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열매를 맺는 씨앗
예수님의 말씀(102. 스스로 열매를 맺는 씨앗) / 본문 : 막 4:26-29
“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영국의 코벤트리라는 도시에 큰 교회가 있었는데 2차 대전 때 다 타 버리고 교회 한쪽 벽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그 벽은 그대로 보존되면서 “하나님 아버지, 용서하십시오”라는 큰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많은 관광객들로 하여금 이 현장을 그대로 보게 하여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일본의 히로시마에는 원자탄이 떨어졌던 곳에 박물관을 짓고 전쟁의 흔적을 그대로 보관하여 후세인 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독일의 베를린에도 대단히 큰 카이제르 기념 교회가 있었다. 이 교회 역시 모두 불타서 종 탑만 우뚝 서 있습니다. 후에 교회를 다시 지을 때에도 그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바로 옆에다 교회를 지었다. 그런데, 우리들의 6.25 흔적은 어디로 갔습니까가 ? 유감스럽게도 아픔을 볼 수 있는 산 증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경험과 아픔은 점점 잊혀지고 있습니다. 증거 없이 아무리 전한들 설득력이 없습니다. 아니, 시간이 점점 지남에 따라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무감각해져 정신이 해이해져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26-29절의 말씀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생략하고 있는 비유로,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가라지 비유, 겨자 씨 비유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씨앗에 대하여 좋다느니 나쁘다는 말이 없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열매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돌 짝 밭과 같은 마음,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이 있습니다.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받는 은혜도 다르고, 그 은혜의 결과 변화 받는 모습도 다 다른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은 오늘 이 곳에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태도를 가지고 듣는 사람이 변화를 받고 열매를 맺는 것을 봅니다.
가라지 비유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밭은 다 좋은 밭입니다. 그러나 좋은 씨앗이 뿌려진 밭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도 뿌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 밭이 아무리 좋아도 뿌려지는 씨앗 그 자체가 나쁜 씨앗이라고 하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복음의 수용성,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참으로 좋지만, 뿌려지는 씨앗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비유 중에 겨자씨의 비유는 또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아주 큰 역사를 이루는 뜻입니다. 적은 씨앗이 나중에는 그늘을 내고, 열매를 내고, 공중의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그런 나무로 자란다는 뜻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아주 미약한 말씀이요, 인격이지만 점점 자라서 아주 큰 나무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씨앗에 대하여는 좋다느니 나쁘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 씨앗에 대한 좋고 나쁜 것은 가라지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4가지 내지 6가지의 반응이나 수용성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 비유의 특징은 생명의 신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씨가 자라는 과정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토질이나 풍성한 수확보다는 신비로운 능력, 생명의 신비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시키고 발전시키고, 성장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의 씨를 뿌려주시고 열매를 거두어들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자라고 열매를 맺고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가 복음을 뿌렸으니 내가 열매를 거둘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의 어떤 노력이나 창조적인 행위로 싹이 트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열심히 가꾸고, 돌아보아서 이삭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신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식물이 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습니다. 씨를 뿌린 사람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납니다. 씨 뿌린 사람이 밭에 나가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요, 씨가 발아할 수 있도록 온도를 맞춰주려고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습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씨를 뿌리고 사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돌아와 그가 해야하는 다른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밭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어도 땅은 씨를 보관하고 있었고, 싹이 나게 하느라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행동,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한 것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보다는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 하시고, 우리는 그냥 기뻐서 따라다닌 것뿐입니다. 이것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믿음이 자라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전부요, 우리가 한 일이란 정말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따라다닌 것뿐입니다.
엘리코트(Elicort)라는 신학자가 말한 심리학적인 성장의 3단계를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사상, 곧 생각의 성장입니다. 생각의 성장이 곧 인격의 성장입니다. 생각이 깊어지고, 발전해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질이 결정입니다. 유명한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말하기를 “이 세상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세상에는 복이나 화가 따로 없다. 다만 생각 여하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말하기를 “생각하기를 가르쳐야지, 생각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고귀한 생각과 함께 있는 사람은 고독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며,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엘리코트는 두 번째의 성장은 행위의 성장을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그가 사는 행위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소포클래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신은 행동하지 않는 자를 결코 돕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생각에 머물고, 지식에 머물지 말고 행동으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 그의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행동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목적이 성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목적이란 우리의 사는 의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여도 그 일에서 의미를 찾고 또 부여합니다. 의미가 큰 일이라고 하면 시간과 물질을 남김없이 투자하여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하면 어떠한 수고도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의미 없는 일에 왜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낭비할 것입니까? 사람은 삶의 목적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공부하는 목적, 직업을 가지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들 가정이 살아가는 목적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하는 것까지 사실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때가 많습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나의 전부를 투자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사는 목적이 분명해지고, 그런 목적에 있어 성장해야 합니다. 목적을 가지는 일에도 성숙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사는 것도 감사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참으로 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사32:8)고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눈여겨보아는 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라고 봅니다.
그 첫째는 생명의 씨, 살아있는 말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세계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어야지 무생물을 가지고 생명을 나오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밭이 있다 하여도 그 밭은 생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생명의 씨앗, 하나님의 말씀, 영원한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합니다. 아무리 고매한 인격을 가지고, 겸손하여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거기에 생명의 말씀이 떨어져야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씨를 만들고 그 씨에 생명을 심어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식물에 열매를 주시고 그 안에 생명의 씨앗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상한 학문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공학’입니다. 생명을 공학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공학은 길이 잘못된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공학은 사람에게 있는 것인데 이것을 붙여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공학’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줄기세포 연구하는데 아마 계속 할겁니다. 처음에 좋은 목적을 말하지만 결국은 상업적인 논리와 권력으로 가는 것입니다. 악용 당하게 되어있다 그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씨는 뿌려지면 저절로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여기서 최소한의 어떤 노력이 있어야 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혼자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고 중에서 우리보고 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0:14절에서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고 싶었어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어둡고 캄캄한 암흑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이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먼저 믿고 믿음의 좋은 말씀을 가르쳐주고, 지도해주는 선배들이 고마운 것입니다.
셋째로 땅이 있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란 천하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교보문고의 표어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입니다. 그런데 책을 만들기 전 이 사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계신자”라고 했습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우트마태’라고 하는데 영어로 오토매틱이라는 말입니다. 자동, 자연적, 저절로 스스로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자들은 마치 처음에 작은 물체가 점점 진화해서 크게되고 척추동물이 된 것으로 설명하지만 생명 그 자체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 생명체가 어떻게 변화되었다고는 하는지 모르지만 생명 자체를 말하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스스로’란 진화를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를 말한 것입니다.
고전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 님 뿐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토마스 목사님이 대동강으로 들어오셔서 순교하셨을 때 복음은 죽고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지금도 살아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있습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 년 우리나라 교회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한해였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나라안의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곧이어 병인양요까지 치뤘으니 외세에 대한 조선의 쇄국정책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 8월 평양의 대동강에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나타났는데 이 배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로버트 토마스라는 선교사가 통역관으로 동승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의 피를 흘린 주인공입니다.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던 그는 드디어, 1863년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 이은 부인의 죽음과 선임 선교사와의 갈등으로 한때 선교사역을 포기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세관에서 통역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다시금 복음 사역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같은 해 9월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 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 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단 한 권이라고 더 조선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한 권의 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의 처단은 즉시 집행되었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바로 박춘권 이라는 자였습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 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면서 그에게 내밀었고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오..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과연 토마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에 유력한 신앙 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은데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석호정 만경대의 최취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준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 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습니다.
비록 정식으로 조선 땅을 밞아 보지도 못한 채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음을 당한 로버트 토마스선교사. 하지만 그의 죽음 뒤에야 비로소 조선 땅에도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데. 서툰 한국말 실력에 가진 것이라곤 한문으로 된 성경책 한 권뿐이었지만,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 복음의 부흥을 위한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29절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입니다. 씨앗의 결국은 열매를 맺는 것이고 열매가 익었을 때 추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반드시 심판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일차적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라나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자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