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1. 비유(19) – 친구) / 본문 : 눅 10:28-37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한국 사람은 세계에서 빠르기로 유명합니다. 관광지에서 한국사람 별명이 “빨리빨리”가 된지는 오래입니다. 선교지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기 힘든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파라과이 선교사님이 어느 날 사모님과 같이 우체국에 편지를 발송하려 갔습니다. 우체국 안에 손님이 제법 많았고 줄을 서 있었습니다. 차례가 와서 우체국 직원에게 선교편지 약 20통을 건네 주며 보통으로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체국 직원이 편지 20통 정도를 발송하는데 약 1시간을 넘게 걸리는 것입니다. 일반 편지인데 무게가 같다고 해도 하나 하나 무게를 달고 글 한자 쓰고 옆 사람과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고 떼레레(덥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마시는 물)를 빨고 우표 한 장 부착하고 옆 사람과 이야기하여도 줄을 서 있는 그 누구도 빨리 해 달라는 사람이 없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이 있으니까…
파라과이는 “내일”이란 단어를 너무 좋아한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이 있으니 걱정이 없는 듯 보입니다. 언제나 그들의 답변은 내일(Manana, 멘니아나)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내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기쁜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림일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이 질문으로 예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네가 어떻게 읽느냐” 즉 너는 성경을 어떻게 배웠느냐는 말입니다. 그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정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율법사에게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오늘 설교 제목을 다른 제목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성경본문 그대로를 설교 제목으로 정하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래서 두 군데를 뽑았었습니다.
28절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37절 “너도 이와 같이 하라”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과 마지막 절입니다. 이 말이 본문을 싸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알고 있으면 “하라” 명령형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명령이 모두 481가지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는 것입니다. 마가복음도 마지막 장에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것입니다. 누가복음도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8). 요한복음은 내용상 마지막 장인 20장 27절에서 “…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명령형입니다. 우리가 비로소 이 말씀대로 할 때에만 의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A. 링컨은 “불행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것이 불행인 줄 알면서도 그 방향으로 계속 가는 것이다. 우리 앞에서는 불행과 행복의 두 갈래 길이 항상 놓여 있다. 우리는 매일 두 길 중 한 길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결코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은밀한 중에 행하는 것입니다(마 6:2).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고, 이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눅 22:27, 막 10:45, 요 13:15-16).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그의 사랑을 본받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의 보물은 결코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율법사는 29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친구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옳게 보이려고 질문을 했지만 당시에 친구에 대한 논의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이 질문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리새인이 아닌 모든 사람을 제외시키려 했습니다. 오늘날 자기교단, 자기교회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에세네파는 “모든 어두움의 자식들을 미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정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랍비는 이단자들, 밀고자들, 배교자들은 구덩이에 밀어놓고 끌어올리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께서는 마 5:43절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런 말씀을 기억하는 율법사 입장에서는 “사랑의 의무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으로 오늘 비유가 나왔습니다. 비유이지만 언제나 예수님의 비유는 실제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는 실제로 당시에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여행객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이며 여리고는 해면보다 250m정도 낮은 저지대입니다. 약 36km되는 내리막길인데 A.D 4세기 말 까지도 강도의 출몰이 빈번했던 지역입니다.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며 예수님이 소경을 눈뜨게 하고 삭게오를 만난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여리고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도시입니다.
나그네는 강도를 만나 반항하다가 거의 죽게된 상태로 방치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갑니다(31. 32절).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비유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견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말씀드립니다. 레위인이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규율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사람이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그냥 갔을 경우입니다. 레위기 21장 1절에 보면 제사장은 일상 생활에서도 모든 시체의 접촉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예배를 위해 가는 길이 아니라면 문제가 안됩니다. 가는 방향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기 때문에 이 여행자와 같은 방향으로 간다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본문에서 의도하는 바는 이런 애매한 해석을 낳게 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여행객은 아직 죽지 않았으며 신음소리를 내며 도와달라고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도의 적으로도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제 3의 인물을 지목하셨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주후 6-9년 유월절 어느 날 밤중에 죽은 사람의 뼈를 예루살렘의 성전에 뿌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방해한 것입니다. 유대인 입장에선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일제가 한국교회가 예배드릴 때 칼차고 들어와서 예배를 방해하고 총회를 방해한 사건보다 더한 것입니다. 이 일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의 적대관계는 극에 달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혼혈 족인 사마리아인을 예로 드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33). 예수님이 만나 병 고쳐 준 사람을 보면 모두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지 못하면 사랑을 못합니다. 어떤 분은 후진국에 가서 사람들을 보면 원래 그렇게 이 사람들은 살아왔으니까 너무 불쌍히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불쌍한 것은 불쌍한 것입니다. 육체나 영혼을 불쌍히 여기지 못한다면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우리 집사람도 불쌍히 여깁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저 같은 사람에게 시집와 가지고…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습니다. 붕대를 소지하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옷을 찟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기름은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죽어 가는 행인을 위해서 다 붓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자기 짐승에 태워 안전한 주막까지 옮깁니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돌보다 모자란 비용은 자신이 다시 돌아올 때에 값아 줄 것이니 염려하지 돌봐달라고 부탁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다시 질문합니다.
36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사랑의 대상을 물었는데,
예수님은 36절에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사랑의 주체를 물어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사는 “누가 나의 친구인가?”를 질문했는데 예수님은 “나는 누구의 친구가 되어야 하는가?”로 재차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이론적인 반면 예수님은 실제적이십니다. 친구가 되려면 친구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죽어 가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어떠한 강제성도 띠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특기할 것은 예수님은 이 행인이 누구라고 밝히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30) 라고 만 하십니다. 여기서 율법사는 이렇게 질문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 어떤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나 그 질문은 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것을 물어본다면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또한 만일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은 자신이거나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었다고 해도 내용을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3:11)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 11:19)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3-15)
결국 예수님은 율법사에게서 37절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라는 대답을 이끌어 내십니다. 죽어 가는 사람이 자신이라면 그가 사마리아인일지라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사의 이 대답은 좀 솔직하지 못한 대답입니다. 율법사는 당연히 “사마리아인입니다.”로 대답해야 되는데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함으로 핵심을 피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율법사의 교만과 위선을 꺾였습니다. 율법사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 이상으로 영육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당장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캐나다의 한 신문 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법원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은 부인과 남편을 불러다가 사실 심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남편과 이혼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재판장이 물었습니다. “남편의 노래를 매일 들어야 하는 게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인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래, 노래를 얼마나 못하기에 이혼을 할 정도입니까?” 재판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자기 남편을 가리키며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는 노래가 단 한 가지뿐인데, 그 노래 제목은 <독신 생활이 좋아>랍니다. 게다가 곡조도 전혀 맞지 않아서 도무지 참고 들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오늘 여리고로 가던 사람이 나무 멀리 있다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내 옆에 있는 분 한번 처다 보세요. 혹시 이 사람이…
그렇습니다.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여리고로 가는 사람입니다. 예배드리고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향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피를 흘리며 누워만 있지 않다고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울증은 고혈압, 당뇨병, 관절염, 요통 등과 같은 만성질환들보다 개인의 사회적, 신체적 안녕을 더 손상시키는 질환이며, U.S. Surgeon General’s Report on mental Health는 우울증이 세계 전체 질병으로 인한 장애의 1/10이상을 차지한다고 보고한바 있습니다.
미국 우울증 협회에서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흔하고 건강에 악영향을 주는 질환은 우울증으로서, 약 3,500~4,0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합니다. 사망률이 만성 우울증 환자의 15%가 자살로 이어져 우울증은 심장질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망자수를 초래하는 심각한 질환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2005년 사망원인 1위는 암으로 인구 10만 명당 134.5명이 사망하였으며, 다음은 뇌혈관질환(64.3명), 심장질환(39.6명), 자살(26.1명) 순이며, 10대 사인 중 10년 전인 1995년에 비해 사망률이 가장 많이 증가한 사인은 암(23.7)이며, 다음은 자살(14.3명), 당뇨병(7.0명) 순이었습니다.
우리는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어 예수님을 본받아 “누가 나의 친구인가?”를 묻기 이전에 “나는 누구의 친구가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