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열매를 맺는 씨앗

예수님의 말씀(102. 스스로 열매를 맺는 씨앗) / 본문 : 막 4:26-29

“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영국의 코벤트리라는 도시에 큰 교회가 있었는데 2차 대전 때 다 타 버리고 교회 한쪽 벽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그 벽은 그대로 보존되면서 “하나님 아버지, 용서하십시오”라는 큰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많은 관광객들로 하여금 이 현장을 그대로 보게 하여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일본의 히로시마에는 원자탄이 떨어졌던 곳에 박물관을 짓고 전쟁의 흔적을 그대로 보관하여 후세인 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독일의 베를린에도 대단히 큰 카이제르 기념 교회가 있었다. 이 교회 역시 모두 불타서 종 탑만 우뚝 서 있습니다. 후에 교회를 다시 지을 때에도 그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바로 옆에다 교회를 지었다. 그런데, 우리들의 6.25 흔적은 어디로 갔습니까가 ? 유감스럽게도 아픔을 볼 수 있는 산 증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경험과 아픔은 점점 잊혀지고 있습니다. 증거 없이 아무리 전한들 설득력이 없습니다. 아니, 시간이 점점 지남에 따라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무감각해져 정신이 해이해져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26-29절의 말씀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생략하고 있는 비유로,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가라지 비유, 겨자 씨 비유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씨앗에 대하여 좋다느니 나쁘다는 말이 없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열매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돌 짝 밭과 같은 마음,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이 있습니다.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받는 은혜도 다르고, 그 은혜의 결과 변화 받는 모습도 다 다른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은 오늘 이 곳에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태도를 가지고 듣는 사람이 변화를 받고 열매를 맺는 것을 봅니다.
가라지 비유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밭은 다 좋은 밭입니다. 그러나 좋은 씨앗이 뿌려진 밭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도 뿌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 밭이 아무리 좋아도 뿌려지는 씨앗 그 자체가 나쁜 씨앗이라고 하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복음의 수용성,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참으로 좋지만, 뿌려지는 씨앗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비유 중에 겨자씨의 비유는 또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아주 큰 역사를 이루는 뜻입니다. 적은 씨앗이 나중에는 그늘을 내고, 열매를 내고, 공중의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그런 나무로 자란다는 뜻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아주 미약한 말씀이요, 인격이지만 점점 자라서 아주 큰 나무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씨앗에 대하여는 좋다느니 나쁘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 씨앗에 대한 좋고 나쁜 것은 가라지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4가지 내지 6가지의 반응이나 수용성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 비유의 특징은 생명의 신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씨가 자라는 과정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토질이나 풍성한 수확보다는 신비로운 능력, 생명의 신비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시키고 발전시키고, 성장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의 씨를 뿌려주시고 열매를 거두어들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자라고 열매를 맺고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가 복음을 뿌렸으니 내가 열매를 거둘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의 어떤 노력이나 창조적인 행위로 싹이 트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열심히 가꾸고, 돌아보아서 이삭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신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식물이 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습니다. 씨를 뿌린 사람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납니다. 씨 뿌린 사람이 밭에 나가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요, 씨가 발아할 수 있도록 온도를 맞춰주려고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습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씨를 뿌리고 사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돌아와 그가 해야하는 다른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밭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어도 땅은 씨를 보관하고 있었고, 싹이 나게 하느라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행동,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한 것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보다는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 하시고, 우리는 그냥 기뻐서 따라다닌 것뿐입니다. 이것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믿음이 자라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전부요, 우리가 한 일이란 정말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따라다닌 것뿐입니다.

엘리코트(Elicort)라는 신학자가 말한 심리학적인 성장의 3단계를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사상, 곧 생각의 성장입니다. 생각의 성장이 곧 인격의 성장입니다. 생각이 깊어지고, 발전해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질이 결정입니다. 유명한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말하기를 “이 세상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세상에는 복이나 화가 따로 없다. 다만 생각 여하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말하기를 “생각하기를 가르쳐야지, 생각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고귀한 생각과 함께 있는 사람은 고독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며,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엘리코트는 두 번째의 성장은 행위의 성장을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그가 사는 행위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소포클래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신은 행동하지 않는 자를 결코 돕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생각에 머물고, 지식에 머물지 말고 행동으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 그의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행동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목적이 성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목적이란 우리의 사는 의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여도 그 일에서 의미를 찾고 또 부여합니다. 의미가 큰 일이라고 하면 시간과 물질을 남김없이 투자하여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하면 어떠한 수고도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의미 없는 일에 왜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낭비할 것입니까? 사람은 삶의 목적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공부하는 목적, 직업을 가지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들 가정이 살아가는 목적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하는 것까지 사실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때가 많습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나의 전부를 투자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사는 목적이 분명해지고, 그런 목적에 있어 성장해야 합니다. 목적을 가지는 일에도 성숙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사는 것도 감사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참으로 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사32:8)고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눈여겨보아는 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라고 봅니다.
그 첫째는 생명의 씨, 살아있는 말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세계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어야지 무생물을 가지고 생명을 나오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밭이 있다 하여도 그 밭은 생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생명의 씨앗, 하나님의 말씀, 영원한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합니다. 아무리 고매한 인격을 가지고, 겸손하여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거기에 생명의 말씀이 떨어져야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씨를 만들고 그 씨에 생명을 심어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식물에 열매를 주시고 그 안에 생명의 씨앗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상한 학문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공학’입니다. 생명을 공학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공학은 길이 잘못된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공학은 사람에게 있는 것인데 이것을 붙여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공학’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줄기세포 연구하는데 아마 계속 할겁니다. 처음에 좋은 목적을 말하지만 결국은 상업적인 논리와 권력으로 가는 것입니다. 악용 당하게 되어있다 그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씨는 뿌려지면 저절로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여기서 최소한의 어떤 노력이 있어야 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혼자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고 중에서 우리보고 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0:14절에서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고 싶었어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어둡고 캄캄한 암흑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이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먼저 믿고 믿음의 좋은 말씀을 가르쳐주고, 지도해주는 선배들이 고마운 것입니다.
셋째로 땅이 있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란 천하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교보문고의 표어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입니다. 그런데 책을 만들기 전 이 사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계신자”라고 했습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우트마태’라고 하는데 영어로 오토매틱이라는 말입니다. 자동, 자연적, 저절로 스스로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자들은 마치 처음에 작은 물체가 점점 진화해서 크게되고 척추동물이 된 것으로 설명하지만 생명 그 자체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 생명체가 어떻게 변화되었다고는 하는지 모르지만 생명 자체를 말하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스스로’란 진화를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를 말한 것입니다.
고전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 님 뿐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토마스 목사님이 대동강으로 들어오셔서 순교하셨을 때 복음은 죽고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지금도 살아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있습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 년 우리나라 교회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한해였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나라안의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곧이어 병인양요까지 치뤘으니 외세에 대한 조선의 쇄국정책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 8월 평양의 대동강에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나타났는데 이 배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로버트 토마스라는 선교사가 통역관으로 동승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의 피를 흘린 주인공입니다.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던 그는 드디어, 1863년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 이은 부인의 죽음과 선임 선교사와의 갈등으로 한때 선교사역을 포기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세관에서 통역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다시금 복음 사역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같은 해 9월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 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 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단 한 권이라고 더 조선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한 권의 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의 처단은 즉시 집행되었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바로 박춘권 이라는 자였습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 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면서 그에게 내밀었고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오..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과연 토마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에 유력한 신앙 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은데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석호정 만경대의 최취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준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 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습니다.

비록 정식으로 조선 땅을 밞아 보지도 못한 채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음을 당한 로버트 토마스선교사. 하지만 그의 죽음 뒤에야 비로소 조선 땅에도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데. 서툰 한국말 실력에 가진 것이라곤 한문으로 된 성경책 한 권뿐이었지만,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 복음의 부흥을 위한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29절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입니다. 씨앗의 결국은 열매를 맺는 것이고 열매가 익었을 때 추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반드시 심판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일차적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라나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자라는 것입니다.
 

선지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1. 선지자이신 예수님) / 본문 : 마 13:57, 막6:4, 눅 4:24, 요4:44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영어에 “코벤트리로 보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코벤트리로 보낸다.”라고 하면 ‘한 집단에서 제외시킨다, 교제를 끊는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코벤트리는 영국 잉글랜드 중앙부 워릭셔에 있는 도시인데 그 곳 사람들은 군인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군인과 시민 사이에 교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파견되는 군인은 일체의 교제가 단절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7세기 청교도 혁명 때, 왕당파 포로가 코벤트리에서 연금 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이후로 사이가 더 나빠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코벤트리로 보내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선지자라고 번역된 원문의 헬라어 단어는 profhvth”(프롭헤테스, prophetes)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미리 말하는 자, 영감으로 말하는 자”로 “선지자, 선견자, 예언자”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쉬운성경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모두 예언자로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KJV, NIV, ASV)은 모두 prophet(퍼페츠)로 번역했습니다. 영문의 prophet는 헬라어의 문자를 영문으로 옮겨서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원문에서 profhvth”단어는 두 개의 단어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앞의 ‘pro’와 ‘fhvth”‘가 합성된 것입니다. ‘pro’는 전치사로 “앞에, 전에”의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영어의 pro는 전치사로는 “… 찬성하여”와 명사로는 “숙련가, 전문가”를 뜻하는 말입니다. 뒤의 ‘fhvth”‘는 ‘fhmiv’(훼미)에서 왔는데 그 뜻은 “이야기하다, 증언하다, 알게 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자 적으로 선지자 또는 예언자는 앞서서 말하는 사람, 미리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라는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성경이나 기타 현대 성경들(영어 등)은 구약이 39권의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배열은 율법서, 역사서, 시서, 예언서 순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유대인들은 그것을 다르게 구분합니다. 오늘날까지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는 율법(토라), 예언서(네비임), 성문서(聖文書, 케투빔)의 세 가지로만 분류합니다. 유대인들은 첫 번째 성경(토라)를 율법이라고 부르며 사실상 다른 성경들과 차별을 두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만큼 모세 오경은 먼저 성경으로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서는 그 이후에 형성된 책인데 부분적으로는 문서로 또는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을 전기예언서, 후기예언서 부분으로 엮게된 것입니다. 이 성경들은 예언자들의 말이 구두로 또는 문서로써 오랫동안 전달되는 중 그 자체가 지닌 권위와 감화력은 그것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과 감화를 받게 했으며, 회개와 위로와 격려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특히 자기 나라를 잃어버리고 고국산천을 멀리 떠나 먼 이방나라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 경건한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예언자들의 말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수많은 경고와 예언을 등한히 하고 무시하던 민족이 이제 망국의 운명과 포로 생활의 쓰라린 고통을 직접 당하게 될 때 예언자들을 통해서 들려오던 그 하나님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기억되며 동시에 예언자들의 예고와 경고가 그 얼마나 진실성을 가졌었는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 회개의 제사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장소가 없다.” 그리고 이 때에 와서 비로소 예언자들의 말을 기억하며 그들의 글을 읽고 보존하여 마음으로 새로운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전기예언서와 후기예언서에 있는 글들을 읽으며 새 희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법도 안에만 있으면 반드시 영광의 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언자(선지자)란 이스라엘의 제일 어려운 시기를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에게 예언자, 예언서란 희망의 메시지요,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의 운명을 놓고 예언한다든가 사업에 대한 예언을 한다든가 꿈꾼 것을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일전에 어떤 점쟁이가 낸 광고에서 ‘집사, 장로, 목사도 환영’이라는 카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광고를 보면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이 점을 보러 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점쟁이들이 대통령이 당선될 때마다 자기가 예언해서 맞혔다는 등 소문내기를 좋아합니까. 또 자기가 가르쳐줘서 로또복권에 당첨됐다고 자랑하는 점쟁이도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은 점쟁이들이 사주카페라는 것을 만들어 커피도 마셔가며 친근한 언어로 예언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예언들은 모두 거짓된 것입니다. 맞아도 거짓이요, 틀려도 거짓입니다. 점쟁이들은 모두 거짓 예언자입니다. 참된 예언자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그 분의 참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예언자입니다.

예언자의 말을 존중히 여기기 시작한 다른 이유가 또 있는데 유대인들은 주전 5세기 중엽에 예언자 말라기에 이르러 예언의 소리가 끊어졌고 다시는 그것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하여 필요하시면 하나님이 언제든지 예언자를 보내주신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다른 예언자가 아니라 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다시 엘라야를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13:3절에는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고 하여 이제는 누구든지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면 죽음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편 74:9에서도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로서 예언자가 끊어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더 이상 예언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전 예언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세례요한은 이사야 40:3의 예언대로 예수님 앞에 유대 광야에 나타났습니다.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말4:5)한 바로 그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을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14)고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선을 그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 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도 수군덕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마 16:14-16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예언자)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선지자적 역할은 다른 것입니다. 구약 개념의 예언자 시대는 유대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끝난 것이고 예수님은 새로운 선지자로 오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와 글들을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읽으셨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눅 4:17) 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 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 성경으로서 당신을 증거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사도들 역시 구약을 인용하고 가르쳤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행 13:15)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예언자) 보다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갈 때 예수께서 질문하셨을 때 들은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하는 말씀을 들었지만 실상은 그만한 존경을 못 받으신 것입니다. 본문에 말씀하신 것처럼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하심으로써 섭섭함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던 이 백성이 이번에는 하나님의 아들마저 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형장으로 가시던 중 너무나 힘드셨던 탓에 어느 구둣방 문전에 주저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아하수에로스라고 하는 그 구둣방 주인은 몰인정하고 무자비하게도 그리스도를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는 내침을 당하시면서 구둣방 주인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나는 곧 간다. 그러나 너는 내가 돌아오기까지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주님은 떠나셨습니다. 그 뒤 아하수에로스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나라도 집도 없이 힘겨운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유럽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는 “방황하는 유대인(Wandering Jew)”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오늘날 대다수 유대인들이 조국에서 쫓겨 나와 세계를 전전하는 것을 해명하는 이야기인 듯 싶습니다.

여기는 디즈니랜드입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아이들이 벌떼처럼 몰려갑니다. 신데렐라가 등장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신데렐라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려고 그 주변에 둘러섰습니다. 그러나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몸이 심하게 뒤틀리는 장애를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형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눈빛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신데렐라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치는 아이들 틈에 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감히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한 걸음, 한 걸음을 사뿐히 내딛으며 신데렐라가 소년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해 있는 소년의 얼굴에 살며시 입을 맞췄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분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 공주가 아닌, 평강의 왕을 기억해 보십시오. 장애 소년이 아닌 당신과 내 이야기입니다. 두 경우 다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두 경우 다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신데렐라는 단지 키스만 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뒤에 남겨진 소년의 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신데렐라였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뒤틀린 소년의 몸뚱이는 예수님이 가지시고, 자신의 아름다움은 장애 소년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짧은 감동보다 위대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 The Gift/ 맥스 루케이도 (두란노, 2002)

저는 본문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예수님 정말로 이 말씀이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꼭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고향인 갈릴리의 나사렛 지방에서만 영접을 받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루살렘에서도 배척 당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또한 오늘날 많은 국가와 종족, 지역에서 배척 당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본문 말씀은 그만큼 예수님이 느끼시는 섭섭함이 크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이제 내 곁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더 이상 밀어내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밀어내었던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밀어내시면 더 이상 기회와 희망은 없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은 하나님의 마지막 카드입니다. 이제 때가 다 되어갑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성경도 요한 계시록의 끝 부분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그 때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주로 영원히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요즘 존경하는 사람이 한명 생겼습니다. A(아로노). C(클레멘즈). 게벨라인(1861-1945)이라는 분입니다. 1861년 독일에서 태어나 12세에 그리스도인이 되어 18세에 성직에 헌신하기로 결정한 사람입니다. 그가 결심한 날이 10월 31일로 바로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기념일입니다. 그가 미국에 도착한 후 불과 몇 달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서전 ‘반세기’에서 “나는 신약성경을 읽고 있었다. 그때 갑자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탐구와 그를 위한 봉사에 나의 일생을 바쳐야 한다는 강렬한 충동이 나에게로 밀려왔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교회에서 시무했으며, 히브리인에 대한 강한 사명을 받고 당시 뉴욕으로 흘러 들어온 수 천명의 유대인을 위한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Hope 선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의 희망’이라는 잡지를 1894년부터 1945년 그가 죽을 때까지 51년 동안 그 잡지를 편집했습니다. 1889년 종파 문제로 독일 감리교 연회와의 관계를 끊고 미국, 캐나다, 유럽 등에서 순회 설교를 했습니다. 게벨라인의 첫 저서는 “스가랴서의 연구”인데 여기에 순회 설교 때 흥미 있는 이야기가 담겨있었습니다. 그는 랍비들에게 자신의 연구한 책을 보냈습니다. 랍비들은 그의 책을 휴지통해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랍비의 비서였던 한 젊은 청년이 그것을 꺼내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집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1장에 관하여 “유대인의 문제”는 하나의 고전이 되었으며, “주석 성경”은 1912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0년후에 완성했습니다(이 책은 본래 9권으로 발간되었으나 무디 로이제우크에 의해 4권으로 합본되었다. 한글로는 ‘엑스포지터스.성경신약주석(전6권)’으로 옮긴이:강병도 800쪽, 기독지혜사에서 1982년 발행했는데 요즘은 구하기가 어렵네요).

사람들은 종종 게벨라인에게 그토록 수많은 순회 설교를 하고 잡지를 편집함과 동시에 많은 저서를 집필한 비결을 묻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습니다. “나는 그저 시간을 낭비한 일이 없을 뿐입니다.” 또한 왜 골프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골프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 시간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단히 열정적인 학생이었으며 학자였을 뿐 아니라 헌신적인 설교자였다.

이영제 목사 정리(참고: 개혁신학과 설교연구, 국제신학연구소, 1987. 9. 25)

감람산의 기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0. 감람산의 기도) / 본문 : 눅 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41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습관이 있습니까?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고 합니다. 습관은 한번 체질화되면 고치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좋은 습관을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됩니다. 이 습관이 사람을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나타난 습관이 있습니다. “낮이면 성전에서 … 밤이면 감람원이라하는 산에서 쉬시니라”(눅 21:37)고 했습니다. 눅 1:9, 2:42에도 “습관을 좇아”라고 나옵니다. 47절에서 가롯유다가 체포조를 이끌고 이 장소를 어렵지 않게 찾아간 것도 습관적으로 가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0절에 “그곳에 이르러”라고 했는데 그곳은 습관적으로 가시는 그곳입니다. “그곳”이란 바로 감람산 서쪽 중턱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입니다(마 26:36, 막 14:32). 예수님에게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마지막 밤에 다신 곳도 바로 늘 가셔서 기도하시고 쉬신 곳이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마지막 밤이 다가온다면 늘 가던 교회로 나와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교회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 제일 행복한 것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교회 가까운데 묻히면 부활 때 무덤에서 제일먼저 일어난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교회 가까운 곳에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점점 들어와 교회 앞마당과 심지어는 강대상 밑에도 무덤을 삼았습니다. 섹스피어의 무덤도 교회 강대상 밑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욕심에서 남보다 더 빨리 부활하려고 교회를 가깝게 생각한 것은 잘못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녀야 합니다. 여러분 습관이라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닙니다. 예배드릴 때 습관적으로 조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장소로 가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주님을 부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습관은 인간 생활에 큰 지도자이자’(Heine)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너무 아멘을 습관적으로 크게 하시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부흥회 중에 예배 분위기가 방해될 까봐 이 집사님에게 유아실로 가서 아이들을 보고 계시라고 임무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부흥회 때 설교를 하고있는데 저 쪽에서 아멘~!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설교도 들리지 않을텐데 왜 아멘 하셨습니까? 그랬더니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이들 교과서인 세계지도를 보고있는데 파랗게 칠해진 바다를 보고 아멘 했습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아멘. 무엇을 보던지, 무엇을 생각하던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아멘 하는 삶, 이런 습관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40)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46)고 하셨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시험이 다가오는 때입니다. 바로 이 때가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나 잠시 뒤에 있을 일도 사람은 모릅니다. 주님만이 아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무지한지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가 만일 마지막 하루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한다면 좀더 진실 되지 않겠습니까? 늘 그런 마음으로 예배하며 기도하고 하루 하루를 살아야 됩니다. 아이들하고도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떠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언제까지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 때를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영원한 기도의 제목은 시험에 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목적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면 사람이 바보가 됩니다. 그렇게 똑똑하고 사리분별를 잘하는 사람이 상식적으로도 통하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험에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단에게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면 사람과의 관계에만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될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을 합니다. 저기 멀리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연약한 사람입니다. 별것 아닌 것에도 시험이 듭니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예수님에게 사단은 끈질기게 따라다닙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이 때 잠시 물러간 것 같으나 아주 떠나지 않고 늘 예수님의 주위에서 맴돌고 있음을 압니다. 사람들을 통해서 사단은 끊임없이 나타납니다(마16:1, 19:13, 22:35). 바로 예수님이 지금 기도하시는 것은 사단과의 싸움입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
우리의 최종적인 기도는 “아버지의 뜻대로”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보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식이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부모님의 뜻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우리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머리로 다 이해하면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머리로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믿으려면 끝까지 못 믿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는 신을 믿으려면 아마도 나보다 못한 것을 믿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창 25:5)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28:2에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라고 합니다. 이사야 1장 19절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라고 하십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표시입니다.

힘을 도와 주십니다.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43)
우리가 기도할 때도 천사가 도와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가 도왔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육신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기도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집사람 동기모임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아마 동기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사모님이 목사님이 40일 기도를 하러 가셨는데 그만 중간에 죽을 것 같아 사람들이 들것에 모시고 집으로 왔답니다. 그래서 이 사모님이 잘 왔다고 한 것이 아니라 다시 기도원으로 돌려보냈답니다. “죽어도 기도원에서 죽으셔야지 돌아오시면 안됩니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 목사님이 능력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모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보고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천사들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에게 이 천사는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도 나타나 도와 주셨습니다(마 4:11, 막 1:13).

누구나 힘을 좋아합니다. 힘이 있어야 삽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힘은 육체적 힘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일을 위해서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은 다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적 힘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회개하기 이전 세상 힘을 가졌을 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저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한 후에는 겸손한 사람이요, 참가치를 아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적 힘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우리들에게는 세 가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1) 나는 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I can do nothing on own, because I am nothing) 빌 3:4-8
2) 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I con do all things through Christ becauce He stsengthes me) 벧전 5:10
3) 나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때문에 나는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I give God all the credit for my thing I am able to accomplish)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의식(seuse of God’s almighty power)하고 살아야 합니다.

로버트 모패트(1795∼1883년)는 남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입니다. 그는 선교 활동 중 고향인 영국에 잠시 들러 후원을 호소했는데 첫 번째 교회에 들어섰을 때 무표정한 서너 명의 여신도밖에 없어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잠언8장4절을 인용,「사명의 고귀함」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가 설교하는 동안 남자라고는 오르간에 바람을 집어넣는 소년 조수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놀라웠습니다. 아무도 안 들었을 것 같은 그의 설교를 이 소년이 듣고 감화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후에 위대한 아프리카 선교사가 된 리빙스턴이었습니다.

우리 주앙교회를 다른 말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새 힘 교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주앙교회에 다니면서 어 깨 축 늘어뜨리면 안됩니다. 누가 툭 치면 살아서 팔딱 뛰어야 합니다.

정범진 씨의 《밥 잘 먹고 힘센 여자를 찾습니다》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무렵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침대 머리맡을 들어올려 내 발가락을 관찰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마비되었던 감각이 돌아오면 제일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신체부위가 발가락이라는 이야기를 의사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몸의 마비를 경험해 본 사람은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를 절절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몸의 마비를 경험하지 않고도 이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한 자기 발가락을 바라볼 때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고,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강아지를 보면 가만히 주인 앞에 와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왜 바라봅니까?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앙망 하는 것은 무엇을 주실 것을 믿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세 가지 힘이 나옵니다. 그 모습은 바로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가는 모습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1) 날개 치며 올라가는 힘입니다(Soar).
2) 곤비치 않고 달려가는 힘입니다(run).
3) 피곤치 않고 걸아가는 힘입니다(walk).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역사상 기독교인을 꺾었던 왕이나 나라는 없습니다.
초대 교회 인들은 가이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로마제국을 밀어 제치면서 신앙의 길을 걸었습니다. 모든 일을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시기를 바랍니다(Start from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 행하시기를 바랍니다(walk with Christ).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며 행동하시기 바랍니다(walk learning on Christ).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동하시기를 바랍니다(walk to Christ).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이 여러분들에게 날마다 소생시키는 힘이(Renewing Strength)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얻습니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9. 온유한 자가 땅을 얻습니다.) / 본문 :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11)

역사상 제일 큰 땅을 차지하게 된 인물은 아마도 미 대륙을 발견한 ‘컬럼버스’라는 데는 의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온유한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온유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여러분! 바보스러운 것이 온유가 아닙니다. 또한 도전적인 사람이 온유하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 미저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산타마리아 호’는 많은 관광객들의 관람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산타마리아 호는 컬럼버스를 태워 가지고 처음으로 대서양을 건너 미 대륙에 도착한 배의 이름입니다. 지금의 산타마리아 호는 그 때의 배를 원형대로 모조해서 바닷가에 메어 놓은 것인데, 보는 사람마다 그 배가 대서양을 건너기에는 형편없이 작다는 사실에 놀란다고 합니다.
길이가 30m도 되지 않는 이 배는 지금 미저리 강을 오가는 거대한 배들 틈에서 장난감같이 작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배와 두 척의 더 작은 배가 용감한 컬럼버스를 태우고 신대륙에 건너 왔으며 탐험의 신기원을 마련한 것입니다. 바로 신대륙의 발견 등이 민주주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컬럼버스는 부족한 장비와 가망성 없는 모험을 용기로 보충한 사람이었습니다. 용기란 두려움 없이 산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앙을 통하여 두려움을 극복해 가는 생활입니다.

본문에 ‘온유한’(praei’”:프라에이스)로 사용된 말은 시편 37: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말입니다. 헬라어의 이 어근은 “pavscw:파스코”라는 말인데 “고난을 체험하다”라는 동사입니다. 그리고 원래 히브리어의 뜻은 “겸손한, 온순한”이라는 말의 “wn:[;:아나브”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아나브의 어근은 “hn:[;:아나”입니다. 아나의 뜻은 “누르다, 괴롭히다, 고통”을 뜻합니다.
헬라어, 히브리어 모두 원문상의 이 뜻을 종합하면 “온유한”것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 어려움 없이 자란 사람은 결코 온유하지 못하고 온유한 것을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은 사람 바로 이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칼빈은 온유함에 대해서 말하기를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실로 나폴레옹이나 진시황과 같은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무력의 힘과 권력으로 수많은 땅을 정복하였지만, 그들은 죽어서 몇 평 안 되는 묘지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온유하심으로 세상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고 천국의 영원한 기업을 상속하여 주실 것입니다.

미국은 정말 온유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그 땅들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알라스카는 미국 본토의 1/5에 해당하는 큰 땅덩어리입니다. 본래의 알라스카는 구 소련 땅이었습니다.
1867년 죤슨의 대통령으로 재임당시 720만 불을 주고 그 땅을 사들였습니다. 그 당시 얼음으로 되어있는 빙하의 땅으로만 알려졌던 문제의 땅 알라스카를 사들이자, 미국 국회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소환하여 질책을 가했습니다. 국회동의도 없이 쓸모 없는 땅을 사들였다고 온갖 비난과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중 한 의원은 “얼음이 필요하다면 미시시피강을 얼음으로 이용할 것이지 왜 하필이면 아이스박스에 불과한 알라스카를 샀는가?”라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 후 정부와 의회의 공동 조사단에 의하여 알라스카를 탐사해 보았더니 그 땅에는 상상외로 순금, 백금, 석유 풍부한 어장이 무진장으로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언론들은 미국은 얼음 땅을 사들인 것이 아니라, 황금의 땅을 거져 주었다고 대서특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하 양원 국회의원들이 백악관을 찾아가 정중히 사과를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알라스카의 축복이 주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땅이라고 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무리 쓸모 없는 땅이라도 귀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땅위에서 자연이 형성되고 인간의 문화가 이뤄지고 인류의 역사가 창달되고, 정치 경제 산업 등의 온갖 사회적인 발전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힘이 강한 자가 힘이 없는 자를 물리치고 땅을 빼앗기도 합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보면 서로 땅을 차지하려고 하는 욕망 때문에 개인과 개인사이에 싸우기도 하고 나라와 나라사이에 전쟁을 일으키고 무력으로 침범하는 일이 지구상에서 종식되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에 일본이 우리나라 전 국토를 침략하였고, 그 후 6.25의 한국전쟁이 발생된 이래 지금까지 남북으로 분단된 뼈아픈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유럽일대를 정복하고 지중해연안에 있는 주변국가들의 영토를 로마 지배령으로 삼았지만, 로마제국은 결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정당성을 벗어나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빼앗은 땅은 언젠가는 다시 빼앗기고 결국 패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평화와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결국 오랫동안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고 땅을 불법으로 빼앗은 자는 땅으로 망할 것입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은 이집트에서 많은 재산을 얻어 가지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네겝 땅으로 올라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서로 다투는 일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분가시켜서 서로 편리하게 떨어져 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말하기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 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먼저 선언했습니다. 롯은 요르단 분지를 가리키며 목자와 짐승들을 따로 데리고 분가하여 물이 넉넉하고 하나님의 동산같이 느껴졌던 소알 평지를 향했습니다. 롯이 떠나간 다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고개를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둘러보아라. 네 눈에 비치는 온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리라”(창 13:14-17)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선택한 이유를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고 합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를 오늘도 선택하십니다.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온유한 자들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고후 6:10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마지막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입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약 3:13에 보면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을 떠나 40년 동안 기나긴 세월을 견디면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1에 보면 사도요한은 밧모섬에서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땅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말한 것인데 이것은 천국을 말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땅을 얻어보아야 얼마나 가겠습니까?

어느 마을에 효자로 소문난 사람이 있어 원에서는 그 사람의 뒤를 밟도록 했습니다. 그가 과연 어떻게 부모 마음을 헤아리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나무를 캐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효자의 뒤를 밟던 관리는 그의 눈을 의심해야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효자는 집에 오자마자 난간에 앉아 어머니가 떠온 세숫대야에 발을 담그는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아들의 발을 씻기고 있었습니다. 관리는 화를 내며 효자에게 달려나갔습니다.
“이 파렴치한 놈 같으니라고.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라고 소문이 나서 찾아와 봤더니 천하에 불효 막심한 인간이었구만. 늙은 어머니에게 발을 씻기는 일을 시켜?”
그러자 이 효자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효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도록 해 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저희 어머님은 일하러 갔다 온 아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큰 낙으로 알고 사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내가 무슨 큰 일을 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역사 하시고자 하나님의 뜻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앙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시고자 하는 뜻을 잘 따라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가는 것입니다.

유머작가인 루코크라는 사람은 현대판 성령강림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풍자해서 썼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림”이라는 광고가 났습니다. 적어도 120여명은 모였어야 할 예배에 출석한 사람은 겨우 40여명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최근 가족과 함께 구입한 갈릴리 호수의 별장으로 주말여행을 떠났고, 바돌로매는 집에 손님이 와있기 때문에 예배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빌립의 가족은 지난 밤 늦도록 계속된 파티의 후유증으로 자고 있으며, 안드레는 새 차를 구입하려고 모토쇼장에 갔습니다. 마태는 근무처인 세무서에 시간외 근무를 나갔고, 요한은 사업차 골프를 치러 떠났습니다. 도마는 취직시험이 주일과 겹쳤으니 당연히 나올 수 없었습니다. 불길 같은 성령도 망설이다가 다락방 앞에서 되돌아갔습니다.

불꺼진 등대는 위험만 가져다 줄뿐입니다. 주님의 온유하신 성품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불꺼진 등대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신 성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2:5에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천국의 영원한 땅을 기업으로 받기를 바랍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