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1. 비유(19) – 친구) / 본문 : 눅 10:28-37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한국 사람은 세계에서 빠르기로 유명합니다. 관광지에서 한국사람 별명이 “빨리빨리”가 된지는 오래입니다. 선교지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기 힘든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파라과이 선교사님이 어느 날 사모님과 같이 우체국에 편지를 발송하려 갔습니다. 우체국 안에 손님이 제법 많았고 줄을 서 있었습니다. 차례가 와서 우체국 직원에게 선교편지 약 20통을 건네 주며 보통으로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체국 직원이 편지 20통 정도를 발송하는데 약 1시간을 넘게 걸리는 것입니다. 일반 편지인데 무게가 같다고 해도 하나 하나 무게를 달고 글 한자 쓰고 옆 사람과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고 떼레레(덥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마시는 물)를 빨고 우표 한 장 부착하고 옆 사람과 이야기하여도 줄을 서 있는 그 누구도 빨리 해 달라는 사람이 없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이 있으니까…
파라과이는 “내일”이란 단어를 너무 좋아한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이 있으니 걱정이 없는 듯 보입니다. 언제나 그들의 답변은 내일(Manana, 멘니아나)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내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기쁜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림일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이 질문으로 예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네가 어떻게 읽느냐” 즉 너는 성경을 어떻게 배웠느냐는 말입니다. 그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정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율법사에게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오늘 설교 제목을 다른 제목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성경본문 그대로를 설교 제목으로 정하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래서 두 군데를 뽑았었습니다.
28절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37절 “너도 이와 같이 하라”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과 마지막 절입니다. 이 말이 본문을 싸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알고 있으면 “하라” 명령형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명령이 모두 481가지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는 것입니다. 마가복음도 마지막 장에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것입니다. 누가복음도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8). 요한복음은 내용상 마지막 장인 20장 27절에서 “…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명령형입니다. 우리가 비로소 이 말씀대로 할 때에만 의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A. 링컨은 “불행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것이 불행인 줄 알면서도 그 방향으로 계속 가는 것이다. 우리 앞에서는 불행과 행복의 두 갈래 길이 항상 놓여 있다. 우리는 매일 두 길 중 한 길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결코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은밀한 중에 행하는 것입니다(마 6:2).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고, 이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눅 22:27, 막 10:45, 요 13:15-16).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그의 사랑을 본받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의 보물은 결코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율법사는 29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친구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옳게 보이려고 질문을 했지만 당시에 친구에 대한 논의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이 질문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리새인이 아닌 모든 사람을 제외시키려 했습니다. 오늘날 자기교단, 자기교회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에세네파는 “모든 어두움의 자식들을 미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정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랍비는 이단자들, 밀고자들, 배교자들은 구덩이에 밀어놓고 끌어올리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께서는 마 5:43절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런 말씀을 기억하는 율법사 입장에서는 “사랑의 의무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으로 오늘 비유가 나왔습니다. 비유이지만 언제나 예수님의 비유는 실제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는 실제로 당시에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여행객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이며 여리고는 해면보다 250m정도 낮은 저지대입니다. 약 36km되는 내리막길인데 A.D 4세기 말 까지도 강도의 출몰이 빈번했던 지역입니다.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며 예수님이 소경을 눈뜨게 하고 삭게오를 만난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여리고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도시입니다.
나그네는 강도를 만나 반항하다가 거의 죽게된 상태로 방치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갑니다(31. 32절).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비유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견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말씀드립니다. 레위인이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규율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사람이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그냥 갔을 경우입니다. 레위기 21장 1절에 보면 제사장은 일상 생활에서도 모든 시체의 접촉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예배를 위해 가는 길이 아니라면 문제가 안됩니다. 가는 방향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기 때문에 이 여행자와 같은 방향으로 간다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본문에서 의도하는 바는 이런 애매한 해석을 낳게 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여행객은 아직 죽지 않았으며 신음소리를 내며 도와달라고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도의 적으로도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제 3의 인물을 지목하셨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주후 6-9년 유월절 어느 날 밤중에 죽은 사람의 뼈를 예루살렘의 성전에 뿌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방해한 것입니다. 유대인 입장에선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일제가 한국교회가 예배드릴 때 칼차고 들어와서 예배를 방해하고 총회를 방해한 사건보다 더한 것입니다. 이 일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의 적대관계는 극에 달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혼혈 족인 사마리아인을 예로 드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33). 예수님이 만나 병 고쳐 준 사람을 보면 모두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지 못하면 사랑을 못합니다. 어떤 분은 후진국에 가서 사람들을 보면 원래 그렇게 이 사람들은 살아왔으니까 너무 불쌍히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불쌍한 것은 불쌍한 것입니다. 육체나 영혼을 불쌍히 여기지 못한다면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우리 집사람도 불쌍히 여깁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저 같은 사람에게 시집와 가지고…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습니다. 붕대를 소지하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옷을 찟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기름은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죽어 가는 행인을 위해서 다 붓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자기 짐승에 태워 안전한 주막까지 옮깁니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돌보다 모자란 비용은 자신이 다시 돌아올 때에 값아 줄 것이니 염려하지 돌봐달라고 부탁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다시 질문합니다.
36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사랑의 대상을 물었는데,
예수님은 36절에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사랑의 주체를 물어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사는 “누가 나의 친구인가?”를 질문했는데 예수님은 “나는 누구의 친구가 되어야 하는가?”로 재차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이론적인 반면 예수님은 실제적이십니다. 친구가 되려면 친구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죽어 가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어떠한 강제성도 띠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특기할 것은 예수님은 이 행인이 누구라고 밝히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30) 라고 만 하십니다. 여기서 율법사는 이렇게 질문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 어떤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나 그 질문은 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것을 물어본다면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또한 만일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은 자신이거나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었다고 해도 내용을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3:11)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 11:19)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3-15)

결국 예수님은 율법사에게서 37절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라는 대답을 이끌어 내십니다. 죽어 가는 사람이 자신이라면 그가 사마리아인일지라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사의 이 대답은 좀 솔직하지 못한 대답입니다. 율법사는 당연히 “사마리아인입니다.”로 대답해야 되는데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함으로 핵심을 피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율법사의 교만과 위선을 꺾였습니다. 율법사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 이상으로 영육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당장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캐나다의 한 신문 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법원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은 부인과 남편을 불러다가 사실 심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남편과 이혼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재판장이 물었습니다. “남편의 노래를 매일 들어야 하는 게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인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래, 노래를 얼마나 못하기에 이혼을 할 정도입니까?” 재판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자기 남편을 가리키며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는 노래가 단 한 가지뿐인데, 그 노래 제목은 <독신 생활이 좋아>랍니다. 게다가 곡조도 전혀 맞지 않아서 도무지 참고 들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오늘 여리고로 가던 사람이 나무 멀리 있다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내 옆에 있는 분 한번 처다 보세요. 혹시 이 사람이…
그렇습니다.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여리고로 가는 사람입니다. 예배드리고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향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피를 흘리며 누워만 있지 않다고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울증은 고혈압, 당뇨병, 관절염, 요통 등과 같은 만성질환들보다 개인의 사회적, 신체적 안녕을 더 손상시키는 질환이며, U.S. Surgeon General’s Report on mental Health는 우울증이 세계 전체 질병으로 인한 장애의 1/10이상을 차지한다고 보고한바 있습니다.
미국 우울증 협회에서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흔하고 건강에 악영향을 주는 질환은 우울증으로서, 약 3,500~4,0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합니다. 사망률이 만성 우울증 환자의 15%가 자살로 이어져 우울증은 심장질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망자수를 초래하는 심각한 질환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2005년 사망원인 1위는 암으로 인구 10만 명당 134.5명이 사망하였으며, 다음은 뇌혈관질환(64.3명), 심장질환(39.6명), 자살(26.1명) 순이며, 10대 사인 중 10년 전인 1995년에 비해 사망률이 가장 많이 증가한 사인은 암(23.7)이며, 다음은 자살(14.3명), 당뇨병(7.0명) 순이었습니다.

우리는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어 예수님을 본받아 “누가 나의 친구인가?”를 묻기 이전에 “나는 누구의 친구가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0. 비유(18) – 부자와 나사로) / 본문 : 눅 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미국에 간 전도사님이 전해준 이야기입니다. LA에서는 가끔 한국인거지를 본답니다. 그분들을 볼 때마다 생각이 깊어진답니다. 그분들도 한 때는 미국이 기회의 땅으로 알고 이민 왔을 텐데 어떻게 살다보니까 거지가 된 것이지요.
이 세상에는 언제나, 어떤 사회나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공존합니다. 미국에도 거지는 있고 일본에도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부자가 다 나쁜 사람이 아니며, 세상에 있는 거지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또한 단순하게 보복적인 심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 속의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세상 살기가 좋아 하나님을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었던 사람을 말합니다. 돈이 많은 것이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게을러서 가난하게 된 사람을 책망하기도 합니다. 부자는 자기가 소유한 재산 때문에 더 중요한 영혼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비유들이 그렇듯이 오늘 본문의 비유 또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와 나사로(거지), 이생과 저 세상으로 대조됩니다.

19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라고 말합니다. 돈 많이 벌어 축재하는 사람들의 네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값진 옷입니다(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부자로서의 자기 과시를 과거에는 옷으로 나타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자동차, 주택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현실주의 자 입니다. 여가를 기분 좋게 보냅니다. 생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며 궁리하는 것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즐길까? 하는 것입니다. 호화로운 생활입니다(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분수 넘치게 사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합니다. 부자가 많이 가졌다는 것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한평생 한 번도 하나님을 생각할 틈도 없이 잘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셋째 부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지옥에서 나사로 이름을 불렀습니다.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그를 경멸했을 것입니다.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선을 알고도 행치 않은 사람입니다. 충분히 나사로를 도울 수 있었는데 이것을 외면했습니다.
넷째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말씀에 의해서 산 것이 아니라 돈에 의해서 산 사람입니다. 그 결과는 회개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최소한 가난한 사람은 부에 대한 자부심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자기가 잘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자만감이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를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남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입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 먹고 병원 가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을 고통 하는 사람입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세상의 것으로는 빈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지에게 축복입니다. 가난이 칭찬을 들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사로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는 인생을 말합니다.

그런데 22절에 갑자기 상황이 변화됩니다.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아무래도 가난한 사람이 병을 제때 치료하지 못하니 빨리 죽습니다. 이 땅에서의 모습은 역시 살았을 때나 다름없이 취급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의 운명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죽기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일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열 여덟 번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지옥이라는 말을 유치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핵심을 피해서도 안됩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 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23절에 음부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지옥은 참혹한 곳이기에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지 말도록 하나님의 일꾼들을 동원해서 막으십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도스트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쵸프의 형제들’이라는 책에서 보면 이렇게 지옥을 설명했습니다. “만일 지옥에서 붙는 불이 물질에 붙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몸이 타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지옥은 물 한 방울이 허락되지 않는 곳입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무디라는 미국의 의학자는 어떤 사고를 인하여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나,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한 내용을 ‘죽음 이후’라는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 책에서 죽음 이후의 경험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죽은 뒤에 좁고 긴 터널을 통과하게 되었다. 내가 살면서 경험했던 모든 일들이 기억되었고 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다 알게 되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리챠드 3세’라는 책에서 지옥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양심에 달린 수 십, 수 백 개의 혓바닥들이 쉬지 않고 지껄이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지옥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악들이 기억나게 되는 곳입니다. 지옥은 무엇보다도 다시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곳입니다. 단테가 쓴 ‘신곡’이라는 책을 보면 지옥 어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했습니다. “이 곳을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 자기 운명을 모르며 사는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 헛된 것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 세상 향락에 빠진 사람들, 나중에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것에 눈이먼 사람들, 여기 본문 속에 부자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지옥을 만들어 인간을 괴롭히는가?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가?” 지옥은 사람들을 위하여 만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가두기 위하여 만든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마귀에게 속아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마련하고 계획하셨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만큼 사람들을 지옥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수 천 년 동안 노력하셨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자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지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돌려놓기 위하여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지옥으로 가는 길목에 세우시고 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곳으로 가면 영원히 희망이 없다” 얼마나 힘을 다해 막으시는지 모릅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고통은 말로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옥으로 빠져 가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마 18:8-9)

지옥의 고통의 길을 피하도록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천국 가는데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돈을 바쳐라, 생명을 바쳐라, 자식을 바쳐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안내자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제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겨울방학에 밤을 세워서 친구 한 명을 억지로 설득해서 안 가겠다는 아이를 함께 데리고 가출을 했습니다. 간 곳은 강원도 황지라는 탄광촌입니다. 그 때 제 꿈은 하도 가난해서 10년 후에 택시를 사서 고향에 금의 환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려면 그 때 생각하기를 누가 탄광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기에 그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떠납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역이 추천역으로 해발 855m인데 지금은 눈꽃 축제를 만들어 관광열차가 갑니다. 그 옆에 황지역이 있습니다. 지금은 태백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도착하니까 얼마나 추운지요. 태백은 정선ㆍ도계 탄전과 더불어 태백탄전의 중심지이며 남한 최대의 탄전지대입니다. 1933년 일본인에 의해 매장이 확인된 후 계속 개발되어 1987년 640만 톤으로 전국생산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전성기를 맞이했었습니다. 지금은 수요의 감소로 석탄산업의 경쟁력을 상실하여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 43개에 달하던 탄광의 93%가 문을 닫고 현재 3개의 탄광만 남아있답니다. 당시 탄광 근로자는 2만 여명이었는데 지금은 5,000여명으로 감소하였답니다. 제가 탄광에서 일을 하겠다고 그곳까지 찾아갔습니다. 중학생은 안 된다는 걸 사정사정하니까 아침에 오라는 것입니다. 여관에서 하루 묶고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7일주일 정도 생활을 했습니다. 그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탄광촌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막장인생이라고 합니다. 막바지 인생입니다.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직업이 택시운전이라고 합니다. 택시 운전 중에 생명을 잃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한데 직업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목숨걸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막장 인생들은 수천 미터 지하에 들어가 40℃가 넘는 곳에서 하루 8시간을 일합니다.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그 안에서 먹고 일하면 탄가루가 폐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폐가 굳어지는데 그 병이 구폐증입니다. 나중에는 폐인으로 병상에서 쓸쓸하게 죽어가게 됩니다. 구폐증은 아무리 현대 의술이 발달했어도 치료할 수 없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막장인생으로 어렵게 살아가지만 아이들에게만은 그 직업을 물려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 때 제가 머물렀던 어느 방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
나는 공부를 못 하니까 나도 커서 광부가 되겠지.
그런데 아버지는 절대 광부가 되지 말라 하신다.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광부는 절대로 되지 말라 하신다.

왜 아버지가 한사코 말린 것일까요? 광부의 생활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후 밤을 세워 친구를 다시 설득해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한사코 지옥에 가지 말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너무나 지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돈 가지고 오라는 것 아닙니다. 지옥에는 제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어서 실제적으로 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가 힘써 전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것을 다 잃고도 선택해야 할 것이 천국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할 곳이 지옥입니다. 그 길과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어느 청교도 교인이 아주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그에게 와서 지혜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한 젊은이가 그에게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큰 부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 그는 자기의 세 가지 신조를 젊은이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첫째는, 술 마시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만 믿고 만사에 의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자신의 생활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당신이 말한 그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내용입니다. 누가 그런 것을 모릅니까 ?” 하고 뭐 좀 특별난 대답이 없느냐는 식으로 되물었습니다. 그 때에 부자는 정중하게 “다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것이지요”하고 말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알고 있을 뿐이지 실천하지를 않는 것이 지성인의 약점입니다.
 

양과 염소의 마지막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9. 비유(17) – 양과 염소의 마지막) / 본문 : 마 25:31-34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전 세계에서 하루에 15만 명이 죽습니다. 이를 종교별 퍼센트에 대입하여 나누어보면 15만 명중, 무슬림(3만1천500명), 힌두교(1만9천500명), 카톨릭(2만2천500명), 무종교인(1만8천명), 불교인(9천명), 중국종교(9천명) 순으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수치는 하루에 죽는 사람 중 최대한 1만 명을 제외한 14만 명은 개신교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대부분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은 축복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할 사명을 느끼게 합니다.
모세 이후 인류 역사 3400년의 역사 가운데 3114년 간 전쟁이 지속 되었습니다. 1945-2000년 55년 간 인류역사에 전쟁이 없던 기간은 3주간뿐입니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평안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은 엄격하게 말하면 마지막 심판에 대한 비유입니다. 비유이지만 예언적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예화와 다른 것은 비유는 그 자체가 실제적이라는데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장차 이루어질 예언적 비유입니다.
새해 초부터 목사님은 참 지혜도 없이 종말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십니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처음부터 쉬쉬한다고 곪아터질 것이 안 터지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끝을 알고 가야합니다. 마지막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마라톤 뛸 때 끝 지점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어디에 고개가 있는지, 내리막길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끝까지 잘 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는 마지막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서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라고 합니다.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
마크 트웨인은 <톰 소녀의 모험>이란 작품으로 미국의 작가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발명품에 투자하였다고 모두 손해보고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어수룩한 사람이 찾아와 한 가지 발명품을 보여주면서 5달러(5,000원)에 사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가격이 싸기 때문에 무시해 버렸습니다. 찾아온 사람이 바로 전화기를 발견한 ‘벨’이라는 사람입니다. 마크 트웨인은 가격이 싸다고 무시한 결과 거부가 되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부자가 되는 기회를 잊어버리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영생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에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과 염소가 한 우리에 섞여 있는 상태로 키우고 있습니다. 가뭄 때문에 울타리 안에서 키우기 어려운 지역에서는 염소들도 방목하게 됩니다. 이 때 염소와 양이 섞이게 됩니다. 그러나 양과 염소는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만, 염소는 황혼이 되어도 바깥에 계속 있기를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양과 염소는 구분해서 다루어야 됩니다. 팔레스틴의 염소는 대개는 까만 색이고 양은 흰색이기 때문에 그 색으로만도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1.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십니다(31).
심판하시는 주님은 최후의 순간 재림하실 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과 천사들이 함께 오십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겨둘 것이 없습니다.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시는 것은 전 우주적인 성격으로 그 장엄함을 나타내 보여줍니다(24:31, 살후 1:7, 계 14:14-20).

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십니다(32).
여기에는 어떤 민족도 국가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아울러 유대민족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만의 예외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2008년 제29회 북경 올림픽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도약하기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64년 동경올림픽, 한국이 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국력을 대폭 신장시켰듯이 중국도 그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중국은 세계인구의 1/5을 차지한다는 데서 일본과 한국과는 좀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국력신장이야 하기에 달린 것이지만 중국이 지금 이 시점을 기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중국 공자를 신으로 만들고 공자를 전하기 위해서 작업을 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신사를 참배하고 이를 통해서 하나로 묶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종교적 심리를 이용하여 국력을 하나로 모으려고 사상통일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국가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야 어떻든 결국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모두 서게 됩니다.

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3)
양의 무리는 오른편에 염소의 무리는 왼편에 양분하게 됩니다. 이것은 제 3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어느 민족 어느 개인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부터 왼편은 하나님의 반대되는 자리, 불의한 자리로 나옵니다(삿 3:15, 삼하 20:9, 전 10:2). 반대로 오른편은 하나님의 편으로 위엄과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자리로 나옵니다(출 15:6, 왕상 2:19, 욥 30:12, 시 45:5). 따라서 마지막 심판 때에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서게됨을 말하는 것이며,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4.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34절)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31절에서는 ‘인자’로 나타나는 주님이 이제는 ‘임금(왕)’으로 나옵니다. 예수그리스도 인자가 왕이었습니다. 그분이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낮추시어 인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른편에 선 사람들을 다른 표현으로 “복 받을 자들”(호이 율로게메노이)이라고 하십니다. 원문은 완료 분사형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부여하신 축복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 복은 예비 된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것입니다. 예비 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상속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어떤 자가 구체적으로 복 받을 자인지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1:1-3절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복 받을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 입니다. 그러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복을 받기 위해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게 아니라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당연히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킨다고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성경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성경만큼 무시당하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1) 읽는 자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수인데 반해 “읽는 자”는 단수형을 씁니다. 읽는 것은 혼자 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꼭 교회에 모여야 했습니다. 성경은 두루마리로 성전에만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행복한 줄 아십시오. 핍박이 심한 로마의 학정시대이므로 성경을 읽기 위해 성전에 모인다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일입니다. 요한의 시대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자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복 받지 않겠습니까?

2) 듣는 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경제적 어려움도 어려움이려니와, 정치의 혼란도 혼란이려니와, 지도력의 부재도 문제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옛날에는 설교자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중국은 설교자가 없어 설교를 듣고 싶어도 못 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에게는 설교자가 없어 못 듣는 것이 아닙니다. 들을만한 설교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명 설교가 얼마나 봇물처럼 일렁이는지 모릅니다. 들을 귀가 없어 문제랍니다.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겔 12:2)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제대로 들은 자는 움직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따릅니다. 같이 가던 자들은 소리만 들었습니다. 소리만 들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소리와 말씀은 다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 9:6) 그는 당연히 그 말씀을 따라 아나니아에게 갔습니다. 여러분! 혹 소리만 듣는 자들은 아닙니까?

3) 지켜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읽습니까? 눈이 즐거우라고요. 무엇 때문에 듣습니까? 귀가 즐거우라고요. 아닙니다. ‘읽는 자’와 ‘듣는 자’는 ‘지키는 자’에 걸립니다. 읽고 듣는 것의 목적은 지키는 것에 있습니다.

죤스타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만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은 더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펜실바니아에 아름다운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 위쪽에는 강을 막아서 세운 큰 댐이 있었습니다. 댐 건설 전문가들이 조사하여 댐의 위험성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마을을 떠날 것을 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저렇게 크고 튼튼한 댐이 무너지다니”라고 생각하면서 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해 가을에 조사단이 다시 와서 점검한 후에 더욱 위험하게 됨을 발견하고 “마을을 떠나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재차 경고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마을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고 무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 째 경고가 있은 지 보름 후인 1889년 5월 31일에 이 둑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때, 마을 사람들 2,200명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미국 역사상 최대의 댐 붕괴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였기에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우습게 여기지 마세요. 반드시 마지막 날은 오는 것입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그 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요즘은 웃음이 만병통치약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웬 게그 프로그램이 그렇게 많은지요. 사회가 다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그러나 그런 웃음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는 시계가 있었지요 그 시계가 무엇 때문에 돌아가느냐 물으면 사람들은 시계 속에 태엽이 있어서 태엽의 힘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많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 태엽을 감아 준 사람의 힘이 태엽을 통해서 그 시계를 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엽을 감아 주고 또 태엽이 없으면 감아 줄 수가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이 내게 있으니까 예수의 구원과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고 그 역사 안에서 영광된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안에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영생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복 받을 자들”로 오른편에 서 있는 기쁨의 자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안에서(정 선교사 파송예배)

본문 :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었던 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한민국에 약 1,000만 명의 성도와 7만 명의 목회자, 45,000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나라에는 20만 명의 역술인(무당)이 있으며 첨단 시대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700번 서비스 ARS와 인터넷으로 역술사업 규모가 연간 1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 남아있는 우리들의 사명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오늘 파송을 받게되는 에스더, 에스라가 가게되는 A나라에는 공식적인 통계에는 개신교인 0%로 나옵니다. 그리고 카톨릭 포함하여 0.02%라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이곳에 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달해야 할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운명적 삶을 살았습니다. 마치 힌두교의 사상처럼 원래 그런 팔자를 타고 태어났다는 식으로 운명이라며 잘못된 것도 수용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소설이나 동화에 보면 이런 양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는 약자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자의 태만과 실수에 의해서 문제가 해결됩니다. “흥부와 놀부”에서는 두 형제 공히 문제 해결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능한 흥부는 마음씨 나쁜 형의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문제의 해결은 전혀 뜻밖의 제 삼자의 개입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심청전에서도 제 삼자의 개입으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장화홍련전은 미해결 비극으로 끝나는데 단지 압제자에 대한 막연한 경고로 끝을 맺습니다.
이런 사고의 틀에서 깨어나 이제 문을 두드리며 문제를 해결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변화되었습니다.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깨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복음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선교사를 보내고 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여…”(사 61:1)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기독교의 믿음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기독교는 예수를 떠나면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선교하며 왜 복음을 전합니까? 그것은 모든 일을 예수 안에서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슬람은 마호멧은 있어도 예수는 없습니다. 이곳에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1885년 최초의 목사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도착했을 때 이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들이 처음에 왔는데, 세례를 받기 위해 나오는 사람이 79명이나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서상륜(1849-)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집안이 어려워서 20대부터 보부상으로 만주로 다니며 한약재와 인삼을 팔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다 1878년 만주 땅에 있을 때 열병에 걸려서 죽게되었습니다. 그 때 그의 친구들이 아일랜드 출신의 의료 선교사 헌터(Joseph M. Hunter)가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선교사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에게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개종한 그를 맥킨타이어는 영국 성서공회 선교사인 로스(John Ross)에게 소개해 줍니다. 이 때 그는 이응찬이라는 사람과 함께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1887년 최초의 한글 성경인 “예수 셩교 젼서”가 발간됩니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치를 펴서 외국인 선교사들에게는 “금지된 나라, 은자의 나라”였습니다. 서상륜은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합니다. 1883년 성경 100권을 밀반입하려다 중국국경에서 조선관리에 의해 체포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있는 한 관리로부터 도움을 얻어 가까스로 풀려나게 됩니다. 그 후에 그는 도피하여 은둔생활을 황해도 소래라는 작은 마을에서 하게됩니다. 그곳에서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한국 최초의 개신 교회인 소래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소래를 떠나 서울로 들어갑니다. 그는 로스에게 부탁하여 1884년 상해를 통해 성경 6,000권을 제물포에 들여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성경을 받은 그는 서울의 동료 포부상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 해 13명의 결신자를 얻게됩니다. 그리고 다음해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왔을 때 79명이 세례를 받겠다고 나간 것입니다.
서상륜이 전도할 때, 그의 봇짐에는 항상 세 가지를 가지고 다녔답니다. 성경, 금계랍이라는 한약재, 그리고 씨감자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필요도 함께 전달해 준 것입니다. 오늘 A나라로 파송을 받게되는 에씨네 부부도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을 오늘날 전문인 선교사라고 합니다.

3.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주진국(1944-2005) 선교사님이 들려준 선교사의 삶을 요약하면
1)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처럼 선교지에서의 생활 그 자체가 선교가 되어야 한다.
2) 선교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3) 선교는 말이 아니라 액션(action)이다. (컴퓨터의 일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액션입니다.)
애국과 종족우월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되 모든 민족 속에 위대한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미션(mission)은 예수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이요, 영웅주의를 버리고 스스로 낮은 곳으로 오신 겸손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며,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원하지 않는 방법과 행동을 하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처럼 살고 행동해야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1) 기쁨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기쁨이 없이는 못합니다.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2) 성령이 충만하여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성령이 충만하여 한다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3) 감사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12: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공동번역(개정)] “그 날, 너희는 이렇게 감사의 노래를 부르리라. “야훼께 감사하여라. 그의 이름을 외쳐 불러라. 그가 하신 큰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그 높으신 이름을 잊지 않게 하여라.”
 

삶에 관한 비유(3) 두 아들 이야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8. 비유(16) – 삶에 관한 비유(3) 두 아들 이야기) / 본문 : 마 21:28-32
 

[개역한글]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표준새번역(개정)]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런데 맏아들은 “싫습니다 !”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작은 아들은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는 가지 않았다. 31. 그런데 이 둘 가운데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어떤 군인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의 행동이 망나니 같았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 동안 너의 행동을 참고 보아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안되겠다. 내가 너를 산에 데려가 크게 혼내겠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산 길이 하도 험하니까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좀 쉬었다 가요.” “이 놈아 쉬기는 뭘 쉬어.” 아들은 계속 쉬어가자고 사정합니다. 그래서 잠시 쉬는데 아들이 말합니다.“아빠하고 등산하니까 참 좋네요.” “이 녀석아. 조금 더 가면 크게 혼날 건데 좋긴 뭐가 좋아.” “아빠랑 등산하는 것이 처음 이예요. 혼나러 가는 길이지만 이렇게 좋을 수 없네요.” 곰곰 생각해보니 아들과 등산 한번 간 적 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만 마음이 풀려서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아들과 산을 내려왔습니다. 아버지와 손잡고 가는 길은 항상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찬송가 456장을 불러보세요.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날에 예수님께서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위치면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종교지도자들은 기분이 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예수님은 성전에서 비둘기 팔며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이들은 종교지도자들의 비호아래 장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마 21:13)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간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한마디로 그동안 골 맡던 것이 터진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힐문하기 시작합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23절)
예수님도 이들에게 세례요한의 권위에 대해 반문을 하셨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서로냐?”(24-25절). 이 질문으로 종교지도자들은 딜렘마에 빠져버렸습니다. 만약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요한은 믿으면서 왜 예수는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 걸릴 것이고,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하면 당시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의 반란이 염려되어 결국 그들은 겁쟁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27절)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27절). 하시고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인 두 아들에 관한 비유를 시작하셨습니다. 두 아들 모두 아버지로부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한 아들은 안 가겠다고 말했다가 후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또한 아들은 가겠다고 말은 넙죽 해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31절)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먼저 번 아들입니다.”
(* 주 : 개역한글 성경에는 맏아들과 둘 째 아들의 내용이 뒤바뀌어 있음, 표준 새번역에서는 바로 잡았음)

본문의 내용을 해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 아들은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은 것이 문제요, 한 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절했지만 나중에 돌이키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이 비유는 “누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인가?”, “누가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자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포도원은 교회요, 하나님의 일터입니다. 두 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교회에, 하나님의 일터에 와서 일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공공연하게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했던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순종하기를 거절했지만 나중에 회개하고 돌아와 일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는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위선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는 다른 어느 문제보다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느냐 행치 아니하느냐에 놓여있습니다.
“아버지여 가겠소이다”라고 말만하고 가지 않은 둘째 아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조금 깊이 묵상하시는 분이라면 이 말씀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말을 말아야지! 말해놓고 지키지 못하면 그것이 죄야!”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시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아무 고백도, 약속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을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앙고백을 반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신앙고백을 통해서 참된 신앙과 연관짓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반대하시는 것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거짓 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고백을 사도신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주일 예배에 하나님께 함께 고백합니다. 그리고 또한 많은 예배 때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입으로만 하는 고백이 아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말에 싫다고 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한 첫째 아들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첫째 아들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심으로 결국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이 맏아들의 경우 결과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정당화 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아들도 처음에 아버지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첫 번째는 불순종입니다. 감히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불순종적인 교만한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솔직한 젊은 세대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솔직한 모습이라는 것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솔직한 것이 모두 용납되고 죄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전도하는데 이런 말을 합니다. “너무 빨리 가서 믿을 것이 무엇이냐? 그냥 편히 살다가 죽을 때 주여 믿습니다. 하고 죽으면 되지요.” 분명히 말씀드리면 이것은 사단의 소리입니다. 지금 지체하고 예수님 안 믿고 나중에 그가 잘 믿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 바로 예수를 믿을 때임을 아셔야 합니다. 첫 번째 아들은 늦었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참 다행한 일입니다.

이 비유에는 네 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 가서 일하라”(28절)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일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요 감사한 것입니다. 예전에 보면 일거리가 없어서 그저 먹여만 주고 잠만 재워주면 일하겠다고 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할 일이 많습니다. 열심히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교회에서만 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 속에서 일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벌어서 헌금하세요. 그리고 자녀교육 바르게 시키세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모두 하나님의 일터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일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 일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셋째는 지금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한 것입니다. 1871년 10월 8일 주일날 밤에 D.L. 무디는 시카고에서 제일 많은 회중들 앞에서 설교했습니다. 설교제목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대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였습니다.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나는 여러분이 집에 가서도 이 제목을 거듭거듭 마음에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에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나사렛 예수님께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어서 아이라 생키(Ira Sanky)가 찬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구주 부르시네. 세상 피난처 사라지니, 의의 폭풍 몰아치고 죽음 가까웠도다.” 그러나 이 찬송을 마치기 전에 소방차가 밀어 닥쳤습니다. 그 날이 시카고 대 화재의 밤이었습니다. 무디는 나중에 회중에게 “다음주에 결정하자고 한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넷째는 의무입니다. 이 의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면 아들 된 자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니라면 이 물음은 필요가 없어집니다.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얘”로 번역된 부분은 원문에 “아들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포도원에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두 가지 목적으로 삽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worshipper)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worker)입니다. 예배와 일, 기도와 노동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목적입니다.
예배가 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일은 주로 교회 밖에서 이루어집니다. 예배가 곧 하늘을 향한 감사의 고백이라면 일은 곧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예배자로 부르시고(소명), 세상으로 일꾼으로 보내셨습니다(사명).
예배와 일은 때로 상충되기도 하고 가끔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다 보면 일할 시간이 없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예배할 틈이 없습니다. 예배에 전념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일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또한 예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둘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이 둘을 하나의 영적인 삶으로 승화시킨 사람이 6세기의 수도자 베네딕트였습니다. 성 베네딕트는 수도원에서 일은 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 사람들에게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하루 8시간 노동을 의무화했습니다.

옛날 예루살렘에 시장에서 일하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대제사장을 찾아 왔습니다. “대제사장님, 저는 20년 간 시장에서 일해온 장사치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가진 소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거룩한 지성소를 들어가 하나님 만나 뵙는 일입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대제사장이 말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사꾼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간청했습니다. 할 수 없이 대제사장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좋소. 만일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허락하겠소. 당신이 직업을 그만 두고 성전으로 들어와 3년 간 마루를 닦고 쓰레기를 치우고 제사장을 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남자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3년이 지났습니다. 대제사장도 이제는 거절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사꾼을 데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기 보이는 저 문을 열고 들어 가시오. 그 문을 지나면 지성소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문이 있을 것이오. 그 문을 열면 당신이 찾던 지성소요. 거기에서 부디 하나님을 만나시오”. 남자는 떨리는 마음으로 지성소로 향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그 마음에 온통 하나님에 대한 환상과 기대로 가득 차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지성소의 문을 열었더니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생선 냄새가 나는 시장이 나왔습니다. 놀란 장사꾼이 다시 주변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가 20년이나 일했던 시장이 분명했습니다. 그 때 그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하던 시장이 지성소였단 말인가? 지성소는 따로 없었단 말인가?” 유대인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는 바로 우리가 일주일 동안 사는 가정이요 직장이요 세상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교회는 무엇입니까? 그 지성소로 향하는 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세상으로 나가는 거룩한 문입니다. 그 문을 통과하면 하나님 계신 일터요 직장이요 가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