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9. 십자가 복음) / 본문 : 막 8:30-38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속담에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양의 속담에는 “전쟁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란 급하면 신을 찾게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서양에 ‘바루네’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 세상에는 신이란 것이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무신론자로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다가 바다 한복판에서 큰 풍파를 만나 배가 파선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방을 바라보니 시퍼런 성난 바다만 있을 뿐, 끝이 안 보이는 지라 이제는 별 수 없이 죽는구나 하고 한숨을 내쉬며 “하나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습니다. 다행히 바람이 잔잔해지고 목적지에 도달했는데, 사람들은 그 다음부터 “바루네씨의 무신론은 육지에서는 훌륭하나 바다에 가면 소용없다”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본문이 시작하는 31절에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본문의 중반에는 34절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하반부에는 37절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도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가 고난이지만 내게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가 기쁨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기 어려운 말씀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밝힌 고난에 대해서 처음 공개되는 ‘첫 번째 고난예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야임을 좀처럼 밝히지 않으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이 늘 흠을 잡으려고 하는 상태에서 쓸데없는 공격과 오해로부터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는 당시 유대인들이나 심지어는 제자들까지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 관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고난받는 메시야 상은 제쳐놓고 오직 영광의 메시야상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고난, 죽음, 버림받음의 수모를 감수해야 하는데 제자들까지 이런 메시야 관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B.C. 586년에 함락된 이후로 예수님 당시까지 이스라엘은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 등으로 이어지는 열강들의 억압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렇듯 암담한 민족적 상황 속에서 생겨난 메시야 사상은 이방 세력을 몰아내고 이 땅에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이런 정치적 메시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32절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parrhsiva/:파르레시아)”는 ‘숨김없이, 명백하게’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는 전혀 말씀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에 말하는 것처럼 “파르레시아”(숨김없이) 말하지 않았을 분입니다. 그동안 비유로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마 9:15, 눅 5:35), “나는 받을 세례가 없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와 아들마저 죽임을 당했다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12:8, 마 21:39, 눅 20:15)등이 모두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셔야 된다는 암시적 표현이었습니다.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이 말을 하시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참 오래 참으셨던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무겁게 입을 여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아 가야할 날이 많은 자식에게 부모가 병들어 죽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일부러 찾아가 죽어야 되겠다고 말한다면 자녀의 입장에서 얼마나 충격이겠습니다.
30절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셨는데(복음서에만 81회 나옴 2:10, 2:28 제외하고 모두 예수를 가리킴) 오늘 본문이야말로 “인자”라는 말이 더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마가복음에는 14회에 걸쳐 인자가 나옵니다. 인자는 문자대로 “사람의 아들”을 말하고(시 8:4, 80:17), 에스겔에서 91번이나 언급된 예언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갖는 제일 큰 특징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고난 받아야 될 메시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인자’는 우리의 가슴을 더 저리게 합니다.
31절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예수께 고난을 주는 대상이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이끌던 주요 계층입니다. 이들은 유대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의 3대 구성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직접 육신적 상처를 입힌 로마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고 하는 책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증거로 잘못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신체적 죽임을 당하게 한 로마인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시 복음을 받아들였어야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층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렸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믿었던 도끼에 발을 찍힌 격입니다. 메시야를 제일 기쁘게 영접해야할 대상이 예수를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에 왜 이 부분을 강조하십니까? 단순히 당신을 죽인 대상을 언급하여 훗날 우리로 하여금 그 원한을 풀기 위해서 말씀해 놓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으면서도 주님을 버리시면 안됩니다. 당신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입니다. 오히려 믿었던 사람들이 메시야를 버렸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더 있지만 제일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가 영광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고난만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이것을 버리면 구원은 없습니다. 이것을 버리려고 하는 현대인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왜 다니느냐 바로 고난을 받지 않고 축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십자가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이 예수의 고난 때문에 예수를 버렸다면 우리 또한 우리 십자가 때문에, 고난 때문에 예수를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방해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고난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이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주위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을 한번쯤은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형벌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유죄판결을 받은 죄인이 있다면 사형수는 자신이 질 십자가를 직접 지고 형장까지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이 길을 가면서 사람들에게 조롱과 원망과 침 뱉음과 모든 사람들의 한을 풀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니라(ajparnhsavsqw:아콜루데이토)” 현재 명령법으로 나옵니다. 이 말은 현재 당장 지라는 것뿐만이 아니라 지속성이 강조되는 말입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언제나 지고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벗어놓는 것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기쁨입니다.

유명한 조각가 로댕은 “시련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박물관을 보지 말라. 박물관의 모든 진열된 그 아름다운 예술품은 고난과 역경을 당하지 아니하고는 그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다.”고 했다.
대부분의 교우들은 어려움을 당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돈이 많고 명예가 있을 때는 감사할 줄 모르다가 그것을 다 잃어버리고 나서 집 한 칸도 없이 털리고 나니, “감사합니다”하는 것입니다.

수요예배, 새벽예배를 통해서 사무엘 상, 하까지 보았습니다. 여기에 무슨 이야기가 나옵니까? 사무엘 상, 하 이지만 사실상 다윗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을 통해서 알게된 것은 그가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닐 때는 하나님께 원망하는 기도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죽인 이후에는 하나님께 아무런 기도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자기 아들 셋이 모두 죽습니다. 그럴 때 다윗은 하나님께 뭐라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죄 값을 받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원망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분이라면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그리고 주님을 보세요.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기에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고난 자체가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고통은 소망이 없는 고통입니다. 의미가 없는 고통입니다. 마치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 한 후에 받는 고통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고난은 다릅니다. 그 고난은 우리를 단련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버나드쇼에게 누군가 묻기를 “이 세상의 모든 책들이 다 타버리고 한 가지 책만 남는다면 그것은 어떤 책이겠느냐?”고 했을 때 그는 “구약성서의 욥기”라고 대답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랑할만한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는 재산을 잃고 열 명의 자식들도 잃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욥이 하나님을 원망할 만도 한데 욥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말한 욥은 엄청난 고통을 받았지만 나중에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고난 중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7절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다르게 표현하면 “목숨과 맞바꿀만한 것인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보아라?”가 됩니다. 이 말씀에 대한 정답은 35절의 “… 나와 복음을 위하여”입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라면 목숨과 바꿀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겠다고 속 시원하게 말한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로마서 1장 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자기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고후 4:5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몬 1: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이라고 나옵니다. 이 때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목숨과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바꾸는 사람들의 행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2006.6) 독일복음주의동맹 산하의 종교자유위원회의 토마스 슈마허 교수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공권력에 의해, 혹은 종교적 감정을 품은 다른 종교인들로 인해 살해당하는 사람들의 수가 해마다 5만 5천 명에 달하며 그 수가 가까운 장래 안에 줄어들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데이비드 바렛은 이보다 배에 가까운 순교자가 있다는 통계를 내 놓았습니다.
2000년 당시 순교자 수는 16만 명이었는데 이때부터 최근까지 3년 간 연평균 순교자의 숫자는 1.24%씩 매년 증가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증가추세라면 2025년에 가서는 한해 21만 명까지 순교자가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기독교가 왕성하게 자라나는 곳은 편안한 유럽이 아닙니다. 핍박하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복음이 살아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말 할 수 없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거듭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잔치에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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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88. 비유21 – 잔치에의 초대) / 본문 : 눅 14:15-24

“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15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어제는 권부자 자매님의 아들 돌이 있어 다녀왔습니다. 오래 전부터 전화로 초대하고 또 몇 일 전에는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강정민자매도 결혼하는데 초청장을 만들어 보낼 것입니다. 잔치 집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손님입니다. 손님이 없는 잔치 집은 정말 보기가 안 좋습니다. 잔치가 열린다는 것은 손님을 초대하는 자리입니다. 선별하여 초대할 수는 있겠으나 초대하지 않는 잔치 집은 없습니다. 옆 사람하고 인사합시다. ‘하나님의 잔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고 할 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Hom. Faber)임과 동시에 잔치(축제)하는 존재(Hom. Festinus)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비인간화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컴퓨터선교회를 시작할 때 바로 이점을 생각했습니다. 옛날 전쟁에서 이기려면 잘 무장된 칼과 방패 등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맞지 않는 갑옷과 칼을 가지고는 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잘 맞는 도구, 무기를 골라야 합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는 긴 창을 가지고 다녔고 장비는 무쇠덩이 같은 것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저는 컴퓨터가 최고의 도구가 될 것을 생각하여 컴퓨터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조건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사람이 일만 하고는 진정한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의 교육과 단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생을 잘 즐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잔치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점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돈을 벌기는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잔치를 베풀지 못하는 것입니다. 잔치를 베풀지 못하는 인간은 ‘기계적인 인간’, ‘합리적인 계산기’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모두가 잔치라고 말합니다. 백일잔치, 돌잔치, 생일잔치, 재롱이 잔치, 결혼잔치, 경로잔치, 스포츠에서도 농구잔치, 꽃 잔치, 단풍잔치, 음식잔치 좋은 것은 모두 잔치라고 합니다.

신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모두 잔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잔치에 비유하여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잔치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음식’입니다. 먹을 것이 있어야 잔치가 됩니다. 호남지방에서는 잔치 집에 홍어회가 빠지면 별로 잘 차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서두에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는 큰 축제를 베풉니다. 마태복음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하고 이 초청에 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는 떡을 떼며 축제를 동반한 예배를 드렸고 세례식이나 부활절을 지킬 때에는 들에 나가 함께 노래하며 춤추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러시아는 가히 축제의 나라라고 할 만 합니다. 연중 거의 1/3이 교회가 지키는 축제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중 제일 큰 축제일은 부활절(파스하) 입니다. 축제음식으로 “부활 달걀”(파스하 쿨리치)을 먹기도 하고 장식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흥이 많은 사람들인데 너무 전쟁을 많이 하다보니 축제가 잊혀져 버린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간은 축제 없이 살 수 없는데 교회의 예배가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축제가 안될 때 사람들은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유럽교회의 쇠퇴 원인도 교회가 축제를 잊어버린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예배가 축제를 상실할 때 사람들은 나이트클럽과 술과 세상 향락으로 범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짜 축제가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금송아지 앞에서 벌어졌던 아론의 축제를 기억합니다.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의 축제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축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기도와 찬양의 축제를 회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진정한 하나님의 잔치 집입니다.

하나님은 잔치를 베풀어 놓고 우리를 그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런 초청을 제일 잘 나타내 주는 곳이 누가복음 14장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는 주님의 초청을 3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8-11절에서는 결혼축제(a wedding feast)를 말씀하시면서 상좌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겸손(Humility)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둘째, 12-15절에서는 만찬을 여시고 부자를 청하지 말고 가난한 자를 청하여 자신의 과시 욕을 보이기 위한 잔치가 아니라 진정한 이웃을 위한 잔치를 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셋째, 16-24절에서는 큰 잔치(A great Supper)라는 축제를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가르침 중에 최상의 교훈인 구원(Salvation)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속지 마세요. 세상 사람들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시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자연에 대해서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인간은 할 수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로의 초청뿐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잔치는 그리스의 날 곧 메시야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 베풀어지는 잔치 그 잔치를 큰 잔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아이를 위해 돌잔치를 합니다. 결혼을 하기 되어 잔치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베푸시는 잔치가 잔치중의 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잔치입니다. 구약에서 이 잔치를 잘 예언한 곳이 있습니다.

이사야 25:6-9절 “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 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7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9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잔치를 “어린양의 혼인잔치”(계 19:7-9), “하나님의 큰 잔치”(계19:17-18)라고 다시 소개합니다.

오늘 본문 큰 잔치의 비유는 초청의 잔치라고 불려집니다. 16절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주인이 오라고 부르는 데는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서 언급되었던 두 가지 경우의 잔치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8-11절에서는 결혼축제에서 ‘겸손’을 말씀하신 것과 둘째, 12-15절에서는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잔치를 베풀지 말라고 한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 주님이 오라고 하는 것은 최소한 그런 잔치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초청하시는 데는

첫째,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오라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사람들(계층)을 초청하니 오라는 것입니다.
셋째, 아직 빈방이 있으니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러한 초청에 대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이유와 구실을 내세워 이 초청을 거부합니다. 그 핑계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18절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나가 볼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큰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 밭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불가불”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핑계입니다. 땅을 산 사람이 보지도 않고 샀을 리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보러가겠다는 것은 그곳에 마음이 있고 자꾸만 보고 싶은 것입니다. 물질에 가치를 가지는 사람입니다. 언젠가는 두고 가야할 것에 집착하여 주님께 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19절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적 표현으로 바꾸어보면 “자동차를 새로 샀는데 지금 가서 시운전을 해보아야겠습니다.”가 됩니다. 그럼 왜 하필 이 시간에 가야합니까? 이것도 핑계에 불과합니다.

셋째, 20절에 보면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합니다. 먼저한 사람의 핑계보다는 제일 무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사람은 더 강력한 거부 의사를 나타냅니다. 노골적으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거부인 동시에 고집스러움을 보여줍니다.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이렇게 복음에 대해서 정면으로 거부한 사람들 마지막 날에 주님도 저를 모른다고 하실 때 핑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의 풍습에 의하면 잔치에 사람들을 청할 때는 두 번 초청을 합니다. 한번 잔치가 열리기 훨씬 앞서서 몇 일 전에 알리는 것이고(16절), 다음은 잔치 시간이 임박해서 오늘 몇 시에 잔치합니다(17절)라고 초청합니다. 전자가 구약의 초청이라면 후자는 신약의 초청입니다. 우리는 잔치에 참여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음식을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준비해 놓으셨습니다(잠 19:1, 사 25:6, 마22:1). 그리고 이 풍성한 것을 선물로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잔치 집의 사람이 없으니 주인은 다른 방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하나님의 일군들에게 잔치에 초대할 방법을 다시 일러주십니다. “빨리”라는 단어가 이제 시간이 다 되었고 급박함을 알립니다. 지체할 여유가 없습니다. 복음 전도의 시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우리가 가야할 곳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먼저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상을 말해줍니다.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이제 부족한 사람들을 불러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상류층의 사람들 종교지도자들은 이 초청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여 초청하였는데도 자리가 더 남아있었습니다. 그 때 가야하는 곳이 23절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길과 산울은 시내의 거리보다는 사람이 덜 다니는 곳입니다. 지금은 시대적인 시기는 후자인 것 같습니다. 복음이 유럽을 한바퀴 돌아 우리에게 왔습니다. 여기는 이미 잔치집의 손님이 아주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조금 남은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부른다는 것입니다. 때가 상당히 임박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 때는 급박하기 때문에 강권해서 채우는 것입니다. 상대편 입장을 다 들어줄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어떤 나라에 큰 난리가 났습니다. 급기야 왕이 그 왕궁을 버리고 시골로 피난을 갑니다. 왕은 농부의 옷으로 갈아입고 신하 몇 사람과 함께 어느 마을에 몰래 숨어 들어갔습니다. 한 농부가 이 낯선 길손들을 잘 영접해주었습니다. 변장을 한 왕과 신하들은 며칠 동안 거기서 잘 묵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라 정세가 회복되어 왕은 환궁하게 되었습니다. 환궁한 왕은 그 농부가 자기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준 것과,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남을 잘 대접해준 것이 기특해서 농부를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농부는 낯선 길손들이 왕과 신하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왕은 농부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 그러나 농부는 이렇다할 소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이시여, 이제 와서 제가 출세를 원하겠습니까, 영화를 원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금은보화를 원하겠습니까? 그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다만 며칠 후 제 생일잔치에나 한번 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침 환갑인 지라, 자식들이 힘을 모아서 조촐하나마 잔치를 열어준다는 군요.” 왕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며칠 후, 한 나라의 왕이 시골 초가집에 사는 일개 농부의 환갑잔치에 왔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 집은 귀한 집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집이 되었습니다. 그일 하나로 인해 농부의 가문은 위대한 가문이 되었습니다.

지난 15일 송도지역 코오롱건설의 ‘더 프라우’ 청약 때 몇 일 전부터 텐트를 치고 밤을 세워가며 줄을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좋아하는 운동경기를 보기 위해서도 표를 사고 줄을 섭니다. 교회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조금 예의바른 사람은 잔치 집에 잘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자잘한 세상 잔치에는 모두 참여하고 ‘어린양의 잔치’, ‘제일 큰 잔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진짜 중요한 잔치 집을 잘못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큰 잔치 집에 반드시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7.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 / 본문 : 막 5:24-34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오래 전에 나온 이야기 가운데 다시 뜨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줌마와 조폭’의 공통점입니다. 첫째로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는 것입니다. 조폭은 무리를 지어 활동합니다. 아줌마는 아줌마 부대를 형성합니다. 둘째는 형님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조폭은 윗사람을 철저하게 형님으로 대우하고 족보도 있습니다. 아줌마는 만나서 5분만 이야기하면 형님 아우가 생깁니다. 셋째는 문신을 합니다. 조폭은 온 몸에 문신을 하고 아줌마들은 눈썹에 영구 문신을 합니다. 네 째는 제 식구들을 끔찍이 챙깁니다. 조폭들은 자기파를 위해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아줌마들은 자기 가족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다섯째 무대뽀입니다. 조폭들은 세상의 법도 겁나지 않습니다. 아줌마들은 아무도 못 말립니다. 여섯째 밤만 되면 무서워집니다. 조폭들은 밤이 되면 제 세상입니다. 아줌마들도 밤이 되면 집에서 자기세상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칼을 잘 쓴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랍 사람과 결혼한 한국 여자들에 대해서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슬람인이 되든지 아니면 아랍에 가서 멸시 당하면서 사는 줄 알았습니다. 미국여자들도 그렇게 살잖아요. 근래에 터키 선교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 아줌마들은 선교사에게 복음을 전달받고 남편을 끌고 교회에 나온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도 아줌마입니다.

1.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사실 여러모로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분 느껴보셨나요? 예뿐 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를 향해서 오고 있습니다. 나는 그 꽃을 받을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잘 모르지만 “나에게 꽃을 주다니…” 그런데 그 사람은 나를 스치고 지나가 다른 사람에게 꽃을 주는 것입니다. 그 때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초라한 마음이 됩니다.
이 여인은 남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본문의 모습도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 틈바구니에 끼어 있습니다. 본문 앞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자기 딸이 죽어간다고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시는 중입니다. 이 얼마나 비중 있는 이야기입니까? 회당장에 비해서 이 여인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회당장은 알려진 사람입니다. 아마 하나님을 잘 믿는 바리세인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정말 대단한 이야기, 죽은자가 살아난 이야기 중간에 끼어있습니다. 저도 이런 비슷한 기분을 많이 느껴보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어떤 모임에 참여하게 되는데 큰 교회 목사님들의 틈바구니에서 초라하게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모 언론사에 갔을 때는 자동차가 좋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은 다 안내하는데 나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더라구요. 찬양을 잘합니까? 운동을 잘 합니까? 제가 기를 피려면 컴퓨터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 역시 본문처럼 끼어있는 인생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는 도중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본문이 갑자기 끼어 들게 된 것입니다. 마치 본문처럼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야기, 회당장이라는 영향력 있는 집안의 이야기 중간에 끼어 있어 주위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끝없는 고통 속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무기력하게만 보이는 이 여인의 이야기가 나 자신의 이야기와 너무나 닮지 않았습니까? 마음 문을 여시고 이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은 한마디로 참으로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군중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였습니다. 그렇게 군중들로부터 밀려나서 저 쪽 한구석에서 예수님이 가시는 쪽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게되는 이 여인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는 이 여인은 중병에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겪고 있는 고통은 세 가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첫째로 이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면서 살아왔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자가 피를 흘린다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자신의 병적인 고통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따돌림까지 당하면서 살아야했습니다.
둘째로 본문 26절에 보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병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고생만 더했습니다.
셋째로 이런 고생 끝에 찾아온 것은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의료 보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산은 다 탕진했는데 피는 여전히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는 따돌림을 당하고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질병은 몸에 짊어지고, 가산은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이제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여인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딱 한번 결사적인 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꺼져 가는 희망을 붙들고 이제 마지막 시도를 해 보아야겠다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녀를 행동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그녀로서는 이것이 마지막 선택이라고 믿었습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다 신경 쓸 만큼 그녀가 처한 입장은 한가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간절히 손을 뻗었습니다. 힘을 다해 뻗은 그녀의 마지막 인생의 몸부림은 그녀의 손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닫자 예수님의 능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옷에 손이라도 대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가난함이나 좌절과 부끄러움을 뛰어넘어서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갈망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혈루병이 있는 여인이 유대인의 건강한 남자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사회의 이런 통념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벽을 깨어 부스고 일어난 접촉입니다. 그저 지나가다 스친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두터운 벽을 깨고 그녀는 마지막 인생을 걸고 예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의 권능이 전달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결과로 그토록 소망했던 일이 드디어 일어났습니다. 이 때의 일을 성경은 본문 29절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라고 기록합니다. “곧”(euthus)이라는 즉각적인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즉시 피가 멈추었고 그 결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예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죽어가던 육체가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나가는 것을 아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밀고 밀리며 예수님의 옷에 손을 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이 나간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예수님께 손을 댄 이 여인에게만 능력이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짤막하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 아마도 이 명령은 제자들에게 다음 같은 명령이 되기도 합니다. “그녀를 찾아 보아라.”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지시에 제자들은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군가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병자와 권세자 사이에서 일어난 이 접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대꾸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밀었을 수 있게죠.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이 만진 것을 신경을 쓰시다니 그냥 가시죠.” 오히려 예수님이 과민 반응을 보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나간 것을 예수님과 이 여인만 알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과 이 여인만이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영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감동된 드라마에서 제자들은 아무 일도 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들은 예수님을 육체적으로만 보호하고 있는 것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 여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33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이 여인이 스스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마치 가져가서는 안될 어떤 물건을 훔쳐간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이 일로 “주님의 처분만 바랄 뿐입니다.”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더러운 몸으로 신성한 예수님의 몸을 만졌다고 생각하니 두려웠습니다.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만졌을 때 사람들이 죽었던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두려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죽어야 될 만큼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한테 그동안 얼마나 거칠게 대우를 받았고 한마디로 왕따를 당했습니까? 이제 병은 나았지만 이것은 사전에 허락된 일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으로 일방적으로 나아간 행동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주께서 어떤 처벌을 내리셔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처분만을 바라고 있는 이 여인에게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이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이 예수님이 이 여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여인이 하나님의 나라에 식구가 된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의 언제나 그리하셨던 것처럼 예수님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이 같은 무지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 명령하셨으니”(행 17:30) 하나님은 우리의 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잠시 그것은 생각지 않으신 채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언제나 주님은 하나님은 그 자리에 여전히 계실 뿐입니다. 손을 뻗어야 하는 것은 나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으로 “평안히 가라”고 축복하고 헤어지십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분명히 이 여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십자가 아래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또 한 사람이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파트너를 얻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본문은 끝나고 마가는 원래의 이야기로 뒤돌아 갑니다. 좀더 크고 멋진 이야기로 뒤돌아갑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야기가 더 크고 멋있는 이야기로 뒤돌아 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회당장의 딸이나 이름 없는 이 여인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새 식구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식구들은 이렇게 모인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세상이 더 이상 소망과 희망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세상의 벼랑 끝에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여인에게 있었던 혈루병은 예수님을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우리 중에는 육체의 이런 병을 안고 살아가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 그렇지 않다 해도 결국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절망가운데도 소망이 있습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는 이 세상이지만 주님은 나를 향해 걸어오십니다. 손을 내밀기를 바라십니다. 손을 내밀어 주님을 잡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 전 중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이 보내온 소식입니다.
이분은 북한 가까운 지역에서 한인교회를 하는데 북한 사람 하나가 교회 앞마당에 쓰러져 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많은지라 그냥 알아서 하지! 하고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런데 전화소리에 교회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며 그렇지 않아도 북한에서 온 사람 때문에 교회가 골치가 아프다고 시끄럽게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 교회를 갔습니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뼈만 앙상하게 남았는데 이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교회가면 살 수 있다고 해서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앞 마당에서 몇 칠을 있었고 찬송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집으로 이 사람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조금 회복되어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청진시 수남지역에서 온 이광일(36세)입니다. 북한에서 굶어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어차피 죽는 것이기에 원망이나 후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을 통해서 이런 환대를 받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계시는가 봐요!” 하면서 쉬엄쉬엄 하던 말을 마쳤습니다. 선교사님은 이 사람을 살리려고 노력했으나 보름이 지나 죽었습니다. 죽어가면서 마지막 그가 남긴 말은 그가 마지막으로 북한에 있는 제 가족들이 저를 찾을지 모르니 하나님 믿고 간다고 전해달라고 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내 가족들에게 예수를 전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한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선교사님은 그의 손을 꼭 쥐어 주면서 어떻게 하든지 광일 형제의 가족을 찾아 예수 믿게 하겠노라고 약속 한 후 주께 광일이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간절히 했습니다.

율법의 완성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6. 율법의 완성) / 본문 : 마 5:17-2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성도가 많은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작은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나름대로 다 어려움이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작은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말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 같은 일이 지난주에 일어났습니다. 바로 사모만 앞에 두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저는 수 천명 있는데서 설교 잘하는 목사가 존경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모만 두고 설교하는 분이 더 존경스럽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개척해서 8개월 동안 사모만 앉혀놓고 설교했답니다. 이런 분이 대단한 것입니다.
다른 목사님이 고백한 것입니다. “목사역할이 쉬우냐?, 아버지역할이 쉬우냐?” 이 목사님은 주저하지 않고 아버지역할이 더 힘들다고 고백했습니다. 목사는 성도 앞에서 적당히 덥고 지나칠 수 있지만 가족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만 설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여! 주여! 외쳐도 진실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내 가족이 알고 하나님이 아십니다.
목회자 신문에 보니까 안타까운 사모님 고백이 실렸습니다. 목사님이 여 집사님이 교회 건축해 주겠다고 해서 집을 나가셨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연락이 없답니다. 저에게 교회 건축해 주겠다고 하지 마세요. 특히 여 집사님들! 그래서 사모님은 성도에게 무어라 말할 수도 없고 해서 당신이 목사가 되셔서 목회를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 교회에서는 “돌아와 돌아와 집을 나간이여 ~~” 찬양을 부른답니다.

성도냐! 목사냐!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여행사에서 남쪽의 교인들을 모아 백두산에 관광객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장로님들을 구분해서 모시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평신도”라는 깃발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백두산의 한 고려인 안내원은 남한에 “강원도, 경기도 … 그리고 평신도”가 있는 줄 알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든지 하나님 앞에 진실이 없으면 안됩니다.
구약에 역사에 보면 모세, 여호수아 이후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선지자, 사사를 보내십니다. 그러나 모든 선지자, 사사가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6대 사사로는 옷니엘(삿3:7-11), 에훗(3:12-30), 드보라(4-5장), 기드온(6:1-8:32), 입다(10:6-12:7), 삼손(13-16장)이 있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사사인 삼손은 나실인으로 사사기 13장에 출생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 외에 출생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기록된 사람 사무엘, 세례요한 정도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의 관심 속에 출생을 했습니까? 그러나 그는 딤나에 가서 여자에게 빠지고 맙니다. 그 이후로 이렇다할 기록이 사사로 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정말 큰 실망입니다.
사사시대는 결국 실패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도 주변 나라와 같이 왕이 필요하다고 하나님께 떼를 씁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무슨 제도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제도야 언제든지 고칠 수 있지만 법이 없이 망하는 나라는 없는 법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무슨 제도가 없어서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요구를 하나님은 들어주셔서 왕을 세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은 사무엘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범죄 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사무엘상 15장 11절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는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후에 다윗의 왕위를 계승받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다윗 왕 같은 왕은 없습니다. 모든 전쟁에서이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잘 순종하던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나라가 평안해져 갈 무렵 사무엘상 11장에 보면 자신의 군사들은 암몬과 전투 중에 있는데 자신은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고 있던 밧세바를 봅니다. 그리고 간통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그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 내 보내서 고의로 죽게 만듭니다. 이것은 살인죄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려고 한 배신적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크게 실망하시고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꾸짖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잘 따르고 순종했지만 그의 범죄를 통해서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며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겨놓았습니다.

우리 내면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본문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이것은 오직 예수 외에는 율법의 완성이 일어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오직 예수님만이 이 죄의 고리를 끊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만은 안됩니다. 이것은 율법이 불완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율법을 지켜낼 만한 인간의 힘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몸은 있지만 갑상선 호르몬이 우리에게 분비되지 않으면 사람이 힘을 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끊임없이 공급되지 않으면 우리는 힘을 잃게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지켜졌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이것이 지켜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의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plhrovw:플레로오)는 “가득 채우다”라는 뜻입니다. 율법에는 무엇인가 비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이 요한복음 2장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요 2:7)라고 했습니다. 채워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엇을 채웁니까?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창조주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때(시 42:1),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막 12:30)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영을 채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주시는 성령을 채워야 합니다. 성령을 채워야할 우리 마음에 세상의 욕심과 탐욕으로 채워져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껍데기뿐인 율법은 힘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허울만 남겨놓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겉치레뿐입니다. 무디는 “불꺼진 등대는 위험만 가져다 줄 뿐이다”고 했습니다.

본문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나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을 우습게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제일 엄격한 종교 집단입니다. 요즘은 큰 교회들도 수요예배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녁에 모이기가 어려워서 수요일은 낮에 모이는 교회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주일 낮에 천여 명이 모이는 교회도 몇 십 명 안 모인답니다. 바리새인들은 우리의 열정과는 달랐습니다. 바리세인들은 한마디로 삶 전체의 시간이 신앙생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열심인 사람들입니다.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하루 세 번 이상 기도했습니다. 안식일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금식합니까? 솔직히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합니까? 오늘날 주일을 바리새인이 안식일 지키듯이 지킵니까? 어쩌면 우리는 그냥 공짜로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 같지 않습니까? 서기관들은 어떻습니까?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늘 연구합니다. 지식에 있어서는 탁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서기관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행함에서나 지식에서 우리는 결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들의 신앙이 비록 형식에 있었다고는 하나 우리는 이러한 형식이라도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다 버리고 이들보다 우리의 신앙이 낫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비판하신 것은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따라합시다. 통째로 드리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바울이 말한 이 방법 위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머리 써서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가 무슨 말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다 가져 가십시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드리기는커녕 하나님의 것을 어떻게 가져올 까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가져가시는 것에 대해서 불평만을 늘어놓지는 않습니까?

본문 19절에서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라고 되어 있어서 마치 우리의 행위로만 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2주전의 설교제목이 “존재는 행위보다 선행한다”였습니다. 그래서 마치 행위가 필요 없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잘 보십시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행위 자체가 완성이 아닙니다. 우리 행위는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행위로만 절대 인간은 온전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 길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온전히 주님께 맡길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절대 우리의 행위로 채울 수 없는 부족함을 채우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완성이지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그 날 이후”라는 글에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은혜를 베푼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 지상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시는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지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한 술 주정꾼을 만났습니다. 거의 폐인이 되어 손발이 심히 떨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여,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소?”라고 물었습니다. 술 주정꾼은 예수님을 가만히 보더니 “나를 고쳐 주신 분이군요.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당신이 건강한 다리로 고쳐 주셨지요. 절름발이일 때는 구걸하며 살아도 부끄럽지 않고 그런 대로 살아갔는데, 발로 뛰면서부터는 얻어먹을 수도 없고 마음에 맞는 직장은 없어서 방황하다가 이처럼 되었습니다.” 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예수님은 깊은 상념 속에서 이번에는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한 불량자가 선창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고 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대낮에 이게 무슨 짓이오?”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전에 앞을 못 보던 소경이었을 때 당신은 진흙을 발라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기뻤고 온 세상이 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눈을 뜨고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결국 화풀이를 하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하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나는 그 은혜의 보답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은혜를 화로 갚지는 않았습니까?
세익스피어는 “은혜를 모르는 자식을 두기란 독사에게 물리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이 은혜를 갚는 길은 오직 한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하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사람이 유럽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하는 말이 런던의 호텔 방 창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런던, 파리, 로마 등에 감동하지 못했습니다. 굳게 닫힌 창문 하나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단점과 싫은 점에 몰두해서 삶의 빛과 즐거움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굳게 닫힌 창문에 집착하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주님의 은혜를 전할 수 없습니다. 단점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용서와 사랑이 날아가 버립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신앙생활은 나 자신에 대해선 엄격하되 다른 사람에 대해선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이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