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선을 쌓으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4. 마음에 선을 쌓으라) / 본문 : 눅 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어느 한 가정이 해수욕장에 놀러갔습니다. 어린 아들은 수영하는 재미에 자꾸만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불안한 어머니는 심하게 꾸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불만이 가득해서, 왜 아버지는 깊이 들어가도 말리지 않으면서 자기만 야단치느냐고 투덜댔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하는 말이 “아버지는 보험에 들었단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황금 만능주의 시대를 잘 대변해 주는 내용입니다.
제가 성경의 동물사전을 만들다가 비둘기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둘기의 가장 큰 특징으로 뽑는 것이 비둘기는 어떤 새 보다도 가장 잘 놀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본 비둘기는 놀라기는커녕 너무 무감각해진 비둘기들입니다. 아마 전자는 산비둘기고 제가 본 비둘기는 집비둘기라 그런가 봅니다. 원래 집비둘기는 없었지요. 먹을 것을 찾아 자꾸만 내려 오다보니까, 또 사람들이 평화를 상징한다고 잡아다가 기른 것이 무감각해진 도시 비둘기를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렇게 무감각해지면 안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영의 세계에 대해서 투명하고 맑아 죄에 대해서 민감하여 져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에 대해서

‘선’하면 우리가 얼른 생각나는 것은 본문의 말씀과 같이 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을 기독교에서 강조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것은 행함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교리관 때문입니다. 선에 해당하는 원어는 ajgaqov”(아가도스)로 “좋은, 은혜, 친절한”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날의 우리 생각과 같이 예수님 때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9:17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이에 대해서 1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질문자는 무슨 선한 일을 하는 목적이 구원을 얻기 위함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선한 이는 한 분이라고 하심으로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구원의 허락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공부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선을 행함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지만 선을 행하는 것은 구원과 직결됩니다. 아직 하나님을 모르고 선만 행하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한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미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 7절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 선을 쌓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선을 쌓는 사람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선한 사람이 또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엡 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선하지 못하면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고 선하지 않으면 문제가 많이 나타납니다. 혹 본인은 구원받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기고 복음이 전해지는 데 방해요소가 됩니다. 선교사 가운데도 인격이 안된 분이 있어 이런 분을 경험한 사람은 모든 선교사의 조건 중에 인격을 제일먼저 생각합니다. 시편 34: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또한 예수님은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대해서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각종 실과라고 하심으로 이미 우리가 먹고살기에 충분한 과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욕심을 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겠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인간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살인자의 어머니”라는 글의 제목을 대할 때 글의 내용을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저려옴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고 한탄하신 것은 이보다 더하셨을 것입니다.
최초의 살인자 어머니의 아픔을 겪은 사람은 사라 였습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은 죄가 찾아 왔습니다. 출산의 고통이 크게 더하였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사랑의 고백 대신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때문에’란 질책이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고통 받으며 출산하여 키웠던 두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의 죽음을 가슴에 묻어야 했고 인류 최초의 살인자의 어머니가 되어야 했던 사람이 바로 사라였습니다.

마음으로 범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행함을 경히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원인이 또 하나 있습니다. 선과 악은 이미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인 마음을 잡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잠 6: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같다고 합니다.
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음은 지켜야 됩니다.
잠 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것입니다.
결혼식 때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이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포기하지 마세요. 반드시 소망하게 되면 좋은 날이 옵니다.

어떤 목사님이 어려움을 당한 어느 가정을 심방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집의 외아들이 어쩌다 불량소년들과 사귀더니 가출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부모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 그 가정은 일시에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어머니는 줄곧 울기만 합니다. 기도하고 위로하고 성경으로 권면도 하고 심방을 마치고 나왔지만 모두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행했던 여집사님 한 분이 뜻밖에도 너무나 담담해 보이 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그 여집사님이 이야기합니다. “가출한 아들로 해서 울고 있는 저분들이 저는 오히려 부럽습니다. 저는 속을 썩이더라도 그런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여러분, 이 심정을 이해하겠습니까 ? 바로 얼마 전에 그 여집사님의 아들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무리 불량한 자식이라 해도 없는 것보다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 언젠 가라도 바른 사람이 되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가져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25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간구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선을 베푸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중국 명대의 유학자요 정치가인 왕양명이 지혜로운 말을 남겼습니다. ‘살아보니 나의 인생에 어려운 일이 네 가지 있더라’ 했습니다. ‘첫째로 어려운 것은 고생스러운 것이다.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을 때에 고생스럽더라.’ 기본적인 것입니다. 배고픈 것, 헐벗는 것, 참으로 견디어내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로 남에게 냉대 받은 것이 고통스럽더라.’ 집안에서든 직장에서든 친구들에게서든,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친구로부터 냉대 받는 것, 인간 관계가 그렇게 될 때 참으로 괴롭더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고민스러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고민이 있어서 이 실존적인 고뇌와 더불어 싸울 때의 고독과 고뇌, 이것은 참으로 괴로운 것이더라고 말합니다. 그는 다시 이 세 가지의 어려움보다도 가장 더 괴로운 것은 ‘한가로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도 이 무기력증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왜 한가로이 할 일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찾아보세요. 얼마나 바쁜데요. 예수 믿고 할 일없는 사람은 예수님을 잘못 믿는 것입니다.
시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마음이 없으면 주를 찾지 아니합니다. 교회 갈 마음이 있어야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주님을 찾으면 이미 다 찾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보물을 찾은 것입니다. 진리의 길을 찾은 것입니다. 찾았다고 노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선을 쌓아야 됩니다. 쌓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계속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행실을 주님이 기억하신 다는 것입니다. 선이 쌓이는 것입니다.

“쌓는다”(qhsaurou’:데사로우)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저축해 두는 것입니다. 마음을 쓰면 우리는 그것이 버려지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마음이 쌓인다는 것입니다. 원문은 ‘tivqhmi’(티테미)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티테미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충고하다, 죽다, 이해하다, 진열하다, 만들다, 내려앉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뜻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면 쌓는다는 의미를 좀더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쌓을 때에는 나를 죽여야 됩니다. 그래야 끝까지 쌓을 수 있습니다. 쌓은 것은 또한 아름답게 진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만들고 다듬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티테미에는 “내려앉다”는 뜻도 있습니다. 쌓다가 무너지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쌓는 사람이 어떻게 한번의 무너짐도 없이 쌓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도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고 했습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살후 3:13)고 했습니다.

마음에 선을 쌓으라고 하니까 혹 여러분 중에서 마음에만 쌓고 행하지 않으면 어떡할까 염려하는 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러분! 사랑을 생각해 보세요.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이 가면 다 간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몸만 교회에 있지 마음에 다른데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가면 다 가게 되어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생명처럼 지키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2)고 하셨습니다.
선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악과 반대되는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선은 마음에서부터 나옵니다. 마음에 선을 쌓아두시며 사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은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부분입니다.
마음을 만져줄 수 있는 사람만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마음을 만져줄 수 있는 비결은 먼저 마음을 주어야만 한다.
마음을 만져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
높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마음 문을 열지 않는다.

마음을 움직이는 도구는 마음뿐이다.
그 마음은 순수해야 한다. 그 마음은 깨끗해야 한다. 그 마음은 아름다워야 한다.
성숙한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다. 성숙한 마음은 세워주는 마음이다. 성숙한 마음은 덮어주는 마음이다.
마음을 얻는 것이 재물을 얻는 것보다 낫다. 마음을 잘 만져주라. 마음을 잘 치유해 주라. 마음을 잘 이해해 주라.
- 《좋은 글》中에서 -
 

환경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3. 환경) / 본문 : 마 6:30-34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콩을 밭에다 심으로면 콩 나무가 되지만 방 안 시루에다 심으면 콩 나물이 됩니다. 같은 콩이지만 자라나는 환경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게 하는 요소를 ‘ 유전 환경 개성’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란 유전인자 속에서 태어나고 환경에서 자라서 자기의 독특한 개성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 중에 일생을 통해서 가장 깊이 영향을 끼치는 것은 환경입니다.

한 가정에 천사처럼 착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습니다. 부모는 순진하고 애교 넘치는 딸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딸에게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얼굴은 사나워지고 말투는 표독스러워졌으며 행실은 나빠졌습니다.
부모는 딸이 갑자기 변한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 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우연히 딸의 책가방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요괴인간이 잔뜩 그려진 책받침과 불량만화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딸은 공부할 때마다 책받침에 그려진 끔찍한 요괴를 바라보며 그 이미지를 마음 속에 키웠던 것입니다. 딸의 마음은 어느새 파괴적인 성격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현명한 어머니는 딸에게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진 책받침과 위인들의 명상록을 선물했습니다. 이때부터 소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예전의 착한 딸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좋은 환경이 좋은 사람을 만듭니다.

환경이란 둘러싸고 있는 것과 영향이 미치는 것으로서 자연환경, 인문환경, 물리적 환경, 정신적 환경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크게 사회적 환경(인간 환경)과 물리적 환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환경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지만 그러나 아무도 이것이 왜 변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래도 살려면 이 변함을 무시할 수 없고 그 변하는 환경에 맞추어 가야 하는데 우리는 이 맞춤을 적응이라고 부릅니다.
생물학에서 보면 ‘적자생존’의 법칙이 있어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은 생존할 수 있지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물은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정신건강에 있어서 적응하는데 성공한다면 정신건강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좋은 인격을 형성하게 되지만 실패한다면 나약한 인격을 형성하게 되어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환경과 관련하여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것은 맹자의 어머니가 교육을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시장에서 살았는데 상인들의 장사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흉내내기 때문에 맹자의 어머니는 조용한 산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번에는 공동묘지 옆이라서 곡하고 사람 파묻고 하는 것을 흉내냈습니다. 그래서 또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학자들이 사는 마을에 살았더니 공부하는 모습을 흉내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최근 AP 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 10개국 중 최고로 5명중 4명인 81%가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은 고사하고 인간의 눈으로 보아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환경을 극복하고 역경을 넘어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해결 받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믿음만을 이야기한다면 여러 믿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믿어 나만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요즘 펀드식 주식이라고 하나요. 내가 잘 모르니까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은행이 나의 재산을 알아서 관리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인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속해서 나 자신이 관리하시고 나 자신이 고민하며 해결해 나가시겠습니까?
주님은 우리 자신의 모든 일을 맡길 것을 권면하십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왕 맡겨드리는 것 다 맡기세요. 얼마나 편안합니까. 주님이 내 일을 다 알아서 관리해 주시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의 일을 다 아실 뿐만 아니라 설계해 나가십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염려한들 키를 한자도 키울 수가 없고 머리털 하나도 검고 희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 삶을 맡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이 왜 나옵니까? 맡겼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맡기지 못한 사람은 순종할 것이 없습니다.
좋은 예를 우리는 창세기 37-50장에 걸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나이 17세에 형들이 미워해서 애굽상인에게 팔아버립니다. 그 후 애굽에서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누명을 쓰고 억울한 감옥 생활을 합니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이쯤 되면 성격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릴 것입니다. 사회와 자신을 팔아먹은 형들에 대해서 원한과 증오가 싸일 것입니다. 그러나 총리에 오른 요셉의 고백은 창 45:5에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창 50:20에는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팔릴 때, 모함을 당할 때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어진 그 환경에 적응하며 신실하게 살았을 뿐입니다. 제 신앙의 좌우명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라”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일생을 맡기시고 순종하세요. 이것이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환경을 만들고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방인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방인과 구별된다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필요하면 하나님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롬 12:1-2의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스토익 윤리(Stoic Ethics)에서는 욕망과 감정을 제어하는 것을 자기의지로 봅니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부한 사람은 가장 적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스스로 만족(self-sufficient)하는 것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자족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만족입니다. 아마 불교의 철학도 스토아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그대로 수용하고 자기가 거기에 적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정신 세계에서 실제는 없는데 있는 것으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정신으로 속여 스스로 만족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헛된 욕망에 빠져서 증오를 품고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닙니다. 마치 공산주의 사상처럼 인간을 스스로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골 1:18-19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말하는 ‘자족’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족으로 스스로 속이는 정신적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성령의 충만한 만족입니다.

셋째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환경의 적응을 넘어 우리는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어야 합니다.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나라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우리는 그 품에서 삶의 과거, 현재, 미래를 형성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잠 27:8)고 했습니다.
고향의 품에 가면 마음을 나눌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뜻함이 있습니다. 함께 나눌 눈물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대인들은 이 품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에 젖어서 이 땅의 고향도 잃어버리고 있고, 영원한 본향도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갈 영원한 본향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히 11:16). 신앙은 새로운 고향, 즉 진정한 내 나라를 발견한 기쁨이자, 그곳을 향한 여정입니다. 그 길이 비록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지만, 아브라함처럼 말씀에 순종하여 지시하신 땅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평안과 영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마 7:13-14). 우리는 그 본향에 빈손으로 갈 것이 아니라, 조국 나라와 민족을 예수 사랑으로 섬겨서 풍성한 사랑과 섬김의 열매를 갖고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해야할 일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이나 율법자들은 하도 율법이 많아 늘 연구하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할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해야 할 일로 결론을 내린 것이 부모의 장래였습니다. 부모의 장래가 나면 율법을 강론하다가도 가야합니다. 한마디로 만사를 제쳐놓고 부모의 장래를 지내야 합니다. 이것이 서기관과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제일 먼저 해야할 우선 순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우선 순위는 달랐습니다. 누가복음 9:59-60에 보면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전파는 부모의 장사보다 더 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먼저”해야 되는 일이 바로 복음전파입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에서 제자운동의 교육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중에서 진정 제일 중요한 것을 복음전파에 놓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환경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환경에 지배를 받고만 있지 않습니다. 환경의 인도자 되시고 운행자 되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34절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사람들은 때때로 환경과 팔자를 탓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행동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우화를 전합니다. 어느 날 회색 털을 가진 늑대가 양 을 마구 잡아먹자 농부들이 늑대를 잡아 두들겨 팼습니다. 늑대는 소리쳤습니다.『나를 이렇게 때려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거다. 내 털이 회색인 것은 내가 알 바 아냐.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지』그러자 사람들은 더 세게 두들기며 말했습니다.『네 놈의 털이 회색이니까 두들기는 것이 아니라 네 놈이 양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두들기는 것이다』

마음은 살 수도, 팔 수도 없지만 줄 수는 있습니다. 서로 나눌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가 환경에 적응할 뿐만 아니라 극복하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먼저 복음전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주위사람 다 무시하고 전해지는 것입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먼저 마음을 줄 때 상대편이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먼저 여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은 “먼저”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먼저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철학자 …는 “당신이 평생에 한 사람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어도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 한사람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결단-세번째 교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2. 결단-세번째 교회) / 본문 : 계 3: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지난 목요일에 서울에 갔다 오는데 지하철 2호선에서 부자 자매를 만났습니다. 사람이 굉장히 많은데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순간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어떻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확률적으로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제가 서울을 매일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한 달에 많아야 서너 번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만난 것입니다. “하물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하나님은 사람이 많다고, 교회가 많다고 우리는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주앙교회에 하나님의 관심이 계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곳에 하나님이 우리 옆에 계시다는 것을 믿고 정신차리고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이란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의 불만과 욕망을 충족시켰을 때의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선현들은 완전한 충족, 완전한 행복, 절대적인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좋고, 조금 부족한 것이 오히려 좋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독일의 극작가요 철학자인 렛싱은 말하기를 “만약 전능한 자가 그의 오른 손에는 완전한 진리를 들고 왼손에는 진리의 추구를 들고 나를 행하여 ‘택하라’고 하신다면 나는 겸손히 꿇어 엎드려 ‘완전한 진리는 오직 당신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하면서 그의 왼손을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절대적이고 완전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것이며 오직 진리(예수)를 추구하며 따라갈 뿐입니다. 이것을 무시할 때 부작용이 생깁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현재 상태를 말해줍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만족이 주어진 교회가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쳐야 되는데 하나님은 이들의 신앙을 가리켜 15절에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자기 만족(The self -complacement)에 빠져있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Laodicea) 교회는 에베소에서 수리아로 통하는 대로에 있는 교회로 당시 금융과 재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지역에서 금도 생산되었습니다. 로마의 씨세로가 소아시아를 여행하는 중에 어음을 현금으로 빠꾼 곳은 라오디게아뿐이었을 만큼 세계에서도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주후 61년에 지진으로 온 거리가 파괴되었을 때도 라오디게아 시민들은 로마정부의 원조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힘으로 재건했습니다. 또한 이곳은 의류의 생산지였습니다. 양털 중에도 검은 양털의 명산지입니다. 의학의 중심지로 부르기안 안약이 생산되었고 의과대학이 있어 유명한 의사들이 있었으며 멘 이라는 의학 신전도 있습니다. 교통의 이점을 최대한 살린 금융의 중심지이자 상공업이 발달한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큰소리친 것입니다.
오늘 한국도 거의 모든 지역이 도시화되었습니다. 4천 7백만 인구 중에 시에 사는 사람이 3천 800만이며 시골에 사시는 분은 겨우 870만 명입니다. 40년 전에는 서울의 강남도 다 촌에 해당했습니다. 강남의 개포동은 예전에 개도 포기한 동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개도 포동포동 살찌는 동네로 바뀌었습니다. 충신교회가 있는 동부이촌동은 “이 촌놈의 동네”라고 합니다. 우리 산본을 지나면 안산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안 살겠다고 해서 안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안 살기는 왜 안 삽니까? 얼마나 좋은데요. 우리가 있는 현재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와 닮았습니다. 그들이 큰 소리 친 것은 부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부에서 큰소리 칩니다. 그런데 이들은 영원한 부는 물질적인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님을 몰랐습니다(벧전 1:7). 물질적인 풍요가 영적인 활력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께서는 이 교회를 향해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네 가지 영적 사실을 몰랐습니다.

1. 곤고한 것 = 전쟁으로 모든 것을 약탈되고 파괴당한 것을 묘사한 말(시 137:8, 롬 7:24)
2. 가련한 것 = 어떤 것도 도움이 될만한 것이 없는 상태
3. 가난한 것 = 금융업의 발달로 물질적 부를 축적한 것과 달리 영적인 가난한 상태
3. 눈먼 것 = 라오디게아에 특수한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던 것과 달리 영적으로 눈먼 상태
운전을 할 때 갈 길을 알면 여유 있게 천천히 갈 수 있는데 갈 길을 모르면 불안하고 쉴 수가 없습니다. 또한 먼 곳과 가까운 곳을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대응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멀리 보면 잘 못 가던 길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 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앞만 보고가면 지금 가는 길이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4. 벌거벗은 것 = 라오디게아의 검정색 양모가 유명했던 것과 달리 영적으로는 벗은 모습

이들은 현재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위기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깨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교퉁이 중심지이고 상업적인 도시로 성장하게 된 데는 물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L.A가 사막에 물을 끌어와 건설된 도시이지만 이미 2000년 전에 라오디게아는 이러한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차다’라는 말이 나온 것은 15km 떨어진 골로새로부터 냉수 공급을 받았습니다. ‘더웁다’라는 것은 라오디게아 북쪽 10km 히에라볼리의 온천수를 생각한 것입니다. 찬물과 더운물의 공급을 따로 따로 받고 있었는데 이 물이 라오디게아까지 오다보면 더운물은 식고, 차가운 물은 더워져서 두 물이 모두 미지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더운물과 차가운 물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두 물이 모두 미지근하게 된 것 같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미지근한 물을 먹으면 금방 토해냈습니다. 먹을 수가 없게, 아무 맛도 없이 미지근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미지근한 물을 토해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토해내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미온적인 우리 신앙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서 본문 18절에서 세 가지를 제시하십니다.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베드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금보다 더 귀한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러나 금융의 요충지였던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금으로써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2.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 라오디게아의 검은 광택나는 양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으로 바꿔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옷은 흰옷입니다.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세마포 옷입니다.

3.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눈이 아프면 안약을 사서 발랐던 것처럼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눈을 위해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악에 어둔 우리의 눈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게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나옵니다. 위의 세 가지 모두 사라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흰옷을 사서, 안약을 사서”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돈으로 해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라는 것은 공짜가 없으며 값을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장사꾼의 아들이라 잘 압니다. 물건을 살 때는 잘 사야 합니다. 그냥 덮어놓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물건 사는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좋은 물건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먼저 뛰어야 합니다. 남보다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정보를 동원해야 합니다. 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 사면 잘 팔 수 있습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이런 상업적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 교회의 여전도 회장으로 있는 그 이름도 유명한 “땅 사랑 집사”가 있었으니 부동산 투기가 한창 기승을 부릴 즈음, 한몫 잡으려는 땅 집사는 이번 주일에 여전도회 헌신예배가 있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일주일 내내 열심히 아파트와 땅을 보러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다 이윽고 문제의 주일, 여전도회 헌신 예배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땅 집사는 급하게 찬송가를 찾아 사회 석에 올랐습니다. 무사히 틀리지 않고 신앙고백을 한 후 찬송을 부를 시간, 거룩하고 자신 있게 한마디! “우리 모두 찬송가 109동(!)을 부르겠습니다!”

교회의 영적 문제, 내 가정의 문제, 나의 문제 모두 대가를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도 행위의 종교냐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서 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의 가치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아무 가치도 느끼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백성들을 자식처럼 아끼며 보살피는 어진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틈만 나면 평민 복장을 하고 궁 밖으로 나가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울려 지냈습니다. 어느 날 왕은 대중목욕탕을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은 뜨거울 물에 몸을 담그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즐기고 있었는데 그 목욕물은 지하에 설치된 화로에 의해서 데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화부를 만나기 위해 지하실로 내려갔습니다. 지하실은 어둡고 지저분했으며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일하기가 쉽지 않겠구려. 내가 잠시 있다가 가도 방해가 되지 않겠소?”
왕의 말에 화부는 ‘어쩌다 들른 사람이겠지. 얼마나 버티나 지켜보자’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왕의 지하실 방문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화부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화부는 왕에게 “편안한 궁궐을 놔두시고 저를 만나기 위해 이처럼 뜨겁고 더러운 곳을 방문하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폐하께서 거친 음식도 저와 함께 잡수시면서 제게 진정으로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전 이미 너무나 훌륭한 선물을 폐하로부터 받았습니다. 폐하 자신을 제게 주셨으니, 제게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왕은 화부에게 “선물은 오히려 내가 받았네”했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본문 22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하신 말씀이 내게서 역사 해야 합니다.
본문 20절에 나타난 ‘서서’(헤스테카)는 현재 완료형이며, ‘두드리노니’(크루오)는 현재형입니다.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은 오래 전에 준비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두드리심은 현재적이요 계속적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 앞에서 계속해서 노트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두드려야 하는데(마 7:7, 눅 11:9) 오히려 주님이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지금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본문 20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아멘.
 

부활의 증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1. 부활의 증거) / 본문 : 마 28:1-10

“1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부활! 목사인 제가 “이 사실을 어떻게 증거 할까?” 이 문제가 사실 제일 큰 문제요 고민입니다. 복음의 결론이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인 설교를 잘하고, 선교를 잘해도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생명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활에 대해서 저도 한 때 의심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교회를 다니는데도 도저히 이 부활이 믿어지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은혜가 무엇이냐고 누가 물어보면 “부활이 믿어진다는 것이 은혜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부활 없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도 부활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오직 복음이란 이 부활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 15:14)라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 제가 알고있는 한 부활에 대해서 증명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의 말로 부활이 믿어지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부활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확인해 드리고자 합니다.

부활에 대해서 의심을 가졌던 것은 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3년 반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명예롭지 못한 별명이 따라다니는 제자가 있는데 도마입니다. 그는 항상 “의심 많은 제자”, “믿음이 없는 제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는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눅 24:11)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한결같은 반응이었습니다. 이 의심은 그렇게 쉽게 풀린 것이 아닙니다. 마태는 “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28:16-17)고 전해줍니다. 처음 여인들의 말을 들었을 때만 의심한 것이 아니라 갈릴리에 나타나신 예수를 보고도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믿음에 대해서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래서 믿어질 것 같으면 문제가 없지요. 덮어놓고 믿는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런 자세가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떠나가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부활에 대해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가설 중에 하나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빼 돌리고 부활했다고 퍼트린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음모론이 제기된 것입니다. 이 음모론이 설립되기 어려운 것이, 제자들이 날조하여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라면 제자들이 먼저 의심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의 음모에 가담했던 적이 있는 척 콜슨(Chuck Colson)은 음모가 성립하려면 가담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정도로 확신을 보이고 또 재능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확신을 보이기는커녕 문 잠긴 방에 꼭꼭 숨어 자신들도 죽게될까 봐 덜덜 떨고있었습니다. 이런 음모를 꾸밀 만큼 제자들은 담대하지도 못했으며 상황도 못되었습니다. 음모를 꾸밀만한 엉뚱한 인물이 있는데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역시 예수가 제판을 받을 때 모닥불이나 쬐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여자아이하나가 자꾸만 와서 분명히 갈릴리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예수를 따라다닌 것을 본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음모를 꾸미겠습니까?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예수의 시체를 훔쳐서 이런 이야기를 꾸며낸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또한 제자들의 의심은 제자들이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4복음서가 똑같이 기록한 것은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 있는데 이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 28:1, 막 16:1-3, 눅 24:1, 요 20:1)라고 증거 합니다. 당시 유대 법정은 여자의 증언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법정효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머리를 썼다면 그럴듯한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예컨대 베드로나, 요한 아니면 니고데모가 제격인데 왜 하필 여자들인지, 또한 복음서의 기록은 이 사건이 있은 후로 몇 십 년이 지난 후에 기록된 것이므로 이런 약점을 얼마든지 고칠 시간이 있었는데 성경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 처음에 부활 사건이 기록된 것은 짜임세가 없어 보입니다. 충분히 손질을 해서 전해줄 만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마리아들이 새벽에 무덤에 도착했을 때 힌 옷 입은 사람이 있었는데 천사인지, 청년인지?, 둘인지, 하나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부활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지 않게 잘 나타나셔야지, 도저히 변증하려는 뜻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부활과 관계된 음모가 있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음모는 예수의 제자들이 꾸민 것이 아니라 무덤이 비었다는 이 당혹스런 사실을 어떻게 하든 숨겨야하는 로마군인들의 입장과 산헤드린 공의회의 입장이 같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죽인 장본인들로 당시의 권력자들입니다. 부활이 소문뿐이었다면 이 문제를 어렵게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무덤에 가서 막혀있는 무덤을 보여준다든가 아니면 좀더 적극적인 방법은 무덤의 돌을 굴려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예수의 시체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면 간단할 것 아닙니까?

앞에서 첫 증인이 여인들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여인들보다 먼저 목격한 증인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무덤을 지키던 군병들입니다. 땅이 흔들리고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이 굴러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역사상 가장 놀라운 기적을 목격한 증인들입니다. 땅이 흔들리고 천사가 나타날 때는 거의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마리아 들이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러 갔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들에게 나타난 이 일을 그저 두려워 떨면서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오후쯤 가서는 제사장들이 꾸며낸 이야기를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마 28:13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거짓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큰돌을 굴리도록 군병들이 잘 수 있을까?, 아니면 소리도 없이 굴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깊이 잠이 들었다면 어떻게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간 것을 알 수 있을까?”하는 약점들이 있습니다. 어떻든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이 방법 외에는 더 좋은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굳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증명하려고 애를 쓰지만 예수님의 생애에서 이미 나타난 것처럼 예수를 부정하고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예수님 또한 이점에서 그렇게 애쓰시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힘쓰시지는 않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너무 약하게 보여주고 있지는 않나 생각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행동이 부활 후에 제한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갈릴리 바닷가에 그렇게 잠깐 나타나셨다 가시지 말고 예전에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몇 년 더 계셨더라면 부활 문제를 가지고 저처럼 굳이 이렇게 설교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할 만큼 부활 후의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십니다. 마치 늘 보여주시면 안 되는 사람처럼 홀연히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곤 합니다. 이렇게 하신 기간이 딱 6주간입니다. 두 달이 안됩니다. 나타나신 것은 모두 열두 번입니다. 열두 번에 걸친 예수님의 나타나심에는 일정한 형태가 있습니다. 먼저부터 알고 있던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장소 또한 공개적이지 않은 방안이나 갈릴리의 조용한 바닷가였습니다. 공개적인 장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꺼려하셨습니다. 당신을 처형하라고 소리를 질러대던 대제사장이나, 처형을 허락한 빌라도에게 나타나 간담을 서늘하게 하면 속이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왜? 예수님은 이렇게 행동하셨을까요?
도마에게 한 말씀을 통해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부활은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이미 이 부활에 대해서 여러 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마 8:31, 9:9, 10:34).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고전 15:20, 골 1:18). 부활은 우리가 죽음 이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ejgeivrw:에게이로) “깨우다, 일어나다, 행동을 시작하다, 씨앗이 나오게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생명의 씨가 있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강원도민일보의 의하면 7천년 전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식물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2월 28일 강원도 양양군 여운포∼송전간 도로개설 부지에서 신석기 유적 발굴조사 중 출토된 지름 2㎝ 안팎의 구근에서 최근 파란 싹이 돋아났다고 했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언제든지 생명이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처음이 아닙니다.
프랑스에서는 2,000년 묵은 꽃씨를 무덤에서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살 것인가, 못 살 것인가 해서 땅에 심었더니 죽었던 꽃씨가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또 1884년 애굽에서 3,000년 묵은 완두콩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1884년 6월 4일 이 완두콩을 땅에 심었는데 며칠 후에 싹이 나고 땅을 뚫고 올라왔습니다. 꽃씨나 콩의 씨앗도 2, 3천년만에 그 생명이 다시 사는데 하물며 인간의 생명이 부활이 없겠습니까?

[유머]
미국의 어떤 남자가 강짜가 넘 센 아내를 데리고 성지 순례차 예루살렘에 관광 갔다가 갑자기 아내가 죽었습니다.
장의사가 남편에게 말하기를 “미국으로 시신을 운구하려면 5,000 달러가 들고, 여기 聖地에 매장하면 150달러가 든다고 했습니다.
남자가 잠깐 생각하더니 미국으로 데려가겠다고 하자…
장의사가 말하기를 아니 여기 매장하면 150 달러 밖에 안 드는데 왜 애써 5,000 달러라는 많은 경비를 들여 고국으로 운구 하러 합니까?” 하자
그 남자가 말하기를 “오랜 옛날 그러니까 2000여 년 전에 한 남자가 여기서 죽어 묻혔는데 사흘만에 되살아났다고 했는데 나에게 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쩝니까?”

우리가 믿든지 안 믿는지 상관이 없이 부활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주십니다. 요한이 전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3-16)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는 공산주의의 실천자였던 레닌의 시체를 포르말린이 담긴 유리관 속에 넣어 많은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리관에는 “그는 모든 나라 인민의 지도자였다, 또한 그는 세상의 구주였다.”라고 팻말을 써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레닌은 한때 볼세비키의 운동에 있어서 리더였을지 모르지만 단지 과거의 사실일 뿐입니다. 그는 현재의 지도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현재형으로서, 예수님 자신이 오늘 여기에 진리가 되시고 부활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진리가 되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 속에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죤 러스킨이 쓴 ‘티끌의 윤리’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러스킨은 진흙이 하나님께서 들어 쓰실 때에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나중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모래와 흙과 불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에 사파이어가 될 수 있다. 티끌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에 오팔이 될 수 있다. 진흙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히게 될 때에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진흙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인간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연결될 때에 맨 흙덩어리 같은 우리가 사파이어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보혈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0. 보혈) / 본문 : 눅 22:19-20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미국의 어느 마을에 철도를 건너 통학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이 소년이 철도를 건널 때면 어김없이 기차가 지나갔습니다. 소년은 그때마다 승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밝은 미소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폭우가 내려 철로가 끊겨 있었습니다. 만약 기차가 그대로 지나가면 수 천명의 희생자가 발생할 상황이었습니다. 소년은 가방에서 연필 깎는 칼을 꺼내 허벅지를 마구 찔렀습니다. 그리고 흰 셔츠에 빨간 피로 ‘STOP’이라는 글씨를 써 기차를 향해 흔들었습니다. 기관사는 소년의 셔츠에 적힌 붉은 글씨를 보고 급히 기차를 세웠습니다. 기관사는 그제 서야 철로가 끊긴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선혈이 낭자한 소년을 끌어안으며 “너의 피 값으로 우리가 살았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살았습니다.
고전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예수의 피 없이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몸에서 피가 하는 역할은 산소와 영양분을 적재적소에 공급하고, 이산화탄소와 영양분의 찌꺼기를 배설기관에 보내는 일도 합니다. 당연히 건강한 피가 잘 흘러야 이 모든 기능이 원활히 이루어집니다. 심장에서 뇌까지 돌아오는데 8초가 걸리고 발끝까지에 18초가 걸린다고 합니다. 모세관을 연결하면 10만 마일 지구를 세 바퀴 이상을 도는 거리라고 합니다. 심장에서 동맥으로 동맥에서 혈관 그리고 모세관까지 복잡한 통로를 거쳐 구석까지 맑은 산소 공급을 하고 더러운 것을 새롭게 합니다.

첫째, 피는 생명입니다.
성경은 피(Blood)를 생명(life)이라고 말합니다(창 9:4). 성경은 생명의 말씀, 곧 피의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피의 책이며, 피로 얼룩진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곧 피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은, 복음의 생명력은 피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세상의 많은 책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있는 책인 것도 이 피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이유는 성경의 매 쪽마다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일종의 피의 강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만일 피를 제거해 버린다면 성경 역시 여느 다른 책과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이 피는 하나님의 아들이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엡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증거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한 피 받아 한 몸 된 형제 자매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 피는 속죄의 힘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피 흘림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인간의 죄는 다른 선을 행하든지 다른 사람이 그 값을 대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 사망의 형벌은 피 흘림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죄는 구석구석을 부패하게 했습니다. 죄는 인간다운 삶의 기능을 마비 시켰습니다. 그래서 죄는 인간이 떨쳐 버릴 수 없는 불안의 원인이며 사단의 공격 표적이 되었고, 저주와 심판을 불러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를 위하여 피가 틀림없이 뿌려져야 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계 1:5) 이로서 아담의 범죄이후 그토록 우리를 괴롭혔던 죄의 고리가 끝난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다시 예전으로(죄 있는 상태) 돌아간다면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셋째,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라
38년 된 앉은뱅이를 고치신 후에 그를 성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요 5:14)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 사람들이 다 돌아간 후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1)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9) 예수님의 피는 보혈입니다. 이런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전으로 돌아가 산다면 사단이 얼마나 우리를 조롱하고 비웃겠습니까?

저는 아버님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서울에서 공부하고, 전도사 생활하며 혼자 떠돌아다닐 때 자주 고향집에 연락을 취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연락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가 몇 달에 한번씩 가끔 생각날 때만 집에 들리는 정도였습니다. 서울서 혼자 지내다가 돈이 떨어지면 그래도 고향에 있는 부모님 밖에 없으니 작은 돈이라도 용돈 타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은 강원도를 다니면서 옷 장사를 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님 말씀에 아버님이 장사가 잘 되실 때는 옷 보따리가 커지고, 장사가 안되실 때는 옷 보따리가 점점 줄어든다고 어릴 때부터 들었습니다. 아버님은 암에 걸리셨는데 이렇다할 치료도 한번 받아 보시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실 때까지 강원도를 떠돌아다니시면서 장사를 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까지도 장사를 하셨는데 나중에 친척 분이 아버님이 머물고 계시던 여인숙에 가서 장사하시던 옷 보따리를 가져오셨는데 그 옷 보따리는 아주 작은 보따리였습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아버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주님 앞에서도 아버님이 못다 하신 믿음과 신앙생활을 다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어머님도 주님께 이렇다할 봉사를 하시지 못했습니다. 저는 할 수 만 있다면 그 봉사도 제가 다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앞에서 죽을 각오로 신앙생활을 해야된다고 다짐하고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님의 보혈은 어떻습니까?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요일 5:6)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캄캄한 밤에 홀로 밤을 세우시며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기도하셨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십자가의 보혈” 이것만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구속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어린양의 피, 출 12:1-3)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골 1:20).

오래 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산중턱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여섯 명의 희생자를 내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현장 가까이에는 교회훈련센터가 있음을 알리는 68피트 높이의 철탑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AP통신이 전한 사고의 원인은 그 철제십자가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날 따라 그 십자가의 전등불이 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을 운항하는 항공기들은 십자가 탑이 밝혀주는 불빛을 보고 그곳을 지나곤 했는데 그 날은 불이 꺼져 있던 탓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불꺼진 십자가와 피 없는 십자가는 언제나 비극의 원인을 제공합니다. 예를 들면 십자군 전쟁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도시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저 십자가들, 도시를 뒤덮는 저 높은 십자가들,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하는 메시지여야 하며 민족 구원의 등불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피묻은 십자가의 원색이 바래고 장식용으로 전락한다면 십자가 때문에 존재하는 교회는 설자리를 잃고 말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지금도 살아있어야 합니다. 빛이 나야합니다. 이 십자가는 보혈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만이 썩어져 가는 이 세상의 빛이요, 생명입니다.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패션 오브 크리이스트”를 보신 분이 많을 것입니다. 처음 이 영화가 나왔을 때, 너무 잔인하다는 비평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보는 이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올 만한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엄청난 양의 피를 우리는 보아야만 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그 피를 첨벙첨벙 튀기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은 이것이 그들의 구원을 위한 피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한 마리아가 그 많은 피를 닦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분명 이 피는 온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피였습니다. 나의 죄를 씻기 위한 피였습니다. 오늘도 이 떡과 피를 먹음으로 새롭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84장
1.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2. 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3. 나의 죄 속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는 공로 없도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4. 평안함과 소망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5. 영원토록 내할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나의 찬미 제목은 예수의 피밖에 없네
[후렴] 예수의 흘린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목사 : 여러분은 예수를 피를 마시고 예수를 살을 먹음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성도 : 나는 내 몸 속에 흐르는 그리스도의 피 공로와 그 능력을 의지하여 몸 버려 피 흘리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의 온 삶을 바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