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5. 서로 사랑하라) / 본문 : 요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저에게 2-3년 전까지는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취미가 없는 것 같아서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진 찍기”라고요. 그래서 말도 하나 만들어 냈습니다. “잘 찍은 사진 하나가 선교지를 변화시킨다.” 왜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지, 그리고 작은 것 같이 보이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제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2년 전에 북유럽에 선교여행 함께 다녀왔던 목사님이 지금도 제가 찍어드린 사진 만한 게 없다고 하십니다. 제가 사진을 찍으면서 느낀 것인데 사진은 내가 내 자신을 찍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거울을 보면서 한번 찍어 보았는데 얼굴이 카메라에 가렸습니다. 저에게 사진이 찍히는 분들이 있어 저는 행복합니다. 아래 가시면 하민이와 준혁이 사진 하나씩 걸어놓았습니다. 서은이와 하민이 준혁이를 보면서 저는 하루가 힘이 납니다. 그 사진만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사랑하려면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단어가 번갈아 가며 나타납니다. 사랑과 서로입니다. 사랑은 네 번, 서로는 3번 나옵니다. 상대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혼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 짝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짝사랑이라는 말은 불가능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중 호세아서에는 이런 안타까운 Love Story가 나옵니다. 사랑하는 아내 고멜은 남편을 배신하고 창녀의 소굴로 도망쳐 버리고, 남편 호세아는 보리를 싸들고 찾아가서 팔려간 고멜을 돈을 주고 사오는 겁니다. 그녀의 배은망덕한 사랑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계속되는 배신은 하나님을 짝사랑의 애닮은 연인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그 이후 하나님은 짝사랑의 아픔을 앓고 계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짝사랑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요? 예전에 어느 날인가 복잡한 통근시간에 시내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저만치 한 여학생이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앉아 있던 나는 꼭 그 여학생을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손을 뻗쳐 가방을 받기에는 애매한 거리였습니다. 그저 그 학생이 한번만 돌이켜본다면 나는 그를 부를텐데, 조금만 더 다가선다면 그 가방을 받아줄텐데 그 학생은 끝내 더 먼 위치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눈뜨는 아침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돌보시는 그의 사랑을 아십니까? 당신의 먼 장래까지 보장하시는 그의 관심을 아시나요? 그런데 나 자신이 어쩌면 주님께 시선한번 안 돌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주일에 성경한번 제대로 안보는 사람, 하루 중에 기도한번 안 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을 오늘도 짝사랑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릅니다.

출애굽기 25장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실 성소를 만드는 일입니다. 이 때 제일먼저 만들게 되는 것이 성소의 제일 안쪽(지성소)에 있게될 증거궤(법궤)을 만드는 일입니다. 사실 나머지 성막들과 도구들은 이 법궤를 위함이며, 보호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법궤의 뚜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위쪽에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출 25:20)라고 했습니다. 천사들이 서로 바라보는 보습을 하고 동시에 이 천사들은 속죄소를 바라보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고 하셨습니다.
속죄소의 법궤 없이는 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서만 모세와 대면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법궤의 모양이 두 천사가 날개를 펴고, 서로 마주 대하여 보고있는 것입니다. 날개가 펴 있다는 것은 지금 일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지금 천사들과 함께 행동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1장에는 에스겔이 본 환상 네 생물이 나옵니다. 이 네 생물은 천사들입니다.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겔 1:9)라고 했습니다. 천사들의 날개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송영을 부를 때 손에 손을 잡고 부르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이들은 손을 잡은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뒤돌아 보지 아니하며 앞으로 향해서 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말한 것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엡 2:21) 함께 지어져 가는 모습이 우리교회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 2:18)라고 하시면서 배필로 하와를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부사이에서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서로”라는 말씀을 매우 좋아하십니다. 한마디로 모든 좋은 것은 “서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저에게 몇 번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신학교 다닐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한 남학생이 김밥을 싸왔는데 손으로 감싼 채 혼자 먹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학생들이 젓갈을 가지고 같이 먹자고 덤벼들었는데 계속 혼자 먹으려고 도시락을 가지고 피하려다 그만 김밥이 다 쏟아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어디서 목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도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방안에 아무도 보이지 않아 두려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오는 날이 간혹 있었습니다.
소리나는 곳으로 다가가 보면 부엌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정하게 일을 하고 계시는 모습이 구멍난 문 창호지 사이로 내다보였습니다.
무엇인가 반찬을 만들고 계시는 어머니와 불을 때시느라 벌개진 아버지의 얼굴이 그렇게 정겨워 보일 수 없었습니다.

이 설교문을 작성하면서 동시에 “한국교회 성도의 선교의식구조 조사”라는 설문을 인터넷을 통해서 메일로 보내고 설문 통계를 보고있었습니다. 문항이 26번까지 있어서 누가 참여해 주겠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설문에 응해주는 분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10명, 50명, 100명을 넘어서 지금은 350명이 넘었습니다. 이렇게 응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힘이 나는 것입니다. 이 설문을 잘 정리해서 발표하면 박사학위도 누가 줄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던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설문조사 주소 : http://missionmagazine.com/main/php/vote.php?idx=4

선교지에 가면 한국선교사님과의 갈등 때문에 고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서로” 도와주면서 기도하면 선교해야 됩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 나 혼자만 살겠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변의 사람들 다 끊고 나만 고상하게 살겠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집안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땅히 책임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신약성경에는 수 없이 서로에 대한 관계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막 9:50)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요 13:14)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행 2:42)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4:32)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롬 12: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롬 14:19)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고전 12:25)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롬 16:16, 고전 16:20, 고후 13:11)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갈 5:13)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 6:2)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엡 4:32)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엡 5:19)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살전 4:18)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히 10:24)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히 13:16)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약 5:16)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벧전 4:8)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벧전 4: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직이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5:5)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요일 3:11)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 보면 사랑을 5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만나는 사람 중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가 있는데 이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존경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의 위치를 인정하고 높여주는 것이 존경입니다. 이 존경하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셋째,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해란 말의 영어의 뜻은 ‘아래에 서다’란 뜻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입장을 낮추고 상대방을 바라볼 때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넷째, 책임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입장과 권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매사에 의무보다 권리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맡겨진 일에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책임감이 사랑입니다.
다섯째, 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주는 사람은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어떤 젊은 비행기 조종사가 한 여성과 펜팔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주는 허무함, 출격 때마다 느끼는 불안과 긴장 가운데서도 조종사는 그 여자가 보내는 편지에서 위로를 받고 삶의 용기를 가지곤 했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두 사람은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
그는 기차를 타고 약속한 역에서 내렸습니다.
그녀는 꽃 한 송이를 들고 있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합실에는 한 뚱뚱한 여자가 꽃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줌마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렸습니다.
조종사는 크게 실망이 되어 모르는 체 그냥 지나갈까 생각도 했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가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 순간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 웬 멋장이 아가씨가 내 손에 이 꽃을 쥐어주면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면 건너편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 달라고 하던데요”
사랑의 약속이라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나무에 비유하며 정원(포도원)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아가서에는 포도원 망대를 허무는 작은 여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동산을 방해하는 자를 말합니다.
미국의 전래동화 이야기입니다.

 

주머니쥐가 친구인 너구리를 방문했습니다. 너구리의 집은 강 근처에 있었는데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자기도 그런 정원을 가꿀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너구리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게 할 있다고 말했습니다. 주머니쥐는 모든 힘을 기울여 열심히 정원을 가꾸어 보겠다고 다짐하며, 너구리에게 약간의 씨앗을 얻었습니다. 주머니쥐는 집으로 달려와 흥이나서 노래를 부르며 씨앗을 땅에 심은 뒤, 집안으로 들어가 몸을 씻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그는 씨앗이 다 자랐나 보기 위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정원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어제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주머니쥐는 화가 날 정도로 실망했습니다. 그는 땅에 묻힌 씨앗들을 향해 “어서 자라나거라. 씨앗들아!”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는 땅을 두드리기도 하고, 발로 쾅쾅 밟아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이 도대체 무슨 소동인가를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너구리도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다른 동물들과 함께 왔습니다.
“주머니쥐야 도대체 무슨 일이니? 네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온 숲이 시끄럽구나.”
주머니쥐는 왜 씨앗들이 자라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원망하며, 다시금 씨앗들을 향해 큰 소리로 어서 자라라고 소리쳤습니다. 숲 속의 동물들을 주머니쥐의 어리석음을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주머니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크게 소리쳤습니다. 마침내 너구리가 말했습니다.
“잠깐만, 주머니쥐야. 너는 씨앗들을 자라게 할 수 없어. 그저 햇빛을 잘 받게 하고, 물만 잘 주면 나머지는 씨앗들이 알아서 해. 씨앗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그때부터 주머니쥐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고 너구리가 말한 대로 씨앗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주머니쥐는 규칙적으로 물을 주고, 쓸모 없는 잡초는 뽑아주었습니다.
마침내 아름다운 연두 빛 새싹들이 정원 여기 저기서 나오기 시작하더니 예쁜 꽃들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주머니쥐는 기쁜 마음으로 너구리에게 달려가 자랑했습니다. 너구리는 주머니쥐의 정원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이것 봐. 네가 지켜보는 동안 씨앗들이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었잖아.”
“맞아. 그러나 씨앗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어려운 일이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고전 3:6-7)
사랑을 알게되고 확인하는데는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성스럽게 돌보고 가꾸다 보면 우리의 정원도, 교회도 주머니쥐의 정원과 같이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며 열매들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의 자리, 역할을 귀찮다 생각지 마시고 충실히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존재는 행위보다 우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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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84. 존재는 행위보다 우선한다.) / 본문 : 요 15:4-5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중국언론들이 14일 보도한 내용입니다. 중국 서남부 윈난성 푸민현 정보가 라오서우산 산허리 전체에 녹색 페인트칠을 해 ‘녹화’ 사업을 한데 대해 주민들이 실소를 금치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코미디같은 녹화사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현 정부의 지시에 따라 페인트칠을 했으며 이유는 말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페인트칠하는 값이 중국 돈 47만 위안(약 5,700만원)이 들어갔답니다. 이 돈으로 진짜 나무를 심었으면 더 푸르게 만들 수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이 산이 푸르게는 보일지 모르나 생명은 없는 것입니다. 얼마 가지 않아 흉한 보습만 하게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외형적 크리스천은 페인트칠한 산과 같은 것입니다. 껍데기만 남아있는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고 하셨습니다. 페인트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껍데기만 남아있는 크리스천이 아니라 생명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95년 개신교인은 8,760,336명이었고 천주교인은 2,950,730명이었습니다. 개신교인이 약 2/3이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2005년 조사에서는 개신교인 8,616,438명이며 천주교인 5,146,147명입니다. 천주교는 배 정도가 성장한 반면 개신교는 오히려 15만 명이나 줄었습니다. 열심으로 보면 개신교가 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원인에 대해서 한마디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존재보다는 행위에 우선을 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는 전도와 선교를 지향하며 열심을 가지는 교회에서 더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가 우리의 사명임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 어떤 것이 궁극적으로 바른길인지는 우리가 결정하고 가야하는 것입니다.

기업형 교회관을 버려야 합니다.
저는 교회성장학에 관한 책들을 보면서 가끔 깜짝 놀랍니다. 300명 이상의 교회가 되면 목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관리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는 기존 목자의 직무에서 벗어나 시스템관리자로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조직관리를 잘하지 않으면 목회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는 그 이상 성장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도 교회는 그 이상 성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왜? 한 교회가 성장해야만 성장한다는 논리를 갖게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목회자가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계속해서 신학생이 배출되고요. 한국교회가 중소형 교회가 더 많으면 한 두 교회가 큰 것보다는 더 일을 잘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 목사님들 모임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서울의 어떤 큰 교회에서는 교역자에게 성과급 제도가 있답니다. 처음에 교역자로 갔을 때 구역을 맡기고 성도가 100명이라면 거기서부터 늘어나면 늘어난 만큼 성과급을 지급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교회가 크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동의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쯤 되면 어떤 교역자에게는 성도가 돈으로 보일 것입니다.

기업형 교회관이 잘못된 이유는 교회를 기업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경제 논리에 밝은 요즘 교인들은 교회를 마치 기업처럼 생각하고 교역자를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를 기업처럼 생각하는 잘못된 이유는 “존재”나 “근본” 보다는 “행위”와 “기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업이란 가장 효율적이고 경쟁력 있는 방법을 통해 물건을 생산해 내고 팔아야 합니다.
어떤 기업주가 “우리 회사는 가정과 같습니다.” 하면서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또한 기업을 하려면 그렇게 해서는 기업이 안됩니다. 기업은 생산성을 통해서 이윤을 낼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지친 영혼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또한 똑 같은 논리로 나가고 있다면 그들은 쉴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로 갔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안에서 한 가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 자녀라는 것은 생산성을 위한 존재가 아닙니다. 한 가정의 예를 들어봅시다. 말썽만 부리는 딸이 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생산해 내지 못합니다. 무엇을 생산해낼 능력이 있어서 가족의 일원이 아닙니다. 그리고 커서 나중에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될 수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또한 자녀를 키우고 키워준 것을 투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갚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존재로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장모님은 83세가 넘으셔서 교회에 오셔서 아무 일도 못하시고 안 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는 존재함으로서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존재”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선교단체는 간혹 투자에 대한 “생산”이라는 말로 목표를 설정합니다. 점검을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효율성만을 따지다 “생산” 만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부모는 좋은 결과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도하고 많은 뒷바라지를 합니다. 그러나 자녀를 결코 투자관계에서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아내와 남편, 자식들이 결코 이익을 벌어들이는 수단이 아닙니다. 가족은 생산 능력이 있든 없든 모두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우리는 모두 자녀일 뿐입니다. “존재”로서만 그 이유가 충분한 것입니다.

요 5:31-47절에 보면 “기업형 교회”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시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을 믿고 나아오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제시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게 잘못만 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동양의 어떤 군주처럼 폭군의 모습도 없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신분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마구 노예로 부리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의 가치관이나 철학은 그래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믿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그들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한마디로 더 크고 더 나은 시스템을 구축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그들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종교적 체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요 12:37-39 참조). 이처럼 유대교는 신약시대의 “기업형 교회”였던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서로를 시스템 적인 관계로 생각합니다. 이런 부부는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평가를 합니다. 결국 자신이 절대적인 손해라고 생각하면 이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부는 용서와 사랑이 메말라 갑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기업형 사고방식이 아니라면 어떤 방법이 효과가 있겠습니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집에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안에”라는 말이 무려 5번이나 나옵니다. 공장이 아닌 하나님의 집에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공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동산에서 멀어졌는지는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책임이 있다” 또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진전시켜야 한다”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건설한다, 확장한다, 진전시킨다” 등과 같은 표현들은 사실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성경이 사용하는 표현들과는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성경이 사용하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관한 인간의 반응에 초점을 맞춥니다. 즉 성경은 “영접한다, 들어오라, 구한다, 상속받는다”와 같은 용어를 사용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언어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성경의 언어는 “존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해 “열매”라는 비유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본문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경은 왜 열매라고 표현합니까? “목수가 견고한 가구를 만들었다, 제과 업자가 맛있는 빵을 만들었다” 등과 같은 표현 대신에 열매라고 표현한 것은 “행위”에 초점을 두게되면 하나님이 원하는 성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존재”가 “행위”에 우선합니다.
“존재”가 “행위”에 우선할 경우 오히려 교회는 활력이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존재” 함으로 만도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것입니다.
“행위”를 강조할 경우 성과를 내지 못하는 성도는 성도도 아닌 것처럼 취급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까지 경쟁을 유발시켜 여기서 뒤떨어지는 듯한 사람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아버지 집에 존재한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단순히 기독교를 종교로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종교를 초월합니다.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만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존재”의 가치를 알게되면 내면이 변화하게 됩니다. 살아야 되는 이유가 분명해 집니다. 하지만 “행위”로서는 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선한 것처럼 행동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변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시스템이 아니라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올라갔습니다.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갑니다. 한사람은 유달리 승부 욕이 강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지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 가면서 일했습니다. 어느덧 산을 내려갈 시간이 되어 두 사람은 각자 서로가 수고한 결과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셈일까요? 쉬어가면서 일한 친구가 더 많은 장작을 장만했더랍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했는데도 왜 자네 것이 더 많단 말인가?”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설명했습니다. “나는 10분씩 쉴 때마다 도끼날을 갈았다네.” 당연히 이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끼날 무디어 지는 줄도 모르고 덮어놓고 열심만 낸다고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면 이와 같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집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으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지 않습니까? 존재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에녹이 특별한 일을 했다는 성경에 근거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바벨탑을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철저하게 “존재”에 초점을 두고 “행위”는 경계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이것이 반대로 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는 필요하지만 “존재”를 우선하지 않은 “행위”는 허무만이 남게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서 그 생명을 잃는다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마 16:26, 막 8:36, 눅 9:25)고 하셨습니다.

○ 온 교회를 가득 채우고, 더 큰 예배당을 짓고서 온 가족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 많은 헌금을 모금하고 결국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 원대한 꿈을 이루었지만 존엄성을 잃었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저는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 중에 이런 사람을 많이 보았습니다. 정말 개인적으로 측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행위”의 교인이 아니라 “존재”의 성도로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 솥 밥을 먹는 사람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3. 한 솥 밥을 먹는 사람들) / 본문 : 요 21:15-17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가진 왕자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왕자들이 자기가 가진 값진 보물을 가지고 공주를 찾아갑니다. 길을 가다가 세 왕자가 우연히 만났습니다. 서로 자기가 가진 보물을 자랑합니다. 이 때 천리안을 가진 왕자의 거울을 통해서 보니까 공주가 아파 죽어 가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왕자들은 천리마을 가진 왕자의 말을 타고 번개처럼 공주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천년 묵은 불사의 약초를 가진 왕자가 공주에게 주어 공주를 살려냅니다. 문제는 이 세 왕자 덕에 살아난 공주가 누구와 결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보시대를 살아가는 네티즌들은 천리안을 가진 왕자 편을 들것입니다. 그리고 자동차의 시대를 맞이한 포드나 현대가 사람들은 천리마을 가진 왕자 편을 들것입니다. 그러나 농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농자천하지대본’의 사상으로 불사약을 먹인 왕자와 결혼해야 된다고 할지 모릅니다.

미국에는 3십만 개 이상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약 5만개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교회도 가지각색의 모습과 철학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에게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가지각색의 대답을 듣게됩니다.
● 어떤 교인들은 예배의 형식에 초점을 맞추어 “조용하고 평온하고 엄숙한,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경이로움을 일깨워 주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와 밴드를 동원해 기쁘고 즐겁게 드리는 교회를 구분합니다. 이런 분들은 잘못하면 교회를 휴양지나 컨트리클럽 또는 이성교제의 전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어떤 교인들은 교회의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구분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부패한 세상과 싸워 승리해하는 공동체로 인식하는 교인도 있습니다. 또한 사회 봉사나 선한 행실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교인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요새나 원형경기장과 같은 교회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 어떤 교인은 세상문화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 그들의 문화를 교회문화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교인은 교회를 은행이나 패스트푸드점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어떤 교인들은 교회는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통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반대로 최신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현대형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교인은 대형쇼핑몰과 같이 필요한 것을 교인들에게 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교토에 가면 “천불상사(千佛傷寺)라는 절이 있답니다. 이곳에는 가부좌를 한 천 개의 불상이 정렬되어 있는데 천 개의 불상 모두가 모습이 다르답니다. 그래서 자신하고 비슷하게 생긴 불상을 골라 예불을 드린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하고 비슷하게 보이는 것을 선택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농경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세 왕자 중에 불사의 약초를 먹인 왕자와 결혼하는 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단순히 농경시대에 살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각은 천리안과 천리마는 단순히 사용만 했기 때문에 여전히 왕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사약을 먹인 왕자는 이미 공주가 먹었기 때문에 그 왕자만 보물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여러분들은 앞의 경우처럼 복잡해 질 것 같습니다. 아마 최서은이에게 물어보면 그 답이 쉽게 나올 것 같습니다. 찝짜가(십자가)가 있어야 교회라고 말할 것입니다. 서은이는 십자가만 보면 찝짜가 찝짜가 하고 부른답니다. 너무나 십자가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주신 것입니다.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우리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어야 삽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먹는 것을 너무 밝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말 음식을 보면 못 먹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을 살아서 그런가 봅니다. 이 지구성에는 약 3,000개 이상의 언어가 존재한답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어야 나이가 한 살 더 먹는 민족은 없습니다. 그래서 철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이만 먹지말고…”그럽니다. 한국인이 먹는 것은 음식과 시간만 먹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인은 마음도 먹습니다. 그래서 욕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챔피언도 먹습니다. 축구 경기에서 전 세계사람이 한 점 잃었다(로스트)고 하는데 우리만 한 골 먹었다고 합니다. 심리적인 면에서는 겁먹고, 애먹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지만 아니 어떻게 애를 먹습니까?

육체를 입고있는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니 제일 기본적인 욕구가 먹는 것입니다. 컴퓨터시대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상업주의에도 먹는 욕구를 표방하면 사업이 성공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과는 거리가 먼 개인용 컴퓨터 매킨토시의 브랜드와 고로가 사과모양의 애플입니다. 누가 한 입 깨 물은 로고는 사과의 미각을 통해서 인간 욕구를 강조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드웨어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있습니다. 실리콘벨리의 썬 마이크로시스템사가 개발한 프로그래밍언어가 커피 브랜드의 이름을 딴 “자바(Java)”입니다. 로고도 커피 향이 나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식욕을 통한 이미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식욕이 탐욕이 되어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의 금식기도 후에 사단은 이 식욕으로 첫 번째 시험을 합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먹는 것으로 죄가 들어왔으니 먹는 것으로 해결을 해야합니다. 문선명의 통일교는 이것을 유치하게 해석을 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을 성적 타락으로 비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죄의 피가 들어왔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자신을 통해서 성교를 하면 죄가 사해진다고 합니다. 이것이 피가름이라는 통일교 교리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한 솥의 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공동체를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옛날에 손님이 오면 가족이 먹는 한솥밥에 차려낸다는 법은 없었습니다. 가문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친계(親系) 8촌, 외계(外系) 4촌, 처계(妻系) 2촌 밖의 손님은 딴 솥으로 밥을 지어냈습니다. 밥상은 물론이요 반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한 숱 가락이 한 찌개나 국을 퍼먹는 것은 위생에도 안 좋습니다. “한 솥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직계 가족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이를 생각하면 단순히 선생과 제자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야말로 한 솥의 밥을 먹은 사이입니다. 3년 6개월이라는 시간동안 한 솥 밥을 먹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 15:32)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킨 오병이어의 사건이나 칠병이어의 사건 역시 한 솥의 밥을 먹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축사하신 한 광주리에서 나온 떡과 고기를 먹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고기 잡으러 나간 디베랴 바닷가에 오셨습니다(요 21:1).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6)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순종하여 163마리의 고기를 잡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준비하신 모닥불에 고기와 떡을 굽고 제자들과 디베랴 바닷가에서 아침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의 어린양을 먹이는 일에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면 어린양을 먹일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마음이 사랑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한계가 있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세 번 모두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마다 주어진 말씀은 “양을 먹이라”입니다. 두 번째 “내 양을 치라”고 했는데 이것도 역시 같은 뜻으로 보면 됩니다. 양을 치는 것은 기본이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푸른 초장으로 잘 인도하는 것이 양을 잘 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와 제자들이 먹었던 것과 같은 한 솥의 밥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골라낸 사람, 가르치라)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알려주는 본문 가운데 하나가 에베소서 3:1-13말씀입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수천 년 동안 간직해온 신성한 비밀을 밝혀줍니다. 바울은 이 비밀을 “신비”라고 불렀습니다. 이 비밀을 수천 년 동안 하나님만 알고 계셨고 족장들도, 제사장들도, 선지자들도 심지어는 천사들도 알지 못했던 비밀입니다. 이제 이 비밀이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이 비밀이란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밀”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미스테리온(musthrivw/)이란 말입니다. 이 비밀이란 허락된 사람 외에는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미스테리온은 오랫동안 숨겨 왔지만 하나님께서 마침내 원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결정하신 비밀입니다. 바울은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셨다”(엡 3:3)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자신이 깨달아 안 것처럼 우리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엡 3:4-5).

그러면 이 신비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엡 3:6)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지체가 되어” 교회를 구성하게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신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다”(갈 3:28)는 하나님의 새 언약입니다.

우리나라가 한 솥 밥을 먹은 것은 농사신인 선농제사 때 희생당한 신성한 신체인 소의 어느 한 부분도 버리지 않고 한 솥에 끓인 국물에 밥을 말아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문무백관 백성, 거지에 이르기까지 한솥밥을 나누어 먹었던 말하자면 공식 음식인 선농탕 곧 설렁탕입니다. 그래서 큰 것을 말할 때 ‘선농단 국솥 만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솥 밥을 먹는 사람들”(설렁탕) 그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십자가로 하나된 ‘설렁탕’교회 이것이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이 비밀(미스테리온)을 전하는 것이 인간보다는 천사가 더 합당해 보이지 않습니까? 만일 미가엘이나 가브리엘 천사가 구름가운데 갑자기 나타나서 천둥 같은 목소리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선포한다면 모든 사람이 귀를 기울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는 것을 천사들에게 부탁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 3:7)고 했습니다. 사실 천사들은 복음의 비밀조차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천사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복음을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고 했습니다. 이 복음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와 설렁탕(한 솥 밥을 먹는 사람들)을 먹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이 복음의 진리를 베드로와 바울처럼 힘써 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유와 회개의 요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2. 비유(20) – 비유와 회개의 요구) / 본문 : 마 5:24-26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우리나라의 고려 공미왕 때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우애 깊은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형제가 길을 가던 중 동생이 황금덩이를 줍게 되었습니다. 아우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다 가지고 싶은 욕심이 솟는 것을 누르고 형과 반씩 나누어 갖기로 하였습니다. 이윽고 강가에 이루러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가 중간지점정도 왔을 때 동생이 갑자기 금덩이를 형 앞에 내어놓더니 “형님, 제가 이 금덩이를 발견하기 전 까지는 형님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에 조금의 흠도 없었는데 이 황금을 발견하고 나누어 가질 생각을 했을 때 욕심이 생기고 형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전 이 금덩이를 저 강물에 던져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형님이 아우의 손을 잡으며 “그래, 네 말이 뫘구나”하면서 둘이서 힘껏 금덩이를 강물 한가운데로 던져버렸답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서로 화목해지고자 할 때, 장애가 되는 것은 서슴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화목이 가능해 집니다.

오늘로서 비유에 대해서 설교한 것이 20번째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비유가운데서 어떤 점을 발견하셨습니까? 저는 예수님의 비유를 설교하면서 전체적으로 비유의 주제가 드러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종말의 때가 가까이 왔다고, 또는 종말이 반드시 오는데 그 때를 위해서 준비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세기말 팔레스틴 신학자 엘리에치르라는 랍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기 전 하루동안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선생님 어떻게 사람이 자기의 죽는 날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랍비 엘리에치르는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 할 수 있는 한 오늘 많이 회개하라. 이렇게 하면 일생 내내 회개 속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9:8에서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선의 삶입니다.

때가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러한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하라는 것입니다. “송사하는 자와 함께 있을 때 급히 사화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재판관에게 내어주면 그 때부터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비유의 내용 설정은 매우 급하게 돌아갑니다. 재판관에게 내어줄 사람은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속히 내어주려고 할 것입니다.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곧 고발당하게 됩니다. 반드시 해결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경찰서에 가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사건이 일어나면 일단 당사자와 화해를 신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돼서 경찰서까지 가면 어떻게 하든 경찰서에서 해결을 해야합니다. 민사상 고발 사건은 당사자와 해결을 원만히 해결하면 고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일단 검찰로 넘어가면 문제가 복잡해지고 시간이 오래가게 됩니다. 검찰에서 법원으로 가면 더 골치아파집니다. 법원으로 가면 일단 제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검찰에서 법원으로 넘어가기 전에 해결을 해야 불기소처분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단계를 거쳤습니다. 25절 “…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예수님이 왜 범죄자의 장면으로 이야기 하셨습니까? 다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사건을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길에 있을 때에”는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이 마지막 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
26절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빚을 다 갚기 전에는 결코 형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원문은 이것을 “진실로 … 못하리라”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우메’(ouj mh;)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마태가 예수님의 이 비유를 ‘형제의 화목’과 연결시킴으로 윤리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원래 예수님의 이 비유의 목적은 단순한 윤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형제와 화목 하는 문제를 가지고도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정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단순히 형제와 화목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화목을 그렇게 강조한 것은 형제 화목이 그러할 진데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바로 이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화목은 하나인 것입니다. 회개 없이 화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우리의 원죄를 끊는 일보다는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와도 화목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화목하지 않은 자의 예물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제사의 종류(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로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번제(레 1:3-17)는 일상의 신앙고백과 경배의 제사이며 소제(레 2:1-16)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순종의 제사입니다. 그리고 화목제(레 3:1, 7:12)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제사이며 속죄제(레 4:1, 13)는 무의식적인 범죄와 부정함과 허물을 사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레 5:1-4)는 하나님과 이웃을 적대 관계에 놓이게 한 죄를 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제사의 종류를 자세히 보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속건제를 드리지 않은 사람이 속죄제를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을 방해하였다면 먼저 이 제사를 지내야 그 다음에 자신의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로 인한 다른 사람의 피해는 그대로 놓아둔 채 내 죄만 속하겠다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 아닙니까? 지금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속건제가 드려지지 안으면 속죄제를 지낼 수 없고, 속죄제가 드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화목제를 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속해지지 않았는데 어찌 화목제를 지낼 수 있습니까? 화목제가 드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소제 역시 드릴 수 없습니다. 소제를 드릴 수 없다면 일종의 신앙고백 격인 번제는 더욱더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제사의 시작은 속건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속건제가 안되면 아무제사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속건제가 시작되면 거슬러 올라가 번제까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가 이 비유를 이렇게 적용한 것은 단순히 윤리에 초점을 두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입장하고 유대인은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선택받았다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깊이 박혀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하나님께 가기 위한 ‘화목’ 즉 우리가 강조하는 것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상태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유대인에게 지금 번제보다는 속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로만 끝날 수 있습니다. 단순히 형제와 화목만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상태에서 머물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제사가 제일 중요하다고요? 제사가 다 중요하지만 그 시작에 있는 속건제가 중요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첫 단추가 뀌어져야 다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제사의 방법이 네 가지(화제, 요제, 거제, 전체)가 있습니다.
화제는 흠 없는 수소, 암소, 숫양, 암양, 숫염소, 암염소, 산비둘기, 집비둘기, 고운 곡식 가루, 기름, 유향 등의 모든 제물(레 1:3, 10,14; 2:1,2; 3:1,6,12; 4:23,28)
요제는 화목 제물의 가슴, 첫 곡식 단(레 23:15), 첫 이삭의 떡(레 23:20)
거제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 타작 마당의 곡식, 십일조, 포도주, 기름(레 7:32; 민 15:20) 등
전제는 포도주, 독주(레 23:13; 민 28:7)로 드립니다.

그런데 속건제를 드리는 제사의 방법은 두 가지로만 드릴 수 있습니다(레 6:17-18, 14:12, 14).
화제와 요제입니다. 화제와 요제의 특징은 제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화제는 흠 없는 소나 양 등이 필요합니다. 요제 또한 화목 제물의 가슴을 식단에서 높이 들어 앞뒤로 흔들어 들이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속건제 제사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화제는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을 상징합니다(요 1:29,36; 고후 5:21).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요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제물로 바쳐짐을 의미합니다(골 1:22; 히 9:24,25).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우리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 피가 있어야 됩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도 형제와 용서하고 화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가 없으면 그 화목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으로 잘 지내보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걸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반드시 화목하게 하는 제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 제사의 시작은 속건제이며 그 속건제는 화제와 요제로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곧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회개치 않은 사람이 형제와 진정한 화목을 이룰 것 같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형제와 화목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가능합니다. 속건제가 드려져야 화목제사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눅 5:24)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오직 우리 죄를 속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을 통해서만 우리의 온전한 회개,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의 제사가 가능한 것입니다. 회개와 화목은 하나인 것입니다. 같이 가는 것입니다.

페루의 쉬피보 인디언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쉬피보어로 “사하심”이라는 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보지 않고 넘겨 버린다.”라는 말이 제시되었습니다. 이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어 거부되었다. 다음에는 “생각지 아니한다.”라는 말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기피한다는 뜻이 있어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말이 제시되었는데, 그 말은 “빚을 탕감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하심은 탕감을 넘어 베푸시기까지 하는 것이라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결국 “문질러 없앤다.”, 또는 “지워버린다.”는 말이 제시되었습니다. 이 말은 죄의 존재를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식적으로 죄를 씻어 주셔서 더 이상은 죄가 없다는 의미로 “사하심”과 어느 정도 합당하다고 하여 채택되었습니다. 멕시코의 싼 뿔라스 인디언의 성경도 “사하심”을 “약한 마음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하시려는 것은 죄와 함께 죄의식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어떤 미국인이 프랑스를 방문해서 돌아다니다가 시골의 어떤 장터에서 싸구려 목걸이를 하나 사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세관에서 높은 세금을 매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아주 싸구려 물건입니다” 했더니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고가의 고급 품목입니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고가의 세금을 물고 왔습니다. 이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서 그 목걸이를 가지고 보석 감정 전문가에게 그 목걸이를 보였습니다. 감정가는 확대경을 가지고 한참 목걸이를 관찰하더니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손님, 이건 보통 목걸이가 아닙니다. 손님도 좀 보시지요.” 그래서 가만히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보니 거기에 글자가 이렇게 새겨져 있더랍니다. “조세핀에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한 세기를 지배하던 나폴레옹의 사인 때문에 그 목걸이가 그렇게 고가품으로 인정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인과 하나님의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놀라운 기술과 계획, 하나님의 인치심 속에서 만들어진 인생으로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인생입니까!

언제나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나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께 가는 모든 방해요소를 지워버리십니다. 주님의 사인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시는 주앙교회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