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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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06.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 본문 : 요 15:18-20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따라합시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원래 “나는 무슬림으로 태어났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던 터키의 네자티 아이든(Nezati aydin, 35세)의 말입니다.
지난 2007년 4월 18일(수) 13시경 터키 중동부에 있는 말라트야 도시의 기독교출판사를 이슬람 무장세력 5명이 기습하여 독일 선교사 1명과 현지 기독교인 2명을 목잘라 죽인 끔찍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이 때 죽은 현지인 가운데 네자티 아이든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난 후에 그의 형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던 내용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태어난 환경은 어떠했든지 간에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교학에 ‘상황화’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어쩌면 선교는 이 용어와 같이 씨름하면서 들어가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집사람이 요리를 조금 하지 않습니까? 지난번 감자를 얇게 쓸어 빈대떡을 부쳤습니다. 어떤 요리 프로그램을 보니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리 연구하는 분들이 현대인의 욕구에 맞는 음식을 개발하려다보니 자꾸 새로운 방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감자 부침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지요. 외모의 모양과 방법은 변화되지만 원래의 재료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상황화라는 말도 그렇게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한국문화의 성격을 대표적으로 “비빔밥 문화”라고 했습니다. 한국인의 정서 속에는 비빔밥에 관하여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섞이든, 무엇이 들어가고 빠지든 비빔밥은 비빔밥입니다. 이런 한국인의 흡수력은 가히 세계를 놀라게 합니다. 일 년도 사용하지 않고 휴대폰을 신 모델로 바꾸는 한국인의 소비 형태가 관련 분야의 국가 경쟁력이라고 하는 분석기사를 내놓는 경제전문기관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과 교회를 들여다 볼 때 이러한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게 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자기는 별로 갈 생각이 없었는데 그냥 따라 간다는 것이지요. 좋게 보면 비빔밥 문화이지만 자기 주관이 없는 행동입니다. 남이 다 하니까 우리 아이도 해야되고 다른 교회가 하니까 우리도 해야하고 하는 식의 방법, 프로그램은 그다지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얼마 안되어 유명무실해 질 수 있습니다. 시작할 때 오랜 연구와 기도 끝에 마련한 것이 아니라 남이 하니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철학 없이 시작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다 가는 교회로, 남이 다 하는 방법대로가 아닙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남이 하는 것 따라하는 것 싫어합니다. 주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노력해서 우리의 맛을 내야합니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남보다 더 노력을 해야할 것입니다. 그래도 해야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세상 사람 따라하는 것은 쉬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본문 18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 전적으로 주님 자신 때문에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사단은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것 그것이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에 관심이 없는 한 사단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원문의 “미워한”(memivshken:메미세켄)은 완료형 능동태로 나옵니다. 이 뜻은 “이미 미워했고, 지금도 여전히 미워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미움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벧전 5:8).

본문 19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셨는데 본문에 “세상”이라는 단어가 무려 5번이나 나옵니다. 요한은 중요한 단어를 반복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멘”이라는 단어도 요한복음에서만 “아멘, 아멘”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바로 자신의 논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것입니다. 처음 두 번은 ‘소속’, ‘근본’을 세 번째 것은 ‘분리’를 뜻합니다. 이 가정법은 “제자들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움을 받는 이유를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는 이유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면 미움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비로소 한국인이 되었다고 느낄 때가 언젠가?’라는 질문에 대한 한 가지 재미있는 대답이 있습니다. ‘공연히 일본이 미워질 때’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일본과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느끼고, 한국인으로서의 동질성과 소속감을 가지게 됩니다. ‘비로소 성도가 되었다고 느낄 때가 언젠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보셔야합니다. 사단이 내게 도전해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진정한 성도가 아닌지 모릅니다.

욥은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욥 19:22) 고 했습니다.
사람은 목숨을 아무렇게나 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위해서 제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을 때만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67년에 바울과 베드로가 순교하고 150년에 저스틴이 156년에 폴리갑이 순교한 이후 203년에 북 아프리카의 퍼피튜아(Perpetua)라는 여인이 순교했습니다. 기독교 박해가 널리 퍼진 가운데 북아프리카에선 박해가 더욱 심한 상황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죽은 영혼을 섬기는 애굽의 세라피스교 신자였던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는 주후 202년에 유대교나 기독교로의 개종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로마령인 북 아프리카의 대도시 카르타고에서는 기독교의 큰 부흥이 일어나 관리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들은 황제의 칙령을 개종자뿐 아니라 개종을 시키거나 가르치는 자에게까지 확대하여 시행하였습니다. 황제의 칙령이 시행되는 와중에 비비아 퍼피튜아와 그녀의 여종 펠리시타스는 새투러스라는 교사가 있는 카르타고의 교리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퍼피튜아는 어린 자녀가 있었고, 펠리시타스는 임신 8개월이었습니다. 그들은 곧 형사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존경받는 귀족이었던 퍼피튜아의 아버지는 그녀가 신앙을 부인하도록 여러 가지로 달랬습니다. 그녀는 결코 동요하지 않았지만 어린 자녀를 보고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녀는 어린 자녀와 함께 있도록 허락을 받은 후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녀의 처형 날이 다가오면서 가족들이 다시 그녀를 회유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새투러스와 퍼피튜아, 펠리시타스와 세 명의 남자들은 관중들이 있는 투기장에서 곰, 표범, 멧돼지 등의 공격을 받아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퍼피튜아와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의 펠리시타스는 옷이 벗겨진 채 미친 암소가 있는 투기장에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 광경은 잔인한 관중들조차 “그만 멈춰!”라고 소리칠 정도로 참혹하였습니다.
그들이 투기장에서의 일차 놀림감이 된 후 사형집행인에게 끌려가는 가운데 퍼피튜아는 슬픔에 잠겨있는 기독교인들을 향해 “형제, 자매들에게 전해주세요. 믿음 안에 굳게 서고 서로 사랑하며 우리가 당한 환난이 믿음의 거침돌이 되지 않게 하라고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가 당시의 그리스도인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한 소리입니다. 순교자의 목소리를 들어야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 이기적이다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솔직히 별 어려움도 아닌데 목사가 그것을 잘 달래 주어야 좋은 목회이고, 설교 또한 적절하게 재미있게 웃기고 축복 받으라고 하면 좋아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나약한 교회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내 자신의 단순한 즐거움이나 편안한 안주만을 위해서 교회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인 한 분이 늘 수고하시는 담임 목사님께 식사 대접하겠다고 목사님을 근사한 횟집으로 초대했답니다. 교인이 목사님에게 말하기를 목사님 무얼 드시겠어요? 그 말을 들으신 목사님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즉석에서 하신 말씀 “당 회”만 빼고 아무거나 다 시키십시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는데 마가복음의 방문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가신 마지막 행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요 2:13-20)에 보면 예수님 사역 초기에 예루살렘에 방문하십니다. 이 때도 비둘기 팔고 환전해주고 성전 안에서 장사하고 자기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 이 성전은 허물어질 것이고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믿지 못하겠다며 자신들이 46년 동안 짓고있음을 말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에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처음에 방문하신 때보다 지금이 더 강경하신 행동을 보이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이러한 말씀을 주실 시간도 없기 때문입니다.

막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My house will be called 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NIV) 이 번역이 마음에 듭니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내 집은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라고 칭함을 받으리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내 자신만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만민이 와서 기도하는 집이기도 하지만 만민을 위해서 기도해야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세속화 될 때 이 세상은 빛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스스로 멸망하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결코 세상에 속한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의 사명이 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외쳤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디모데후서 1장 8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린 자들 아닙니까? 명예도 버리고 유익 된 물질도 다 버리고 오로지 주를 위해서 충성하겠다고 나섰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많은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난들은 아름다운 고난이에요. 디모데후서 2장 3절을 한 번 보십시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합니다. 고난의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이기 때문입니다. 시시한 군사, 별 볼일 없는 군사는 사탄도 우습게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라 그래서 마귀가 다 겁내는 게 아니고 좋은 군사만을 겁내는 겁니다. 시시한 군사는요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방위 받을 때 제일 창피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하철 타고 가는데 옆에 해병대 군인이 서 있을 때 제일 창피합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다른 곳으로 가지요.
야고보서 5장 13절은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 지니라” 그랬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훈련되어 주님과 함께 일하다 그리스도인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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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05. 예수님의 비유(23)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본문 : 마 25:14-30(23)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저는 어려서부터 이상한 아이였습니다. 어르신들이 볼 때 이상한 행동을 아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저희 집은 작은 오두막집이었는데 뒤에는 다른 집이 있고 깍아진 언덕이 있었습니다. 집 앞에도 내리막이 있고 구렁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여 주변의 돌들을 모아 쌓았습니다. 그러니까 집에만 가면 돌을 모아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새벽에 나가 밤새 떨어진 밤을 주워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아무도 모르게 구덩이를 파 놓고 그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모으기를 잘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방법은 다르지만 컴퓨터에다 선교정보를 모으고, 말씀을 정리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저의 이런 면을 보면 부모님이 자녀를 잘 관찰하면 어려서부터 달란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이 묻어 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 듯 오늘 본문이 이해가 안됩니다. 어쩌면 저에게 맡기셨다고 해도 묻어두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많은 내용을 공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 글이 조금 부족한 것이라고 해도 공유함으로 유익하다면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어 많은 글들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하신 이 비유가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 가지고 있다가 하드디스크 깨지고, 분실하고 나면 나 자신도 자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주는 것이 남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달란트(talent)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지만 본문의 달란트는 신약시대의 화폐단위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나 미국의 ‘$’와 같은 말입니다.

주인이 집을 잠시 떠나 외국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종들에게는 단순히 집을 잘 지키라는 명령 외에 여덟 달란트를 세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주인을 종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에게 합당한 분량을 준 것입니다. 종들을 단순히 자신의 사업에 이용하려 한 것이 아니라, 사업의 동업자로 생각한 것입니다. 주인은 그만큼 종들을 믿고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두 번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세 번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15절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따라”라는 말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적절한 이익배당을 약속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일종의 종들은 동업을 통한 이익배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얼마 후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장사하여 배로 남겼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배로 남겼는지 흔히 오늘날로 말하면 그 비법을 더 설명해 주셔야 하는데 그냥 배로 남겼다고 만 했으니 더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말씀을 해 주고 계십니다.

달란트를 활용한 두 사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모습을 다시 봅시다.
16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17절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바로 가서”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두 종들은 자신이 맡은 소유에 대해서 즉시 또는 재빨리 그 소유를 사용하기 위해서 어떤 일에 착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기에 맡겨진 사명과 일에 대해서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지체 없이 그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마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중에 천천히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2:8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이 다음에 만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즉시, 지금, 빨리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다음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즉시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주인은 26절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하셨는데 “게으른”(ojknhrev:오크네오)은 “지체하다, 머묻거리다, 망설이다”라는 뜻입니다. 주인에게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또 한가지는 “그것으로 … 남겼으되”입니다.
주인이 준 달란트로 남긴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나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주고 간 것입니다. 종은 남길 수는 있지만 그것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잘못된 사람들의 착각은 그것이 자신의 것인 줄 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왜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가 어렵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선 오늘 이익을 남긴 두 사람의 경우 부자의 경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20절, 22절에 “주여 내게 … 주셨는데”라고 말합니다. 소유의 출처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겼지만 감긴 것까지도 주인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욥 1:21) 하면서 찬양했습니다.

우리는 달란트의 비유에 대해서 이윤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윤 그 자체에 있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21절과 23절은 본문이 일치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의 관심사가 이윤을 많이 남기거나 적게 남기는데 있지 않고 주어진 여건 하에서 성실히 노력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는 주님의 이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eu’(유)는 “well, 좋은”을 말합니다. 헬라어의 이 부사는 종의 지난날에 대한 주인의 아낌없는 인정과 신뢰를 보내는 말입니다.
이어서 주인은 “착하고”(ajgaqov”:아가도스)라고 칭찬하십니다. 이 단어는 마가복음 10장 17-18절에서 예수께서 길 가 실 때에 한 사람이 달려와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라고 말합니다. 이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고 하셨습니다. 이런 단어가 두 종들에게 주인이 친히 사용하셨다는 것은 대단한 칭찬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충성된”(pistov”:피스티스)는 “충실한, 믿을만한, 의지가 되는, 확신하는”의 뜻입니다. 이들이 왜 충성된 자들인지는 “작은 일에”있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자에 비해서 배 이상을 받았습니다. 사실 엄청나게 많은 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작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에게 주신 것, 그 모든 것은 우리의 기준으로 크다, 작다 이지 주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충성한 종에가 두 가지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입니다. 이 부분은 현세적이라기 보다는 내세적인 것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회계 이후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것”은 단순히 물질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많은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인과 종의 사이에 두터운 신뢰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의 “즐거움”(carav:카라)는 열처녀의 비유에서와 같이 신랑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이 단어는 ‘은은한 기쁨’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큰 기쁨으로 마 2:10에서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내면적인기쁨 샘솟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달란트를 묻어둔 한 사람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장사하지 않고 그냥 땅속에 묻어두었습니다. 이 종이 이렇게 한 것은 단순히 장사하여 손해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종이 주인에게 한 말은 표면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진짜 이 종이 장사를 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종들이 자신보다 많은 달란트를 받은 것에 대해서 기분이 상했을 수 있습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가 없거나 약한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입니다. 15절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누어 주신 것인데 이것이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에게 맡겨진 한 달란트는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과 두 달란트를 맡은 종에 비해서 한 달란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장사를 포기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24절에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굳은”(sklhrov”:스클레로스)은 “마른, 사나운, 거친”이라는 뜻입니다. 박정할 뿐만 아니라 포악하고 거칠다라는 말입니다. 새번역성경에서는 “무서운 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또한 이 단어는 ‘므나의 비유’(눅 19:11-27)의 21절에서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의 “엄한 사람”(aujsthro;”:아우스테로스)보다 더 강경한 단어입니다. 종은 자신의 주인을 악한 인격자로 몰아 세우면서 자신의 불성실과 직무 유기에 대한 변명을 찾으려고 합니다. 죄인의 변명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돌아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라고 말함으로 주인을 아주 나쁜 사람으로 몰고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잘못을 주인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종의 변명에 대해서 주인은 27절에 “취리하는 자들”을 왜 활용하지 않았냐고 하십니다. 취리하는 자들이란 오늘날로 말하면 은행과도 같은 기능을 하는 사람입니다. 조금만 생각이 있었고, 열심히 있었다면 최소한 그렇게 무의미하게 달란트를 두고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이 종은 도망가거나 오지 않을 수는 없었나 생각하지만 주인이 돌아오면 모두가 회계하러 나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예외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하나님의 일이란 작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 그 자체가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구약의 성전문지기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이 오벧에돔 집안 사람입니다. 이 집안 사람들이 처음에 다윗이 법궤를 옮겨가고자 했을 때 대충 마차에 싫고 가다가 떨어지는 것을 웃사가 만져서 죽었습니다(삼하 6:7). 그런데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나 오벧에돔 집사람들은 이 법궤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삼하 6:10, 대상 13:13). 하나님을 무섭게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극진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윗 성에 문지기 역할을 합니다(대상 15:18, 24, 25). 이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기쁨이었는지 그들은 진심으로 성을, 법궤를 지켰던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에 나오는 사람은 세 사람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말고 다음에 나오는 사람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의 들러리 같아 보입니다. 그냥 한 사람 더 소개하나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이 사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보다는 배를 많이 받았지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자신보다 무려 배 이상의 다섯 달란트는 더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떠한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이 행동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 역시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달란트 비유는 전체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재림에 관한 교훈의 구조 안에 있습니다. 열 처녀가 등불을 준비하며 주인을 기다려야 함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은사를 사용하며 주님을 기다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단 하나뿐인 추천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4. 단 하나뿐인 추천서) / 본문 : 요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

지난주에는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교재로 만드는데 추천서가 필요하다고 하여 추천서를 받으려고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추천서는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마음 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짜 추천서를 예수님께 받았으면 하는 마음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추천서를 받았지만 예수님께 추천서를 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지막에 예수님의 추천서가 필요합니다. 이 추천서는 어떤 글에 대한 추천서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총 결산의 추천서입니다. 이 추천서가 ‘양가집’이 되지 마시고 ‘우수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중국의 노자는 ‘道可道면 非常道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도’가 ‘도’로서 정의되면 더 이상 ‘도’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도’에 대해서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노자는 ‘물’로서 ‘도’를 설명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경은 단 한차례도 꾸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웅담이 아닙니다. 또한 한 개인의 우상화를 위해서 기록된 책도 아닙니다. 구약의 그 어떤 인물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를 말할 뿐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사람들로부터 모욕당한 것,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수치스러운 장면들이 다 공개되었습니다. 성경은 분명 예수를 영웅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우리에게 구원 주로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추천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천사들을 보낼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천사를 보내셨고, 롯을 구출할 때도, 욥에게 그의 위로하실 때에도, 여호수아에게 작전을 지시하실 때에도, 삼손을 보내실 때도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애굽에서 유대인을 이끌어 내시기 위해서는 모세를 불렀고, 미디안의 손으로부터 구원하고자 기드온 불렀으며, 블레셋을 쳐부수기 위해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제국를 건설하거나 막강한 왕위를 세우거나 무수한 군중의 경건한 예배를 받으시면서 어떤 광대한 영토의 국민을 통치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가난과 외로움, 잠 못 이루는 밤들과 괴로운 날들, 수난과 죽음으로 보내셨습니다.
어떤 분은 마치 유대인들처럼 자신만을 위한 강력한 왕의 메시야를 꿈꾸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치 강력한 독재자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7:25)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위대한 추천서를 우리는 받았습니다. 본문의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는 구원 주로서의 하나님의 추천자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가 러시아 소치로 결정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강원도 평창을 4펴차로 따돌렸습니다. 여러 가지 패인에 대한 분석이 있지만 진짜 패인이 어디 있었을 까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마지막 프리젠테이션에서 평창이 밀렸다는 생각입니다. 푸틴 대통령은 국제적으로 러시아는 공식 석상에서 영어나 다른 나라말을 사용하지 않고 러시아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어를 사용했고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스페인어도 함께 사용하여 각국의 IOC의원들을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의사 선생님, 제 남편이 다 죽어갑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영국의 한 시골 병원에 초라한 모습의 부인이 찾아와 애원했습니다. 의사는 얼른 왕진 가방을 챙겨 들었습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만 의사 선생님 미리 말씀드리는데 저는 돈이 한푼도 없습니다만…” “사람부터 살려야지요.” 의사는 더 이상 군말 없이 부인을 따라갔습니다. 초라하게 누워있는 남자가 보였습니다. 진찰을 다 마친 의사는 안심하라고 하면서 작은 가방하나를 두고 갔습니다. 이 가방을 열어 적힌 대로 처방하면 됩니다. 부인은 의사가 돌아간 뒤 가방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약대신 돈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쪽지에는 “처방전- 당신 남편은 극도의 영양실조 상태입니다. 이 돈으로 무엇이든 먹고 싶은 음식을 사 주십시오.” 이 일화는 영국의 골드 스미스라는 의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원의 인내와 희생

예수께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이런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제자들의 반응은 마가복음 10:26-27절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께 있음을 못박아 두신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이 구원에 대해서 이기적인 욕심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희생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결코 희생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막 8:35)

켄터키의 두 광부가 암석을 폭파하기 위해 선발되었습니다. 그들은 도화선과 나무토막 모양의 다이나마이트를 갖고 우물 속과 같은 굴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도화선을 점화할 때, 콘베이어 두레박이 그 두 사람을 광산으로부터 운반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다이나마이트가 준비되고 도화선에 불이 붙여졌습니다. 두 사람은 준비된 콘베어에 올라탔습니다. 어떤 잘못으로 인해 꼭대기에는 단 한 사람만 남아있었습니다. 그 한 사람이 두 사람을 한꺼번에 들어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 광부 중 그리스도인인 한 사람이 재빨리 그 두레박의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신호로 그 로프를 잡아 당겼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아닌 그 동료는 위로 올라갔습니다. 뒤에 남아 있는 그 사람은 “나는 그리스도인 일세, 만일 어떤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 해도 나는 괜찮네”라고 그에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레박이 밑으로 내려오기 전에 폭발했습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욥 30:20) 욥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오늘날에도 욥과 같이 하나님이 즉시 나타나셔서 도와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와 함께 길을 가다가 아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일으켜 주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충분히 손을 뻗어 그 아이를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도록 놔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아이가 죽을 만큼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생각하십시오.

K교회에 생긴 일입니다. 목사님이 갑자가 다른 교회로 떠나셨습니다. 이 교회는 500여명의 성도가 있는 교회인데 갑자기 목사가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민주적인 방법에 의하여 장로님들이 소집되고 일명 목사 청빙위원회가 생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목사를 모시고 올까를 고민하던 장로님들은 여러 가지 방안을 종합하여 일단 청빙 공고를 내고 목사 테스트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30분간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양력을 보고 투표하는 것입니다. 물론 문제도 많지만 장로님들의 생각은 대체로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 목사님을 모시기로 최종 결정이 났는데 미국에서 3000여명까지 부흥시켰던 경력이 있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을 모시게 된 주된 결정도 아마 그것이었던 같습니다. 장로님들이나 성도들은 꿈에 부풀었습니다. 그 분을 초빙하면 교회가 3000여명 이상으로 부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습니다. 이런 기대와 교회의 부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새로 모시게 되는 목사님과 자신의 신앙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고민하는 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모습으로 목사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외적 성장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경영자를 모시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마 27:49),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막 15:30-31) 이 소리가 얼마나 가증한 소리입니까? 지금 자신을 생각할 때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추천합시다.

제가 살던 시골집 뒤에 침 잘 놓는 명의로 소문난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습니다. 환자들이 새벽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 소식을 모르는 분들이 한동안 계속해서 왔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약이나 자신의 경험으로 어떤 의원에게 고침을 받고 효과가 있었다면 같은 병을 앓는 사람에게 그 방법이나 의원을 추천합니다. 바울은 그의 인생을 치료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것을 전하는데 남은 인생을 사용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그분이 세상에 오신 목적 그리고 그가 받은 은혜를 전합니다. 바울이 전한 편지들은 위대한 추천서입니다. 저의 이 설교도 여러분에게 구원의 추천서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께 추천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오라’는 말이 무려 642회나 나옵니다. 하나님은 문을 열어 놓으시고 간절히 들어오기를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평양 부흥운동의 주역가운데 한 사람인 블레어(Blair)는 한국선교사역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 사경회를 꼽았습니다. 사경회는 성경공부와 기도를 집중적으로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1907년 1월 시작된 사경회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말씀과 기도로 이어져 성령의 도가니가 된 상태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요한복음 3장 34절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의 말씀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이 땅에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깨어나야 합니다. 못 살았을 그 때 그 시절에만 성령이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현재도 여전히 성령은 필요합니다. 우리가운데 역사 하셔야 합니다. 세상의 것으로만 살아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써 주신 추천서는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골고다 골짜기의 피로서 써 주신 것입니다. 이를 가볍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바쳐서 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 더 확인해 봅시다. 민수기 23장 19절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아멘-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3.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 본문 : 마 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지난 25일 캄보디아 여객기(AN-24)가 추락해 한국인 탑승객 16명을 비롯해 모두 22명이 사망하는 가슴 아픈 일이 발생했습니다. 처음에는 해당여객기가 오래된 기종으로 러시아에서 생산되었었는데 지금은 단종 되어 정비불량이거나 기체 노후로 추락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관제탑과의 교신 내용을 분석한 결과 조종사의 과실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공항 관제탑은 사고 여객기가 실종되기 5분전에 “고도가 너무 낮다”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도 조종사는 자기가 이 지역을 잘 안다며 비행을 계속하고 5분만에 레이더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착륙이 불과 5분 남았었습니다. 공항 진입항로 앞 50여 킬로미터 지점에 해발 천80미터의 보꼬산이 가로놓여 있었는데 당시 사고기의 고도는 600미터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조종사는 관제탑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안일하게 대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결과 자신뿐만 아니라 22명의 모두 사망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도가 너무 낮다고, 그런데 우리들은 그 짧은 경험과 지식으로 괜찮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젊은 날에 구약성경을 보면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피도 눈물도 없는 분이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 죽는 것이 너무나 많이 나올 뿐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나 생각하시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그 의문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을 아무렇게나 생각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하러 오셨고 천하보다도 우리를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만 아니라면 사단을 당장 그 앞에서 무릎 꿇게 하거나 죽여버릴 수도 있으셨을 텐데 우리 때문에 그 모진 고통과 조롱을 받으시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지난주에 사진정리 작업을 했습니다. 제가 찍은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기록사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진들은 선교사들이 찍어준 것이고 그 다음에 일제에 의해서 사진이 찍힙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6.25 한국전쟁사진이 찍힙니다. 그리고 이후 60-70년대 가난했던 시절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진의 역사입니다. 저는 이 사진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은 조상들에게 빚진 사람들이구나!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6.25때는 아닙니다. 60-70년대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 아픈 것을 장이 아픈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마음이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고 합니다. 이 말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우리말에 ‘목이 메다’는 말이 있습니다. 눈물 젖은 주먹밥을 먹을 때 ‘목이 메지요.’ 그러나 죽은 아내 남편, 아이들을 생각하니 목이 메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조상들에게 빚진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아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구원해 주기 위해서 던져주는 줄을 잡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생명줄을 잡아라’고 하실 때 이 줄을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말씀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는 4복음서와 요한계시록에 각각 6번씩 나옵니다. 복음서에서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성령의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 예상시험문제를 가지고 자기들끼리 의논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정보가 있는 것처럼 몇 명이 모여서 의논할 때 어쩐지 내가 빠지면 안될 것 같아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다 아주 파고들어서 고개를 맞댑니다.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소음과 각종 소리들 때문에 귀가 먹지는 않았나 의심스럽습니다. 먹이사슬이 형성되어 있는 동물과 같은 경우 소리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수단입니다. 이제 쓸데없는 소리 듣지 말고 생명의 말씀, 우리의 영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은 빈부 귀천을 가리지 않으며 누구나 들을 수 있습니다. 또 들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 하고 외칩니다. 그리고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시 49:1-2) 라고 합니다.

말씀을 들어야 하는 대상은 하늘과 땅도 포함되며 모든 민족 땅의 모든 것입니다.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신 32:1)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지어다”(사 34:1)
다른 천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만물의 영장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할머니가 속이 아파 병원에 가셨대요. 병명은 위(胃)가 안 좋은 것으로 나왔고 그래서 의사는 ‘잔탁’을 드시라는 처방을 내려 주었대요. 그런데 이 할머니, 속만 안 좋으신 게 아니라 귀까지 안 좋아 ‘잔탁’을 ‘장 닭’으로 잘못 알아들은 거예요. 그래서 이 할머니는 착실하게 의사선생님이 내려준 처방을 지키기 위해 시장에 가서 장 닭을 큼지막한 놈으로 사와서 이왕 먹을 것 인삼까지 넣어 푹 고아 먹었대요. 안 그래도 속이 안 좋은데 기름진 닭에 인삼까지 넣었으니 탈이 날 수 박예요. 병이 오히려 더 악화되자 이 할머니 화가 나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니 선상님이 하란 대로했는데 속이 더 아프니 어찌된 일이요?” 그러자 의사선생님, “드시란 약은 드셨습니까?” “하모!”. “어떻게 드셨는데요?”. “인삼을 넣어 푹 고아 먹었지!”
여러분! 나이 들어서 말씀보고 싶을 때 눈 어두워 못 보고, 귀어두워 말씀 못 듣고 한탄하지 말고 젊었을 때 성경 많이 읽고 주님 일 부지런히 하십시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라고 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모세가 레위 제사장들로 더불어 온 이스라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아 잠잠히 들으라 오늘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신 27:9)
이어 여호수아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수 3:9) 고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율법책에 귀울 기울였기”(느 8:3) 때문에 소망이 살아났습니다. 잠언 8:34절에서는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양을 말씀하실 때 양의 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 양들이 그의 음성을 나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3-5) 만일 양이 제아무리 깨끗하고 다른 모든 조건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도 양이 잘 듣지 못하는 짐승이라면 성경은 양을 택하여 비유 삼지 않았을 것입니다. 양의 특징은 털이나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듣는데 있습니다.

진리의 소리가 빌라도에게도 들렸습니다. 그는 아내로부터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마 27:19)라는 소리를 듣고도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눅 23:23). 빌라도의 귀는 듣지 못한 귀의 전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 우리가 책임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 단 국물만 빼먹겠다는 사람은 분명히 말하지만 언젠가 하나님을 떠날 사람들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은 “번영은 구약성서의 축복이고, 역경은 신약성서의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은 많으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없으며, 십자가를 귀에 걸고는 있어도 머리에는 없으며, 십자가를 목에는 걸었어도 성도의 가슴에는 없으며, 종탑에는 매달려 있어도 교회 속에 없다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들어야 하는 소리는 달콤한 소리가 아닙니다. 쓴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목사님이 한마디 야단쳤다고 다른 교회로 옮기고 “여기 아니면 교회 없냐” 하는 식으로 살면 안됩니다.

어렸을 때 어머님이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서 부릅니다. 그런데 귀찮아서 못들은 체하고 뒷문으로 나가 놉니다. 그러면 누나가 그 심부름을 대신 합니다. 어머님은 심부름을 잘했다고 용돈을 주십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달려갑니다. “누나는 내가 할 심부름을 대신한 것이야! 그러니까 그 돈 반은 내 꺼야” 하고 우깁니다. 착한 누나는 저에게도 나누어줍니다. 그 이후로는 심부름을 열심히 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님을 통해서 그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까? 그분은 우리가 본 받아야할 첫 열매이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5:20).

2004년 약30만 명이 희생당한 인도양 40여 개국을 덮친 쓰나미를 잘 아실 것입니다. ‘쓰나미(tsunami)’란 말은 일반적인 해일과는 달리, 지각균열이나 화산 폭발 등으로 발생하는 거대한 파도를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일본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글입니다.
어느 해변 언덕에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살폈습니다. 평소 같으면 새소리와 짐승들의 발자국 소리로 시끄러울 텐데 그날따라 풀숲에 이는 바람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위엔 짐승들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어디론가 모두 이동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노인은 ‘설마’하며 수평선을 바라봤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멀리서 집채만한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육지를 향해 달려오는 게 아닌가. ‘큰일났다!’ 노인은 마을이 밀집해 있는 해안가를 내려다봤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줄도 모르고 평화롭게 일상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피하시오. 쓰나미가 오고 있소.” 그러나 마을까지 노인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습니다. 해안가로 내려간다면 이미 파도가 마을을 집어삼킬 게 뻔했습니다. 조급해진 노인은 할 수 없이 자기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이다. 언덕 위에 불이 났다.” 노인의 집이 활활 타자, 그제 서야 주민들은 불을 끄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허겁지겁 언덕 위로 올라왔습니다. 바다에서 놀던 아이들도 불 구경을 위해 노인의 집으로 달음박질쳤습니다.
그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칼날 같은 물보라를 동반한 파도가 마을을 덮쳤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파도가 마을을 삽시간에 쓸어버리는 장면을 목격하며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이 일화를 실은 일본 교과서는 그 파도를 ‘쓰나미(津波)’라고 했습니다.

‘쓰나미’에 대한 이야기를 영국에서도 가르쳤는데 ‘쓰나미’가 오기 전에 썰물이 빠져나갈 시간이 아닌데도 썰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2004년 쓰나미가 올 때 영국의 소녀 하나가 이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선생님이 쓰나미가 올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을 설명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소녀는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쓰나미’가 오려나 봐요? “물이 빠져났어요.” 그리고 엄마에게 선생님이 일러준 말을 했고 엄마는 딸의 말을 듣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피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약7만5천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시메울루에섬은 지난 연말 가공할 쓰나미를 일으킨 대지진의 진앙으로부터 불과 60㎞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높이 10m가 넘는 거대한 쓰나미에 휩쓸리고서도 사망자가 단 7명에 그쳤습니다. 주민들이 전 재산을 잃고도 인명 피해는 이처럼 경미한 수준에 그친 것은 100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세몽’(쓰나미) 이야기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첫 지진의 진동으로 땅이 흔들리다 멈췄을 때 다른 해안 지역 주민들은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최악의 순간이 지나갔다고 생각했지만 시메울루에 섬사람들은 조상들이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를 생각해내고 죽을힘을 다해 언덕 위로 올라가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사야가 들려주는 간곡한 소리를 못들은 채 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지막 날에 반드시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사1:10)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사 28:23) 아멘.