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8. 보라!) / 본문 : 마 12: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본문 말씀은 이사야 42: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의 인용구입니다. 이사야는 B.C. 700년경에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 말씀이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사야의 말씀이 있은 지 700년이 지나서 다시 기록된 말씀입니다. 본문과 비슷한 말씀이 이사야 45:22에도 나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무엇을 보고 사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님의 말다툼과 폭력을 보고자란 아이는 성장하여 성격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보는 대로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보는데는 사실상 많은 수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보면 됩니다. 누구라도 볼 수 있습니다. 많이 배웠기 때문에만, 대학교에 가야지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를 보라!’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아서는 결코 얻을 것이 없습니다. 때로는 교만한 자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자신을 돌아볼 것을 권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나 자신을 보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단의 음성은 ‘너 자신을 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 꼬락서니를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자살을 합니까? 무능력한 자신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능력이 많으신,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분에게만 생명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내가 참 목자가 된다는 것은 여러분이 주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짜 목사가 되는 것은 여러분이 주를 바라보지 않고 다른 곳, 돈을 보고, 사람을 보고, 건물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수는 계수할 수 없거늘”(렘2:32)
처녀에게 있어서는 첫 사랑의 증표인 패물이(반지)가 중요하겠지요. 신부는 그 날 입었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잊지 못하겠지요. 그러나 진짜 잊어버리지 말야할 하나님은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에베소 교회가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선행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인내하였으며,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선한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그 와중에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계 2:1-4).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 2:8) 우리가 열심히 일하기를 원한다면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바울로부터 이어지는 유명한 설교가들은 오직 예수만을 높였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중심이었습니다.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같은 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단순한 구석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에 대해서만 설교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 말씀의 중심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없는 설교, 예수 없는 봉사, 예수 없는 전도는 모두 무의미한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철저한 예수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성령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며,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며, 보내시기에 너무 먼 저 높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와 함께 역사 해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말할 때 잘 알고 있는 성경구절이 히브리서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여기까지만 읽으면 안됩니다. 계속 읽어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성을 바랐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가는 길은 알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보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한 것이 있습니다. 시편 30:7-10 “7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령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사실은 한 분도 보이지 않습니다. 구약에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불 가운데서 제물을 드릴 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으며, 모세가 40일을 금식하고 시내산의 떨기나무 가운데서 보이셨으며, 음성으로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는 사람을 구원하는데 한계점이 있음을 아시고 2000년 전에 직접 이 땅에 내려오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초림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으고 함께 동거동락합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본 적이 없으며, 성령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을 볼 수 있을까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설교를 하고, 설교를 듣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은 바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령은 반드시 말씀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떠나 있는 성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을 보라고 주신 선물인줄을 믿습니다.

우리가 만나주실 만한 사람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목적은 사실 단순히 보고 말아버릴 것 같으면 볼 필요도 없겠지요. 우리는 짝사랑하기 위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님을 바라보는 목적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마 7:7-8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기름을 동시에 준비하고 주님을 찾고 기다려야 합니다.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주님이 오시면 만날 수 없습니다. 바로 예배는 주님을 만나기 위한 우리의 준비요, 제사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신의 사람과 영의 사람에 대해서 잘 나와 있습니다.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비밀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본문의 말씀을 다시 봅시다.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나의 택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내가 붙드는 나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못된 사람들은 택하기만 하고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 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이라는 말은 헬라어 명사 ‘파이스’입니다. 이 말은 구약에서는 아이에 대한 애칭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신분상의 종으로 서용 되던 말은 ‘둘로스’입니다. 그러므로 ‘둘로스’의 종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오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미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렸던 음성이 있습니다.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내 성령을 줄 터이니” 이미 예수님께는 하나님아버지의 전권 적인 위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하나님의 영)과 함께 활동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바로 이 성령이 예수님을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바로 성령을 주신다는 의미는 곧 하나님 자신이 활동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심판’이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만 약 90번나옵니다. 우리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잘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야고보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바로 나가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의 아줌마들이 욘사마를 보기 위해서 구름 떼처럼 모여들은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 집회한다고 하면 얼마나 모여들겠습니까? 조용기 목사님이 집회할 때마다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런데 한번은 일본에서 집회를 했는데 200여명이 모였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고백하기를 자신이 집회한 모든 장소 중에 제일 적게 모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욘사마는 몇 만 명씩 그것도 별로 알리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고 모여듭니다.

저는 얼마 전에 잘 성장한 어느 교회의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 교회는 절반 정도의 성도가 초신자이기 때문에 정말 순수합니다. 그러시는 겁니다. 저는 이 말에 한국교회가 참 문제가 많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오래 믿은 우리는 모두 순수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를 먼저 믿었을수록 순수해 져야지요. 깨끗해져야지요. 어떻게 이제 세상에 금방 들어온 초신자가 더 순수합니까? 교회가 얼마나 타락을 했으면 이런 말이 나오나 싶었습니다.

주님의 애타는 음성을 이사야는 이렇게 들려줍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욥은 고통 중에 하나님 만나기를 소원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욥 23:3) 여러분! 하나님 만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끝난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에게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장막(성소)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곳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나타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할 때, 예배할 때 그곳에 나타나시기를 더 좋아하십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말. 예. 선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7. 오직 말. 예. 선) / 본문 :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주앙교회 표어를 아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주앙교회 표어를 다시 간략하게 정했습니다. 이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오직 말씀, 오직 예수, 오직 선교
최상석 집사님에게 암기하는 방법을 배우세요. 주은이 구구단 외우게 하려고 연상단어를 다 만드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88해야 육사(64)가고 77하면 사고(49)친다.
교회가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져야 성장합니다.

불란서가 낳은 실존주의 작가 싸르트르(J.P. Sartre)는 말하기를 “인생이란 계획의 연속이다”라고 했습니다. 노오만 빈센트 필(N.V. Peale)박사는 “사람은 평생목표, 연도별목표, 주별목표, 일별목표를 세워야하고 자기가 40년 후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겠는가를 명확히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필립스 브룩스(P.Brooks)목사는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말고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전래동화 가운데 지금까지도 자손 대대로 이야기를 전한다고 하는 유명한 우화가 있습니다. 한 주장이 늙어서 자기의 추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세 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눈앞에 큰 나무가 있고 그 나무 가지에 독수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추장은 맏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맏아들이 대답했습니다. “하늘이 보이고 나무가 보입니다.” 추장은 실망하여 둘째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둘째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나무가 보이고 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독수리가 보입니다.” 추장은 역시 실망한 빛으로 막내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막내아들이 대답했습니다. “독수리가 보이는데 두 날개가 있고 그 날개들이 마주치는 곳에 독수리의 가슴이 보입니다.” 추장은 기쁨으로 외쳤다. “그 곳을 쏴라.” 막내아들의 화살은 독수리의 가슴을 명중시켰습니다. 물론 추장은 막내아들에게 추장의 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자기의 목표하는 바를 확실하게 내다보는 인간이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교훈하는 인디언의 전래동화입니다. 그들이 들로 나온 목적은 사냥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하늘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막연하게 독수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습니다. 목적은 사냥이므로 독수리를 쏘아야 할 것이며, 큰 독수리는 다른 곳에 맞추어도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날의 목적으로 볼 때 꼭 보아야 할 한 군데는 온 우주안에 독수리의 가슴 한군데 밖에 없는 것이다.

1. 오직 말씀

돈 몇 푼 벌기 위해서 사장님의 말씀은 잘 따라 지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여러분! 목사인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헛것으로 들었을 때 인간에게 무서운 재앙이 닥쳤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창세기 3장 3절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에’를 우습게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창세기 8장 15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브라함도 창세기 12정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 ”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야 삽니다.

선지자, 예언자, 목사, 선교사 말씀 전달자에게는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년에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렘 36:1) 눈물의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사역이 시작됩니다. 에스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겔 15:1)라고 합니다. 말씀이 임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갇혀있지 않습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마리아가 처녀인 자신의 몸에서 구주가 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 천사가 가르쳐 줍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2. 오직 예수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국민일보 겨자씨에 나왔던 임종수 목사님의 글입니다.] 서울 봉천동의 고갯길에서 큰 글씨로 엉성하게 인쇄되고 맞춤법이 엉망인 전도지 1장을 주웠습니다. “예수를 미드면 맘이 평안함을 어더요 / 수고롭고 괴롬많아 짐무겁게 진자여 빨리 내게 나아오라 / 평안함을 주리라 / 하신대로 나는 믿고 평안함을 어더 / 전도합니다 / 미드면돼요 / 미드세요.”

이 전도지를 나누고 다녔을 사람은 사실 자신의 무식함을 자랑하는 셈이 되었겠지만 이 사람은 그것이 문제되지 않을 만큼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넘쳐흘렀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로 말미암아 소유한 평안은 혼자서 가지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전도지를 준비한 것 같습니다. 그 전도지는 교회의 이름이 적힌 그런 전도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전도자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로만 가득한 그런 전도지였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3. 오직 선교

성령(선교의 영)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교회 성장과 선교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이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합니. 그 이유는 성령 자신이 바로 선교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26에 주께서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 사역에 있어서 성령 자신이 바로 증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과연 성령은 예수의 승천 이후로 교회를 선교사역에로 이끌어 동참토록 하여왔습니다. 선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몇 가지로 말씀드립니다.

첫째, 성령은 선교의 주도자(The Initiator)가 되십니다.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을 보면 선교의 주도자는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주도를 따라 순종한 것 뿐 이었습니다. 교회는 전적으로 성령에 인도하심에 의하여 그 사역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결정적인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행동에 옮겼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하루에 3천명씩이나 회개하게 된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행 2:1-41). 빌립 집사와 베드로가 이방인이었던 에디오피아 내시와 백부장 고넬료에게 전도를 하고 세례를 준 것도 성령의 지시와 역사 하심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행 8:26-40, 11:44-48). 최초의 선교사인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사로 파송된 것 역시 성령의 명을 따라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행 13:1-3).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는 바울의 길을 막으시고 유럽대륙으로 그 길을 인도하신 분 역시 성령이었습니다(행 16:1-10). 성령은 이처럼 복음의 확장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고 그의 사자들을 인도하였습니다.

둘째, 성령은 선교를 위한 전략가(The Strategist) 이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은 자신들의 선교전략을 가지고 선교에 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 집사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는 일일이 지시하셨습니다(행 8:26,29,30). 고넬료를 전도한 베드로의 사역도 성령의 지시에 의해 수행된 것이다. 성령은 우선 이방인에 대한 베드로의 편견을 바꾸시었고, 후에 말씀하시기를,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0:19-20).
그랜트 맥클렁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령은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우두머리 전략가(the Chief Strategist) 이시다. 인간의 계획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할 때에만 그 실효성이 있다. 성령은 각 시대와 장소를 위한 전략을 가지고 계신다. 이러한 전략을 분별하고 실행하는 것이 곧 교회의 책임이다.
이런 점에서 최고의 전략가이신 성령을 늘 선교사역의 동반자로 모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셋째로, 성령은 선교의 동기 부여자가(The Motivator) 되십니다. 성령은 선교를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본질적인 능력을 허락하시는 격려자 혹은 동기부여자가 되십니다. 성령은 세계 복음화를 위한 그리스도 교회의 힘의 원천이십니다. 성령께서 임하신 오순절은 성령의 역사 아래 선교가 시작된 날이었으며, 성령을 받고 그 능력을 체험한 사도들과 성도들이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로교회인 우리들이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상 우리는 모두 모두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된 오순절교회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일궈내신 오순절 교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말.예.선 계시록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이 말씀을 지키다 고난 받는 최근 박해 소식 몇 가지만 모아보았습니다.
- 파키스탄의 드미트리 세스타코프 목사(38세)는 종교적 증오심을 유발하고, 불법종교단체를 운영하며 종교적 극단주의를 조장하는 문서 배포 혐의 등으로 2007년 1월 4년 간의 노동수용소 형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하여 항소를 진행 중입니다.
- 카라칼파크스탄 지역에서 베델교회를 이끌고 있는 사라바트 세리크바예프 목사(32)도 지난 2007년 4월, 극단적 종교단체 조직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카라칼파크스탄은 정교회와 이슬람 이외의 어떤 종교단체도 등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 우즈베키스탄의 독립언론인인 우미다 니야조바의 경우 불법월경, 불법 밀수품 소지, 사회불안 야기 등의 혐의로 7년 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 지난 4월 말, 에티오피아 동부의 지지가시에서 기독교인들이 모여 집회를 갖고 있던 천막에 이슬람 신자들이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두 명의 기독교인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지난 4월 24일에 아볼레시 인근의 중국이 개발한 유전 지대에서 반군에 의해 살해된 기독교인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반군의 공격에 의해 65명의 에티오피아인들과 9명의 중국인이 살해 당했고, 중국인 기술자 9명이 납치되었습니다.
- 인도네시아 말랑에 거주하는 41명의 기독교인들은 지금 이슬람을 모독한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다.
- 두 명의 목사를 포함한 네 명의 미국인 기독교 지도자들과 약 30 명의 중국인 지하교회 지도자들이 지난 4월 19일, 씬장성의 아케수시에서 모임을 갖던 중 현장에서 체포되어 모두 구속되었다.
- 수단 내전의 주요 접전지역의 하나인 누바 마운틴 지역에서 기독교 복음사역자들이 살해 당했습니다. 사역자 일행은 지난 4월 27일, 트럭을 타고 누바마운틴 지역을 이동하던 중 인근 무장세력들로부터 집중 사격을 받아 사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

오픈도어에서 발표한 10위까지의 박해 국가는 “1위. 북한, 2. 사우디아라비아, 3. 이란, 4. 소말리아, 5. 몰디브, 6. 예멘, 7. 부탄, 8. 베트남, 9. 라오스, 10. 아프가니스탄”입니다. 북한은 줄 곧 1위를 지켜오던 사우디아라비아를 따돌리고 5년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우리의 동포입니다.

말씀으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주임도 말씀이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지켜 행할 뿐만 아니라 가르쳐 지키게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말씀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말씀이십니다. 우리에게 오직 말씀이란 오직 예수와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오직 우리의 미션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은 미션을 말하지만 우리는 오직 예수 복음전파가 유일한 미션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미션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가 나의 미션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6.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 / 본문 : 엡 6:1-4

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현대 사회를 평가 할 때에 부모 중심의 대가족 사회에서 부부중심 핵가족 사회로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녀중심의 신세대 가족 사회로 변해 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세의 고통을 예언한 바울 사도는 말세징조 중의 하나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부모를 거역하는 자녀들의 출현’이라고 했습니다(딤후 3:1-4).
가족제도는 보통 세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부모 중심가족입니다.
부부 중심가족입니다.
자녀 중심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가정인가요?
이 세 가지 모두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대가족을 인정할까요? 핵가족이나 신세대 가족 중 어느 것을 인정할까요? 성경은 이 세 가지 모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로 “주안에서의 가족”을 인정합니다. 엡 6:1을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대가족이나 핵가족이나 신세대 가족 안에서가 아니라 주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입니다.
‘주안에서’ 이것이 놀라운 성경적 가족구조요 제도입니다. 그러면 ‘주안에서’란 무엇입니까? 주님께 순종하는 범위 안에서라는 말이며, 주님을 믿는 자로서,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주님과 함께 하는 가운데서 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가족들은 부모나 자녀가 다함께 주님께 소속된 자로서 주님과 동행하는 자로서 가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가정을 건설하셨습니까? 그것은 주님은 당신을 믿는 가족들과 함께 가정에서 행복을 만들기 위하여 가정을 세우신 것입니다. 즉 믿는 사람에게 가정이란 주님과 가족이 함께 행복을 만들어 내는 공장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선포의 제목을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정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는 행복이 생산됩니까? 그 행복이 이웃에게 나누어집니까?
어떤 글에 보니 현대인의 가정에서 아버지는 돈 제조기, 어머니는 밥 제조기, 자녀는 성적 제조기일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돈과 밥과 성적만 있지 행복은 없다는 말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행복을 제조하는 Hapymaker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어떤 가정에서는 결손, 탄식, 불만, 원망, 공포, 불안, 교만, 이기주의 및 온갖 불행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회로 흘러 넘쳐 사회까지 온갖 불행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성경과 교회를 통하여 바로 가정으로 하여금 다시금 행복을 만드는 축복의 장소로 회복시키는 작업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도 행복을 만드는 축복의 장소가 되겠습니까?

1. 먼저 가로막는 것을 없애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 가정으로 하여금 행복을 만드는 일을 훼방합니까? 그것은 부모와 자녀간의 “세대차이”입니다. 세대 차이는 현대 교육과 각종문화가 급속하게 자녀들에게 쏟아져 들어감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의 세대와 전혀 다른 가치관과 사상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피할 길이 없는 무서운 행복 창조사역의 방해물입니다. 돈과 쾌락과 개인과 현세와 출세와 지위나 사업만을 제일주의로 알고 있는 인생으로 현대 교육은 자녀들을 물들게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대차이를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한가지 사상, 통일된 가치관, 과거 현재 미래 어느 세대나 다 통할 수 있는 인생관을 부모와 자녀가 함께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곧 “주안에서”라는 말입니다. 부모도 자녀도 모두 주님 안으로 들어 와야합니다. 주님 중심의 가치관, 성경중심의 인생관을 가져야하는데 이것은 주님을 영접하고 성경을 받아드릴 때 주어집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과 손자 모든 식구가 한 자리에 앉아 대화가 됩니다. 세대차이가 없습니다. 전 세계 어디 가서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는 세대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창조하려면 먼저 온가족이 예수님을 모셔드리는 일부터 시도해야합니다. 아직 가족 중에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비신자가 있는 분들은 낙심하지 마시고 사랑과 온유로서 전도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최우선적으로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것을 반대하지 않도록 힘을 쓰셔야합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인데 자녀 여러분 최고의 효도는 부모님으로 예수님을 믿도록 도와드림으로 천국 백성 되시게 해 드리는 것이 최고의 효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가족을 예수 믿게 하는 일은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일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일본 동경에 살인 강도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딸은 독실한 신앙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기 아빠가 살인강도가 아닙니까? 그녀는 복음과 회개와 용서를 전하였으나 아빠는 거부하며 받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은 아빠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시부야 공원 숲속으로 숨는 아빠를 본 딸은 귀부인으로 변장을 하고 손에 가방을 들고 구두소리를 내며 산을 내려갑니다. 자기 딸인 줄 모르는 그는 딸을 찌르고 가방을 빼앗아 도망을 칩니다. 그런데 가방을 열어보니 그곳에는 돈은 없고 딸의 유서만 있습니다.
“아버지 이 불효한 딸을 용서하세요, 오늘 밤 죽인 것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모시는 길은 이 길밖에 없는 줄 알고 또한 남의 자식 죽이면 그 부모의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아버지는 모르시고 계시기에 나는 지금 죽어도 천국에 들어 갈 준비가 되어 있기에 최후로 이 길을 택하였사오니 저를 자식으로 생각하신다면 불쌍하다 마시고 회개하시고 예수님을 믿으시어 천국에서 기쁜 낯으로 만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 강도는 입술을 깨물고 통곡하며 웁니다. 후일 그는 자수하고 20년을 징역을 살되 모범수로 신앙생활을 하여 나중에는 풀려 나와 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부모여, 자녀여, 무엇을 느낍니까? 전도해야합니다.
지상에서의 행복보다 천상의의 동반자요 영원한 행복의 가족이 되도록 도와 드림이 더욱 중요합니다.

2. 행복은 이해의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6:1)
이해 ‘이것을 순종하라는 명령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주안에 있기 만하면 안됩니다. 1절의 말씀을 보세요’ 순종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행복은 이해하고 순종할 때에 만들어집니다. 여기의 순종이란 말은 노예가 주인의 말을 잘 경청하여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란 뜻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또 법원에서 판사가 판결을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피고의 진술을 귀기울여 듣는 태도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도 이와 같이 부모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저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파악하는 자녀가 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순종은 쉬워집니다. 어떤 명령이든지 복음의 명령은 자녀의 행복을 위한 것이요, 훌륭한 성장과 장래의 성공을 위한 것입니다. 바로 이 뜻을 파악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명령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그 원인을 하나 하나 설명을 듣자는 것이 아니요, 그 명령의 근본적인 뜻과 의도가 어디 있는지를 파악하라는 뜻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한 말씀이라는 것을 안다면 순종은 쉬워집니다. 4절에서 아비들은 자녀를 노엽게 말라고 하였는데 이 경우에도 부모가 자녀를 잘 이해한다면 결코 노엽게 할말 상처가 될 말, 섭섭할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벤자민 웨스트라는 유명한 화가는 자신은 어머니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거울을 깨트리면 “안 다쳤니 그러면 됐다, 엄마도 그랬었단다. 거울은 다시 끼면 되요,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네 몸은 다치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엄마는 아이에게 천사와 같은 존재입니다. 모든 부문에서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행복은 이해하며 순종할 때에 만들어집니다.

3. 행복은 가치 있게 여기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6:2)
행복이란 부모와 자녀 그리고 온 가족이 서로 서로를 가치 있게 여겨줄 때에 만들어집니다. 2절에서 부모를 공경한다란 부모를 존경한다는 뜻이요, 곧 부모를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4절의 노엽게 하지 말라에서 자녀를 노엽게 한다는 것은 자녀를 무시하거나 가치가 없는 물건으로 취급할 때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자녀를 성경대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기업이요, 상급으로 본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선물입니까?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요. 또한 부모님은 나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일까요? 성경에는 어버이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어버이는 몇 가지의 이유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됩니다.
첫째, 어버이는 자녀를 낳아 주신 데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됩니다.
둘째, 어버이는 자녀를 길러주심에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됩니다.
부모는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모든 정성을 다해 그리고 희생적으로 자녀를 기릅니다. 이면은 순전히 본능에서 사는 동물의 세계에서 보다 현저히 드러나 그것이 창조주의 역사임을 알게 해 줍니다.
셋째, 어버이는 자녀를 바로 기르기를 원하며 자녀가 잘못되면 이를 징계하는데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말합니다. 사람이란 자신은 부족해도 자녀만은 완벽히 기르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이 어버이는 하나님의 삼권인 창조와 섭리와 심판의 권력을 대리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버이를 통해 하나님을 배울 수 있고, 또 어버이에게 효도함으로써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이러할 때에 행복이 만들어지고 넘쳐흐릅니다.

미국의 한 가정을 소개합니다. 발리스키라는 부부의 가정은 10명의 자녀를 키웠는데, 그들 가운데 6명은 선교사가 되어 해외로 나갔고, 4명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선교활동을 도왔습니다. 발라스키 가정의 맏아들인 랄프는 부모로부터 강렬한 신앙적 영향을 받았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아름다운 기독교 가정을 이루었습니다.”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첫째,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둘째, 부모님은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우리들에게 힘들고 귀찮은 일이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셋째, 아버지는 우리들의 친구가 되어 허물없이 우리를 사랑해주셨지만 결코 가장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아버지의 결정은 대법원의 판결과 같았습니다. 넷째, 부모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공평무사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잘못했을 때는 벌을 받았고, 잘했을 때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다섯째, 어머니와 아버지는 언제나 말씀과 삶이 일치하셨습니다. 그들은 삶으로 우리들의 가장 이상적인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진실로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훗날 다 성장하여 중년이 된 자녀들의 기억 속에 이와 같은 인상과 추억이 깊게 남을 수 있다면 그 부모는 경건한 부모로서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4. 행복은 가르침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6:3-:4)
왜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을 안 할까요?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을 안 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과 순종해야 할 말씀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순종을 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와 순종이 주는 행복과 장수, 그리고 잘되는 형통을 배워서 알았더라면 결코 불순종을 할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녀 된 사람들은 3절의 말씀처럼 잘되고 장수하는 길이 순종임을 아시고 진리와 순종에 대하여 배우기에 힘을 써야합니다. 반면에 부모되신 분들은 4절의 말씀처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들에게 진리와 순종을 가르쳐야합니다.

여러분’ 탄광촌 목사의 아내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를 아시지요, 자녀가 13명이었는데 학교를 못 보냈습니다. 그래서 웨슬리의 어머니는 자녀 교육을 위하여 한 주간의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주일에는 신앙서적과 성경만을 보게 합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 시켰고, 수요일에는 논리와 윤리학을, 목요일은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금요일에는 철학을 토요일에는 웅변, 시, 일기 발표를 시켰습니다. 2주일에 한번은 고아원을 방문하고 다시 2주일이 되면 양노원을 방문하게 하였습니다. 한 주 한끼는 금식을 하게 하였습니다. 하루 세 번은 소리내어 기도하며 매일 가족끼리 성경을 가지고 기도회를 하기를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침대 앞에서 매일같이 “너희는 누구냐? 우리는 위대한 아이입니다”, “누가 그랬냐?”, “하나님이요”,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역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시켰냐?”, “우리를 위대하게 쓰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요” 아멘! 이와 같이 행복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치고 배우려고 해야합니다.

가정은 하나님과 함께 행복을 만드는 축복의 장소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부모를 이해하고 공경하며 순종해야합니다. 진리를 가르치며 배워야합니다. 여기서 행복은 창조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천사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부모님에게 천사가 되어주세요. 자녀에게 천사가 되어주세요. 그 이상이 부모입니다.

행복한 어린이로 키우려면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5. 행복한 어린이로 키우려면) / 본문 : 막 10: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든, 무엇이든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가 저술한 『에밀』에 등장하는 한 구절입니다.

갖고 싶은 것은 ‘언제든, 무엇이든’ 갖게 하는 것이 왜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일까? 언뜻 모순처럼 들리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루소가 말하는 것에 공감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쉽게 손에 넣으면 인내나 노력이라는 소중한 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무엇을 가져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무엇을 가졌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가느냐에 행복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따라간 것이 무엇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실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의정, 좌의정자리를 탐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긴 것은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건물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이 고난을 당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들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무엇을 줄 것인가를 다시 깊이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자녀에게 물질을 남겨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부모만큼 자녀를 잘 못 키우는 부모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간단하지 않습니까? 재물이 많으니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기도 어렵고 슬픈 기색을 하고 근심을 하며 갔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물질은 하나님을 따라가게 하는데 제일 방해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물질을 자녀에게 남기려고 합니까? 하나님을 따라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남겨서는 안됩니다.

부족함이 없이 자란 아이는 진정한 행복을 모른다.
통계청이 발표한(2007.5.2)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5-19세 청소년은 하루 평균 60.1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수업 중 문자를 보내는 학생도 46%(정보문화진흥원 조사 결과)에 달할 만큼 중·고교생의 휴대폰 중독 현상이 심각하다”고 합니다.

. 떼를 쓰지 않는 아이가 착한 아이는 아닙니다.
아이가 백화점이나 시장에 가서 이것이 갖고 싶다, 저것이 갖고싶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은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을 꾸짖습니다. 아이들이 불만스런 얼굴을 하면 엄마들의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야지. 그렇게 퉁퉁 부어있으면 다시는 백화점에 안 데려올 거야.” 이런 유형은 가정교육이 엄격한 엄마입니다.
좀 무른 엄마는 “내참. 그럼 작은 장난감으로 골라야 돼.”하고 사줍니다.
누가 더 현명한 엄마일까요?
어떤 엄마가 아이의 건전한 욕망을 길러줄 수 있을까요?
대답은 후자입니다. 후자 엄마의 경우 최선은 아니었지만 전자의 엄마보다는 후자 쪽이 더 현명한 것입니다. 전자의 엄마는 아이의 요구를 차단했을 뿐 아니라, 아이가 물건을 갖고싶어하는 사실마저 차단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이가 갖고 싶어하는 욕망은 조금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욕망을 쉽게 충족시켜주거나 앞서서 채워주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갖고 싶다고 느낄 때 아이는 참을성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것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 주실 때 그냥 고쳐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최소한 예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믿고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왔을 때 고침을 받았습니다.
. 자녀에게 힘쓰는 일을 많이 시켜라. 엄살을 많이 부려야 합니다.
“내가 없으면 엄마가 힘들 거야!”라는 생각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엄마에게 자녀가 꼭 필요한 존재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느끼게 해 주어야 합니다.”

믿고 키워라
. 믿음이 없이 자꾸만 아이를 의심하면 아이는 어떻게 해도 부모님은 믿어주지 않는다는 불신에 빠집니다. 부모님이 먼저 믿어 주어여 합니다.
. 아이의 물건은 아이가 처분하게 하라.
. 용돈도 아이와 상의해서 정하라.
. 물질보다 값진 상은 ‘참 잘했어요.’
. “어른 다 됐네”라는 말에 아이는 성장한다.
임종을 앞둔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내일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어린이들에게 좀 더 많은 사랑과 정성을 기울여라”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은 아이를 어린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는 ‘어리신 분’이라는 존경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어린이는 희망의 동의어입니다.

참는 것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 ‘먹다 남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본인의 상징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일본인들은 먹다가 거의 남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고, 먹는 것 자체가 양이 작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서양인에 비해 많이 남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들어 낸 말이 ‘먹다 남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본인의 상징이다.’라는 말입니다.

환경부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2005년) 우리나라의 1일 발생되는 음식물류 폐기물의 양은
약 11,397톤(8톤 트럭 1,400여대 분) 1,880+344=2,324
음식물 쓰레기에 의한 경제적 손실가치는
· 국민 전체 1일 약 404억원
· 국민 전체 1년 간 15조원
· 1인당 연간 314,700원
· 1가구당(3.6인 기준) 연간 1,133,000원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에서 복음을 전할 때 남자 어른만 계수 한 숫자가 5,000명이 넘었습니다.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포함하면 최소 15,000명은 됩니다. 오병이어로 이 사람들을 다 먹이시고 12바구니가 남았습니다. 나누어 주다보니 남은 것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으로 먹고 남은 음식을 잘 거두었습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시골의 작고 오래된 교회에 젊은 전도사님이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첫 목회를 시작하는 전도사님의 감회는 남달랐습니다.
첫 설교로 오병이어의 기적의 내용으로 설교하게 되었는데 너무 긴장한 탓에 그만 “예수님께서 떡 5,000개와 물고기2,000마리로 다섯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나 남기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하여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말씀을 듣고있던 그 교회 장로님이 하는 말이 “그 정도라면 나도 하겠다”라며 전도사님에게 들릴 정도로 혼잣말로 말했습니다. 얼굴이 홍당무같이 달아오른 전도사님은 그 다음주에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실수한 것을 인정하고 “제가 실수하여 잘못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 가득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장로님에게 물었습니다. “장로님 이래도 하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장로님 왈 “지난주에 먹다 남은 거 있잖아!”

아이의 행복에 필요한 것
앞의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에게 엄마가 “돈 없어!”라고 딱 짤랐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이가 생각하기를 “돈만 있으면 살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또 엄마가 돈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엄마가 없다고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에게 속고 있구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는 그 돈을 손에 넣으려고만 할 것입니다. 엄마가 돈을 잘 관리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일본 황족만 다니는 황태자 학교가 있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야구가 일반학교 학생들과 열리는데 말이 야구지 아이들끼리 노는 것인데, 일반학교 아이들은 야구 유니폼을 다 입고 왔는데 정작 황태자만이 유니폼이 없었다고 합니다. 황태자가 “저도 입고 싶어요.”하니까 황후인 미치코 왕비가 “크리스마스까지 기다리렴.” 그리고 3개월이 지나서 유니폼을 갖도록 했다는 겁니다.
제가 전에 협동목사로 있던 일산에 벧엘교회가 있습니다. 특별 40일 새벽예배가 있었는데 집사님 아들이 초등학생인데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더니 새벽기도 40일 다니면 컴퓨터 새것으로 사주기로 했답니다. 아이에게 아무 노력과 기다림 없이 갖게 하는 것은 아이늘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늘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우리 어른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갖은 방법을 적용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예수님으로부터, 십자가로부터 주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값없이…”란 말에 너무 소중함을 모르고 받으시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7:6)고 말씀하셨다.
. 모든 것을 가진 아이는 양보를 배우지 못합니다.
. 부족함이 없이 자란 아이는 친구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 학용품을 소중히 다루지 않는 아이는 공부도 잘 할 수 없습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아빠는 낚싯대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요리를 좋아하는 엄마는 주방기구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일수록 학용품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것입니다.
. 가족이 함께 무언가에 열중해 보십시오.

아버지 집에서 키우라
목사만 목회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이를 기르는 것이야말로 목회다’라고 생각합니다.
내 아이에게 제일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부모님입니다.

시 한편 소개 드립니다.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아이와 함께 손가락 그림을 더 많이 그리고, 손가락으로 명령하는 일은 덜 하리라.
아이를 바로 잡으려고 덜 노력하고, 아이와 하나가 되려고 더 많이 노력하리라.
시계에서 눈을 떼고 눈으로 아이를 더 많이 바라보리라.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아는 데 관심을 갖지 않고, 더 많이 관심 갖는 법을 배우리라.
자전거도 더 많이 타고 연도 더 많이 날리리라.
들판을 더 많이 뛰어다니고 별들을 더 오래 바라보리라. 더 많이 껴안고 더 적게 다투리라.
도토리 속의 떡갈나무를 더 자주 보리라. 덜 단호하고 더 많이 긍정하리라.
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리라.

- 다이아나 루먼스 -

재물을 남기는 부모가 아니라 믿음을 남기는 부모님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