 선교회 일하는 것은 제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제가 다른데 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한다는 명분도 있고 저도 좋으니까요? 문제는 나를 위한 것이냐, 주님을 위한 것이냐 하는 문제보다는 왜 그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 6:1)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열처녀 비유’는 성경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하나의 걸작으로 인정받는 부분입니다. 이 비유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비유임과 동시에 읽고 의미를 새기면 새길수록 다양하고 깊은 진리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열 처녀가 있는데 다섯 명으로 구분합니다. 딱 절반입니다. 반은 지혜롭고 반은 지혜롭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섯 명은 신랑이 올 때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있었기 때문이고 다섯은 기름을 준비했지만 모자랐고, 깨어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집의 문이 닫힙니다.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외칩니다. 이 얼마나 간절한 호소입니까?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으며 신랑은 대답합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그리고 주님의 결론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3).
이 이야기는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열 처녀는 처음에는 비슷해 보였습니다. 동일한 면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한참 동안은 함께 갑니다. ① 먼저 열 처녀들은 모두 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초청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열 처녀는 모두 초청을 받았습니다. ② 그리고 모두 이 초대에 응한 사람들입니다. 초대했지만 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마 22:1-14) 이 여인들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③ 신랑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1절)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똑 같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신랑이 오자 순식간에 유사점들은 사라지고 본질적인 차이점이 들어 납니다. 다섯 처녀는 등잔에 기름이 있었고 다섯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8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장면입니까? 여러분! 아주 처음부터 없었다면 별로 안타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더 기다리려면 기름이 있어야 하는데 떨어져 가는 것을 눈으로 보아야 하는 처녀들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교통사고를 한번 낸 적이 있는데 대전에 가서 사거리 신호가 파란색이 되어서 악세레더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앞에 가던 코란도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거리에서 신호가 바뀌면 계속 달리거든요. 그래서 저도 빨리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밀리고 밀려서 계속 앞으로 차가 가는 것입니다. 그 때 차가 서야 하는데 안서는 겁니다. 꽉 브레이크를 밟고 눈으로 보면서 앞차를 쾅 받는데 너무 너무 안타깝더라구요. 바로 이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모르면 모르는데 알고도 당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 중에 제일 경계해야 하는 말은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기름이 떨어져 가는 이 처녀들에게 예수 믿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 것 갔습니까?
분명히 예수 믿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비록 떨어져간 기름이지만 그것도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 중에 있었습니다. 초저녁까지는 당연히 열 처녀 모두 신랑을 맞이할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기름이 무엇이냐?’ 라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기름이 중요합니다. 성령은 종종 기름으로 상징되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렇게 해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성령이 기름이라면 성령이 떨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고 또 성령을 사러가야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름은 내적인 표현입니다.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전은 이 부분에 대해서 설교하기를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혼인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안에 큰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 이 변화는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성취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본질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준비가 안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등잔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등잔은 하늘의 기름으로 채워져 계속해서 밝게 타올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아직 준비가 덜된 사람입니다. 어두움의 자녀들은 빛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어두움으로부터 하나님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혼인자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신랑을 준비하는데 넉넉한 기름을 가지고 준비해야 합니다. 신랑이 언제와도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도 기름이 떨어져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속히 안 오시기 때문에 초저녁에 금방 올 줄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이 지쳐갑니다. 기름이 떨어져 갑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IT시대에 맞게 빨리빨리 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요즘 성장하는데는 참 좋은 성격입니다. 그러나 쉽게 지칠 수 있다는 데는 맹점입니다. 교회도 다녔던 사람이 많습니다. 나가서 전도해 보면 교회에 한번도 안 다녀 본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입니다. 교회에 가서 쉽게 축복 좀 받아보려고 했는데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상 형편의 때를 맞추어 기도회도 해야되는 것도 있지만 입시철만 되어서 자녀 좋은 학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 보면 저는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자녀가 좋은 학교 들어가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 더 많습니다. 건강해야 되구요. 하나님이 늘 지켜 주셔야 됩니다. 항상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잘못 이해하면 안됩니다. 교회는 나의 복을 빌기 위한 무속 적인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비유가 가르치는 것은
첫째, 우리 안에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8-9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그랬습니다. 기름이 준비되었던 여자들이 나누어 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이 여인들이 인정이 없는 그런 여인은 아닙니다. 문제는 나누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기름을 준비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랑을 맞이해야 할 그 날에는 너무 늦습니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셋째, 신랑(주님)은 예고 없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고 없이 오시기 때문에 주님의 결론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13절)

제 장모님을 모시고 우리 집에 계신데 심심하시니까 경로당에 가시라고 했더니 경로당에 가기 싫으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제 아는 사람이 다 죽어서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장모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함께 공부했던 분들 중에서 여러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제 핸드폰 번호에서 더 이상 전화 받을 사람이 없어 제가 지우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나도 이 세상 사람에게 그렇게 되겠지요.
여러분!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그 때에 주님을 등불 들고 맞이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참고 –
1. 그리스도의 신부를 단장시키는 영적 미장원이다 (고후 11: 2-3).
가) 목욕시킴 (행 2:38).
나) 향기로 단장함 (계 5:8).
다) 세마포를 입어야 함 (계 19:7-8).
라) 단정한 성품으로 단정함 (벧전 3:4).

2. 교회는 믿음의 가정이다 (엡 5:23-24).
가) 아내는 가장에게 순종함 (24).
나) 신랑은 신부를 사랑함 (25).
다) 정결함으로 (27).

3. 그리스도의 군병을 무장시키는 훈련장이다 (엡 6:14-17).
가) 머리에 구원의 투구.
나) 가슴에 의의 호심경.
다) 허리에 진리의 띠.
라) 발에는 복음의 신.
마) 왼손에 믿음의 방패.
바) 오른손에 성령의 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9. 비유(9) –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본문 : 눅 18:9-14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의 비유는 탕자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함께 가장 유명한 비유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간혹 잘못 전달되어지곤 합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두 남자의 기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의 비유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핵심은 구원에 관한 비유입니다. 두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는 개인의 선행을 통해서 나아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통해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결론은 오직 두 번째의 방법뿐입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주십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람의 선행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임을 말해줍니다.

극단적인 대조
10절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몇 번의 일을 통해서 바리새인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게 되어있지만 당시 바리새인은 그렇게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 사람들은 바리새인에 대해서 높이 평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제일 높은 평가를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수효는 많지 않습니다. 한 시대에 약 3,000명 정도입니다. 특별한 계급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요 자랑거리입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높은 계급과 사회적으로는 랍비(선생)의 반열에 있었으며 율법적으로는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지키는데 주력하는 집단이었습니다. 니고데모도 바리세인이었고 바울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리를 가리켜 “악하며 돈만 밝히고 사람을 속이는 사람이며 로마의 앞잡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리는 가능한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로마가 고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국가도 팔아먹는 파렴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리를 언급한 것은 우리로 보면 마치 독립군과 친일파를 비교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바리새인의 태도가 11-12절에 나옵니다.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행동합니다. 아주 당당하게 따로 서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가면 장로님석이 따로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교회에 처음에 왔는데 잘 몰라서 교회 앞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랬더니 안내원이 오더니 “이곳은 장로님 석인데요” 그래서 다른 자리로 옮겼습니다. 그랬더니 또 오더니 “이곳은 성가대 석입니다.”그리고 또 옮겼더니 그곳도 지정된 자리라고 하여 교회를 그냥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정된 자리가 있는 것이 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스펄전의 한 제자가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관해 스펄전 앞에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설교를 극화시켜서 갑옷을 입고서 성령의 검을 휘두르며 외쳤습니다. “이제 마귀는 어디 있습니까?” 이에 스펄전은 “마귀는 그 갑옷 안에 있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바리새인들이 거짓말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말 다른 사람들의 것을 물래 훔치거나 간음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들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대로 일주일에 두 번씩은 금식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 평가에 동의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장 뛰어난 인물이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입니다. 이들과 사람들은 친분을 맺고 싶어하고 자기들의 집에 초대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들 중에 한 사람만 알고 있어도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에게 대법관이나 판사를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들을 위한 기도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세리가 볼 때 이들은 멀리 서서(13절) 기도하는 것입니다. 감히 세리는 이들 옆에도 갈 수가 없는 그런 자리입니다. 뿐만 아니라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왜 그가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했을까요? 그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슴을 칠 일을 많이 저질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심한 대조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신분으로 볼 때는 귀족 대 천민이요, 행동으로 볼 때는 자랑스러움 대 수치스러움이요, 자기 평가로 볼 때 자부심 대 위축감입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판단은 같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이 정 반대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라고 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결론을 맺고 계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러한 결론을 맺고 계신 것일까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너무나 상반되게 나왔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 대해서 좀더 깊이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두 번째 사람은 세리입니다. 누가 보아도 표면적으로 쉽게 결론을 낼 것입니다. 우리보고 판사와 도적을 비교하라면 결론은 다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표면적인 것만 보고있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그렇게 보는 것이 옳다는 결론에 도달한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의 판단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십일조를 제대로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말만 십일조이지 자신들이 드린 제물을 자기들이 관리하며 사용목적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밝히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속임수인지도 모릅니다. 간음의 문제도 속임수를 썼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세리도 세리라고 다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어쩔 수 없이 세리노릇을 하고 있지만 병이든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사람도 있고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좋은 일을 하는 세리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비유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또한 세리를 무조건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해서도 안됩니다. 분명히 세리는 유대민족 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분명히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세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들 중에 누가 스스로 의로우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세리의 기도는 바리새인과 달랐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 이 기도는 성경에서 제일 짧은 기도중의 하나입니다. 한글로는 딱 다섯 마디, 헬라어로는 여섯 마디입니다. “@O qeov”, iJlavsqhtiv moi tw’/ aJmartwlw’/.”(호 데오스 헬라스데티 모이 호 하말톨로오)

언어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남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품사 : 동사, 명사
남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문장의 형식 : 1형식 (주어 + 동사)
예문 : 나 배고파
여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품사 : 부사, 형용사, 부사구, 형용사구, 부사절, 형용사절..
여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문장의 형식 4형식, 5형식 (주어 + 동사 + 목적어 + 목적어 + 또 목적어 + 많은 목적어) 그리고 (주어 + 동사 + 목적어 + 목적 보어 + 또 보어 + 무지하게 많은 보어. 보어.. 보어.. 그들은 하도 보어를 많이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주어와 동사를 잊어버린다. 이걸 보통 치매라고 부른다.)
예문 : 밥 달라면 항상 밥이 나오는 줄 알아요? 내가 무슨 식당이에요? 주문한 대로 나오게.. 슈퍼마켓인 줄 알아요? 아까 밥을 하기 시작한 것을 못 보았어요? 아직 한 시간 밖에 안 되었잖아요? 그까짓 밥 몇 끼 굶으면 죽을 것처럼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
(여성들은 주로 의문문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답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서 하는 질문들은 아니다. 그 질문들에 대해서 친절하게 꼬박 꼬박 대답하다가는 정말 맞아죽는 수가 있다.)
조언 :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부디 조심할 것.
예를 들어서 상대방이 화가 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말해 봐’ 했을 때 말을 잘 못 알아들은 줄 알고 친절하게 다시 한번 말하다가는 어디가 부서지는 수가 있다.
그렇다고 ‘전화를 왜 했어요?’ 했다고 다음에는 전화를 안 한다면 그 때는 정말 죽는다. 아… 남자가 여성에게서 살아남은 길은 무지 험난한 길이다.

이중에 핵심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모이 호 하말톨로오)입니다. 어떤 영어성경에서는 “a sinner”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the sinner”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 moi tw’/ (나와 그)라는 말이 함께 나오기 때문에 이것을 함께 번역하면 문법이 이상해집니다. 그러나 원문은 이러한 문제를 개의치 않고 사용합니다. 이 뜻은 나도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나에게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그”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죄인이며 나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어설픈 의를 나타내 가지고는 하나님께 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의를 하나님께 나타내어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완전한 죄인임을 고백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의인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회개함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최초의 인간이자 죄인이었던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후에 자신들의 생각을 어설프게 하나님께 변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그들은 주님의 낯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 3:8). 성경에서 의인이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딱 한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직접 칭찬하십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0:4, 42:6)
이사야 에게서도 비슷한 장면을 보게됩니다. 그는 환상 중에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모습을 보았고 천사들의 찬양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자랑이나 자부심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오히려 이렇게 외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이사야에게 천사가 제단 숯불을 가져와 그의 입술에 대자 비로소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있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주변의 세계를 보고 불 경건으로 인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박국은 망대에 들어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나타나시자 하박국은 아무말도 못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 3:16).
사도 요한은 계시를 받은 밧모섬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일곱 촛대 가운데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발 아래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었고”(계 1:17)라고 말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장면입니다.

시은좌(施恩座)의 은혜를 통해서만
세리의 기도 여섯 마디 중에 “@O qeov”, iJlavsqhtiv moi tw’/ aJmartwlw’/.”(호 데오스 헬라스데티 모이 호 하말톨로오) 첫 번째 ‘하나님’과 마지막 단어인 ‘죄인이로소이다’ 사이에 “불쌍히 여기옵소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접근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옵소서”라고 번역된 헬라어 ‘헬라스데티’는 언약궤 위에 놓은 “시은좌”를 가리키는 동사형입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시은좌를 이리로 돌리소서”입니다. 이 뜻은 “나를 속죄제로서 시은좌 위에서 흘려진 피를 통해서 나아오는 자로 여기소서”입니다.
파스칼은 “나는 의인, 위인, 성자의 세 단어를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죄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흘림으로써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시온좌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