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송구영신

2006년 송구영신 / 엡 4:22-24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어느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그 근처에 사는 교인댁 한 곳이 생각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 댁을 심방하고 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예고도 없이 목사님의 방문을 받으니 심방 받는 집에서는 반갑게 목사님을 맞이했습니다. 목사님은 자리에 앉자 말했습니다. “생각나는 구절이 있어서 한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성경책을 좀 가져오십시오” 그때에 그 교인은 생각했습니다. ‘이 기회에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잘 믿는지 목사님께 보여드려야지’ 그래서 아이를 불러 말했습니다. “얘, 너 안방에 가서 엄마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책을 가져다주겠니?” 목사님 들으시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꼬마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들고 나오는 책은 성경이 아니라 백화점 물품 구입 목록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 여러분, 잘 믿는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까? 여러분 가정의 어린아이에게 물어보십시오. 아이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추어졌는가를 보십시오. 그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이야기하십시오.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옛 사람은 죄로인해 하나님의 향상을 잃어버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생각을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현재 시상으로 점점더 악화되어가는 부패의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롭게 되어 헬라어 ‘아나네우스다이’ 는 현재 부정사 수동태로 성령에 의해서 날마다 계속적으로 새워져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어느 어머니가 딸 셋을 데리고 혼자 살았습니다. 거기에다 고아원에서 양녀 하나를 더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이 애를 동생으로 알고 너희들이 같이 사랑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아이가 낯선 곳에 와서 계속 웁니다. 언니들이 이 고아원에서 데려온 아이를 위해서 인형도 갖다 주고, 먹을 것도 갖다 주고, 옷도 갖다 입히고 하며 별 방법을 다 썼지만 이 어린 아이는 계속 웁니다. 사흘이나 우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제일 큰 언니되는 아이가 너무 답답해서 “너 왜 우냐” 하면서 같이 붙들고 울었습니다. 한참 울다가 둘이 쓰러져 잤는데 그 다음부터는 안 울더랍니다. 문제는 나와 함께 울어 줄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을 따라 … 지으심을 받은” 헬라어 ‘톤 카타 데온 크티스덴타’ 문자적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창조된’이란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제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헬라어 ‘엔 디카이오쉬네 카이 호시오테티 테스 알레데이아스’ 문자적으로는 ‘진리로부터 나온 의와 거룩함 안에서’를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여러 해 동안 평양감옥에 있을 때에 한 감방에서 주영하라고 하는 공산주의자와 같이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함께 지내도록 만들어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기철, 주영하–공교롭게도 같는 주씨입니다. 그래서인지 서로 툭 터놓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게됩니다. 그런데 주영하라는 사람은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철저한 공산주의자요,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상당한 고관으로 지내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주영하가 목사님에게 말합니다.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에 형님을 만났더라면 예수쟁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주기철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던가봅니다. 이에 주기철 목사님도 “내가 예수 믿기 전에 당신을 만났더라면 나도 틀림없이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주영하가 끝으로 중요한 말을 합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이 땅에 평등을 이루고, 이 땅에 자유를 이루고, 모든 사람들이 잘살게 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이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아주 희색이 만면하여 하나님 앞에 간다면서 죽더군요. 그 모습을 저는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부러울 뿐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벧전 4:7-10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헤르만 크르테스라고 하는 유명한 장군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스페인 사람입니다. 이 장군이 멕시코를 점령하러 와서 바야흐로 싸움을 걸려고 하는데 보아하니 멕시코 군인은 많고 자기네 군대는 적고, 정세가 불리해요. 그러자 군인들은 사기가 떨어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들 하는 것입니다. 장군은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밤에 그는 충복 몇 사람을 불러서 자기네가 타고 온 배들을 모조리 불질러버리라고 명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장군은 외쳤습니다. “자, 우리는 이제 정복을 하거나 죽거나, 둘 중에 하나다. 돌아가는 길은 없다!” 그래놓고 진군을 명했습니다. 결국 전쟁에 이겼습니다. 중국 속담에 ‘개가 급하면 담장을 넘는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생명을 걸고 하는 일에는 엄청난 위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올해는 이제 하루도 아닌 12시간정도만 남았습니다.
올 한해를 어떻게 살아왔나 평가하고 결산해야 할 때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마지막 때에 가서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꼭 한해가 끝날 때쯤에 가서야 삶을 돌아보고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질 때가 되서야 그가 나에게 얼마나 귀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가서야 인생에서 정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항상 마지막에 가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명상록에서 ‘항상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것이 또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입니다.
본문에 보면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고 긴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이 세상이 끝나게 되는 날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가 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2천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세상이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알고 살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재림의 때를 사도들에게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했습니다. 다만 언제 그 날이 올지 모르니까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긴장을 풀지 않고 하나님나라를 대망하며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종말론적인 삶’ 이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성도들이 그토록 성령 충만한 삶을 살수 있었던 비결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십니까?
바로 이러한 종말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천년 전에 살았던 베드로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했다면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가까운 것입니까?
설령 우리 세대에 우주적인 종말이 오지 않는다 해도 우리에게는 개인적인 종말이 있습니다.
길어야 몇 십 년 안에 우리 삶이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우리 삶을 결산할 날이 옵니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 일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때와 기한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종말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해야하겠습니까?
한해의 마지막이 다 가고있는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을 통해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기도하라.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만나는 사람들마다 요즘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루가 가고 어떻게 일주일이 가는지 정말 정신 없이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절대로 정신 없이 쫓기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성경에 보면 부지런 한 것과 조급한 것은 반대입니다.
잠 21: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앞서서 인도하시지만 마귀는 뒤에서 우리를 몰아갑니다. 아무리 많은 일들이 있어도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살면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인도를 놓치니까 마음이 불안해지고 조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든 맥도날드는 ‘따르는 삶’이 있고 ‘쫓기는 삶’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따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쫓기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따르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열심히 살면서도 조급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사람이 기도하면 부지런해집니다. 기도하면 분별력이 생깁니다. 기도하면 목표가 생기고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사니까 마음에 평안이 생깁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이 세상의 압력을 이겨낼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부지런해집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조급해집니다. 평소에 기도생활을 잘 하다가도 무슨 일만 생기면 기도생활이 흐트러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안에 일이 생겨서, 너무 마음이 복잡해서, 너무 바쁘고 할 일이 많아져서 기도를 못한다고 합니다. 아직 기도가 삶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도가 언제 더 필요합니까? 큰 일이 터질 때 기도가 필요합니다.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할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사울 형의 그리스도인이 있고 다윗 형의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건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항상 조급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인간적인 생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합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하셨습니까? 다윗을 향하여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여러분은 다윗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이야말로 정말 기도할 때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기도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새해를 잘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Ⅱ. 사랑하라.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열심히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열심히 사랑할 수 있습니까?

A.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
진정한 사랑은 허물이 있을지라도 그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의 단점이나 허물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교회에 마마를 앓아서 얼굴이 심하게 얽은 여자와 결혼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금슬이 좋은지 잉꼬부부로 소문이 났습니다. 사람들이 그 집사님에게 ‘결혼을 결정할 때 부인의 얼굴이 얽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사랑스럽다 보니 속속 들어간 곰보자국에 복이 소복소복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단점이 있고 부족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있으면 단점 때문에 오히려 더 마음이 애틋해지고 감싸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자꾸만 허물이 눈에 보이고 거슬리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허물이 잘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기만 하면 괜찮은데 그것을 꼭 들추어냅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본인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만나도 어떤 모임에 데려다 놔도 거기서 허물을 찾아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다 단순하게 기뻐하며 축복을 누리는데도 자신은 축복이 안됩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이것도 병입니다. 어떻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확실한 치료약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대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들을 보면, 자기 안에서 모순을 느끼고 스스로 죄책감과 정죄감이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죄인중의 괴수니라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넘쳤나니’ 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지를 깨닫고 이런 죄인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다면 절대로 남의 허물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온전한 사람들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상처받은 사람들, 허물 많고 부족한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허물을 덮어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B.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초대교회는 교회 건물이 따로 없고 가정집에서 소그룹으로 모였습니다. 그러니까 온가족이 믿는 가정들은 대개 자기 집을 개방해야 했습니다. 수시로 성도들이 와서 모임을 갖고 식사를 합니다. 또 교회안의 과부들, 고아들처럼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섬겨야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어느 곳에 가든 그리스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가정이라면 사역자들이 언제 오든 방을 내주고 대접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대접하고 섬겨야 할 일들이 많겠습니까?
여러분, 열심히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렇게 대접을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대접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주일마다 식사 준비하는 것을 비롯해서 사람들을 가정으로 초청하여 대접하고, 사역자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어려운 성도들을 섬기는 일들이 다 대접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접을 하되 원망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원망 없어야 사랑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 성도들에 대한 사랑이 있을 때는 원망이 안 생깁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지고 계산이 앞서니까 원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들은 대접을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접을 열심히 하면서도 사랑으로 하기 때문에 원망 없이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대개 세 가지를 후회하게 된다고 합니다.
첫째는 좀더 참을 수 있었는데…,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좀 더 베풀 수 있었는데…, 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좀 더 즐겁게 살수 있었는데…,하는 것입니다.
결국 더 용납하지 못하고 베풀지 못한 것이 가장 큰 후회로 남게 될 것입니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데 아직도 남의 허물을 들추고 비판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종말이 가까웠는데 내 것을 주장하고 베푸는데 인색하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이제 한해가 다 가고 있는데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용납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오늘을 넘기기 전에 용서하고 용납합시다.

Ⅲ.봉사하라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은사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곧 이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내 몸도, 내가 낳은 자식도, 나의 아내도 남편도 다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시간도 물질도 내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한해를 보내면서 내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일년동안 맡겨주신 것들을 얼마나 잘 관리해왔는지 평가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나라의 부흥을 위해 사용하라고 공적자금을 맡겨주셨는데 내가 내 마음대로 유용하지는 않았는지 계산해보아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 삶을 마치는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을 어떻게 관리해왔는지 계산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고 날 마나 결산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청지기로서 살고 있습니까? 한번 점검해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라면 가장 기본적으로 관리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시간과 물질입니다.
우리는 시간의 청지기입니다. 그래서‘일 주간의 모든 날들이 주님의 날들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의미로 일주일 중 하루를 떼어 주님께 드립니다. 주의 날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하루가 하나님의 날임을 인정하는 표로 경건의 시간을 구별하여 드립니다. 만일 주일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바쁘다면, 경건의 시간도 가질 수 없이 바쁘다면, 틀림없이 주님과 관계없이 바쁜 것입니다.
또 우리는 물질의 청지기입니다. 우리의 모든 물질이 주님의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벌었지만 내게 일할 수 있는 몸을 주시고 힘과 재능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생명을 붙들고 계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물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는 표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의 날을 지키는 것과 십일조생활은 청지기로서의 기본입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이 되어야 다른 영역에서도 청지기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청지기로서의 삶을 점검해보시고 믿음의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찬송가 작업을 하다가 보니까 찬송을 작사한 사람도 참 여러 종류입니디다. 저는 수도원 같은데서 깊은 묵상을 통해서만 찬송가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분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도 있습니다.
341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게오르그 노이마르크(1621 ~ 1681). 독일 태생.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어렵게 마련한 등록금을 가지고 가던 중 노상에서 강도를 만나 완전히 털리고 빈털털이 신세로 몇 년 동안 유리 걸식하며 지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 궁중 시인, 사서, 문서국 장관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후에 또 한 차례 실명하는 불운을 겪었으나 결코 하나님을 원망치 않고 신앙 안에서 주옥같은 찬송시를 많이 남겼다.
359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찰스 스페드릭 웨이글(1871 ~ 1966). 미국 인디아나 주 태생의 목사. 원래 음악 아카데미에서 음악을 전공했으나 전도자로서의 소명을 깨닫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순회 전도자로서 복음 전파 사역에 헌신하였다. 한편 그는 순회 전도 사역 때문에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는데, 본 찬송시는 바로 그 당시 지어진 것이다.

일본 사람이 쓴 소설 중에 <아끼루>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산다”는 뜻입니다. 노벨상 수상 작품 후보로 들어갔다가 상을 받지 못했지만 중요한 작품입니다. 그 소설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25년 동안이나 시청에 근무하던 어떤 사람, 아주 몸이 건강하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위암입니다. 의사는 말하기를 6개월 산다고 선언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고민을 합니다. 6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니까 모든 것이 귀찮아집니다. 물론 직장에도 가고 싶지 않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셔도 재미없고, 누구를 만나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는 아주 절망하고 삽니다.
그러다가 어떤 꽃 파는 불쌍한 어린애하고 앉아서 얘기를 합니다. 말동무가 됩니다. “나는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그는 슬픈 얘기를 합니다. 이 철없는 어린애의 대답이 “그래도 6개월은 있잖아요” 합니다. 아, 그 말이 맞단 말입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립니다. “6개월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6개월은 있다” 이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새로운 용기를 얻어 가지고 6개월 동안 “내가 뭘 할까” 하며 그는 가능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귀중한 일을 하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의 삶이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면 남은 6개월 동안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대개 이런 질문을 하면 사람들은 ‘소홀했던 관계를 돌아보겠다’ ‘등지고 있는 사람과 화해하겠다’ ‘꼭 해야하는데 하지 못했던 일을 하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청지기로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봉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만 마지막 날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이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끝나게 될 때 후회 없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유에 뉘인 예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6. 구유에 뉘인 예수) / 눅 2:1-7

“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크리스마스 때 미국 시카고의 어느 마을 아이들은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선물을 받으려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낡은 옷을 입고 있었고 양말을 신은 아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앞에 서 있던 열 살 난 남자아이가 자기 뒤에 서 있는 여자아이를 보니 신발도 신지 않은 발이 더 추워 보였습니다. 남자아이는 모자를 벗어서 여자아이의 발 앞에 던져 주며 “자, 그 위에 발을 올려 놔. 그러면 좀 따뜻 할거야.” 하고 말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크리스마스 날 선물을 기다리는 이 여자아이에게 이 한 마디 말은 더없이 아름답고 따뜻한 선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1941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는 총독부의 지시로 인해 전통으로 내려오던 크리스마스 장식과 카드 교환을 금지했습니다. 기숙사 학생들은 전에 없이 썰렁한 성탄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방학을 하루 앞둔 날이었습니다. 기숙사 사감 김일순 선생에게 한 학생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좀 올라오시래요.” 김일순 선생이 미관 2층 방으로 들어가 보니 그 곳에는 몇몇 학생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김옥길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방문이 닫힌 것을 다시 확인하더니 커튼을 누군가가 젖혔습니다. 그러자 눈앞에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여러 가지 카드와 크리스마스 장식품이었습니다. 할말을 잊은 사감 선생은 그냥 학생들만 쳐다보는데 모두들 숙연한 표정 가운데서 유독 김옥길만 웃고 있었습니다. 김옥길은 일제가 씨를 없애고자 무궁화나무를 교정에서 다 뽑아버리자 아무도 모르게 그 중 한 가지를 꺾어 기숙사 자기 방에서 키운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편안한 가운데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평안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성탄절이 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탄절기가 되면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성탄절은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는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기할 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차이가 있는데, 마태복음은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고(마 2:1-12)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난가실 사실(마 2:13-15)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만유의 주요 왕으로 오셨으되 자기 백성으로부터 배척 당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누가복음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를(1-7절), 천사들의 찬송(8-14절), 목자들의 경배(15-20절)를 다룹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땅위의 왕으로 오셨지만 세상 왕들에 의해서는 경배 받지 못하시고 배척 당하셨지만 구유에 나신 예수를 영접한 것은 세상 왕이 아니라 목자들이었습니다.

본문 “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에 나타난 말씀으로 우리는 예수님 탄생 때 있었던 시대적인 상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인데 이 사람은 B.C. 27-A.D. 14년까지 로마의 황제로 있었던 사람입니다. B.C. 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라는 칭호를 부여받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의 이름을 따서 가이우스 율리우스 시이저(Gaius Julius Caesar)로 이름을 바꿉니다.
로마인 입장에서만 보면 이 황제는 정치를 잘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한 정치 및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점령지에 대해서는 지방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여 점령지 문화와 풍습을 그대로 보존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건축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으며 그 자신이 건축가로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황제로 있을 때 평화가 지속되어서 ‘자비로운 정치가’, ‘로마의 대부’로 불려졌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최고의 승원장(Pontifex Maximus) 또는 대제사장(Highest Priest)칭호를 받아들여 자신이 종교의 최고 자리에 앉게되었습니다. 그리고 피살된 외증조부 ‘율리우스 시이저’를 신격화 하여 그를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신으로 받들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로서 그는 하나님께 범죄 하는 황제가 된 것입니다.
그는 뛰어난 행정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속한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실시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호적’이라는 단어는 ‘아포그라포’로 ‘등록하다, 기록하다’입니다. 이 문서는 세금 징수를 위해 만들어진 기록부로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 가서 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마리의 남편 요셉의 고향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이곳을 관할하고 있었던 사람은 B.C. 12년에 집정관이 된 구레뇨라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마리아를 데리고 고향을 찾은 요셉은 이 동네가 하나님이 예언해 주신 다윗의 동네(삼상 16:1)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베들레헴은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메시야가 오실 동네로 예언된 곳입니다(미 5:2).

우여곡절 속에 전쟁터나 다름없는 베들레헴에 도착한 요셉과 마리아는 동분서주했지만 산모가 거할 방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이 가까워 오는데 길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들레헴에는 이미 로마 관원들과 군인들이 장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미 다 잡아 가지고 숙소로 활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날 집이 없었습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예수는 태어나고, 하는 수 없이 밖이 훤히 보이는 그런 장소에 말이 먹이를 먹는 나무통에 뉘였습니다.

예수가족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부자였다면 어린 예수가 이토록 가난하게 태어날리 없습니다. 돈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방을 구해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목수일로 지내는 사람이었고 마리아는 “이 계집종에게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마 1:48)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훗날 산상복음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게 태어나고 가난하게 자란 예수님은 가난한 처지의 사람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것도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이나 로마의 관원들이 아니었습니다. 목동들이 양을 치다말고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나의 방에 머물고자 하십니다.
나에게 그리스도를 위해 비워줄 방이 있는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실 지 모릅니다.
그렇게 어여뿐 아기라면, 그분이 구세주인데 얼마든지 우리 집에, 나의 마음의 방에 머물게 하겠다고 장담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말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13절까지 열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그리고 14-30절까지 주인이 떠나면서 종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5장의 결론이 나옵니다.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나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42-43절 이렇게 말합니다.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는 것, 아기 예수는 안 계십니다. 그러나 주리고 굶주린 사람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분들이 남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 중에서도 있습니다. 여러분 굳은 일 해야하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 지는 것을 너무 두려워 마세요.

어떤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6가지 감옥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감옥은, 자기 도취의 감옥입니다. 공주병, 왕자병에 걸리면 정말 못 말립니다.
둘째 감옥은 비판의 감옥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셋째 감옥은 절망의 감옥입니다.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평하며 절망합니다.
넷째 감옥은 과거 지향의 감옥입니다. 옛날이 좋았다고 하면서 현재를 낭비합니다.
다섯째 감옥은 선망의 감옥입니다. 내 떡의 소중함은 모르고 남의 떡만 크게 봅니다.
여섯째 감옥은 질투의 감옥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괜히 배가 아프고 자꾸 헐뜯고 싶어집니다.
사람은 이 6가지 감옥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러한 감옥에서 탈출할 수가 있습니다.

성탄절을 앞둔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어둠이 내리는 거리에는 추위에 몸을 웅크린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습니다. 캐럴이 울리는 화려한 상점 앞에 한 어린아이가 남루한 옷에 다 떨어진 신을 신고 상점 안을 황홀한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한참 후 상점 안으로 들어가려던 어느 여인이 아이를 보고 손을 잡고 상점 안으로 들어가 새 신발과 따뜻한 옷을 사주었습니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렴.” 여인의 말에 아이는 여인을 바라보며 가만히 말했습니다. “아주머니는 하나님이세요?” 아이의 말에 여인은 미소를 짓고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냥 하나님의 가족 중 한 사람이란다.” 아이는 말했습니다. “아주머니가 하나님의 가족인 줄 저는 벌써 알았어요.”
나를 스스로 죄어오는 감옥에서 벗어나 구유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삶에 관한 비유(2) 포기하지 않는 기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5. 비유(15) – 삶에 관한 비유(2) 포기하지 않는 기도) /
본문 : 눅 11:5-13, 18:1-8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8:1-8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857-1859년에 미국에서 일어난 ‘기도의 부흥’은 미국 역사에서 그 어떤 영적 각성 운동보다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당시 백만 명 가량이 주님께 회개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예레미야 랜피에르라는 사업가가 월 스트리트에서 400미터 정도 떨어진 어느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 수요일에 정오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첫 주에는 6명, 다음 주에는 20명, 그 다음 주에는 40명이 참석했습니다. 그곳에는 어떤 광신적인 행위도 신경증 적인 모습도 없었으며,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기도회를 시작한지 4주가 흘렀을 때, 미국에 경제 대공황(1857년)이 일어났습니다. 한 달 사이에 1,400개가 넘는 은행이 파산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뜨겁게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랜피에르의 교회에서 시작된 기도회는 보스턴, 뉴 헤이븐, 필라델피아, 워싱턴, 그리고 남부까지 확산되었습니다.
이듬해 봄에는 2천 명의 시카고 시민이 매일 정오에 메트로폴리탄 극장에 모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시카고에서 갓 이사 온 21세 청년이 이 모임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라는 소명을 느꼈는데, 그가 바로 드와이트 무디였습니다.
오늘날의 미국인들이나 한국인들에게 설교자나 책이나 성경 번역이나 깔끔한 교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교회가 성장하지 못합니까? 우리에게 정말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을 여시고 그분의 능력을 보여 주실 때까지 그분께 부르짖는 열정입니다.

오늘 두 비유에서 예수님도 끈질긴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제목이 ‘포기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믿는 우리에게 포기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 번 째 비유는 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 밤늦게 친구가 찾아와 먹을 것을 달라고 말합니다. 친구는 주고 싶었지만 여행을 하고 막 돌아온 터라 피곤하여 누웠습니다.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눅 11:5-6). 그러나 계속해서 음식을 좀 달라고 간청합니다. 친구가 생각하기를 이러다가는 밤잠을 다 자겠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귀찮아서 떡을 주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기도의 대헌장(Magna Charta)처럼 여겨지는 말씀이 나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9-10절)

두 번째 비유는 불의한 재판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의를 행하는 것하고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이 재판관은 뇌물을 잘 먹는 그런 재판관이었을 것입니다. 올바른 재판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돈만 아는 그런 재판관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정상적인 재판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을에 한 불의한 일을 당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자신의 일을 탄원해줄 남편이 없었으므로 직접 재판관을 찾아와 계속 부르짖었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눅 18:2).
재판관은 오랫동안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니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4-5절)하고 그녀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주님께서 내리시는 결론은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너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7-8절)

모든 비유가 그렇듯이 오늘 본문의 비유 역시 핵심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야기로만 보면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비유 속에 나오는 사람은 참 염치없는 사람 같습니다. “어떻게 여행에서 막 돌아온 친구 집에 찾아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까? 저 같으면 하나님 그렇게 염치없는 짓은 못합니다. 그냥 굶고 말지요?”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분은 대개 내성적인 성격으로 온화하신 분입니다. 저처럼 말입니다. “주님이 열심히 기도하라는 뜻을 이해가 되지만 이야기는 너무 심합니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비유만을 생각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잠자리에 누워 일어나기 싫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녀들의 궁핍을 보고도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왕상 18: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엘리야가 우상에게 하는 말입니다. 우상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시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은 늘 깨어 계시며 우리를 지키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도 아니십니다. 솔로몬은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대하 6:30)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신 이유는 유사함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조됨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첫 번째 나오는 비유에서 그는 악하다고 나옵니다(눅 11:13).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요구하는 자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그가 선하기 때문에, 또는 그가 이해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간청으로 견딜 수 없게되어 그렇게 한 것뿐입니다. 하물며 악하지도 아니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듣기 싫어하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얼마나 잘 들으시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어떻게 강청해야 합니까?
9절이 가르쳐 줍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8장을 보면 나병 환자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저를 깨끗케 해 주십시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구한 대로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10:46-52을 보면 맹인 바디메오가 눈뜬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을 못 보는 바디메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길거리로 나왔습니다. 소리질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에게 주님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그는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날 그는 구한 대로 눈을 뜨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구한 사람이 받습니다. 구하면 주십니다. 그뿐입니까? 찾으면 반드시 찾습니다. 누가복음 15:8-10을 보면 은전을 잃어버린 여자가 있었습니다. 등불을 켜고 집안을 샅샅이 쓸며 찾았습니다. 결국 잃어버린 은전을 찾았습니다.

닫힌 문을 여는 방법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열쇠로 여는 것이고, 하나는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문밖에 서 있어도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안에서 닫힌 문을 열려면 열어줄 때까지 두드려야 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것은 반복해서, 힘을 다해, 주실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결론은 13절입니다.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기도의 동기를 주시고 응답에 대한 확신을 주십니다. 기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한반도에는 세 차례에 걸쳐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의 백만인구령운동입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후 10년 사이에 놀라운 부흥운동의 영적 파고가 세 차례나 계속된 것은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일입니다.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조지 휘필드(George Whitefield)로 대변되는 제1차대각성운동도 1734-36년, 1740년-1742년 두 차례에 걸쳐 부흥운동의 파장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이 놀라운 부흥운동을 이 땅에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번의 부흥운동의 파장 중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은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1907년 1월 14일과 15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도 겨울남자사경회’ 기간 중에 일어났습니다. 그 부흥의 현장 한 가운데 서 있던 조지 매큔(George McCune)은 이 때 임한 성령의 역사가 웨일즈와 인도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 어떤 성령의 역사보다도 더 강력한 놀라운 성령의 현시였다는 것입니다. 장로교인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이 부흥의 불길은 곧 교파를 초월 평양 남산현감리교회를 비롯한 평양전역으로, 그리도 거기서 다시 한반도 전역으로 마치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그 결과 1907년 1월과 6월 사이 한반도 전역에서는 성령의 불길이 훨훨 타올랐습니다. 부흥을 경험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이 놀라운 부흥의 불길을 경험한 노블 선교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코리아 미션 필드(Korea Mission Field)에 이것은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라고 증언했습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원산지역 주재 선교사들이 모여 가진 기도회 동안에 발흥한 원산부흥운동은 평양대부흥운동의 영적각성의 모체였습니다. 초기 부흥운동의 모든 자료들은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산부흥운동이 그 시작입니다. 원산부흥운동이 시작되었던 기도회는 두 명의 무명 여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의화단 사건으로 원산으로 피신해온 여 선교사 화이트(Mary Culler White)와 카나다 장로교 출신 여 선교사 맥컬리(Louise Hoard McCully)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도회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다른 선교사들도 하나 둘씩 기도회에 합류했습니다. 이들은 차제에 공개적으로 기도회를 갖기로 하고 의료 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에게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지 3번의 강의를 부탁했습니다. 부탁을 받은 하디가 강의를 준비하다 말씀과 만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명문 토론토대학, 그것도 그 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입국한 하디는 그 내면에 학력에 대한 교만함,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교만함, 영국시민이라는 백인 우월 주의,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런 마음을 부셔버린 것은 주님의 성령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평양선교사사경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강사는 원산부흥운동의 주역 하디였습니다. 요한 1서를 본문으로 한 하디의 일련의 메시지는 그곳에 참석한 많은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하디는 은혜를 받기 전 얼마나 자신이 교만했는지, 그런 자신에게 어떻게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자신을 변화시켜주셨는지를 진솔하게 회중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날 집회에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 목사 이길함 선교사부터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의 손을 잡고 그 집회에 참석했던 12살의 어린 셔우드 홀(Sherwood Hall)이 참석했습니다. 하디의 메시지는 어린 셔우드 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주었습니다. 본래 서양에 가서 사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하디의 설교를 듣고 자신 역시 부모님들처럼 의료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서 사역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도 하디 선교사가 졸업한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한국에 최초의 결핵 요양원을 설립하여 폐결핵으로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건졌습니다. 한국의 ‘크리스마스 실’도 그가 처음 만든 것입니다.

저는 1970년대 말에 한국교회 기도원이 막 생겨나기 시작할 때 감리교 목사님 부흥 사경회 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 부흥회와 기도원을 다녔습니다. 정말 뜨거운 현장이었습니다. 비가오는 여름산상부흥회 때는 좁은 창문으로 고개만 들이밀고 은혜 받아보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 우리의 부흥은 신학이 잘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설교를 목사님들이 잘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도의 운동이 약하고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앙교회에 기도의 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만이 우리를 부흥케 합니다. 기도만이 우리를 살리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는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전적인 신뢰를 하나님께 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기도’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구절은 284구절입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기도에 관한 구절과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설명하는 여러 단어들 가운데 ‘프로슈코마이’가 있습니다. 이 뜻은 “간청하다. 예배하다”라는 것입니다. 단어 하나 속에 기도의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단순한 간구만이 아닙니다. 예배행위인 것입니다. 기도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예배를 외면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마 21:13)
 

삶에 관한 비유(1) 등불을 비추어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4. 비유(14) – 삶에 관한 비유(1) 등불을 비추어라) / 본문 : 눅 8:16-18, 11:33-36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11: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미국에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기차로 여행을 떠나고 역마차들이 많이 이용되던 때입니다. 이 때에 시골 열차 건널목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온 가족이 탄 마차가 달려오는 기차에 치여, 마차에 타고있던 일가족이 몰살하고 말았습니다. 사건 심문이 일어나고, 그 건널목을 지키면서 기차가 다가올 때 지키는 건널목지기가 소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사건이 발생한 날 밤에 마땅히 그랬어 하듯이 그 자리에 지키고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기차는 그 시간에 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까?” “예”
“당신은 등불을 들고 기차를 맞으러 나갔습니까?” “예”
“그리고 기차가 온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등불을 좌우로 흔들었습니까?” “예, 흔들었습니다.”
이 부분이 핵심이었으나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한 사고로 결론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후 여러 해가 지나 건널목지기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소리를 내면서 “오. 저 불쌍한 사람들” 그러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친구가 그때의 사고 때문에 그러는 것임을 알고 “자네는 아무 잘못도 없었네, 어쩔 수 없었던 일이네!”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세밀하게 조사가 다 이루어지지 않았나. 자네의 혐의는 완전히 벗겨졌네.”라고 했습니다. 건널목지기가 이 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한 가지 묻지 않은 것이 있었다네.” 등불은 켜 있지 않았고, 이 때문에 마차를 탄 가족이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빛의 목적은 비추이기 위함입니다.
오늘 두 비유는 말씀이 전개되는 방식이 것이 거의 같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나오고 다른 하나는 대적자들을 책망하실 때 나옵니다.
첫 번째 비유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8: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두 번째 비유는 11: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빛이 있기는 한데 숨겨졌다는 그 빛은 의미가 없습니다. 빛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등대 만드는 일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 손에 상처가 하나 있는데 등대에 올라가 납땜하다가 딘 흔적입니다. 추운 겨울에 등대 불빛이 꺼져서 빛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리하러 갔습니다. 대개 불이 꺼질 때는 전기가 안 들어오기 때문에 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기 납땜을 해야 하는데 막막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닥불을 피우고 인두를 불 속에 넣었다가 빨같케 달아오르면 이것을 가지고 식기 전에 빨리 등대로 올라가 납땜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바람을 불고 인두는 쉽게 식는데 납이 제 손에 떨어져 보글보글 끓고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잠시 참아야지요. 그 때 생긴 흔적입니다. 등대는 잘 보이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등대의 목적이 비추기 위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빛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요 1:9-10).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우주의 상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의 깊음위에”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원래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생겼습니다(창 1:2).

이 세상은 빛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첫 번째 말씀은 “빛이 있으라”였습니다. 이 빛이 생겼을 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원상태는 물러가고 아름답고 보기에 좋은 질서의 세계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빛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만물의 모태는 바로 빛인 것입니다. 이 생명의 빛을 보시고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 빛이 하나님에게 첫 번째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죄악으로 세상은 영적인 어두움이 빠집니다. 혼란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아담과 화와는 서로에게 미루기만 합니다. 책임을 지려는 태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빛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빛 가운데 아름다움이 있고 생명이 충만하고 기쁨으로 가득 찼던 에덴 동산에 다시 창조이전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엄습해 왔습니다.

이런 영적인 혼란한 세상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요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빛의 역할은 밝혀줍니다. 따뜻하게 합니다. 자라나게 합니다.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인도합니다.
빛의 속성이 있습니다. 빛은 직선으로 비추입니다. 빛은 비추게 되면 반사됩니다. 빛은 아름다움(색깔)습니다. 빛은 정직합니다. 빛은 불변합니다. 빛은 시공을 초월합니다.

이런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게되니 어두움이 들어 나는 것입니다.
눅 8: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빛은 어두움을 들쳐 냅니다. 그대로 감추게 하지 않습니다.

등불은 눈입니다.
눅 11: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지금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눈이 여러분의 등불입니다. 눈이 돈만 바라보면 돈 있는 곳으로 인도합니다. 눈이 산을 바라보면 산으로 갑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주앙” 주님만 바라보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등불은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자신이 빛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빛이 없으면 아무에게도 빛을 줄 수 없습니다.
눅 11: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빛을 숨기는 것은 죄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살릴 수 있으면서 죽게 만들면 그것은 죄인 것입니다. 빛이 있는데 빛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빛은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달처럼 해의 빛을 받아 반사시키는 것입니다. 태양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달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봄으로 빛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빛을 잃게됩니다.

이 빛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 주앙교회가 아프가니스탄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정신호 집사님, 박정옥 자매님이 가게됩니다.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은 이란과 파키스탄, 중국, 구 소련의 중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의 십자로”로 알려져 있는 나라입니다. 건조한 산악지대로 비옥한 계곡이 많습니다. 1992년 공산주의 정부가 무너진 후로, 무자히딘(mujahidin) 게릴라와 과도기 정부의 불화로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지하드(jihad)라는 이슬람 성전으로 시작했으나, 권력과 종족 분쟁, 종교적 패권다툼으로 잔인하게 변질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나라 중 하나이며 복음전하는 것을 핍박하는 박해국가 1위 나라입니다. 교회 건물은 하나도 없는 반면 이슬람 사원은 48,000개가 있는 나라입니다. 북한은 선전용 교회라도 가지고 있는데 아프간은 그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다 미국인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지고 있어 서양 선교사들이 활동하기가 매우 어려워 졌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아프간의 하자르족과 유사한 용모를 지니고 있어서 아프간인들에게 친근감을 준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앙교회에 기회를 주셨습니다.

911테러가 일어날 때까지의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은 학교도 갈 수 없었습니다. 여성이 혼자 집밖에 나가면 가족에게 매 맞아 죽습니다. 이때 여성을 죽인 가족은 명예살인으로 인정되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여성은 숨쉬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자유도 누릴 수 없는 나라입니다. 911이후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많은 어려움 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빠른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여성의 현실은 아직도 갈길이 멉니다. 아프간 여성 가운데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5%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내전이 아직 수습되지 않은데다 경제마저 붕괴되어 있어 실업률, 특히 여성실업률이 지나치게 높으며 전쟁 미망인들은 아직도 여성의 사회활동을 타부시 하는 분위기 때문에 대부분 구걸로 연명하고 있답니다.

이곳에 우리 박정옥 자매님이 가게됩니다.
여러분! 기도해 주십시오.
스펄전은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으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고 했습니다.
죠지뮬러는 “기도란 그리스도의 능력을 붙잡는 손이다”고 했습니다.

기도로서 우리의 빛이신 예수님의 빛을 받아 우리 또한 이 빛을 비추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리석은 건축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3. 비유(13) – 어리석은 건축자) / 본문 : 눅 6:46-49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49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제가 사무실을 영등포에서 9년 있었고 건대입구에서 6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사 갈 때마다 그 주변에 아파트와 건물을 다시 건축하는 것입니다. 건축할 때 기초공사를 하는데 중장비 차가 와서 기둥을 박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몇 달을 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초공사 없이 집을 짓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심지어는 아주 종교 생활을 잘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실상은 기초 없이 집을 짓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지난주에도 ‘영리한 청지기 비유’를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비유들이 이미 하나님을 믿는데 믿음이 잘못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랑을 밤새워 기다리다 기름이 부족하여 5명의 신부는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지난주에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제일 경계해야할 말 가운데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이라구요. 물론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문제입니다. 오늘 주님은 이 문제를 다시한번 가르쳐 주십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들인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주여,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참 좋은 말씀이다. 그런 정도로만 이해하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쌍한 자들을 위해서 재산을 나누어주어라”그러면 “참 좋은 말씀이다”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신학교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강의를 다 마쳤는데 한 학생이 제게 “목사님 술을 먹는 것이 죄 입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학생은 술 먹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겠지요. 그리고 본인이 먹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술을 먹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저는 다른 사람이 술을 좀 먹었다고 그것이 꼭 죄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술 드시게 되면 죄를 범할 확률이 먹지 않는 분에 비해서 훨씬 많아질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 자신에게는 술 먹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고 먹지 않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이 지키나 안지키나에 관심을 가지기 전에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에서도 예수님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 말씀은 주님을 한사코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이미 부르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건축자
우리는 기초 없이 집을 짓는 어리석은 건축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먼저 다른 사람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전혀 틀린 점이 없어 보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고상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천이라는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집을 짓는 사람은 장점이 있습니다. 빨리 짓는 다는 것입니다. 한참씩 걸려서 기초를 놓아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행함으로 고생해야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값이 지나치게 많이 올랐습니다. 집을 가지고 계신 분에게 오른 것이야 좋지요. 그런데 진짜 심각한 것은 열심히 노력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이 퍼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은 집도 바람이 불고 비가 지독하게 내리기 전까지는 모릅니다.
스펄전은 실행이 없는 말을 가리켜 ‘유혹’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인 유혹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대신에 회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며, 진심으로 회개하는 대신 그저 ‘나는 믿노라’고 말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신 그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 오는 대신 그저 그리스도께 오는 것을 말하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말만 하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여, 주여…”하는 자입니다.

일본 동경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모든 건물들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때에 무너지지 아니한 빌딩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 건물은 미국의 건축가 ‘라이트’란 사람이 지은 빌딩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처음에 설계를 하고 빌딩을 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의 설계에 대하여 많은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설계대로 하면 과다한 비용이 들고, 많은 노동력, 많은 시간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건물은 처음부터 말을 많이 듣고 건축되었습니다. 그러나 지진이 나고 보니깐, 이 빌딩만이 지진 속에서 변함없이 서 있었던 것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
기초 없이 미련하게 집 짓는 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지혜롭게 집을 짓는 사람에 관해서도 말씀해 주십니다. 산상수훈에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 7:25)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집을 주초위에 놓는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두 복음서 모두 주님의 가르침의 실천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단순히 “우리가 나가서 도덕적으로 좀 더 잘살아보아라”하는 의미 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바른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 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초위에 세우는 것은 예수님 위에 세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이 모두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사 28:16)고 했으며 바울은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 2:20)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라(마 16:18)는 말씀을 들은 장본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 직후 산헤드린 공회의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 4:11) 또한 자신이 쓴 첫 번째 편지에서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벧전 2:6-8)
우리는 이 비유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경계해야 될 오류가 있습니다. 그 오류란 바로 그리스도를 빼 놓고 그리스도의 가르침만 따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 나의 말한 것을 행치 아니하는”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예수님 없이 말씀만 따를 수 없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 없이 예수를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먼저 설계를 합니다. 설계를 한다는 것은 계획을 세운다는 것 아닙니까? 인생을 설계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그래도 주님의 말씀은 듣고 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완전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하고는 다릅니다.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명령에 순종하면 됩니다. 이미 주님께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다 알고 있습니다. 실천하는 것만 남아있습니다.
여러분!
힘을 내세요.

진짜 다이야몬드와 가짜 다이야몬드를 구별하는 방법 중에 ‘수중 감정법’이라는 것이 있는데, 다이야몬드를 물속에 집어넣으면 인조 다이야몬드는 빛이 사라지고 진짜는 그 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마치 이 다이아몬드처럼 역경 중에서도 계속하여 빛을 발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초를 단단히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4:8절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약성경 260장 중 에서 318회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말씀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의 빈도로 말하면 매25절마다 한번 꼴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 전체에서 1,000번 이상이나 말하고 있는 확실한 것으로 반드시 종말은 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흔들고 옮기어버릴 수 있는 무서운 종말이 올 때에도 지혜로운 건축자의 소망은 요동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라는 본문의 내용 증간에 원문 성경에는 “그리고”(Kzj)라는 접속사가 4번이나 계속 나옵니다. 이것은 계속되는 환난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주 숨가쁘게 돌아가는 연속적인 연타의 시험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가 내 생명의 힘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이까? 악한 자들이 나의 원수가 되고 대적이 되어 내 살을 먹으려고 달려들다가 실족하여 엎드러지리이다. 군대가 진을 치고 달려들어도 내 마음은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난리가 나서 나를 몰아쳐도 내 마음이 든든하리로다. 고난이 임할 때에 나를 당신의 초막 속에 숨기시고 나를 들어 반석 위에 세우시리도 (시 27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